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여행기 - 몽골의 별
나의 사춘기는 유독 길었다.
1998년. 11살. 아버지 뇌종양 판정.
그때부터 갓 3살된 동생과 함께 하루는 고모집, 그 다음 날은 외할머니집을 오가며 약 3년간 부모의 보살핌 없이 자랐다.
내 주변은 항상 울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실감하기엔 너무도 이해하기 어려운 눈물이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비틀거리고 있음은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동생이 우는 소리에 깨었고 나는 그럴때마다 혹시라도 친척들이 우리를 싫어하지 않을지 눈치만 보았다. 가끔 보는 어머니가 어찌나 반가웠던지.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학교 운동회에서 친구들이 물어보는 "아버지는 왜 안오셔?"라는 평범한 질문들에 울었던 기억도 난다.
고등학교 1학년.
여러 일들이 있은 후에 우리 가족은 결국 캐나다 이민을 결정한다. 아버지는 절반의 감각을 잃으셨지만 사회생활은 가능할 정도로 쾌유하셨다. 허나 내 어린 시절 상처는 완치되지 않았는지 나는 유독 낯선 땅의 적응을 힘들어했다. 어차피 알아듣기도 힘든 수업, 대부분은 무단 결석을 하였고 그나마 학교에 가는 날이면 허구헌날 동기들과 치고박고 싸워 정학을 당하기도 하는 등 지독한 방황을 겪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당시 고등학교 이민자 영어수업에서 내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 같던 외국인 여자친구를 만난다. 그녀는 항상 홀로 남겨져있던 나에게 유일한 편이 되어주었다. 이 사람이라면 내 기나긴 방황을 멈춰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시커먼 밤, 촛불이 얼마나 가랴. 그녀는 나의 어두운 모습을 싫어했다. 나는 떠나려는 그녀에게 참 악독하게 집착했지만 결국 그녀는 물론, 내 스스로마저 잃고 방황끝에 캐나다 고등학교를 자퇴한다.
천진난만하던 어린 아이었을때는 나도 행복을 꿈꿨었는데, 어느새 그 꿈이 어느 순간 바뀌더라.
"그저 단 하루라도 불행하지 않길. 내일만큼은. 제발 내일 만큼은 불행하지 않기를."
병걸린 닭 마냥 꾸벅꾸벅 졸다, 가끔 눈떴을 때 보는 현실이 참으로 개같아서 또 억지로 잠이 들길 반복하던 무의미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왜 나만 남들과 다를까."
그런 어리석은 망상에만 사로잡힌 채, 지하 컴퓨터방에 반쯤 죽어 2년을 지냈더니 그제서야 보이더라. 부모님 눈물이.
22살.
한국으로 따지자면 검정고시. 늦은 나이에 그래도 정신을 차렸는지 나름 괜찮은 대학 입학했다. 평생 잊지 못할 처음으로 효도했던 그 날, 처음으로 나를 보며 웃으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잊혀지질 않는다.
대학입학 2주 후.
아버지가 또다시 비틀비틀 거리신다. 몇 번의 응급실행 끝에 결국 나를 제외한 그 모두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는 캐나다에 홀로 남게된다. 난 다시 혼자였다.
아버지는 결국 불구가 되었고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가끔 가족들과 화상통화를 할 때, 그 시절 내 마음은 어떠했을까. 더이상 남은 돈이 없어 그 작은 원룸에 옹기종기 살던 우리 가족들. 그리고 그것을 모니터 너머로 방관하던 나.
그때부터 정말 지독하게 살았다. 정말 지독하게.
학비, 생활비, 월세.
남들이 미래를 꿈 꿀때, 나는 하루의 12시간을 알바로 채웠고, 남은 12시간은 자기비하로 채웠다.
나보다 가족들이 더 힘든걸 알기에 너무도 많은 것들을 그들에게 숨겨야 했다. 이미 삶이 지옥인 그들에게 하찮은 나의 힘듦따위가 짐이 되지 않게끔, 나는 내 감정을 억지로 잊어내야 했다.
"잘 지내요. 내 걱정하지 말아요."
