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말 말고 가져와라! 우선 목이나 좀 축이자!" "어이쿠! 갈수록 태산이로군!" 점원은 공령천신의 엄청난 주량에 더 이상 언급을 회피했다. 하후미린은 여전히 미소를 띄운 채 점원에게 말했다. "통닭도 서너 마리 가져다 드리게." "예예!" 공령천신은 그 말에 입이 귀 밑까지 찢어졌다. "킬킬킬. 볼수록 맘에 드는 놈이구나!" "…!" 하후미린은 공령천신을 바라보며 뭔가 잠시 생각을 굴린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생은…" 그러자, 대뜸 공령천신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집어 치워라. 소생은 무슨 고리타분한 소생! 주정뱅이 형님이라 불러라!" "예엣?" 하후미린은 안색이 변할 정도로 당황했다. 허나, 곧 그는 짚이는 바가 있었다. (후후! 나 하후미린의 형님이 되고 싶다?) 하후미린은 이채를 발했다. (도계의 하늘. 야망이 없는 인물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더 이상 머뭇거림 없이 말투를 고쳤다. "그럼 외람되나 형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러자, 공령천신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오냐, 그래야 편하지. 그래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느냐? 첩실(妾室)로 쓸 예쁜 계집을 구해 달란 얘기라도 하려느냐?" 공령천신, 두 배분 높은 노형의 얘기는 처음부터 계속 멋대로였다. 이쯤 되자, 하후미린 역시 자못 농담조로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닙니다. 우제가 듣기로는 노형님께서는 이미 백 년 전에 땅 속으로 들어가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의 눈가에도 슬며시 웃음기가 떠올랐다. 공령천신은 주독에 절어 새빨간 딸기코를 씰룩거리며 익살스럽게 대꾸했다. "이 좋은 술을 두고 어딜 들어가? 노형은 앞으로도 백 년은 더 살 것이다!" 그 때였다. 낑낑거리며 점원이 술동이를 들고 나타났다. 그것을 보자 공령천신은 마치 어린애처럼 환성을 질렀다. "이야호! 술이다! 최고급의 백화주구나!" 이어, 그는 숨돌릴 사이도 없이 술동이째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쭉! 통닭다리를 찢어가지고는 와구와구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그리고, 또다시 꿀꺽꿀꺽…!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공령천신은 술과 닭다리를 목구멍에 구겨 넣었다. 잠시 후, 술 열 동이와 서너 마리의 통닭은 거짓말처럼 깨끗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럴 수가!" 점원은 눈이 부릅떠진 채 공령천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갈수록 태산이라던가? "꺼억! 이제 겨우 술이 들어간 느낌이 드는군!" "어이구! 맙소사!" 점원은 아예 까무러칠 듯한 표정이었다. 공령천신, 그는 이빨을 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렵니까?" 하후미린의 물음에 그는 눈을 껌벅거리며 대꾸했다. "오냐. 천불 땡중과 일갑자만에 만나기로 했으니라." 이어,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지저분한 장포를 뒤적거렸다. 먼지가 푹석거리는 가운데 그는 품 속에서 때가 낀 비단책 한 권을 꺼냈다. "옛다! 받아라!" 그는 선심 쓰듯 그것을 하후미린 앞에 집어던졌다. "…!" 하후미린은 무심히 그것을 집어들어 펼쳤다. 범문(梵文)이 가득한 책자였다. "음?" 갑자기 하후미린의 두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그의 기색을 보며 공령천신이 물었다. "알아보겠느냐?" "예." 하후미린은 얼른 대답했다. "잘 되었다. 