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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식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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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병 탓인지, 운동 부족인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위장 장애를 겪다보면 유독 그리운 음식이 생긴다.  

명치에 돌을 얹은 듯한 통증 속에 허덕이다, 죽 한 그릇 겨우 먹고 연명하는 기간이니 무엇인들 그립지 않으랴만.  개중에도 하필이면 맵고 기름진 물건들만 족족 떠오르는 것이 사람은 하지 말라면 더욱 하고 싶은 심보가 확실히 있나보다.

평소 잘 찾지도 않던 분식집 음식이 하나 둘 떠오르는데 정작 요 몇 년간 분식을 몇 번이나 먹었나 헤아려보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언제부터 그리 좋아했다고.  수염 숭숭 난 독신 남성이 쉽게 찾는 음식이 아니다.  포장마차에 팔던 뜨끈한 오뎅이나 좀 통하는 데가 있을까.

세계 인류가 사춘기의 2차 성징과 함께 남녀의 발달이 나뉜다면 한국 남녀는 떡볶이와 돈까스로 길을 달리하며 어른이 된다.  학교 앞 분식집에 성별 나눌 것 없이 삼삼오오 모여 떡볶이를 먹던 것이, 교복을 벗을 무렵이면 상대방의 성화 없이는 찾지 않는 음식이 되고마는 것이다.

팬들이 울고 화내고 빌다가 지쳐 잊을만 할 때서야 롯데 자이언츠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곤 하는 것처럼.  그렇게 계면쩍게 발도장이나 종종 찍어주는 것이 다 큰 남자들의 분식집 방문이다.

좋으냐 싫으냐를 묻는다면 싫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발길이 뜸하냐고 물어도 할 말이 없다. 그저 국밥이며 제육, 돈까스를 입에 욱여넣느라 분식집에 갈 여력이 없다고 대답할 수 밖에.  

그러니 요즈음의 두서 없는 그리움은 어린 시절에 인이 박힌 것이다.  수염도 시커멓고 속도 시커먼 어른이 되기 전,  둥지 튼 제비마냥 분식집을 찾곤 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풍족하지 못한 용돈으로 끝내 선택하는 메뉴는 대개 떡볶이 한 컵이었다.  종이컵 1인분도 세월이 좋아져 종이컵이지, 아주 어릴 때는 200원을 내고  빨간 플라스틱 국물 바가지에 떡 하나 오뎅 하나를 집어올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고 또 깨끗한 새 바가지를 집어 꼬치 오뎅의 국물을 벌컥 마셔댔으니 아주머니 입장에서는 여간 귀찮은 장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묽지도 걸쭉하지도 않아 국자에서 소리없이 미끄러지는 빠알간 떡볶이 국물은 고급 양식 수프 못지 않은 교양을 가지고 있다.  물엿이 들어간 소스에 풍덩 빠져 윤기가 흐르는 쫄깃한 떡을 집어 삼키면,  고춧가루의 매콤한 풍미가 코를 쿡 쑤시고는  달콤한 맛이 혀를 부드럽게 휘감으며 사방으로 퍼진다.
어금니에 알알이 찢어진 떡이 매끈한 감촉으로 온통 화끈거리는 입안을 다독이다 목구멍 깊이 사라지면, 이 때다 하고 올라오는 매운맛을 시원한 오뎅 국물로 눌러내는 것이다.  한 모금 두 모금 국물의 짠맛이 받치면 그제서야 또 달큰한 떡볶이 하나를 꿀꺽 밀어넣는다.  

오늘은 한 개만 먹고 가야지 하다가도 결국 주머니를 탈탈 털어 하루 용돈을 다 쓰는 것도 순식간이다.  정신없이 떡볶이를 먹어치우다 오뎅 국물로 매운맛을 다 누르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주머니에 남은 동전을 긴밀히 세어보며 꼬치 오뎅에 손을 뻗는다.