"돈 필요 없어요. 여기 복지가 좋아서 학비 걱정안해도 학교 다들 잘 다녀요."
버거웠고, 고달팠다.
주변 친구들이 대학을 졸업을 하고 하나둘 사회로 향할때조차, 나는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 휴학을 하고 알바를 뛰고 있었다. 그때의 좌절은 곧 통증으로 바뀐다.
28살 공황장애.
거리를 걷다가도 불현듯 찾아오는 가슴통증과 알 수 없는 공포감. 막혀오는 숨.
5일을 뜬 눈으로 지새도 잠에 들 수 없었던 끔찍한 불면증.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병원.
이 통증을 참지 못해 아르바이트는 잘렸고 처음으로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나를 살렸던 어머니의 피땀섞인 3500불.
여느때와 같이 반지하 자취방 침대에 누워 멍하니 탁한 천장만 바라보다 문득 가족한테 가고 싶어졌다. 못 본지도 10년이 다 되어가는 어색한 가족이었지만, 그 시기 나에게는 그 누구때보다 가족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30살 간신히 대학 졸업 후 귀국을 한다. 내 캐나다에서의 생존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30살 취업.
귀국 후 얼마되지 않아 나름 초봉에 복지도 좋은 곳에 취업했다. 취업 발표가 되던 날, 모두가 기뻐했다. 그토록 밝게 웃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낯설 정도로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가족의 좋은 일이었다.
허나 10년을 넘게 내 주변을 공전하던 이 우울감은 뗄 수 없는 습관이 되어버렸는지 그 어떤 행복에도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귀국 후에도 끊을 수가 없어 몇 년을 달고 살았던 그 지긋지긋했던 수면제처럼 말이다.
"나에게 가족이 없다면, 그냥 여기서 그만하고 싶다."
취업 후에도 나는 항상 이유모를 공허함과 싸워야 했고 하루에도 여러번 습관처럼 우울감에 갇혔다.
2017년 9월 몽골여행.
제대로 된 해외여행이라곤 3박 4일 일본이 전부였던 내게 무슨 바람이 분건지 장기연차를 내고 홀로 열흘간 몽골여행을 떠난다. 최종목적지는 고비사막.
다 버리고 오고 싶었다.
몽골의 광활한 초원 위, 내 안을 가득 채운 이 불쾌한 감정들을 남김없이 그 곳에 놓고 오고 싶었다.
몽골여행은 참으로 단순하다.
수도인 울란바트로를 벗어나는 순간 전기, 물, 도로 등 우리가 당연하다 여겼던 문명의 것들이 한 순간 사라진다. 대신 사람흔적 하나 보이지 않는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이 우리를 맞이하고, 그 길을 며칠이고 달리는 것이 여행의 전부이다.
그러다 가끔 양, 말, 염소 등 무리지어 있는 동물들을 만날때면 잠시 차에서 내려 그것들과 짧은 교감을 하고 다시 길을 나서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가로등삼아 울퉁불퉁 초원길을 지겹도록 긴 시간 동안 달린다.
몽골은 여행지의 특성 상 혼자 온 여행객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열흘내내 달리는 작은 밴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무심히 창 밖을 바라보며 그들 각자만이 알고 있을 여행의 이유를 되짚는다. 그렇게 달리다보면 하늘의 별이 가장 밝을 때 쯤, 유목민들이 묵는 게르에 도착한다.
전기가 없는 것은 금새 익숙해지지만, 물이 없다는 것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화장실도 없는 그 끝없는 초원에서 여행자들은 미리 준비해온 우산을 펼쳐 스스로를 가린 채 쪼그려 앉아 용변을 보고, 샤워는 마을에서 사온 생수를 손수건에 적셔 몸을 씻는 것으로 대체한다. 허나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물이 없는 것보다도 더 힘든 것이 음식이다. 초원에 사는 몽골인들은 채소를 먹지 않는다. 한 평생 채소를 먹어본 적 없다는 몽골인들도 여럿 보았을 정도로 그들은 극단적인 육식주의자이다. 물론 채소를 기르기 힘든 척박한 자연환경덕에 오랜 기간 자리잡아온 식문화겠지만, 평소 매 끼니 채소를 곁들여 먹는 우리에게 채소없는 식단을 열흘 내내 고수하라는 것은 고문이 따로 없다. 심지어 그들이 먹는 고기류 음식에는 양념도 거의 되어있지 않은 순수 "고기 그 자체"이기에 매끼니가 모든 여행자들에게 고통스럽다.
