그래서 그의 아들들은 그의 의관을 가지고 장례를 치러야 했다. 선조 25년(1592) 이전에는 아무도 소나 말을 타고 감히 그의 묘 앞을 지나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지란이 북쪽으로 돌아가던 날 태조에게 이렇게 상소했다고 한다. "임금을 도와 나라를 정하니 군신의 의가 정해졌고,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니 군신의 의가 끊어졌소" 그 상소문 속에 자기의 상투를 잘라 바쳤으므로 태조가 도저히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허락하였다고 한다. 지란은 건주 정벌의 공으로 청해백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고 개국 공신 일등에 녹훈되었다. 시호는 양렬이며, 태조의 묘에 배향되었다. 살아 돌아온 함흥차사 성석린 성석린(1338-1423)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자수, 호는 독곡이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 방원은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인데, 태조가 창업할 때 가장 공이 많았다. 계비인 신덕 강씨의 소생인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고, 정도전이 방석에게 아부하여 방원을 해치려 하였다. 이 음모를 알게 된 방원은 선수를 쳐서 군대를 동원하여 정도전을 죽이고 방석을 폐출시켰다. 화가 있는 대로 난 태조는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밤중에 함흥 관저로 떠나버렸다. 이때부터 문안사자가 잇달아 함흥으로 갔지만 가는 족족 다 죽고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 그것을 일러 '함흥차사'라고 부르는 말은 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더이상 함흥차사로 가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자 성석린이 자원하고 나섰다. 태조와 친분이 있는 그는 자기가 태조의 마음을 돌리고 오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태종은 기꺼이 허락하였다. 그는 무명옷에 백마를 타고 떠났다. 함흥에 도착하자 그는 말에서 내려서 나그네가 하듯 밥을 지었다. 밥짓는 연기가 나자 멀리서 바라보던 태조가 그에게 환관을 시켜 물어 왔다. 성석린은 환관에게 "볼일이 있어 이곳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말도 먹일 겸 투숙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환관이 돌아가서 그대로 아뢰자 태조가 반갑게 그를 불러들였다. 석린은 조용하게 인륜의 중요함을 말하고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을 개진하였다. 태조가 갑자기 얼굴빛을 바꾸며 물었다. "너는 너의 임금을 위하여 나를 설득하려고 왔느냐?" 겁을 먹은 석린은 엉겹결에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제 말씀이 거짓이라면 제 자손은 반드시 장님이 나올 것입니다" 어쨌든 태조는 그 말을 믿고 마음을 돌렸으며 아들 태종 임금과 화해하게 되었으나, 문제는 성린의 집에서 생겼다. 그의 맏아들 지도는 장님이고, 둘째인 발도는 자식이 없고, 지도의 아들 창산군 귀수와 귀수의 아들이 모두 뱃속 장님이었다. 성린의 벼슬은 영상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경이다. 새끼 딸린 말로 태조의 마음을 돌리고 죽은 박순 박순(?-1402)의 본관은 음성이다. 함흥에 가 있는 태조에게 문안 사신으로 간 사람마다 다 죽고 살아 돌아오는 이가 없던 때였다. 태종은 신하들에게 이번엔 누가 가겠느냐고 물었지만 가겠다고 나서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때 박순이 가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떠날 때 수레를 타지 않고 새끼 딸린 말을 타고 갔다. 함흥에 들어가서 태조의 행재소(왕의 임시 처소)가 보이는 곳에서 일단 멈추고 새끼말은 거기에 매어 둔 채 어미말만 타고 가니 새끼말과 어미말이 서로 돌아보면서 우는 바람에 제자리걸음을 하게 되고 여간 지체하지 않았다. 행채소에 도착하여 태조에게 인사를 올리자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낀 태조가 그 까닭을 물었다. 박순은 속마음으로 바로 이때구나 하고 입을 열었다. "길을 오는 데 방해가 되어서 새끼말을 떼어서 나무에 매어 놓았더니 그 야단입니다. 하찮은 미물인데도 어미와 새끼가 차마 서로 떨어질 수 없어서 저렇게 야단입니다" 태조는 가슴이 찡해 옴을 느꼈다. 태조는 옛친구인 박순에게 돌아가지 말고 남아 있으라고 하였다. 어느 날 태조가 박순과 함께 바둑을 두는데 갑자기 '털썩!' 하고 무엇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둘러보니 지붕에서 쥐 두 마리가 떨어졌는데 어미쥐가 새끼쥐를 안은 채 죽어 가고 있었다. 박순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바둑판을 밀치고 그 자리에 엎드려 태조에게 눈물로써 돌아갈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드디어 태조로부터 한양으로 돌아가겠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박순은 태조에게 인사하고 귀경길에 올랐다. 