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없는 자본주의, 우리는 무형의 경제로 나아갈 수 있을까
0. 서론
우리나라 사람에게 경제란 곧 제조업이라는 마인드가 뿌리깊게 박혀있습니다. 이는 물론 우리나라를 현재의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까지 데려다 주었으나, 이러한 제조업 기반 마인드가 우리 경제가 이 이상 도약하는 것을 막는 족쇄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에 서비스업 관련 글도 썼었죠(https://pgr21.com/freedom/101217).
와중에 찾은 책이 ["자본 없는 자본주의"]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현대 경제의 패러다임이 유형자산 투자에서 무형자산 투자로 변화되었고, 이 두 경제체제의 특징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새로운 경제 환경에서 성공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유형자산 투자식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법, 사고방식으로 행동해야겠지요. 제가 고민하던, 신경제로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가져와봤습니다.
1. 유형자산과 무형자산이 뭔데?
유무형 자산을 짚기 전에 간단히 자본에 대한 정의부터 하고 가겠습니다.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책에서의 자본(투자)의 정의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추후 경제적 이익을 생산해낼 수 있는 자산"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생산"을 위한 것이므로, 단순히 시세차익이나 이자 받는 금융자산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유형자산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산입니다. 토지, 건물 등 부동산, 기계설비, 운반용 트럭, 장비 등 눈에 보이는 자산이지요. 전통적으로 투자는 이러한 유형자산과 연관이 많습니다. 공장을 세우려고 한다면 우선 땅을 사고, 그 위에 건물을 지어야하고, 공장 설비도 구입해서 라인을 깔아야 합니다. 자재 운반을 위한 트럭도 필요할 것이고, 원자재와 그걸 보관할 창고도 필요하겠군요. 이 모든 것이 유형자산입니다. 눈에 보이고, 측정하기도 비교적 쉽습니다.
반면 무형자산이란 말 그대로 "무형",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자산을 말합니다. 브랜드, 상표권, R&D, 특허, 레시피, 공급망 관리 능력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추상적이지만, 명백하게 제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하는데 기여하는 것들입니다.
대충 눈치 채셨겠지만, 경제가 발전될수록 전자보다는 후자의 중요성이 훨씬 커집니다.
2. 무형자산 투자의 특징
저자는 유형자산과는 다른 무형자산 투자의 특징을 4S라고 요약합니다. 이는 확장성(Scalable), 매몰(Sunk), 스필오버(Spillover), 시너지(Synergy)를 말합니다.
[확장성]은 말 그대로 (유형자산 대비) 확장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유형자산 위주 경제에서 생산을 늘리기 위해선 다시 막대하게 유형자산에 투자해야합니다. 삼성 반도체 공장을 예로 들어봅시다. 기존 DRAM 공장 캐파가 풀인 상태에서 주문이 더 들어오면? 생산을 늘리기 위해선 공장을 새로 지어야 합니다. 공장을 지을 토지를 물색하고, 물리적으로 건물을 지어야하며, 생산설비도 사와야하고 노동자도 추가로 고용해야합니다. 당연히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들어서 마음대로 늘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전통 제조업의 경우는 한 기업이 독점하기보단 여러 회사가 캐파 싸움을 벌이기 쉽습니다. 물리적으로 시장을 다 먹을 만큼 투자하기는 힘드니까요.
반면 무형자산은 한 번 확립되면 확대하기가 훨씬 편합니다. 맥도날드, 스타벅스는 전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브랜드는 이미 각인 됐고, 표준화된 제품의 레시피, 직원 교육 매뉴얼 등은 한 번 확립되면 얼마든지 타 점포 등으로 복붙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도 시간은 좀 걸리지만, 새로 공장을 짓는 것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적은 비용, 시간으로 확장할 수 있죠. 더 쉬운 예시는 IT산업이고요. 개발 하나만 잘 해놓으면 전세계로 서비스할 수도 있습니다.
