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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8. 태산봉선(泰山封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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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유증: 당고종의 우울

당고종에게 있어 2차 고당전쟁은 당태종의 그늘을 넘어설 절호의 기회이자, 치세의 황금기를 보증할 숙원 사업이었다고 평가됩니다.[8-1] 일찍이 당고종은 655년 황후를 무측천으로 교체하면서 장손무기 등 치세 초기를 주도하던 재상들을 숙청하고, 강력한 황제권을 구축하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8-2] 그러나 아직 문벌 세력이 완전히 굴복한 것은 아니었지요.[8-3] 또한 당나라의 군사적 위상도 당태종 시대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습니다.[8-4] 당고종은 이러한 정국의 불안 요소를 극복하고자 2차 고구려 원정을 단행한 것으로 여겨지며,[8-5] 침공군에 임아상·소정방·정명진·소사업 등 당고종 시대에 본격적으로 중용된 인물들이 대거 포진한 것[8-6]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8-1]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92쪽.
[8-2] 여호규, 「7세기 중엽 국제정세 변동과 고구려 대외관계의 추이」, 『대구사학』 133, 2018, 24-25쪽.
[8-3]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75-76쪽.
[8-4] 서영교, 「『新唐書』 日本傳에 보이는 唐高宗 令出兵援新羅 璽書의 背景」, 『역사학보』 237, 2-3쪽.
[8-5]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114쪽.
[8-6]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84쪽.


이 때문에 당고종은 특별히 일융대정악(一戎大定樂)을 지어 상연하며 고구려 원정에 천하평정[八紘同軌]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부여하였습니다.[8-7] 또 1차 침공 당시와는 달리 정국 주도자들의 입장이 통일되어 (지방관의 상소 1건을 제외하면) 전쟁 반대 주장도 찾아보기 힘들었으며,[8-8] 황제의 친정이 논의되는 등[8-9] 당고종이 치세를 통틀어 유일하게 군사 부문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의지를 보이기까지 했습니다.[8-10] 이러한 사실들은 2차 고당전쟁이 당고종이 야심차게 추진한 거국적인 사업이었음을 시사합니다.[8-11]

[8-7]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88-89쪽.
[8-8]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74쪽.
[8-9] 『新唐書』 卷220, 列傳145 東夷 高麗.
[8-10]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87쪽.
[8-11]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4쪽.


그런데 이처럼 커다란 의미가 담긴 고구려 침공은 전편에서 살펴보았듯 대실패로 종결되었습니다.[8-12] 이러한 결과는 당고종에게 막대한 부담과 좌절감을 선사한 것으로 보입니다.[8-13] 패전 이후 당나라의 조정은 불안정 상태에 빠졌고, 신하들은 정쟁에 돌입하여 재상 3명이 1년 단위로 연달아 몰락했지요.[8-14] 이러한 동요 정국은 664년 당고종이 무후의 ‘수렴청정’을 허용하여[8-15] 정치적 책임을 분담하기로 결심한 뒤에야 차츰 안정되었습니다.[8-16]

[8-12]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6쪽.
[8-13]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103쪽.
[8-14]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100쪽.
[8-15] 『資治通鑑』 卷201, 麟德 元年(664) 12月, “自是上每視事, 則后垂簾於後, 政無大小皆與聞之.”
[8-16] 장창익, 「唐 高宗 시기 2次 高句麗 遠征과 政局의 再編」, 『동양사학연구』 155, 2021, 115쪽.


후유증: 당나라의 피폐

한편 정치 부문뿐 아니라 군사 부문에도 전쟁의 여파가 작용하였습니다. 앞서 당나라는 이미 고구려 원정 도중 철륵의 반란으로 인해 3개 도행군을 회군시킨 바 있습니다. 이를 통해 편성된 토벌군은 662년 3월경 천산(天山)에서 철륵의 항복을 받아내었지만[8-17] 이내 약탈을 벌였고, 철륵은 항복을 취소하고 북상하였지요.[8-18] 장군 양지(楊志)가 철륵을 추격했으나 패해 돌아왔고, 철륵도행군대총관 정인태(鄭仁泰)가 재차 추적을 벌였으나 철륵을 찾기는커녕 식량 고갈과 기상 악화로 14,000기의 경기병 중 단 800명만이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8-19]

[8-17] 『舊唐書』 卷83 薛仁貴傳.
[8-18] 『資治通鑑』 卷200, 高宗 龍朔 2年 3月 조.
[8-19] 『資治通鑑』 卷200, 高宗 龍朔 2年 3月, “仁泰將輕騎萬四千, 倍道赴之, 遂逾大磧, 至仙萼河, 不見虜, 糧盡而還. 值大雪, 士卒饑凍, 棄捐甲兵, 殺馬食之, 馬盡, 人自相食, 比入塞, 餘兵才八百人.”


