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영주권을 포기하려는 사람의 푸념
안녕하세요! 항상 눈팅만 하던 유령회원이었지만 왠지 오늘 따라 여러 회한도 들고 생각도 정리하고 싶어 제 영주권을 포기하려는 자기변명?합리화를 얼굴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져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제목 그대로 입니다. 아직 포기신청서를 넣은 건 아니지만 결국 이러니저러니 하다 영주권 만료 끝나고 포기하게 될 거 같습니다.
요즘 한국의 미래가 대단히 불투명해지면서(출산률이나 경제붕괴나 전쟁위기나 성별과 정치 갈등 등...) 많은 사람들이 흥미본위건 진지하건 이민과 이주에 대해 찾아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많이 나오는 곳 중 하나가 미국 캐나다 호주 일본 인 듯 하고 그 중에서도 미국 영주권의 프레스티지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미 영주권자라 그런 분들이 더욱 눈에 띈 걸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제가 뭐 여기서 미국을 욕하거나 멍청한 생각이라거나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저는 말하자면 낙오자고, 이민을 생각하시려는 진취적이고 행동력 있는 분들과는 정 반대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글은 뭔가를 주장하려는 목적보다는 패배자의 푸념 정도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제 두서없는 푸념 이전에 제 미국에서의 삶을 좀 말씀드려야 좀 이해하실지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어 그것부터 공유해보겠습니다.
저는 미국과 좀 기묘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어린 시절에 미국이라고 하면 친척이나 친지가 미국에 있는 가정을 생각하곤 합니다만, 저희 가정은 그런 혈연은 없었습니다. 다만 부모님은 두분 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나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시며 외동인 저를 키워주셨고, 당시에 그렇게 여유롭지 않은 집임에도 불구하고 미주 영어캠프를 보내주시곤 하셨습니다. 요즘도 있는진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그러니 한 15년 전 이겠군요, 에는 그런 종류의 캠프가 참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LA 인근의 교포가 운영하는 영어캠프에 초등학교 때 갔었는데 솔직히 말해 이때부터 대단히 좋지 못한 경험을 했었습니다. 그 교포는 외동떨어진 타운에 아이들 열댓명을 몰아넣고 한인교포청년 하나를 대충 가디언 삼아 애들을 관리했습니다. 근처 공립학교에 포터로 애들을 날라 등하교를 시켰고 숙소로 돌아오면 불법복사한 교재를 무한정 풀게 했었습니다. 학교에선 인종차별 때문에 괴로웠고 숙소생활은 폭력적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때리고 윽박지르고 모욕하고 가디언 하나는 지속적으로 남자아이들의 성기를 만지거나 조롱하며 성폭력을 가했지요. 게이인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강제로 수음을 시키거나 서로를 수음시키게 하거나 하는 일들을 반복했습니다. 당시 전 그게 어떤건지 몰랐고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치욕스럽고 자괴감이 느껴지지만 이젠 복수라거나 원한을 갚겠다는 생각조차 안 들고 그저 잊고 싶은 기억일 뿐인 것 같습니다. 숙소생활을 제외해도 교사와 미국의 학생들에게 다종다양한 인종차별을 경험했고 주먹다짐이나 따돌림, 교사의 노골적인 비웃음 틈바귀에서 그렇게 행복했던 것 같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좀 나아졌기를 바랍니다.
