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
안녕하세요. 더미짱입니다.
약 한 달 전쯤에 책 출판을 기념하여 글을 하나 썼었는데(https://pgr21.com/freedom/101799)
당시에 글을 써달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저도 한 번쯤 pgr에 책 소개를 조금 더 자세히 하고 싶어서 글을 남깁니다.
1. 연구의 계기
저는 2021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박사학위의 제목은 <17세기 청‧조선 관계 연구>입니다.
구체적으로는 1637년 병자호란 이후 조선과 청 관계가 어떠한 방식과 방향으로 정립되어 가는지 확인해보고자 한 작업이었습니다. 병자호란은 다들 알다시피 청의 승리로 끝이 났고, 이후 조선은 청의 제후국이 되었지만 그것만으로 관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요. 사람도 친구를 사귀거나 결혼을 하면 양보할 건 양보하고 지킬 건 지켜가며 서로 맞춰가듯이 국가 간의 관계도 천자와 제후의 관계라 하더라도 조정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저는 바로 그 조정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모든 관계는 시작이 중요합니다.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의 항복 의례 이후 조선과 청은 여러 가지 실무 문제에 직면합니다. 당연히 청은 승전국으로서 더 많은 권리를 요구했고, 조선은 패전국이지만 조선이라는 국가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침해받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어떻게 보면 1637년 이후 한 동안은 이러한 입장 차이를 조율하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조율 과정은 결과도 물론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갈등이라는 것은 관계가 안정되더라도 발생하기 마련이고, 그럴 때면 이전에 갈등을 해결하던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전례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조율 과정이 사료에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청실록에는 결론만을 서술하거나 과정을 기술하더라도 요약해놓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승정원일기>나 <비변사등록>에는 조금 더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 경우가 있지만 이 역시 외교 현장(심양이나 북경)에서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해 듣고 기술하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제가 가장 주목한 사료는 <심양일기>와 <심양장계>였습니다. <심양일기>와 <심양장계>는 세자시강원이 1637년부터 1644년까지 심양에서 있었던 일을 직접 보고 들으며 작성한 것입니다. 세자시강원이 이러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청이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세자를 인질로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포함한 다수의 인질이 심양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시강원 역시 소현세자를 보필하기 위해 심양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시강원은 단순히 세자를 보필한 것이 아니라 매일 세자와 청 내부의 상황에 대해 일기를 작성하였고, 중요한 보고 사항은 본국으로 장계를 통해 보고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일기는 <심양일기>가, 보고서들은 <심양장계>라는 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책에 바로 외교적 조율 과정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조‧청 관계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이 두 책을 정말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그 결과 나름대로 저만의 결론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소현세자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시강원의 존재 목적이 세자를 보필하기 위함이었으니 세자에 대한 정보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저 나름대로 소현세자의 상(像)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다만 박사논문의 주제는 조‧청 관계였기 때문에 소현세자와 관련한 이야기를 풀어낼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박사학위 이후에 소현세자 이야기를 따로 학술논문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성이 게으른지라 작업은 생각보다 더뎠습니다. 제가 게으름과 일별하고 조금 더 부지런해질 수 있었던 계기는 pgr에서 본 하나의 글 때문이었습니다(https://pgr21.com/humor/450377). 위의 글에서 저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소현세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논문 제출을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2022년 9월에 <소현세자 서사의 탄생과 역사 속의 소현세자>라는 논문을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위의 논문을 포함하여 소현세자와 관련한 논문을 두 편쯤 더 제출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사실 학술 논문은 비연구자가 읽기도 힘들뿐더러 아직 초학자 수준인 저를 방송에서 불러줄 일도 없으니 제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중서를 출간하는 것이었습니다.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대중서는 경력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심사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연구실적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책을 낸다는 것은 수고에 비해 얻을 것이 많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이야기를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출간을 결심했고, 결국 6월 막바지에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라는 단행본을 간행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그 책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2. 소현세자는 왜 각광을 받게 되었는가?
아마도 한 번쯤은 소현세자 독살설을 접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소현세자 독살설의 배경은 <인조실록>입니다. 소현세자의 염습에 참여한 이세완이라는 인물이 소현세자의 시신의 형상을 증언하였는데, ‘온 몸이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많은 사람들이 소현세자 독살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이세완의 증언에 대해 아무런 반향도 없었습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애도는 할지언정 그 죽음의 배경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소현세자라는 인물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조금씩 잊혀졌습니다.