정인태군의 피해는 처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8-20] 이후 당나라는 유화책으로 선회하였고, 철륵도안무사(鐵勒道安撫使)로 임명된 계필하력은 철륵에서 주동자라며 내놓은 200여 명을 처형하는 선에서 사태를 봉합했습니다.[8-21] 반란의 지도자였던 회흘부의 추장 비속독(比粟毒)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이후에도 그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회흘을 다스리며 당나라로부터 도독으로 인정받게 되지요.[8-22]

[8-20] 서영교, 「唐高宗 百濟撤兵 勅書의 背景」, 『동국사학』 57, 2014, 338쪽.
[8-21] 이성제, 「7세기 東突厥系 蕃將과 蕃兵의 활동 : 麗唐戰爭 시기 활동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25, 2013, 203쪽.
[8-22] 서영교, 「唐高宗 百濟撤兵 勅書의 背景」, 『동국사학』 57, 2014, 339쪽.


이러한 결과를 불러온 정인태의 작전 실패는 다음과 같이 평가되어 있습니다.

군대가 돌아오자, 사헌대부(司憲大夫) 양덕예(楊德裔)가 (정인태를) 탄핵하며 상주하였다. “정인태[仁泰] 등은 이미 항복한 자들을 주살하여, 오랑캐[虜]가 달아나 흩어지도록 했습니다. (또한) 사졸들을 위무하지 않았고, 군량을 헤아리지도 못하여, 마침내 (병사들의) 해골이 들판을 뒤덮었고, 갑옷이 버려져 도적의 물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성조(聖朝)가 개창한 이래로 오늘과 같이 참담한[喪] 패배는 없었습니다.”軍還, 司憲大夫楊德裔劾奏, “仁泰等誅殺已降, 使虜逃散, 不撫士卒, 不計資糧, 遂使骸骨蔽野, 棄甲資寇. 自聖朝開創以來, 未有如今日之喪敗者.”- 『자치통감』 권200, 당기 16 -
위에 따르면 양덕예는 경기병 13,200여 명의 상실을 당나라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인식한 셈입니다. 그러나 참패의 목록은 곧 갱신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 평양성 앞에서는 (정인태 못지않게 굶주림에 시달렸을) 방효태가 수만 명의 부하들과 함께 전몰하였고, 662년에 고구려 전선에 있었던 4명의 주요 지휘관 중 살아 돌아온 것은 소정방 하나뿐이었기 때문이죠.[8-23] 이로 인한 당나라의 인적·물적 손실은 막대하였으며, 특히 수군의 희생이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8-24]

[8-23]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5쪽.
[8-24] 『資治通鑑』 卷201, 龍朔 3年 8月 戊申(27), “上以海東累歲用兵, 百姓困於徵調, 士卒戰溺死者甚眾, 詔罷三十六州所造船, 遣司元太常伯竇德玄等分詣十道, 問人疾苦, 黜陟官吏.”


이처럼 661년에 동원된 당군은 고구려와 철륵 모두에서 큰 타격을 입었고, 당나라는 한동안 전쟁의 후유증을 겪게 되었습니다.[8-25] 실제로 당고종은 662년 7월 이전에 백제 고지에 주둔한 당군의 철군을 허용하는 조서를 내렸지요.[8-26] 또 662년 12월에는 하북 지방 사람들이 전쟁으로 피폐해졌다는 이유로 봉선 및 낙양 행차 일정이 취소되었습니다.[8-27] 심지어 663년 8월에는 당고종이 직접 요동 전쟁의 참상을 성찰하고, 동방 원정을 대비한 건함을 중단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했습니다.[8-28]

[8-25]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99쪽.
[8-26] 『資治通鑑』 卷200, 高宗 龍朔 2年 7月 조.
[8-27] 『資治通鑑』 卷201, 高宗 龍朔 2年 12月, “詔以方討高麗·百濟, 河北之民, 勞於征役, 其封泰山·幸東都並停.”
[8-28] 서영교, 「고구려의 最後와 彗星」, 『진단학보』 138, 2022, 51-52쪽.


