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그림자 -28부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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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그림자 -2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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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마음에 약속 시간보다 삼십분이나 먼저 자리에 나온 경자가 아침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며 상념에 젖어 있었고 어제 밤과 아침에 가졌던 격렬한 섹스로 인해 아직도 아랫도리가 뻐근함을 느꼈지만 경자는 그 뻐근한 만큼 자신의 가슴 한 구석이 조금씩 굳어져 옴을 느꼈다.

경자는 다시 한번 아침에 있었던 아들의 행동을 떠올리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따지고 보면 잘못은 자신에게 있었는지 모른다.
아직 젊은 나이이기에 자신이 행하는 일에 어떤 결과가 생길 것이고 그에 따른 처신은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 서툴 수밖에 없는 아들이었기에 자신이 던진 한 마디에 그런 반응을 보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은 하지만 지금 자신의 가슴에 맴도는 서운함과 아쉬움은 감추기가 힘들었다.

- ..... -

커피 한 모금을 마신 경자가 내려놓은 커피 잔을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자는 다시 생각했다.

과연 자신은 아들에게 있어 어떤 존재일까..

아들을 낳아 준 엄마..
아니면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
그도 아니면 아들의 숨겨진 욕망을 아무 죄책감 없이 받아주고 있는 몹쓸 엄마인 동시에 헤픈 여자..

- .... -

경자는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가만히 시선을 창 밖으로 향했다.

처음 아들과 입맞춤을 하던 그 시간부터 아들이 자신의 몸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던 시간을 떠올리며 어쩌면 그 순간 아들은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스스로가 겪어보지 못했던 육체적 갈망에 휩쓸려 자신에게 그런 행동을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 육체적 갈망을 어느 순간 자신이 받아주면서부터 아들은 자신에게 표출했던 잠재된 육체적 욕망을 자신을 향한 어떤 특별한 감정으로 변화시킨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경자는 애써 자신의 생각을 부인하고 싶었다.
그것이 육체적 갈망에서 시작되었든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 시작되었든 간에 현재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의 마음은 사랑이란 감정에 젖어든 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 또한 그런 감정에 의해 아들에게 자신의 육체를 열어주었다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오늘 자신은 수아를 만나 아들에게 스스로가 저지른 잘못을 억지로 떠넘기지 말 것과 더 이상은 아들을 곁에서 자신의 아들을 괴롭히지 말 것을 요구 할 생각이었고 그래야만 자신은 물론 아들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 안녕하세요.. -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경자의 곁으로 수아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자 황급히 시선을 도린 경자가 수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 어서 와요..
앉아요.. -

- ...... -

경자의 말에 수아가 맞은 편 자리에 앉자 아들과의 섹스로 인해 여전히 뻐근하게 느껴지는 아랫도리를 움직인 경자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겠지만 자세를 고쳐 앉는 경자의 모습에서는 수아에게 자신과 아들은 이런 사이임을 내비치는 듯한 도도함 마저 묻어 있는 듯 보여졌다.

- 말 돌리지 않고 그냥 물을게요..
이해하기 바래요.. -

- ...... -

조금은 냉랭하기까지 한 경자의 말에 수아가 고개를 들어 경자를 응시했다.

- 임신을 했다면 지금 몇 개월이나 됐나요.. -

- 오 개월..
정도 됐어요.. -

- 정말 정태의 아이를 가진 거 맞아요.. -

- ...... -

직설적인 경자의 말에 경자를 바라보던 수아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 이런 말해서 미안하지만 난 아가씨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아는 우리 정태는 그렇게 무책임 하지도 않을 뿐 더러 이런 일을 벌일 만큼 대담하지도 못한 아이예요.. -

- ..... -

- 만에 하나 우리 정태가 아가씨를 싫어한다고 해서 우리 정태를 붙잡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거나 또는 우리 정태의 책임이 아닌 일을 우리 정태에게 책임 지우려 한다면 난 그걸 그냥 묵과 할 수 없어요.. -

- ..... -

- 그리고..
아가씨가 임신 오 개월이라면 더더욱 아가씨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정태는 그때부터 쭉 나와 함께 지냈어요..
아가씨를 만날 틈이 없었어요.. -

- ..... -

자신의 말에 아무 반응도 없이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는 수아의 태도에 경자는 순간적으로 작은 적대감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느낌마저 가졌다.

