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원》 -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수많은 석학들과 선조들이 이 질문을 놓고 씨름해 왔습니다. 현대에 빠르게 발전해 온 행복 심리학계의 권위자 서은국 교수가 이 질문에 도전합니다. 서은국 교수는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인용되고 있는 행복 심리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행복심리학의 창시자 에드 디너 교수에게 사사했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심리학과 종신 교수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유엔에 동료들과 함께 제출한 행복 지수 측정 제안서는 갤럽의 연례 조사에 행복 지수가 정착되는 데에도 도움을 줬습니다. 이 책 《행복의 기원》은 큰 인기를 끌고 2024년 10주년 개정판이 나오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아쉽지만 제가 읽은 판은 절판되었고 밀리의서재에서도 내려갔습니다. 다행히도 밀리의서재에 혹시나 검색해보니 10주년 개정판이 올라와 있네요. 개정판에는 대표적인 질문과 답변이 추가되어 있는데 이 부분도 우리가 행복의 기원 본문을 읽고 오해할 수 있는 점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일단은 읽은 게 구판이라 구판 위주로 글을 쓰되, 개정판에서 추가된 부분도 조금 반영했습니다.
글쓴이는 진화심리학과 행복심리학의 관점으로, 꽤나 명쾌하게, 그러나 그동안 인류가 생각해 온 방식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행복이란 무엇인지 답을 내립니다. “생존과 번식, 행복은 진화의 산물이다.”
행복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다루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왜 의식의 불완전함을 다룰까요? 이는 행복을 이성적으로, 의식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한계가 있음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그래야 행복을 이성적으로,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잠시 내려놓고 이 책이 행복을 연구하고자 하는 방식대로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제시하는 냄새와 청결 문제는 반론이 제시된 것이라, 《바른 마음》에 나오는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최면에 잘 걸리는 사람들을 모아서 두 무리로 나눕니다. 한 무리에는 "취하다"(take)라는 낱말을 들으면 구토를 하게 암시합니다. 다른 무리에는 "종종"(often)이라는 낱말을 들으면 구토를 하게 암시합니다. 그리고 6가지 도덕적 진술을 둘로 나누어 하나에는 "취하다"가, 다른 하나에는 "종종"이 들어가게 표현합니다. 취하다 구토팀은 같은 진술이라도 "취하다"가 들어가는 문장을 더 비도덕적이라고 평가하고, 종종 구토팀은 "종종"이 들어가는 문장을 더 비도덕적이라고 평가합니다. 이 실험 결과는 구토가 느껴지는 것을 비도덕적이라고 평가한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결과는 일곱째 문장입니다. 이 문장은 전혀 도덕적 진술이 아닙니다. 댄이라고 하는 사람이 교수와 학생이 모두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주제를 고른다는 뜻의 문장에 "취하다"나 "종종"만 넣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취하다 구토팀과 종종 구토팀은 댄을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들이 댄을 비난하는 이유는 최면 때문에 문장에서 역겨움을 느꼈기 때문일 뿐이지만, 뭔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지어내서라도 댄이 비난받아 마땅한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이 마지막 결과는 사람들이 자신의 무의식에 있는 진짜 판단의 원인을 모를 때 의식에서는 완전히 틀린 이유를 지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행복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식적인 행복의 원인들은 진짜 행복의 원인이 아닐 수 있는 겁니다.
의식적인 원인이 아니라서 실감하지 못하는 진짜 행복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책에서는 이것을 보여주기 전에 먼저 인간이 문명을 갖추고 살아온 세월은 생명체로 지내온 세월에 비하면 잠깐에 불과하므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먼저 짚고, 그다음으로는 사람은 사람만의 어떤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여기에서, 행복은 생존과 번식을 잘 하기 위해 느끼는 것이라는 이 책의 핵심 주장이 나옵니다.
드디어 행복의 정의가 나옵니다. 먼저 정서를 두 가지로 나눕니다. 쾌에서 느끼는 감정을 긍정적 정서, 불쾌에 바탕을 둔 감정들을 부정적 정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정서에 비추어 행복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행복의 핵심은 부정적 정서에 비해 긍정적 정서 경험을 일상에서 더 자주 느끼는 것이다. 이 쾌락의 빈도가 행복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Diener, Sandvik, & Pavot, 1991) .
