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삶-특집] "…
"바쁘다는 핑계로 자녀와 대화하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다"
"가장 후회되는 것은 가족에 소홀했던 일"…[삶] 인터뷰이들
[※ 편집자 주= 이번 특집은 그동안의 [삶] 인터뷰 기사 내용 가운데 후회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터뷰이들의 답변을 묶은 것입니다]
아버지, 여동생과 함께한 정호승 시인(맨 왼쪽)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을 마치고 나서 [김영사 제공]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사람은 살면서 후회되는 일을 많이 한다.
특히 가족들에게 소홀하게 대한 것이 평생의 아픔으로 남는다. 이제는 잘해야겠다면서 반성하고 나면 이미 부모님은 이 세상에 없고, 자녀는 훌쩍 커서 어른이 돼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연합뉴스의 [삶]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은 2022년 9월 이후 지금까지 50명에 이른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후회되는 일이 무엇인지 물었는데, 상당수의 인터뷰이들은 가족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을 꼽았다.
부모에게 무뚝뚝하게 대하고, 단답형으로 답변하고, 충분히 대화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자식들에게는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아래 내용은 인터뷰이들이 말한 후회스러운 일을 묶은 것이다.
※ 표시가 된 내용은 인터뷰를 진행한 윤근영 기자가 앞뒤 맥락 등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정호승 시인
[촬영 정한솔]
◇ 시인 정호승
--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 가장 후회되는 것은 독서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책을 읽고, 중요한 구절과 내 생각을 독서 노트로 정리해 놨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가 20대로 돌아간다면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젊었을 때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도록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을 필요가 있다. 30대 초중반, 40대 초중반에 한동안 시를 쓰지 않은 것도 후회되는 일이다. 문학적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에 허송세월했다.
-- 부모님에 대한 후회는 없나.
▲ 부모님께 시간을 내드리지 못했다. 어느 날 내가 급하게 가방을 들고 집에서 나갈 때 아버지께서 물었다. "호승이, 너 오늘 바쁘나?"라고 했고 나는 "지금 바쁩니다. 지금 나가려고 그러잖아요"라고 답변했다. 아버지는 "내가 너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네가 바빠서…" 이렇게 말끝을 흐리셨다. 나는 "나갔다 돌아왔을 때 말씀하세요"라고 답변하고는 그대로 외출했다. 귀가해서는 아버지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 했는지 묻지 않았다. 인제 와서 후회된다.
※ 위의 내용은 2022년 12월22일 송고한 [삶] 시인 정호승 "한국서 정치만 낙후…자기들 집단이익만 추구"라는 제목의 기사에 들어 있다.
많은 자녀는 노쇠해진 아버지에게 살갑게 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아들들이 그렇다. 과거에는 상당수의 아버지가 매우 권위주의적이어서 자녀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 박재갑 전 국립암센터 원장은 어린 시절, 벽에 걸린 아버지 사진도 정면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부친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이러니 아버지가 노쇠해지고 온화해진 이후에도 아주 살가운 관계가 되기는 어렵다. 아버지가 뭔가 물어도 단답형으로 무뚝뚝하게 답변하고, 서둘러 대화를 끊으려 한다. 이제는 좀 더 친근하게 대하자고 결심하게 되는 때가 오기는 하는데, 그때는 이미 아버지가 치매이거나 의식이 분명하지 않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이계호 교수
이 교수는 충북 옥천에 태초먹거리학교를 세워 무료로 건강 강의를 하고 있다. [촬영 이다빈]
◇ 이계호 태초먹거리학교 교장
- 건강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 딸이 25세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왜 암에 걸리는지, 암을 예방할 방법은 없는지, 재발을 막을 방법은 없는지에 대해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 딸은 언제 발병했나.
▲ 서울에 있는 대학교 산업디자인과에 다니던 딸이 22세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딸은 수술을 비롯한 표준치료를 신속히 끝내고 곧바로 대학교로 돌아갔다. 나는 딸의 빠른 복학을 막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 역시 복학해도 된다고 했다.
-- 너무 빠른 복학이 문제였나.
▲ 복학을 늦추고 1년 정도의 면역력 회복 기간을 가져야 했는데 의사도 그런 이야기를 안 했고, 나도 그걸 몰랐다.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딸은 어떤 사람이었나.
▲ 우리 딸은 나한테 애교를 부린 적이 없다. 선 머슴애 같은 성격이었기에 그렇다. 나는 젊은 시절에 공부하고 연구하느라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다. 그게 아쉽고 후회됐다. 그래서 내가 딸한테 애교를 떨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딸은 그걸 멋쩍어하면서도 잘 받아줬다.
-- 태초 먹거리 학교를 세운 이유는.
▲ 딸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나는 많은 시행착오를 했다. 너무 많이 실수했고, 엉뚱한 짓을 많이 했다. 주변을 보니 다른 암 환자들과 그 가족들도 우리 집과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해 2010년 7월에 암 환자를 대상으로 교육을 시작했다. 딸이 하늘나라로 간 지 1년 만이었다.
※ 위의 내용은 2023년 9월16일 송고한 [삶] 유방암으로 하늘나라 간 25세 딸…치료과정서 후회되는 두가지에 들어간 답변들이다.
