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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일기 -2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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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소에 가보니 홀로 밤을 지새웠는지 얼굴에 피곤이 가득한 우나댁과 아직도 정신이 반쯤 나간 할머니가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한숨을 쉬고 식당으로 가보니 태봉이가 몇몇 분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

“어! 이장 왔어.
자~ 이리 앉아.”

재훈형님이 옆자리를 내주며 앉으라고 한다.
자리에 앉아 살펴보니 연배가 비슷한 구씨아저씨와 재훈형님, 그리고 태봉이가 한자리에 앉아 추후절차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청년회장에게 들었네.
수고 많았어.”

“별거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납골당은 정하셨어요?”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논의 중이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군.”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재훈형님은 태봉의 눈치를 보더니 짧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리고, 구씨아저씨가 대신 입을 열었다.

“할머니께서 묘도 써드리지 못해 죄송하니 절에 묘시고 49재라도 지냈으면 하세요.
하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고 평소 할아버지가 물을 좋아하셨으니 강에 뿌려 드렸으면 좋겠다는 것이 태봉이 생각입니다.”

“고인께서 특별히 유언을 남기신 것도 없으니 할머니 뜻에 따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나도 해드리고 싶어.
그런데........빌어먹을........돈이 웬수지.”

태봉이가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내뱉더니 술을 입에 털어 넣는다.

“부의금 들어온 것으로 부족합니까?”

“아직 개봉하진 않았지만 손님이라고 해봐야 마을 분들뿐이라 많지는 않을 겁니다.”

구씨아저씨가 침울한 표정으로 태봉이 대신 대답한다.

“그렇다고 할머니 뜻을 거역할 수도 없고.......”

“그래서 우리도 고민하고 있는데 마땅한 해결책이 없네.”

재훈형님의 말에 가슴이 답답하여 술을 마시고 길게 한숨을 쉰다.
이놈의 세상! 돈이 무엇이건데, 가시는 길까지 편히 모시지 못한단 말인가? 슬픔에 젖은 우나댁과 멍하니 앉아계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돈이란 없다가도 있고, 없다가도 있는 것인데, 기껏 그런 돈 때문에 할머니 가슴에 못을 박을 수야 없지 않는가?

“이렇게 하죠.
할머니 뜻대로 49재를 지내기로 해요.
대신 부의금을 개봉해 보고 부족한 돈은 제가 빌려드리겠습니다.”

“아니! 방금 뭐라고 했나.
이장이 부족한 돈을 대겠다는 건가?”

“그냥 드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빌려드리는 겁니다.”

“태봉이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재훈형님이 태봉을 보고 물어보고, 태봉은 마른 침을 삼키더니 고맙다고 한다.
사실 태봉이만 보았다면 절대 돈 같은 것은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우나댁과 할머니가 불쌍하고 애처로워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이야기를 끝나고, 근교에 있는 절을 물색했다.
다행이 할머니께서 다니시는 절에서 맡아주시기로 하였고, 장례식장 직원이 내려와 화장터 예약도 끝났다는 말을 전했다.

밤이 깊은 시간, 술을 많이 마셔서 장례식장 밖 공터 벤치에 않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라 장례식장 입구에도 인적이 끊어졌는데,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이 주변을 둘려보다가 벤치로 다가온다.
여인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불빛이 희미하여 누군지 알 수 없다.
구름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민 달빛에 박속처럼 하얀 얼굴과 은갈색 머리까락이 먼저 눈에 띄고, 우수에 젖은 파란 눈동자와 오뚝한 콧날이 보인다.
빈소를 지키던 우나댁이 잠깐 나온 모양이다.
우나댁이 옆자리에 앉더니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
참 맑다.”

“..........”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겁니까?”

“들었어.
은혜.
잊지 않을게.”

“은혜도 아니고, 고마울 것도 없어요.
제가 빌려드린다고 했지.
언제 그냥 주겠다고 했나요.
그리고 저번에 기억 안 나요.
남편이 못 갚으면 우나댁에게 받아낼 겁니다.”

“돈 없어.”

“그럼 몸으로 때워야죠.”

우나댁이 고개를 내려 바라보디니 피식 웃는다.

“한번에 10만원.”