그것을 네 녀석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다." 공령천신은 익살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실은 노령이 심심해서 천축에 놀러갔다가 금강혈가람에서 슬쩍해 온 것이다. 한데 슬쩍하기는 했으나 도통 알아볼 수가 있어야지. 클클…!" 그 말에 이어, 스스스…! 공령천신은 신형을 감추고 말았다. "노형님!" 하후미린이 다급히 불렀으나 소용없었다. 공령천신의 모습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으니… 한데, 그 순간 멀리서 들리는 듯한 공령천신의 음성이 그의 귓가를 울렸다. "헤헤. 곧 다시 만나리라. 네 앞길에 큰 위험이 두세 번 있을 것이나 그것이 전화위복으로 큰 기연이 될 것을 알기에 안심하고 떠난다." 그것이 전부였다. "가셨군." 하후미린은 다소 씁쓸히 중얼거렸다. 공령천신, 그는 확실히 기인이었다. 우연하게 만난 듯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듯하고, 어이없이 사라지면서도 여운을 남기는…! 하후미린은 잠시 멍하니 그가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허나 곧, 그는 공령천신이 남기고 간 책자에 시선을 돌렸다. <금강혈가경(金剛血迦經).> 그것을 펼치자 그 안에는 천축에서도 쓰지 않는 고범어의 글이 빽빽하게 쓰여 있었다. 기실, 범인(凡人)이라면 그것을 읽어 내기란 불가능했다. 배분이 높은 기인으로 알려진 공령천신조차 해독을 못하던 것이 아닌가? 허나, 하후미린만은 예외였다. 공히 천하제일학사요, 무불통지의 대문성(大文聖)인 그가 범인과 같을 수는 없었다. 그는 어렵지 않게 금강혈가경이라는 책자를 읽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서두는 대략 이러했다. <공룡혈뢰찰(恐龍血雷刹)의 횡포가 극에 달하여 이에 보다 못해 토벌하도다. 금강혈가경은 그 때 얻은 전리품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허나, 그 내용이 불가의 무공답지 않게 지나치게 패도적이었도다.> 하후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금강혈가경은 금강혈가람(金剛血迦覽)의 물건이 아니었군." 그는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이를 절대 익히지 말 것이며 밖으로 유출됨도 방지할지니라. 만일 유출될 시는 반드시 팔대혈가금강신(八大血迦金剛神)을 내보내 회수하라.> 하후미린은 다소 씁쓸한 기분이 되어갔다. 그는 시야 가득 익살스러운 공령천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노형님은 장난으로 이것을 금강혈가람에서 빼 오셨겠으나 이것이라면 능히 대륙무림에 큰 풍지평파를 불러 일으키리라." 그의 생각은 옳았다. 약육강식의 무림. 그 속에서 무공 익히기라면 밥먹기보다 즐겨하는 무림인들에게는 패도지공일수록 눈에 불을 켜고 익힐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금강혈가경. 이 패도적인 천축밀교의 무학이 중원에 들어왔음을 안다면 그 누가 탐욕을 가지지 않겠는가? 허나, 하후미린은 스스로 무공에 연이 없었던 바 금강혈가경의 내용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는 무심히 금강혈가경을 품 속에 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가보아야겠군." 그는 한 덩어리 묵직한 은자를 점원에게 들려 주었다. 공령천신의 몫까지… 이어, 하후미린은 밖으로 나섰다. <금강혈가람.> <금강혈가경.> <공룡혈뇌찰.> 우연히 얻은 한 권의 고대범밀경(古代梵密經)에서 나온 이름들. 모르리라! 그것에 내재된 그 엄청난 신비를… 하후미린으로서도 알지 못하는 신비가 그곳에 있음을 그는 알지 못했다. 풍운! 그 시작은 한 명의 용(龍)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늘에 오르려는 자들의 집요한 포섭으로부터… 혜자(惠子)가 양혜왕(襄淮王)의 재상(宰相)에 취임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장자(莊子)는 양국(襄國)을 방문했다. 