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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좌파란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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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좌파란 존재하는가?


1. 탄핵이 통과된 날 저녁, 여의도의 한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한 후배가 문득 말을 꺼냈습니다. "선배들이 부른 강의실에 갔더니, 수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모여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이 저에게 ‘김일성에 대한 충성 맹세’를 강요했어요.
바로 그 자리에서 나와 그들과 결별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1학년 시절, 그들 밑에서 배운 적도 있고, 이후
그 조직에서 벗어나면서도 가까운 거리에서 학생운동을 계속해 온 나로서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애국자 대회"(그 모임의 이름은 애국자 대회입니다)
참석한 적이 있지만 그런 경험을 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2. 학생운동이 NL 주사파의 손에 완전히 넘어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
시절, PD 계열에 속해 있던 저는 숨막히는 절망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의 벽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찌라시 하나, 대자보 하나 붙이기 힘들었습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나갈 통로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 시절, 제 작은 세상에선 그들은 멀리 있는 군사독재 정권보다 더 크게 느껴지
는 독재자였습니다.  우리가 붙인 찌라시를 떼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찌라시를 붙이고, 우리
가 붙인 대자보 위에 그들의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3.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절망하게 한 것은, 종교보다 더 종교적인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학
생들을 보면서 느낀 "반지성주의"였습니다. 학생운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그들에게 우리는
늘 분열주의자, 분파주의자로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어째서 가장 순수하고 합리적이어야
할 학생들이 저런 사상을 신봉하는 것일까? 그들은 ‘어머니다운 품성’을 강조하고 "품성론"을
배우고,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되뇌며 수령관을 배웠습니다. 가장 먼저 PD 계열로 전향
했던 저는 골칫거리이자 "악마화"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어느 술집 앞을 지나던 날, NL 계열의 후배들이 술에 취해 저에 대해 욕을 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들은 저와 대화를 나눈 적조차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4. 애국자 대회에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날이 떠오릅니다. 40여 명의 NL 조직원들 사이에서
저는 조용히 일어섰습니다. 지금은 남북 청년학생 축전 같은 걸 할 때가 아니라, 이제 막 시작
된 전교조 투쟁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공기는 한순간에 얼어붙었고, 저는
그들의 시선 속에서 고립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저를 공격한 것은 놀랍게도 선배들이 아니었
습니다. 제가 가장 절친하게 지내던 동기들이었습니다. 인간이란 멀리 있는 강적보다 가까운
배신자를 더 미워하게 마련입니다. 내내 고통스럽기만 했던 대학 시절, 같은 계열의 한 친구
가 내게 건넨 말은 비수처럼 날카로웠습니다. "네가 NL이랑 싸우는 동안 우리는 파쇼랑 싸웠
어." 그 말에 제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시절, 제가 좋아하던 경
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싸움의 내용이 싸움 후의 세계를 결정한다." 나는 그 문장을 붙들고
싶었지만 의문이 들었습니다. 작은 목소리조차 용납하지 않으며, 종교적인 신념으로
뭉친 저 결사가 과연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5.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30대 중반이 지난 어느 날, 여의도 앞에서 우연히 동기를
만났습니다. 애국자 대회 당시, 저에게 가장 큰 힐난을 했던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 영업 일을
한다던 그는 세상살이의 고단함 속에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그 시절, 그토록
혐오하던 자본가의 입장에서, 자본가의 논리를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10여 년이란 시간 동안 그의 얼굴은 폭삭 늙어 있었습니다. 나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형편없는 학점, 정상적인 취업의 길에서 밀려난 우리는 학원 강사, 영업 사원 같은 자리를 전
전하며 정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겪었을 삶의 무게가 어떤 것이었을지, 내가 감히 묻
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결국 그에게 묻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주체사상을 신봉하
느냐"고. 그것은 의미 없는 질문이었을 겁니다. 그 시절 우리가 감당해야 했던 두려움과 희생
을 보상해 줄 수 있는 체계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요.

결국 인간은 유리처럼 부서지기 쉽고,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 시절, 우리
는 어리석고 나약한 청년들이었습니다. 무언가에 매달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시절이었
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이 옳았든, 옳지 않았든 간에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대가를 치렀습니
다. 그렇게 우리는 몰락했습니다. 희망을 부여잡고 있던 손도, 그 손에 남아 있던 조각마저도
이미 퇴락해 버렸습니다.


6. 서양의 68세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듯이, 우리 세대도 언젠가는 흔적 없이 사라질 것
입니다. 우리가 품었던 신념, 우리가 나눈 기억, 그 모든 것들이 먼지처럼 흩어질 날이 올 겁
니다. 주사파였던 사람들, 그들이 북한에 대해 품고 있던 최소한의 우호적 태도란, 어쩌면 인
간의 꼬리뼈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라져버린 기관의 흔적, 무의미한 유물처럼 말입
니다. 하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이 PD 계열이 과거에 예언했던 대로 가장 먼저 제도권과 결합
했습니다. 그리고 보수화되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보수
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지속성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인데, 그들은 이미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대립했던 이념, 그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적대감조차 이제는 흐릿해졌습니다.


7. 총선이 한창이던 시절, "종북좌파"라는 주문을 외우는 목소리가 "국민의힘" 전체를 뒤덮었
습니다. 그들은 자신과 조금이라도 생각이 다르면 망설임 없이 "종북좌파"라는 프레임을 씌웠
습니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듯이, 처음에는 이들을 그저 철 지난 사
고방식을 가진 일부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과거 종북 세력의 위협이 그들에게 트라우마로 작
용했을 수도 있다고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계엄을 지나며 이들이 모두 진지했다는 사실
에 나는 경악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피해의식과 공포에 시달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떠올랐습니다. 의학에서 이를 "망상 장애"라 부릅니다. 예전에는 "편집증"이라는 이름으
로 더 흔히 불렸던 증상입니다.  "국민의힘"을 보면, 집단적인 망상 장애를 겪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종북좌파" 척결은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신념입니다. 이 신념을
위해 그들은 공동체가 쌓아올린 합의와 질서를 망설임 없이 거부합니다. 그 모습은 문명인
이 아니라, 지하드를 선포한 광신적인 집단을 떠올리게 합니다. 논리적 설득은 불가능하며,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그들의 미망(迷妄)은 우리 사회에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보수 진영 내에서 그나마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인사들조차 이 주문을 기
꺼이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이준석이든 유승민이든, "종북좌파"라는 낡은 주문을 꺼리는 기색
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도 이 광신적 신념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셈입니다.


8. 과거의 일기장을 뒤지다 보니, 한 구절이 눈에 띕니다.
"한나라당은 정권을 탈취할 수 있다면 지옥에서 악마라도 데려올 것이다."
아마도 이명박을 겨냥해 쓴 말이었겠지요. 그 시절 저는 이런 예언을 대단한 통찰처럼 여겼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고작 이명박이라니, 제 상상력의 한계를 스스로 깨닫
고 민망해질 따름입니다.
그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최종적인 결실이 윤석열이라는 인물일 줄은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실로 인해 시대의 시곗바늘이 40년이나 뒤로 돌아갈 뻔한 것을 예상
이나 했겠습니까.


9. 그들이 진정한 우리 시대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려면, 이제는 이런 철지난 주문과 이데올로기
공세를 멈춰야 합니다. 이제는 과거의 유령과 싸우느라 현재를 희생시키는 일을 그쳐야 합니
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공동체, 공화국의 파괴범이란 오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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