- 정말 우리 정태 아이 맞아요.. -

- 네.. -

짧지만 왠지 단호함이 실려있는 듯한 수아의 대답에 경자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경자의 가슴도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 실례가 되는 말이지만 그냥 물을게요..
이해해 줘요.. -

- ...... -

- 임신을 했다면 언제 우리 아이와... -

경자가 말끝을 흐리자 경자를 바라보던 수아가 고개를 살짝 떨구자 경자는 순간 자신의 물음이 너무 냉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미안해요..
하지만 우리 정태 일이니까..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 그래요..
이해하죠.. -

- 네.. -

고개를 숙인 체 수아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고마워요..
우리 정태하고 언제 관계를 가진 거죠...
좀 전에 내가 말했듯이 지난 몇 개월 동안 우리 정태는 늘 나랑 같이 있었는데.. -

- ....... -

- 수아 양.. -

처음과는 달리 경자의 목소리가 많이 수그러져 있었다.

- 처음에는.. -

수아의 입에서 처음에는 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경자는 가슴이 처렁 내려앉은 것을 느꼈다.
어쩌면 정말로 아들과 수아가 관계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보다는 처음에는 이라는 말이 더욱 경자의 가슴을 내려앉게 했다.
수아의 말대로라면 수아와 아들이 육체 관계를 맺은 게 한번이 아니라는 소리가 되는 것이고 그 말은 곧 수아의 말이 모두 사실임과 동시에 아들이 자신을 속였다는 소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 처음에는 정태가 아파트로 이사 온지 얼마 안되던 때였는데 우연히 술에 취한 정태를 발견했어요..
너무 술에 취해서 어쩔 수가 없어서 여관으로 데려가 눕히고 재우려고 했는데 정태가 술에 취해서 그만... -

- ..... -

경자의 눈이 내려지며 어느새 주먹을 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수아의 말을 돌아보면 아파트로 이사를 해서 얼마 안되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자위 행위를 하던 아들을 발견하곤 너무도 놀란 마음에 아들을 외면했고 그 날 아들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경자는 떠올렸다.
그리고 다음 날 집으로 돌아와 무언가를 감추듯 자신의 말에 대답하는 아들이 모습까지..

경자의 가슴은 터질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쩌면..
어쩌면..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수아는 정말로 아들의 아이를 임신했고 자신은 아들이 처음으로 품었던 여자도 아님은 물론 아들의 유일한 여자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그리고 두 번째는.. -

두 번째라는 말에 경자의 손은 물론 경자의 어깨까지 부들거리며 떨고있었지만 고개를 약간 숙이고 말을 하는 탓에 수아는 경자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 어머니가 외국 여행을 가셨을 때 집으로 돌아가다 우연히 술에 취해 아파트 앞에 쓰러져있는 정태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는데 그때..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나서 지금... -

- ...... -

경자는 절망감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도 정확했다.
처음도 그랬고 두 번째 역시 자신이 병원에 입원을 했던 시기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자를 더욱 절망으로 몰아 넣는 것은 다른 곳도 아닌 아들과 자신의 보금자리인 집에서 아들이 수아와 육체 관계를 맺었다는 게 경자로 하여금 더욱 절망의 늪으로 밀어버리고 있었다.

[ 어떻게..
정태가..
다른 곳도 아닌..
집에서...
어떻게..
정태가.. ]

- ...... -

경자가 절망감에 눈을 감은 체 몸을 떨고 있던 순간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든 수아가 그제야 창백해진 경자의 얼굴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 괘.
괜찮으세요... -

- ...... -

수아의 말에 감았던 눈을 뜨고 수아를 바라보았고 경자의 눈에 한가득 눈물이 고여있음을 발견한 수아가 황급히 경자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 죄송해요..
어머니.. -

- ....... -

-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처음에는 지우려고 병원에도 갔었는데..
지울 수가 없었어요..
뱃속의 아이가 자꾸만 살려달라고 저에게 외치는 것 같아서.. -

- ...... -

점점 더 아득해져 가는 정신을 애써 추스른 경자가 말끝을 흐리는 수아를 바라보며 손에 더욱 힘주어 주먹을 꼭 쥠과 동시에 아랫입술을 이빨로 굳게 물기 시작했다.

경자는 이것이 꿈이라면 어서 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모든 것을 받쳐 믿어왔던 아들에게 끝없는 배신감을 느낌은 물론 그동안 자신의 육체를 끌어안으며 고백했던 아들의 모든 말들이 결국은 육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였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한순간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은 아들에 대한 믿음감을 느끼며 경자가 정신을 다 잡고 수아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 그..
그래서 낳을 건가요.. -

- ...... -

떨리는 경자의 목소리에 잠시 고개를 들어 경자를 바라보던 수아의 고개가 다시 떨궈졌다.