간인(姦人)이 있어 혜자에게 말했다. --장자는 틀림없이 당신의 직위를 뺏으러 온 것입니다! 신경이 곤두선 혜자는 삼일(三日)을 고심하다 장자를 찾아갔다. 물론, 혜자는 장자를 설득시켜 자신의 막하에 두거나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 그런 그를 보며 장자는 말했다. --남해(南海)에 원추(鴛鰍)라는 천조(天鳥)가 있음을 알고 있소? 그 천조는 남해에서 북해까지 날아가는데 도중 벽오동 (碧烏棟)나무에서만 쉰다오. 또, 갓 나온 이슬 맞은 죽순 외에는 먹지 않고, 감로수 외에는 목이 마르더라도 결코 마시지 않소! 그런데, 썩은 쥐를 주운 자오(子烏)가 구만리장천을 비상해가는 원추를 보고 애써 얻은 썩은 쥐를 빼앗기지 않나 해서 걱정을 했다는구료. 그래서, 까악! 소리치며 원추에게 덤벼들었다오! 허나, 원추는 그대로 날아갈 뿐이었소! 달려드는 자오를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암흑의 공간, 한 점의 빛줄기도 있지 않았다. 허나, 검은 암흑 속에 섞여 있는 피의 기운! 그것은 천지창세(天地創世) 이전의 혼원암흑계(混元暗黑界)였다. 그리고, 둥실…! 진공의 대기를 부유하는 검붉은 형상이 있었다. 츠츠츠…! 폭발해 오르는 극렬한 절대악마기류! 그것은 인간의 몸에서 풍길 수 없는 기운이었다. 악마의 기도! 보는 이의 심혼이 산산이 바스러져 저 깊숙한 지옥유부(地獄幽府)로 떨어져 내릴 전율적인 악마의 파천마력도(破天魔力道)!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울려 퍼졌다. "크흐흐! 대륙육패천인! 놈들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저 아수라의 저주음(詛呪音)! 우우우웅! 그 끔찍한 저주악마음은 암흑의 진공대기를 찢어발기며 울려 퍼졌다. 인간! 전율적인 악마기류를 흘리고 있는 자는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울부짖는다. 지옥유부에서 일천 마리의 악귀가 한꺼번에 호곡하듯, "흐흐흐! 천림에 숨은 잠룡을 격살시키려 지저사계를 움직여 대륙육합천패를 준동시키고 유령사모를 천림으로 쫓기게 해 천림파멸을 노렸거늘!" 그 악마의 저주음에는 분노가 어려 있었다. 자신에 대한 노화가 솟구치고 있는 것이었다. 지옥천마황(地獄天魔皇)! 지옥의 유부에 숨어 천하를 노리는 자! 아무도 그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황천(皇天)을 먼저 얻어 지옥혈천하의 기반을 닦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한데. 그놈이 활보하고 있다니. 죽이리라!" 휘우우웅! 저 폭풍같이 회오리치는 가공할 살기! 닿는 것만으로도 적의 신경마저 박살낼 정도로 엄청난 살 기가 흘렀다. "힘으로 본 지옥천마혈맥(地獄天魔血脈)을 막을 자는 철혈전신맥뿐이나 그 무적철혈풍은 육합을 제압하느라 사라졌다!" 뭉클… 뭉클…! 피와 죽음의 끔찍한 악마혈기류가 자욱하게 피어 오른다. "남은 것은 하후만상천맥! 그 뿌리만 제거된다면 지옥혈천하는 이룩되리라! 크흐흐…" 우르르! 그 끔찍한 저주살음에 진공의 대기가 몸을 떨었다. 한데, 어느 한 순간, "백색사령(白色邪靈)!" 지옥천마황의 입에서 한 소리 폭갈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스르르…! 암흑의 일갈을 무너뜨리며 한 무더기의 백무(白霧)가 아지랑이처럼 피어 올랐다. 스스스…! 그것은 이내 인간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백색인간! 머리결과 피부, 눈썹과 손톱, 그리고, 눈마저도 새하얗다. 공포마저 느껴야 하는 전율적인 사기(邪氣)를 내뿜으며 한 명의 백색인간이 유령처럼 출현한 것이었다. 나이조차 짐작할 수 없는 밀랍인형처럼 으스스한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백색인간! "삼가 백색사령이 존황 각하의 하명을 기다리오이다!" 부르르…! 그 공포적인 사령기를 내재한 백색인간, 그도 저 암흑 속에 부유하는 지옥천마황 앞에서는 떨고 있었다. "가랏! 가서 놈을 죽여라! 하후만상천맥의 뿌리를 잘라라!" 