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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총성이 만든 세계: 쾨니히그레츠, 현대사의 첫 도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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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분기점: 쾨니히그레츠의 포연이 빚어낸 세계

역사의 강줄기에는 무수히 많은 날들이 모여 거대한 흐름을 이룬다. 대부분의 날들은 전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어떤 날은 거대한 폭포처럼 깎아지른 절벽을 만들어 역사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울린 한 발의 총성,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해안을 붉게 물들인 상륙정의 문,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을 부수던 환희의 망치 소리. 우리는 이 극적인 순간들을 20세기라는 거대한 드라마의 결정적 장면으로 기억하며 그 의미를 파고든다. 그러나 이 모든 폭발적인 사건들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도록 무대를 설계하고, 갈등의 씨앗을 심었으며, 역사의 물줄기를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틀어버린 진정한 ‘기원의 날’이 있다. 그날은 바로 우리가 주목하는 20세기가 열리기 34년 전, 1866년 7월 3일, 보헤미아의 안개 낀 들판에서 벌어진 쾨니히그레츠 전투(Battle of Königgrätz)의 날이다.

이 전투의 이름은 워털루나 스탈린그라드처럼 대중의 귀에 익숙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복잡한 ‘나비효과’를 일으킨 단 하루를 꼽으라면, 바로 이날을 지목해야 할지 모른다 . 쾨니히그레츠의 포연은 단순히 한 제국의 패배와 한 왕국의 승리를 알리는 신호를 넘어, 낡은 유럽의 질서에 대한 사망 선고였으며, 20세기를 피로 물들일 민족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총력전이라는 괴물들의 산파 역할을 한, 현대 세계의 진정한 창세기였기 때문이다. 이 하루가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20세기의 거의 모든 것 – 두 차례의 세계대전, 공산주의 혁명, 냉전, 이스라엘의 건국, 미국의 패권, 그리고 멀리 떨어진 한반도의 분단까지도 – 존재하지 않았거나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독일의 심장을 향한 마지막 결투: 철과 피로 쓴 새로운 시대

19세기 중반, ‘독일’은 통일된 국가가 아닌 지리적·문화적 개념에 불과했다. 수십 개의 왕국, 공국, 자유도시가 얽혀 있는 이 땅의 주도권을 놓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오랜 시간 동안 ‘독일 이원주의’라는 불안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며 전통적인 권위를 내세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자신을 중심으로 한 느슨한 연방, 즉 ‘대독일주의(Großdeutsche Lösung)’를 꿈꿨다. 반면, 북독일의 신흥 강자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프로이센의 강력한 군사력과 공업력을 바탕으로 한 ‘소독일주의(Kleindeutsche Lösung)’라는 거대한 도박을 계획했다. 이 두 비전은 결코 공존할 수 없었고, 비스마르크는 이 문제를 “언젠가는 철과 피(Eisen und Blut)로 결정해야만 한다”고 공언했다.

쾨니히그레츠는 바로 그 ‘철과 피의 날’이었다. 비스마르크의 도박은 프로이센의 모든 것을 건 모험이었다. 그는 이 전쟁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독일 문제에서 영원히 축출하고, 통일의 주도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유럽의 모든 외교관들이 길고 지리한 소모전을 예상했지만, 역사는 단 하루 만에 승부를 결정지었다.

전투의 승패를 가른 것은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두 가지 혁신이었다. 첫째는 기술, 즉 프로이센군의 ‘드라이제 후장식 소총(Dreyse needle gun)’이었다. 병사들이 서서 화약과 탄환을 총구로 밀어 넣어야 했던 오스트리아의 전장식 소총과 달리, 프로이센 병사들은 엎드린 채로 총 뒤편의 노리쇠를 이용해 빠르게 탄환을 장전할 수 있었다. 이 차이는 엄청난 화력의 격차를 낳았다. 프로이센 병사 한 명이 오스트리아 병사보다 3~5배 빠른 속도로 사격하며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둘째는 전략이었다. 프로이센의 총참모장 헬무트 폰 몰트케는 철도망을 이용해 여러 개의 군단을 각기 다른 경로로 신속하게 이동시킨 후, 전투 당일 하나의 거대한 망치처럼 오스트리아군의 측면과 후방을 덮치는 ‘따로 행군하여 함께 싸운다(Getrennt marschieren, vereint schlagen)’는 혁신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이는 고도로 훈련된 참모본부와 정확한 시간 계획이 없이는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기술적 우위와 전략적 혁신이 결합되자, 전통적인 방식에 머물러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속수무책으로 붕괴했다. 단 하루의 전투로 오스트리아는 4만 명이 넘는 사상자와 포로를 냈고, 프로이센의 피해는 그 4분의 1에 불과했다. 유럽은 충격에 빠졌다. 나폴레옹 시대 이래 유럽 대륙의 질서를 유지해 온 합스부르크의 시대는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거대한 스노우볼의 시작: 독일 제국과 유럽의 화약고