- 그래요.. -

- 네.. -

짧지만 너무도 강력한 수아의 한마디에 경자는 다시 눈을 질끈 내려 감았다 한참 후에 다시 눈을 떴다.

- 만약에 우리 정태가 수아 양을 끝가지 받아들이지 않고 나도 수아 양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해도 그래도 낳을 건가요.. -

- 네.. -

- 수아 양.. -

경자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 이제 정태가 절 받아주고 안 받아 주고는 아무 상관없어요..
아이를 지키고 싶어요..
비록 정태와 관계를 맺어서 가진 아이지만 이제 정태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제 아이예요.. -

- 하지만 수아 양이 그랬잖아요..
정태말고는 아무데도 갈 수가 없다고 그런 정태가 수아 양을 받아주지도 않는데 애를 낳겠다는 말이에요.. -

- 네..
정태말고는 아무데도 갈 수도 갈 생각도 없지만 설사 정태가 끝까지 절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낳아서 키울 거예요.. -

- 수아 양..
이건 정태나 수아 양이나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에요..
이런 생각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뿐이에요.. -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라는 말에는 자신의 이름도 거론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경자는 아들과 자신의 문제는 둘째 치고라도 혼자서라도 애를 낳아 기르겠다는 수아의 생각을 돌리고 싶었다.

- 정태에게는 아무 피해도 주지 않겠다고 약속드릴게요..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그냥 저 혼자서 조용히 낳아 기를게요.. -

- 그러면 왜 이랬어요..
그럴 생각이면 처음부터 혼자 낳아서 기르지..
왜 지금에 와서 정태의 아이를 혼자서라도 낳아서 기르겠다고 말하는 거예요..
왜..
무슨 이유로.. -

- 그건 어머니가 더 잘 아시잖아요.. -

몰아붙이는 경자의 말에 수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경자에게 대답했다.

- 제가 왜 이러는 지는 어머니가 더 잘 아시잖아요..
어머니도 자식을 낳아 보셨잖아요..
정태를 낳아 보셨잖아요.. -

- ...... -

자신을 바라보며 울먹이며 말하는 수아를 바라보던 경자가 순간 할 말을 잃고 수아를 응시했다.

- 어머니가 만약 저라면 제 뱃속에 있는 아이가 정태라면 어머니는 정태를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만들고 싶으세요..
어머니가 만약 저라면 어머니의 앞날 때문에 아무 죄의식 없이 정태를 죽이실 수 있으세요..
그러세요.. -

- ...... -

- 그래서 그랬어요..
어머니는 아시잖아요..
아이를 가진 엄마의 심정이 어떤 건지..
상황이 어쨌든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만든 아이기에 저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생명이고 설사 정태가 절 외면해도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제 아이라고요..
누가 뭐래도 제 아이 에요..
제 아이.... -

- ...... -

눈물을 흘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하던 수아가 끝내 탁자에 엎드려 서러운 울음을 울기 시작하자 그런 수아를 바라보던 경자의 눈에도 가느다란 눈물 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 제 아이 에요..
정태 아이가 아니라 제 아이라고요..
흐흑.. -

- ...... -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계속 울먹이는 수아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경자가 눈을 내려 감으며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려 감았던 눈을 뜨자 눈물로 인해 희뿌옇게 보여지는 햇살을 가만히 올려 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수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에게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 어머니도 자식을 낳아 보셨잖아요..
정태를 낳아 보셨잖아요..
어머니는 아시잖아요..
아이를 가진 엄마의 심정이 어떤 건지.. ]

그렇게 다시금 수아의 말을 떠올리며 창 밖을 내어다보던 경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흐느끼고 있는 수아를 잠시 내려다 본 뒤 천천히 커피 숍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친구 분 만나신다더니 벌서 들어오세요.. -

- ....... -

거실로 들어서는 경자를 바라보며 말을 던진 정태가 경자의 곁으로 다가서자 걸음을 멈추고 경자가 아들을 돌아보았다.

- 엄마.. -

- ....... -

그렇게 아들을 돌아보는 경자의 눈에 순간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지 엄마의 모습에 정태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엄마의 어깨를 잡자 경자가 아들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 넌 날 속였어.. -

- 엄마..
갑자기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

- 왜 아니라고 하고 싶니.. -

- 제가 언제 엄마를 속였다고 그러세요..
전 엄마를 속인... -

- ..... -

[ 짜아악... ]

정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자의 손이 아들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고 엄마의 손을 미처 피하지도 못한 정태가 고개를 돌리며 경자를 응시했다.

