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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소년의 시간⟩ - 무엇이 소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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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드라마 ⟨소년의 시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년의 시간⟩은 정말 경이로운 작품이다.

나는 ⟨소년의 시간⟩이 연기, 연출, 촬영 면에서 가장 진보된 기술과 역량이 총집합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매 화마다 1시간 분량을 원테이크로 촬영하면서, 내내 숨 막혀 터져버릴 듯한 긴장감이 팽팽하게 이어지고, 이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최고의 연기가 경이로움을 완성했다.

특히 칭송하고 싶은 점은 바로 ‘긴장감’이다. 나는 타란티노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평범한 대화마저도 질식할 것 같은 긴장감으로 몰고 가는 연출은 타란티노의 전매특허 중 하나였다. 그와 비슷한 긴장감을 ⟨소년의 시간⟩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한 장면이 아니라 매 화마다 목격할 수 있었다. 특히 3화는 ⟨바스터즈⟩에서 쇼산나와 란다가 슈트루델을 먹는 장면이 절로 떠오른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기꺼이 시청해야 할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경이로움을 충족할 수는 없다. 경이로운 작품은 기술적 완성도에 더해 의미 있는 메시지를 담아야 하고, 그 메시지가 관객을 넘어 시대에 울림을 주어야 한다. 나는 ⟨소년의 시간⟩은 그런 메시지와 울림을 가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소년의 시간⟩은 13살 어린 소년의 살인 사건을 다룬다. 이 작품이 흔한 수사물이었다면 ‘어떻게 소년은 살인을 저질렀는가?’에 초점을 맞췄을 것이다. 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 장르였다면 ‘왜 소년은 살인을 저질렀는가?’에 초점을 맞췄을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아니었다. ⟨소년의 시간⟩은 살인의 과정이나 이유에 대해서는 다소 뭉개고 간다. 명확하게 보여주긴 하지만, 이를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다음과 같은 질문에 주목하게 한다.

‘무엇이 소년을 살인자로 만들었는가?’

그리고 그 무엇으로 ‘남성성(masculinity)’을 지목한다. 하지만 남성성을 단순히 범인으로 비난하거나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남성성의 복잡한 면모를 복합적으로 다룬다. 그런 면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소년의 시간⟩은 남성주의(Masculism) 드라마다.”


두 가지 흐름

⟨소년의 시간⟩은 전체적으로 소년의 살인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매 화가 1시간 분량의 이야기를 리얼 타임으로 보여주며 독립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려면 각 화에 흩뿌려진 단서들을 모아야 한다.

이는 대표적인 미스터리 작법이기도 하다. 작가는 전말을 알고 있지만, 이것을 조금씩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독자가 몰입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특정한 메시지 아래에서 바라보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메시지까지 녹여내는 걸작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그저 사건의 전말을 숨기는 정도에 그친다)

그래서 이 리뷰를 통해 ⟨소년의 시간⟩을 두 가지 흐름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먼저 사건의 흐름을 1~4화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작품이 어떻게 ‘남성성’이라는 주제를 드러내는지 이해하려고 한다. 다음으로 메시지의 흐름을 4~1화에 걸쳐 거꾸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작품이 ‘남성성’에 관하여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려고 한다.


사건의 흐름

1화: 사건의 제시

1화는 제이미라는 소년이 케이티라는 소녀의 살해 용의자로 체포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몇 가지 상황에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현관문을 박살 내고 자동소총을 들이대며 체포한 용의자가 고작 13살이었다. 꼬마 하나 체포하자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 그렇게 체포된 소년이 부모와 떨어져 홀로 각종 절차를 따르는 모습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딱딱한 행정 용어를 읊고 나서 ‘무슨 뜻인지 이해했나요?’라고 묻는데, 13살짜리가 정말 그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소년은 그저 계속해서 ‘내가 안 그랬어요.’를 이야기할 뿐이었다.

여기까지 보면서 소년을 동정하고, 소년에게 감정 이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알고 싶었던 정보가 드러난다. 소년이 정말 살인을 저질렀나? 그랬다. 소년은 살인을 저질렀다. CCTV에 명백하게 촬영되었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소녀를 몇 번이고 찌르는 모습이었다.

