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1 - 11편 (11/20)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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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1 - 11편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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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곳마다 소나무를 켜서 거문고를 만들어 타다가 떠날 때에는 이를 부숴 버렸다.
시풍은 속세를 떠난 높은 격조가 있었으며, 또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으니 참으로 절대기재라 할 수 있다.
김식이 조광조, 김정, 김구와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최수성이 갑자기 밖에서 들어와서 오랫동안 읍을 하더니 서둘러 말했다. "노천(김식의 자)은 나에게 술 한잔 주게" 김식이 그에게 술을 주었더니 쭉 들이켜고 나서는, "내가 부서진 배를 탔다가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하였네.
가슴이 매우 두근거렸는데 지금 술을 마시고 나니 속이 확 풀리는 듯하군" 하고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괴이하게 여기자, 조광조가 말하였다. "부서진 배의 비유는 우리들을 가리킨 것이네.
다만 자네들이 몰랐던 것뿐이네" 남곤이 산수도 한 폭을 김정에게 보내어 화제를 요청하였다.
최수성이 마침 김정을 방문했다가 그것을 보고 그 산수도 위에 글을 썼다.
지는 해는 서산으로 내려오고 외로운 연기는 먼 나무에서 나오네 은사의 차림 복건 쓴 서너 사람 망천장의 주인은 누구이냐 남곤이 그 화제를 보고 원한을 품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최수성이 시국에 대해 분개하여 시를 지어 숙부 최세절에게 올렸다.
해 저문 창강 위에 날은 차고 물결은 절로 이네 외로운 배 일찌감치 대어야지 밤이 되면 풍랑 응당 높아지리 중종 16년(1521)에 승지 최세절이 동료에게 말했다. "조카 수성이 나에게 벼슬에서 물러나라고 권하는데 떠나가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최세절이 그 시를 외어 전하였는데, 최수성을 꺼리는 자가 이 사실을 남곤에게 말하였다.
남곤이 안처겸 옥사의 추관이 되어 임금에게 최수성도 아울러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국청에 나온 최수성은 떳떳하게 말했다. "사림이 불화하여 조정에 화가 생길까 두려웠으므로 숙부에게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게 하였을 뿐입니다" 남곤이 마침내 극형에 처해졌다.
평소에 친하게 놀던 벗 이달형 등이 발로 최수성의 시체를 거두어 싸서 빈 골짜기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영상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이다.
남이 보내 오는 물건을 꼼꼼히 기록한 김안국 김안국(1478-1543)의 본관은 의성이고, 자는 국경, 호는 모재이다.
연산군 7년(1501)에 진사시에 1등,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9년(1503)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중종 2년(1507)에 중시에 급제하였다.
중종 26년(1531)에 일본 사신 붕중이 왔는데, 김안국이 선위사로서 영접을 주관하였다. "노생이 중국에 두 번 조회하러 갔고, 유구에 두 번 사신으로 갔으며 귀국에 세 번 와서 외국 사람을 많이 만났으나 공과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붕중은 탄복해 마지않았으며, 귀국할 때에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아우 정국과 함께 유림의 종장으로서 김안국은 이천에 물러나 살고, 김정국은 고양에 물러나 살고 있었다.
하루는 김정국이 이천 형의 집에 가니, 마을 사람들이 풋콩을 삶아 오기도 하고 혹은 오이를 따 가지고 와서 김안국에게 바쳤는데, 김안국은 그것을 모두 또박또박 책에 기록하였다.
김정국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형은 이런 물건들을 무엇에 쓰려고 받으며, 어찌하여 그것을 책에 기록합니까" "사람들이 성의로 보내 오는데 내가 어찌 그것을 물리치겠으며, 책에 기록해 두지 않으면 내 마음에서 곧 잊어버리게 된다.