내가 그 곳에서 본 여행자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 곳에 왔을까.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땅을 왜 스스로 찾아와 고립을 자처한 것일까.
그들은 무엇을 버리고 싶었을까.
하루의 마무리는 항상 똑같다. 게르 주인은 여행자들을 위해 한 가운데 캠프파이어 불을 떼주지만 누구도 그 불을 바라보지 않는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그 곳에서, 그 여느때보다도 시끄럽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멍하니 바라본다.
광활한 대지 위, 쏟아지는 별빛들에 잠수하듯 깊이 빠질때면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진 듯한 고요함이 찾아온다. 내 안에 엉켜있던 마음들이 마치 기적처럼 하나 둘 풀림을 느꼈고, 나는 그동안 짊어져왔던 무게를 천천히 별빛 아래 내려놓았다.
나는 그렇게 열흘 간, 초원과 사막 이곳저곳에 내 지난 과거의 잔해들을 흩뿌려 놓았다. 유난히 외로웠던 유년기와 삐뚤대며 방황하던 학창시절, 그리고 핏기없이 창백했던 20대의 청춘까지 모두 초원의 찬 바람에 실려 사라짐을 느꼈다.
신기하게도 30년간 내 안에 자리잡아온 기생충같은 번뇌들은, 봄을 맞이한 겨울의 눈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마치 원래 내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나는 이내, 내 안의 갑자기 텅 비어버린 공간에 앞으로 다른 더 좋은 것들을 채워가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열흘째 되는 날, 초원에서의 마지막 일출을 보며 나는 마침내 길고 길었던 사춘기와 작별한다.
나는 지금도 가끔 세상에 지칠때면 고개를 들어 별을 본다. 그때 보았던 몽골의 별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별이 같은 별임에, 나는 아플 이유가 없다.
1998년. 11살. 아버지 뇌종양 판정.
그때부터 갓 3살된 동생과 함께 하루는 고모집, 그 다음 날은 외할머니집을 오가며 약 3년간 부모의 보살핌 없이 자랐다.
내 주변은 항상 울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실감하기엔 너무도 이해하기 어려운 눈물이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비틀거리고 있음은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동생이 우는 소리에 깨었고 나는 그럴때마다 혹시라도 친척들이 우리를 싫어하지 않을지 눈치만 보았다. 가끔 보는 어머니가 어찌나 반가웠던지.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학교 운동회에서 친구들이 물어보는 "아버지는 왜 안오셔?"라는 평범한 질문들에 울었던 기억도 난다.
고등학교 1학년.
여러 일들이 있은 후에 우리 가족은 결국 캐나다 이민을 결정한다. 아버지는 절반의 감각을 잃으셨지만 사회생활은 가능할 정도로 쾌유하셨다. 허나 내 어린 시절 상처는 완치되지 않았는지 나는 유독 낯선 땅의 적응을 힘들어했다. 어차피 알아듣기도 힘든 수업, 대부분은 무단 결석을 하였고 그나마 학교에 가는 날이면 허구헌날 동기들과 치고박고 싸워 정학을 당하기도 하는 등 지독한 방황을 겪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당시 고등학교 이민자 영어수업에서 내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 같던 외국인 여자친구를 만난다. 그녀는 항상 홀로 남겨져있던 나에게 유일한 편이 되어주었다. 이 사람이라면 내 기나긴 방황을 멈춰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시커먼 밤, 촛불이 얼마나 가랴. 그녀는 나의 어두운 모습을 싫어했다. 나는 떠나려는 그녀에게 참 악독하게 집착했지만 결국 그녀는 물론, 내 스스로마저 잃고 방황끝에 캐나다 고등학교를 자퇴한다.
천진난만하던 어린 아이었을때는 나도 행복을 꿈꿨었는데, 어느새 그 꿈이 어느 순간 바뀌더라.