후유증: 당군의 수세

전투에 동원되는 당군의 규모도 축소되었습니다.[8-29] 예컨대 662년 7월 웅진도행군총관으로 임명된 손인사(孫仁師)는 단 7천 명의 군사를 배정받았고,[8-30] 이듬해인 663년 7월경에야 실제로 병력를 받아 출병할 수 있었습니다.[8-31] 또 662년 12월 구자(龜玆, 쿠차)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한 풍해도총관(風海道總管) 소해정(蘇海政)의 병력 역시 수천 명에 불과했고, 당나라는 서돌궐의 계왕절가한(繼往絶可汗)과 흥석망가한(興昔亡可汗)을 참전시켜 부족한 병력을 보충해야 했습니다.[8-32]

[8-29]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8쪽.
[8-30] 『新唐書』 卷3, 本紀3 高宗 龍朔 2年 7月; 『舊唐書』 卷199上, 列傳149上 東夷 百濟.
[8-31] 김영관, 「就利山會盟과 唐의 百濟 故土 支配 政策」, 『先史와 古代』 38, 2009, 68쪽; 김영관, 「百濟 滅亡後 扶餘隆의 行蹟과 活動에 대한 再考察」, 『百濟學報』 7, 2012, 86~89쪽;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6쪽.
[8-32] 『資治通鑑』 卷201, 高宗 龍朔 2年 12月 조.


물론 당시 서돌궐은 기미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이들 역시 당나라의 군사적 자원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662년 소해정과 합류한 계왕절가한은 평소 원한이 있던 흥석망가한의 세력을 병합하고자 흥석망가한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모함하였습니다.[8-33] 그러자 소해정은 흥석망가한을 유인하여 죽여 버렸고, 이에 궁월부(弓月部) 등 서돌궐의 여러 부락이 이반하였지요.[8-34] 이들이 토번군을 불러 당군을 치려 하자 소해정은 감히 싸우지 못하고 토번에게 군수품을 뇌물로 주어 겨우 위기를 모면했습니다.[8-35] 당나라가 이처럼 약세를 보이는 가운데 계왕절가한까지 곧 사망하자, 서돌궐은 서서히 토번에 귀부하며 당나라의 변경을 노략질하기 시작하였습니다.[8-36]

[8-33]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8쪽.
[8-34] 『資治通鑑』 卷201, 高宗 龍朔 2年 12月 조.
[8-35] 정병준, 「吐蕃의 吐谷渾 倂合과 大非川 戰鬪 : 唐朝의 韓半島 政策과 관련하여」, 『역사학보』 218, 2013, 319쪽.
[8-36]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8쪽.


이처럼 토번의 세력이 서역을 넘어 서돌궐에까지 미치는 상황이었지만, 패전의 여파에 빠져 있던 당나라는 소극적인 대처로만 일관하였습니다.[8-37] 당고종은 토번의 지속적인 압박을 받고 있던 토욕혼의 구원 요청을 계속 거절하였으며,[8-38] 663년에 토욕혼의 가한이 당나라로 도망쳐 온 뒤에도 변경 방어만 강화했을 뿐 토번의 토욕혼 병합을 막지는 못했습니다.[8-39] 결국 665년부터는 토번이 매년 당의 변경을 침입하기에 이릅니다.[8-40]

[8-37]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9쪽.
[8-38] 『資治通鑑』 卷201, 高宗 龍朔 3年 5月 조.
[8-39] 정병준, 「吐蕃의 吐谷渾 倂合과 大非川 戰鬪 : 唐朝의 韓半島 政策과 관련하여」, 『역사학보』 218, 2013, 320쪽.
[8-40] 정병준, 「吐蕃의 吐谷渾 倂合과 大非川 戰鬪 : 唐朝의 韓半島 政策과 관련하여」, 『역사학보』 218, 2013, 323쪽.


고구려의 공세

이러한 상황은 동방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서』·『북사』·『주서』·『수서』 등 5세기 이후를 다룬 중국의 사서에서 고구려의 영토는 하나같이 동서 2,000리·남북 1,000리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당서』·『구오대사』·『오대회요』 등에서는 고구려의 영토가 동서 3,100리·남북 2,000리로 크게 증대되어 나타납니다.[8-41] 이때 당나라의 1리는 수나라의 1리보다 5%가량 깁니다.[8-42] 따라서 도량형의 차이로는 1,000리 이상의 영토 변화를 설명하기 힘듭니다.