쾨니히그레츠의 포연이 걷힌 자리에는 완전히 새로운 유럽의 지형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 전투가 굴리기 시작한 첫 번째 거대한 스노우볼은 바로 ‘독일 제국’의 탄생이었다. 쾨니히그레츠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비스마르크는 5년 뒤 프랑스마저 1871년 보불전쟁에서 굴복시키고, 적국의 심장부인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통일 독일 제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유럽의 심장부에 갑자기 등장한 이 강력하고, 산업화되었으며, 군국주의적인 국가는 기존의 세력 균형을 산산조각 냈다. 나폴레옹 이후 유럽 대륙의 질서를 유지해 온 ‘힘의 균형’은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파괴되었다.
영국의 ‘빛나는 고립’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독일의 급부상, 특히 빌헬름 2세 시대에 시작된 해군력 증강(건함 경쟁)은 영국의 해상 패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빼앗긴 채 깊은 복수심(Revanche)에 불탔고, 이는 프랑스 외교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동쪽의 러시아는 자신의 서쪽 국경에 나타난 새로운 거인을 경계하며 남하 정책의 걸림돌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외교는 이제 독일을 중심으로, 혹은 독일에 대항하여 재편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유럽은 두 개의 거대한 화약고로 나뉘었다.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삼국 동맹’과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삼국 협상’이라는 거대한 동맹 블록이 형성되어 서로를 겨누게 된 것이다. 이제 작은 불꽃 하나만 튀어도 유럽 전체가 불바다가 될 수 있는, 아슬아슬한 대치 상황이 만들어졌다. 쾨니히그레츠가 없었다면, 이 위험천만한 ‘화약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이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개의 국가로 분열된 상태로 남았다면, 유럽은 19세기적인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국지적인 분쟁은 있을지언정 전 유럽이 참전하는 총력전의 구도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세계대전, 공산주의, 그리고 히틀러라는 괴물의 소환

1914년,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성은 정확히 그 화약고에 던져진 불꽃이었다. 쾨니히그레츠가 만들어 놓은 구조가 없었다면 단순한 지역 분쟁으로 끝났을 사건이, 전 유럽을 휩쓰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폭발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또 다른, 훨씬 더 끔찍한 괴물들을 세상에 풀어놓았다.
첫 번째 괴물은 공산주의의 유령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1,500만 명의 사상자, 경제 파탄, 식량 부족은 러시아 제국을 붕괴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차르 체제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민중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레닌과 볼셰비키는 이 혼란을 틈타 ‘빵, 토지, 평화’라는 구호 아래 권력을 장악했다.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은 쾨니히그레츠가 없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극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의 이론 속에만 존재하는 소수 지식인의 급진 이념으로 남았을 것이다. 결국 20세기를 양분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대결, 즉 냉전의 씨앗 역시 쾨니히그레츠의 들판에 뿌려진 셈이다.

두 번째 괴물은 더욱 끔찍했다. 바로 히틀러와 나치즘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족쇄에 묶였다. 천문학적인 배상금, 모든 식민지와 일부 본토의 상실, 군비 제한, 그리고 전쟁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 ‘전쟁책임조항’은 독일인들의 마음속에 깊은 분노와 굴욕감을 심었다. 전후의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제 대공황은 이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다. 바로 그 분노와 절망을 자양분 삼아 성장한 것이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나치당이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위대한 독일 민족의 재건을 외치며 대중을 선동했고, 결국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쾨니히그레츠에서 시작된 스노우볼이 제1차 세계대전을 낳고, 그 전쟁이 결국 히틀러라는 괴물을 소환하여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인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로 이어진 것이다.

