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에 대하여(부제: 요양원 방문 진료를 다녀본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주제입니다만 현재 국내 정치에서 논의 중인 사안은 아닌 것 같아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이 언급될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여 일반 글로 씁니다. 관리자님께서 보시기에 정치 글이 맞다고 판단하시면 옮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요양원 촉탁의로 방문 진료를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요양원에 대해서는 제가 잠깐 일하면서 본 것만도 심각한 문제가 여럿이라 언제 따로 글을 쓰려고 했었습니다만, 마침 유게에 안락사 이야기(https://pgr21.com/humor/502947)가 나왔고 자게에서 진지한 논의를 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서 관련된 내용만 조금 언급해 보려고 합니다.
촉탁의로서의 주된 업무는 2주마다 요양원을 방문하여 약물만으로 가능한 정도면 약 처방을 해드리고, 상태가 위중하면 병원에 가서 해당과 전문의 진료를 보시도록 안내해드리는 것입니다. 요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간단한 혈액 검사와 소변 검사 정도라 낙상으로 골절이 의심되는 수준만 돼도 엑스선 촬영을 의해 병원에 가야 합니다. 또한, 요양원에 상주하며 환자 상태를 살필 의료 관련 인력이라고는 간호조무사 1인뿐인 경우가 많아서 기저 질환이 있는 고령자가 상태가 나빠지면 당장의 치료뿐 아니라 상태 관찰을 위해서라도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일이 결코 드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때 병원에 가셔야 한다고 말씀드려도 실제 병원 방문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고, 2주 뒤에 다시 가보면 병원에 다녀오시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당시 방문 진료를 다닌 요양원이 20곳이 넘었지만 그중에 병원을 제대로 모시고 가는 곳은 서너 군데뿐이었습니다. 주된 이유는 "보호자"가 병원 진료를 거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보호자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요양원 직원에게 "이분은 여기서 치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 당장 병원에 가셔야 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요양원 직원들의 대답은 거의 언제나 "이분은 보호자께서 병원에 가지 않고 그냥 여기 계시다 돌아가시기를 원하는 분이니까 최대한 약만 세게 처방해 주시면 좋겠다."였습니다.
일단 본인이 아니라 보호자가 결정한다는 것부터도 문제지만, 여기에는 보호자가 거부하는 경우뿐 아니라 요양원이 거부하는 경우까지 혼재해 있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로 보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그들의 속내를 직접 들을 수는 없으니 제가 나름대로 짐작해본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일차적으로 보호자 측에 병원비가 든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이니 넘어가고 다른 이유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병원 동행 문제입니다. 요양원에 입소할 정도면 혼자 병원 방문이 불가한 상태라 누군가 동행해야 하는데 이게 요양원 직원이 당연히 따라가 주는 게 아닙니다. 요양원에 따라서는 동행해 주기도 하지만 인력 문제로 보호자가 동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곳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도 하루 일정을 비워 방문해야 하는 보호자 입장에서는 요양원에 당신들이 제대로 봐주지 않아서 병원에 가게 된 것 아니냐는 식으로 항의를 하기도 하고, 강하게 요구하면 어쩔 수 없이 요양원 직원이 한 번쯤 모시고 가주기도 합니다. 서울시 등의 지자체 중에는 병원 동행 서비스를 운영하는 곳도 있지만 그런 서비스에도 제약이 있고 그런 걸 일일이 알아봐서 신청하는 것도 요양원이나 보호자 입장에서는 귀찮은 일이 됩니다. 결국 보호자에게 전달이 되더라도 병원에 동행할 사람이 없다며 거부하는 경우가 많이 나오고, 요양원 입장에서도 보호자에게 싫은 소리를 듣게 되거나 잘못하면 자기네가 모시고 가야 하게 되니 애초에 꺼내고 싶지 않은 얘기가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는 요양원 측의 금전적 손실 문제입니다. 요양원은 재원 일수에 따라 입소비와 식비 등을 정산해서 받는데 만약 병원에 갔다가 입원이라도 하면 그동안 요양원에서는 돈을 받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그 자리에 바로 다른 사람을 받을 수도 없겠지요. 게다가 만약 급성기를 넘겨 퇴원하더라도 후유증 때문에 이제 요양원에서 볼 만한 상태가 아니라 요양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하면 아예 퇴소하게 되니 요양원 입장에서는 큰 손해가 납니다. 이처럼 요양원에서는 병원 방문 진료가 필요하다고 하면 일단 거부부터 하고 볼 유인이 있는데 사회 제도가 그걸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나니 안락사에서도 악용을 막는 규제가 도입됐을 때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저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봤던 환자분 중에는 본인이 병원 진료를 원치 않으시는 분도 없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해 본 요양원 환경에서는 병원 방문 진료 하나만 해도 늙어서 힘없고 경제력도 없는 환자 본인의 의사는 별로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요양원 직원들도 마치 환자 본인의 생각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보호자"가 거부하신다고 보호자 입장만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안락사가 도입됐을 때 그 대상이 될 사람들과 현재 요양원 입소자 사이에는 겹치는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본인의 의사에 따라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게 도입한다는 건 아직 너무 이른 것만 같습니다.
