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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의 역사를 알아보자

743px-John_Everett_Millais_-_The_Blind_Girl,_1854-56.jpg 방랑의 역사를 알아보자
 

 존 에버렛 밀레이의 "맹인소녀(1856)"에는 방랑하는 자매가 그려져있다. 언니로 추정되는 소녀의 무릎에는 아코디언의 일종인 콘서티나가 놓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구걸하는 대가로 악기를 연주할 것이다. 아름다운 이중 무지개를 바라보는 동생과 달리, 무표정하게 눈을 감고 있는 그녀는 맹인이다. 그녀의 목에는 "맹인을 가엾게 여겨주세요"라는 글씨가 쓰여있다. 

 

 

 방랑(Vagrancy), 일정한 수입이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상태. 나그네, 떠돌이, 거지라고도 불리는 방랑자들은 일반적으로 빈곤 속에서 빌어먹고, 훔치는 존재로 여겨졌다. 역사 속에서 이들은 단순히 떠돌아다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거나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심지어는 군에 강제징집되기도 하였다. 

 

 

 

A_history_of_vagrants_and_vagrancy,_and_beggars_and_begging;_(1887)_(14595475748).jpg 방랑의 역사를 알아보자
 

 문명사회가 성립된 이래, 그들은 약탈자, 노상강도, 믿지 못할 존재, 경멸받아 마땅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때로는 연민받아 마땅한 적선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질서의 체계 바깥으로 튕겨져 나간 비합리적이고 불가해한 존재, 즉 타자로 여겨졌던 것이다. 

 

 중세 초기의 방랑승(Gyrovagues)은 고정된 거주지를 갖지 않은 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걸하곤 했다. 때로는 허무맹랑한 효능이 있다며 조작된 성유물을 파는 약팔이 짓을 하기도 했다. 여러 기독교 교부들은 이들을 비난했고, 수도사가 방랑하며 구걸하는 관행은 공의회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지적되고 금지되었다. 

 

 

A_history_of_vagrants_and_vagrancy,_and_beggars_and_begging;_(1887)_(14595618977).jpg 방랑의 역사를 알아보자
 

 중세의 동화에서 방랑하고 구걸하는 자들은 때때로 마녀나 주술사와 연관지어졌다. 이는 어쩌면 방랑자들과 수렵채집사회인들 사이의 연관성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렵채집사회인들은 정착하는 삶을 경멸했고, 무엇보다 각종 독초와 약초 지식이 해박했으니 말이다. 이와 같은 고정관념은 근세에까지 이어져, 튜더 왕조 시절의 거지들은 종종 자신들을 모욕하거나 문전박대하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걸곤하는 주술사들이라 여겨졌다. 

 

 14세기, 흑사병 시기에 제정된 "1349년 노동자 조례"는 영국 노동법의 시조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 조례에 의해 방랑, 실업 혹은 게으름은 범죄로 규정되었으며, 60세 이전의 모든 신민이 일해야 한다고 명시되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사망했기에, 많은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에 고통받기보다는 차라리 여유롭게 방랑하고 구걸하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늘어난 수요와 줄어든 노동자들의 공급에 힘입어 높은 임금을 요구했다. 

 

 

Vagrant_being_punished_in_the_streets_(Tudor_England).jpg 방랑의 역사를 알아보자
 

 사법당국은 불에 달군 낙인과 채찍으로 응수했다. "1530년의 방랑자법"에 의하면, 어쩔 수 없이 빈민의 신세가 된 노약자들에게는 "거지 면허증"을 부여하지만, 몸이 튼튼한데도 방랑하는 거지들에게는 채찍질과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그들은 수레에 질질 끌려가며 살갗이 벗겨질때까지 채찍질을 당하고는 고향으로 되돌아가 3년 동안 성실히 노동해야만 했다. 만일 두번째로 체포된다면 다시 채찍질을 당하고 귀의 절반을 내놓아야했다. 세번째는 사형이었다. 