1645년 사망한 소현세자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까지는 30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습니다. 1931년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하였던 야마구치 마사유키라는 일본인 학자가 <소현세자와 탕약망>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입니다. 이 논문에는 놀라운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서양인 선교사 아담 샬과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매우 깊은 교유를 맺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전말은 아담 샬의 회고록인 <중국전례보고서>에 수록되어 있었는데, 이에 따르면 소현세자는 서양 문명에 감화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하는 길에 전도사의 파견을 요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야마구치는 “아담 샬과 소현세자의 만남은 조선 역사상의 대사건이었지만 소현세자의 요절로 인해 어떠한 역사적 발전으로도 진행되지 못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한국인 학자 김용덕이었습니다. 김용덕은 1964년 <소현세자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야마구치의 논의를 수용한 것에 더해 소현세자 개인의 영향력에 주목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심양에서 인질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소현세자의 지위가 국왕 대리의 수준으로 격상되었고 이로 인해 인조와 갈등이 불거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용덕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소현세자의 죽음을 독살로 규정한 것에 있습니다. 김용덕은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을 명분론과 현실주의의 대립으로 해석하였고, 이 갈등이 소현세자 독살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서구 과학과 천주교에 대해서 비상한 호의와 관심을 가졌던 소현세자가 즉위했다면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이 존재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야마구치와 김용덕의 연구만으로도 소현세자 재평가의 모든 판이 깔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소현세자에 대한 관심은 불타오르지 않았습니다. 1998년 역사작가 이덕일은 공전의 히트작 <누가 왕을 죽였는가>(후에 <조선 왕 독살사건>으로 제목 수정)라는 저서에서 한 꼭지로 소현세자를 다루었는데 그 서두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그리고 삼전도 치욕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도, 그 뒤에 존재하는 소현세자와 그 일가의 비극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만큼 소현세자는 잊혀진 인물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덕일의 책이 발간된 이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소현세자와 관련한 연구와 콘텐츠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상황을 반전시킨 것일까요? 사실 이덕일의 책에서 보여주는 소현세자의 모습은 야마구치와 김용덕의 연구에서 대부분 제기된 것들이었습니다. 다만 훨씬 극적인 장치를 통해 인조와 소현세자의 대비를 실감나게 보여주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인조가 세자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있을 때, 세자는 이렇듯 왕조가 교체되는 도시 북경에서 ‘하늘이 이끌어준 만남’에 감사하고 있었다”, “수많은 서양 물품을 가지고 귀국하는 소현세자의 머릿속은,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는 이상으로 가득했다”와 같은 구절들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이 30만 부 이상 팔려나가며 대히트를 쳤다는 것입니다.(정말 부럽습니다.) 물론 이것이 소현세자 한 명 때문은 아니었지만 소현세자가 대중의 관심이 되기에는 충분하였습니다. 소현세자가 관심의 영역에 들어오자 많은 역사학자들과 미디어매체들이 달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관련 콘텐츠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점차 소현세자를 둘러싼 이야기는 살이 붙기 시작했고, 어느덧 거대한 서사가 완성되었습니다.
- 소현세자는 외교관 역할을 수행하며 청과 조선을 중재하고, 청의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았다. 소현세자(내외)는 조선인 포로(노예)를 속환(구출)하고, 농장을 성공적으로 경영하며 부를 축적하는 등 경영가적인 능력을 선보였다. 또한 명・청 교체를 눈앞에서 목도하며 현실주의자적 안목을 지니기 시작하였다. 북경에서는 아담 샬과의 만남을 통해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고(혹은 수용하고), 서양문명의 우수성을 인식하였다. 소현세자의 급진성(개방성)은 인조의 시기를 불러왔고, 이로 인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당했다). -
이상이 현재 공유되고 있는 소현세자 서사의 대략이고,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최근 영화 <올빼미>와 드라마 <연인>이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소현세자 서사를 완성시키는 데에 있어 역사학자들 역시 일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역사학자들조차도 대부분 학술논문보다는 교양지, 신문, 방송 등을 통해 소현세자와 관련한 의견을 개진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소현세자 관련 논의가 학술 논문에서 채택되기에 부족함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역사학자들 역시 치밀한 사료 검토 대신 ‘소현세자에 대한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는 길을 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3. 역사 속의 소현세자는 어떠한 모습이었는가?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에서 사료가 이야기하는 소현세자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짧은 글에서 모든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몇 가지 이야기나마 해보고자 합니다.
현재 공유되고 있는 소현세자 서사에 따르면 소현세자가 심양의 포로들을 속환하고 이들을 농장 경영에 동원하여 큰 성과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소현세자가 패전에 대한 대가로 인질 생활을 수행하면서도 전쟁의 참화를 온몸으로 겪고 있는 또 다른 피해자, 즉 조선인 전쟁 포로들을 적극적으로 구출하는 모습은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쓴 인조와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이러한 서사는 <인조실록>이나 <심양일기>, <심양장계>와 같은 사료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는 듯 보입니다. 그럼에도 앞뒤 사정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문제는 ‘밥’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심양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 일행은 수백 명 단위였습니다. 공식적인 인질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또 삼공육경(삼정승과 육조판서)의 자제들로 11명입니다. 하지만 소현세자를 보필하는 시강원 관원을 포함하여 각종 명목의 관료들이 동행하였고, 호위 역할을 하는 군사, 잡일을 도맡아 할 종인, 식사를 책임질 주방장, 조선 본국과 왕래하며 소식을 전하는 군관 등 많은 사람들이 심양 생활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숫자가 수백 명 단위를 이루다보니 식사 문제도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처음 청에서는 상국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통 크게 찬거리를 현물로 모두 제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소현세자 일행의 인질 생활은 기한이 정해져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무작정 계속 식비를 대주기에는 인질 일행의 숫자는 너무 많았고 기한이 흐를수록 부담은 커져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1년 후 청에서는 은을 지급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꿉니다. 돈을 줄 테니 알아서 찬거리를 사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돈은 현물로 주었을 때보다 적은 가치에 해당했고, 조선에서는 항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결국 심양의 인질 일행은 청이 제공하는 은과 본국에서의 지원을 합쳐 식비에 충당합니다. 근데 1641년에 이르면 청에서 또 다시 방침을 바꿉니다. 이제부터 밭을 떼어줄 테니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질 일행은 현재 심양에 있는 인원 중에는 농사를 지어본 사람도 없으며, 그렇다고 농군을 본국에서 불러올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뜻으로 맞섭니다. 결국 1641년 1년은 유야무야 넘어갑니다.
