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도쿄 사기꾼들 감상
넷플릭스에서 방영해서 일본에선 나름 화제가 되고 있는 도쿄 사기꾼들(원제 地面師たち지면사들)을 봤습니다. 원작이 되는 소설은 보지 않았습니다만 다루고 있는 내용이나 드라마로서의 퀄리티가 꽤 흥미로웠기 때문에 간단한 소감 겸 소개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면사 사기라는 배경
지면사(地面師): 토지, 건물의 소유권을 위장해 매도하여 거액의 매매대금을 편취하는 부동산 사기꾼
간단히 요약하면 위장매도인 부동산 사기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나라를 가리지 않고 유구한 부동산 사기입니다만, 지면사 사기는 피해자가 개인에 한정되지 않고 법인을 상대로도 범죄를 기획하여 거액을 뜯어낸다는 점에서 화제성과 케이퍼 무비 소재로써의 매력이 있어서 소설화 및 드라마까지 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면사 사기의 흐름은 대충 아래와 같다고 합니다.
1. 높은 수익성이 잠재되어 있음에도 소유자가 고령, 건강상의 이유로 관리되고 있지 않은 부동산이 타겟
2. 증명서류와 인감을 위조함과 동시에 소유자의 대역을 준비
3. 대역이 소유자 행세를 하면서 부동산을 매도하고 잠적
4. (드라마에선 묘사되지 않은 패턴) 범죄가 발각되지 않는 가운데 매입자가 해당 부동산을 사업화하여 또다른 거래가 반복되면서 본래 소유자의 권리회복이 어려워지고 피해가 복잡화/확산
본래는 버블경제 때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발생했던 범죄 양태가 2010년대 들어서 고급 맨션/타워 맨션과 같은 고수익 부동산에 대한 니즈가 강해지면서 다시 생겨났다고 하네요. 특히 인구사멸과 고령화로 인해 빈집 문제나 부동산의 방치가 꾸준히 지적되는 가운데, 소유자를 위장할 수 있는 잠재적인 범죄 타겟이 늘어나게 된 것도 배경의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1화에서도 비슷한 흐름으로 지면사 사기의 맛보기 에피소드를 보여주었죠)
법인을 상대로 거액을 편취하면서 유명해진 지면사 사기 중, 지금에 와서도 회자되는 대형 사건은 인터넷을 찾아보면 아래 두 건이 대표적입니다.
・세키스이하우스(디벨로퍼/건설사)(2017년) 도쿄 고탄다에 소재한 여관을 위장매도(피해액 55.3억엔)
・아파호텔(비즈니스호텔)(2013년) 도쿄 아카사카에 소재한 주차장 용지를 위장매도(피해액 12.6억엔)
두 사건 모두 피해액을 회복하지 못했고 매입대금은 어딘가로 녹아들어가면서 업계 리딩 컴퍼니로 알려져있던 두 회사의 위신에 그야말로 똥칠을 했습니다. 심지어 세키스이하우스는 단순 시공사가 아닌 디벨로퍼로서 부동산 계획 개발의 밸류체인 전체를 커버하고 있는 프로 중의 프로인데도요.
"도쿄 사기꾼들"은 그 중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은 세키스이하우스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실화 기반의 픽션이란 점에서 드라마의 매력과 흡입력은 초반부터 꽤 괜찮았던것 같습니다. 사실 더 데이스의 동앙전력도 그랬지만 작중의 세키요(積洋↔積水)하우스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든 알 수 있는 모티브였고 저도 중간에 보다가 어랏 하고 자세를 고쳐앉아 봤습니다.
■드라마 구성・전체적인 감상
맛보기 에피소드로 주요 등장인물들의 특성과 극의 톤을 각인시키면서, 대형 사건을 둘러싸고 계획 및 실행단계에서 뚝딱거리는 안정적인 케이퍼 무비 맛이었습니다.
공중파 드라마가 아니라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진행이 스피디하고 인물의 백스토리도 서사에 필요한 최소한으로 사용해서 굳이 빨리넘기기가 마려운 상황도 없었고, 개인적으로는 일본 드라마도 넷플릭스 같은 OTT의 힘을 빌리면서 프로덕션 퀄리티가 확실히 성장하고 있구나 라는 점을 (드라마의 호불호를 떠나서)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더 데이스에 이어서 다시금 느꼈습니다.
