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뇌과학》 - 기억하고 잊는 인간에게 건네는 뇌의 따스한 소개
기억의 뇌과학
저자 리사 제노바/출판 웅진지식하우스/발매 2022.04.15.
일류 심리학자로 살아가다가 50세에 조발성 치매를 겪으면서 송두리째 삶이 바뀐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스틸 앨리스》. 많은 호평을 받고 줄리안 무어를 주연으로 삼아 영화화도 되었습니다. 이 소설의 작가로 명성을 얻은 리사 제노바. 실은 하버드 대학교에서 신경과학을 공부해 박사를 받은 신경과학자이기도 합니다. 자비로 출판한 스틸 앨리스가 큰 인기를 끌어서 그 뒤로도 여러 소설을 지었고 알츠하이머병과 기억을 설명하는 대중 강연으로 수많은 상을 받았으며, TED 강연 “알츠하이머병을 예방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2024년 6월 15일 기준으로 조회 수가 약 323만에 달합니다. 한국어 자막도 등록되어 있네요.
https://youtu.be/twG4mr6Jov0
《기억의 뇌과학》(원제: 《Remember》)은 기억과 망각을 다루는 책으로 제노바의 첫 논픽션입니다. 이 책도 2021년 3월 출간 즉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큰 인기를 끌었고 한국에는 2022년 4월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뇌과학자 정재승은 추천의 글에서 “아마도 현대인들에게 이 책은 또 하나의 선물이 될 것이다. 우리가 기억과 망각에 대해 알고 싶은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라고 호평했는데, 유명 소설의 작가다운 친근하고 다가가기 쉬운 필체로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기억과 망각의 뇌과학을 소개해 줍니다.
사람들은 기억력이 떨어져갈 때, 다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때 치매에 걸리면 어쩌나 불안해합니다. 제노바는 위의 유명한 TED에서 85세가 되면 두 사람 중 하나는 치매에 걸리고 한 사람은 치매 환자를 도울 거라는 충격적인 서두로 들어가죠. 우리가 불안에 사로잡히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불안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제노바는 그 이면에 있는 우리의 본질까지도 살펴보죠.
그러나 제노바는 이렇게 망각의 불안에 깊게 싸인 우리들에게 위안의 손길을 내밉니다.잊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단순히 나이 드는 게 혹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는 게 싫어서만은 아니다. 기억하는 능력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것 자체가 두려운 것이다. …(중략)… ‘이러다가 내가 나를 잃어버리면 어쩌지?’ 당연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 <기억의 뇌과학>, 리사 제노바
이 문장은 《킹덤 오브 헤븐》에서 십자군과 이슬람이 수많은 피를 흘리며 쟁탈한 예루살렘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살라딘이 남긴 명대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지……. 모든 것이기도 하고!” 기억은 우리의 전부일 때도 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닐 때도 있지요. 그렇게 제노바는 불완전하게 기억하고, 망각할 수밖에 없는 동물인 인간을 토닥여 줍니다.우리는 기억의 역설을 감당해야 한다. 즉 기억은 전부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다. 너무 거창하게 느껴진다면, 더 순화된 버전도 있다. 기억은 정말 대단하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하지는 않다.
- <기억의 뇌과학>, 리사 제노바
이 책은 총 3부로 되어 있습니다.
Part 1 기억의 과학
Part 2 망각의 예술
Part 3 기억의 숲을 가꾸는 방법
기억의 과학에서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는지, 그리고 왜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기억에는 작업기억, 근육기억, 의미기억, 일화기억, 섬광기억 등이 있습니다. 작업기억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해마에 저장해 둔 기억이고, 이 기억 중 장기간에 걸쳐 저장할 것으로 정해지는 기억들이 뇌 전체에 의미기억이나 일화기억으로 저장됩니다. 의미기억은 지식을 저장한 기억이고, 일화기억은 사건과 경험을 저장한 기억입니다. 근육기억은 몸을 움직이는 방법을 기억한 것으로, "근육"기억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뇌에 저장됩니다. 다른 기억과는 달리 해마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해마가 파괴되어 장기기억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일화기억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다는 경험은 기억하지 못하지만요. 섬광기억은 특별히 강력한 감정을 일으키거나 너무나 의외의 사건을 기억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기억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머릿속에 있는 도서관이나 DVD 기록보관소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자를 상상해 보라면 사람의 뇌 속으로 들어가 그 뇌 속에 있는 책을 펼쳐놓듯이 읽는 장면을 떠올리기 쉽죠. 그러나 실제로는 뇌세포들을 이리저리 활성화시켜 보면서 가지고 있는 기억 정보가 저장된 형태와 같이 뇌가 활성화되었을 때, 비로소 떠올립니다. "아! 이거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잘 모르고 있던 기억의 과학적 원리들을 조금씩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다룬다면 어려워질 수 있는 내용들이지만, 실제 생활과 함께 연관해서 설명하는 방식이라 읽으면서 내용을 더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하지만 저장된 기억을 불러내는 것은 DVD나 유튜브 채널을 고르고 재생 버튼을 누르는 것과는 다르다. 책을 읽듯이 기억을 읽거나 동영상을 재생하듯 기억을 재생할 수는 없다. 시각기억은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폴더를 훑어보다가 원하는 사진을 확대· 축소해서 보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사진을 보는 것이 아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연관성이 있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물건들을 최대한 많이 모아야 이기는 게임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뇌 여러 부분에 흩어져 있지만 서로 연관성이 있는 세포들을 찾아 모아야 기억을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지, 동영상처럼 재생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의 인출은 기억의 일부가 자극을 받아, 기억회로의 활성화를 촉발할 때 일어난다.