중동의 인위적인 탄생과 끝나지 않는 분쟁의 씨앗
쾨니히그레츠의 나비효과는 유럽을 넘어 중동의 운명까지 결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편에 섰던 오스만 제국은 패전국이 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 수백 년간 아랍 세계를 지배해 온 이슬람 칼리프 체제가 막을 내린 것이다.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1916년 비밀리에 맺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자와 연필로 분할했다. 민족, 종교, 부족의 경계를 무시하고 그어진 이 인위적인 국경선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을 탄생시켰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중동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시아파, 수니파, 쿠르드족이 뒤섞인 이라크의 비극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이스라엘의 건국 문제이다. 전쟁 중 자금과 지원이 필요했던 영국은 1917년 ‘밸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 건설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의 시오니즘 운동에 엄청난 동력을 부여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홀로코스트에 대한 동정 여론까지 더해져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졌다. 만약 제1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영국이 이런 약속을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며, 이스라엘 건국은 불가능했거나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결국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분쟁 중 하나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뿌리 역시 쾨니히그레츠의 전투와 연결되어 있다.

신대륙의 부상과 아시아,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
이 거대한 스노우볼은 이제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전 세계의 질서를 재편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유럽의 전통적인 강대국들을 몰락시킨 반면, 미국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부상시켰다. 전쟁터가 되지 않은 미국은 양차 대전 동안 군수물자를 판매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고, 전쟁의 마지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전후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시대를 열었다.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소모전이 없었다면 미국은 20세기에도 여전히 아메리카 대륙에 집중하는 고립주의 국가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가 되고 UN, IMF 등 현재의 국제기구가 탄생한 배경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있었다.

아시아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 제국주의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영일동맹을 근거로 연합국에 가담한 일본은 손쉽게 독일이 점유하고 있던 중국의 산둥반도와 태평양의 섬들을 차지하며 아시아에서의 팽창을 가속화했다. 유럽 열강이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아시아의 맹주로 급부상한 것이다. 이는 훗날 만주사변,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군국주의 폭주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의 종착지에 바로 한반도가 있다. 일본의 패망은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방식이 문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는 명분으로 한반도를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했다. 이는 냉전의 시작과 함께 그대로 남북 분단으로 굳어졌다. 만약 쾨니히그레츠가 없어서 제2차 세계대전도, 냉전도 없었다면?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이곳에 들어올 이유 자체가 사라진다. 우리는 독립을 다른 방식으로, 어쩌면 더 힘들게 쟁취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토가 허리가 잘리는 비극은 겪지 않고, 하나의 국가로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결론: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단 하루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는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얽혀 만들어진 복잡한 직물과 같다. 하지만 그 직물의 씨줄과 날줄을 결정한 가장 근원적인 패턴은 1866년 7월 3일, 쾨니히그레츠의 포연 속에서 짜이기 시작했다. 이 하루가 없었다면, 독일 제국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러시아 혁명과 공산주의는 역사의 주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다른 방식으로 해체되었을 것이고, 중동의 지도는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 것이며, 이스라엘은 건국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은 세계의 패권국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일본의 제국주의는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며,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쾨니히그레츠가 없던 세상이 평화로운 유토피아였을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인류는 다른 형태의 갈등과 전쟁을 겪었을 것이다. 제국주의의 탐욕과 민족주의의 열기는 어차피 19세기의 시대정신이었기에,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폭발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쾨니히그레츠의 그 하루가 역사의 무한한 가능성을 단 하나의 비극적인 경로로 수렴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날의 전투는 단순히 한 제국의 시대를 끝낸 것이 아니라, 20세기라는 무대의 막을 올리고 주연 배우들을 등장시킨,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서곡이었다. 그렇기에 쾨니히그레츠 전투가 벌어진 그 하루는, 영광과 비극이 교차한 현대사의 진정한 시작점이자, 가장 중요한 하루라 부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날의 포연은 15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 길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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