“너무 저렴한가? 이번 기회에 올려드릴까요?”

“됐어.
바람.
시원하다.”

우나댁이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데 검은 소복 때문인지 몰라도 청초한 아름다움에 욱하는 충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때가 때인지라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진정한 다음 담배를 다시 물었다.
우나댁은 팔을 좌우로 벌리며 숨을 깊이 들이마시더니 얇은 미소를 머금고 바라본다.

“들어갈게.
이장도 빨리 들어와~”

“그래요.
이것만 피우고 들어갈게요.”

우나댁이 빈소로 향하는데, 그녀의 뒷모습이 고독하고 쓸쓸해 보인다.
아침이 되자 고인의 관을 마을 청년회 분들이 운구차에 옮기고, 사람들이 버스에 오르자 화장터로 출발했다.
화장이 끝나자, 미리 예약한 절로 향해 모시니 모든 절차가 마무리 되었다.
태봉이를 비롯한 마을 분들과 다시 장례식장에 모여 조의함을 개봉해서 계산해 보니 역시 예상대로 2백여만 원정도가 부족했다.
태봉에게 확인증을 받고, 부족한 경비는 장례식장에 직접 온라인 입금을 시켜주기로 했다.

모든 일을 마치고 펜션에 돌아오니 저녁 10시가 넘어 피곤하지만 쉽사리 잠이 오질 않고, 맥주를 마시며, 혼자 청승을 떨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오지만 지나간 과거들이 흑백필름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한번쯤 뒤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침이 되자 어김없이 연변댁이 왔고, 식사를 하는 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주남마을 이장님 되시죠.
여긴 군수님 비서실입니다.”

젊은 아가씨 목소리다.
저번 군수실에 갔을 때, 잠깐 만났던 비서인 모양이다.

“예! 말씀하세요.”

“오늘 군수님께서 도지사님을 만나 뵙기로 했습니다.
혹시 이장님.
시간 되시면 함께 갔으면 하십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사업계획 때문인가요?”

“예! 맞습니다.
오늘 군수님께서 직접 도지사님께 브리핑을 하시기로 하셨습니다.”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됩니까?”

“1시까지 군청으로 오시면, 저희들이 군수님과 함께 도청까지 모시겠습니다.”

“제가 준비할 거라도 있습니까?”

“특별히 준비하실 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1시까지 군청으로 가겠습니다.”

군청을 다녀온 지 3일 만에 군수가 직접 도지사에게 브리핑 약속을 잡았다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연변댁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아직 시간이 이기에 버섯농장으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반가운 클래식 음악과 함께 타이트한 반지와 탱크탑을 걸칠 우나댁이 버섯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어떻게 벌써 나왔어요.
피곤하신데 며칠 쉬지 그랬어요.”

우나댁은 가볍기 고개를 흔들며 다가왔다.

“여기가 더 편해.”

“할머니는 괜찮으세요?”

“아직 정신 없어.”

“남편은요?”

“몰라.
아침에 나갔어.”

“남편이 그렇게 싫어요.
왜 무관심으로 일관하시는 거죠?”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아내가 지금의 우내댁과 같은 느낌을 아닐까하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심정으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모르겠다.
우나댁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그녀에게 남편이란 존재는 무엇일까?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국제결혼이라는 것이 사랑보다는 브로커들의 상술과 우리나라 남성들의 절박함 또는 판타지에 좌우되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 합의된 모순물이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다.
그녀도 무턱대고 판타지만을 쫒아 오진 않았을 것이며, 태봉이도 처음부터 지금처럼 살려고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두 남녀의 가슴에 이다지도 깊은 상체기를 남겼단 말인가? 남과 여의 만남은 자연의 섭리이고, 어찌 보면 신이 선물한 의무이며 권한이다.
그런데 인간이란 동물은 사랑이란 고귀함 보다는 탐욕에 눈이 멀어 사람과 사랑을 상품으로 취급하고, 그 상품이 된 인간 또한 자신의 상품가치를 이용하여 무언가 이득을 얻으려 하였기에 지금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것보다는 사랑은 사랑으로써 순수함을 지켜야 하며, 상(商)은 상으로써 그 본분을 다해야 함에도 인간이 사랑(사람)을 사고파는 이놈의 세상이 문제라면 문제가 아닐까?