그런 식으로 초등학교 방학 때 몇번 미국에 다녀오고 전 한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음, 솔직히 말해 도피유학이라고 해야겠지요. 저는 지지리도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아마 부모님도 고민이 많으셨을겁니다. 그래서 저에게 미국의 보딩스쿨 유학을 권하셨고 저는 별 생각없이 동의했습니다. 솔직히 한국에 있었으면 멀쩡한 대학을 갈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전 미국 남부의 좀 이상하고 동떨어진, 보통 사립 보딩 스쿨 하면 떠올릴만한 곳의 정 반대인 곳에 2학년으로 입학하여 3년을 다니다 졸업했습니다. 물론 그때도 공부는 안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제가 그 학교에서 제일 공부 못하는 아시안 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미국 교육하면 떠오르는? 자유지상적이고 개방적인 교육 시스템에 더해 학교 자체가 좀 히피스러운 곳이었기에 전 별 부담 없이 즐겁게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때가 참 즐거운 기억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때도 학생들이 마약난교를 하다 걸린다던지, 동네에 산불이 미국스케일로 나서 한 학기 통채로 연기와 검은 잿물 강 속에서 보냈다던지, 선생이 대놓고 대마를 하며 학생을 부른다던지같은 좀 미국스러운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적어도 당시에 전 큰 상처없이 보냈습니다.
결국 대학을 가야 할 순간이 왔는데 앞서 말씀 드렸듯 전 공부를 정말 못하는 놈이었습니다. 제 SAT 성적으로는 어디 명함도 내밀 수 없었죠. 아시안 스테레오타입을 깨는 모델이라고 하면 좀 유쾌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당시 모든 과목에서 꼬라박던 저는 그나마 그 중에서 미술을 그나마 괜찮게 했고 주에서 연 학생미술경연 때 상을 받고 제 그림이 걸린 적도 있었기에 미대를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미대는 컷이 훨신 낮다는거였겠습니다만... 아무튼 전 마지막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열심히 포트폴리오를 (미대유학원의 보조를 받아)제작했고 다행히도, 아니면 참 비극적이게도 제가 지원한 미대에 전부 붙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남부 오지에 질린 저는 대도시에 가고 싶어 호기롭게 뉴욕에 있는 미대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어쩌면 그냥 대학 학비로 다른 걸 하는게 나았을지도 모르겠군요.
뉴욕에서의 생활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습니다. 제 미술의 재능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도시는 험상궂고 차가웠습니다. 가끔 처연하게 아름다운 대도시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학비와 물가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성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었기에 상대에게 불쾌한 경험을 준 적도 있었고 저 스스로도 부끄러운 실수가 많았었습니다. 그렇게 몇년 다니다가 전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에 저는 부모님이 미 영주권을 취득하시며 저도 영주권자가 되었습니다.
군대는 운 좋게도 카투사를 갔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좀 거주한, 적어도 영어 대화에선 별 문제가 없던 카투사였고 당시 미군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의 비호 속에서 속된 말로 꿀을 신나게 빨 수 있었습니다. 이제와선 당시 이기적이고 게을렀던 당시 저 때문에 고생을 했을 후임들에게 미안해집니다. 아무튼 좀 논란이 될 수 있는 말이겠습니다만,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 카투사에 있었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제대 뒤 다시 복학을 했습니다. 미국은 군대휴학이 없어서 재입학을 한 거긴 하지만 재입학은 딱히 어렵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군대 가기 전에 만든 지인들이 모두 졸업을 했다는 거였습니다만 뭐 이건 모든 복학생의 딜레마 아니겠습니까. 전시작업을 준비하며 다시금 학교에 적응하려던 저에게 생긴 진짜 문제는 복학한지 얼마 되지않아 터진 코로나였습니다.
