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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을 마주하며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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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밤이기도 하고 요즘 생각도 복잡해서 그런지 갑자기 오랫만에 두서 없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어쩌다 보니 제목을 좀 지나치게 비장하게 느껴지는 걸로 짓긴 했습니다. 종말을 마주하며 살아가기... 뭔가 굉장히 장엄해 보이고 솔직히 좀 호들갑 떠는 게 아닌가 싶은 문구입니다. 사실 과장이 맞기도 합니다. 단지 제가 종말, 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쓴 이유는 실제로 왠지 모르게 요즘 많은 사람들이 종말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듯, 무기력한 미래와 자포자기적 절망을 보며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예외는 아닙니다.

  저는 작년 이맘때, 그러니까 24년 4월 즈음에 한 글을 PGR21에 써서 올린 적 있습니다.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다는 제목으로, 제 비겁한 인생 다이제스트 같은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전 사실 아직 미 영주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어영부영 유지 중인 상황입니다. 딱히 무슨 야망이 있어서도, 어떤 그럴듯해 보이는 미래를 보고 있어서도 아닙니다. 단지 그것 이상으로, 저는... 포기에 대단히 무감각해졌고, 포기라는 행동을 하는 의욕조차도 많이 없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참 유쾌하지 못한 1년이었습니다.

  혹시 제 이전 글을 읽어보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그리고 그 글을 조금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저는 미대를 졸업해 프리랜서로 그림 작업을 생업 삼아 활동 중 이었다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여기까지만 써도 많은 분들은 어떤 걸 직감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바로 AI죠. AI 일러스트 생성은 첫 등장 이후로 빠르고 굉장하게 발전하는 중 입니다. 거기에 더해, 저 개인적으로도 추가적인 악재가 있었습니다. 제 팬...이라고 할 수도 있으려나요. 뭔가 제 그림에 대단히 관심이 있던 인터넷의 한 개인이 제가 업로드했던 그림들을 모두 모아 학습해서 AI 이미지 생성용 LoLA로 만들어 공짜로 뿌렸던 것 입니다. 좋게 보자면 내 그림을 누군가 학습해서 뿌릴 정도로 관심과 매력이 있었던 것 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뭐... 그 밖의 것들은 딱히 좋게 볼 구석이 없었습니다. 마치 소설이나 각본에서 등장하는 상징적인 이벤트 같았습니다. 너가 상상해 온 방향성, 너가 꿈꿔온 커리어, 너가 바라던 미래 그 모든 건 사실 없었고 그런 망상들은 모조리 끝났다, 라고 누군가 말하는 듯 싶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프로 작가의 꿈을 어느 정도 접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 공교롭게도, 어쩌면 의미심장하게도 제가 상당히 귀찮은 질환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당뇨입니다. 어쩌다 받아 본 건강검진에서 당화혈색소 12.8, 공복혈당 225가 나오더군요. 의사 선생님이 결과를 보자마자 바로 직접 전화하셔서 제 진찰을 잡아주실 정도였습니다. 나중에야 여러 검사를 통해 알게 된 것이지만 제가 아직 서른이 아니고 비만하거나 다른 장기 부전이 없는데도 이런 무지막지한 수치가 나온 이유 중 하나는 제 타고난 식후 인슐린 분비량이 매우 낮은 편이었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어느정도는 예정된 일이었고, 제가 잘 관리했더라도 맞이했을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더 안 좋은 질환이나 문제가 있던 건 아니었다는 점 정도같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저는 2중의 악재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들은 즉각적인 종말은 아닙니다. 그림의 미래가 불투명해졌다고 해도 뭐 사람이 그냥 굶어 죽으리란 법은 없는 거고, 당뇨는 완치가 없는 평생질환이지만 운동과 식이를 잘 컨트롤하면 평생 정상 혈당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이런 일들을 사적으로 겪으면서 동시에 뭐, 세계가 어떻게 되고 국가가 어떻게 되고... 그런 모든 것들을 대면하다 보니 사람이 유쾌해지긴 어려운 법이죠. 그래서 저 거창한 제목 "종말을 마주하며 살아가기" 라는 건 그런 저의 심리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종말은 아직 저를 후려치지도, 토막내지도 완전히 찌그러트려 박살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치 불곰 한 마리를 얇은 나무 문 하나만 사이에 둔 채, 그것이 문을 긁는 진동과 소음, 거칠게 훅훅거리는 비강과 뜨뜻미지근한 입김의 열기, 문틈을 완전히 매워 햇빛을 가려 오직 검은 그림자만이 비치는 듯한 어두운 거체같은 것들을 느끼며 공포에 절어있는 것 같은 상태입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멀지 않은 시일 내에 저 불곰은 제 얇고 허약한 나무 문을 부수고 들어와 저를 산산히 찢어 죽일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인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무얼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차라리 그냥 공포에 나를 방치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가볍게 제 머리를 꺾어 지체 없이 고통 없이 죽여주면 안되나 싶은, 그런 카타르시스한 감정이 몇번이고 올라오곤 합니다.

  그리고 아마 저만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게 아닐 겁니다. 정말이지 많은 분들이 인터넷이나 현실에서 불안정한 미래의 공포를 이야기하곤 합니다. 작게는 개인의 단위부터, 크게는 국가, 세계, 심지어 온난화같은 지구적 단위까지, 나락이 끓어오르는 듯한 어둡고 부정적인 열정들로 넘쳐 흐릅니다. 행복한 예측은 없고, 나쁜 징조와 음울한 데이터만 가득하며, 좋은 이야기에도 꼬리를 물듯 그 좋은 이야기 주변, 혹은 이면의 나쁜 이야기를 불러옵니다. 마치 모두가 절망에 중독된 것 같습니다.

  행복하게 산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 같습니다. 결국 목적없이 태어나 의미없이 가야 할 인생인데,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그 모든 것들을 알면서도 한달 뒤, 일년 뒤, 십년 뒤의 미래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오지 않은 곳에서 출발한 공포는 현재를 살아가는 저희를 좀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한 스트레스를 더이상 견디며 살기를 어느정도 포기해버린 것 같습니다. 그냥 저는 지금 이 순간만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냥 이 순간, 내가 즉시 해야 할 것들만 처리하고 받아들이며 살기로 했고, 미래를 상상하길 포기했습니다. 5년 뒤의 나, 10년 뒤의 나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돈을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커리어를 짜고 어떤 플랜을 타임 테이블에 맞춰 세팅하고... 그런 것들을 상상하는 힘이 더이상 제겐 존재하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유치하고 단견적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져 버렸습니다.

  모두가 저마다의 종말을 마주한 채 매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건 과연 어떤걸까요. 저처럼 나약하고 꺾여버린 인간이 아닌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미래를 상상하는 용기를 낼 수 있는 걸까요. 전 그런 평범함과 일반적임조차 부러워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종말의 공포에 꺾이지 않으셨을 여러분 모두가 정말 존경스럽고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정제되지 못한 졸필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종말을 마주하면서도 굳건히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미래가 상상보다 더 나은 것이길 바라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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