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에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왕이 되어 어머니 윤씨를 위해 복수를 할 적에 당시 회의에 참석한 사람을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잡아 죽였으나, 허종은 홀로 화를 면하였다. 후인들이 그 다리를 가리켜 '허종이 빠진 다리'라 혀여 '종침교'라 하였으니, 지금 사직동에 있다. 허종 대감은 난시에는 싸움터에 나가 장군이 되고 평시에는 내직에 들어와 재상이 되었는데, 풍채가 늠름하고 기개가 헌걸 찼으며, 신장이 12척 5촌이나 되었다. 문장도 잘 하고 활을 잘 쏘아, 조정에서 그에게 의지한 바가 매우 켰다. 일찍이 이조 판서로 있을 적에 문장과 인물로 세상을 울리던 명나라의 동월과 왕창이 사신으로 왔다가, 12척 장신에 옥처럼 깨끗한 풍채와 의젓한 의관의 허종을 보고 감탄하여 자신들도 모르게 무릎을 꿇어 절하고 경서와 사서를 토론하였다. 동월, 왕창 두 사신이 귀국할 적에 압록강에 이르러서도 허종 대감을 사모하여 차마 헤어지지 못하였다. 폐비 윤씨가 폐위되기 전에 친히 베틀에 올라가서 비단을 짜는데, 임금이 찾아왔다. 왕비가 베틀에서 내려와 말하였다.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옥체가 이다지도 크십니까?" "나보다 더 큰 사람이 또 있다. 불러들일 터이니 그를 한번 보아라" 임금은 곧 명령을 내려 허종을 불러들였다. 성종 24년(1493) 61세에 죽었다. 공훈으로 양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정이다. 부인이 호랑이에게 물려가 큰 화를 면한 유순 유순(1441-1517)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희명, 호는 노포이다. 어릴 적부터 문장을 잘 하였다. 세조 5년(1459)에 생원시에 장원했고, 8년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12년에는 중시에도 급제하였다. 연산군 4년(1498)에 정승에 임명되어 그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성종 때 연산군의 생모 윤씨에게 사약을 내릴 때에 유순은 입직승지로서 약사발을 받들고 가는 사명을 맡았다. 그런데 이날 새벽에 포천의 본가로부터 하인이 급히 달려왔다. 부인 장씨가 범에게 물려 갔다는 소식을 갖고 온 것이다. 유순이 어전에 나아가 아뢰고 포천으로 급히 가니, 그의 동료 승지 이세좌가 약사발을 대신 가지고 갔다. 유순이 포천 본가에 이르니, 부인은 과연 범의 등에 업혀 가다가 중도에 나뭇가지를 잡고 살아나서 집에 돌아와 있었다. 유순은 매우 기뻐하였다. 뒷날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에 이세좌 부자는 모두 죽음을 당하였으나 유순은 화를 면하였다. 유순은 중종반정 때에 정국 공신 2등에 책록되어 원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중종이 한번은 절의로 신하들을 꾸짖으면서 중종반정 때에 녹훈된 세 승지의 공훈을 삭제하기 위해 의정부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유순이 아뢰었다. "당시 신이 영상으로서 변고(반정)의 소식을 듣고 창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뻔뻔스럽게 훈적에 참여했으니, 신이 세 사람과 죄가 같으므로 감히 헌의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유순을 옳게 여겼다. 궤장을 하사 받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희이다. 4대에 걸쳐 정려문이 여섯 번이나 세워진 정성근 정성근(?-1504)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군부이다. 성종 5년(147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부모가 돌아가시자 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3년상을 마쳤으며 몸이 야윌 정도로 슬퍼하였다. 또 성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상기가 끝난 뒤에도 슬퍼서 마음으로 상복을 입는 심상삼년을 입으니, 사람들이 모두 충효를 모두 갖추었다고 칭송하였다. 승지로 있을 적에 강직하여 뜻을 굽히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사명을 받들고 대마도에 들어가자, 대마도주가 그림, 부채, 호초, 향조각 따위를 예물로 바쳤다. 정성근은 일행이 대마도주에게 받은 것을 다 거두어서 한 그릇에 봉해 두었다가 귀국할 때에 접대하던 왜관 편으로 그 물건들을 도주에게 돌려보냈다. 이에 대마도주가 그 물건을 우리 나라 임금에게 보내어 정성근에게 주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대마도주의 청을 들어주려 하니, 정성근은 극구 사양하였다. "신이 저 대마도에 있을 적에 받지 않다가 이곳 우리나라에 와서 받으면 전후 마음이 다른 것이니 참으로 원치 않습니다" 주상은 정성근에게 억지로 권할 수 없어 도로 대마도로 보냈다. 