- 엄마..
왜 이러세요.. -

-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네가 어떻게.. -

아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는 경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정태는 여전히 엄마의 태도를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경자를 바라보았다.

- 제가 뭘 어쨌다고 이러세요.. -

- 난 너를 위해서 모든 걸 버렸어..
널 사랑해서 난 엄마라는 이름도 내가 가진 모든 것도 다 버렸어..
세상이 날 보고 미친년이라고 손가락질을 할지도 몰랐지만 난 다 버렸어..
너 때문에..
너 때문에... -

- 도대체 왜 이러세요..
무슨 이야기인지 말을 해주셔야 제가 알아듣죠..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러시는데요.. -

어느덧 정태의 목소리도 격앙되고 있었다.

-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다른 곳도 아닌 이곳에서 내가 아닌 다른 여자하고 몸을 섞을 수가 있냐고.. -

- 엄마... -

엄마의 말에 놀란 듯 정태가 굳어진 얼굴로 엄마의 두 팔을 움켜잡았다.

- 그게 무슨 소리예요.. -

- 무슨 소리인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네가.. -

- 엄마..
제발 무슨 말인지 자세하게 이야기 해보세요.. -

눈물이 범벅이 된 체로 흐느끼는 엄마를 향해 정태가 커다란 고함을 외치며 경자를 흔들었다.

- 너 수아하고 몸을 섞었다며 그것도 여기에서..
왜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거짓말이라고 하고 싶어.. -

- ...... -

역시 고함을 지르듯 악을 쓰는 엄마의 고함에 정태는 순간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 경자를 붙든 체 그대로 굳어버렸다.

-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날 두고 어떻게 네가..
정태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니..
어떻게.... -

- ...... -

방금 전까지 악을 쓰듯 고함을 지르던 모습과 달리 점점 목소리를 낮춰가던 경자가 아들의 가슴을 손으로 두들기며 울먹였고 정태는 여전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었다.

- 아니지..
정태야..
모두 거짓말이지..
그렇지.. -

- ...... -

- 거짓말이지..
빨리 거짓말이라고 말해..
빨리..
흐흐흑.. -

아들의 옷을 붙잡고 흔들며 말하던 경자가 끝내 아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서러운 울음을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들의 가슴에 울음을 울던 경자의 몸이 서서히 스러지다 결국은 아들의 다리 앞에 주저앉은 체로 계속 울음을 터뜨렸고 그런 엄마를 내려보던 정태가 천천히 몸을 숙여 경자의 어깨를 잡고 끌어안으려 하자 경자가 세차게 아들을 밀어냈다.

- 내 몸에 손대지마.. -

- 엄마.. -

- 엄마라고 부르지마..
난 이제 네 엄마 아니야.. -

- 그건 실수였어요..
술에 취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

- 실수..
실수라고..
그래서 네 아이까지 임신한 그 애를 그렇게 매몰차게 외면했어..
그냥 실수이기 때문에.. -

- ...... -

경자의 말에 순간 정태의 얼굴에 다시 한번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 지어졌다.

- 어...
엄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 아이라뇨..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수아 선배가 제 아이라도 가졌다는 말씀이세요.. -

- 그렇게 궁금하면 가서 물어봐..
네 아이를 가졌는지 아닌지를... -

- ...... -

경자의 말에 정태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그..
그렇다면..
지난번에 선배가 했던 말이 장난이 아니라..
사실... ]

지난번 만남에서 자신이 임신을 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던 수아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실이었음을 알아 챈 정태는 절망에 가까운 표정으로 천천히 엄마를 바라보았고 경자는 그런 아들의 시선을 외면한 체 거실 바닥에 엎드려 서럽게 울음을 계속 울었다.

[ ...... ]

- ...... -

얼마의 시간이 흘러버린 것일까..

창 밖으로 밀려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거실을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지만 소파에 앉아있는 경자와 정태는 조금의 이동도 없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 이제 어떻게 할거야.. -

- ...... -

기나긴 침묵을 깨고 경자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정태는 여전히 말없이 앉아있었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 경자가 그런 아들을 응시했다.