“그는 나를 보지 않아.
그리고 나도 그를 보지 않아.”

“왜요?”

“왜 물어.
그게 중요해.”

“그럼 우나댁에게 중요한 것은 뭐죠?”

우나댁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바라보다가 뒤돌아선다.

“가! 난 이곳에 있을게.”

“가라고요?”

“그래.
가! 난 여기가 중요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물음인지도 모른다.
힘없이 터벅터벅 걷는다.
과연 난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까? 어쩌면 스스로 조차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닐까? 펜션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오늘 따라 무겁게만 느껴진다.

정장으로 갈아입고 연변댁에게 양해를 구한다음 차를 끌고 군청으로 향했다.
군청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올라가는 길에 비서에게 연락이 왔고, 군수실에서 잠시 담소를 나눈 다음에 도청으로 향했다.
군수와 같은 차를 타고 가는데, 군수는 자신이 준비한 자료를 읽어보며 필요한 부분을 다시 질문한다.
많이 긴장한 모양이다.
도청에 도착하여 도지사 방으로 들어갔다.
군수가 허리를 숙어 인사하자 도지사는 반가운 얼굴로 악수를 청한다.
넓은 원탁에 많은 사람이 자리했고, 군수가 앞에 나서 브리핑을 시작했다.
사업 취지나 지금까지의 경과보고가 넘어가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는데, 우리 마을을 필두로 순차적으로 사업을 확대하겠다고 한다.
먼저 제출했던 사업계획을 토대로 인근 마을까지 사업을 확대하고, 더 나아가 도의 우수 사업으로 키우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발표가 끝나자 60대 초반의 도지사가 박수를 치니, 나머지 사람들도 박수로 회답한다.

“잘 들었습니다.
지역발전을 위한 아주 우수한 모델입니다.”

“감사합니다.”

도지사의 치하에 군수가 밝게 대답한다.
도지사는 사업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주남마을 이장님이라고 하셨죠.”

“예!”

“사업계획은 직접 작성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군수님께서 작성하신 겁니다.”

“제가 듣기로 이장님께서 작성하셨다고 들었는데?”

“그건 아이디어 차원의 초기 계획이었습니다.
그걸 군수님께서 사업의 타당성이나 향후 발전계획까지 체계적으로 다시 작성하신 겁니다.”

“오~ 그래요.
하여튼 우리 정군수 일처리 하나는 똑 부러진다니까?”

도지사의 친찬에 군수는 상기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인다.

“잘 들었습니다.
아주 좋은 계획입니다.
특히 이렇게 민관이 함께 노력하는 모습 아주 인상 깊었어요.
저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브리핑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도지사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는 길에 군수가 식사를 하자고 한다.
아직 시간이 이르지만 흔쾌히 응하니 차는 한적한 산길을 올라 고즈넉한 한옥집 앞에 멈추었다.

“제가 가끔 찾는 한식집인데, 음식도 맛깔스럽고 분위기도 좋습니다.”

“좋군요.
앞장서시죠.”

“차비서.
예약한 방이 어디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군청에서부터 군수를 수행한 비서가 앞장서고, 군수와 함께 뒤를 따르니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40대 중반의 여인이 일행을 마중 나왔다.

“어머나~ 우리 정군수님 오셨네.”

“오실장님은 어떻게 볼 때마다 예뻐지는 것 같아.”

“호호호~ 군수님의 과찬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자~ 이쪽으로 드시죠.”

오실장은 일행을 ‘추(秋)’라는 명패가 붙은 방으로 안내했고, 군수가 상석에 앉고, 내가 바로 앞자리에 착석했다.
오실장은 군수의 옆에 앉아 메뉴판을 내밀었다.

“전~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차비서도 앉아요.
이장님! 차비서가 계획서를 꼼꼼하게 검토, 보완해주어 오늘 성공적으로 브리핑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 그렀습니까?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차비서는 잠시 망설이더니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타이트한 감청색 투피스 정장을 입고 있는데, 상의는 V자로 깊이 파이고 밑에 달린 단추가 허리를 조여, 가슴이 유난히 강조된 블라우스와 무릎에서 살짝 올라간 치마를 입고 있었다.
다리를 한 대 모아 한쪽으로 눕히고 자리에 앉았는데, 안 그래도 짧은 치마가 허벅지까지 올라간다.
그녀는 흘려 내린 안경을 살짝 올리고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리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앉는다.