하지만 1642년 청에서는 더 강경하게 자신들의 조치를 밀고 나갑니다. 인질 일행은 똑같은 논리로 거부했지만 청 황제 홍타이지는 이에 대해서도 해법을 제시합니다. “농군을 본국에서 데려오기 어렵다면 포로를 속환해서 쓰고 세자가 훗날 본국으로 돌아갈 때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황제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심양의 인질 일행은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조선인 포로를 속환, 즉 돈을 주고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이상의 포로 속환과 농장 경영 측에서 소현세자를 비롯한 인질 일행의 자발적인 의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조선 측은 어떻게든 농장 경영을 회피하려 들었고, 포로 속환을 통해 일꾼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은 전적으로 홍타이지이의 아이디어였습니다. 홍타이지가 포로 속환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온 것 역시 결코 조선에 우호적인 조치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심양에서 감당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섰던 조선인 포로를 돈으로라도 바꾸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아담 샬과의 만남을 살펴보겠습니다. 소현세자가 주목받게 된 계기는 야마구치가 아담 샬의 회고록을 발굴하면서부터였습니다. 따라서 ‘소현세자 서사’의 시작점은 소현세자와 아담 샬의 교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담 샬의 기록을 그대로 믿으면 되는 것일까요?
아담 샬의 회고에 따르면 두 사람의 만남은 화기애애했습니다. 소현세자는 서양인 선교사들의 천문 역법 제작 기술에 감탄하여 역관을 대동하여 아담 샬을 방문했습니다. 아담 샬 역시 소현세자에게 여러 천주교 서적들과 천구의, 천주상 등을 전달하며 화답했습니다. 이에 소현세자는 아담 샬에게 친필 서한을 보내 기독교 교리를 조선에 전파하겠다는 각오를 밝혔습니다. 또 소현세자는 선교사 내지는 세례받은 환관의 파견까지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두 사람의 만남이 조선 측에 남아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아담 샬의 기록은 자신의 성과를 홍보하여 자신을 후원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레오폴트 1세에게 헌정된 책이라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 샬은 이 회고록을 통해 유럽의 예비 선교사들이 중국 선교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도록 이끌어야 했고, 또한 본국에서의 지속적인 후원이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의심의 시선으로 아담 샬의 기록을 살펴보면 의외로 허점이 많습니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가 천문 역법 전문가, 즉 역관을 대동하고 자신을 방문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는 청에서 아담 샬 등 서양인 선교사들이 제작한 달력인 시헌력을 공식 달력으로 채택하자 조선이 그 달력의 제작 원리를 배우기 위해 역관을 파견했던 역사적 사실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소현세자 일행 중에는 역관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조선이 시헌력의 존재를 눈치 챈 것은 시헌력이 공식 배포된 1645년의 일이었습니다. 소현세자는 1644년 11월 귀국길에 올라 1645년 2월 한양에 도착하기 때문에 시헌력의 존재를 알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조선에서 역관을 파견하여 시헌력 제작 원리를 배우고자 했던 일 역시 1645년 이후일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는 1648년부터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 아담 샬은 1648년 이후에 일어난 일을 1644년 소현세자와의 만남에 끼워 넣은 것입니다. 요새말로 소위 msg를 친겁니다.
소현세자가 친필 서한을 보냈다는 대목도 의심스럽습니다. 소현세자의 친필 서한은 모두 라틴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친필 서한의 원본도, 그리고 한문으로 베낀 사본마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담 샬이 번역해놓은 소현세자의 서한 내을 보면 기독교 교리를 내면화한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아담 샬과 소현세자의 만남은 아무리 길어도 물리적으로 두 달을 넘길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던 소현세자가 기독교 교리를 체화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기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담 샬의 회고록에 기록된 소현세자의 신분 문제도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조선의 왕’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인조가 심양이나 북경을 방문한 적은 없기 때문에 인조와 아담 샬이 만나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이 ‘조선의 왕’을 소현세자로 비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자를 왕으로 표기한 사실 그 자체에 있습니다. 만약 아담 샬이 정말 소현세자를 조선 왕으로 잘못 알았다면, 이는 아담 샬과 소현세자의 교유가 예상보다 깊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소현세자가 자신을 조선 국왕이라고 소개했을 리는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만약 아담 샬이 소현세자의 신분을 알면서도 왕으로 표기했다면, 이는 자신의 회고록이 과장된 기록임을 자인하는 꼴이 됩니다. 어느 쪽이든 회고록의 신뢰도에는 치명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소현세자 독살설 문제를 꺼내보겠습니다. 소현세자 독살설의 요지는 인조가 침의 이형익을 사주하여 소현세자를 독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소현세자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매우 유약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지병을 앓아왔고, 이 때문에 정상적인 업무가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8년 간의 심양 인질 생활 중에 조선에서 어의와 약재를 보낸 것만 3번이었고, 홍타이지는 소현세자를 전쟁에 끌고 다니려했다가 소현세자의 건강 문제 때문에 2번이나 봉림대군을 대신 데려가기도 하였습니다. 소현세자는 1644년의 마지막 귀국길에도 병마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귀국은 1달 이상 지체되기도 하였습니다.