순간, "존명!" 스스스…! 다시금 백색사령은 안개로 화해 어둠으로 녹아 들어갔다. 유령과도 같이… 살인명령(殺人命令)! 그것은 떨어지고야 말았다. 백색의 공포자--백색사령! 과연 그가 죽일 척살대상자는? 이곳은 지옥의 마계였다. <지옥마계(地獄魔界)> 하후미린, 그는 인적없는 황야를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휘이잉! 썰렁한 야풍에 갈대가 숨을 죽인다. "후후! 금황신후라 했는가?" 하후미린은 소매에서 황금빛의 조그만 비파를 꺼내 쥐며 미소지었다. 허나, 그것은 차라리 씁쓸한 자조의 고소였다. "황금으로 하늘을 움직일 수 있고 내게 힘을 줄 수 있다면 벌써 이루었을 것이다!" 하후미린은 황금슬을 도로 집어 넣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데, 어느 한 순간, 그는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다!) 강렬한 살기! 그것을 느낌과 동시에 하후미린의 뇌리는 쾌속하게 회전했다. (나의 목숨을 끊으려는 자는 스스로 하늘이라 생각하는 자뿐이다! 그렇다면?) 그의 눈가로 서늘한 이채가 스쳐 갔다. (후후! 목숨을 건 도박. 하늘이 되려는 자 중에서 내게 힘을 줄 수 있는 자가 있어야 했거늘. 오직 파멸만을 원하는 지옥천이 먼저 왔군!) 빙그레… 싱그러운 미소가 흐른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받아 들여야겠지! 원추는 다만 날 뿐이나 썩은 쥐를 움켜쥔 자오는 그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니…) 하후미린은 공허한 시선을 들어 맑은 창공을 올려다 보았다. "나는 갈 뿐이라네." 그는 잔잔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일 마장 앞, 돌연, 스스스…!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듯 한 무더기의 백무가 떠올랐다. 그것은 이내 한 명의 백색인간으로 뭉쳐지고 있었다. 백색사령! 백색의 공포자! 지옥의 유계에서 척살명령을 하달받고 올라온 죽음의 사형집행인! 바로 그였다. 한데, (…!) 하후미린의 초연한 기운을 본 그의 백색안이 가볍게 일렁였다. (하늘… 이다!) 그의 마음은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하늘을 보지 못한 자는 하늘을 모른다. 백색사령! 그는 지난 일백 년의 시공을 그 자신이 하늘이라 믿는 지옥의 하늘을 보아온 자였다. 그랬기에 그는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는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받들고 있는 그 지옥의 악마천이 진정한 유일천임을. 허나, 그의 눈앞에 있는 저 허허롭기까지 한 하늘, 그것도 또한 하늘이었으니… "하늘이 두 개일 수는 없다!" 백색사령은 새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한 입술을 깨물며 뱉듯이 중얼거렸다. "하후공. 그대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소!" 그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대륙무림의 유일지존이 되실 분을 위해 그대는 죽어야 하오!" 이어, 슥…! 그의 새하얀 백색사수가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퍼억! 둔주한 파육음(破肉音)이 터지며 피가 튀었다. 하후미린의 백의가 삽시간의 피로 물들어 갔다. 뚝…! 뚝…! 백색사령의 백색사수는 어느새 하후미린의 가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그 손을 타고 점점히 시뻘건 선혈이 흘러 내렸다. 허나, 하후미린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백색사령! 원추라는 하늘의 새를 아는가?" 그의 입에서 무심히 흘러 나오는 말, 부르르…! 백색사령의 백미가 격렬하게 떨렸다. "대륙무림 따위는 내겐 썩은 쥐일 뿐이거늘…" 푸들… 푸들… 하후미린은 그렇게 웃으며 서서히 쓰러져 갔다. 