뉴욕의 락다운이 뉴스가 되던 시절을 지금도 기억하실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시에 거기에 있었습니다. 수업은 리모트가 되었고 기숙사는 룸메이트를 포함해 대다수가 자기들의 고향으로 사라졌습니다 .코로나덕에 미국에 거주하지 못하게 된 부모님은 영주권을 놓아버리셨습니다. 항상 시끄럽고 막히던 거리는 텅 비었고 간간히 우버이츠 배달부와 시체를 나르는 냉동탑차만이 거리를 달렸습니다. 대부분의 가게가 닫았고 학교의 시큐리티도 대부분 자리에 없었습니다. 뉴스에선 사람이 죽어나가는 등의 좋지 못한 이야기들로 가득했습니다. 당시 기숙빌딩 같은 층에 있던 사람은 저와 대만 출신 유학생 한명뿐이었는데 저흰 마치 약속이라도 했듯 11시쯤에 문을 열고 서로의 안부를 말없이 확인하곤 했습니다. 그 친구의 연락처라도 얻어둘 걸 그랬다고 지금도 후회하곤 합니다. 좀 시적으로 써보자면, 당시 뉴욕은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저는 다행히 기숙빌딩 근처의 아시안 식당에서 테이크아웃으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느낀 부정적인 감정과, 뭐라 말하기 힘든 미국사회에 대한 불신이 아직도 제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여기엔 오직 나 뿐이며, 누구도 날 도와줄 수 없고 내가 무슨 일이 생겨도 바로 찾아와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지독한 이방인의 고독감이 가장 괴로웠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버틴 끝에 비행기 표를 구해 귀국했습니다. 어차피 수업은 모두 리모트였기에 굳이 미국에 있을 필요는 없었던 게 다행이었습니다.
그렇게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때에 전 졸업을 했습니다. 한국에서요. 줌으로 졸업식을 진행했고 전 랩탑 화면에서 제 졸업사진을 봤습니다. 학교에서 지원해주던 프로그램은 모두 셧다운되어있었고 전 미국에 있지도 않았기에 미국에서 취직처를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제가 용기와 근성을 보이며 미국으로 건너가 뭐라도 시도했으면 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겁쟁이에 게으른 놈이었고 미국에 돌아갈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러저러 레주메를 찔러보긴 했습니다만 제대로 된 경력도 없고 포트폴리오도 쳐지는 놈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프리랜서로 시작하자, 그리고 기회를 엿보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프리랜서 생활은 생각보단 괜찮았습니다. 대부분은 상업적이라 하기 힘든 커미션 부류였지만 그래도 벌이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비로운건지 돈이 많은건지 유치한 그림에 괜찮은 가격을 쳐주곤 했습니다. 한국 기준으로 부끄러운 벌이는 아니었지만 말인 즉슨 미국에서 생활할 수 있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는 뜻이었습니다. 단지 전 영주권 유지를 위해 간간히 미국에 방문했다가 한국에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하며 불안정한 프리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에 한계를 느끼고 서부에서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싼 렌트를 내며 미국에 정착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프리랜서로 돈을 벌고 렌트의 보조를 받으며 취업을 해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 낮은 수준의 누더기같은 포트폴리오는 아무 곳에도 통하지 않았고 저는 정말 딱 렌트비와 식비만 나오는 수준으로만 돈을 벌었습니다. 그것도 결국 한계를 맞이하고 결국 전 귀국했습니다. 물론 금전적인 영향 외에도 노숙자들에게 둘러쌓여 현금을 뜯기거나 길가에 즐비한 마약중독자에게 걸핏 겁을 먹거나 하는 일들 때문에 미국에서 더 버틸 의지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돌아오자 저를 맞이한 건 부모님 중 한 분의 암과 조부의 영면이었습니다. 저는 상을 치르고 병간호를 했습니다. 꼴에 프리랜서라고 병상 옆 책상에서 그림작업을 하며 간병을 했습니다. 다행히도 초기에 발견된 암이고 부모님도 체력과 근력이 남다른 분이셔서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전 여전히 한국에 있습니다.