소현세자가 1644년 살인적인 일정을 보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현세자는 1643년 12월부터 1644년 3월까지 심양에서 한양을 왕복했습니다. 심양에 도착하고 2주 만에 명과의 전쟁에 동원되어 전쟁터를 전전합니다. 1644년 5월 북경을 점령한 이후 심양으로 돌아왔다가 9월 다시 북경으로 이동했으며 11월 한양을 향해 영구 귀국길에 오릅니다. 전근대 교통수단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일부는 총탄과 화살이 빗발치는 전쟁터였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병약한 소현세자가 육체 건강한 일반인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정을 소화하기에 무리가 있었음은 당연합니다. 1645년 2월 한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소현세자가 위태로웠습니다.
1645년 2월 18일 소현세자가 한양에 도착하자 치료를 위해 어의들이 총동원됩니다. 어의 1번이 치료에 동원되었다가 실패하면 2번이 추가로 동원되고, 이마저도 실패하면 3번이 동원되고, 3번도 실패하면 4번 어의가 출동합니다. 그리고 바로 4번 어의가 이형익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형익이 투입된 이후 소현세자의 증세가 극적으로 호전됩니다. 3월 14일 소현세자는 모든 치료를 중단할 정도로 회복합니다. 하지만 4월 23일 병이 재발하였고, 다시 어의 1, 2, 3번이 차례로 동원됩니다. 이번에는 2번이 이형익이었고, 어의 3명은 돌아가며 자신의 방식으로 소현세자를 치료하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4월 26일 소현세자는 사망하였고, 사망 직전 마지막으로 치료를 담당하였던 인물이 바로 이형익이었습니다.
이형익이 만약 독살의 공범이었다고 한다면 크게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첫째, 4월 23~26일 사이 치료에 동원된 어의는 3명이었습니다. 치료방식은 어의 1번이 실패하면 1번은 물러가고 2번이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1번은 1번 나름대로 계속 치료를 하고 그 위에 2번의 치료를 더하는 것입니다. 즉 어의 1, 2, 3번은 계속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학적 기술을 총동원하여 소현세자를 치료하였습니다. 만약 어떤 어의 한 명이 소현세자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상황을 악화시키려 했다면, 나머지 두 명의 어의가 눈치를 채고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만약 세자가 사망하면 치료에 동원된 어의 모두 처벌의 대상이 될게 뻔했으니까요.
또 한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소현세자는 이미 위중한 상태로 한양에 도착했습니다. 만약 이형익이 소현세자를 독살시키고자 했다면 4월이 아닌 2월이 훨씬 적절한 시점이었습니다. 청나라에서 병을 얻어온 데다가 내로라하는 어의들이 달려들어도 회복시키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형익이 투입되어 치료에 실패하더라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조실록>에 남아있는 독살의 흔적들은 과연 무엇인가? 이와 관련해서 최근 SBS ‘그것이 알고싶다’ 유튜브 채널에서 제작된 <사인의 추억> 소현세자 편이 주목됩니다. 법의학자 유성호는 소현세자의 시신 형상은 독살의 증거라기보다 부패의 결과로 보이며, 소현세자의 증상을 장기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제1형 당뇨병일 확률이 높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물론 현대 의학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술된 의료 기록을 토대로 내린 결론이기 때문에 맹신할 수는 없지만 <인조실록>에 수록된 시신의 형상이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4. 궁극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가?
제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조선의 미래가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조선은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로 250년을 지속하였습니다. 또한 소현세자를 흔히 서양 문물 수용의 상징적인, 혹은 유일한 인물로 기억하지만 소현세자의 존재와 별개로 서양 문물은 지속적으로 조선 사회에 유입되었습니다. 1602년 마테오 리치가 제작하여 명나라 조정에 진상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가 조선에 전달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년에 불과했습니다. 1644년 청나라에서 시헌력을 채택한 이후 조선 조정에서 시헌력 수용의 필요성을 논의한 것은 1645년의 일이었으며, 관상감원을 청나라에 파견한 것은 1648년이었습니다.
천주교 교리를 담은 다양한 서적들이 조선에 유포되어 평생 한 차례도 관직을 역임하지 못하고 안산에 칩거했던 성호 이익에게까지 전달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물론 이익은 천주교를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그의 제자들까지 성호 이익의 뜻을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 한 명의 성직자도 파견되지 않은 조선 땅에서 자발적인 천주교인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근대화에 실패했는가? 이 문제를 따지기 전에 ‘당시 수용되었던 서양 문명이 충분히 근대적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합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시기의 서구 과학이라는 것의 최종 목적은 신의 존재와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서구 과학의 일부 영역, 예컨대 천문학의 성과는 동아시아의 수준보다 높았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이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의 근대 과학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서양인 선교사들이 만든 시헌력에서 가정한 우주의 질서에서 중심은 여전히 지구였습니다. 중세 과학 수준에 머물러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식으로 근대화의 가능성을 따져보는 역설적인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근대화 실패의 책임을 너무 쉽게 조선의 폐쇄성에 돌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우리의 생각만큼 폐쇄적이지 않았고, 소현세자라는 존재와 무관하게 서양 문물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소현세자에게 조선의 미래를 위임하고, 소현세자의 죽음을 조선의 좌절과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은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로도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과거의 인물에게 현재의 열망을 투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하지만 그 열망이 자칫 과도할 경우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는 끊임없는 긴장 상태에 놓여야만 합니다. 이상의 이야기는 현재의 과도한 열망으로 기울어버린 시계추를 조금이나마 17세기 격변기의 ‘인간 소현세자’에게 맞추려 한 시도였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약 한 달 전쯤에 책 출판을 기념하여 글을 하나 썼었는데(https://pgr21.com/freedom/101799)
당시에 글을 써달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저도 한 번쯤 pgr에 책 소개를 조금 더 자세히 하고 싶어서 글을 남깁니다.
