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경제의 동반론
문화와 경제의 동반론
일반론이다. 나는 이렇게 본다. 문화와 경제는 함께 가야 한다. 이미 문화는 풍부히 축적했다면, 경제력을 키우도록 애를 써야 한다. 이미 돈은 풍부히 축적했다면, 문화를 키우도록 애를 써야 한다. — 뉴욕은 금융과 무역으로 큰 돈을 벌었고, 그걸 다시 문화에 투자했다. — 그 문화의 힘으로 다시 경제력이 상승하고, 그 경제의 힘으로 다시 문화력이 상승한다.
경제력을 가진자와 문화력을 가진자가 융합하는 것도. 함께 가는 거라 할 수 있다. 한쪽은 경제력을, 다른 한쪽은 문화력을 가진 남녀가, 가정을 이루는 것도 융합이고 — 군사 민족인 로마가 정복을 통해 경제력을 키우고, 그리스 문화를 흡수하는 것도 융합이라 할 수 있으며 — 조선의 사례처럼 아버지가 경제력을 키우고, 아들이 문화력을 키우는 것도 융합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의 삶을 생각해보자. 하나의 인간을 놓고 볼 때에도 마찬가지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 경제력의 발전과 문화력의 발전, 두 가지 흐름이 진행되는 거라 해석할 수 있다. — 어느 사람이 사법고시에 합격하기 위해 시험공부에 매진했다면, 그것은 경제력을 키우는 행위였다 할 수 있다. 고전을 읽고, 애인과 예술 전시회를 다닌다면, 그것은 문화력을 키우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다시 개인의 삶을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은 부모로부터 경제력을 물려받고, 어떤 사람은 부모로부터 문화력을 물려받는다. — 어떤 사람은 경제력과 문화력을 모두 물려받고, 어떤 사람은 어떤 것도 물려받지 못하며 — 어떤 사람은 빚을 물려받고, 어떤 사람은 병든 문화를 물려받고, 어떤 사람은 천박한 문화를 물려받는다.
개인은 어찌 살 것인가? — 인생의 길이란 어느 하나만이 답이라 할 수 없다. 그 유력한 답 중 하나는 극복의 역사를 쓰는 것이다. 열악한 조건이더라도, 경제력과 문화력을 향상시키고자 해야 한다. 두 가지 과제를 모두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 이미 하나를 갖고 있다면, 다른 하나에 주목해야 한다. 둘다 없다면, 그중에 먼저 키울 것을 주목해야 한다. 둘다 키우면 되는 것이지, 왜 하나에 주된 집중을 해야 하는가 하면 — 둘 중 하나는 키우기가 어려운, 환경과 조건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장기적으로 볼 때, 어느 하나에 먼저 집중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축구선수를 보자. 기본기에 먼저 집중을 하고, 체력과 근력은 나중으로 하는게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체력을 키우고 웨이트를 하는 것은 나중에라도 꽤 단시간에 가능하지만, 기본기는 어려서부터 집중해서 키워야 하고, 나중에는 키우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결국은 기본기와 체력 ・ 근력이 함께 해야 한다. 그래야 전성기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그 전성기에 도달하기 위해 순서가 필요할 수 있다. — 기본기에 집중한다고, 체력과 근력을 전혀 안 키우는 건 아니다. 체력과 근력에 최적화를 안 하고, 기본기에 훈련을 최적화하는 것뿐이다. 경제력에 집중하면서도 기회가 되면 문화적으로 도움받는 것들을 흡수할 수 있다.
경제력과 문화력은 동반되어야 한다. 그것은 짧은 기간에 마치 자전거에서 왼쪽 오른쪽, 핸들을 교대로 조절하는 것처럼 그렇게 진동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꽤 긴 기간 동안 하나에 집중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경제력과 문화력이 동반되지 않는,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보자. 경제력은 없이 오직 문화력만 추구할 때, 생계가 문제된다. 문화에 있어서 많은 경우 물질의 도움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그림을 그리려면, 물감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음악을 하려면, 악기는 있어야 한다. 문화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곤란하고, 많은 유가 필요하며, 그중 일종은 재료나 도구가 되는 것들이고, 다른 일종은 영감을 주는 것들이다. — 그것들은 경제력이 있어야 되는 것일 수 있다.