“오늘 이장님께서 말씀을 잘해주신 덕분에 제가 다 우쭐해 졌습니다.”

“제가 뭐 한 게 있습니까? 모두 군수님의 공이죠.”

“이장님께서 초기 계획서를 워낙 잘 만들어 주셨고, 또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차비서가 정말 열심히 보완해 준 덕분이지 어디 제 공이라고 할 수 있나요.”

“아무리 계획서를 잘 만들어도 보고를 못하면 모두 헛방이죠.
그런 점에서 보면 군수님의 공이 제일 큽니다.”

“하하하~ 이장님께는 못 당하겠군요.
하여튼 잘 끝나서 다행입니다.
마침 음식들이 나오네요.”

문이 열리며 음식들이 준비되자 오실장이 다시 군수의 옆에 앉아 술병을 내밀었다.

“군수님 받으시죠.”

“오늘 주인공은 이장님이죠.
이장님께서 먼저 따라드려요.”

“알겠습니다.”

오실장이 술을 내밀어 잔을 받으니, 군수와 차비서에게도 술을 따라준다.

“좋은 시간 되세요.”

오실장이 물려가자 모두 건배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이장님! 부인되시는 분도 공무원이시죠?”

“예!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주남마을에 귀농하신지는 2년 조금 넘으셨고, 그전에는 IT회사 팀장으로 근무하셨죠.”

“맞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법인을 만들게 되면 대표를 맡아주셔야 하는데, 그것 때문에 조사를 좀 했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에게 법인 대표를 맡기시겠다는 겁니까? 저보다는 군수님께서 맡아주시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요?”

“녹을 먹는 놈이 맡을 자리가 아닙니다.
또 저야 군청업무에 충실해야죠.”

“그럼! 군수님께서 명망(名望) 높은 분으로 추천해 주십시오.”

“이번 일은 군민들이 얼마나 협동 단결하여 노력하느냐가 성공의 열쇠입니다.
그런데 외부인이 와서 떠든다고 듣기나 하겠습니까? 이장님께서는 이미 농촌 체험 프로그램을 성공리에 정착시키셨고, 주민들의 신망도 두텁다고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번 사업계획을 기획한 분도 이장님인데, 이장님이 아니면 누가 적임자란 말입니까?”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우리 마을만의 사업이라면 어떻게 되든 해보겠지만, 인근마을까지 책임진다는 건 솔직히 부담도 되고 자신도 없습니다.”

“왜 갑자기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우리 주남마을 일만으로도 벅찬 놈입니다.”

“제가 뒤에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안 되겠습니까?”

“이번 계획을 잘 보면 법인은 하나지만 각 마을마다 일정지분을 가지고 운영되는 협동조합의 개념이 강합니다.
우리 주남마을만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하지만 법인 대표는 자신 없습니다.”

군수는 술을 조금 마시더니 씁쓸하게 웃으며 차비서를 바라본다.

“자네 말대로군.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나?”

차비서는 지금까지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군수의 말에 차비서가 술병을 내밀었다.

“제가 한잔 따라드리게요.”

조금은 차가운 말투와 표정에 정은 안가지만 주는 잔을 마다할 입장은 아니라서 잔을 받았다.

“경미언니는 요즘 잘 지내요?”

“예? 제 와이프를 아세요?”

“보수교육 받을 때, 연수원에서 만났어요.
우연히 같은 방을 쓰게 되어 친해진 다음 요즘도 가끔 통화하는 사이죠.”

“세상 참 좁네요.”

“그러게요.
저도 조사하다가 이장님께서 경미언니 남편이란 사실을 알고 조금 놀랬어요.”

“저는 차비서님에 대해 처음 들었는데, 언제 만나신 거예요?”

“올 봄에 만났으니 한 8개월 정도 됐네요.”

“그래요.”

“그때 경미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장님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어요.”

“와이프가 뭐라고 하던가요?”