1. 연구의 계기
저는 2021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박사학위의 제목은 <17세기 청‧조선 관계 연구>입니다.
구체적으로는 1637년 병자호란 이후 조선과 청 관계가 어떠한 방식과 방향으로 정립되어 가는지 확인해보고자 한 작업이었습니다. 병자호란은 다들 알다시피 청의 승리로 끝이 났고, 이후 조선은 청의 제후국이 되었지만 그것만으로 관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요. 사람도 친구를 사귀거나 결혼을 하면 양보할 건 양보하고 지킬 건 지켜가며 서로 맞춰가듯이 국가 간의 관계도 천자와 제후의 관계라 하더라도 조정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저는 바로 그 조정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모든 관계는 시작이 중요합니다.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의 항복 의례 이후 조선과 청은 여러 가지 실무 문제에 직면합니다. 당연히 청은 승전국으로서 더 많은 권리를 요구했고, 조선은 패전국이지만 조선이라는 국가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침해받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어떻게 보면 1637년 이후 한 동안은 이러한 입장 차이를 조율하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조율 과정은 결과도 물론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갈등이라는 것은 관계가 안정되더라도 발생하기 마련이고, 그럴 때면 이전에 갈등을 해결하던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전례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조율 과정이 사료에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청실록에는 결론만을 서술하거나 과정을 기술하더라도 요약해놓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승정원일기>나 <비변사등록>에는 조금 더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 경우가 있지만 이 역시 외교 현장(심양이나 북경)에서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해 듣고 기술하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제가 가장 주목한 사료는 <심양일기>와 <심양장계>였습니다. <심양일기>와 <심양장계>는 세자시강원이 1637년부터 1644년까지 심양에서 있었던 일을 직접 보고 들으며 작성한 것입니다. 세자시강원이 이러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청이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세자를 인질로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포함한 다수의 인질이 심양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시강원 역시 소현세자를 보필하기 위해 심양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시강원은 단순히 세자를 보필한 것이 아니라 매일 세자와 청 내부의 상황에 대해 일기를 작성하였고, 중요한 보고 사항은 본국으로 장계를 통해 보고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일기는 <심양일기>가, 보고서들은 <심양장계>라는 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책에 바로 외교적 조율 과정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조‧청 관계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이 두 책을 정말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그 결과 나름대로 저만의 결론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소현세자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시강원의 존재 목적이 세자를 보필하기 위함이었으니 세자에 대한 정보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저 나름대로 소현세자의 상(像)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다만 박사논문의 주제는 조‧청 관계였기 때문에 소현세자와 관련한 이야기를 풀어낼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박사학위 이후에 소현세자 이야기를 따로 학술논문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성이 게으른지라 작업은 생각보다 더뎠습니다. 제가 게으름과 일별하고 조금 더 부지런해질 수 있었던 계기는 pgr에서 본 하나의 글 때문이었습니다(https://pgr21.com/humor/450377). 위의 글에서 저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소현세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논문 제출을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2022년 9월에 <소현세자 서사의 탄생과 역사 속의 소현세자>라는 논문을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위의 논문을 포함하여 소현세자와 관련한 논문을 두 편쯤 더 제출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사실 학술 논문은 비연구자가 읽기도 힘들뿐더러 아직 초학자 수준인 저를 방송에서 불러줄 일도 없으니 제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중서를 출간하는 것이었습니다.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대중서는 경력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심사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연구실적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책을 낸다는 것은 수고에 비해 얻을 것이 많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이야기를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출간을 결심했고, 결국 6월 막바지에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라는 단행본을 간행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그 책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2. 소현세자는 왜 각광을 받게 되었는가?
아마도 한 번쯤은 소현세자 독살설을 접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소현세자 독살설의 배경은 <인조실록>입니다. 소현세자의 염습에 참여한 이세완이라는 인물이 소현세자의 시신의 형상을 증언하였는데, ‘온 몸이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많은 사람들이 소현세자 독살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이세완의 증언에 대해 아무런 반향도 없었습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애도는 할지언정 그 죽음의 배경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소현세자라는 인물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조금씩 잊혀졌습니다.
