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시타 히데요시, 가네가사키의 전설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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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를 등에 업은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는 쇼군(将軍)에 즉위하고는 야마시로국을 자신의 직할지로 삼았다. 오다 노부나가는 그렇게 오다-아시카가 연립정권을 수립한 뒤, 자신의 영지로 철군했다.
오다 군이 교토에서 물러난 틈을 탄 미요시 세력과 결탁한 사이토 타츠오키가 쇼군이 기거하는 혼코쿠지(本圀寺)에 쳐들어왔으나 교토 방비를 위해 근처에 주둔 중이었던 친(親) 오다-아자이 세력, 특히 아케치 미츠히데 등의 분전 덕에 패퇴시킬 수 있었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목숨을 구한 오다 노부나가는 그의 임시 어소인 혼코쿠지가 방어에 취약하다고 판단하고 니조성을 쌓는 등, 연합 정권은 이때까지만 해도 공고해보였다. 그러나 실권을 쥐길 원하는 쇼군과, 그를 꼭두각시쯤으로 생각하는 센고쿠다이묘의 동상이몽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국을 맞았다.
쇼군은 허수아비 신세를 한탄하며 각지의 다이묘들과 비밀리에 연락하기 시작했고, 오다 노부나가 또한 쇼군의 어명을 빌어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교토로 상락해서 사실상 자신에게 충성 맹세를 할 것을 종용했다.
# 1569년, 32세, 열흘동안 열 여덟개의 성을 함락시키다.
이해 봄, 오기마치 천황은 "노부나가를 부쇼군직에 임명하고 싶노라"는 의사를 전달했으나 이번에도 노부나가는 천황을 무시했다.
한편, 이 해에 남쪽 규슈 지역의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다지마슈고(但馬守護) 야마나(山名) 가문을 견제해달라는 요청을 보내왔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를 승낙, 다지마 방면으로의 출진을 명하였으며 그 총대장으로서 기노시타 도키치로 히데요시를 임명했다. 일설에 따르면, 자그마치 2만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고도 한다.
히데요시는 이 전쟁에서 "열흘 동안 열 여덟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수도의 서북방 지역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며 기노시타 히데요시는 이 전쟁에서 일군을 지휘할 역량이 있음을 입증해보였던 것이다.
# 1570년, 33세, 가네가사키의 전설
오다 노부나가의 다음 목표는 에치젠(越前)의 다이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였다.
에치젠은 새로운 거점인 수도 지역과 원래의 본거지 미노 지역을 동시에 침략할 수 있는 거슬리는 지역이었다. 더욱이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상경해서 배알하라는 쇼군의 어명(사실상 노부나가의 명령)을 무시하고 있었다. 아시카가-오다 연립정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아사쿠라 가문은 아자이 가문과 전통적 동맹 세력이었기에, 그들을 치는 것은 자칫하면 혼인동맹으로 맺어진 아자이 가문의 지지를 잃어버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그리고 1570년 봄, 오다 노부나가는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조정에 대항하는 반역자로 선포하며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아사쿠라 가문의 성들이 하나 둘 함락되었고, 오다 측의 낙승이 점쳐지는 분위기였으나, 급보가 날아들었다. 아자이 나가마사가 아사쿠라 가문을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던 것이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와 혼인한 매제이기도 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때, 아자이 가문이 배신하였다는 급보를 전해듣고는, "헛소리!"라고 일축하며 현실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信長公記』
아자이-아사쿠라 연합은 자그마치 2만이 넘는 군세가 되었으며, 무엇보다 양쪽에서 오다 군을 협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오다 군은 퇴각은 기정사실이었으며, 당장 퇴각 과정에서 오다 노부나가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나 걱정해야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 중대한 퇴각전에서 최후미 부대의 총대장*, 즉 신가리(殿)의 역할을 맡게된 것이 바로 기노시타 토키치로 히데요시였다. 히데요시는 이때, "죽을 운명"이 되었던 것이다.
*신장공기『信長公記』나 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에 따르면 총대장은 히데요시였으나, 히데요시 이외에 아케치 미츠히데, 이케다 카츠마사와 같이 더 높은 지위의 무사가 퇴각전에 참전했기에 히데요시가 총대장은 아니었을 것이란 일설또한 있다. (『武家雲箋』) 그러나 어찌되었든 최후미에서 적을 맞았던 것만은 교차검증된다.
이 싸움이 바로, 훗날 "가네가사키의 무너짐(金ヶ崎崩れ)", 혹은 "가네가사키의 퇴로(金ヶ崎の退き口)"로 불리는 퇴각전이다.
이 때 그는 겨우 십 수명의 호위 병력만을 거느린 채, 기적적으로 교토로 생환하는 데 성공한다. (4월 30일)
오다 가의 제장들은 히데요시의 귀환에 마치 귀신이라도 살아돌아온 걸 보는 듯이 했으며, 오다 노부나가는 그에게 직접 황금을 하사했다고 한다. 오다 군은 이렇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