지금도 익숙하게 보이는 구불구불한 곱창 모양 오뎅이며,  무던한 핫바 모양 오뎅도 맛있었지만  종종 생각나는 것은 부산에서 파는 물떡이다. 오뎅들과 함께 꼬치에 꿰인 채 국물에 푹 담겨 있던 커다란 가래떡.  큰맘 먹고 하얀 덩어리를 집으면 묵직한 중량에서부터 나를 흐뭇하게 했던 부산 경남의 명물.

시원하고 구수한 오뎅 국물에 푹 절여진 물떡은 두터운 두께에서 말미암아 겉은 푹 퍼지고, 안은 단단하고 쫄깃한 이중적인 식감을 주었더랬다.    육수에 푹 젖어 짭짤해진 겉면을 살짝 씹으면 앞니에 찹쌀처럼 달라붙다가 표표히 흩어지는 부드러운 식감을 즐기는 것도 좋고,  간장을 찍어발라 두꺼운 떡에 간을 더해준 다음 단단한 안쪽까지 한 번에 잘라내 씹는 것도 흡족하다.

잘글잘근 물떡을 씹어삼킬 때 떡이 가진 은은한 단맛이 우러나오며 오뎅 육수와 간장이 가진 짭쪼롬 함이 구수한 조화를 이루는 그 맛.  포장마차의 오뎅 국물에 떡국을 해 먹는 느낌이라고 비유하면 와 닿을런지.  그 두툼하고 퉁퉁한 식감을 빼놓아야 하겠지만.

떡볶이 먹고 오뎅 먹고. 국물 한 번 마셨다가 내키면 물떡도 집어주고.   열 개고 스무 개고 용돈만 떨어지지 않으면 무한할 것 같은 이 순환을 중단시킨 것은 떡볶이를 멀리한 일이 아니다.  키도 커지고 용돈도 커지고, 버스비를 간식비로 소진할 배짱마저 커지는 무렵에 "튀김"을 가까이 한 일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교 앞에 있던 포장마차는 마치 빨간색 파란색처럼 떡볶이와 국물 오뎅 두 가지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어린 나에게 눈에 들어온 것이 둘 뿐인지 실제로 중학생이 될 무렵 다른 분식집에 가서야 튀김을 팔았던 것인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분식집에서 튀김을 접한 것은 내 미각 문명의 진일보였다.

튀김의 종류를 떠나 바삭하고 고소한 튀김옷이 떡볶이 국물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세상은 혁명을 맞이한 것이나 다름 없다.  미슐랭 레스토랑을 몇 개 보유했든지, 세계 3대 미식 국가이든지 어쩌고 간에 떡볶이 국물에 찍어먹는 노란 튀김의 위력을 모르는 나라는 열등하다.  인류의 보편적 인권으로서 만민은 떡볶이 국물에 튀김을 찍어먹을 수 있어야 한다. 땅땅.

바삭한 튀김옷 아래 쫄깃하고 탱탱한 속살을 숨긴,  한 입 씹으면 특유의 감칠맛과 냄새가 올라오는 오징어 튀김의 독특한 매력이며, 녹색 고추 특유의 상쾌한 풋내가 올라오며 촉촉한 식감이 바삭한 튀김옷과 조화를 이루는 고추 튀김, 한낱 어육이지만 달고 짭조롬한 살내음이 제법 매력적이었던 맛살 튀김.  가뜩이나 떡볶이 국물과 잘 어울리는데 튀김옷까지 갖춰 입어버린 삶은 달걀 튀김까지.

하나하나가 개성을 뽐내는 음식들이지만 부쩍 내가 그리운 것은  김밥 튀김이다.  앞서 말한 물떡이야 결국 오뎅 국물에 가래떡을 끓인 것이라 정 그리우면 해먹지 못할 것도 없지만은.  이 김밥 튀김이라는 놈은 깁밥도 말아야하고 그 김밥을 적절하게 튀기기까지 해야하니 누가 팔지 않고는 엄두가 나질 않는다.