1645년 사망한 소현세자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까지는 30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습니다. 1931년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하였던 야마구치 마사유키라는 일본인 학자가 <소현세자와 탕약망>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입니다. 이 논문에는 놀라운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서양인 선교사 아담 샬과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매우 깊은 교유를 맺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전말은 아담 샬의 회고록인 <중국전례보고서>에 수록되어 있었는데, 이에 따르면 소현세자는 서양 문명에 감화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하는 길에 전도사의 파견을 요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야마구치는 “아담 샬과 소현세자의 만남은 조선 역사상의 대사건이었지만 소현세자의 요절로 인해 어떠한 역사적 발전으로도 진행되지 못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한국인 학자 김용덕이었습니다. 김용덕은 1964년 <소현세자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야마구치의 논의를 수용한 것에 더해 소현세자 개인의 영향력에 주목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심양에서 인질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소현세자의 지위가 국왕 대리의 수준으로 격상되었고 이로 인해 인조와 갈등이 불거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용덕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소현세자의 죽음을 독살로 규정한 것에 있습니다. 김용덕은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을 명분론과 현실주의의 대립으로 해석하였고, 이 갈등이 소현세자 독살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서구 과학과 천주교에 대해서 비상한 호의와 관심을 가졌던 소현세자가 즉위했다면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이 존재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야마구치와 김용덕의 연구만으로도 소현세자 재평가의 모든 판이 깔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소현세자에 대한 관심은 불타오르지 않았습니다. 1998년 역사작가 이덕일은 공전의 히트작 <누가 왕을 죽였는가>(후에 <조선 왕 독살사건>으로 제목 수정)라는 저서에서 한 꼭지로 소현세자를 다루었는데 그 서두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그리고 삼전도 치욕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도, 그 뒤에 존재하는 소현세자와 그 일가의 비극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만큼 소현세자는 잊혀진 인물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덕일의 책이 발간된 이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소현세자와 관련한 연구와 콘텐츠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상황을 반전시킨 것일까요? 사실 이덕일의 책에서 보여주는 소현세자의 모습은 야마구치와 김용덕의 연구에서 대부분 제기된 것들이었습니다. 다만 훨씬 극적인 장치를 통해 인조와 소현세자의 대비를 실감나게 보여주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인조가 세자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있을 때, 세자는 이렇듯 왕조가 교체되는 도시 북경에서 ‘하늘이 이끌어준 만남’에 감사하고 있었다”, “수많은 서양 물품을 가지고 귀국하는 소현세자의 머릿속은,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는 이상으로 가득했다”와 같은 구절들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이 30만 부 이상 팔려나가며 대히트를 쳤다는 것입니다.(정말 부럽습니다.) 물론 이것이 소현세자 한 명 때문은 아니었지만 소현세자가 대중의 관심이 되기에는 충분하였습니다. 소현세자가 관심의 영역에 들어오자 많은 역사학자들과 미디어매체들이 달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관련 콘텐츠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점차 소현세자를 둘러싼 이야기는 살이 붙기 시작했고, 어느덧 거대한 서사가 완성되었습니다.
- 소현세자는 외교관 역할을 수행하며 청과 조선을 중재하고, 청의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았다. 소현세자(내외)는 조선인 포로(노예)를 속환(구출)하고, 농장을 성공적으로 경영하며 부를 축적하는 등 경영가적인 능력을 선보였다. 또한 명・청 교체를 눈앞에서 목도하며 현실주의자적 안목을 지니기 시작하였다. 북경에서는 아담 샬과의 만남을 통해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고(혹은 수용하고), 서양문명의 우수성을 인식하였다. 소현세자의 급진성(개방성)은 인조의 시기를 불러왔고, 이로 인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당했다). -
이상이 현재 공유되고 있는 소현세자 서사의 대략이고,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최근 영화 <올빼미>와 드라마 <연인>이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소현세자 서사를 완성시키는 데에 있어 역사학자들 역시 일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역사학자들조차도 대부분 학술논문보다는 교양지, 신문, 방송 등을 통해 소현세자와 관련한 의견을 개진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소현세자 관련 논의가 학술 논문에서 채택되기에 부족함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역사학자들 역시 치밀한 사료 검토 대신 ‘소현세자에 대한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는 길을 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3. 역사 속의 소현세자는 어떠한 모습이었는가?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에서 사료가 이야기하는 소현세자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짧은 글에서 모든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몇 가지 이야기나마 해보고자 합니다.
현재 공유되고 있는 소현세자 서사에 따르면 소현세자가 심양의 포로들을 속환하고 이들을 농장 경영에 동원하여 큰 성과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소현세자가 패전에 대한 대가로 인질 생활을 수행하면서도 전쟁의 참화를 온몸으로 겪고 있는 또 다른 피해자, 즉 조선인 전쟁 포로들을 적극적으로 구출하는 모습은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쓴 인조와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이러한 서사는 <인조실록>이나 <심양일기>, <심양장계>와 같은 사료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는 듯 보입니다. 그럼에도 앞뒤 사정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문제는 ‘밥’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심양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 일행은 수백 명 단위였습니다. 공식적인 인질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또 삼공육경(삼정승과 육조판서)의 자제들로 11명입니다. 하지만 소현세자를 보필하는 시강원 관원을 포함하여 각종 명목의 관료들이 동행하였고, 호위 역할을 하는 군사, 잡일을 도맡아 할 종인, 식사를 책임질 주방장, 조선 본국과 왕래하며 소식을 전하는 군관 등 많은 사람들이 심양 생활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숫자가 수백 명 단위를 이루다보니 식사 문제도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처음 청에서는 상국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통 크게 찬거리를 현물로 모두 제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소현세자 일행의 인질 생활은 기한이 정해져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무작정 계속 식비를 대주기에는 인질 일행의 숫자는 너무 많았고 기한이 흐를수록 부담은 커져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1년 후 청에서는 은을 지급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꿉니다. 돈을 줄 테니 알아서 찬거리를 사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돈은 현물로 주었을 때보다 적은 가치에 해당했고, 조선에서는 항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결국 심양의 인질 일행은 청이 제공하는 은과 본국에서의 지원을 합쳐 식비에 충당합니다. 근데 1641년에 이르면 청에서 또 다시 방침을 바꿉니다. 이제부터 밭을 떼어줄 테니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질 일행은 현재 심양에 있는 인원 중에는 농사를 지어본 사람도 없으며, 그렇다고 농군을 본국에서 불러올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뜻으로 맞섭니다. 결국 1641년 1년은 유야무야 넘어갑니다.