이 교수에게 가장 후회되는 일은 딸의 조급한 복학을 막지 않았고, 딸의 치료 과정에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점이다. 그에게 딸이 숨진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어서 딸에 대한 질문이 많은 언론매체의 인터뷰 요청은 거절한다고 했다. 성장기의 딸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도 그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이 교수는 항상 일에 몰두했다. 그러다 보니 딸에게 시간을 충분히 내주지 못했다고 한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조명숙 여명학교 교장
[촬영 이건희]
◇ 조명숙 여명학교(탈북청소년 학교) 교장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 내가 결혼할 때 어머니는 가난했다. 그런데도 매달 5만 원씩 모아서 나와 남편에게 결혼반지를 해주셨다. 금가락지였다. 우리 부부는 그 금가락지를 끼지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는 반지를 왜 안 끼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냥 장롱에 뒀다고 했지만, 사실은 결혼식 직후에 팔았다. 중국에서 탈북민 지원활동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왔다가 되돌아가는 탈북민들에게 우리는 한국 돈으로 5만 원, 10만 원에 해당하는 달러를 손에 쥐여주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금반지를 팔지 않아도 활동에 큰 지장이 없었다. 반지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을 간과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든다.
-- 가족들한테 이기적이라는 말도 들었다고 하던데.
▲ 빈민가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내가 대학에 갔으니 집안을 일으켜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나는 대학 졸업하기 전부터 외국인노동자와 탈북민을 위한 삶을 살았고, 8년간 급여가 없었다. 여동생이 "우리 가족보다 외국인노동자와 탈북민이 더 중요하냐. 그런 일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부자들에게 맡기고, 언니는 우리 가족을 도와주면 안 되느냐"고 했다. 가족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하다.
※ 위의 내용은 2023년 6월30일 송고한 [삶] "北의 엄마가 간암이래요, 제발 남한의 좋은 약 좀 구해주세요"라는 기사에 들어 있다.
여명학교 근무 이전에 조명숙 교장은 중국-북한 접경 지역에서 탈북민을 돕는 일을 했다. 중국 쪽에서 하는 일이지만 그건 자기의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과정이었다. 탈북민들도 생명이 위태로운 긴박한 상황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러니 그가 가족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인터뷰 중에 가족들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과거에 운동가와 활동가로 일했던 많은 사람이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뛰어다니지만 정작 자기 가족의 고통에는 신경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눈물 닦는 비정규직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가 2023년 12월 7일 오전 대법원 앞에서 열린 '판결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다. 재판부는 원청인 김병숙 전 한국서부발전 사장에게 사망 사고의 형사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연합뉴스 사진]
◇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 아들 김용균(비정규직으로 근무 중 사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인가.
▲ 용균이 쉬는 날 전화로 "엄마, 집에 갈까?"라고 묻곤 했다. 나는 오지 말라고 했다. 하루 쉬는데, 집에 오가다 보면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할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야근하고 반나절, 그리고 그다음 날 쉬었다고 한다. 그걸 알았으면 집에 오라고 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용균은 입사한 지 한 달 반 만에 예비군 훈련을 받기 위해 집에 왔다. 몸이 너무 많이 말라 있었다. 하는 일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힘들다고 했다. 그러면 그만두라고 했더니 아들은 조금 더 일해보고 안되면 포기하겠다고 했다. 워낙 취업이 어렵기에 그곳에서 좀 더 버텨보겠다고 생각한 듯하다.
-- 본인의 부모님도 아들을 잃었는데, 많이 힘들었을 듯하다.
▲ 물놀이 사고로 나의 남동생이 죽었다. 사고가 났을 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자식을 잃어보니 그 고통은 형제를 잃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남동생이 죽었을 당시 부모님의 고통에 대해 내가 신경을 못 써준 것이 너무 죄송하다. 어머니는 2018년 3월에 돌아가셨고, 용균이는 12월에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 위의 내용은 2023년 4월5일 송고한 [삶] 김용균 어머니 "비정규직 목숨값은 정규직의 절반이라니"라는 기사에 들어간 내용이다.
비정규직 김용균은 2018년 12월11일 새벽 서부발전 컨베이어벨트 아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24세였다. 그는 머리와 몸이 분리돼 있었다. 어머니 김미숙은 하나뿐인 자식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영안실 복도에서 남편과 함께 데굴데굴 구르며 울었다. 김 이사장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아들이 쉬지 못할까 봐 집에 오라는 소리를 못 한 것조차도 후회스럽다고 했다.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일을 못 하게 된 것이 결국은 아들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었다는 생각도 들어 오랫동안 남편과 대화하지 않았다고 한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전순옥 전 국회의원
[촬영 정한솔]
◇ 전태일 여동생 전순옥
-- 1970년 11월 13일 오빠 전태일 분신 소식은 어떻게 들었나.
▲ 당시 나는 16세였다. 서울 단성사 아래 양복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점심때 라디오에서 나오는 분신이라는 단어를 얼핏 들었다. 오빠가 분신자살한 줄은 전혀 몰랐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니 오빠 친구 김영문이 찾아와 오빠가 많이 다쳤다며 병원에 함께 가자고 했다. 명동에 있는 성모병원에 도착했을 때 오빠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졸도했다.