[8-41] 이인철, 「7세기 고구려 군사활동의 주요 변수」, 『신라문화』 24, 2004, 215쪽;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57쪽.
[8-42] 김상보, 나영아, 「고대 한국의 도량형 고찰」, 『동아시아 식생활학회지』 4(1), 1994, 7쪽.


또한 고구려의 서쪽 경계도 『위서』·『북사』·『주서』 등에서는 요동으로 인식되었으나, 『구당서』·『신당서』·『구오대사』·『오대회요』 등에서는 요수를 건너 영주(榮州)에 이른다고 되어 있습니다.[8-43] 이와 함께 『통전』과 『태평환우기』에서도 고구려 강역의 변천을 서술하며 ‘수대(隋代)를 지나며 점점 커져 동서 6,000리에 이르렀다[至隋漸大, 東西六千里]’라고 언급하였지요.[8-44] 이렇게 다수의 사료에서 확인되는 바에 따르면 7세기 고구려의 영토가 동서로 크게 확대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게 됩니다.[8-45]

[8-43]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57-158쪽.
[8-44] 『通典』 卷186, 邊防2 東夷 下; 『太平寰宇記』 卷173, 四夷2 東夷2 高勾驪國.
[8-45]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60쪽.


그렇다면 고구려는 662년 이후 다시 요서로 진출하여 과거 구축하였던 적봉진 등의 군사 시설을 복구하고, 이 지역의 유목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8-46] 실제로 당나라는 이후 3차 고당전쟁 이전까지 거란족이나 해족 등을 동원하지 못한 반면,[8-47] 고구려는 거란병을 군사적 자원으로 운용하였습니다.[8-48] 이처럼 고구려가 3차 고당전쟁 직전까지도 요서에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고 보면, 구당서 이후 사서들은 멸망 당시의 고구려 강역을 반영하여 고구려의 서쪽 경계를 영주로 표기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8-49]

[8-46]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75-176쪽;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61쪽.
[8-47] 김지영, 「7세기 중반 거란의 동향 변화와 고구려-660년 거란의 이반을 기점으로-」, 『만주연구』 12, 2011, 89쪽.
[8-48] 『新唐書』 卷110, 列傳35 泉男生傳, “男生走保國內城, 率其衆與契丹·靺鞨兵內附, 遣子獻誠訴諸朝.”
[8-49]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78쪽.


3100-2000
(참고용 지도. 당나라의 1리는 약 560m이므로, 3,100리는 1,736km이고 2,000리는 1,120km입니다.)

이때 『삼국지』·『후한서』·『주서』 등 당나라 이전을 다룬 사서들에서는 보이지 않던[8-50] 고구려의 가한신(可汗神) 숭배 기록이 유독 『구당서』[8-51]와 『신당서』[8-52]에만 보인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당시 고구려는 세력권 내 이종족들의 신앙을 포용하여 국력 결집을 도모한 것으로 생각됩니다.[8-53] 이러한 고구려 사회의 변화는 고구려가 가한신을 섬기는 요서의 유목민들을 아우른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8-54]

[8-50] 이재성, 「麗唐戰爭과 契丹·奚」, 『중국고중세사연구』 26, 2011, 210쪽.
[8-51] 『舊唐書』 卷高199, 列傳149 東夷 高麗, “事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
[8-52] 『新唐書』 卷220, 列傳145 東夷 高麗, “俗多淫祠,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
[8-53] 이재성, 「麗唐戰爭과 契丹·奚」, 『중국고중세사연구』 26, 2011, 211쪽.
[8-54] 이재성, 「麗唐戰爭과 契丹·奚」, 『중국고중세사연구』 26, 2011, 210-211쪽.