<행복의 기원>, 서은국
쾌와 불쾌는 생존에 밀접한 활동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행복을 느낄지도 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존하기 높은 환경에 처할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은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동물 중에는 단독 생활을 하는 종들도 있습니다. 이런 동물들은 모여 살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홀로 살면서도 종을 지금까지 유지해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함께 모여서 삶으로서 험악한 자연에서 더 잘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미와 인간은 그 때문에 지구에서 최고의 생존 성공담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뇌에서 항상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글쓴이는 더 나아가서 행복이 사회적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가설을 세웁니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아직 가설입니다.
첫째, 행복은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에 의해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둘째, 행복의 개인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그가 물려받은 유전적 특성,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외향성이라는 성격 특질이다.
두 결론은 수백 편의 논문을 통해 검증된 사실이다. 확고한 결론이지만,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설명은 아직도 학계에 부족하다. “그냥 그래.”
<행복의 기원>, 서은국
그래서 이제부터 나오는 글쓴이의 주장은 아직 부족한 면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글쓴이는 아직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행복의 기원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은 재물을 얻거나 지위를 얻거나 무엇을 이룰 때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조건으로 얻는 행복은 행복의 개인차 중 10~15% 정도밖에 예측하지 못합니다. 정서는 행복을 느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있는 것인데, 자연에서는 한 번 외적인 조건을 충족해도 그것이 영원히 생존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행복을 갈구해야 했고, 그래서 외적인 조건에서 얻는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번의 큰 사건이 아니라 반복적인 소소한 사건이 행복에서 중요합니다.
또 학자들은 외향적인 사람들을 연구하다가 뜻밖에 이들이 행복을 자주 느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사람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행복전구가 자주 켜지기 때문입니다. 외향성이 직접 행복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지만,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사회적 경험을 잘 하게 도와줍니다. 외향성 수치가 낮은, 즉 내향적인 사람들조차도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행복을 더 많이 느낍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에 민감하기 때문에 사회적 경험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외향성 수치가 높은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쟁이”입니다.
이렇게 보면 행복은 타인과 교류할 때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일종의 ‘부산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건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다. 역으로, 의무감이나 수단으로써 사람을 만나는 것은 가장 피곤한 일이 될 수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행복하지 못하다고 고백하는 이유도 역시 사람 때문이다.
<행복의 기원>, 서은국
한편, 많은 나라들에서는 경제 수준과 행복이 깊은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것이 경제 수준이 아니라 문화 차이 때문입니다. 소득과 행복의 상관관계에서 개인주의의 영향을 제거하면 상관관계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즉 유럽과 북미 등의 부자 나라가 행복해 보이는 것은 그들이 부자라서가 아니라 개인주의 문화를 누리고 있어서입니다.
분명히 사람은 사람과 같이 있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는데, 개인주의가 행복감을 예측한다고요? 이 당혹스러운 문제는 사실 모순이 아닙니다. 위에서 내향적인 사람 얘기를 했지만, 사람에게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행복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의 불쾌감의 근본이라는 뜻도 됩니다.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사람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쾌가 아니라 불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화에서는 삶의 주인이 나 자신이 아니라 남이 되는데, 이런 남이 주인 되는 삶에서는 남의 평가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피로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남이 모든 판단 기준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객관적인 기준, 즉 물질주의가 판을 치게 되는데, 물질주의 역시 행복을 빼앗아가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이제 결론에 왔습니다.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것을 이루었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일상에서 긍정적인 정서를 자주 경험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면, 그런 쾌락주의자들이 “미래에 더 건강해지고, 직장에서 더 성공하고, 사회적 관계도 윤택해지고, 더 건강한 시민정서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쾌락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쾌락은 먼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행복의 기원>, 서은국
이는 한국인이 가장 행복을 많이 느끼는 두 가지 행위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행복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개정판에서는 이 문장이 삭제되어 있네요. 아마 남녀가 함께 있는 사진의 설명문이었기 때문에 사진이 삭제되면서 같이 지워진 것 같은데, 아쉽네요. 그래도 본문에도 비슷한 문장이 있습니다. “행복의 핵심을 사진 한 장에 담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의 내용과 지금까지의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총체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것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다.”)
이 책의 강점은 결론이 허무하지 않고 매우 소박하면서도 마음에 와닿는다는 것입니다. 책에서는 사람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목적론적 사고를 해체하는데 이 목적론적 사고를 해체하고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 허무주의적인 과학주의자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생존과 번식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을 행복한 삶으로 서술합니다. 그러면서도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떻게 사회관계를 맺는 것이 건강한 것인지까지도 나아갑니다. 이는 물질주의가 팽배한 한국, 경제 수준에 비해 행복 수준이 낮은 한국인들에게 더욱 필요한 메시지입니다.