저는 이제 더이상 미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토록 원하는 영주권이고, 대단한 기회의 징검다리입니다만, 제 나약함과 무능함, 그리고 나쁜 것부터 먼저 떠올리게 된 부정적인 정신은 한국에 남고 싶어하는 듯 합니다. 제 글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저는 변명이 많고 자기합리화를 꽤나 잘합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이라면 분명 낼 수 있을 한줌의 용기, 배짱, 노력, 치열함조차 없는 사람이기에 미국에서 사는 저 자신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미국사회에서 버틸 능력도 근성도 없고 미국사회를 부정적으로 느끼게 되었고 소중한 사람들이 제가 없는 곳에서 아프고 사라진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미국은 대단한 나라입니다. 유능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많고 사회는 역동적이고 대도시는 활기찹니다. 굳이 경제지표나 뉴스를 보지 않아도 미국의 큰 도시와 좋은 카운티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물자는 넘치도록 풍부하고 세계 모든 것들이 이곳에 모입니다. 능력있는 사람들을 제대로 평가해주고 몇배의 기회를 부여합니다. 평범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문제 없이 삶을 꾸려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같은 낙오자에겐 자비가 없고 고독함을 느끼게 하는 곳 같습니다. 저는 늘 미국에 있으면서, 바에서 술을 마시고 같이 게임을 하고, 사람들과 스몰토크도 나누고 짧고 비루한 연애도 해봤지만 그 모든 순간에 전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무슨 치안이라던가 총기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 졸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치 고장난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혼돈스럽고 파괴적인 슬픔과 자괴감이 저를 항상 덮쳐왔습니다.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하는 것 같고, 소중한 인연들은 수백수천 미터 밖에 있고 저의 무능함은 항상 저를 무자비하게 두들겼습니다. 외모도, 능력도, 자산도, 의지도 없는 저는 무너지는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한 채 이제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적어도 가족과는 함께 있고자 합니다.
물론 모두 말하는 대로 한국은 망조의 길에 들어섰고 좋지 못한 전망 뿐이며 미국은 미래가 보장된 최강의 대국이겠지만, 설령 그게 근시안적인 안락일지언정, 제가 이 순간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다행히도 전 도망과 자기합리화엔 꽤나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또 다른 편안함으로 도망칠지도 모르겠군요.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낙원 씩이나 바라며 도망치려는 것도 아닌 법이죠. 단지 이 순간에도 저를 위해 많은 걸 지원해주시고 희생하신 부모님의 노력을 헛되게 한 것에 대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길고 우울하며 조잡한 푸념을 여기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세상엔 저 같은 탕아도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지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건너가시려는 분들, 분명 저와 다르게 멋진 삶을 사실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모두 좋은 하루 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내용은 제목 그대로 입니다. 아직 포기신청서를 넣은 건 아니지만 결국 이러니저러니 하다 영주권 만료 끝나고 포기하게 될 거 같습니다.
요즘 한국의 미래가 대단히 불투명해지면서(출산률이나 경제붕괴나 전쟁위기나 성별과 정치 갈등 등...) 많은 사람들이 흥미본위건 진지하건 이민과 이주에 대해 찾아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많이 나오는 곳 중 하나가 미국 캐나다 호주 일본 인 듯 하고 그 중에서도 미국 영주권의 프레스티지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미 영주권자라 그런 분들이 더욱 눈에 띈 걸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제가 뭐 여기서 미국을 욕하거나 멍청한 생각이라거나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저는 말하자면 낙오자고, 이민을 생각하시려는 진취적이고 행동력 있는 분들과는 정 반대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글은 뭔가를 주장하려는 목적보다는 패배자의 푸념 정도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제 두서없는 푸념 이전에 제 미국에서의 삶을 좀 말씀드려야 좀 이해하실지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어 그것부터 공유해보겠습니다.