어찌 남의 은혜로운 뜻을 버리겠는가" 시골에 살 적에 김정국은 간소하고 담박하여 나물과 잡곡밥도 이어 가지 못하였으나, 김안국은 전원을 장만하여 양곡을 쌓아 두고, 나누어주었다가 또 거두어들이며, 고을의 모임에는 꼭 참여하였다.
김안국이 전라감사가 되었을 적에 마침 전주에 있는 경기전을 중창하는 날을 당하여 경기전 대문 밖 조금 가까운 곳에 별도로 별당 두세 칸을 건축하였다.
인조 1년(1623) 계해반정 뒤에 정승 원두표가 정사공신으로 방백이 되어 경기전에 이르러 태조의 영정을 배알하였다.
이때 경기전 참봉이 기생을 불러 이 별당에서 같이 자고 있었다.
원두표는 그 별당을 철거해 버렸다.
그 뒤 나이 젊은 경기전 참봉들이 집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할 적에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생을 묵게 할 곳이 없어서 혹 재실에 몰래 끌어들여 같이 자기도 하였다.
김안국과 원두표 두 사람의 일처리에 대하여 잘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 반드시 분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고 시호는 문경이다.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신인의 현몽에 따라 소를 도로 거둔 김정국 김정국(1485-1514)의 자는 국필, 호는 사재이며, 김안국의 아우이다.
중종 2년(1507)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중종 4년에는 문과에 장원하였다.
황해감사로 있을 적에 남곤, 심정이 간사하게 사람을 모함한 정상과 정암 조광조 등 여러 현인이 자기 일신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한 사실을 극진히 진술한 수천 자에 달하는 소를 작성하였다.
마침 막료인 도사 남씨가 남곤의 일족으로서 사간원 헌납에 발탁되어 상경하게 되었다.
김정국이 그 소를 남씨에게 주면서 말했다. "그대가 서울에 당도하거든, 이 소를 올리게" 남씨 또한 거절하지 않고 소를 가지고 길을 떠났다.
그런데 김정국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말했다. "공이 만일 이 소를 올리면 사림이 어육이 될 것이니, 지금 사람을 급히 뒤쫓아 보내면 도로 찾아올 수 있을 것이오" 김정국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곧바로 역졸을 보내어 도로 찾아오게 하였더니, 역졸이 벽제관에 이르러 남씨를 만나 도로 찾아 왔다.
남씨가 서울에 왔을 적에 어떤 사람이 그 소의 내용에 대하여 묻자, 남씨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대답하고,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를 뜻이 높은 이로 여겼다.
남씨는 뒤에 벼슬이 판서에까지 이르렀다.
모재 김안국은 매양 일렀다. "이 소가 만일 올라갔으면 사람들이 어찌 내가 몰랐다고 말하겠는가.
우리 형제는 마땅히 죽었을 것이요, 이밖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를 일이다" 그때 모재는 파직만 되었을 뿐이고, 사재는 벼슬이 삭탈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사재가 모재보다 중한 죄를 받은 것은, 그 소가 궁내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이 그가 소를 올리려 한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했다. "남지정(남곤의 호)이 주청사로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올 적에 김정국이 황해감사로 있으면서 황주 초지정에 나가 만나 보고는 '사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노여움을 건드려 죄가 가중되었을 것이다" 사필은 아무나 잡는 게 아니라고 항변한 채세영 채세영(1490-?)의 본관은 평강이고, 자는 영지, 호는 임진당이다.
중종 2년(151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동왕 1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보임되고 사관을 겸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채세영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조광조 등 당인들을 죄주는 전지를 쓸 적에, 채세영이 조광조 등의 처벌이 부당함을 극력 간하려 하자, 승지 김근사가 채세영이 쥐고 있는 붓을 빼앗아 멋대로 쓰려고 하였다.
채세영은 그를 몸으로 막으며 큰소리로 항언하였다. "이것은 역사를 기술하는 붓이오.
다른 사람이 함부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채세영의 말과 기운이 곧아서, 좌우가 있는 조신들이 숙연하였다.
