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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린 왕자》·《에린 왕자》 - 고전의 옷을 입고 온 살아 있는 사투리

  애린 왕자
저자:생텍쥐페리
출판:도서출판 이팝
발매:2020.10.30.
  에린 왕자
저자:생텍쥐페리
출판:도서출판 이팝
발매:2021.11.22.


한때는 표준어를 만드는 것이 한국어의 과제인 적이 있었습니다. 각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투리로 소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모든 사투리 화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표준어입니다. 지금은 표준어와 어법을 국립국어원이라는 국가 기관에서 관리하지만, 일제 시기에 한국어의 표준은 사전을 통해서 만들어졌고, 일제가 한국어 사용을 규제하는 그 시대에 그런 사전을 만드는 과정은 단순한 언어 연구가 아닌, 대한민국 독립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표준어가 권력을 잡고 지방 사투리들은 촌스러운 것, 급이 낮은 것으로 여겨지며 도태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활권이 전국 단위로 넓어지면서 한 지방에 국한된 사투리로만 소통할 수가 없게 되었고, 전국 단위로 소통할 수 있는 표준어만 익히는 것이 경제적인 언어생활이 되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동남 방언, 그중에서도 주류 방언이 아닌 포항 사투리로 번역된 《애린 왕자》가 나왔습니다. 동남 방언은 크게 경남 방언과 경북 방언으로 나뉘는데, 포항 방언은 경북 방언하면 떠오르는 대구가 속한 경북 남부 방언권과는 독자적인 방언 권역에 속합니다. 66bd9a111d4e5.png    

김덕호, 〈영남 지역의 하위 방언〉(2019)의 경북 하위 방언 구획 지도. 포항은 경주, 영덕, 청송, 울진 일부와 함께 경북 동부 방언에 속합니다.


이 책은 포항을 기반으로 하는 독립 출판사 이팝에서 나왔습니다. 세계 각 언어로 《어린 왕자》 번역을 진행하는 독일 틴텐파스 출판사와 이팝의 최현애 대표의 만남에서 시작되어, 틴텐파스판 《어린 왕자》의 125번째 언어로 "경상북도 방언"이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번역자는 최현애 대표 본인입니다. 처음에는 300부만 찍었다가, 인터넷에서 입소문을 타고 올라가 2쇄, 3쇄를 연이어 찍었습니다. 밀리의서재에서는 역자가 직접 녹음한 오디오북과 개그맨 김용명·신규진이 같이 녹음한 축약본 오디오북도 같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라북도 방언 역자를 겨우 찾아 나온 것이 심재홍 역의 《에린 왕자》입니다. 틴텐파스판 《어린 왕자》에서는 154번째 언어입니다. 이와 함께 소리꾼 임채경이 녹음한 오디오북도 같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지역 사투리로 쓰고 녹음한 책이 팔리고 있다는 것이 아직까지 한국에서 지역 방언을 보존하려는 자생력 있는 운동이 가능하다는 것 같아서 기쁩니다. 출판사가 서울로, 파주로 몰리는 이때에 포항에 자리를 잡은 출판사가 지역 특성을 잘 살렸고 그것이 대중들에게 먹혔다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두 책 모두 입말 사투리를 썼고, 눈으로 읽기보다는 소리 내서 낭독하기에 좋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원문에 없는 것 같은 구절을 넣기도 해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문디 가스나… 꽃 말을 듣는 게 아니 였능데" 어느 날 가가 내자데 속마음을 털어놓데.”

다른 번역본에는 "문디 가스나…"에 해당하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원문에 충실한 다른 번역본을 먼저 읽고 이 책을 읽도록 권하기도 하더군요.

두 책 모두 각 방언 화자가 직접 녹음한 오디오북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책이 많이 팔린 게 다행입니다. 저는 눈으로 읽을 때보다 직접 들을 때 좀 더 이해가 잘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읽을 때에는 무슨 말인지 감이 안 오는 단어가 들으니까 "아하! 이거구나" 싶은 경우가 있었어요. 제가 서울 방언 화자인지라 타 지역 방언을 직접 들어 볼 기회가 적다 보니 이런 음성자료가 더 큰 도움이 됩니다.

눈으로 읽을 때보다 들을 때 더 잘 이해가 되는 것은 소리 나는 대로 글을 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식겁하다"라는 단어는 표준어긴 하지만 서울 방언보다는 동남 방언에서 더 많이 쓰는 말인데, 한자어기 때문에 식겁(食怯)이라고 쓰는 게 맞지만 "시껍하다"라고 썼더군요. 이는 서울 방언 이외의 사투리를 글로 적은 역사가 짧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국어의 역사에서는 처음 훈민정음을 만들었을 때에는 소리 나는 대로 적었다가 점차 단어의 원형을 밝혀 적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배웠습니다. 이는 원래 처음 글을 쓸 때에는 쓰는 사람이 편하게 쓰다가, 점차 읽는 사람이 편하게 쓰는 것으로 바뀌어 가는 경향 때문입니다.