이제 반대편 극단을 생각해보자. 문화력은 없이 오직 경제력만 추구할 때, 그는 타락한 삶을 살 가능성이 크다. — 그가 과연 자존감을 무엇으로 채울지 문제되고, 그는 결국 아무것도 없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 그의 곁은 돈만 바라는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의 눈은 돈에 있어서 경쟁자들로 채워질 것이다. 자녀는 자신을 돈으로만 보고, 친구는 이용가치를 가늠하며 속으로 딴 생각을 품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죽어서는 돈을 갖고 가지 못한다. 죽어서 돈을 갖고 갈 가능성은 0%이고, 죽어서 정신을 갖고 갈 가능성은 0%가 아니다. 사후세계가 있다면, 그곳에서 그는 더이상 부자가 아님이 명백하다. — 다른 사람들은 문화력을 갖췄고, 그는 경제력도 문화력도 없이 사후세계를 살아야 한다. — 죽기 이전에도 그는 다른 부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결국 오랜 부자들은 문화도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에 투자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졸부라고 생각하고, 겉으로는 웃을지라도 속으로는 멸시할 것이다. 그 멸시를 통해서 나는 졸부가 아니고 문화력을 갖췄다는, 분별에 의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 다른 부자들이 인정을 해주지 않으면, 평범한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인정해주는가 하면 —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 인정이라 한다면, 나처럼 하면 너희들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성공학 강의팔이나 유치찬란한 힙합감성같은, 그런 것에 의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 그것이 그의 정신승리를 도울 수는 있겠지만,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이는 공허하게 느껴질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도 평범한 사람들도 가난한 사람들도 인정해주지 않고, 가족마저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는 자신을 인정해줄 수 있는가가 문제되고 — 인정이 잘 되지 않으니, 외로움이 몰려올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를 인정하고 있다면, 외로움은 밀려오지 않는다. 설령 밀려와도 방파제가 있어, 자아의 침식을 막아줄 것이다.
결국 경제력과 문화력이 모두 필요하다. — 뭐 거창한 재산가가 아니더라도, 뭐 거창한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 개인은 자신의 경제력과 문화력을 가늠하고, 궁극적으로는 그 둘다 발전시키고자 해야 한다. — 상황인식과 목적의식을 갖고 있다면, 발전할 기회는 많을 것이다.
인생은 다양한 길이 가능하다. 오직 하나의 길만이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길이 평등한 건 아니다. 한편으로는 수평적 다양성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좋고 나쁨이 있다. 위에 이야기한 것은 그중 높은 길 하나를 이야기한 것이다. 이러한 길을 전제로 한다면, 워라밸은 다음과 같이 봐야 적절할 것이다.
working을 경제력으로 해석한다고 해보자. life는 문화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문화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그건 라이프가 아니다. 경제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그건 워킹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 life는 문화력이 아니라, 휴식을 의미하는 거라 주장하는 수가 있다. 그러면 워라밸을 통째로 부정해야 한다. 라이프가 그저 휴식이라면 워라밸은 사실상 — 워워밸이다. 오늘의 워킹과 내일의 워킹을, 휴식을 통해 균형잡는 것일 뿐이다. — 라이프는 문화력을 뜻하는 것이다. 문화력을 뜻하는게 아니라면, 워라밸을 통째로 부정해야 한다. 그 대신 다음과 같은 것으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Money-Culture Balance
다시 한 개인을 놓고, 경제력과 문화력을 다음과 같이 매칭할 수도 있다. 실력은 경제력을 가리킨다. 인격은 문화력을 가리킨다. 사회의 문화는 개인의 인격에 대응하는 것이고, 경제력에 있어 내적인 것은 개인의 실력에 있는 것이다.
경제와 문화는 함께 가야 한다.