벼슬을 좌참찬에 이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잘린 여자 속옷을 항상 옆에 두고 후손을 경계한 박영 박영(1471-1540)의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자실, 호는 송당이다.
아버지는 수종인데, 벼슬은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양녕대군의 딸에게 장가들어 박영을 낳았다.
박영은 재주와 도량이 넓고 컸다.
성종 22년(1491)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어느 날 그가 궐내에 들어가 숙직을 하다가 탄식하였다. "말을 달리고 칼을 시험하는 것은 한 용부의 일일 뿐이다.
사람으로서 학문을 하지 않으면 어찌 군자가 되겠는가" 그는 드디어 결단을 내려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낙동강 가에 집을 짓고 신당 정붕에게 수학하였는데,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생각하고 몸소 실천하며 두문불출한 지 수년이었다.
어느 날 신당이 손을 들어 냉산을 가리키며 박영에게 물었다. "저 산 밖은 어떠할까?" "외면이 바로 전면이니 저것이나 이것이나 매한가지일 것입니다" 신당이 웃으며 말하였다. "오늘에야 그대가 책을 읽은 공효가 있음을 알겠도다" 그대로 수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부지런히 강구하였다.
한번은 김해부사로 있을 적에 이웃집 여자의 곡소리를 들었다.
급히 형리를 시켜 데려와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으니,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우리 남편이 아무 병도 없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박영이 사람을 시켜 그 남편의 시체를 메어 오게 하고 힘센 군교를 시켜 시체를 반듯하게 누인 다음, 손에 힘을 주어 시체를 가슴에서부터 아랫배까지 누르게 했더니, 드디어 배꼽 속으로부터 손가락 만한 대나무 가지가 뚫고 나왔다.
박영이 그 여자를 결박해 놓고 심문하자 그 여자가 다 실토하였다. "마을의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같이 살기로 약속하고, 제 남편이 술에 취해 자는 틈을 이용하여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박영이 곧 군사를 풀어 그 사나이를 급히 잡아다 물으니 그 말이 모두 부합되므로 법에 따라 처벌하였다.
하루는 들새가 관아 후원에 날아와서 놀란 소리로 세 번 울고 서남쪽으로 가 버렸다.
박영이 가족들을 불러 급히 행장을 꾸리도록 했는데, 행장을 미처 꾸리기도 전에 금부도사가 와서,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그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심문을 받을 적에 뼈마디가 모두 부서질 정도였다.
박영이 큰 소리로 추관에게 물었다. "누구의 고발이오?" "아무의 고발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과 원한을 맺은 사람으로는 경주부윤 유인숙이 나보다 심하였다.
유인숙도 잡혀 왔다면 무고임이 분명하니 나는 살아날 수 있겠다" 중종이 바야흐로 국정을 베풀고 친히 국문하다가 이 말을 듣고 그 까닭을 물었다. "그 사람이 문서를 위조하여 남의 전지를 빼앗으려고 김해부에 소송을 했다가 사리가 틀려서 배척을 당했으며, 또 경주부에 소송했더니, 경주부에서는 그 간사한 짓에 분노하여 감사에게 보고해서 형벌을 받았으므로 원한이 나보다 심할 것입니다.
저놈이 내가 반역을 도모한다고 먼저 고발하였으니 경주부윤 유인숙도 그 다음에 고발할 것입니다" 임금이 드디어 유인숙에게 물으니, 유인숙의 진술이 박영의 진술과 같으므로, 고변한 자를 반좌율(무고한 사람에게 무고 입은 사람에게 부과한 죄와 동일하게 부과함)에 적용하여 처단하였다.
박영이 선전관에 임명되었을 적의 일이다.
어느 날 준마를 타고 화려한 옷을 입고 저녁 무렵에 수문동을 지나는데, 동네 어귀에서 꽤 아름다운 여인이 손짓하며 불렀다.