그리고, 쿠웅! 그는 그대로 둔중한 소리와 함께 갈대 숲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죽은 것이었다. 백색사령! 그 자의 전신은 오한이 들린 듯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썩은 쥐를 지키려 하늘을 죽였도다!" 그자의 입에서는 회한의 떨리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대성인이시여!" 이어, 쿵! 그는 무릎을 꿇으며 오열했다. 주르르…! 새하얀 백안을 찢으며 흐르는 붉은 혈루(血淚)! 그는 그제서야 느낄 수 있었다. 어느 것이 진정한 하늘인가를… 진정한 하늘의 도를… 그가 그것을 느낀 이유 중 허나는 하후미린의 우측 손가락에 끼인 유리반지 때문이기도 했다. "유리천사환(琉璃天邪環)을 지니시고서도 목숨을 버리시다니…" 유리천사환! 그것이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인들을 무릎 꿇릴 수 있는 사도지존의 신물! 백색사령! 그도 사계(邪界)의 인물이었다. 허나, 그는 하후미린이 자신의 우수를 좌수로 가리고 있었기에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죽으면서 남긴 말을 되새기며 그 투명한 유리반지를 보면서 모든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 얼마의 시각이 흘렀을가? 문득, 오열하던 백색사령이 천천히 일어섰다. 츠으으…! 그의 백색사안으로는 어떤 결심의 빛이 서리고 있었다. "유령사모. 천년사황녀께서 생존해 계시다면 이 분 하후공의 보살핌을 받으셨으리라! 유령사모님을 찾아 죽음으로 사죄하리라! 아울러. 전설에 묻힌 일천사령전사군(一千邪靈戰士軍)을 찾아 복수하리라!" 으드득…! 그는 이를 갈며 맹세하고 있었다. 이어, 그는 처연한 신색으로 신형을 돌렸다. "무덤(塚)은 필요치 않으오리다! 천지(天地)가 관(棺)이고, 해와 달이 보석이 될 것이고, 별들이 진주가 되어 하후공의 매장품이 될 것이오이다!" 그리고, 스르르…! 아침 안개가 바람에 흩날리듯 백색사령은 사라져 갔다. 하후미린! 하늘이었으되, 그 하늘을 움직일 힘이 없었던 대철인! 나라는 있으되, 신민을 부릴 수 없는 천자와도 같았던 인물! 스스로를 하늘로 자처했던 그였기에 그는 하늘의 뜻에 따라 저 무궁한 대자연의 품으로 안겨든 것이었다. 휘이익! 무심한 밤바람(夜風)이 구슬피 울었다. 화르르…! 갈대는 하늘의 죽음을 애도하듯 머리를 산발하며 흐느낀다. 노을, 핏빛 노을이 황야를 뒤덮었다. 석양의 그윽한 노을은 포근하기조차 했다. 스스슥… 황야의 일각이 갈라지며 한줄기 회영(灰影)이 나타났다. 한데, 회영은 그대로 흔들리는 갈대잎을 가볍게 밟으며 허공을 내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미타불. 일각 이상 지체했으니 공령천신 궁노시주가 심통을 부리리라!" 회영, 그는 회색의 가사를 입은 노승이었다. 생불(生佛)을 보듯 자비로운 불안(佛眼)을 지닌 노승, 귀 밑까지 이어진 백미와 가슴까지 드리워진 탐스런 백염을 흩날리며 노승은 조급히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그 노승의 기도는 사위를 모조리 끌어들일 듯 광휘로왔다. 한데 문득, 인자하기 그지없는 노승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아미타불! 이 황야에 웬 서기가?" 일순, 스스스! 회의노승의 두 눈에서 신비롭고도 맑은 안광이 쏟아져 전면을 주시했다. 황야에 깔린 갈대밭의 중앙, 보라! 그곳에선 범상치 않은 서기가 피어 오르고 있지 않은가? "궁노시주와 약속이 급하기는 하지만 아니 관여할 수가 없겠도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피잉… 그는 전광과도 가이 허공을 갈랐다. 경악실색할 경공이었다. 그의 빠름은 가히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현세(現世)에서 두 번 다시 보기 힘들 정도로 가공할 빠르기의 경공술을 펼치는 이 노승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미타불… 시신이!" 회의노승은 황망히 불호를 외우며 내려섰다. 