“꿈도 없고, 야망도 없고, 힘든 일은 무조건 피하고 보는 비겁한 패배주의자라고 하더군요.”

“정말 우리 와이프가 그렇게 말했어요?”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요약해 보면 방금 말씀드린 그대로죠.”

피도 눈물도 없는 약육강식(弱肉强食)과 같은 직장과 삭막한 도시 생활을 피해 귀농을 선택했으니 꿈과 야망이 없다는 말은 인정하겠다.
하지만 비겁한 패배주의자라니? 무엇이 비겁하단 말인가? 도시생활을 포기한 것이 비겁한 것인가? 패배주의자는 또 뭔가? 경쟁이 싫어 도망친 것이 패배주의자란 말인가?

“말이라는 것이 ‘어’ 다르고 ‘아’ 다른 건데, 말씀이 좀 지나치군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전 단지 그때 느낌을 그대로 전해드린 겁니다.
하지만 저는 경미언니의 말에 동의할 수 없어요.
제가 살펴본 이장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셨거든요.
만일 그런 분이었다면 마을공동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시거나 이번에 기획하신 사업계획 같은 것은 나올 수가 없었겠죠.”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하시는데, 요점만 말씀하세요.”

“지금까지 잘 해오셨잖아요.
인근마을로 확대하는 것은 차후문제입니다.
당장 주남마을부터 성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근마을로 전파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남마을의 성공을 위해서는 이장님 외에 대안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보고 맡으라는 말씀인가요.”

“예! 이장님 뒤에는 군수님이 계십니다.
또한 저도 미약한 힘이나마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끝까지 거부하면 비겁한 패배주의자가 되는 건가요?”

“전 동의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재주를 가지셨군요.
좋습니다.
하죠.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언제라도 적임자가 나타나면 바로 그만두겠습니다.”

“그건 차후 구성되는 법인관계자들이 결정하겠죠.”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네.
군수님! 비서하나는 똑 부러지는 분을 두셨습니다.”

“하하하~ 이제 이야기 끝났죠.
차비서 수고 많았어요.
자~ 우리들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건배합시다.
건배.”

술맛이 쓰다.
감투를 좋아하는 놈도 아니고, 좀 편안하게 살자고 귀농했는데, 여기서도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식사가 끝나고 군청으로 향했다.
차를 군청에 두고 왔기 때문이다.
군수에게 인사하고 가려는데 차비서가 부른다.

“무슨 일이죠.”

“아직 술 안 깨셨죠.
지금 가시면 음주운전이에요.”

“그런가? 많이 마시진 않았는데?”

“혹시 모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시간도 때울 겸, 저랑 차 한 잔 하시겠어요?”

“미인의 청을 거절하면 벼락 맞겠죠?”

“호호호~ 가요.
저기 괜찮은 커피숍 있어요.”

차비서와 군청 앞에 있는 건물로 향했다.
커피숍은 2층에 있었고, 전망 좋은 창가에 앉아 커피대신 주스를 주문했다.
차비서는 역시나 차갑고 도도한 표정으로 주스를 한 모금 빨아 마신다.

“아직 정식으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차연선입니다.
아시겠지만 군수님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어요.”

“저에 대해선 직접 조사하신 것 같으니 따로 설명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뭐죠?”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경미언니를 통해 이장님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요.
그런데 군청장님 실에서 이장님을 처음 뵙고, 제가 상상했던 이미지랑 많이 달라서 약간 놀랐어요.”

“와이프가 나쁜 이야기만 한 모양이죠?”

“그건 아니고 푸념이라고 해야 하나? 처음 경미언니와 한방을 쓰게 되고 서로에 대해 소개하는데, 제가 00군청에 근무하고 있다고 하니, 언니가 남편이 주남마을 이장인데 혹시 아느냐고 물어보더군요.
대충 들었다고 말씀드렸죠.
주남마을도 우리 군에 속해 있는데, 모른다고 하기 민망하더군요.
경미언니가 다시 이장님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보시는데, 제가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아주 열심히 하시는 분이라고 대충 둘려댔죠.
그때부터 경미언니가 이장님에 대해 푸념을 하기 시작했어요.
오랜 기간 떨어져 살다보니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죠.”