박영이 말에서 내려 종에게 "내일 아침 일찍 오라"고 이르고는 그 여인을 따라가니 사람이 없는 깊숙하고 외진 곳에 집이 있었다.
박영이 그 집에 이르자, 날은 이미 저물어 캄캄하여졌다.
그 여인이 박영을 대하고는,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리므로 그 까닭을 물었다.
여인은 곧 손을 들어 말소리가 나지 않도록 중지시키고, 낮은 목소리로 귀에 대고 말하였다. "공의 풍채를 보니 필시 보통 사람이 아닌데, 나로 말미암아 비명에 죽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슬퍼합니다" 박영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 묻자 여인이 말하였다. "도적들이 나를 미끼로 삼아 사람을 유인하여 죽이고 그 의복과 타고온 말, 말안장 등을 나누어 가진 지 여러 해 되었습니다.
내가 날마다 탈출할 것을 생각해 왔으나 그들이 죽일까 두려워 감히 탈출할 계책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은 나를 살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박영은 칼을 빼앗아 들고 앉아서 기다렸다.
밤중에 방 위의 다락에서 도적들이 여인에게 큰 밧줄을 내려보내 "그자를 묶어 올려 보내라"고 하였다.
박영은 몸을 솟구쳐 벽을 차 무너뜨리고 급히 여인을 업고 탈출하여 담을 뛰어넘었다.
여인이 가지 말라며 붙잡자 그는 속옷 자락을 잘라 버리고 떠나왔다.
그 이튿날 벼슬을 사직하고 선산으로 돌아와서, 무인 노릇을 버리고 글을 읽어 생각을 바꾸고 세상의 순수한 유학자가 되었다.
평소에 앉은 자리 옆에 항상 잘린 여자 속옷을 두고서 자제들에게 보이면서 경계하였다.
중종 16년 신사옥사에 무고를 당하여 혹독한 형을 받고 얼마 뒤에 방면되었다.
70세에 별세하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목이다.
관곡을 빌려 먹을 정도로 청빈했던 최명창 최명창(1466-1536)의 본관은 황주이고, 자는 여신, 호는 송석이다.
성종 20년(1489)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연산군 10년(150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사간원의 관직과 홍문관의 전한을 역임하고 지방의 수령을 여러 번 지냈는데, 이삿짐 보따리가 늘 단출하였다.
황해감사를 지냈고 청백리에 뽑혔다.
그는 집이 없어 항상 남의 집을 빌려 살았고, 만년에 지은 쌍계의 집 또한 겨우 비바람을 가리울 정도로 초라했다.
벼슬에서 파면된 뒤로부터는 해마다 양주 창고에 있는 관곡을 꾸어다 먹으니, 사람들이 '관곡 꾸어 먹는 재상'이란 뜻으로 '적창재상'이라 불렀다.
71세에 '기묘당인'으로 몰려 죽었다.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다.
홍패는 몰수되고 백패마저 도둑맞은 심잠 신잠(1491-1554)의 본관은 고령이고, 자는 원량, 호는 영천자, 아차산인이다.
시와 글씨와 그림에 능하여 세상 사람들이 '시서화 삼절'이라고 불렀다.
중종 8년(1513)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동왕 14년에 현량으로 천거되어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보임되었다가 얼마 뒤에 과거의 방을 파하여 홍패(문과 합격증)를 몰수당하고, 곧 장형을 받은 후 장승으로 유배되었다.
17년 동안 배소에 있다가 양주로 배소가 옮겨져 편한 대로 살게 하니 아차산 아래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에서 또 백패(진사시의 합격증)를 도둑맞았다.
신잠은 시를 지어 읊었다.
홍패는 이미 뺏기고 백패마저 잃었으니 한림과 진사가 모두 이름뿐이로구나 이제부터 아차산 아래에서 묻혀 살 것이니 '산인' 두 글자야 어느 누가 뺏을꼬? 그 뒤 특별히 음직으로 상주목사가 되었다.