1화는 그렇게 사건의 전말을 제시하면서 마무리된다.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는가?’ 이에 대한 물음이 나오기도 전에 답을 알려 준 셈이다. 이는 ‘어떻게’가 작품이 주목하는 지점이 아니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범인과 형사의 두뇌 싸움은 이 사건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관객은 자연스럽게 다음 의문으로 넘어가게 된다. ‘왜 소년은 살인을 저질렀을까?’

2화: 인셀의 등장

2화는 제이미의 살해 동기를 파헤치려는 형사가 학교를 수사하는 모습을 다룬다. 1화를 통해 품게 된 의문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형사는 처음에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다. 대신에 학교가 개판이라는 현실만 목도할 뿐이었다.

그러다 학교에 다니던 형사의 아들을 통해 핵심 단어를 듣게 된다. 인셀, 직역하자면 ‘비자발적 독신주의자’로, 연애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남자를 가리키는 신조어다. 인셀은 복잡한 유래를 가졌고, 현재에는 젠더 갈등의 주요 소재가 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남성 혐오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반대로 여성 혐오적인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 또한 인셀로 지칭되는 집단에 있어서는 마초주의와 페미니즘에 치여 사회적 약자로 따돌려지는 피해의식을 드러내는 말로도 쓰인다.

제이미는 케이티로부터 인셀이라는 모욕적인 소리를 듣게 되었고, 이것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일종의 괴롭힘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살해 동기로 보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이렇게 인셀을 사건의 주요 동기로 부각되면서, 이 작품의 중심에 남성성이 고개를 내밀게 된다.

마지막으로 형사는 제이미의 친구 라이언으로부터 흉기의 소재도 파악하게 된다. 형사는 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모든 근거를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 실체가 깔끔하고 후련하지가 못하다. 오히려 ‘지금 우리 아이들은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커다란 걱정만 이어지게 된다.

3화: 무엇이 소년을 살인자로 만들었는가?

3화는 소년을 평가하는 심리상담사의 상담 모습을 담아냈다. 이미 2화에서 사건의 전말을 동기까지 드러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이미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3화를 보고 나서 그러한 생각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대신 제이미가 얼마나 왜곡된 성역할에 사로잡혔는지 알게 된다.

특히 케이티에 대한 제이미의 생각은 끔찍하면서도 측은했다. 케이티는 가슴을 드러낸 사진이 학교 전체에 퍼지는 끔찍한 일을 겪게 된다. 그런데 제이미는 그런 케이티의 취약함을 자신이 고백할 기회로 생각한다. 만약 제이미가 성인이었고 인셀이 아니었다면, 살인자보다 더 한 악마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하지만 고작 13살이라는 나이와 짝사랑하는 내성적인 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 나이에 할 법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살인으로 이어지지 않고 주먹다짐으로 끝난 일이었다면 어땠을까? 왜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는지, 사랑과 연애란 무엇인지, 머시멜로우를 듬뿍 넣은 핫초코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을 것 같다.

하지만 제이미는 케이티를 살해했다. 그리고 케이티가 죽어도 싼 년이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오히려 의문이 든다. 도대체 무엇이 이 아이를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을까? ⟨소년의 시간⟩은 그 범인으로 왜곡된 남성성을 지목한다. 제이미는 상담사에게 ‘통제’를 운운하며 폭발한다.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지속적으로 위협과 폭력성을 드러낸다. 여기에는 상담사가 여성이라는 점도 영향을 끼친다.

이 모습을 ⟨양들의 침묵⟩처럼 범인과 형사의 심리 싸움이 아니라 남성성의 문제로 이끈 것은 대본의 의도였다. 상담사는 남성성이라는 단어를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제이미의 행동은 그 대사에 따라 왜곡된 남성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자칫 메시지가 극을 압도하는 세련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는 순간이다. 하지만 배우들의 열연이 숨 막히는 긴장감을 선사하며 노골적인 의도를 숨겨 주고, 쉬는 시간의 존재가 분위기를 환기하며 연출적 함정을 비껴간다.