너무 심한 고통을 겪는 말기 질환 환자의 경우 지금도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마약류 진통제를 강하게 써서 증상을 조절해 드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호스피스 병동에도 짧게 파견나가 봤었는데 이 당시에 환자분들이 평화롭게 임종을 맞이하시는 것을 보면서 저 자신이나 제 가족이 임종기 환자가 되면 병원이나 집에서 호스피스 치료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바 있습니다. 호스피스에서는 통증 조절만이 목적이기 때문에 중독이나 부작용 위험 같은 것은 무시하고 고용량으로 진통제를 사용합니다. 그 와중에도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할 정도의 끔찍한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를 적어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심한 고통을 줄여주는 게 목적이라면 안락사 도입보다는 호스피스 이용을 늘리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루 종일 약에 취한 상태로 보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설사, 변비, 가려움증 같은 성가신 증상들에 시달리며 주변 사람들까지 고생만 시키며 사는 것은 존엄하지 않다고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는 일반적인 진료 상황에서도 환자 본인의 자율성보다 보호자의 입김이 강한 경우를 자주 접하는 마당이라 안락사를 도입하려면 좀 더 개인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 잡는 것이 선결 조건이 아닐까 싶은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대개 그렇듯 이 문제도 매우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제가 겪어 본 사례도 전체에서는 일부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여러분들과 서로의 시각을 비교하고 유의미한 토론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양원 촉탁의로 방문 진료를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요양원에 대해서는 제가 잠깐 일하면서 본 것만도 심각한 문제가 여럿이라 언제 따로 글을 쓰려고 했었습니다만, 마침 유게에 안락사 이야기(https://pgr21.com/humor/502947)가 나왔고 자게에서 진지한 논의를 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서 관련된 내용만 조금 언급해 보려고 합니다.
촉탁의로서의 주된 업무는 2주마다 요양원을 방문하여 약물만으로 가능한 정도면 약 처방을 해드리고, 상태가 위중하면 병원에 가서 해당과 전문의 진료를 보시도록 안내해드리는 것입니다. 요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간단한 혈액 검사와 소변 검사 정도라 낙상으로 골절이 의심되는 수준만 돼도 엑스선 촬영을 의해 병원에 가야 합니다. 또한, 요양원에 상주하며 환자 상태를 살필 의료 관련 인력이라고는 간호조무사 1인뿐인 경우가 많아서 기저 질환이 있는 고령자가 상태가 나빠지면 당장의 치료뿐 아니라 상태 관찰을 위해서라도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일이 결코 드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때 병원에 가셔야 한다고 말씀드려도 실제 병원 방문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고, 2주 뒤에 다시 가보면 병원에 다녀오시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당시 방문 진료를 다닌 요양원이 20곳이 넘었지만 그중에 병원을 제대로 모시고 가는 곳은 서너 군데뿐이었습니다. 주된 이유는 "보호자"가 병원 진료를 거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보호자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요양원 직원에게 "이분은 여기서 치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 당장 병원에 가셔야 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요양원 직원들의 대답은 거의 언제나 "이분은 보호자께서 병원에 가지 않고 그냥 여기 계시다 돌아가시기를 원하는 분이니까 최대한 약만 세게 처방해 주시면 좋겠다."였습니다.