유기장이의 딸을 정부인으로 삼은 이장곤 이장곤(1474-?)의 본관은 성주이고, 자는 희강, 호는 금재이다.
연산군 원년(1495)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연산군 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교리 때에 왕의 비위를 거슬려 거제에 귀양갔다.
연산군은 이장곤이 일을 도모할까 의심하여 다시 포교를 보내어 잡아오게 하였다.
이장곤은 죄를 더 받을까 두려워하여 함흥으로 도망을 갔는데, 도중에 목이 몹시 말랐다.
마침 물을 긷는 처녀가 있어 물 한 바가지만 주기를 청했더니, 그 처녀는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주는 것이었다.
이장곤이 괴이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처녀가 말했다. "목이 몹시 말라 급히 마시면 체할까 염려되어 천천히 마시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장곤이 그 지혜로움에 놀라 다시 물었다. "너는 누구의 딸이냐?" 알고 보니 건너편 유기장 집 딸이었다.
그는 곧 처녀의 집으로 따라가서 사위가 되어 몸을 의탁하였다.
이장곤 같은 서울의 귀한 손이 어찌 유기(고리) 짜는 것을 알겠는가.
그는 날마다 낮잠만 자고 지냈다. "내가 사위를 맞이한 것은 유기 만드는 일을 돕게 하기 위해서인데, 오직 밥만 먹고 밤낮 잠만 잘 뿐이니, 이는 곧 하나의 밥통이로다" 유기장 부부가 노하여 아침, 저녁의 밥을 반으로 줄여 버렸다.
그의 아내가 그를 불쌍히 여겨 매양 솥바닥의 누룽지를 긁어 더 먹여 주었다.
이렇게 지낸 지 수년이 되었는데, 중종이 반정하고 조정이 일신되어 연산군 때에 죄를 얻은 사람을 모두 사면하였다.
이장곤의 관직도 도로 주어 팔도에 명령하여 찾게 하니, 소문이 널리 퍼졌다.
이장곤이 풍문에 그 소문을 듣고 장인에게 말하였다. "관가에 매달 바치는 이번 유기는 내가 져다가 바치겠소" "자네 같은 잠꾸러기가 동서의 방향도 모르는데, 어찌 관가에 상납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직접 바치더라도 번번이 퇴짜맞기 일쑤이다.
당치 않은 말은 아예 하지 마라" 곁에 있던 그의 아내가 말하였다. "시험삼아 한번 보내 보도록 하시지요" 그러자 장인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이장곤은 등에 유기를 짊어지고 관아의 뜰로 바로 들어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아무 데 사는 유기장이 유기를 바치기 위해 와서 기다립니다" 마침 그때 함흥부윤은 이장곤과 친했던 무관이었다.
그 무관이 이장곤의 얼굴을 보고 크게 놀라 섬돌을 내려와서 손을 잡고 자리에 올랐다. "공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런 모양으로 나타나셨소? 조정에서 찾은 지 오래되었소" 이어서 술과 음식과 옷과 갓을 챙겨 주었다.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이 유기장의 집에 몸을 의탁하여 구차스럽게 목숨을 연명하다가 뜻밖에 다시 밝은 세상을 보게 되었소" 함흥부윤이 순찰사영에 급히 보고하여 곧 역마를 내어 상경하도록 재촉하였다. "유기장의 집에 3년 동안 주객의 처지로 있었으므로 돌아보지 않을 수 없고 겸하여 조강지처의 의리가 있소.
지금 가서 작별을 고할 것이니, 그대는 내일 아침에 나를 찾아와 주시오" 이장곤이 이렇게 말하고 유기장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 달 유기를 무사히 갖다 바쳤습니다" 장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였다. "이상하다.
옛말에 '올빼미가 천년 묵으면 꿩 한 마리는 잡는다' 하더니, 그것이 헛말이 아니다.