백제부흥군의 붕괴

물론 위 같은 고구려의 팽창은 남부 전선에 얼마간 소홀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8-55] 고구려는 경제의 중심지인 평양 일대에서 장기간 전쟁을 치렀으므로, 661년의 수확기를 놓치고 농업 기반 시설이 파괴되는 등 큰 타격을 입었을 것입니다.[8-56] 이 때문에 고구려는 백제 방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기 어려웠고, 663년 왜군과 연합해 덕물도 근방에서 손인사가 이끄는 당군을 저지하려 시도한 것[8-57]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군사 지원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백제 고지에 상륙한 손인사군은 기존의 당군 및 신라군과 합세해 백강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지요.[8-58] 이후 고구려는 지수신과 부여풍의 망명을 받아주는 정도의 대응만을 할 수 있었습니다.[8-59]

[8-55]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62쪽.
[8-56]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98쪽.
[8-57]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56쪽.
[8-58] 『舊唐書』 卷199上, 列傳149上 東夷 百濟.
[8-59] 김지영, 『7세기 고구려의 대외관계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189쪽.


이러한 백제부흥군의 실패는 확실히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에 호재로 작용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8-60]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당고종은 백강 전투가 벌어진 다음 달인 663년 8월에 동방 원정을 파하겠다는 조서를 내렸지요.[8-61] 이 때문에 당나라는 현실적으로 고구려 원정을 재개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견해가 제기됩니다.[8-62] 그런데 664년 7월에 이루어진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돌사성(突沙城) 공격[8-63] 등 당고종의 고구려 정복 추구가 지속되었음을 시사하는 사료도 존재합니다. 이에 당나라의 원정 중단을 일시적·임시적인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8-64]

[8-60]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51쪽.
[8-61] 김진한, 「보장왕대 고구려의 대당관계 변화와 그 배경」, 『고구려발해연구』 39, 2011, 117쪽.
[8-62] 정원주, 「男生의 失脚 배경과 그의 行步」, 『한국고대사연구』 75, 2014, 315-317쪽; 여호규, 「7세기 중엽 국제정세 변동과 고구려 대외관계의 추이」, 『대구사학』 133, 2018, 184쪽;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51쪽.
[8-63]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 文武王 4年 7月
[8-64] 김영관, 「就利山會盟과 唐의 百濟 故土 支配 政策」, 『선사와 고대』 38, 2009, 73쪽; 김진한, 「보장왕대 고구려의 대당관계 변화와 그 배경」, 『고구려발해연구』 39, 2011, 117쪽.


예컨대 664년 10월 유인궤가 당고종에게 올린 상주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신(臣)이 엎드려 수병(戍兵)들을 살피니, 지치고 여윈 자가 많고, 날래고 튼튼한 자는 적으며, 의복은 곤궁하여 헤졌고, 오직 서쪽으로 돌아갈 생각들만 가득했습니다. (···) 폐하께서 해외에 병사를 둔 것은, 고려(高麗)를 멸망시키고자 하심인데, 백제와 고려는, 예로부터 서로 무리를 구원하며, 왜인은 비록 멀리 있으나, 또한 함께 영향을 행사하니, 만약 진압할 병사[鎮兵]가 없다면, (백제가) 다시 한 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지금 이미 병사[戍]를 부려 지키고, 또 둔전을 세운 것은, 사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도운 바인데, 그중에 이렇게 의논하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성공하기를 바라겠습니까!臣伏睹所存戍兵, 疲羸者多, 勇健者少, 衣服貧敝, 唯思西歸, 無心展效. (···) 陛下留兵海外, 欲殄滅高麗. 百濟·高麗, 舊相黨援, 倭人雖遠, 亦共為影響, 若無鎮兵, 還成一國. 今既資戍守, 又置屯田, 所借士卒同心同德, 而眾有此議, 何望成功!- 『자치통감』 권201, 당기 17 -
이에 따르면 고종은 664년 10월에도 여전히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는 야욕을 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8-65] 다만 이러한 추론 자체가 당나라의 실제 정책 방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고종의 지향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의 당시 여건상 현실과의 절충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 해석을 종합해 보면, 당고종이 664년 7월 발표하여 666년 1월에 거행한 태산 봉선[8-66]이 주목됩니다. 결국 당고종은 고구려를 정복하는 대신 의례적인 복속만 받기로 타협하고 봉선을 추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8-67]

[8-65]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51쪽.
[8-66] 채미하, 「666년 고구려의 唐 封禪儀禮 참여와 그 의미」, 『동북아역사논총』 56, 2017, 52쪽.
[8-67] 이민수, 「7세기 중화적 천하질서에 대한 가장 강렬한 저항 - 동북아역사재단(임기환 지음), 『고구려와 수 · 당 70년 전쟁』 -」, 『군사』 126, 2023, 221쪽.


