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향의 종말》- 무의식에서 나오는 편향을 끝내는 길
《편향의 종말》, 제시카 노델, 웅진지식하우스, 2022.11.25.
편향이 인간에게 얼마나 깊이 뿌리내려 있는지를 알게 해 줄 뿐만 아니라, 편향을 끝낼 수 있는 해결책까지 그 인간의 본성 속에 있다는 희망을 던져 주는 이 책의 글쓴이는 제시카 노델이라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입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시학을 전공했습니다. 저널리스트가 되기 위해서 기획 기사를 제안했고 여러 번 좌절을 겪었다가 남자 가명으로 같은 시도를 하니 허무하리만치 쉽게 뚫렸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글쓴이는 편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컴퓨터 과학자들과 함께 편향의 영향을 시뮬레이션하면서 연구했습니다. 이 책은 15년간의 글쓴이의 여정이 담긴 결과고, 2021년에 나오자마자 세계경제포럼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2021년 영국 왕립학회 과학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습니다.
결국 다른 집단에 대한 자신의 인지를 키우고 심화하는 방법은 그들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편향의 종말>, 제시카 노델
이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줄인다면 이 문장일 겁니다. 편향은 어떤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닌 어떤 집단의 구성원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니까요. 편향을 줄이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인에게 아랍인과 더 가까이 앉게 하는 방법은 아랍 문화를 더 잘 알거나 긍정적인 아랍인을 소개해 주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아랍인과 부정적인 아랍인을 같이 소개함으로써 "아랍인"이라는 인식 자체를 무의미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들어 주는 범주를 아주 잘 받아들이고, 자기와 다른 집단에 아주 빠르게 편향적인 시각을 갖추게 됩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해요. 무의식중에 우리가 두뇌의 피로를 막기 위해 언뜻 드러내는 범주를 지워버리려면 엄청난 고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성에 따라 다르게 대하지 않고 다르게 부르지 않는 스웨덴의 두 유치원에서는 전통주의 우파에서 흔히 비난하는 것처럼 남녀의 구분이 없어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여전히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있고 트럭을 가지고 노는 남자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성을 친구로 더 잘 받아들이게 되었고,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 따라 남녀를 구분 짓지 않았습니다.
편향을 없애는 길은 차이를 억지로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차이를 억지로 없애라고 강요하는, 많은 직장에서 행해지는 다양성 교육은 편향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하게 만듭니다. 진정한 해결책은 차이를 인정하되 차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방법은 차이에 따른 범주로 인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편향과 차별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글쓴이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 대부분은 무의식에서 나오는 편향을 극복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무의식 대신 의식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하고, 무의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만큼 탈진해버리고 그걸 남자답다고 칭송하는 문화에 빠진 경찰들에게 탈진에서 회복할 수 있는 마음챙김 훈련을 시키기도 합니다.
구조적인 편향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선택 설계고, 하나는 적극적 우대 조치입니다. 선택 설계는 무의식적인 편향이 판단 과정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선택을 강제하는 것입니다. 여성이 의료 현장에서 더 열악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의료진이 무조건 목록에 따른 처치를 하도록 하거나, 영재 검사에서 소수민족이 검사 기회조차 못 받는 일이 많자 모든 아이들을 조사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적극적 우대 조치는 다양성을 집단에 강제하는 것으로, 소수자를 입학이나 채용에서 더 우대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조치는 구조를 일시적으로 바꾸는 효과는 있지만 둘 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결국은 그 구조가 유지되려면 문화가 바뀌어야 하고, 문화가 바뀌는 방법은 결국 위에서 소개한 대로 편향이 작동하는 범주가 의미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적극적 우대 조치를 읽고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적극적 우대 조치가 능력주의와 역행한다는 비판을 받기 때문인지 글쓴이는 적극적 우대 조치로 뽑힌 사람들이 만들어낸 성과가 결코 다른 방식으로 뽑힌 사람들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집단의 동종성이 늘어나면 그 동종성 자체가 능력으로 평가받는, 원래의 능력주의에서는 나타나서는 안 될 역기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람은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다른 조건이 비슷하면 자기랑 비슷한 사람을 더 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논란이 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는데, 바로 다양성 그 자체가 집단의 능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초 과학에서는 자연계를 경쟁 사회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었고, 협력과 이타성 모델은 20세기 후반에야 뒤늦게 각광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과학계가 지나치게 동종적 - 백인 남성 - 이었기 때문으로, 당시 백인 남성에게 만연한 경쟁 모델 외에 다른 모델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성이 부족한 집단은 다양성이 풍부한 집단에 비해 좁은 식견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또 지나치게 동종적인 집단에서 지배 집단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적절한 롤 모델을 찾지 못해 제대로 된 동기 부여를 받지 못하고, 이는 고정관념 위협이라는 현상과 함께 소수 집단의 능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그렇다면 적극적 우대 조치 때문에 선발에서 떨어진 다수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특히 정성적인 평가 기준이 아닌 정량적인 평가 기준이 지배적인 한국에서는 평가 기준이 공정하다는 인식이 공고하게 박혀 있기 때문에 적극적 우대 조치는 불공정하다는 주장이 강합니다. 평가 기준이 틀에 박혀 있지 않은 미국에서조차 그렇다면 한국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다양성 그 자체가 집단의 능력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이 결합하면 어떨까요?
“귀하는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 후보자에 비해 여학생들에게 적절한 롤 모델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귀하가 강단에 선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여학생들에게 자신들이 교수가 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자극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주장이 과학적인 연구 결과로 뒷받침된다면 어떨까요? 이 탈락한 남성 후보는 자신이 다수자 집단에 속한다는 것만으로 소수자에 비해 능력에서 페널티를 안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다수자에 대한 역차별이라면서 반발할까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 포지션 구분이 있는 팀 스포츠에서, 특정 포지션이 유난히 요구하는 조건이 까다롭고 총체적이어서 그 포지션의 선수가 다른 포지션에 비해 더 그 스포츠를 잘 한다고 인정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팀에서는 그렇게 전반적으로 우수한 동일 포지션의 선수들만을 뽑지 않죠. 우승하기 위해서는 모든 포지션을 골고루 갖춰야 합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포지션 그 자체가 능력으로 인정받고, 종사자들도 그걸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그러나 스포츠의 포지션과는 달리 다수자나 소수자를 결정하는 특성은 개인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정체성 그 자체에 능력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너무나 비인간적으로 느껴집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적극적 우대 조치보다는 선택 설계를 권장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만, 선택 설계는 까다롭고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드는 경우도 있어서 적극적 우대 조치만큼 확실한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지라 어렵네요.
그리고 마지막 하나. 씁쓸한 현실인데, 적극적 우대 조치를 하면 원래는 탈락해야 할 소수자가 합격하는 것이니만큼 소수자의 능력을 평가절하하는 낙인이 찍힐 것이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구 결과는 이 견해를 부정합니다. 소수자라는 낙인은 워낙 공고해서, 적극적 우대 조치가 있건 없건 간에 그들의 능력은 평가 절하를 당하고 있는 게 현실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