그의 청백함은 대체로 이와 같았다. 성종이 승하하자 정성근이 삼년상을 행하였는데, 연산군이 갑자사화 때에 괴이한 행동을 한다 하여 그를 죽여 버렸다. 아들 주신. 매신 및 매신의 아들 원린, 원기, 원린의 아들 효성이 모두 효행으로 이름나 정려문이 여섯 번이나 세워졌다. 이는 옛날에도 없었던 바이므로 세상에서 정씨 가문을 '효문'이라 하였다. 이안눌의 시에, 한 가문에 충신 효자 여섯 정려문이네 라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읊은 것이다.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고, 중종반정 뒤에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연산군의 청혼을 거절하여 죽은 홍귀달 홍귀달(1438-1504)의 본관은 부계이고, 자는 겸선이며 호는 허백당이다. 대대로 함창에 살았다. 세조 8년(1462)에 진사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호당(독서당)의 벼슬과 이조 판서.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가 일어나던 해에 10여 조목의 상소를 올렸는데, 모두 궁궐의 비밀스런 일이었다. 반복하여 넌지시 풍자하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절실하고 곧았다. 연산군은 마음이 편치 않아 그의 벼슬을 빼앗고 경원으로 유배하였다. "나는 본시 함창의 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이 모든 것이 본래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다. 성공해도 나로부터 시작한 것이고 실패해도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지금 다만 옛날로 돌아왔을 뿐이다. 다시 무엇을 한탄하랴" 홍귀달은 가족과 헤어질 때 담담히 말하고 길을 떠났다. 얼마 뒤에 체포 명령이 내려져 의금부로 압송되어 오던 중 단천에 이르렀는데, 왕명을 받은 관리가 달려와서 책 한 권을 주었다. 홍귀달이 펴 보고 재배하며 말하였다. "주상이 신에게 죽으라고 명하신다" 그는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조용히 목매어 죽었다. 중종이 반정한 뒤에 문광이란 시호를 내렸다.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언필, 현감 언승, 문과 박사 언방, 교리 언충, 참봉 언국이다. 언방에게는 얼굴이 예쁜 딸이 있었는데, 연산군이 왕자빈을 간택할 적에 위협하여 빈으로 들이려 하였다. 홍귀달이 그 말을 따르지 않자 마침내 유배하여 사사하였고, 아들 언방도 배소에서 죽었다. 언충이 갑자사화를 당하여 모진 고문을 받고 들것에 들려 감옥 담안에서 조금 쉬고 있는데, 그의 벗이 옷에 흥건히 묻은 피를 보고는 "너무 참혹하구나" 하며 얼굴을 돌렸다. "이것은 홍문관의 물에 젖은 것이다" 언충은 유유히 이렇게 대답했다. 홍문관의 홍자는 붉을 홍의 홍자와 음이 같고, 핏빛이 붉기 때문에 그렇게 운운한 것이었다. 진보에 유배되었다. 금갑옷을 바다에 던져 버린 청백리 이약동 이약동(1416-1493)의 본관은 벽진이고, 자는 춘보, 호는 노촌이다. 문종 원년(145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에 청렴하여 사냥할 적마다 항상 채찍 하나만 들고 갔다. 그는 제주목사를 그만두고 돌아올 적에 그 채찍마저 관아 벽에 걸어 놓고 왔다. 제주도 사람들이 그것을 보물처럼 간직해 두고 신임 목사가 부임 할 적마다 반드시 바람에 쐬고 볕에 내말리곤 하였다. 세월이 오래 지나 좀이 슬고 파손되자, 화공을 시켜 그대로 모사하여 관아의 벽에 걸어 놓고 후임 목사로 하여금 그 청덕을 본받게 하였다. 이약동이 제주에서 임기가 끝나 돌아올 적에 배가 바다 한가운데 당도하여 갑자기 회돌이 물살에 걸려 나아가지 못하였다. 사공이 두려워서 얼굴빛이 새하얗게 질려 있을 때, 이약동은 홀로 의젓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한 비장이 앞에 나와 고하였다. "제주도 백성들이 공의 청덕에 감복하여 금갑옷 한 벌을 싸서 나에게 주면서 공이 갑옷을 입어야 할 날에 이 갑옷을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이약동이 곧바로 갑옷을 바닷속에 던져 버리게 하자, 배가 잘 나아가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다. 후세 사람이 그의 청덕에 감탄하여, 그곳을 '갑옷을 던져 버린 바다'란 뜻으로 '투갑연'이라 이름하였다. 김종직과 동향으로 매우 친했는데, 노년에 하로촌에 물러나 살았다. 벼슬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평정이다. 성종으로부터 친구 대접을 받은 유호인 유호인(1445-1494)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극기, 호는 뇌계이다. 