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아웅산 테러 후 남북 …
"부자세습 공산권에서도 비웃음거리" 직격에 北 반발하며 난장판
81~87년 수재물자·이산가족 등 인도·체육분야 남북회담문서 공개
1985년 평양에서 여동생 상봉하는 지학순 주교
[통일부 제공. 남북회담사료집 제11권 갈무리]
(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기자 = 버마 아웅산 테러 후 처음 남북이 마주 앉은 회담장의 험악한 분위기와 분단 후 첫 이산가족 고향 방문을 성사하기 위한 끈질긴 협상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남북회담 사료가 공개됐다.
통일부는 1981년 1월부터 1987년 5월까지 인도주의 협력과 체육분야 남북회담문서 1천693쪽을 2일 일반에 공개했다.
2022~2023년 총 네 차례에 이어 이번이 다섯번째 남북회담문서 공개다.
공개 문서에는 ▲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발표(1982.1) ▲ 전두환 대통령 암살을 기도한 버마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1983.10) 및 북한의 3자회담 제의(1984.1) ▲ 남북한 체육회담(1984.4~5) ▲ 남북한 수재물자 인도·인수(1984.9~10) ▲ 제8~10차 남북적십자회담(1985.5∼12) ▲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1985.9) 진행 과정과 회의록이 포함됐다.
◇ "테러 사과 먼저" 南 요구에 "자작극" 적반하장 北
북측은 1980년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대표 접촉이 성과 없이 끝난 후 남측의 대화 제의를 줄곧 거부하다가 1983년 아웅산 폭탄 테러 3개월 후 북·미와 한국이 참여하는 3자 회담을 들고나왔고, 이듬해 두 달밖에 남지 않은 LA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논의하자고 돌연 제의했다.
1984년 4월 어렵게 복원된 회담에서 의제 논의는 뒷전에 밀린 채 아웅산 폭발 테러와 영화인 신상옥·최은희 납치사건을 두고 고성과 욕설이 오갔다.
남측 대표는 첫 발언에서부터 먼저 아웅산 테러에 대해 시인·사과하라고 북측에 요구했다.
그러나 북측은 아웅산 테러가 남측의 "자작극에 불과하다"고 적반하장으로 맞섰다.
북측은 제1·3차 체육회담에 앞서 남측이 판문점 일대에 "삐라"(대북 전단)를 뿌리는 "도발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며 남측을 비난하기도 했다.
북측 대표는 "이게 뭐야, 이게! 이거 보라!"라고 외치며, 챙겨온 전단을 남측 대표를 향해 냅다 던졌고, 남측 대표는 지지 않고 "누구한테 무례한 짓을 하고 있어!"라며 전단을 되던졌다.
남측 대표는 더 나아가 "귀측의 부자세습왕조 구축과 우상화는 자유세계는 물론 심지어 공산권 내부에서까지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고 직격했다. 남북회담장에서 남측 대표가 세습을 대놓고 비판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에 북한은 대표단뿐 아니라 취재진까지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성과 욕설을 쏟아내며 회담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회담문서에는 "심지어 북한측 대표들은 우리측 대표가 발언하는 도중에 우리측 대표에게 성냥갑을 던졌"다며 "북한기자들까지 합세해 기물로 책상을 계속 두드리고 우리측 대표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기록됐다.
세 차례 회담 내내 팽팽한 대치만 이어진 남북 체육회담은 북한이 다른 공산권국가의 LA올림픽 보이콧 결정에 합류하면서 아무런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 "북, 수재물자 지원 제의…남, 거부하려다가 뒤집어"
1984년 9월 8일 북한적십자는 남한 수재민에게 물자 지원을 제의하고 나섰다. 국내외 예상과 달리 엿새 만에 한적은 수락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국제적십자연맹의 구호물자 지원 제의도 이미 사양한 데다 북한의 의도가 불분명해 수용하지 않을 것으로 국내외에서 예상됐다.
1985년 인천항에 도착한 북한의 남한 수재민 지원 물자
[통일부 제공. 남북회담사료집 제10권 갈무리]
남북회담사료에는 정부는 처음에는 북한의 제의를 거절하기로 잠정 결정했다가 며칠 만에 이를 뒤집었다는 내용이 실렸다.