[매몰]은 말그대로 무형자산 투자는 매몰비용이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유형자산은 이 사업이 아니더라도 매각하기 쉽습니다. 부동산, 공장설비는 그냥 재판매 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무형자산 투자는 "너무 그 회사에 딱 맞아서" 재판매는커녕 타 회사에 적용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책에서는 예시로는 도요타의 린 시스템(JIT라 부르는 그거) 듭니다. 도요타는 효율적인 공급망 관리를 위해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이걸 따로 떼서 팔 수는 없습니다. 도요타에게 딱 맞는 시스템이니까요. 그래서 무형자산 투자는 정말 중요하지만 신중해지기 쉽습니다. 부동산이나 공장설비는 담보로 대출도 나오고 나중에 처분도 가능한데 이런 무형자산 투자는? 잘못하면 그대로 손실이거든요.
[스필오버]는 파급효과 정도로 보시면 될듯합니다. 이는 한 회사가 독점하기 힘들고 남들이 "베끼기 쉽다"는 특징입니다.
예를들어 공장부지와 설비는 남들이 마음대로 침해하지 못합니다. 벽과 문을 통해 출입을 통제할 수 있고, 생산설비를 도둑질하려는 사람은 경찰에 잡혀가니까요.
반면 무형자산은 쉽지 않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서 특허권을 얻었다? 근데 누군가가 그걸 살짝 개량해서 우회했을 때 법정으로 가면 정말 결론나는데 하세월이 걸릴 뿐 아니라 무조건 지켜지지도 않습니다.
애플이 자기들만의 아이디어, 브랜딩으로 아이폰을 내놓았지만 그 후 삼성, HTC 등 후발주자가 얼마든지 비슷한 스마트폰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완전 똑같진 않지만 디자인도 점점 아이폰을 참고해 수렴해 가고요. 이걸 독점적으로 완벽하게 개발사가 누릴 수는 없습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파급되지요.
마지막으로 [시너지]는 말 그대로 시너지입니다. 무형자산 투자 간에는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걸 낳기 쉽다는 말입니다. 저자는 예시로 전자레인지로 듭니다. 전자파로 물질을 데우는 기술은 군사기술로 개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술을 가전회사가 가져가 가전 제조 기술, 설계, 마케팅과 결합하여 "전자레인지"라는 새로운 제품이 탄생했습니다. 단순히 기술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를 다른 무형자산, 즉 가전제조 노하우, 디자인, 브랜딩 같은 다른 요소와 결합을 해서야 비로소 새로운 게 탄생한 겁니다. 무조건 기술이 다가 아니란 말이죠.
3. 무형자산 투자 경제의 특징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무형자산 위주의 경제는 유형자산 위주의 경제와는 문법 자체가 다릅니다. 아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적응하고 성공할 수 있죠.
전통적인 유형자산 경제는 전술했듯 캐파, 품질 싸움입니다. 누가 더 많은 설비를 가지고 값싸게 생산해내는가의 싸움이죠. 유형자산을 바탕으로 자본을 조달하고, 최대한 단가를 쥐어짜고, 품질 좋은 물건을 싸게 생산해내는 게 핵심입니다.
반면 무형자산 경제는 "아이디어", "결합"의 싸움입니다. 특징 중 "스필오버", "시너지" 쪽이죠. 테슬라가 미친듯이 팔렸던 건 가격이 싸고 품질이 좋아서였을까요? 전혀요. 가격은 비쌌고, 충전은 귀찮았으며, 단차나 마감은 진짜 허접한 수준이었습니다. 승차감 등도 기존 자동차 업체를 따라가지 못했고요.
그럼에도 성공한 건 테슬라는 "브랜딩"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섹시한 슈퍼카라는 이미지, 전기차라는 혁신의 상징이 되었고, FSD로 기술력이 최고라는 것을 과시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기존 제조업의 성공 문법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럼에도 여러 요소, 즉 브랜드, 마케팅, 기술력 등이 결합되어 압도적인 판매량을 낳은 것이죠.
애플의 강점 역시 제조능력이 아닙니다. 제조는 아예 다 외주주죠. 중요한 건 "디자인 능력", "개발능력", "공급망 관리 능력", "브랜딩" 등입니다. 아이폰이 조립 품질이 좋아서 사는 사람이 있나요? 그 안의 생태계, 디자인, 철학을 보고 사는 거죠.