실력과 인격은 동반되어야 한다.
일반론이다. 나는 이렇게 본다. 문화와 경제는 함께 가야 한다. 이미 문화는 풍부히 축적했다면, 경제력을 키우도록 애를 써야 한다. 이미 돈은 풍부히 축적했다면, 문화를 키우도록 애를 써야 한다. — 뉴욕은 금융과 무역으로 큰 돈을 벌었고, 그걸 다시 문화에 투자했다. — 그 문화의 힘으로 다시 경제력이 상승하고, 그 경제의 힘으로 다시 문화력이 상승한다.
경제력을 가진자와 문화력을 가진자가 융합하는 것도. 함께 가는 거라 할 수 있다. 한쪽은 경제력을, 다른 한쪽은 문화력을 가진 남녀가, 가정을 이루는 것도 융합이고 — 군사 민족인 로마가 정복을 통해 경제력을 키우고, 그리스 문화를 흡수하는 것도 융합이라 할 수 있으며 — 조선의 사례처럼 아버지가 경제력을 키우고, 아들이 문화력을 키우는 것도 융합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의 삶을 생각해보자. 하나의 인간을 놓고 볼 때에도 마찬가지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 경제력의 발전과 문화력의 발전, 두 가지 흐름이 진행되는 거라 해석할 수 있다. — 어느 사람이 사법고시에 합격하기 위해 시험공부에 매진했다면, 그것은 경제력을 키우는 행위였다 할 수 있다. 고전을 읽고, 애인과 예술 전시회를 다닌다면, 그것은 문화력을 키우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다시 개인의 삶을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은 부모로부터 경제력을 물려받고, 어떤 사람은 부모로부터 문화력을 물려받는다. — 어떤 사람은 경제력과 문화력을 모두 물려받고, 어떤 사람은 어떤 것도 물려받지 못하며 — 어떤 사람은 빚을 물려받고, 어떤 사람은 병든 문화를 물려받고, 어떤 사람은 천박한 문화를 물려받는다.
개인은 어찌 살 것인가? — 인생의 길이란 어느 하나만이 답이라 할 수 없다. 그 유력한 답 중 하나는 극복의 역사를 쓰는 것이다. 열악한 조건이더라도, 경제력과 문화력을 향상시키고자 해야 한다. 두 가지 과제를 모두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 이미 하나를 갖고 있다면, 다른 하나에 주목해야 한다. 둘다 없다면, 그중에 먼저 키울 것을 주목해야 한다. 둘다 키우면 되는 것이지, 왜 하나에 주된 집중을 해야 하는가 하면 — 둘 중 하나는 키우기가 어려운, 환경과 조건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장기적으로 볼 때, 어느 하나에 먼저 집중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축구선수를 보자. 기본기에 먼저 집중을 하고, 체력과 근력은 나중으로 하는게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체력을 키우고 웨이트를 하는 것은 나중에라도 꽤 단시간에 가능하지만, 기본기는 어려서부터 집중해서 키워야 하고, 나중에는 키우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결국은 기본기와 체력 ・ 근력이 함께 해야 한다. 그래야 전성기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그 전성기에 도달하기 위해 순서가 필요할 수 있다. — 기본기에 집중한다고, 체력과 근력을 전혀 안 키우는 건 아니다. 체력과 근력에 최적화를 안 하고, 기본기에 훈련을 최적화하는 것뿐이다. 경제력에 집중하면서도 기회가 되면 문화적으로 도움받는 것들을 흡수할 수 있다.
경제력과 문화력은 동반되어야 한다. 그것은 짧은 기간에 마치 자전거에서 왼쪽 오른쪽, 핸들을 교대로 조절하는 것처럼 그렇게 진동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꽤 긴 기간 동안 하나에 집중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경제력과 문화력이 동반되지 않는,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보자. 경제력은 없이 오직 문화력만 추구할 때, 생계가 문제된다. 문화에 있어서 많은 경우 물질의 도움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그림을 그리려면, 물감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음악을 하려면, 악기는 있어야 한다. 문화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곤란하고, 많은 유가 필요하며, 그중 일종은 재료나 도구가 되는 것들이고, 다른 일종은 영감을 주는 것들이다. — 그것들은 경제력이 있어야 되는 것일 수 있다.