- 네가 설사 받아주지 않아도 아이를 낳아서 기르겠다고 하더라.. -

- ...... -

이어진 경자의 말에 정태가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경자를 응시했지만 이내 경자가 다시 아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 혹여 그 아이에게 찾아가서 화를 내거나 아이를 지우라는 소리는 하지 말아.. -

- 엄마.. -

- 네가 저지른 일이니 네가 책임을 져.. -

- 어떻게 책임을 져요..
무슨 방법으로..
아이를 지우는 방법말고는 어떤 방법도 없어요.. -

- 넌 그럴 자격 없어.. -

- ...... -

- 넌 수아도 속였고 나도 속였어.. -

- 엄마..
그건.. -

- 그리고 넌 수아의 심정 몰라.. -

- 제가 뭘 몰라요..
그리고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저보고 어떡하라고요.. -

- 아이를 가진 엄마의 심정이 어떤 건지 넌 몰라..
수아는 아이를 지키고 싶어해..
내가 널 지키고 싶었듯이... -

- 엄마.. -

- ......... -

자신을 부르는 아들의 목소리를 외면한 체 경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지만 정태는 그런 엄마를 붙들지 못한 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 근데..
이 여자는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무슨 연락이 있어야 되는 거 아냐..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아이 씨..
회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별게 다 신경 쓰이게 하네...
돌아오기만 해봐.. -

[ 똑..
똑.. ]

- 들어와.. -

초조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있던 동석이 노크 소리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대답을 하자 회사 부장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 그래..
알아봤어.. -

- 네..
일차 부도는 났지만 거래처에 연락을 해서 당좌를 밀어 넣는 건 막아놨습니다..
그런데.. -

- 그런데 뭐.. -

- 김 과장이 횡령한 회사 돈이 생각보다 큽니다.. -

- 얼마나 되는데.. -

- 거래처에 지금하기로 했던 돈과 어제 은행에 집어넣기로 했던 돈하고.. -

- 간단하게 말해..
그래서 모두 얼마야.. -

- 육 억 정도 됩니다.. -

- 뭐..
육 억.. -

- 네..
아마도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

- ...... -

부장의 말에 동석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육 억이라면 생가보다 큰 액수였다.
하지만 이것저것 쓸어모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는 액수라는 생각에 동석은 쓰린 가슴을 진정하기 위해 애꿎은 담배만을 연신 피워댔다.

- 저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게.. -

- 또 뭐야.. -

- 좀 전에 경찰에서 전화가 왔는데..
김 과장이 자신의 이름으로 호주 행 비행기 표를 두 장을 끊었다고 합니다.. -

- 두 장.. -

- 네..
그런데 조회를 해보니까 김 과장과 함께 출국한 사람이 다름 아닌 미스 김..
아니 사모님 이름이.. -

- 그게 무슨 소리야..
미스 김이 김 과장하고 작당을 하고 도망이라도 갔단 말이야.. -

- 아무래도 정황으로 볼 때 그런 것 같습니다.. -

- ...... -

부장의 말에 순간 동석은 머리가 띵해져 옴을 느꼈다.
부장의 말대로라면 혜진이 이미 오래 전부터 석준과 함께 이번 일을 꾸며 왔다는 소리가 되는 것이었다.

- 그리고 더 이상한 건 오늘 아침 사장님 지시로 은행에 담보로 잡히려고 사장님 집 등기를 띄어보니 어떤 사람이 이 억 오천 만원의 근저당을 잡아 놨습니다.. -

- 그게 누군데.. -

- 알아보니..
미스 김이..
아니 사모님이 집을 내놓고 계약금으로 부동산 중개 업자를 통해 그 돈을 받아 가셨다고 합니다.. -

- ...... -

동석은 다시 한번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상황이 점점 혜진과 석준이 꾸민 일로 좁혀졌고 자신은 그동안 철저하게 혜진에게 속아왔던 거시었다.

- 사장님..
큰일났습니다.. -

그 순간 또 다른 직원 하나가 사장실로 뛰어 들어왔다.

- 김 과장님이 회사 장부를 모두 세무서에 넘긴 것 같습니다.. -

- 그게 무슨 소리야.. -

- 지금 세무서에서 저희가 꾸며왔던 이중 장부를 들고 세무조사를 나왔습니다.. -

- 뭐야.. -

직원의 말에 동석이 다시 한번 놀라던 순간 양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장실로 들어섰다.

- 당신들은 뭐야.. -

- **시청 세무서에서 나왔습니다..
세무 조사 법 ** 조 **항에 의거 세금 포탈 및 세금 횡령에 대한 혐의로 압수 수색을 하겠습니다.. -

- 뭐..
뭐야.. -

- 뭐해..
어서 시작해.. -

- 이것 봐..
당신들..
지금...
어... -

남자의 말에 함께 들어온 사람들이 사장실은 물론 사무실을 뒤지기 시작하자 분노에 찬 표정으로 악을 쓰려던 동석이 갑자기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며 뒤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 사장님..
사장님... -

뒤로 넘어지는 동석을 부축한 부장이 다급하게 동석을 불렀지만 동석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있었다.