상세한 수락 경위를 기록한 대목이 부분 비공개 처리됐으나 일부 공개된 내용을 보면 북한적십자사의 제의 이튿날 남북대화사무국에서 청와대, 총리실, 국가안전기획부, 외무부, 보건사회부, 문화공보부, 국토통일원, 대한적십자사 등 관계부처 실무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 결과 한적 대변인 논평 형식으로 북측 제의를 거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정부 내에서 포용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북측 제의에 대처하자는 의견이 대두해 국무총리 주재 관계장관회의(9월 11일), 관계장관과 민주정의당 3역 협의(9월 12일)를 거쳐 북한 수재물자 수용 방안이 논의됐다. 이를 보고받은 전두환 대통령이 "북측 제의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도록 하라"고 지시하면서 한적 총재가 수락 성명을 발표했다고 남북회담문서에 기재됐다.
수재물자 수용 결정은 끊어졌던 남북 직통전화 재가동으로 이어졌다.
앞서 북한이 1980년 8월 말 회의를 끝으로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대표접촉을 일방적으로 중단하면서 그해 9월 남북 직통전화도 끊겼다.
남북은 수재물자 인도·인수를 준비·시행하기 위해 직통전화를 복원하기로 하고 1984년 9월 28일 다시 연결했다.
4년만에 연결된 남북 직통전화는 2008년 8월까지 단절 없이 가동됐다.
◇ 북, 이산가족은 뒷전…"축제 분위기" 강조
수재물자 인도·인수를 계기로 적십자 본회담 재개가 급물살을 탔다.
12년만에 재개된 적십자 본회담의 의제를 두고 한적은 남북의 시급한 인도주의 현안인 이산가족 재회에 초점을 둔 반면에 북한은 "축제" 분위기를 강조하면서 예술단의 방문을 우선했다.
1984년 11월 남북접십자 예비접촉에서 북측 대표는 "제8·9차 적십자 본회의를 축제의 분위기에서 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며 예술단 상호 교환 공연을 제의했다.
이에 대해 남측 대표는 "축제라 해놓으면 우리가 임무에서 벗어난 듯하고, 특히 이산가족들이 그걸 들으면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여길 것). 그러한 것은 좀 순차를 뒤로 돌리는 것이 도리 아닌가"라며 반대했다.
결국 양측은 예술공연단과 고향방문단을 동시에 추진하기로 타협하면서 역사적인 첫 이산가족 상봉 합의가 도출됐다.
양측의 다른 시각은 합의문 제목에서도 확인된다.
남북은 서로 다른 합의문을 작성했는데 남측은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에 관한 합의서"로, 북측은 "적십자 예술단 및 고향방문단 교환과 관련한 합의서"로 제목을 달았다.
북측은 또 축제 분위기를 강조하며 예술단과 이산가족의 수를 각각 300명과 100명으로 구성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남측은 고향방문단이 예술공연단보다 많아야 하는 게 상식이라며 300명 동수로 하자고 제안했다.
몇 차례 회의를 거치면서 이산가족과 예술공연단을 각각 50명으로 구성하기로 타협했다. 애초 북한이 제시한 100명에도 못 미치는 규모다. 그나마 실제로 상봉이 이뤄진 경우는 남북을 합쳐 61명에 그쳤다.
9·10차 적십자 회담에서 남측은 2차 상봉 합의를 시도했으나 북한의 무관심으로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다음 이산가족 상봉은 무려 15년이 걸려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 성사됐다.
이는 북한이 남북 회담으로 복귀한 의도가 교류 확대나 인도주의 협력 등 의제 자체보다는 대외 선전과 고립 모면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김웅희 전 남북회담본부장은 취채진과 만나 "북한은 1980년대 초 남측의 대화 제의를 줄곧 무시해왔지만 아웅산 테러 이후로 테러국 취급을 받으며 고립될 위기에 빠졌고 한국은 반대로 올림픽을 유치하며 위상이 높아지는 상황이었다"며 "북미 회담에 남한이 참여하는 3자 회담, 체육회담, 수재물자 제공 등을 제의하며 수세 국면을 전환하려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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