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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쉬워서 놀랐다" 명성황후 시해 가담자 편지


"의외로 쉬워서 놀랐다" 명성황후 시해 가담자 편지
을미사변에 가담했던 당시 일본의 외교관이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고 고향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가 일본에서 발견됐습니다.
"생각보다 쉬워서 놀랐다"는
감상까지 적혀 있었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다음날
1895년 10월 9일.
당시 일본 영사관보였던 호리구치 쿠마이치가
고향인 니가타현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나고야의 고문서 수집가가 입수한
이 편지를 해독한 사학자 김문자 씨는
"사건의 세부 내용이나 가족에 관한 기술로 볼 때
본인의 진필이 틀림없다"고
아사히 신문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그는 "현역 외교관이 임지에서 왕비 살해에
직접 관여했다고 알리는 문구에서 충격을 받았다"며,
"아직도 불명확한 점이 많은 사건의 세부를 밝히는
열쇠가 되는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평가했습니다.


 





편지를 쓴 호리구치는 동경대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 외교관으로 을미사변에 가담한 이후
브라질 대사 등으로 출세를 거듭했습니다.


 



 


을미사변은 당시 일본 공사였던 미우라 고로의 지휘로
일본 군인과 낭인들이 경복궁 내 건청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참혹하게 살해하고 불태운 사건인데,
일본 정부가 개입돼있음을 보여주는
또다른 자료가 나온 겁니다.
편지의 주인공인 호리구치를 포함해
을미사변 관련자 50여명은 사건 직후 일본으로 귀국해
재판을 받았지만 전원 무죄 석방됐고,
오히려 영웅 대접까지 받았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사실 목격자가 없는 사건


(모두 살해되었음)


원래 이런 일들은 증거가 잘없는 이유가


공개되고 노출되는거 자체가


실패를 의미 하기 때문 


 


우연히 진실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는 자료가


하나 더 나온 상황


 


해석된 전체 내용을


꼭 보고 싶네요


 


 


============================================================


 


아래는 고영근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 가담자인


우범선 살해사건을 간략히 정리


 


1875.9 운요호 사건


 


1876.2 강화도 조약


 


1894년-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승리


 


이후 위기의식을 느낀 황후는


러시아쪽에 서고, 일본을 견제


 


그러자 일본은 시해를 위한


계획을 세움 이유는


민씨일가가 중심 세력이었고


황후는 외교적으로 러시아를


이용하려 했음


 


여우=명성황후



 


1895년 10.8 을미사변


 


을미사변이 일어난 경복궁의 옥호루 (좌)


시해에 가담한 일본 낭인들 (우)


 


현재 옥호루는 일제에 의해 헐린걸 복원한 것

 


 


 


 


도 가츠아키의 검


 


에도시대 장인이 만든칼로


황후의 시해때 사용된걸로 알려짐


후쿠오카현  쿠시다 신사에


시해 가담자인 도 가츠아키가 기증


 


 


도 가츠아키의 칼 을미사변 당시 사용됨

 


 


 


 


우범선


(친일 인물)


 


조선인, 중인출신 훈련대 제2대대장


황후가 시해될때 망도 봐주고


시신 확인 및 처리하는 과정에도 가담


 




 


우범선의 일본인 아내와 아들 우장춘 박사


 


 


 


고영근은 


1899년 일본으로 간다


 



 


일본 구레시


우범선의 옛 집터


고영근은 우범선에 소개받아 집을 얻으며


그와 1km 내외 떨어진 곳에 거주하게 됨


 



 


 1903년 11월, 24일


고영근은 우범선에게 가족들과 같이 살집을


구한다고하고 얻은 새집에 대한 계약을 마치고


우범선을 초대 하였다


 



 


고영근과 노윤명은 우범선의


목과턱에 수차례 칼을 찌르고


쇠망치로 머리를 난타하였고


우범선은 그자리에서 즉사한다


 



 


고영근과 노윤명은


그날 저녁 바로 자수하고


 


재판을 거쳐


고영근은 사형


노윤명은 무기징역 형을


받게됨


 



고영근

 


 


 


 


 


고종은 고영근을 살리려 했다


민영환 민영소를 하야시 공사에게 보내


선처를 부탁함


 



 


1904년 이토 히로부미에게도


선처를 부탁한다


당시 러일전쟁 준비중이던 일본은


고종을 무시 할 수 없었다


 



 


결국 고영근은 무기징역 형을 받고


8년간의 수감을 거쳐


1911년 출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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