- 뭐해..
어서 119불러.. -

- 네.. -

부장의 말에 직원 하나가 황급히 수화기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고 동석의 의식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갔다.

- ..... -

맞은 편에 앉아있는 수아를 바라보며 입을 다문 체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있던 정태가 자신이 나올 때까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엄마를 떠올리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 사실이에요.. -

- 뭐가.. -

낮은 정태의 물음에 고개를 들고 정태를 바라 본 수아가 되물었다.

- 선배.. -

- ...... -

-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건데요.. -

- 생각 같은 거 안 해.. -

- 선배..
자꾸만 이러면 모두가 불행해져요..
선배도 나도.. -

- 네가 왜 불행해지는데..
걱정하지 말아..
너보고 책임지라는 소리하지 않을 테니까.. -

- 그런데 왜 우리 엄마를 만나서 그런 소리를 했어요.. -

- 내가 만나자고 한 거 아냐..
너희 어머니가 날 먼저 만나자고 하신 거야.. -

- 그래요..
누가 먼저 만나자고 했던 간에..
무슨 생각으로 우리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한 건데요..
책임지라고 하지도 않을 거면서.. -

- ...... -

정태의 물음에 수아가 가만히 정태를 응시했다.

- 마음 돌려요..
선배하고 난 안 되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안 되요.. -

- 너랑 함께 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이제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

- 그게 말이 되요..
어떻게 상관이 없어요..
그 아이 제 아이라면서.. -

- 네 아이 아니야..
내 아이야.. -

- 선배.. -

- 넌 이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싶은 생각 조금도 없다고 그랬으니까..
내 아이야.. -

- ...... -

-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넌 너대로 살아..
절대로 너에게 책임지라고 안 할 테니까..
그리고 앞으로는 이제 나도 너보고 싶지 않으니까..
다신 나 찾아오지마..알았지.. -

- 선배.. -

말을 마친 수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숍을 나가버리자 정태가 황급히 그런 수아를 뒤쫓아 커피숍을 나섰다.

- 선배.. -

커피숍을 나온 정태가 몇 걸음 앞에서 걸어가는 수아의 팔을 잡으며 수아를 돌려 세웠다.

- 정말..
왜 이래요..
누구 미치는 거 보고 싶어요.. -

- ...... -

- 그냥 지워요..
이러면 결국 선배 상처만 받아요.. -

- 그게 죽는 것보다는 나아.. -

- ...... -

단호히 내뱉은 수아의 말에 정태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 나도 지우려고 했어..
너무 무서워서 지우려고 병원도 갔어..
그런데 아이가 살려달라고 그러더라..
제발 살려달라고.. -

- ...... -

어느덧 수아의 목소리가 울먹이고 있었고 눈에는 눈물도 고이기 시작했다.

- 너 그게 어떤 건지 알아..
아이를 지우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살려달라는 아이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날 괴롭히는 게 어떤 건지 너 아니.. -

- ...... -

- 밤마다 꿈속에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아이가 나타나서 날 보고 방긋거리며 웃다가 갑자기 나에게 매달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야..
아이를 지우고 나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 것 같고 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내가 내 목숨을 끊을 것 같은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

- ...... -

고함을 치는 수아를 바라보며 정태는 계속 굳은 얼굴로 수아를 응시했다.

- 그런 나를 넌 끝까지 외면했잖아..
너무 무서워서 너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넌 그런 나를 끝가지 모른 척 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보고 아이를 지워라 말아라 하는 거야..
무슨 자격으로.. -

- 내가 언제 선배를 외면했어요..
선배가 나에게 임신을 했다는 소리는 한번도 하지 않았잖아요.. -

- 임신을 했다고 하면 뭐라고 할건데..
넌 지금처럼 나보고 아무 죄책감 없이 아이를 지우라고 할거잖아.. -

- 도대체 나보고 어떡하라고요..
혹시 선배 처음부터 아이를 지울 생각이 없었던 거 아니에요..
그리고 그걸 핑계로 날 잡으려고 한 거 아니에요..
말해봐요..
내 말이 맞죠.. -

[ 짜아악.. ]

전날 경자가 그랬듯이 수아의 손이 매섭게 정태의 뺨을 후려쳤다.