 

 "1547년의 방랑자법"은 한단계 나아가서, 신고포상제를 도입했다. 불법 방랑자는, 신고한 사람의 사적 노예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었다. 만일 이렇게 노예 신세가 된 자가 도망치다 잡히면 이마에 S(slave)자 낙인이 찍히고, 세번째는 역시 사형이었다. 그러나 이토록 가혹한 법률이 실질적으로 시행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 어쩌면 방랑 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상징적 의미의 법률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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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세 북유럽의 공무직이었던 이른바 "거지왕(Stodderkonge)"은 한 마을이나 도시 구역 단위로 거지들을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맡곤했다. 방랑거지들은 국가에서 발행한 공식적 구걸허가증을 소지해야만 구걸을 할 수 있었는데, 이 허가증을 갖추지 않고 불법적으로 구걸하는 거지들을 적발해 해당 구역 바깥으로 쫓아내거나 징역살이를 보내는 것이 거지왕의 책임이었다.

 

 이들 거지왕은 구역의 거지들을 착취하는 존재로 여겨지곤 했는데, 이는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거지왕은 구역에서 세력을 이룩한 일군의 거지들과 협력관계를 맺고 무리를 규합하여 다른 거지들의 일파를 몰아내기도 했고, 거지왕의 영향 하에 놓인 거지들은 쫓겨나지 않기 위해 수입의 일정량을 상납해야만 하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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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본토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아메리카의 방랑자들 또한 가혹한 사정에 놓여있었다. 수천 명의 노숙인, 소수민족 등이 거동수상자로 여겨져 체포되었고 때로는 수 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남북전쟁 이후 노예 신세에서 해방된 흑인들 또한, 해방에 발 맞춰 옛 노예주들에서 새롭게 제정된 "1866년 방랑자 처벌법(Vagrancy Act of 1866)"의 영향 하에 놓였다. 노예 신세에서 해방되어 자연스레 실업자, 혹은 노숙자 신세였던 흑인들은 저임금으로 3개월간 공공기관이나 사기업에서 강제 노역을 해야만 했는데, 거부하고 도망칠 경우엔 쇠구슬과 사슬에 묶여서 남은 기간을 보내야만 했다. 이러한 법률은 버지니아 주에서 1904년에까지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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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들의 국가"를 자처했던 소련에서, 모든 인민은 공식적 은퇴를 하기 이전까지 끊임없이 노동해야만 했다. 따라서 방랑, 혹은 실업은 당 차원에서, 그리고 국가차원에서 용납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만일 누구라도 자신에게 걸맞는 적절한 방식으로 노동하거나, 연구하거나, 봉사하는 일을 거부한다면 그는 곧 형사처벌 대상이 되었다.

 

죄명은 "사회적 기생(тунеядство)"이었으며, 이는 "노동에 따른 분배 법칙"이라는 사회주의 사상의 기본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1961년 5월 4일, 본격적으로 이른바 "사회적 기생충"들을 처벌하는 법률안이 발효되었고, 이 법률에 따라 무려 소련 내 13만 명의 인민이 "반사회적 기생충"임이 판명되었다. 이들 중에는 상당한 숫자의 지식인들도 포함되었다. 반체제 인사들이었던 이 지식인들은 취업제한에 가로막혀 비숙련 노동직을 전전해야만 했고, 더러는 소련을 영원히 떠났다.

 

 1970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셰스쿠 또한 사회적 기생을 범죄로 규정했다. 직장이나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에, 누구든 거리에서 어슬렁거린다면 붙잡혀서 최대 6개월의 징역살이를 해야했다. 

 

 사회적 기생에 대한 처벌법은 오늘날의 동구권에도 계승되고 있다. 벨라루스의 루카셴코 대통령은 2015년, 일하기를 거부한 50만명의 시민들에 "대처"하기 위해, 그리고 무임승차를 막겠다는 명목하에, 이 법률을 부활시켰다. 미성년자, 장애인, 고령자, 수감자, 다자녀를 둔 부모를 제외한 모든 국민이 이 법률의 영향 하에 놓였다.

 

 2020년대 들어서, 탕핑(躺平)이라는 단어가 중국 대륙을 휩쓸기 시작했다. 대자로 드러누워버린 다는 뜻의 탕핑은, 비단 중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가혹한 현대사회의 경쟁 속에서 일찌감치 탈락할 수밖에 없었던 오늘날 한국의 많은 청년들 또한 "쉬었음" 상태에 놓여있다. 전체 쉬었음 인구는 237만명, 이 중에서 2030 청년 쉬었음 인구는 76만명에 이른다. 

 

방랑은 인류의 역사와 늘 함께해왔고, 앞으로도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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