“그럴 수도 있겠네요.
뭐 사실 따지고 보면 가족들까지 팽개치고 혼자서 귀농했으니 불만이 없으면 이상하죠.”

“방금 말씀하신 부분이 가장 큰 이유지만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던데요?”

“또 뭐가 불만이라고 하던가요?”

“제3자인 제가 말씀드리는 것보다는 이장님께서 직접 여쭈어 보세요.”

“말씀도 안 해주실 거면서 이야기는 뭐하려 꺼냈어요.
그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 하려면 그만 합시다.”

“지금 화내시는 거예요.
전 이장님을 위해 말씀드린 건데.........”

“듣기 좋은 말도 자꾸 들으면 짜증나는 법인데, 거북한 말씀만 계속 하시니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더구나 개인적인 문제들 아닙니까?”

자꾸만 아내 이야기를 하니 짜증이 밀려온다.
애써 잊으려하는 그놈과의 일이 생각나서 더 짜증이 났는지 모르겠다.
차비서는 목이 마른지 주스를 조금 마시고, 안경을 고쳐 쓰고 날카로운 눈매로 바라본다.

“이장님! 경미언니 사랑하세요?”

“예? 사랑!.......사랑하니까 결혼했죠.
당연한 걸 왜 물어봐요?”

“지금도 사랑하시냐고 묻는 거예요.”

“차연선씨라고 했죠.
혹시 결혼하셨어요?”

“결혼 5년차에요.”

“연선씨는 남편 되시는 분 사랑하세요?”

“당연하죠.”

“연애하실 때 감정과 똑 같나요?”

“...........!!!”

“쉽게 대답하기 힘들죠.
저도 그래요.”

“지금 말씀대로라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답변과 별반 다르지 않네요.”

“정(精), 존중(尊重), 신의(信義)........꼭 사랑이라는 단어 외에도 부부관계를 더 현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은 많습니다.”

“존중.
신의.”

연선은 중존과 신의라는 말을 혼자서 되뇌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장님은 경미언니를 믿으세요.
언니를 신뢰하세요?”

“믿죠.
아니 믿으려 노력하죠.”

“만일 그 신뢰가 깨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정(精)이 결정하겠죠.
정(精)까지 떨어질 정도면 돌이킬 수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용서(容恕)라는 단어가 등장하겠죠.”

“용서가 안 되면 끝이라는 말씀이군요?”

“그건 저 뿐만 아니라 와이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래요.
아무리 부부라도 관용(寬容)까지 기대하긴 어렵겠죠.”

“맞아요.
용서는 평등관계지만 관용은 상하의 의미가 강하죠.
부부가 상하관계일 수는 없잖아요?”

“말씀 잘 들었어요.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죠.
그나저나 다음 주부터 무척 바빠지실 겁니다.”

“왜요?”

“우리 군수님, 다른 건 몰라도 추진력하나는 알아주는 분이세요.
아마 다음 주에 지원 결정되고, 바로 법인 설립에 착수하실 겁니다.
그럼 이장님께서 법인 대표를 맞아주시기로 하셨으니 당연히 이장님도 바빠지시겠죠.”

“그렇게 빨리요.
아직 준비할 것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법인은 영리법인입니다.
조합 형태의 비영리법인을 설립할 수도 있지만 공동판매, 이익분배 등 영리사업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영리법인으로 가야 합니다.
영리법인에도 종류가 많죠.
주식회사, 유한회사, 합명회사, 합자회사가 있는데 우린 주식회사로 갈 겁니다.
주식회사를 설립하려면 우선 발기인을 모집해야 하지만 1인이라도 가능하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잠시만........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으니 따로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주식회사를 설립한다 해도 상호, 발행주식, 1주당 금액, 본점소재지, 정관 등등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데, 당장 다음 주부터 시작하긴 무리가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행정적인 절차는 저에게 맡겨주세요.
대신 이장님께서는 군민설득과 발기인을 모집해 주시면 됩니다.”

“자본금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주식배정은요? 청약자 모집은 또 어떻게 하실 거죠.”