- <기억의 뇌과학>, 리사 제노바
〈업타운 펑크〉의 안무를 네 시간 만에 습득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새로운 안무를 배우기에 앞서 수년간 춤과 함께한 시간, 그리고 그동안 단련된 내 근육기억을 무시하는 것이다.
- <기억의 뇌과학>, 리사 제노바
그러나 우리의 기억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머릿속에 있는 기억 자체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일치하는 정보를 만들어서 재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재구성한 기억이 원래의 기억을 덮어쓰기 때문이지요. 이는 일화기억뿐만 아니라 너무나 생생해서 사실임이 틀림없다고 믿는 섬광기억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리사 제노바의 글쓰기에서 인상적인 점은 이렇게 과학적인 현상과 낭만적인 일상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쉽게 머릿속에 이야기가 남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요약하면, 지나간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어쩌면 맞을 수도, 완전히 틀릴 수도 있고, 참과 거짓 중간 어디쯤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혹시 배우자가 말하는 기억이 우리의 기억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발끈하지 말자. 우리도 우리의 배우자도 아마 고의는 아니겠지만 잘못된 기억을 둘만의 추억이라고 여기며 간직해왔는지 모른다. 이 점을 깨닫고 진실이 무엇인지 누구도 완벽하게 알 수 없음을 그냥 받아들이자.
- <기억의 뇌과학>, 리사 제노바
이렇게 잊어버리는 것 때문에 우리는 일상에서 여러 번 곤란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필요하지 않은 모든 것을 다 기억하기보다는, 필요한 것만 기억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정 놀라운 뇌의 능력이라 하겠습니다. 때로는 기억하기 싫은 것까지 기억해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는 사람들이 있지요. 하다못해 같은 호텔에 한 달 전에 묵은 방과 다른 방에 예약했다고 해도, 전에 예약한 방 번호는 빨리 잊어버리는 게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늙어가면서 기억력이 떨어지는 현상 중 일부는 노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알츠하이머병의 징조가 아닙니다. 알츠하이머병의 전조는 작업기억을 저장하지 못하는 것, 즉 방금 겪은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나 주의를 기울여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대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탓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자책하지는 마세요! 원래 우리의 뇌는 자주 주의력이 분산되는 법입니다. 그리고 혀끝에서 맴도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지 못하는 설단 현상은 사람 이름 같은 고유명사에 주로 일어나는 반면, 알츠하이머병의 징조에서는 보통명사도 고유명사만큼이나 잘 떠올리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기억과 망각의 과학적 원리를 잘 이해하면 망각을 줄이고 기억을 더 잘 하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기억하고 있을 때의 환경과 같은 환경에서 떠올릴 것, 스트레스를 잘 관리할 것,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것, “잘 자요!” 잠은 진정한 슈퍼히어로입니다. 잠은 기억을 저장하는 버튼이요, 연습만큼 좋은 근육기억 향상법이요, 어지간한 약보다도 효과적인 알츠하이머병 예방법입니다. 그 외의 알츠하이머병 예방법으로는 바로 운동과 학습이 있습니다. 이 학습은 퍼즐이나 두뇌 게임 같은 것이 아니고, 새로운 인지자극을 만드는 것, 즉 피아노 배우기, 새 친구 사귀기, 새로운 곳 여행하기 등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도 알츠하이머병이 걸렸다? 분명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제노바는 본인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할머니와 친구와 함께한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알츠하이머병을 두려워하는 우리와 함께해 줍니다.
책 본문은 마지막으로 제가 위에서 두 번째로 인용한 기억의 역설을 다룹니다. 그래서 기억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도 말아야 하지만, 너무 집착하지도 말 것을 권하면서 다음 문장으로 본문을 마칩니다.
부록에서는 기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로 다음 열여섯 가지를 권합니다.소중하게, 그렇지만 결코 무겁지 않게. 기억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다.
- <기억의 뇌과학>, 리사 제노바
1. 주의를 기울인다.
2. 본다.
3. 의미를 부여한다.
4. 상상력을 동원한다.
5. 공간, 공간, 공간을 활용한다.
6. 나와 연관시킨다.
7. 극적으로 연출한다.
8. 변화를 준다.
9. 연습하면 완벽하게 잘할 수 있다.
10. 다양한 단서를 활용한다.
11. 긍정적 태도를 갖는다.
12. 보조장치를 활용한다.
13. 맥락이 중요하다.
14. 스트레스를 관리한다.
15. 충분히 잔다.
16. 사람 이름을 기억하고 싶다면 고유명사를 일반 명사화한다.
사소한 것 하나. 글쓴이의 성이 제노바라서 이탈리아의 도시 제노바가 떠오르네요. 영어식으로는 제노아(Genoa)인데 굳이 이탈리아식으로 쓰는 것을 보면 조상이 이탈리아에서 온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인지 책에서 나오는 음식은 스파게티나 파스타 같은 이탈리아 음식들입니다. 그걸 확인하려고 책 본문을 검색해 보니 “이탈리아계 가정인 우리 집에서는 끼니마다 파스타를 먹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었네요. 뻔히 책에서 나오는 내용을 놓치고 있었군요. 글쓴이의 말대로라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니까 잊었겠죠!
그러면, 오늘도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기억의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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