이성을 밀어두고 본능을 강조하기 때문에, 본능대로만 살 수 없는 현대 사회인들이 읽기에는 불편한 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참고 끝까지 읽어나간다면 우리가 지나치게 본능을 경시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라는 글쓴이의 결론에 동감하면서도, 모든 본능, 특히 반사회적인 본능대로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행복을 느끼기 위해 우리가 들어야 하는 본능의 소리가 무엇인지를 듣는다면, 결국 나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회도 함께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사람쟁이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느끼는 것이니까요.
사람은 함께하는 삶으로도 살 수 있지만, 돈, 즉 가치를 교환할 수 있는 수단을 발명하고서는 인간관계를 맺지 않고 돈만으로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주의는 물질주의와 같이 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돈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워서 알지 본능적으로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아직 돈만으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람이 더 진화해서 돈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본능으로 알게 될 수도 있을까요? 그러면 끔찍할 것 같네요. 어쨌든 사람은 행복을 느끼기 위해 물질주의를 배우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기 위해 물질주의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물질주의는 행복에 해롭고, 개인주의가 아니라 집단주의 사회에서 더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이 통렬하게 느껴집니다.
사소하지만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도 중세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다는 오류를 의심 없이 사실로 진술했다는 것입니다. 닐 그레이스 타이슨의 《나의 대답은 오직 과학입니다》에서도 이런 내용을 읽고 중세와 과학의 관계를 왜곡하는 관점이 만연하다는 점에 한숨을 쉬었는데 이번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시 싱걸의 《손쉬운 해결책》에서는 신경과학과 심리학에서 세상을 뒤흔든 많은 실험 결과들이 사실은 재현성에 문제가 있다고 나옵니다. 싱걸의 책은 이 재현성 위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아니지만요. 글쓴이가 중세와 과학의 관계에서 오류를 저질렀다면 한때 불거진 이 재현성 위기를 얼마나 의식하고 이 책의 내용들을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행복은 유전적인 요인이 50%인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데, 유전적으로 행복을 잘 못 느끼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건네는 조언이 있으면 더 따뜻한 책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에는 10주년 개정판에서 추가된 “행복이 "생존 도구"라면, 행복할수록 무조건 좋다는 뜻인가?”와 “MBTI 결과가 I(내향성)인 사람은 불행한가?”가 도움이 됩니다. 행복은 생존 도구이기 때문에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하게 행복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지 항상 행복을 느끼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행복을 "비교적" 잘 못 느낀다는 것은 불행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이런 사람들도 행복을 잘 느끼는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뿐이라고 합니다. MBTI의 내향성은 성격심리학에서 표준적으로 쓰는 5요인 모형의 낮은 외향성에 상응하는데, 5요인 모형에서 중요한 것은 외향성과 같은 다섯 요인의 높고 낮음은 주변 상황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뭐가 좋고 나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외향성이 높은 것이 유리한 상황이 있는 만큼(행복처럼), 외향성이 낮은 것이 유리한 상황도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을 덜 느끼는 것의 장점을 행복을 잘 느끼는 것의 장점만큼 소개해 주면 균형이 더 맞지 않았을까 합니다.
비판보다는 생각해 볼 문제를 하나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이 책에서는 목적론적 사고를 해체하기 위해 저명한 물리학자 캐롤의 표현대로 우리는 아무런 "이유 없는 우주"에서 살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고전 역학을 서술하는 세 가지 다른 방식이 있는데, 뉴턴 역학, 라그랑주 역학, 해밀턴 역학입니다. 이 중 뉴턴 역학은 힘이 작용하면 가속도가 생긴다는 인과론으로 모든 물질의 운동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라그랑주 역학은 자연은 액션을 최소화한다는 목적론으로 모든 물질의 운동을 설명합니다. 인과론과 목적론은 매우 다른 것 같지만, 중심에 놓고 다루는 물리량이 달라서 그렇지 결국은 같은 고전역학입니다. 그렇다면 "이유 없는 우주"와 "이유 있는 우주"는 매우 달라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인간은 아무 목적 없이 생존을 위해 살아왔다는 것과, 인간의 삶에는 생존 말고 어떤 목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모순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저 생존을 위해 행복을 느끼게 됐는데 어떤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실제로 어떤 목적이 있어서 행복을 느끼면서 생존이 보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 둘을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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