오늘 저녁밥은 조금 넉넉히 차려 주어라" 이튿날 아침에 이장곤이 일찍 일어나서 뜰을 청소하니, 장인이 좋아했다. "우리 사위가 어제 유기를 잘 바치더니, 오늘 아침에 집 뜰을 청소하네.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도다" 이장곤이 뜰에 짚자리를 까니, 장인이 의아해 하였다. "어찌하여 자리를 까는고?" "오늘 사또가 행차하실 것입니다" 장인이 비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잠꼬대 같은 소리 하지 말게.
사또가 어찌 우리 집에 행차하겠는가.
이제 와서 생각하니 어제 유기를 잘 바쳤다는 것도 필시 길에 버리고 집에 돌아와서 허세를 부려 큰소리친 것이로구나" 그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함흥부의 아전이 채색 자리를 가지고 헐레벌떡 와서 방안에 깔았다. "사또의 행차가 곧 당도하십니다" 유기장 부부는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사색이 되어 울타리 사이에 피해 숨어 있었다.
조금 뒤에 수령의 앞길을 인도하는 전도 소리가 문 앞에 들리고 본관 사또가 당도하여 인사를 한 다음, 이어서 물었다. "아주머니는 어디에 계시오? 청컨대 상견례를 행하겠습니다" 이장곤이 아내를 불러내어 절하게 하였는데, 의복은 비록 남루하나 의용이 매우 안온하고 예절이 발라 천한 상민 여자의 촌스런 태도가 없었다.
본관 사또가 경의를 다하여 말하였다. "이 학사(이장곤을 말함)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적에 아주머니의 힘으로 오늘이 있게 되었으니, 비록 의기의 남자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소" 또 사또가 유기장을 불러 술을 권하고 따뜻한 말로 위로하였다.
이웃 고을 수령이 잇달아 오고 감사도 막료를 보내어 전갈하니, 유기장의 집 문밖이 사람과 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장곤이 본관 사또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비록 천한 상민이나, 내가 이미 아내로 삼았으니 버리는 것은 불가하오.
원컨대 가마 한 채를 빌려주어 같이 가게 해주시오" 본관 사또가 그 말대로 들어주었다.
이장곤이 상경하여 임금에게 사은하니, 임금이 그에게 떠돌아 다니던 전말을 물으므로 이장곤이 그 사실을 갖추어 아뢰었다. "이러한 여자를 천첩으로 대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임금은 새삼 감탄하며 특별히 후부인으로 올려 주었다.
이장곤은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이장곤은 갑자사화 때 망명한 지 수개월 만에 한번 집에 와서 본부인을 보고 떠나갔는데, 하루는 집에 이르니 마침 먼동이 트고 있었다.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대숲에 숨어 있었다.
부인은 1년이 지나도 남편이 오지 않자, 죽었을까 의심하여 무당을 불러 점을 쳐보았다.
무당의 답이 "죽지 않고 그림자가 뜰 가운데 있다" 하였다.
이장곤이 그 말을 듣고 그 뒤로부터 감히 다시 집에 오지 못하였다.
이장곤은 만년에 항상 "무당의 말도 헛말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병의 근원을 치료했던 명의 안찬 안찬 (?-1519)의 본관은 순흥이고, 자는 황중이다.
의술에 정통하고 이학에도 정밀하여 사류들과 많이 벗하였다.
어떤 사람이 새벽에 나갔다가 도중에 갑자기 두 눈이 모두 딱 붙어 뜰 수가 없었다.
손으로 문질렀더니 마치 아교풀을 붙인 듯 딱 붙어서 그대로 장님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모두 그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였다.
안찬이 처방을 해주며 말했다. "눈이란 폐에 속한다.
폐에 병이 들었기 때문에 눈이 꼭 붙은 것이니, 폐를 다스리는 약을 쓰도록 하라" 그 사람이 약을 먹은 지 얼마 안 돼 눈이 점차 뜨이어 평상시처럼 완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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