저는 미국과 좀 기묘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어린 시절에 미국이라고 하면 친척이나 친지가 미국에 있는 가정을 생각하곤 합니다만, 저희 가정은 그런 혈연은 없었습니다. 다만 부모님은 두분 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나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시며 외동인 저를 키워주셨고, 당시에 그렇게 여유롭지 않은 집임에도 불구하고 미주 영어캠프를 보내주시곤 하셨습니다. 요즘도 있는진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그러니 한 15년 전 이겠군요, 에는 그런 종류의 캠프가 참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LA 인근의 교포가 운영하는 영어캠프에 초등학교 때 갔었는데 솔직히 말해 이때부터 대단히 좋지 못한 경험을 했었습니다. 그 교포는 외동떨어진 타운에 아이들 열댓명을 몰아넣고 한인교포청년 하나를 대충 가디언 삼아 애들을 관리했습니다. 근처 공립학교에 포터로 애들을 날라 등하교를 시켰고 숙소로 돌아오면 불법복사한 교재를 무한정 풀게 했었습니다. 학교에선 인종차별 때문에 괴로웠고 숙소생활은 폭력적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때리고 윽박지르고 모욕하고 가디언 하나는 지속적으로 남자아이들의 성기를 만지거나 조롱하며 성폭력을 가했지요. 게이인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강제로 수음을 시키거나 서로를 수음시키게 하거나 하는 일들을 반복했습니다. 당시 전 그게 어떤건지 몰랐고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치욕스럽고 자괴감이 느껴지지만 이젠 복수라거나 원한을 갚겠다는 생각조차 안 들고 그저 잊고 싶은 기억일 뿐인 것 같습니다. 숙소생활을 제외해도 교사와 미국의 학생들에게 다종다양한 인종차별을 경험했고 주먹다짐이나 따돌림, 교사의 노골적인 비웃음 틈바귀에서 그렇게 행복했던 것 같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좀 나아졌기를 바랍니다.
그런 식으로 초등학교 방학 때 몇번 미국에 다녀오고 전 한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음, 솔직히 말해 도피유학이라고 해야겠지요. 저는 지지리도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아마 부모님도 고민이 많으셨을겁니다. 그래서 저에게 미국의 보딩스쿨 유학을 권하셨고 저는 별 생각없이 동의했습니다. 솔직히 한국에 있었으면 멀쩡한 대학을 갈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전 미국 남부의 좀 이상하고 동떨어진, 보통 사립 보딩 스쿨 하면 떠올릴만한 곳의 정 반대인 곳에 2학년으로 입학하여 3년을 다니다 졸업했습니다. 물론 그때도 공부는 안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제가 그 학교에서 제일 공부 못하는 아시안 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미국 교육하면 떠오르는? 자유지상적이고 개방적인 교육 시스템에 더해 학교 자체가 좀 히피스러운 곳이었기에 전 별 부담 없이 즐겁게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습니다. 그때가 참 즐거운 기억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때도 학생들이 마약난교를 하다 걸린다던지, 동네에 산불이 미국스케일로 나서 한 학기 통채로 연기와 검은 잿물 강 속에서 보냈다던지, 선생이 대놓고 대마를 하며 학생을 부른다던지같은 좀 미국스러운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적어도 당시에 전 큰 상처없이 보냈습니다.
결국 대학을 가야 할 순간이 왔는데 앞서 말씀 드렸듯 전 공부를 정말 못하는 놈이었습니다. 제 SAT 성적으로는 어디 명함도 내밀 수 없었죠. 아시안 스테레오타입을 깨는 모델이라고 하면 좀 유쾌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당시 모든 과목에서 꼬라박던 저는 그나마 그 중에서 미술을 그나마 괜찮게 했고 주에서 연 학생미술경연 때 상을 받고 제 그림이 걸린 적도 있었기에 미대를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미대는 컷이 훨신 낮다는거였겠습니다만... 아무튼 전 마지막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열심히 포트폴리오를 (미대유학원의 보조를 받아)제작했고 다행히도, 아니면 참 비극적이게도 제가 지원한 미대에 전부 붙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남부 오지에 질린 저는 대도시에 가고 싶어 호기롭게 뉴욕에 있는 미대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어쩌면 그냥 대학 학비로 다른 걸 하는게 나았을지도 모르겠군요.
뉴욕에서의 생활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습니다. 제 미술의 재능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도시는 험상궂고 차가웠습니다. 가끔 처연하게 아름다운 대도시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학비와 물가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성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었기에 상대에게 불쾌한 경험을 준 적도 있었고 저 스스로도 부끄러운 실수가 많았었습니다. 그렇게 몇년 다니다가 전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에 저는 부모님이 미 영주권을 취득하시며 저도 영주권자가 되었습니다.