떡볶이 국물을 푹 찍어 집었을 때 드러나는, 바삭한 튀김옷 안에 은은향 향을 품고 엎드려 있는 까만 김의 자태를 상상해보라.  뜨뜻한 겉면에 바짝 민감해진 혀를 식혀주듯 알알이 드러나는 미지근한, 혹은 서늘하기도한 밥알의 감촉.  튀김옷의 기름맛을 씻어주는 상큼한 단무지의 풍미가 입안을 감돌 때 어금니 한 켠으로 굴러나가 꼬득거리는 식감을 주는 채썬 당근의  식감까지.  촉촉하게 젖어든 매콤달콤한 떡볶이 국물과 함께 어우러지는 김밥 튀김의 맛은 가히 다른 분식 튀김이 따라올 수 없는 다채로움이 있다.

경상도 위쪽 지방에서는 튀김옷의 위력에 기생해 연명하는 김말이 따위가 온몸에 당면을 쑤셔넣고는 김밥 튀김을 지위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하니 통탄하지 아니할 수 없다.  김 한 장만 튀길 수가 없어 빈 공간에 당면을 쑤셔넣는 것이지, 그 놈이 식감이랄게 있나?

물떡도 김밥 튀김도 나름 지방 음식이라지만,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내 기억 속의 진객은 밀전병 이었다.  물떡이나 김밥 튀김이 길 가다 한 번쯤 다시 볼 법한 반가운 친구라면,   이 밀전병은 흐린 기억 속에 숨겨진 ET와의 만남 같은 것이다.
구절판에 놓인 밀 전병처럼, 밀가루를 얇게 부친 크레이프 같은 것에 떡볶이 국물을 적셔 먹는 것이었는데,   주인장이 호떡 구이용처럼 생긴 처판에다 아무런 속재료 없이 반죽만 즉석에서 동그랗게 구워 건네주면,  미리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에 덜어둔 떡볶이 양념에 비벼 호로록 삼키는 것이었다. 밀가루 냄새가 이렇게 향긋한 것이었나 깨닫게 해주는 구운 반죽의 은은한 밀향이며,  두껍지도, 너무 얇지도 않은 반죽 두께에서 나오는 촉촉하고 보드라운 감촉이며.
아무것도 없다는 걸 눈으로 보면서도,  이 간단한 반죽 부침이 떡볶이 오뎅과 같은 가격이라는 것에 부조리를 느끼면서도 홀랑홀랑 집어삼킬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 맛.
그것은 분식집에서 떠올리기 힘든 우아함이 깃든 음식이었다.  기름에 지져 댄 뻔한 고소함도 아니요, 노릇노릇하게 구운 흔한 식감도 아니다. 부드럽고 팍신하며 은은한.  20년이 지난 뒤에 유튜브 알고리즘에 나타난 크레페 고수가 보여준 내공과 비슷한 더도 덜도 없는 완벽한 조리.

고향인 부산에서도 그 시절 그 가게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밀 전병.  친구들끼리는 공갈만두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구글에 나온 공갈 만두는 납작 만두와 비슷한, 내 기억과는 전혀 다른 음식이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전라도 분이라는 얘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그 정체불명의 밀 전병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학창시절 친구들은 그 밀 전병을 기억할까?

저녁을 굶고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자니 지금 당장 배달앱을 켜고 분식 모듬을 시켜야만 할 것 같다.  지난 몇 년간 분식을 멀리 했던 내 선택이 저주스럽다.  그 돈을 주고 떡볶이를 먹냐고,  프랜차이즈 떡볶이를 시키던 주변 여성들을 타박했던 것을 사과한다.  위장이 편안해지고 나면 나는 동네를 샅샅이 뒤져 김밥 튀김을 찾고 말리라.  


신전 죠스 두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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