슷…! 그가 내려선 갈대밭에는 피로 물든 한 구의 시신이 누워 있었다. 이미, 시신은 사신(死神)의 그림자가 덮인 듯 밀랍같이 창백해진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후미린의 얼굴이었다. 회의노승은 시신 앞에 서자 일단 그의 가슴에 주름진 손을 갖다 대었다. 다음 순간, 백미로 덮인 노승의 눈에서 담담한 미소가 흘렀다. "아미타불! 불존의 은혜로다! 살수자의 손길이 심장에서 반치가 빗겨났도다!" 이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하후미린은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하늘의 도리에 운명을 맡겨 버린 풍운아! 하후미린은 아직 그 명맥(命脈)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하후미린의 손가락에 끼인 유리천사환에 있었다. 백색사령은 하후미린의 가슴을 강타하며 그것을 보았고, 그 엄청난 충격에 그의 손길이 약간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하후미린의 상세를 살필 경황도 없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이곳을 떠난 것이었다. 허나, 누가 보기에도 하후미린의 상태는 사자의 얼굴이었다. 이윽고, 스--윽! 회의노승은 하후미린을 안아 들며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약속이 중하기는 허나… 어찌 죽어가는 생명을 외면하겠는가?" 슷…! 그는 회색의 구름과도 같이 떠올라 부드럽게 대기를 헤치며 허공을 날았다. 다 쓰러져 가는 황폐한 폐사였다. 이미, 오래 전에 인적이 끊긴 듯 절의 주위는 황량했다. 부숴질 듯 야풍에 흔들리는 현판, 오랜 풍상에 지워진 듯, 단청이 벗겨져 흔들리는 현판엔 세 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보타암(菩陀庵)> 그렇게 새겨진 섬세한 필체의 현판이 보였다. 비록, 지금은 을씨년스런 폐사(閉寺)로 변모되었으나 아득한 과거에는 대륙천하에서 가장 성명 높던 사찰 중의 허나인 곳이었다. 유령천사종(幽靈天邪宗)! 그렇게 불리운 대혈마가 있었다. 삼천 년 전. 일명(一名), 유령대법난(幽靈大法亂)을 일으켰던 절대의 혈사왕(血邪王)! 사도무림의 대조종! 그는 부처(佛)만 보면 발작을 하는 괴이한 성품을 지닌 자였다. 결국, 대륙에 산재한 일천불문(一千佛門)의 대웅보전에 안치된 불상 일천 개가 박살나 버렸다. 대륙불계는 노하여 유령천사종을 아수라로 부르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당연히 격돌했다. 당시, 대륙불계의 암중에서 최고의 성불로 추앙받고 있는 비구니가 있었다. 보타성니(菩陀聖尼)! 달마선사가 천축에서 대륙으로 오기 전, 그녀는 대륙불계의 대종정(大宗正)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결국, 보타성니는 백팔보타성니군(百八菩陀聖尼軍)을 이끌고 유령천사종에 맞섰다. 유령천사종! 그의 사술(邪術)은 단순한 사술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강했다. 결국, 대성불기(大聖佛氣)는 유령천사혈기(幽靈天邪血氣)와의 대결을 공사공패(共死共敗)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후, 대소림이라는 광명의 성휘 속에 보타암은 잊혀져 가야만 했다. 그렇게 삼천 년의 시공이 말없이 흘렀다. 그동안 보타암은 을씨년스런 폐사로 변모해 버린 것이었다. 문득, 스스스…! 보타암의 앞으로 허나의 회영이 떨어져 내렸다. 그의 팔에 늘어져 있는 시체 같은 하후미린의 얼굴이 보였다. 회의가사를 걸친 신비노승은 주저없이 보타암으로 들어섰다. 좌우를 둘러보는 그의 노안에는 안타까움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아미타불! 보타암. 천 년 전 유령천사종의 법란을 다스린 보타암이건만 풍상에 물려 이렇게 버려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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