-- 오빠가 분신 전인 11일 밤에 집에 왔었는데, 분신을 암시하는 이야기를 안 했나.
▲ 나는 눈치를 전혀 못 챘다. 당시 야간 중학교에 다녔는데, 옷 공장에서 일하는 것으로는 학교 월사금을 모두 내지 못했다. 12일 아침에 오빠가 옷을 챙겨 입고 나가기에 같이 밥을 먹던 나는 쫓아 나가서 "오빠, 학교 월사금 언제 줄 거야?"라고 물었더니 오빠는 나의 등을 두들겨주면서 "며칠만 기다려주면 오빠가 꼭 해줄게"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오빠와 헤어졌다. 오빠한테 그런 말을 한 것이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고, 지금도 너무너무 미안하다.
-- 어머니 이소선은 자기 머리털을 팔아 근로기준법 책을 사는 데 필요한 돈을 전태일에게 줬다고 하는데.
▲ 오빠는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한테서 들었다. 젊은 시절 공장파업에 가담했던 아버지는 노동운동은 위험하니 나서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으나 오빠는 듣지 않았다. 오빠는 어머니한테 근로기준법 책을 사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해달라고 부탁했고, 어머니는 긴 머리털을 잘라 팔아서 돈을 줬다. 어머니는 나중에 그 일을 크게 자책하셨다. 자신이 그 책을 사줘서 아들이 결국 숨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 위의 내용은 2023년 1월4일 송고된 [삶] 전태일 여동생 전순옥 "노조전임자가 회사 월급 받는 것은 잘못"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들어있다.
전순옥은 분신자살을 결심한 오빠의 마음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거웠을 텐데, 그런 오빠한테 월사금을 마련해달라고 매달린 게 평생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어머니 이소선 역시 근로기준법 책을 구입할 돈을 준 것이 아들을 죽음으로 이끈 것이 아닌가 하고 고통스러워했다. 전태일과 김용균의 죽음에는 사회적 책임이 크다. 당시 정부, 국회, 사법부, 언론 등이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촬영 정한솔]
◇ 주사파의 대부였던 김영환
--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 그런 일은 수없이 많다. 북한 인권운동 과정에서 제대로 판단했다면 그 사람이 잡히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북한에서 워낙 인명 피해가 컸다.
-- 남한에 주체사상을 공급한 것은 후회하지 않나.
▲ 주체사상을 공급한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것에 대한 반성도 여러 차례 했다. 내가 쓴 친필 반성문 사진이 조선일보에 1면 톱으로 실린 적도 있다. 후회는 반성과 다르다.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가 폭발적으로 분출하던 시기였다. 주사파라는 명칭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흐름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흐름에서 내가 리더 역할을 한 게 오히려 다행일 수 있다. 그 흐름의 방향을 바꾸는데 데 내가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위의 내용은 2022년 12월19일 송고한 [삶] '강철서신' 김영환 "北민주화에 수십명 총살돼…고통스럽다"라는 제목의 기사에 들어갔다.
김영환은 서울대 법학과 시절, 한국에 주체사상을 공급한 것에 대해 사과는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당시 대학생 수준의 지성과 정보력, 판단력으로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제 그는 북한민주화 운동에 또다시 자기 몸을 던지고 있다. 그는 북한 동포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또 다른 학생운동권 출신 함운경은 서울대 물리학과 재학 중이던 1985년에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을 주동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나는 세계사적 흐름에서 사회주의가 이길 것으로 생각했던 수십억명 중 한 명이었다"면서 "인제 와서는 내가 진짜 어리석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시인 최영미
[촬영 이건희]
◇ 시인 최영미
-- 가장 후회되는 것은 무엇인가.
▲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여자로 태어난 것, 그리고 대한민국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몇 차례 떠날 생각을 했고 그런 기회가 있었는데,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 등단 이후 삶은 어떠했나.
▲ 한국에서 여성작가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남성들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여기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금방 알아듣는다.
-- 문단이 상대적으로 성폭력이 심한 것인가.
▲ 내가 등단할 때는 성희롱, 성추행이 관행이었다. 내가 무슨 행사를 마치고 나오면 뒤에서 누가 엉덩이를 만지기도 했다. 놀라서 뒤돌아보면 그는 그냥 씩 웃는다. 등단 초기에는 문인들과 술자리에서 어울리곤 했는데, 여성 문인을 기생으로 취급했다. 술을 따르라고 하고, 술이 넘치거나 부족하게 따르면 다시 따르라고 했다. 술 따르려고 시인이 됐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한국 사회에서 문단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위의 내용은 2023년 3월14일 송고한 [삶] 14년만에 산문집 낸 최영미 "90년대 女시인 기생취급 당했다"라는 제목의 기사에 들어간 내용이다.
최영미 시인은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힘들다고 했다. 한국의 남자 기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답답해했다. 범죄심리 전문가 이수정 교수도 인터뷰에서 자기 인생의 최대 역경은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태어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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