영어 알파벳의 기원이 되는 그리스 글도 한때는 쓰는 사람이 편한 "좌우 교대 서법"이라는 방법으로 썼다가 읽는 사람이 편한 지금의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66bd9b9ddbc0e.png좌우 교대 서법으로 적은 영어 문장.

좌우 교대 서법은 처음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을 쓰다, 줄 끝에서 다음 줄로 내려갔을 때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쓰고 이런 교대 작업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싶겠지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만 글을 쓰다 보면 한 줄 다 쓰고 팔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야 하잖아요? 좌우 교대 서법은 한 줄 다 쓰고 팔을 내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쓰는 사람이 편하지만 읽는 사람은 너무 불편하죠. 결국은 읽는 사람이 편한 쪽으로 바뀝니다.

말이 좀 샜는데, 어쨌든 사투리를 읽기 쉽게 쓰려면 사투리를 글로 쓰는 경험이 좀 많이 쌓이고 사투리를 읽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직은 사투리를 글로 적어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읽는 사람보다는 쓰는 사람에게 편한 소리 나는 대로 쓴 글이 된 것 같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사투리의 문법을 분석하고 문법 요소에 따라 끊어 적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사투리로 된 글이 많아지면, 사투리에 정통한 언어학자의 도움 없이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입니다. 아직은 사투리에도 문법이 있고 적는 법이 있다고 하는 것은 사투리를 지키고 쉽게 사용하는 데에 오히려 진입 장벽이 될 것 같아요.

오래된 고전, 많은 사람들이 읽어본 책을 사투리로 다시 읽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이번 읽기에서 곱씹어 생각해 본 것은 다음 문장입니다.

수백만 또 수백만이 넘는 별이사 차고 넘치지만도 그속에 딱 한 송이밖에 없는 꽃을 누가 사랑하모, 가는 별을 보는걸로도 행복할끼라.

<애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최현애 옮김

어떤 사:램이 벨: 수:백 수:천만 개 속:에 딱 하나밲에 없:는 꽃을 좋:아허믄 말이여, 그저 그 벨:덜을 올레 보기만 혀:도 기분이 좋:을 거구만요.

<에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심재홍 옮김

표준어 번역본도 같이 남겨봅니다.

수백만 개의 별들 속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어.

<어린 왕자(개정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전성자 옮김

와각지쟁(蝸角之爭)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어요. 옛날 중국의 제나라와 위나라라는 두 힘센 나라가 의가 틀어져 서로 싸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현자가 조언을 해 주기를 큰 우주에서 보기엔 제나라와 위나라의 싸움이라는 게 달팽이 촉각 위의 두 나라가 싸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자, 위나라 왕과 신하들은 인간 세계의 갈등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 없음을 깨닫고 제나라와 싸울 의논을 그만두었습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도 비슷한 깨달음을 전달해 주는 "창백한 푸른 점"이 있습니다. 먼 우주에서 지구의 사진을 찍은 것이지요. 이 점을 보고 “우주라는 광대한 스타디움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무대에 불과합니다.”라고 감상을 남겼지요. 그 점 위에 위대한 사람이든 악인이든 다 있었다면서, 우리가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깨닫고서야 저 창백한 푸른 점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와각지쟁이든, 창백한 푸른 점이든, 둘 다 우주 안에서 인류의 작음을 강조하고 이를 인류의 보잘것없음으로 연결시킵니다. 이는 인류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보는 오만을 꺾고 겸손하게 해 주기는 하지만, 자칫하면 지구 위의 존재를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떨어뜨리는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글쓴이와 그 언니도 아버지에게서 “넌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라는 가르침을 받고 실제로 깊은 허무에 빠졌으니까요. 글쓴이는 닐 그레이스 타이슨의 “우리는 점 위의 점 위의 점이다.”라는 유명한 말에서 아버지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는데, 저 말과 "창백한 푸른 점"은 통하는 면이 있지요.

어린 왕자는 이와 같이 작음을 의미 없음, 무가치함과 연결하는 가르침에 반항합니다. 아무 특별하지 않은 것도 단둘만의 관계에서는 특별하고,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감정이 미움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 특별한 감정 자체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은 감정과 관계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감정 때문에 인류 역사에 수많은 비극이 일어났다고 해서, 감정을 일으키는 자아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고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요? 허무주의에 빠지고도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요.

부정적인 감정을 잘 다스리고 처리하는 법을 배워야지, 부정적인 감정의 근본이라면서 자아 자체의 무의미함을 설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쪽으로 사람들을 몰아갈 위험이 있습니다. 어린 왕자는 어린이의 시각에서 자칫하면 놓칠 수 있는 작은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 줍니다.

이미 《어린 왕자》를 읽어보신 분들이 많겠지만, 사투리로 다시 읽어 보면서 사투리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을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처럼 경상도 사투리나 전라도 사투리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표준어로 번역된 어린 왕자를 다시 한번 읽어 보고 도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앞으로도 다양한 사투리 작품을 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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