태조를 모시고 있는 신하들은 박순도 예외없이 죽여야 한다고 태조에게 강력히 요청하였다. 망설이던 태조는 박순이 용흥강을 다 건너갔으리라고 생각되었을 즈음 비로소 허락하고, 사자에게 칼을 내어 주면서 말했다. "박순이 용흥강을 이미 건넜거든 더이상 추격하지 말라" 그런데 귀경길에 오른 박순은 도중에 병이 나는 바람에 속도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추격대가 도착했을 때, 그는 막 배에 오르는 중이었고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하였으므로 추격대의 칼에 맞아 허리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몸뚱이의 절반은 강 위에, 절반은 배 안에 있다네"라는 시가 생겨났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깜짝 놀라며 애통해 했다. "박순은 좋은 친구였는데, 내가 그 친구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다" 태조는 드디어 한양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화공에게 명하여 박순의 상반신을 그려 바치도록 하였다. 박순의 아내 임씨는 남편의 부음을 받고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박순의 벼슬은 판중추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민이다. 개국공신을 조롱한 송도의 명기 설중매 설중매는 송도(개성)의 이름난 기생이다. 태조가 조선을 개국한 뒤 군신들을 위해 의정부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모인 신하들 대부분이 옛 고려 왕조에서 벼슬하던 사람들이었다. 설중매는 재능과 용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색정도 강했다. 어느 정승이 술에 취하여 설중매를 희롱하였다. "내가 들으니 너는 아침은 동쪽 사내 집에서 먹고 잠은 서쪽 사내 집에서 잔다더구나. 오늘 저녁엔 나하고 자는 것이 어떻겠느냐?" "동쪽 집에서 밥먹고 서쪽 집에서 잠자는 저 같은 천한 기생이 왕씨를 섬기다 이씨를 섬기는 정승을 모시고 자게 되니 매우 어울리는군요!" 설중매가 이렇게 응수하니 좌석에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얼굴을 붉혔다. 이성계가 왕이 되는 꿈을 해몽한 예언자 무학대사 무학대사(1327-1405)는 안변 설봉산 토굴에서 살았으므로 산이름을 따서 호를 설봉이라 하였다. 속성은 박씨요 이름은 자초이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이성계가 어느 날 무학대사를 찾아가 해몽을 부탁하였다. "꿈에 무너진 집 속에 들어가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왔는데, 무슨 징조입니까?" "경하할 꿈이올시다.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진 모양은 임금 왕자와 같습니다"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진 것은 무슨 징조입니까?"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을 것이요 거울이 깨지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이성계는 매우 기뻐하면서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석왕사라고 하였다. 석왕이란 왕이 되는 꿈이라고 해석했다는 뜻이다. 본시 그 절에는 석왕사라고 쓴 태조의 어필이 있었는데, 불에 타 없어지고 그 글씨를 새긴 현판만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서산대사가 쓴 '산수기'에 전한다. 이 석왕사에는 좋은 배나무가 있어서 해마다 궁중에 진상되었다. 절안에 이화당이 있고, 용추 30여 군데가 있는데 주변 경치가 매우 수려하다. 기생을 사랑하여 눈물 흘린 박신 박신(1362-1444)의 본관은 운봉이다. 어릴 적부터 명성이 있던 그는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강원도 감사로 있을 때 강릉 기생 홍장을 몹시 사랑하였다. 그가 도내 여러 군을 순시하고 돌아오자 강릉부윤 조운흘(호는 석간)이, 거짓으로 홍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박신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운흘이 찾아와서 경포대에 뱃놀이하러 가자고 권하였다. 운흘은 오기 전에 홍장을 불러 예쁘게 꾸미고 또 호화로운 놀잇배도 따로 준비하고는, 처용을 닮은 관리 하나를 뽑아서 홍장을 태우도록 미리 일러두었다. 박신이 운흘과 함께 경포대로 나가니 미인을 실은 호화 유람선이 호수 위에 두둥실 떠 있는데, 그 위에 채색으로 단장한 편액이 하나 걸려 있고 그 편액에 다음과 같은 시가 씌어 있었다. 태평성대 신라에서 조용하게 늙은 이 몸 천년세월 흘렀건만 풍류는 그대로일세 관찰사가 경포대에 뱃놀이 나왔으나 놀잇배에 미인을 어이 차마 태우리 관찰사 일행이 천천히 포구로 들어가서 바닷가를 배회하던 중 갑자기 운흘이 박신에게 말했다. "이곳엔 전해 오는 신선 이야기가 있지요. 