세조 8년(146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종 5년(147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교리가 되어 홍문관에서 숙직을 할 적에, 임금이 내시 한 사람만 데리고 밤에 임어하였다. 유호인이 깜짝 놀라 일어나자, 임금이 사모만 쓰고 앉도록 하고는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비단 이불이 해져 솜이 나오고 또 솜의 빛이 누렇게 바랜 것을 보고, 임금이 칭찬하였다. "네가 맑고 중요한 벼슬을 지내면서 청렴 검소함이 이러하니 가상하다" 임금은 곧 내시에게 이불을 가져오게 하여 덮어 주었다. 벼슬은 합천 부사에 그쳤다. 한번은 영남으로 어버이를 뵈러 귀향하는데, 임금이 내관을 시켜 중로에 따라가서 그의 시주머니를 뒤져서 가져오게 하였다. '조령에 올라서 읊은 시'는 이렇다. 북쪽을 바라보니 임금과 멀리 떨어졌고, 남쪽으로 내려오니 어머니와 가까워졌네 주상은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충효가 모두 구비되었구나" 공이 일찍이 부모 봉양을 위하여 산음현감을 자청해 나갔는데, 관리로서의 일처리가 미숙하여 일반적인 문서도 잘 처결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백성이 소장을 올렸는데, 여러 날 지나도록 판결이 나오지 않자, 다시 호소하였다. "판결을 내려 주는 것은 감히 바랄 수 없고 오직 본 소장을 도로 찾아 가고자 할 뿐입니다" 유호인이 답을 못하여 우물쭈물하는데 통인이 옆에 있다가 말했다. "부임하던 날 올린 소장도 아직까지 판결하지 못하였는데, 네가 올린 소장은 겨우 닷새 밖에 안 되었다. 어찌 그리 급히 서두르는가. 너무 심하다" 뇌계가 그 민첩함을 보고 기뻐하였다. "이 통인이 참으로 영특하고 매우 뛰어나다" 영남의 방백이 부임차 하직 인사를 할 적에 성종이 그를 인견하고 특별히 부탁하였다. "내 친구 유호인이 현재 산음현감으로 있으니, 경이 그를 보살펴 주구려" 그 방백은 왕의 뜻을 거행하지 않고 끝내는 '유호인이 백성을 돌보지 않고 시만 읊고 있다'는 죄목으로 파면했다. 한다. 당시 군왕들의 넓은 기상과 도량을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평생 '소학'을 가까이 했던 소학동자 김굉필 김굉필(1454-1504)의 본관은 서흥이고, 자는 대유, 호는 한훤당이다. 일찍부터 김종직에게서 수학하여 평생에 '소학'을 법으로 삼으니 '소학 동자'라 불리었다. 일두 정여창과 뜻이 통하고 의기가 합치되었다. 연소할 적부터 초립을 쓰고 연밥 갓끈을 늘이고 다녔는데, 만년에 이르러서도 그렇게 하였다. 방에 조용히 거처하면서 책상에 마주 앉아 책을 보되 밤이 깊어도 잠을 자지 않았다. 집안 식구들도 그의 하는 을 엿보지 못하였고, 이따금 늘어뜨린 연밥 갓끈이 책상을 칠 적에 쟁그랑쟁그랑 소리가 들려 아직도 책을 보고 있음을 알 뿐이었다. 성종 11년(1480)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동왕 24년에 유일(등용되지 않아 세상에 숨어 사는 유능한 선비)로 천거되어 남부참봉에 제수되고 형조 좌랑에 전임되었다. 연산군 4년(1498) 가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라 하여 장형을 맞고 희천에 유배되었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에 죄가 추가되어 사사하니,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갖추고 나와서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수염을 입에 물고 조용히 말하며 죽음에 나아갔다. "신체와 터럭과 살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이것까지 손상을 받을 수 없다" 이때가 그의 나이 51세였다. 중종 때에 우상에 특별히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경이다. 문묘에 종사되었다. 신선로를 만든 은둔자 정희량 정희량(1469-?)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순부, 호는 허암이다. 문장을 익히고 시에 능하였으며, 음양학에 통달하여 스스로 자기 운명을 점쳐 보고는 은둔하려는 뜻을 품었다. 성종 23년(1492)에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연산군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검열. 봉교를 지내고 호당에 들어갔다. 무오사화 때에 의주로 귀양갔다가 내지인 김해로 옮긴 후 3년 뒤에야 풀려났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정성스럽게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는 늘 "갑자년의 화가 무오사화보다 심하여 우리들도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세상을 도피하려고 중이 내왕할 때면 서로 함께 모의를 하고 때때로 혼자 부모 묘소에 가서 배회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집 식구들은 어머니를 사모하는 것으로 여겼다. 