결론적으로 3화는 제이미의 살해 동기를 더욱 명백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무엇이 소년을 살인자로 만들었는가?’ 그 중심에 남성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어쩌다 남성성이 소년을 살인자로 만들었을까? 도대체 우리에게 남성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4화: 남성성의 무게

4화는 제이미의 재판을 앞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겨진 가족에게 연좌제를 부여하는 주변의 폭력으로 시작되지만, 작품이 진짜 주목하는 것은 그 폭력으로부터 가족을 지켜야 하는 제이미의 아빠, 에디의 내면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철물점으로 가족과 함께 차를 몰고 가는 장면이었다. 이때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지극히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대화 이면에 숨겨진 긴장감은 숨이 막히다 못해 질식할 수준이었다. 아빠는 분노로 다소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엄마와 딸은 아빠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계속해서 대화를 편안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노력한다. 언제라도 터질 것 같은 폭탄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어디서 이런 차를 가져왔는지 모르겠지만, 3명이 좁게 한 줄에 앉는 자리 배치는 이러한 긴장감을 더욱 증폭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꾹꾹 눌렀던 아빠의 분노는 결국 폭발하고 만다. 그는 차에 낙서를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를 학생을 위협하고, 차에 페인트를 그냥 뿌려 망쳐 놓고, 이를 지적하는 경비원에게 욕을 하며 위협한다. 그리고 엄마와 딸은 그 모습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 모습은 복합적으로 다가왔다. 아빠의 모습을 단순히 남성성에 내재된 폭력성의 증거라며 비난할 수 있을까? 그것도 맞지만, 동시에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한 발버둥으로 보이기도 한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아들의 범죄를 자신의 탓으로 책망하는 아빠의 눈물을 보며 그런 생각이 더욱 짙어진다.

제이미의 아빠는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 다만 사회 전반에 뿌리박힌 남성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엄마는 이를 ‘욱하는 성질(temper)’이라고 표현하고, 아빠와 아들에게 그런 면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지는 않았다. 이는 작품의 의도이기도 하다. 그 욱하는 성질이 개인에게 비롯된 성격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일종의 역할이라고 보는 것이다.


메시지의 흐름

4화: 우리에게 남성성이란 무엇인가?

4화는 작품을 마무리하며 핵심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에게 남성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 폭력성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책임의 무게로 작용하기도 한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더 큰 괴롭힘으로 이어질 상황에서 드러나는 아빠의 폭력성이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소년의 시간⟩은 남성주의 드라마이지만, 최근에 성행하는 남성주의와는 방향이 다르다. 근래의 극단적 남성주의가 여성혐오를 바탕에 둔 래디컬 페미니즘의 남성 버전이라면, ⟨소년의 시간⟩에서 말하는 남성주의는 남성도 가부장제의 피해자로 보고 있다. 가부장제가 남성에게 특정한 성역할을 부과하고, 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거나, 나약한 모습으로 가족을 지키지 못하면, 그로 인해 여성에게 외면(인셀)받게 된다. ⟨소년의 시간⟩은 사회에 만연한 그러한 구조를 비판하는 작품인 셈이다.

3화: 왜곡된 남성성

제이미를 보며 들었던 생각은 이랬다. “쟤는 어디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배우게 되었을까?” 4화에서 부모의 대화를 통해 그 출처가 인터넷이라는 걸 유추할 수는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의 논리가 그 바탕에 있을 수 있다. 인터넷은 이를 왜곡하여 전달한 고장 난 안경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작품이 제이미를 ‘왜곡된 남성성의 피해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상담사는 ‘사람이 죽었다’라는 점을 언급하며 제이미의 행동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이고, 그에 따른 책임이 제이미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말한다. 다만 이것을 제이미 개인의 일탈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제이미는 고작 13살에 불과한 소년이다. 이 어린 소년이 이토록 왜곡된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분명 사회적 책임도 있다.

2화: 학교라는 사회적 책임의 붕괴

3, 4화가 남성성이라는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데 반해, 1, 2화는 사건의 흐름을 보여주는 데 더 많은 무게가 실려 있다. 그럴 만도 한 게 일단 무슨 이야기가 벌어졌는지 보여주어야 의미를 논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다만 이렇게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왜 해당 화에서 특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는지,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2화에서 놀랐던 점은 학교라는 기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형사가 아이들의 언어와 사고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괜찮을 수도 있지만, 학교 선생님들조차 그렇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게다가 영상 시청으로 대체되는 수업과 여전한 꼰대 짓이 만연한 모습 등은 우리 교육이 기술적 진보에 힘입어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마지막에 아들과 감자튀김을 먹으러 가자는 형사의 모습에서 안도감과 우려가 동시에 느껴지는 이유다. 결국 부모라는 안전망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우리 사회는 아이들이 올바른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 수 있을까? 그 안전망이 현재로서는 부모가 유일해 보이는 것은 지나친 우려일까? 학교는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 작품의 배경이 되는 영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대한민국이 더 걱정된다. 특히나 우리의 문제는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의 진상까지 더해졌다는 점에서 더욱더 그렇다.