지금도 달 밝은 저녁이면 신선들이 나와 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 가까이 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산천과 풍경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어찌 신선이 없겠는가!" 박신이 눈물을 글썽이다가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홍장이었다. 좌석엔 웃음이 터져 나왔고, 이날의 놀이는 어느 때보다도 즐거웠다. 조선조에서 그의 벼슬은 찬성사에 이르렀다. 누런 용이 옆에 누워 자는 꿈을 꾼 박석명 박석명(1370-1406)의 본관은 순천이고, 호는 이헌이다. 젊었을 적에 정종과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잔 적이 있었다. 그날밤 꿈에 누런 용이 곁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잠을 깨니, 곁에 영안군(뒤에 즉위하여 정종이 됨)이 누워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두 사람의 우정은 더욱 두터워졌다. 영안군은 왕위에 즉위하자 더욱 박석명을 총애하였다. 태종 때 익대삼등 공신으로 평양군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이다. 억울함을 참고 거위의 목숨을 살린 윤회 윤회(1380-1436)의 자는 청경이고, 호는 청향당이며, 본관은 무송이다. 젊은 시절에 시골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여관을 찾았으나, 여관 주인이 투숙을 허락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뜰 밑에 앉아 있었다. 그때 주인집 아이가 큰 진주를 가지고 마당에서 놀다가 땅에 떨어뜨렸는데, 마침 곁에 있던 흰 거위가 그것을 삼켜 버렸다. 집주인이 진주를 찾다가 끝내 찾지 못하자, 윤회를 의심하고 그를 꽁꽁 묶어 놓았다. 이튿날 아침에 관가에 데리고 갈 작정이었다. 윤회는 변명 한마디 하지 않고 다만 주인에게 청하여 거위도 묶어서 자기 곁에 두도록 하였다. 이튿날 아침, 거위가 눈 똥 속에서 진주가 나왔다. 주인은 너무도 부끄러워 사과하고 나서 왜 어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윤회가 대답했다. "만약 내가 어제 말했다면 당신은 저 거위의 배를 가르고 진주를 찾았을 것 아니오? 그래서 온갖 욕된 것을 참고 아침까지 가다린 것이오" 그의 벼슬은 병조 판서에 이르렀고, 문형(대제학의 별칭)을 관장하였다. 시호는 문도이다. 백발백중 명사수 김덕생 김덕생의 본관은 상산이다. 어느 날 왕이 후원에 나갔는데, 갑자기 맹호가 나타나 왕이 탄 수레에 달려들었다. 이때 김덕생이 화살 한 발로 그 호랑이를 맞추어 죽이자,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의 용기에 혀를 내둘렀다. 그를 시기하는 자가 그를 조정에 모함하여 억울하게 중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덕생은 간청하여 호랑이 한 마리를 그려서 호랑이가 잡혔던 곳에 두게 하고 그 그림에 활쏘기를 하니 쏘는 족족 다 맞추고 한 발의 실수도 없었다. 그는 끝내 형장에서 죽게 되었는데 오랫동안 넘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뒤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세종이 이상하게 여겨 묻자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이 이렇게 대답 하였다. "소신의 이름은 김덕생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지가 이미 여러 해입니다. 원하옵건대 저의 뼈를 고향에 묻어 주시고, 저의 자손들을 등용하시어 억울하게 맺힌 저의 한을 풀어 주소서" 이 말을 들은 세종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그를 동지중추부사에 증직하고, 그의 뼈를 고향에 묻어 주도록 하였다. 상여가 전라도 영광 낭월산 밑에 이르자 상여채가 저절로 부러져서 더이상 갈 수가 없었다. 그날 밤에 그가 또 현몽하여 자기를 그곳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살아서는 왕의 형,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 양녕대군 양녕대군(1394-1462)은 태종의 장남으로 제일 먼저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천품이 활달하고 문장에 능숙하였다. 그는 동생 세종이 임금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미친 척하며 함부로 행동하였다. 드디어 태종 18년(1418), 영의정 유정현 등이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합동으로 아뢰어 세자가 덕이 없으니 폐위시켜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에 태종이 세자의 아들 세손을 세우려 하자 여러 신하들이 또 반대하였다. "상께서 세자를 그토록 잘 가르쳐 길렀는데도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데 이제 또 어리신 세손을 세운다면 어떻게 뒷날을 보장하겠나이까? 더구나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그 아들을 세우는 것은 의리에 마땅치 않습니다. 