어느 날 그는 집을 나갔다가 오래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식구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종적을 찾아 물가에 이르렀는데, 짚신 두 벌과 상관이 물가에 있었다. 강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여기고 두루 찾았으나 끝내 그 시체를 찾지 못하였다. 친척인 해평군 정미수가 계를 올려, 그의 생김새와 복색을 알려 찾기를 청하였으나, 연산군은 "미친놈이 도망하여 죽었는데 무엇하러 찾느냐"고 하였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가 일어났으니, 그 말이 과연 징험된 셈이다. 퇴계 이황이 산중에서 '주역'을 읽는데, 한 늙은 중이 곁에 있다가 이따금 구두의 잘못을 고쳐 주었다. 퇴계는 마음속으로 그가 허암일 것이라 여기고 물었다. "지금은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때인데 정허암은 어찌하여 다시 속세에 나오지 않소?" "정희량은 어버이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다가 삼년상의 예를 마치지 못하였으니 불효요, 임금을 버리고 세상을 등졌으니 불충한 것이오. 불효하고 불충하였으니 죄가 막대한데, 무슨 면목으로 다시 인간 세상에 나가겠소" 그는 조금 뒤에 작별 인사를 하고 어디론가 홀연히 떠났다. 정희량이 장가를 든 뒤 아내를 멀리하여 얼굴을 대면하지 않았다. 정희량의 아내가 늙은 뒤에 단옷날을 잡아 남편의 기일로 삼고, 남겨 놓은 의복을 묻어 무덤을 만들었다. 용재 이행이 시를 지어 조문하였다. 비방과 칭찬 분분하게 만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도 허암공의 마음과 뜻 가늠하지 못하겠네 고양 남강 어디메에 남긴 자취 찾으랴 붉은 통 오색 끈을 부쳐 주기 원하노라 정희량은 화를 피해 중이 되어 스스로를 이천년이라 하고, 산수에 노닐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가천원의 벽에 시를 지어 붙였다. 비바람 치는 전일 놀라 달아났고 문명한 이때에도 저버렸네 외로운 지팡이로 우주간에 노닐으니 시끄러움 싫어져 시마저 짓지 않으련다 그는 주역 수화기제괘(일이 이미 일정하게 되어 있는 모양)의 이치로 화로를 만들어 채소를 익혀 먹었는데, 아침, 저녁 식사할 때에도 오직 이 화로 하나뿐이었다. 그가 신선이 되어 가 버리자 세상 사람들이 이를 '신선로'라 하였다. 오늘 우리가 즐겨 먹는 신선로의 근원이 여기 있다. 이극돈의 죄를 사실대로 쓴 김일손 김일손(1464-1498)의 본관은 김해이고, 자는 계운, 호는 탁영이다. 그의 형 준손, 기손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같이 배웠다. 성종 17년(1486)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2등을 하였으며 예문관 검열에 보직을 받아 사관으로 있으면서 이극돈의 죄를 사실대로 바로 썼다. 연산군 4년(1498) 7월에 왕이 전지하였다. "김종직은 시골의 천한 선비로서 세조 때에 과거에 오르고 성종 때에 경연에 발탁되어 오랫동안 시종의 지위에 있으면서 형조 판서에 이르렀으니 은총이 더할 수 없이 지극하였다. 그가 병으로 물러간 뒤에도 소재지의 수령을 시켜 특별히 쌀을 주어 그 여생을 마치게 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제자 김일손이 편수한 사초 안에 부도한 말로 선왕 세조 때의 일을 거짓으로 꾸며 말하고, 그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수록하기까지 하였다. 그 글에 '정축(세조 3년) 10월에 내가 밀양으로부터 서울로 오다가 답계역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꿈에 어떤 선인이 훤칠한 키에 일곱 무늬가 있는 칠장복을 입고 점잖게 말하기를 -나는 초희왕의 손자 심인데 서초패왕 항우에게 시해되어 빈강에 빠졌다-하고는 언뜻 보이지 않았다. 내가 꿈을 깨고 나서 깜짝 놀라 말하기를, -초희왕은 남쪽 초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방 조선 사람이다. 지역이 서로 만여리 이상 떨어져 있고 세대 또한 천여 년이나 선후가 있는데, 꿈자리에 와서 느꼈으니 이 무슨 상서로운 기미인가. 또 역사서를 고찰해 보면 서초패왕이 초희왕을 강물에 던져 넣었다는 말이 없으니, 어쩌면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그를 쳐서 그 시체를 강물에 던져 넣음인가.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하고 마침내 글을 지어 조문하다'(이 유명한 '조의제문'은 '점필재집'과 '탁영집'에 실려 있다) 세조의 사초에 김일손이 그 '조의제문'을 찬양하여 '충분이다' 하였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모르게 참담하고 두렵다. 