군대는 운 좋게도 카투사를 갔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좀 거주한, 적어도 영어 대화에선 별 문제가 없던 카투사였고 당시 미군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의 비호 속에서 속된 말로 꿀을 신나게 빨 수 있었습니다. 이제와선 당시 이기적이고 게을렀던 당시 저 때문에 고생을 했을 후임들에게 미안해집니다. 아무튼 좀 논란이 될 수 있는 말이겠습니다만,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 카투사에 있었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제대 뒤 다시 복학을 했습니다. 미국은 군대휴학이 없어서 재입학을 한 거긴 하지만 재입학은 딱히 어렵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군대 가기 전에 만든 지인들이 모두 졸업을 했다는 거였습니다만 뭐 이건 모든 복학생의 딜레마 아니겠습니까. 전시작업을 준비하며 다시금 학교에 적응하려던 저에게 생긴 진짜 문제는 복학한지 얼마 되지않아 터진 코로나였습니다.
뉴욕의 락다운이 뉴스가 되던 시절을 지금도 기억하실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시에 거기에 있었습니다. 수업은 리모트가 되었고 기숙사는 룸메이트를 포함해 대다수가 자기들의 고향으로 사라졌습니다 .코로나덕에 미국에 거주하지 못하게 된 부모님은 영주권을 놓아버리셨습니다. 항상 시끄럽고 막히던 거리는 텅 비었고 간간히 우버이츠 배달부와 시체를 나르는 냉동탑차만이 거리를 달렸습니다. 대부분의 가게가 닫았고 학교의 시큐리티도 대부분 자리에 없었습니다. 뉴스에선 사람이 죽어나가는 등의 좋지 못한 이야기들로 가득했습니다. 당시 기숙빌딩 같은 층에 있던 사람은 저와 대만 출신 유학생 한명뿐이었는데 저흰 마치 약속이라도 했듯 11시쯤에 문을 열고 서로의 안부를 말없이 확인하곤 했습니다. 그 친구의 연락처라도 얻어둘 걸 그랬다고 지금도 후회하곤 합니다. 좀 시적으로 써보자면, 당시 뉴욕은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저는 다행히 기숙빌딩 근처의 아시안 식당에서 테이크아웃으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느낀 부정적인 감정과, 뭐라 말하기 힘든 미국사회에 대한 불신이 아직도 제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여기엔 오직 나 뿐이며, 누구도 날 도와줄 수 없고 내가 무슨 일이 생겨도 바로 찾아와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지독한 이방인의 고독감이 가장 괴로웠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버틴 끝에 비행기 표를 구해 귀국했습니다. 어차피 수업은 모두 리모트였기에 굳이 미국에 있을 필요는 없었던 게 다행이었습니다.