다시 어진 왕자를 택하여 세자로 세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경들이 어진 왕자를 택하여 건의하라" 이조 판서 황희가 아뢰었다. "나라의 세자는 함부로 가볍게 세울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이직도 불가함을 굳이 고집하였다. 태종은 화가 나서 황희 등을 문밖으로 내쫓고 재신들에게 말하였다. "충녕대군(뒤에 세종임금이 됨)은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아무리 춥고 더운 날에도 밤새워 글을 읽을 정도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며 사리에 통달하니 나는 충녕을 세자로 삼고 싶다" 신하들이 축하를 올리며 말하였다. "신들이 합동으로 아뢰어 어진 왕자를 택하라고 한 것도 바로 충녕을 두고 드린 말씀입니다" 태종은 드디어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고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하여 광주로 내쫓았다. 양녕대군은 이때부터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남루한 옷에 노새를 타고 산수를 찾아 전국을 유람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일러 태백(주나라 태왕의 장자, 태왕이 유난히 총명한 손자 창에게 왕통을 이으려고 계력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나라의 앞날을 위해 동생 중옹과 다른 나라로 떠났다)의 지극한 덕이 있다고 하였다. 세종은 형 양녕과 우애가 극진한 사이였다. 양녕이 관서(평안도) 지방 유람을 떠날 때였다. 양녕이 세종에게 작별 인사를 하자 세종은 여색을 조심할 것을 특별히 당부했다. 양녕이 떠난 뒤에 세종은 즉시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을 내려 "만약 대군을 가까이 한 기생이 있거든 즉시 보고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평안도 지방의 수령 방백들은 예쁜 기생을 골라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양녕대군이 정주에 도착하자, 소복을 입고 엷게 화장을 한 예쁜 기생 하나가 곡을 하는데 그 소리가 노랫소리처럼 아름다웠다. 소리에 마음이 끌린 대군은 곧 사람을 보내어 그 기생을 불러와 함께 잠자리를 한 뒤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었다. 달빛이 베갯머리를 엿볼 일이 없는데 바람은 무슨 일로 비단 장막을 젖히나 이튿날 감사는 그 기생을 역마를 이용하여 서울로 보내고, 그 시도 임금께 아뢰었다. 세종은 그 기생으로 하여금 그 시를 노래로 부를 수 있도록 연습하라고 하였다. 양녕대군이 평안도에서 돌아와 세종께 배알하니, 임금이 대군에게 물었다. "지난번 작별할 때 한 말씀을 잊지는 않았겠지요?" "신이 어찌 감히 성교를 잊었겠나이까. 삼가 받들고 있나이다" "형님이 비단 이부자리 속에서도 그 말씀을 지키셨다니 기쁘고도 다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쁜 여인을 한 사람 준비시켰나이다" 이어서 세종은 궁중에 주연을 차리고 그 기생으로 하여금 그 시로써 노래부르고 대군에게 술을 권하도록 하였다. 그 기생과는 비록 밤을 함께 지낸 사이지만 밤에 만났던 까닭에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노래의 가사 내용을 듣고서야 알아차린 양녕대군은 그 즉시 뜰을 내려와 벌받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세종 역시 뜰 밑으로 내려가 대군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정담을 나누었으며, 그 기생을 양녕에게 돌려주었다. 이 기생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으나 어미의 성과 관향을 알 수 없으므로 그냥 고정정이라고 불렀다. 고정정 역시 자유분방하게 어물과 육류를 물물교환 하면서 살았는데 교환이 이루어진 뒤에도 혹시 고기가 좋지 않으면 그 고기가 이미 삶긴 뒤에라도 반드시 되물리고야 말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되물리는 교역을 일러서 '고정정교역'이라고 일컬었다. 양녕대군의 후손 이명하란 사람이 어느 날 자기 부인과 더불어 장기를 두다가 떼를 써서 강제로 물리려고 하였다. "당신은 고정정이 아닌데 어찌하여 번번이 물립니까?" 부인이 묻자 남편이 발끈 성을 냈다. "당신은 어찌하여 장기 때문에 남의 조상을 욕하는 거요" 그 부인이 부끄러워하면서 사과하였다. 중이 되어 왕좌를 양보한 효령대군 효령대군(1396-1486) 보의 처음 이름은 우, 자는 선숙이며, 태종의 둘째 아들이다. 세종이 성덕이 있다고 하여 맏아들인 양녕대군은 자기의 세자 자리를 양보하려고 일부러 방탕한 행동을 하였고, 효령대군은 궐내에 있었다. 양녕대군이 저녁에 효령대군의 처소에 가보니 그는 촛불을 환히 켜고 글을 읽고 있었다. 양녕대군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여 물었다. "너는 내게 병이 있다는 것과 충녕(세종)에게 성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양녕대군이 묻자 효령대군은 합장을 하며 말했다. "이밖에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양녕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이튿날 새벽에 효령대군이 합장을 하고 벽을 향해 앉아 있는 것을 본 궁녀가 임금에게 보고를 드렸다. 