1화: 권위와 폭력성은 어떻게 사회적 구조가 되었는가?

왜 이 작품은 의아한 방식을 선택했을까? 제이미라는 13살 꼬마를 체포하기 위해 특공대가 현관을 부수고 자동소총을 들이대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왜 그 꼬마를 부모와 격리해 이해하지도 못할 질문을 퍼붓는 형식적 절차에 시달리게 했을까? 물론 그게 현실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 부분을 강조해서 표현한 측면을 돌아볼 필요는 있다.

제이미를 체포하고 구금하는 과정은 굉장히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물론 흉기를 들면 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로 위험하기 때문에 체포 과정의 과격함은 이해할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체포 이후의 수감 절차는 그러한 변명도 통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분명 13살 꼬마에게 감당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장면을 보면서 경찰이 권위와 폭력을 가진 집단으로서 개인을 위협하는 마초적인 성격으로 느껴졌다. 물론 경찰은 사회 질서를 위해 합법적으로 부과된 폭력을 행사하는 기관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절차와 방식이 불합리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작품은 그 불합리함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담당 형사는 부모에게 처리 방식의 난폭함을 사과한다. 제이미의 동석 보호자는 왜소증이었고, 제이미 학교의 양호 선생님은 오른손이 없는 장애인이었다.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친절할 수 있고, 어쩌면 그들도 사회적 약자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스템은 문제가 있고, 가부장적으로 느껴진다.

사회는 제이미라는 개인을 감옥에 보내며 이 사건을 마무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제이미가 가졌던 왜곡된 남성성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와도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 한 소년이 올바른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우리가 고민하고 개선해 나가야 하는 지점은 생각보다 넓고 뿌리 깊은 곳까지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마치며

⟨소년의 시간⟩은 단순히 하나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없는 복잡한 작품이다. 이 글에서 언급한 내용조차 각자 따로 논의할 필요가 있는 내용들이다. 여기서 언급하지 않은 소셜 미디어의 악영향 같은 소재도 있다. 다만 1~4화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에 ‘남성성’이 있는 것 또한 분명하다. 우리는 시청자로서 제이미가 어쩌다 살인자가 되었는지 알아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의무가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을 경이롭게 만드는 지점이다. ⟨소년의 시간⟩은 우리 시대에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단순히 케이티의 죽음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 남성성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아니다. 남성성은 악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남성성이 어떤 모습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되돌아볼 필요는 있다.

어쩌면 언젠가는 성역할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 남성성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때까지 ⟨소년의 시간⟩은 분명 우리에게 좋은 울림을 주는 작품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이 작품에서 말하는 남성주의가 페미니즘처럼 느껴진다면, 그 느낌이 맞다. 처음에 이러한 맥락의 남성주의가 시작된 곳이 페미니즘이기도 하고, 나조차도 4화를 보기 전까지는 페미니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면에서 4화는 이 작품의 메시지를 완성하는 화룡점정이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의 마무리가 아쉬웠다는 의견을 여럿 보았다. 하지만 4화의 스토리, 연출, 그리고 아빠 역할을 맡았던 스티븐 그레이엄의 연기는 정말 최고였다. 3화의 폭발하는 에너지도 좋았지만, 나는 4화가 폭발하는 에너지를 내면으로 수용하는 더 고차원적인 연출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 형사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다들 몸이 참 좋다. 작품의 주제를 생각했을 때 의도된 캐스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에 비하면 제이미는 정말 연약해 보인다. 그런데 살인자는 제이미였다. 이 점도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 아들과 딸을 모두 부모로 가진 사람이라면, 특히 아빠라면, 이 작품이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하다. 나는 아직 아이가 없다. 아마 아이가 생긴다면, 지금처럼 드라이하게 이 작품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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