이렇듯 물건을 단순히 싸게 잘 만드는 기존의 방정식만으로는 무형자산 경제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여러 무형자산을 "결합해서" 제품 및 서비스로 내놓는 능력이 중요한 것이죠. [이런 능력은 제조에 부가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무형자산 투자야말로 핵심 역량인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스필오버와 시너지의 영향이 막대합니다. 성공하는 기업은 그 자체로 무형자산에 많이 투자하여 생산해내고, 또 다른 회사에서 나오는 무형자산을 잘 빨아들여 결합하는 능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안드로이드는 왜 오픈소스일까요? 왜 구글은 AI관련 논문을 다 공개할까요? 테슬라는 왜 전기차 관련 특허를 다 풀었을까요? 애초에 [그들의 핵심 능력이 "판 전체에서 기술을 끌어오고, 가진 것과 결합해서 새로운 것을 내놓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판을 키우는 게 이득이죠. 어차피 다른 놈들보다 내가 더 그 큰 판을 잘 이용해먹을 수 있으니까.
4. 우리 경제의 시사점
서두에서 언급했듯 우리는 여전히 제조업 위주의 마인드가 뿌리깊게 박혀있습니다. 우리 경제가 앞으로 나아갈 미래를 생각했을 때 이미지는 "삼성 반도체 공장", "배터리 공장" 등이죠. 무언가를 많이 생산해내서 파는 이미지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형자산에 대한 이미지도 사실 제조와 관련된 R&D 정도에서 그칩니다. 어쨌든 모든 게 "잘 생산해내기 위한" 사고방식인거죠.
우리 경제가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거기서 더 나아가야합니다. 단순 기술력을 넘어선 총체적인 이미지를 결정짓는 브랜딩, 하드웨어 스펙만 높이는 게 아니라 매력적인 UI, UX 구축, 직접 제조에서 벗어나 전세계를 누비는 공급망 관리 능력 등. 무수히 많습니다. 이런 쪽에서 성공해야 우리 경제가 앞으로 더 도약할 수 있습니다.
이러면 단순 제조 치중보다 더 낫습니다. 제조는 필연적으로 엄청난 양의 투자와 감가상각의 숙명에서 헤어나기 힘들거든요. 근데 이러한 무형의 이점을 가진다면? 코카콜라는 레시피만 잘 만들면 구형 설비에서도 얼마든지 비싼 음료를 제조해내고, 프랑스의 명품은 대규모 최첨단 설비따위 없어도 값비싼 가방을 팔아먹습니다. 부가가치면에서도 크지만, 애초에 투자 대비 이익률 자체가 압도적입니다. 우리가 쎼빠지게 공장 돌리고, 환율 변동성 맞아가며 원자재 수급 신경쓰고, 제조해서 팔아먹어서 몇 푼 남기는 것보다, 기술 개발해서 로열티 "딸깍" 하는 게 훨씬 더 안정적으로 돈 많이 버는 선진경제 아니겠습니까?
스웨덴의 한 경제학자는 "유럽은 제조업 페티시에 빠져서 혁신하지 못했다"라고 했습니다. 제조업에"만" 너무 집착한 결과 미국처럼 IT산업이 크지 못해서 정체하고, 미국에 밀렸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의 사고방식도 미국보단 유럽의 그것과 닮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유럽의 전철을 밟지 않고 더 성장하는 구조로 들어섰으면 좋겠습니다.
제조업을 버리자는 게 아닙니다. IT산업"만" 키우자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무형자산 투자에 초점을 맞춰서 경제구조를 짜나가야 한단 것입니다. 전술했든 제조업 또한 무형자산 투자로 얼마든지 도약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의 제조능력과 성공적인 무형자산 투자가 결합한다면 얼마든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5. 마무리
사실 제 관심사가 관심사라 경제 구조에 초점을 맞춰 썼습니다만, 책은 무형자산 관련 전반적인 내용을 조명합니다. 무형자산 측정의 어려움, 무형자산 경제로의 이행의 부작용(승자 독식과 양극화 등), 스필오버로 기술 독점이 어려우니 기업들이 무형자산 투자를 꺼리는 현상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무형자산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금융 제도(전술했듯 담보가 없으니 전통 금융업으론 자금조달이 쉽지 않음) 등.
관심 있으시면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뭔가 팍팍 정리되고 논리적으로 연결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중구난방이 된 것 같아 좀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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