이제 반대편 극단을 생각해보자. 문화력은 없이 오직 경제력만 추구할 때, 그는 타락한 삶을 살 가능성이 크다. — 그가 과연 자존감을 무엇으로 채울지 문제되고, 그는 결국 아무것도 없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 그의 곁은 돈만 바라는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의 눈은 돈에 있어서 경쟁자들로 채워질 것이다. 자녀는 자신을 돈으로만 보고, 친구는 이용가치를 가늠하며 속으로 딴 생각을 품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죽어서는 돈을 갖고 가지 못한다. 죽어서 돈을 갖고 갈 가능성은 0%이고, 죽어서 정신을 갖고 갈 가능성은 0%가 아니다. 사후세계가 있다면, 그곳에서 그는 더이상 부자가 아님이 명백하다. — 다른 사람들은 문화력을 갖췄고, 그는 경제력도 문화력도 없이 사후세계를 살아야 한다. — 죽기 이전에도 그는 다른 부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결국 오랜 부자들은 문화도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에 투자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졸부라고 생각하고, 겉으로는 웃을지라도 속으로는 멸시할 것이다. 그 멸시를 통해서 나는 졸부가 아니고 문화력을 갖췄다는, 분별에 의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 다른 부자들이 인정을 해주지 않으면, 평범한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인정해주는가 하면 —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 인정이라 한다면, 나처럼 하면 너희들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성공학 강의팔이나 유치찬란한 힙합감성같은, 그런 것에 의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 그것이 그의 정신승리를 도울 수는 있겠지만,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이는 공허하게 느껴질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도 평범한 사람들도 가난한 사람들도 인정해주지 않고, 가족마저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는 자신을 인정해줄 수 있는가가 문제되고 — 인정이 잘 되지 않으니, 외로움이 몰려올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를 인정하고 있다면, 외로움은 밀려오지 않는다. 설령 밀려와도 방파제가 있어, 자아의 침식을 막아줄 것이다.
결국 경제력과 문화력이 모두 필요하다. — 뭐 거창한 재산가가 아니더라도, 뭐 거창한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 개인은 자신의 경제력과 문화력을 가늠하고, 궁극적으로는 그 둘다 발전시키고자 해야 한다. — 상황인식과 목적의식을 갖고 있다면, 발전할 기회는 많을 것이다.
인생은 다양한 길이 가능하다. 오직 하나의 길만이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길이 평등한 건 아니다. 한편으로는 수평적 다양성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좋고 나쁨이 있다. 위에 이야기한 것은 그중 높은 길 하나를 이야기한 것이다. 이러한 길을 전제로 한다면, 워라밸은 다음과 같이 봐야 적절할 것이다.
working을 경제력으로 해석한다고 해보자. life는 문화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문화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그건 라이프가 아니다. 경제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그건 워킹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 life는 문화력이 아니라, 휴식을 의미하는 거라 주장하는 수가 있다. 그러면 워라밸을 통째로 부정해야 한다. 라이프가 그저 휴식이라면 워라밸은 사실상 — 워워밸이다. 오늘의 워킹과 내일의 워킹을, 휴식을 통해 균형잡는 것일 뿐이다. — 라이프는 문화력을 뜻하는 것이다. 문화력을 뜻하는게 아니라면, 워라밸을 통째로 부정해야 한다. 그 대신 다음과 같은 것으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Money-Culture Balance
다시 한 개인을 놓고, 경제력과 문화력을 다음과 같이 매칭할 수도 있다. 실력은 경제력을 가리킨다. 인격은 문화력을 가리킨다. 사회의 문화는 개인의 인격에 대응하는 것이고, 경제력에 있어 내적인 것은 개인의 실력에 있는 것이다.
경제와 문화는 함께 가야 한다.
실력과 인격은 동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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