그 형명을 의논하여 아뢰어라" 이윽고 7월에 그를 난역으로 처형하고 종묘에 고하였다. 김일손의 벼슬은 이조 정랑에 이르렀다. 중종반정 후 그에게 도승지를 추증하였다. 연산군의 연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박한주 박한주(?-1504)의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천지, 호는 오졸자이다. 6, 7세가 되자 글을 짓고 시를 읊었다. 성종 16년(1485)에 생원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정언과 헌납을 역임하고 예천군수로 나갔는데 정사를 공평하게 하여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좋아했다. 이에 연산군이 그를 내직으로 불러들여 간관으로 임명하였다. 박한주가 임금 앞에 나아가 말하였다. "종묘, 사직과 능침에는 한번도 제사지내지 않으시고 놀이와 잔치는 무상으로 베풀어서 밤을 낮으로 삼아 계속하시니 효도하는 도리에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연산군이 말하였다. "눈병이 있어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후원 안에서 말달리기와 제기차기를 하며 용봉장막을 쳐 놓고 연회를 벌일 때가 그처럼 많은데 주상께서 어찌하여 눈병이 났다고 말씀하십니까" 연산군이 발끈 성이 나서 얼굴빛이 변하였다. "용봉장막이 네 물건이냐?" 박한주가 대답하였다. "이는 모두 백성의 재력에서 나온 것이니, 신민의 장막이라 해도 옳을 것입니다. 어찌 상감의 사사로운 물건이겠습니까" 이어서 노사신, 임사홍의 간사함을 논하다가 마침내 모함을 받아, 점필재 김종직의 문도라 하여 무오사화 때 벽동에 유배되었다가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반정 후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홀아비로 살 적에 기생을 거절한 이자건 이자건(1455-1524)의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건지이다. 성종 11년(1480)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동왕 1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를 모시던 기생이 있었는데, 이자건이 홀아비가 되자 그의 집에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집에 딸아이가 둘이 있어 기생과 함께 살 수 없다" 이자건은 기생을 물리치며 돈과 물품을 후히 주어 돌려보냈다. 연산군 때 직언을 하다 미움을 받아 선산에 귀양갔는데, 선산 부사가 매우 박대하였다. 하루는 의금부의 관리가 온다는 말을 듣고 그 부사는 곧 군사를 거느리고 이자건이 살고 있는 집을 에워싸고 이자건을 불러 뜰 아래에 꿇어 앉혀 놓고 온갖 방법으로 다그치고 욕보였다. 그런데 의금부 관리는 다른 일로 이곳을 지나게 된 것이었다. 의금부 관리가 지나간 뒤에, 부사는 열쩍어 하며 돌아갔다. 뒤에 이자건이 황해 감사가 되었는데 그 수령이 마침 안악군수로 있다가 이를 알고 사직하고 떠나려 하였다. 이자건이 안악군에 당도하여 따뜻한 말로 위로해 타이르니 그 수령이 감읍하였다 한다. 벼슬은 공조,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공간이다. 병풍에 시를 썼다가 죽음을 당한 임희재 임희재(1472-1504)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경여, 호는 물암이다. 간신 임사홍의 아들이다. 성종 17년(1486)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연산군 4년(1498)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는데, 이 해에 김종직의 문도라 하여 곤장을 맞고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텐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나 재앙이 집안에서 일어날 줄 알지 못하고 오랑캐 막으려고 부질없이 만리장성 쌓았구나 하루는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갔다가 병풍에 씌어 있는 시를 보고 물었다. "누가 쓴 것인가?" 임사홍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연산군이 성을 내며 말하였다. "경의 아들이 불충하니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임사홍이 꿇어앉아 말하였다. "이 자식의 성품과 행실이 불순한 것은 상감의 말씀과 같습니다. 신이 바로잡으려 했으나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임희재는 죽음을 당했는데, 그 아비 임사홍은 희재가 사형 당한 그날도 평일과 다름없이 잔치를 베풀어 마음껏 먹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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