- 나쁜 자식.. -

- ...... -

- 착각하지마..
나 이제 절대 너 안 붙잡아..
그리고 이 아이도 네 아이 아니야..
내가 홧김에 다른 남자하고 자고 만든 아이야..
이제 됐지..
이 나쁜 자식아..... -

수아가 고함을 치듯 정태에게 쏘아 부쳤다.

- 아이를 낳으면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어쩔 건데요..
선배 부모님이 아시면 선배를 그냥 둘 것 같아요..
왜 선배 부모님은 생각 안 해요.. -

- 우리 부모님 벌써 알아..
그래서 나 집에서 나와 혼자 살아..
이 나쁜 자식아..
흐흑... -

- ...... -

말을 마치고 주저앉아 우는 수아를 내려보며 정태는 머리가 멍해졌다.

생각보다 일이 크게 벌어졌음을 느꼈고 정태는 순간 다급한 마음에 집에 있는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주저앉아 있는 수아를 일으켜 세웠다.
어떡하든지 수아의 마음을 돌려 아이를 지우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선배가 아무리 이래도 난 선배에게 갈 수 없어요..
난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

- 됐어..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말했지..
너보고 책임지란 소리 안 한다고 그러니까 그런 유치한 말장난으로 날 비웃지 말아.. -

- 선배 비웃는 것도 아니고 책임지라고 할까봐 무서워서 하는 소리 아니에요..
선배를 위해서예요..
알아요..
선배를 위해서라고.. -

- 이거 놔..
더 이상 네 핑계 듣고 싶지 않아.. -

- 난 엄마를 사랑해요..
알았어요..
우리 엄마를 사랑한단 말이에요.. -

- 너만 엄마 사랑하는 거 아냐...
나도 너만큼 우리 엄마 사랑하고 우리 엄마도 이번 일로 너희 엄마만큼 가슴 아파하셔..
알았어.. -

자신의 팔을 뿌리치려는 수아를 더욱 세게 움켜잡으며 정태가 고함을 질렀고 수아 역시 정태에게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댔다.

-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말하는 건 여자로써 엄마를 말하는 거예요.. -

- ...... -

정태의 말에 순간 수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 알아들어요..
우리 엄마하고 난 아들과 엄마가 아닌 남자와 여자로써 서로를 사랑한다고요..
알아 들어요... -

- ...... -

정태의 말에 한동안 멍하니 정태를 바라보던 수아가 순간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었다.

- 너 정말 너무 하는구나..
내가 너보고 책임지라고 매달릴지도 모른다는 게 그렇게도 무섭니..
말했지..
난 절대 너에게 매달리지 않고 아이 낳아서 잘 키울 거라고..
그런데 뭐..
엄마를 여자로 사랑해...
너 정말 무서운 사람이구나..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엄마를... -

- 급해서가 아니라 사실이에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오래 전부터 엄마를 사랑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우리 엄마도 저처럼 절 남자로 사랑하고 있고요..
알았어요.. -

- 뭐..
사실이라고..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조금만 더 있으면 이제 나보고 너랑 너희 엄마하고 다른 남녀들처럼 섹스라도 한다라고 말하겠구나..
그러니.. -

- 그래요..
나랑 우리 엄마랑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서로 섹스도 해요..
이미 선배하고 그러기 전부터 그랬고 어제도 우린 그랬어요.. -

- ...... -

수아의 눈이 커다랗게 변하며 정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 내가 선배하고 그랬던 건 엄마가 이미 나하고 몸을 섞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나를 멀리하려고 해서 홧김에 술을 먹었고 술 때문에 결국 선배하고 그렇게 됐을 뿐이에요.. -

- 기..
김 정태..
너..
너..
지금... -

- 그래요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에요..
그래서 선배 마음을 받아 줄 수도 없었던 거구요..
그러니까 제발 마음 고쳐먹고 아이 지워요..
결국 선배만 상처를 받아요..
네 선배.. -

- ...... -

- 선배.. -

- 놔..
이 자식아.. -

정태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가로젓던 수아가 황급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정태가 다시 수아의 팔을 잡았지만 기어이 정태의 팔을 뿌리친 수아가 뜀박질을 시작하며 멀어지자 그런 수아를 잡으려고 팔을 뻗던 정태가 팔을 내리며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쥐고 벽을 치기 시작했고 어느덧 수아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 ..... -

아들이 나가고 비어버린 집에 홀로 남아있던 경자가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와 아들과 함께 집안을 정리하며 즐거워했던 시간부터 수아의 일이 터지기 전까지의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 한 인간으로 한 여자로써 행복했던 자신의 모습들을 떠올렸다.