일단 본인이 아니라 보호자가 결정한다는 것부터도 문제지만, 여기에는 보호자가 거부하는 경우뿐 아니라 요양원이 거부하는 경우까지 혼재해 있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로 보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그들의 속내를 직접 들을 수는 없으니 제가 나름대로 짐작해본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일차적으로 보호자 측에 병원비가 든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이니 넘어가고 다른 이유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병원 동행 문제입니다. 요양원에 입소할 정도면 혼자 병원 방문이 불가한 상태라 누군가 동행해야 하는데 이게 요양원 직원이 당연히 따라가 주는 게 아닙니다. 요양원에 따라서는 동행해 주기도 하지만 인력 문제로 보호자가 동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곳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도 하루 일정을 비워 방문해야 하는 보호자 입장에서는 요양원에 당신들이 제대로 봐주지 않아서 병원에 가게 된 것 아니냐는 식으로 항의를 하기도 하고, 강하게 요구하면 어쩔 수 없이 요양원 직원이 한 번쯤 모시고 가주기도 합니다. 서울시 등의 지자체 중에는 병원 동행 서비스를 운영하는 곳도 있지만 그런 서비스에도 제약이 있고 그런 걸 일일이 알아봐서 신청하는 것도 요양원이나 보호자 입장에서는 귀찮은 일이 됩니다. 결국 보호자에게 전달이 되더라도 병원에 동행할 사람이 없다며 거부하는 경우가 많이 나오고, 요양원 입장에서도 보호자에게 싫은 소리를 듣게 되거나 잘못하면 자기네가 모시고 가야 하게 되니 애초에 꺼내고 싶지 않은 얘기가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는 요양원 측의 금전적 손실 문제입니다. 요양원은 재원 일수에 따라 입소비와 식비 등을 정산해서 받는데 만약 병원에 갔다가 입원이라도 하면 그동안 요양원에서는 돈을 받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그 자리에 바로 다른 사람을 받을 수도 없겠지요. 게다가 만약 급성기를 넘겨 퇴원하더라도 후유증 때문에 이제 요양원에서 볼 만한 상태가 아니라 요양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하면 아예 퇴소하게 되니 요양원 입장에서는 큰 손해가 납니다. 이처럼 요양원에서는 병원 방문 진료가 필요하다고 하면 일단 거부부터 하고 볼 유인이 있는데 사회 제도가 그걸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고 나니 안락사에서도 악용을 막는 규제가 도입됐을 때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저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봤던 환자분 중에는 본인이 병원 진료를 원치 않으시는 분도 없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해 본 요양원 환경에서는 병원 방문 진료 하나만 해도 늙어서 힘없고 경제력도 없는 환자 본인의 의사는 별로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요양원 직원들도 마치 환자 본인의 생각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보호자"가 거부하신다고 보호자 입장만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안락사가 도입됐을 때 그 대상이 될 사람들과 현재 요양원 입소자 사이에는 겹치는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본인의 의사에 따라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게 도입한다는 건 아직 너무 이른 것만 같습니다.
너무 심한 고통을 겪는 말기 질환 환자의 경우 지금도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마약류 진통제를 강하게 써서 증상을 조절해 드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호스피스 병동에도 짧게 파견나가 봤었는데 이 당시에 환자분들이 평화롭게 임종을 맞이하시는 것을 보면서 저 자신이나 제 가족이 임종기 환자가 되면 병원이나 집에서 호스피스 치료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바 있습니다. 호스피스에서는 통증 조절만이 목적이기 때문에 중독이나 부작용 위험 같은 것은 무시하고 고용량으로 진통제를 사용합니다. 그 와중에도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할 정도의 끔찍한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를 적어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심한 고통을 줄여주는 게 목적이라면 안락사 도입보다는 호스피스 이용을 늘리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루 종일 약에 취한 상태로 보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설사, 변비, 가려움증 같은 성가신 증상들에 시달리며 주변 사람들까지 고생만 시키며 사는 것은 존엄하지 않다고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는 일반적인 진료 상황에서도 환자 본인의 자율성보다 보호자의 입김이 강한 경우를 자주 접하는 마당이라 안락사를 도입하려면 좀 더 개인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 잡는 것이 선결 조건이 아닐까 싶은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대개 그렇듯 이 문제도 매우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제가 겪어 본 사례도 전체에서는 일부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여러분들과 서로의 시각을 비교하고 유의미한 토론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79 비추천 57
- 이전글 [연예] "대변 금지 카페인가?" 화장실에서 똥쌌다고 남친 앞에서 욕먹은 여성, 논란되자 사장님 등장해 직접 해명
- 다음글 [정치] 여야 '청문회' 여진…"악의적 탄핵 간보기" "尹, 수사외압 몸통"(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