양국의 타협책: 태산봉선

동아시아 세계에서 봉선은 통치자가 천명을 받았음을 표현하는 의례일 뿐 아니라, 천하를 통일하여 세상에 평화를 가져왔음을 천지에 알리는 것이기도 했습니다.[8-68] 실제로 당고종은 태산 봉선에서 천하가 태평하고 국내외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화목하다고 선언하였지요.[8-69] 그런데 이 봉선에는 고구려 역시 태자 복남(福男)을 보내 참여했습니다.[8-70] 그렇다면 고구려는 당나라의 봉선 공표에 호응하여 대당 온건책을 채택하였으며, 당나라 중심의 세계 질서에 합류하여 조공 책봉 관계를 회복함으로써[8-71] 전란의 종식을 도모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8-68] 채미하, 「666년 고구려의 唐 封禪儀禮 참여와 그 의미」, 『동북아역사논총』 56, 2017, 79쪽.
[8-69] 『冊府元龜』 卷36, 帝王部37 封禪2, 乾封 元年, “属國家無事, 天下太平, 華夷乂安, 遠近輯睦, 所以躬亲展礼, 褒赞先勋.”
[8-70] 『資治通鑑』 卷201, 高宗 麟德 2年 8月 조.
[8-71] 이성제, 「唐 高宗의 泰山 封禪과 高句麗의 對應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 『고구려발해연구』 64, 2019, 220쪽.


이러한 고구려의 행보는 전쟁 후유증과 국제적 고립,[8-72] 남방 전선의 압박 증가[8-73] 등 대내외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출구 전략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당나라는 천하통일을 표방하기 위해 주변국들의 봉선 참가를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8-74] 예컨대 왜국의 경우, 당나라는 왜국 조정이 사신의 지위 문제로 사절단의 입경을 거부하자 사신의 지위를 높여 재차 파견하는 등[8-75] 일정한 저자세를 취하며 상대국의 봉선 참여를 유도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례로 미루어 볼 때, 당나라는 고구려에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먼저 관계 개선을 제안했을 공산이 큽니다.[8-76]

[8-72]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98쪽.
[8-73] 김지영, 『7세기 고구려의 대외관계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207쪽.
[8-74] 이성제, 「唐 高宗의 泰山 封禪과 高句麗의 對應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 『고구려발해연구』 64, 2019, 210-211쪽.
[8-75] 이성제, 「唐 高宗의 泰山 封禪과 高句麗의 對應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 『고구려발해연구』 64, 2019, 213쪽.
[8-76] 이민수, 「7세기 중화적 천하질서에 대한 가장 강렬한 저항 - 동북아역사재단(임기환 지음), 『고구려와 수 · 당 70년 전쟁』 -」, 『군사』 126, 2023, 221쪽.


고구려는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봉선에 참가하여 화친을 확정지으려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8-77] 특히 복남은 665년 10월에 당고종을 알현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고구려에 대한 무력도발을 철회할 것을 요청하여 소기의 성과를 얻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8-78] 이렇게 봉선을 통해 전쟁으로 실추된 당고종의 위신을 정립해 주는 한편[8-79]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고, 나아가 조공 책봉 관계까지 회복한다면 향후 당나라가 고구려를 재침공할 명분은 사라지는 것이었지요.

[8-77] 여호규, 「7세기 중엽 국제정세 변동과 고구려 대외관계의 추이」, 『대구사학』 133, 2018, 184쪽.
[8-78] 채미하, 「666년 고구려의 唐 封禪儀禮 참여와 그 의미」, 『동북아역사논총』 56, 2017, 76쪽.
[8-79]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51쪽.


전선에 위치해 있던 고구려인들은 이러한 대당관계의 전기를 크게 반겼을 것으로 생각됩니다.[8-80] 결과를 떠나 훌륭한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게다가 태자 복남이 봉선을 위해 출발할 당시까지만 해도 청사진은 곧 이루어질 듯했고, 고구려는 실제로 외교적 노력을 통해 원만한 전후 처리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8-81]

[8-80] 여호규, 「7세기 중엽 국제정세 변동과 고구려 대외관계의 추이」, 『대구사학』 133, 2018, 222쪽.
[8-81] 채미하, 「666년 고구려의 唐 封禪儀禮 참여와 그 의미」, 『동북아역사논총』 56, 2017, 78쪽.


연개소문의 유언이 지켜졌더라면,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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