그런 기억 속에서 묻혀 집안을 둘러보던 경자가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가지런히 정리된 침대가 눈에 보이자 침대로 다가가 걸터앉은 다음 침대 시트를 손으로 천천히 쓸어가기 시작했다.

[ 하흑..
흑...
정태야...
허억..
헉..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

- ..... -

아직도 생생하게 귓전을 울리는 듯한 아들과 자신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경자는 아들과 함께 몸을 섞으며 뜨거운 시간을 보냈던 침대를 어루만지며 살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따르르릉..
따르르릉.. ]

침대를 어루만지고 있던 경자가 전화벨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섰다.

- 여보세요.. -

- 아..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

- 누구세요 -

자신을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경자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저..
박 부장입니다.. -

- 네..
아...
네.. -

자신을 밝히는 말에 경자가 되묻듯 대답을 했지만 이내 헤어진 남편의 회사에서 일하는 박 부장을 떠올렸다.

- 안녕하셨습니까.. -

- 네..
덕분에..
그런데 무슨 일로 저에게 전화를... -

- 딱히 전화를 드릴 데가 없어서..
사장님이 쓰러지셨습니다.. -

-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쓰러지다니요.. -

경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 그게 회사가 부도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 충격으로.. -

- 회사가 부도가 나다니요..
자세히 좀 말씀해보세요.. -

- 경리부의 김 과장이 회사 돈을 챙겨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것도 미스 김하고 같이.. -

- 미스 김이요.. -

- 네..
사장님하고 같이 살던.. -

- ...... -

회사 과장과 혜진이 함께 도망을 갔다는 소리에 경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죄송하지만 병원으로 좀 오셨으면 합니다.. -

- ...... -

- 사모님.. -

- 어디죠..
거기가.. -

- 네..
여기는....... -

박 부장과의 통화를 끝낸 경자가 방으로 들어가 황급히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 환자가 평소 고혈압 증세가 있었고 일시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받음으로 인해 뇌 속의 작은 동맥이 터져서 피가 뇌 실질 속으로 흘러 들어가 뇌 세포가 기능을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 -

- ..... -

- 이럴 경우 대부분의 환자가 오랜 시간을 버터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되는데 환자의 경우는 천만 다행으로 목숨은 건졌습니다만..
아무래도 온전한 상태로 깨어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

- 그럼 죽기라도.. -

의사의 말에 놀란 경자가 물었다.

-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반 가사 상태에 빠질 것 같습니다..
물론 상태가 악화가 된다면 최악의 상태도 생각해야겠지만 현재로는 혼수상태가 계속 될 것 같습니다.. -

- 얼마 동안이나 저런 상태로.. -

- 그건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하루가 될 수도 있고 이틀이 될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영원히 저런 상태로.. -

- ...... -

- 하지만 그거보다는 설사 깨어난다 하더라도 상태가 좋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

- 어느 정도나.. -

- 일단 온 몸의 마비 증세는 물론이고 어쩌면 정상적인 뇌 기능을 상실한 상태 일 겁니다.. -

- ...... -

- 하지만 최선을 다한다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희망을 버리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뇌라는 것이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을 보이고는 하니까요.. -

- ...... -

의례적이기는 하지만 희망을 가져보라는 의사의 말을 들은 경자가 무릎 위의 손으로 주먹을 쥐며 살짝 고개를 떨궜다.

[ 띠...
띠....
띠.... ]

- ...... -

기계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경자가 산소 마스크를 끼고 혼수 상태에 빠져있는 동석을 바라보았다.

[ 당신이란 사람..
끝까지 나에게 무거운 짐만을 지우는 사람이네요....
이런 모습으로 누워 있으려고 나하고 정태를 버리고 갔어요..
이제 당신도 알겠네 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다는 게 어떤 심정인지... ]

[ 행여 이렇게 됐다고 미스 김을 원망하지 말아요..
당신은 그럴 자격 없는 사람이니까.. ]

[ 우습네요..
어떻게 보면 나도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

마음속으로 동석에게 이야기를 하던 경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당신 그거 알아요..
나 지금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궁금하죠..
그 남자가 누구인지..
당신도 아는 사람이에요..
당신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이니까..
그리고 내 피도.... ]

마음속의 말을 모두 마친 경자가 다시 한번 동석을 물끄러미 바라본 뒤 천천히 병실을 나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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