“처음부터 거창하게 벌릴 생각은 없으니 자본금은 이장님께서 작성하신 계획서대로 주남마을 발전기금과 도청 지원금을 기본으로 하고 발기인이 모집되면 그분들께서 납입하신 금액을 합치면 됩니다.
주식배정과 가격은 지원금이 얼마나 나오는지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번갯불에 콩 볶아먹는 것도 아니고, 하여튼 좋습니다.
저는 주민설득과 발기인만 모집하면 되는 거죠.”

“우선 그게 급해요.
나머지 일은 진행상황을 보며 조절하면 될 것 같아요.
아참~ 그리고 모집이 모두 끝나면 저에게 연락 주세요.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바쁘신데 굳이 연선씨에게 수고를 끼칠 수는 없죠.
준비되면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모처럼 답답한 사무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인데, 저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시죠.”

“그렇게 하죠.
연선씨 집은 어디세요.
가까우면 모셔다 드릴게요.”

“저도 차 있어요.”

“그래요.”

차비서와 주차장에서 인사하고 펜션으로 돌아오니 7시가 넘어 연변댁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우나댁 집안 초상과 군청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 아내에게 전화도 못했다.
전화벨이 울리고 잠시 후에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당신이야.
한 며칠 뜸하다가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부셨나?”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아직도 여전히 바쁘지만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어.”

“다행이네.
지금은 어디야?”

“집이야.
왜 영이 바뀌죠?”

“시간도 늦었는데 됐어.
다른 건 아니고, 당신 혹시 차연선이라고 알아.
우리 군청 비서실에 근무하는 친군데?”

“어~ 당신이 연선을 어떻게 알아?”

“군청에 도움을 받을 일이 있어서 갔는데, 아는 척을 하더라고, 당신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다나?”

“그래서?”

“뭐~ 그냥 그러냐고, 다음에 또 보자고 간단하게 인사만하고 왔지.”

“당신 또 군청에 갈이 있어!”

“많지, 요즘에 공동 판매를 위한 법인을 하나 만들고 있는데, 군청과 함께 추진하고 있거든!”

“그럼 연선이랑 또 만나는 거야?”

“군수가 이번 일을 연선씨에게 맡겼으니 자주 만나게 되겠지.”

아내는 잠시 말이 없는데, 숨소리가 평소와 다르다.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연선이가 황당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
그거 여자들끼리 수다 떨면서 생각 없이 이야기 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뭐~ 당신이 나에 대해 이야기라도 했어?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그래?”

“술 마시고 분위기에 휩쓸려서 생각 없이 떠든 이야기라니까? 그리고 그 연선이 계집애 질이 안 좋아.
웬만하면 만나지 마.”

“좀 차갑게 보이기는 하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안 턴데?”

“당신이 몰라서 그래.
생긴 거하고 다르게 뒤에서 호박씨 까는 계집애라니까?”

“알았어.
업무적으로야 또 만날 일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만나기야 하겠어?”

“그 계집애가 꼬리 쳐도 절대 넘어가면 안 돼.
당신 그럴 수 있지.”

“참~ 연선씨가 뭐가 아쉬워서 나한테 꼬리를 치겠어.
걱정 붙들어 매시게나.”

“농담 아니야.
약속해.”

“알았어.
알았어.
약속할게.”

“약속한 거야.
반드시 지켜야 해”

“알았다니까”

“그래.
당신 믿어.
늦었는데 빨리 자.”

“당신도 잘 자.”

아내의 반응이 이상하다.
평소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도 잘 하지 않는 사람인데, 차연선에 대해서 험담을 넘어 악담을 한다.
단순하게 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아 그게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연선을 못 만나게 한다고 보기에는 그 정도가 심하다.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기에 그녀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아내는 연선이 꼬리를 쳐도 넘어가지 말라고 했다.
무언가 알고 있기에 그런 극단적인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단순히 그녀와 만나는 것이 두려워 모함한다고 보기에는 너무 심하지 않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연선의 반응도 이상하다.
연선은 와이프가 자길 버리고 귀농한 것 외에 다른 불만이 있다고 했다.
또한 와이프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봤다.
와이프를 신뢰하느냐고 물어봤다.
아무리 오지랖이 넓다 해도 처음만난 것이나 마찬가진데, 애민한 개인문제를 질문하는 것은 이상하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두 사람 모두 다른 사람에게 밝혀지면 곤란한 비밀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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