이 보고를 받은 태종이 깜짝 놀라 직접 가서 효령에게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꿈에 부처님이 와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의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으로써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태종은 놀랍게 여기고 돌아갔다. 이후부터 효령대군은 항상 불상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예법을 갖추었다. 맏형인 양녕대군이 술과 고기를 즐기자 어느 날 효령이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큰형님, 술과 고기를 끊으세요" 양녕대군이 웃으며 대답했다. "살아서는 왕의 형이고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이 될 텐데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효형은 절에 들어가서 하루종일 북을 쳤다. 어찌나 많이 쳤던지 북맨 가죽이 하얗게 일어났다. 그래서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물건을 가리켜 '효령대군 북가죽'이란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박안신 박안신(1369-1447)의 본관은 상주이다. 태조 2년(1393)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정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적에 대사헌 맹사성과 함께 평양군 조대림을 국문한 일이 있었는데, 왕에게 아뢰지 않고 국문하다가 태종에게 큰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그는 맹사성과 함께 수레에 실려서 끌려갔다. 거리에서 사형을 당할 참에 이르러 맹사성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고 어쩔 줄 몰라 하였는데, 박안신은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었다. 그가 맹사성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나의 상관이고 나는 당신의 부하다. 그런데 이제 둘이 함께 죽게 되었으니 상관과 부하 사이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전에 나는 당신을 지조를 가진 사람으로 알았는데 어찌 이렇게도 겁이 많은가? 당신은 저 삐걱거리는 수레 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또 그는 나졸에게 기와 조각을 가져오라고 하여 거기에 지남철 끝으로 긁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너는 직무를 수행하지 못했으니 죽음이야 달게 받겠지만, 다만 간하는 신하를 임금이 죽였다는 이름을 남길까 두렵다. 안신은 눈을 부릅뜨고 옥리들에게 말했다. "이것을 그대로 상께 보고해라. 만약에 보고를 하지 않는다면 내가 악귀가 되어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잡아먹겠다" 이 보고를 받은 태종은 더욱 진노하였다. 그러나 하륜, 성석린, 권근 등 대신들이 힘을 다하여 그를 구제하였다. 그는 간신히 사면되어 곤장을 맞고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안신은 사신이 되어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뱃길에서 해적을 만났다. 그가 두려운 빛이 조금도 없이 태연하게 걸상에 걸터앉아 조용하게 상대하자, 해적들이 그의 위엄에 눌려 감히 접근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해적들에게 잡힌 일행이 모두 안전하게 풀려났다. 벼슬은 대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숙이다. 꿈을 잘 해몽하여 자라를 살려준 권홍 권홍(1360-1446)의 본관은 안동이고, 호는 설헌이다.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간관이 되었으나 정몽주의 당이라 하여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나이 들어서는 산수를 찾아 유람하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노인이 그를 찾아와서 눈물로 호소하였다. "홍 정승이 오늘 우리 가족을 다 죽이려고 하니 제발 살려주시오" "어떻게 하면 살게 됩니까?" "공께서 가시지 않는다면 홍 정승도 가시지 않을 테니 그러면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조금 후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홍 정승이 보낸 심부름꾼이었다. "홍 정승께서 오늘 살곶이에서 자라탕을 끓인다고 오시랍니다" 이 말을 듣자 권홍이 마음속으로 '아 조금 전 꿈속에서 본 노인이 바로 자라였구나' 하고 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홍 정승 또한 살곶이에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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