"그저 단 하루라도 불행하지 않길. 내일만큼은. 제발 내일 만큼은 불행하지 않기를."
병걸린 닭 마냥 꾸벅꾸벅 졸다, 가끔 눈떴을 때 보는 현실이 참으로 개같아서 또 억지로 잠이 들길 반복하던 무의미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왜 나만 남들과 다를까."
그런 어리석은 망상에만 사로잡힌 채, 지하 컴퓨터방에 반쯤 죽어 2년을 지냈더니 그제서야 보이더라. 부모님 눈물이.
22살.
한국으로 따지자면 검정고시. 늦은 나이에 그래도 정신을 차렸는지 나름 괜찮은 대학 입학했다. 평생 잊지 못할 처음으로 효도했던 그 날, 처음으로 나를 보며 웃으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잊혀지질 않는다.
대학입학 2주 후.
아버지가 또다시 비틀비틀 거리신다. 몇 번의 응급실행 끝에 결국 나를 제외한 그 모두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는 캐나다에 홀로 남게된다. 난 다시 혼자였다.
아버지는 결국 불구가 되었고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가끔 가족들과 화상통화를 할 때, 그 시절 내 마음은 어떠했을까. 더이상 남은 돈이 없어 그 작은 원룸에 옹기종기 살던 우리 가족들. 그리고 그것을 모니터 너머로 방관하던 나.
그때부터 정말 지독하게 살았다. 정말 지독하게.
학비, 생활비, 월세.
남들이 미래를 꿈 꿀때, 나는 하루의 12시간을 알바로 채웠고, 남은 12시간은 자기비하로 채웠다.
나보다 가족들이 더 힘든걸 알기에 너무도 많은 것들을 그들에게 숨겨야 했다. 이미 삶이 지옥인 그들에게 하찮은 나의 힘듦따위가 짐이 되지 않게끔, 나는 내 감정을 억지로 잊어내야 했다.
"잘 지내요. 내 걱정하지 말아요."
"돈 필요 없어요. 여기 복지가 좋아서 학비 걱정안해도 학교 다들 잘 다녀요."
버거웠고, 고달팠다.
주변 친구들이 대학을 졸업을 하고 하나둘 사회로 향할때조차, 나는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 휴학을 하고 알바를 뛰고 있었다. 그때의 좌절은 곧 통증으로 바뀐다.
28살 공황장애.
거리를 걷다가도 불현듯 찾아오는 가슴통증과 알 수 없는 공포감. 막혀오는 숨.
5일을 뜬 눈으로 지새도 잠에 들 수 없었던 끔찍한 불면증.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병원.
이 통증을 참지 못해 아르바이트는 잘렸고 처음으로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나를 살렸던 어머니의 피땀섞인 3500불.
여느때와 같이 반지하 자취방 침대에 누워 멍하니 탁한 천장만 바라보다 문득 가족한테 가고 싶어졌다. 못 본지도 10년이 다 되어가는 어색한 가족이었지만, 그 시기 나에게는 그 누구때보다 가족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30살 간신히 대학 졸업 후 귀국을 한다. 내 캐나다에서의 생존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30살 취업.
귀국 후 얼마되지 않아 나름 초봉에 복지도 좋은 곳에 취업했다. 취업 발표가 되던 날, 모두가 기뻐했다. 그토록 밝게 웃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낯설 정도로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가족의 좋은 일이었다.
허나 10년을 넘게 내 주변을 공전하던 이 우울감은 뗄 수 없는 습관이 되어버렸는지 그 어떤 행복에도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귀국 후에도 끊을 수가 없어 몇 년을 달고 살았던 그 지긋지긋했던 수면제처럼 말이다.
"나에게 가족이 없다면, 그냥 여기서 그만하고 싶다."
취업 후에도 나는 항상 이유모를 공허함과 싸워야 했고 하루에도 여러번 습관처럼 우울감에 갇혔다.
2017년 9월 몽골여행.
제대로 된 해외여행이라곤 3박 4일 일본이 전부였던 내게 무슨 바람이 분건지 장기연차를 내고 홀로 열흘간 몽골여행을 떠난다. 최종목적지는 고비사막.
