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김서현 주인공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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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말, 마운드의 고독
마운드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 조금 붕 떠 있는 느낌이다. 불펜 문이 닫히는 소리는 언제나처럼 멀고 희미하게 들렸다. 관중석의 함성은 웅웅거리는 배경음악 같았다. 마치 오래된 LP판의 노이즈처럼, 익숙하지만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는 소리. 스코어보드의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3:2. 9회말 주자는 없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터프 세이브라고 부른다. 나쁘지 않은 말이다. 어딘가 건조하고, 프로페셔널한 느낌이 든다.
글러브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가죽의 감촉은 늘 똑같다. 길들여진 동물의 피부처럼 부드럽고, 약간의 온기가 느껴진다. 로진백을 만졌다. 하얀 가루가 손가락 사이로 흩날리는 모습은 눈 같기도 하고, 혹은 시간의 먼지 같기도 했다.
포수 미트가 낮게 자리 잡았다. 좋다. 저 위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니, 내 공이 가장 빛날 수 있는 바로 그 지점이다.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몸이 기억하는 일련의 동작들. 마치 잘 짜인 안무처럼, 혹은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울리는 알람처럼 익숙한 움직임이다. 세상이 잠시 느려지는 기분이 든다. 모든 소음이 멀어지고, 오직 나와 포수, 그리고 저기 타석에 버티고 선 타자만이 존재하는 공간.
팔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공은 손가락 끝을 떠나, 마치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포수 미트를 향해 날아갔다. 둔탁한 파열음. 전광판에 숫자가 떴다. 158.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내게 그 숫자는 그냥 숫자일 뿐이다. 어제 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외친 필살기 이름이나, 일본 전지훈련때 편의점에서 파는 맥주 가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과다. 스트라이크.
문득 1루 쪽 응원단상이 눈에 들어왔다. 오렌지색 유니폼 사이로, 새로운 치어리더 노자와 아야카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밝게 웃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캐릭터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경쾌했고, 배경음악처럼 들리던 함성 속에서도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타자에게 집중했다. 그는 방망이를 짧게 고쳐 잡았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 눈빛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나는 그저 내 일을 할 뿐이다. 다시 와인드업. 그리고 공을 던졌다. 이번에도 숫자는 158 언저리를 가리켰다. 파울. 타자는 간신히 공을 건드렸다. 마치 성가신 벌레를 쫓아내려는 듯한 스윙이었다.
나는 모자챙을 다시 한번 고쳐 썼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자기애가 강하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내가 던지는 공을 사랑하고, 삼진을 잡아냈을 때의 짜릿함을 즐긴다. 경기가 끝나고 내 투구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며 만족감에 젖는 것도 사실이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내 영상에 가장 먼저 좋아요를 누르는 것도 나다. 그게 뭐 어떤가. 내가 만들어낸 완벽한 순간을 내가 가장 먼저 축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팬들은 내가 인스타 영상을 올리려고 야구를 잘하는 것 같다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아주 약간은,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완벽한 투구 영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니까.
마지막 공. 포수는 다시 한번 낮은 코스를 요구했다. 좋다. 가장 자신 있는 코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폐 속으로 들어오는 밤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온 힘을 실어 공을 뿌렸다. 공은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미트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타자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스트라이크 아웃!"
심판의 콜 사인과 함께 경기 종료를 알리는 음악이 울렸다. 관중들의 함성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그 소리조차 내게는 조금 멀게 느껴졌다. 나는 마운드를 내려왔다. 샤워장으로 향하는 짧은 길 위에서, 나는 이미 스마트폰을 꺼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 밤 인스타그램 릴스에 올라올, 158km/h 직구 영상을 완벽하게 감상하기 위해서. 어쩌면 아야카도 그 영상에 좋아요를 눌러줄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어쨌든, 오늘도 내 할 일은 끝났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마운드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 조금 붕 떠 있는 느낌이다. 불펜 문이 닫히는 소리는 언제나처럼 멀고 희미하게 들렸다. 관중석의 함성은 웅웅거리는 배경음악 같았다. 마치 오래된 LP판의 노이즈처럼, 익숙하지만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는 소리. 스코어보드의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3:2. 9회말 주자는 없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터프 세이브라고 부른다. 나쁘지 않은 말이다. 어딘가 건조하고, 프로페셔널한 느낌이 든다.
글러브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가죽의 감촉은 늘 똑같다. 길들여진 동물의 피부처럼 부드럽고, 약간의 온기가 느껴진다. 로진백을 만졌다. 하얀 가루가 손가락 사이로 흩날리는 모습은 눈 같기도 하고, 혹은 시간의 먼지 같기도 했다.
포수 미트가 낮게 자리 잡았다. 좋다. 저 위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니, 내 공이 가장 빛날 수 있는 바로 그 지점이다.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몸이 기억하는 일련의 동작들. 마치 잘 짜인 안무처럼, 혹은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울리는 알람처럼 익숙한 움직임이다. 세상이 잠시 느려지는 기분이 든다. 모든 소음이 멀어지고, 오직 나와 포수, 그리고 저기 타석에 버티고 선 타자만이 존재하는 공간.
팔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공은 손가락 끝을 떠나, 마치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처럼 포수 미트를 향해 날아갔다. 둔탁한 파열음. 전광판에 숫자가 떴다. 158.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내게 그 숫자는 그냥 숫자일 뿐이다. 어제 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외친 필살기 이름이나, 일본 전지훈련때 편의점에서 파는 맥주 가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과다. 스트라이크.
문득 1루 쪽 응원단상이 눈에 들어왔다. 오렌지색 유니폼 사이로, 새로운 치어리더 노자와 아야카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밝게 웃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캐릭터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경쾌했고, 배경음악처럼 들리던 함성 속에서도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타자에게 집중했다. 그는 방망이를 짧게 고쳐 잡았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 눈빛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나는 그저 내 일을 할 뿐이다. 다시 와인드업. 그리고 공을 던졌다. 이번에도 숫자는 158 언저리를 가리켰다. 파울. 타자는 간신히 공을 건드렸다. 마치 성가신 벌레를 쫓아내려는 듯한 스윙이었다.
나는 모자챙을 다시 한번 고쳐 썼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자기애가 강하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내가 던지는 공을 사랑하고, 삼진을 잡아냈을 때의 짜릿함을 즐긴다. 경기가 끝나고 내 투구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며 만족감에 젖는 것도 사실이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내 영상에 가장 먼저 좋아요를 누르는 것도 나다. 그게 뭐 어떤가. 내가 만들어낸 완벽한 순간을 내가 가장 먼저 축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팬들은 내가 인스타 영상을 올리려고 야구를 잘하는 것 같다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아주 약간은,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완벽한 투구 영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니까.
마지막 공. 포수는 다시 한번 낮은 코스를 요구했다. 좋다. 가장 자신 있는 코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폐 속으로 들어오는 밤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온 힘을 실어 공을 뿌렸다. 공은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미트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타자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스트라이크 아웃!"
심판의 콜 사인과 함께 경기 종료를 알리는 음악이 울렸다. 관중들의 함성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그 소리조차 내게는 조금 멀게 느껴졌다. 나는 마운드를 내려왔다. 샤워장으로 향하는 짧은 길 위에서, 나는 이미 스마트폰을 꺼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 밤 인스타그램 릴스에 올라올, 158km/h 직구 영상을 완벽하게 감상하기 위해서. 어쩌면 아야카도 그 영상에 좋아요를 눌러줄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어쨌든, 오늘도 내 할 일은 끝났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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