연기 부분에서는 흔히 일본 드라마에 막 입문하거나 일반인 입장에서 지적하는 과장된 연기톤이 비교적 잘 억제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아야노 고(츠지모토 타쿠미)와 토요카와 에츠시(해리슨 나카야마)를 기용한 게 드라마의 톤과 때깔와 맞아떨어지면서 몰입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 드라마 특유의 과장된 톤이 종종 보이긴 합니다만, 연출 자체가 드라이한 편에 중심인물을 맡은 아야노 고가 기본적으로 착 가라앉은 연기로 극 자체의 분위기가 중구난방으로 날뛰지 않게 잡아준 부분이 꽤 크다고 느꼈습니다. 몇 작품 안 봤지만 참 연기 잘합니다. 특히 마지막으로 갈수록 각본상의 무리수가 보이는 가운데 연기 차력쇼로 시청자를 납득시키는 모먼트가 몇 번 있었다고 느꼈습니다.
토요카와 에츠시가 맡은 해리슨 나카야마는 극의 무게를 잡는데는 적절한 캐릭터였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깊이가 느껴지진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보통 이런데 많이 쓰이는 설정을 이거저거 다 섞었더니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색이 나온 느낌이에요. 쾌락범죄자/사이코패스/지능범/아나키스트… 등등 해서 이거저거 많이 들어가있습니다만 극의 주동인물 이상의 미친 존재감 혹은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드는 인물이었냐 하면 그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드라마의 각 축(주모자-추적자-피해자)에서 형사 쪽을 담당하는 릴리 프랭키는 이런 경우에 흔히 나오는 열정은 소진됐지만 책임감 있는 형사 역으로서 좋았습니다. 후배 여형사 역할이었던 이케다 일라이저는 깊이가 있다기보단 극중에서 기능적으로 소비되는 역할이었지만 적어도 괜찮게 녹아들었다는 인상입니다.
빼놓을 수 없는게 세키요 하우스의 사업부장을 맡은 야마모토 코지(아오야기 부장)인데… 이 배우는 뭘해도 시대극 같다고 해야되나 피지컬이나 발성이 너무 좋아서 극중에서 필요 이상으로 존재감이 굵어집니다. 다만 이번 드라마에서는 그런 존재감이 사기꾼들 기술을 맛있게 접수하면서 좋은 시너지가 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등빨/수트빨이 좋았나 싶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개인적으로 일본 디벨로퍼 대기업 하면 떠오르는 정력적이고 탐욕적, 상승사고에 가득 찬 인물상을 전형적이면서도 찰지게 연기해서 명백한 수훈갑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연기를 포함하여 이 드라마의 미덕은 드라이함/스피디함/미니멀함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밀조밀하고 스마트하다는 인상이었네요.
다만 부동산 매매에 대한 나라 특유의 관습이나 후진적 관행을 포함한 디테일을 비춤으로써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드라마였기 때문에, 애초에 소재에 대한 관심이 약한 시청자라거나 해외 시청자에게는 좀 허들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내에선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더라구요.
같이 보던 일본인 친구는 서류 앞뒤로 팔락팔락하면서 인감 확인하는거 보고 실제로도 똑같다고 얘기하는거 보고 신기했습니다.
■현실은 더 재미없고 참혹하다
드라마는 사기맞은 게 발각되고 아오야기가 찰지게 퇴장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만, 그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좀 찾아본 결과과 퍽 고구마였습니다.
・극중의 아오야기 부장의 모티브가 된 세키스이하우스 맨션사업본부장(상무)은 자살했다는 루머도 있지만 정확하게 공표된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극중에서 아오야기의 뒷배를 맡으며, "지울 것을 전제하고 품의서에 사장 안건이라는 압박"을 걸었던 사장, 현실에선 당시 세키스이 하우스의 사장이었던 아베 토시노리의 행보가 기가 막힙니다.
・당시 세키스이하우스의 회장이었던 와다 이사무가 사장의 책임을 물어 임원 투표에 해임안을 부치지만 찬반이 반반으로 갈리면서 부결됩니다.
・오히려, 당시 사장이었던 아베 토시노리가 회장이자 임원 회의의 의장이었던 와다 이사무의 의장 자격을 박탈하고, 의장을 바꿔침과 동시에 번개처럼 회장 해임안을 부쳐서 가결시킵니다. 임원 회의 이전에 물밑작업을 해두고 쿠데타를 성공하고, 이후 2021년까지 회장직을 역임하다가 물러납니다.
드라마에서 이 부분을 아예 다루지 않고, 오히려 에필로그에서 마치 사장이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여주며 끝낸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긴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뒷맛이 너무 나빠서, 거기까지 묶어서 보여주면 결국 드라마 자체가 완전히 소화불량인 상태로 끝날 것 같거든요.
■추천할 만한 양작
이거저거 두서없는 소개였습니다만, 주연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고 딱 적절한 스케일로 만든 양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7부작이라 그리 부담도 없고요.
굳이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없더라도 아야노 고나 야마모토 코지를 평소 좋아하는 일본 영화/드라마 애호가라면 연기 차력쇼 보는 느낌으로 봐도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
추천60 비추천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