다 버리고 오고 싶었다.
몽골의 광활한 초원 위, 내 안을 가득 채운 이 불쾌한 감정들을 남김없이 그 곳에 놓고 오고 싶었다.
몽골여행은 참으로 단순하다.
수도인 울란바트로를 벗어나는 순간 전기, 물, 도로 등 우리가 당연하다 여겼던 문명의 것들이 한 순간 사라진다. 대신 사람흔적 하나 보이지 않는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이 우리를 맞이하고, 그 길을 며칠이고 달리는 것이 여행의 전부이다.
그러다 가끔 양, 말, 염소 등 무리지어 있는 동물들을 만날때면 잠시 차에서 내려 그것들과 짧은 교감을 하고 다시 길을 나서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가로등삼아 울퉁불퉁 초원길을 지겹도록 긴 시간 동안 달린다.
몽골은 여행지의 특성 상 혼자 온 여행객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열흘내내 달리는 작은 밴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무심히 창 밖을 바라보며 그들 각자만이 알고 있을 여행의 이유를 되짚는다. 그렇게 달리다보면 하늘의 별이 가장 밝을 때 쯤, 유목민들이 묵는 게르에 도착한다.
전기가 없는 것은 금새 익숙해지지만, 물이 없다는 것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화장실도 없는 그 끝없는 초원에서 여행자들은 미리 준비해온 우산을 펼쳐 스스로를 가린 채 쪼그려 앉아 용변을 보고, 샤워는 마을에서 사온 생수를 손수건에 적셔 몸을 씻는 것으로 대체한다. 허나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물이 없는 것보다도 더 힘든 것이 음식이다. 초원에 사는 몽골인들은 채소를 먹지 않는다. 한 평생 채소를 먹어본 적 없다는 몽골인들도 여럿 보았을 정도로 그들은 극단적인 육식주의자이다. 물론 채소를 기르기 힘든 척박한 자연환경덕에 오랜 기간 자리잡아온 식문화겠지만, 평소 매 끼니 채소를 곁들여 먹는 우리에게 채소없는 식단을 열흘 내내 고수하라는 것은 고문이 따로 없다. 심지어 그들이 먹는 고기류 음식에는 양념도 거의 되어있지 않은 순수 "고기 그 자체"이기에 매끼니가 모든 여행자들에게 고통스럽다.
내가 그 곳에서 본 여행자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 곳에 왔을까.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땅을 왜 스스로 찾아와 고립을 자처한 것일까.
그들은 무엇을 버리고 싶었을까.
하루의 마무리는 항상 똑같다. 게르 주인은 여행자들을 위해 한 가운데 캠프파이어 불을 떼주지만 누구도 그 불을 바라보지 않는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그 곳에서, 그 여느때보다도 시끄럽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멍하니 바라본다.
광활한 대지 위, 쏟아지는 별빛들에 잠수하듯 깊이 빠질때면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진 듯한 고요함이 찾아온다. 내 안에 엉켜있던 마음들이 마치 기적처럼 하나 둘 풀림을 느꼈고, 나는 그동안 짊어져왔던 무게를 천천히 별빛 아래 내려놓았다.
나는 그렇게 열흘 간, 초원과 사막 이곳저곳에 내 지난 과거의 잔해들을 흩뿌려 놓았다. 유난히 외로웠던 유년기와 삐뚤대며 방황하던 학창시절, 그리고 핏기없이 창백했던 20대의 청춘까지 모두 초원의 찬 바람에 실려 사라짐을 느꼈다.
신기하게도 30년간 내 안에 자리잡아온 기생충같은 번뇌들은, 봄을 맞이한 겨울의 눈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마치 원래 내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나는 이내, 내 안의 갑자기 텅 비어버린 공간에 앞으로 다른 더 좋은 것들을 채워가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열흘째 되는 날, 초원에서의 마지막 일출을 보며 나는 마침내 길고 길었던 사춘기와 작별한다.
나는 지금도 가끔 세상에 지칠때면 고개를 들어 별을 본다. 그때 보았던 몽골의 별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별이 같은 별임에, 나는 아플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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