하지만 1642년 청에서는 더 강경하게 자신들의 조치를 밀고 나갑니다. 인질 일행은 똑같은 논리로 거부했지만 청 황제 홍타이지는 이에 대해서도 해법을 제시합니다. “농군을 본국에서 데려오기 어렵다면 포로를 속환해서 쓰고 세자가 훗날 본국으로 돌아갈 때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황제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심양의 인질 일행은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조선인 포로를 속환, 즉 돈을 주고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이상의 포로 속환과 농장 경영 측에서 소현세자를 비롯한 인질 일행의 자발적인 의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조선 측은 어떻게든 농장 경영을 회피하려 들었고, 포로 속환을 통해 일꾼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은 전적으로 홍타이지이의 아이디어였습니다. 홍타이지가 포로 속환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온 것 역시 결코 조선에 우호적인 조치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심양에서 감당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섰던 조선인 포로를 돈으로라도 바꾸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아담 샬과의 만남을 살펴보겠습니다. 소현세자가 주목받게 된 계기는 야마구치가 아담 샬의 회고록을 발굴하면서부터였습니다. 따라서 ‘소현세자 서사’의 시작점은 소현세자와 아담 샬의 교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담 샬의 기록을 그대로 믿으면 되는 것일까요?
아담 샬의 회고에 따르면 두 사람의 만남은 화기애애했습니다. 소현세자는 서양인 선교사들의 천문 역법 제작 기술에 감탄하여 역관을 대동하여 아담 샬을 방문했습니다. 아담 샬 역시 소현세자에게 여러 천주교 서적들과 천구의, 천주상 등을 전달하며 화답했습니다. 이에 소현세자는 아담 샬에게 친필 서한을 보내 기독교 교리를 조선에 전파하겠다는 각오를 밝혔습니다. 또 소현세자는 선교사 내지는 세례받은 환관의 파견까지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두 사람의 만남이 조선 측에 남아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아담 샬의 기록은 자신의 성과를 홍보하여 자신을 후원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레오폴트 1세에게 헌정된 책이라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 샬은 이 회고록을 통해 유럽의 예비 선교사들이 중국 선교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도록 이끌어야 했고, 또한 본국에서의 지속적인 후원이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의심의 시선으로 아담 샬의 기록을 살펴보면 의외로 허점이 많습니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가 천문 역법 전문가, 즉 역관을 대동하고 자신을 방문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는 청에서 아담 샬 등 서양인 선교사들이 제작한 달력인 시헌력을 공식 달력으로 채택하자 조선이 그 달력의 제작 원리를 배우기 위해 역관을 파견했던 역사적 사실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소현세자 일행 중에는 역관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조선이 시헌력의 존재를 눈치 챈 것은 시헌력이 공식 배포된 1645년의 일이었습니다. 소현세자는 1644년 11월 귀국길에 올라 1645년 2월 한양에 도착하기 때문에 시헌력의 존재를 알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조선에서 역관을 파견하여 시헌력 제작 원리를 배우고자 했던 일 역시 1645년 이후일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는 1648년부터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 아담 샬은 1648년 이후에 일어난 일을 1644년 소현세자와의 만남에 끼워 넣은 것입니다. 요새말로 소위 msg를 친겁니다.
소현세자가 친필 서한을 보냈다는 대목도 의심스럽습니다. 소현세자의 친필 서한은 모두 라틴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친필 서한의 원본도, 그리고 한문으로 베낀 사본마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담 샬이 번역해놓은 소현세자의 서한 내을 보면 기독교 교리를 내면화한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아담 샬과 소현세자의 만남은 아무리 길어도 물리적으로 두 달을 넘길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던 소현세자가 기독교 교리를 체화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기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담 샬의 회고록에 기록된 소현세자의 신분 문제도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조선의 왕’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인조가 심양이나 북경을 방문한 적은 없기 때문에 인조와 아담 샬이 만나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이 ‘조선의 왕’을 소현세자로 비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자를 왕으로 표기한 사실 그 자체에 있습니다. 만약 아담 샬이 정말 소현세자를 조선 왕으로 잘못 알았다면, 이는 아담 샬과 소현세자의 교유가 예상보다 깊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소현세자가 자신을 조선 국왕이라고 소개했을 리는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만약 아담 샬이 소현세자의 신분을 알면서도 왕으로 표기했다면, 이는 자신의 회고록이 과장된 기록임을 자인하는 꼴이 됩니다. 어느 쪽이든 회고록의 신뢰도에는 치명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소현세자 독살설 문제를 꺼내보겠습니다. 소현세자 독살설의 요지는 인조가 침의 이형익을 사주하여 소현세자를 독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소현세자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매우 유약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지병을 앓아왔고, 이 때문에 정상적인 업무가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8년 간의 심양 인질 생활 중에 조선에서 어의와 약재를 보낸 것만 3번이었고, 홍타이지는 소현세자를 전쟁에 끌고 다니려했다가 소현세자의 건강 문제 때문에 2번이나 봉림대군을 대신 데려가기도 하였습니다. 소현세자는 1644년의 마지막 귀국길에도 병마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귀국은 1달 이상 지체되기도 하였습니다.