그렇게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때에 전 졸업을 했습니다. 한국에서요. 줌으로 졸업식을 진행했고 전 랩탑 화면에서 제 졸업사진을 봤습니다. 학교에서 지원해주던 프로그램은 모두 셧다운되어있었고 전 미국에 있지도 않았기에 미국에서 취직처를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제가 용기와 근성을 보이며 미국으로 건너가 뭐라도 시도했으면 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겁쟁이에 게으른 놈이었고 미국에 돌아갈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러저러 레주메를 찔러보긴 했습니다만 제대로 된 경력도 없고 포트폴리오도 쳐지는 놈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프리랜서로 시작하자, 그리고 기회를 엿보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프리랜서 생활은 생각보단 괜찮았습니다. 대부분은 상업적이라 하기 힘든 커미션 부류였지만 그래도 벌이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비로운건지 돈이 많은건지 유치한 그림에 괜찮은 가격을 쳐주곤 했습니다. 한국 기준으로 부끄러운 벌이는 아니었지만 말인 즉슨 미국에서 생활할 수 있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는 뜻이었습니다. 단지 전 영주권 유지를 위해 간간히 미국에 방문했다가 한국에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하며 불안정한 프리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에 한계를 느끼고 서부에서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싼 렌트를 내며 미국에 정착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프리랜서로 돈을 벌고 렌트의 보조를 받으며 취업을 해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 낮은 수준의 누더기같은 포트폴리오는 아무 곳에도 통하지 않았고 저는 정말 딱 렌트비와 식비만 나오는 수준으로만 돈을 벌었습니다. 그것도 결국 한계를 맞이하고 결국 전 귀국했습니다. 물론 금전적인 영향 외에도 노숙자들에게 둘러쌓여 현금을 뜯기거나 길가에 즐비한 마약중독자에게 걸핏 겁을 먹거나 하는 일들 때문에 미국에서 더 버틸 의지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돌아오자 저를 맞이한 건 부모님 중 한 분의 암과 조부의 영면이었습니다. 저는 상을 치르고 병간호를 했습니다. 꼴에 프리랜서라고 병상 옆 책상에서 그림작업을 하며 간병을 했습니다. 다행히도 초기에 발견된 암이고 부모님도 체력과 근력이 남다른 분이셔서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전 여전히 한국에 있습니다.
저는 이제 더이상 미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토록 원하는 영주권이고, 대단한 기회의 징검다리입니다만, 제 나약함과 무능함, 그리고 나쁜 것부터 먼저 떠올리게 된 부정적인 정신은 한국에 남고 싶어하는 듯 합니다. 제 글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저는 변명이 많고 자기합리화를 꽤나 잘합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이라면 분명 낼 수 있을 한줌의 용기, 배짱, 노력, 치열함조차 없는 사람이기에 미국에서 사는 저 자신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미국사회에서 버틸 능력도 근성도 없고 미국사회를 부정적으로 느끼게 되었고 소중한 사람들이 제가 없는 곳에서 아프고 사라진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미국은 대단한 나라입니다. 유능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많고 사회는 역동적이고 대도시는 활기찹니다. 굳이 경제지표나 뉴스를 보지 않아도 미국의 큰 도시와 좋은 카운티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물자는 넘치도록 풍부하고 세계 모든 것들이 이곳에 모입니다. 능력있는 사람들을 제대로 평가해주고 몇배의 기회를 부여합니다. 평범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문제 없이 삶을 꾸려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같은 낙오자에겐 자비가 없고 고독함을 느끼게 하는 곳 같습니다. 저는 늘 미국에 있으면서, 바에서 술을 마시고 같이 게임을 하고, 사람들과 스몰토크도 나누고 짧고 비루한 연애도 해봤지만 그 모든 순간에 전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무슨 치안이라던가 총기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 졸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치 고장난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혼돈스럽고 파괴적인 슬픔과 자괴감이 저를 항상 덮쳐왔습니다.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하는 것 같고, 소중한 인연들은 수백수천 미터 밖에 있고 저의 무능함은 항상 저를 무자비하게 두들겼습니다. 외모도, 능력도, 자산도, 의지도 없는 저는 무너지는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한 채 이제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적어도 가족과는 함께 있고자 합니다.
물론 모두 말하는 대로 한국은 망조의 길에 들어섰고 좋지 못한 전망 뿐이며 미국은 미래가 보장된 최강의 대국이겠지만, 설령 그게 근시안적인 안락일지언정, 제가 이 순간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다행히도 전 도망과 자기합리화엔 꽤나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또 다른 편안함으로 도망칠지도 모르겠군요.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낙원 씩이나 바라며 도망치려는 것도 아닌 법이죠. 단지 이 순간에도 저를 위해 많은 걸 지원해주시고 희생하신 부모님의 노력을 헛되게 한 것에 대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길고 우울하며 조잡한 푸념을 여기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세상엔 저 같은 탕아도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지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건너가시려는 분들, 분명 저와 다르게 멋진 삶을 사실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모두 좋은 하루 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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