소현세자가 1644년 살인적인 일정을 보냈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현세자는 1643년 12월부터 1644년 3월까지 심양에서 한양을 왕복했습니다. 심양에 도착하고 2주 만에 명과의 전쟁에 동원되어 전쟁터를 전전합니다. 1644년 5월 북경을 점령한 이후 심양으로 돌아왔다가 9월 다시 북경으로 이동했으며 11월 한양을 향해 영구 귀국길에 오릅니다. 전근대 교통수단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일부는 총탄과 화살이 빗발치는 전쟁터였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병약한 소현세자가 육체 건강한 일반인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정을 소화하기에 무리가 있었음은 당연합니다. 1645년 2월 한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소현세자가 위태로웠습니다.
1645년 2월 18일 소현세자가 한양에 도착하자 치료를 위해 어의들이 총동원됩니다. 어의 1번이 치료에 동원되었다가 실패하면 2번이 추가로 동원되고, 이마저도 실패하면 3번이 동원되고, 3번도 실패하면 4번 어의가 출동합니다. 그리고 바로 4번 어의가 이형익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형익이 투입된 이후 소현세자의 증세가 극적으로 호전됩니다. 3월 14일 소현세자는 모든 치료를 중단할 정도로 회복합니다. 하지만 4월 23일 병이 재발하였고, 다시 어의 1, 2, 3번이 차례로 동원됩니다. 이번에는 2번이 이형익이었고, 어의 3명은 돌아가며 자신의 방식으로 소현세자를 치료하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4월 26일 소현세자는 사망하였고, 사망 직전 마지막으로 치료를 담당하였던 인물이 바로 이형익이었습니다.
이형익이 만약 독살의 공범이었다고 한다면 크게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첫째, 4월 23~26일 사이 치료에 동원된 어의는 3명이었습니다. 치료방식은 어의 1번이 실패하면 1번은 물러가고 2번이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1번은 1번 나름대로 계속 치료를 하고 그 위에 2번의 치료를 더하는 것입니다. 즉 어의 1, 2, 3번은 계속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학적 기술을 총동원하여 소현세자를 치료하였습니다. 만약 어떤 어의 한 명이 소현세자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상황을 악화시키려 했다면, 나머지 두 명의 어의가 눈치를 채고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만약 세자가 사망하면 치료에 동원된 어의 모두 처벌의 대상이 될게 뻔했으니까요.
또 한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소현세자는 이미 위중한 상태로 한양에 도착했습니다. 만약 이형익이 소현세자를 독살시키고자 했다면 4월이 아닌 2월이 훨씬 적절한 시점이었습니다. 청나라에서 병을 얻어온 데다가 내로라하는 어의들이 달려들어도 회복시키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형익이 투입되어 치료에 실패하더라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조실록>에 남아있는 독살의 흔적들은 과연 무엇인가? 이와 관련해서 최근 SBS ‘그것이 알고싶다’ 유튜브 채널에서 제작된 <사인의 추억> 소현세자 편이 주목됩니다. 법의학자 유성호는 소현세자의 시신 형상은 독살의 증거라기보다 부패의 결과로 보이며, 소현세자의 증상을 장기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제1형 당뇨병일 확률이 높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물론 현대 의학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술된 의료 기록을 토대로 내린 결론이기 때문에 맹신할 수는 없지만 <인조실록>에 수록된 시신의 형상이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4. 궁극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가?
제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조선의 미래가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조선은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로 250년을 지속하였습니다. 또한 소현세자를 흔히 서양 문물 수용의 상징적인, 혹은 유일한 인물로 기억하지만 소현세자의 존재와 별개로 서양 문물은 지속적으로 조선 사회에 유입되었습니다. 1602년 마테오 리치가 제작하여 명나라 조정에 진상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가 조선에 전달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년에 불과했습니다. 1644년 청나라에서 시헌력을 채택한 이후 조선 조정에서 시헌력 수용의 필요성을 논의한 것은 1645년의 일이었으며, 관상감원을 청나라에 파견한 것은 1648년이었습니다.
천주교 교리를 담은 다양한 서적들이 조선에 유포되어 평생 한 차례도 관직을 역임하지 못하고 안산에 칩거했던 성호 이익에게까지 전달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물론 이익은 천주교를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그의 제자들까지 성호 이익의 뜻을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 한 명의 성직자도 파견되지 않은 조선 땅에서 자발적인 천주교인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근대화에 실패했는가? 이 문제를 따지기 전에 ‘당시 수용되었던 서양 문명이 충분히 근대적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합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시기의 서구 과학이라는 것의 최종 목적은 신의 존재와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서구 과학의 일부 영역, 예컨대 천문학의 성과는 동아시아의 수준보다 높았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이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의 근대 과학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서양인 선교사들이 만든 시헌력에서 가정한 우주의 질서에서 중심은 여전히 지구였습니다. 중세 과학 수준에 머물러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식으로 근대화의 가능성을 따져보는 역설적인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근대화 실패의 책임을 너무 쉽게 조선의 폐쇄성에 돌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우리의 생각만큼 폐쇄적이지 않았고, 소현세자라는 존재와 무관하게 서양 문물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소현세자에게 조선의 미래를 위임하고, 소현세자의 죽음을 조선의 좌절과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은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로도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과거의 인물에게 현재의 열망을 투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하지만 그 열망이 자칫 과도할 경우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는 끊임없는 긴장 상태에 놓여야만 합니다. 이상의 이야기는 현재의 과도한 열망으로 기울어버린 시계추를 조금이나마 17세기 격변기의 ‘인간 소현세자’에게 맞추려 한 시도였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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