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를 격침하라
사상 최대의 해전으로 불리는 대서양 전투, 그 한가운데에서 벌어진 비스마르크 추격전단 9일 동안 덴마크 해협과 북대서양에서 전개된 치열한 공방전,3,500명 이상의 승조원이 목숨을 잃고, 독일과 영국의 두 강철 전함이4,700여 미터 해저로 침몰한 비극적 결말까지해전사에 극적인 싸움으로 기록된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전모를 밝힌다1939년 독일 해군(크릭스마리네)은 잠수함 유보트를 앞세워 영국과 미국의 호송선단을 공격하여 영국을 궁지로 몰고 갔지만 수상함은 영국 해군(로열 네이비)과 미 해군 연합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현대적 전함의 건조 계획을 세운 독일은 길고도 복잡한 건조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39년, 위대한 정치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딴 ‘비스마르크’ 전함의 진수식을 갖는다. 비록 영국이나 미국의 전함에 비해 월등히 크거나 화력이 우세하지는 않았지만, 비스마르크는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전함이었다. 당시 조건에서 최대한 크게 제작했을뿐더러 방어력과 화력, 속력의 세 요소가 거의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섬나라인 영국은 대서양을 통해 미국과 캐나다에서 물자를 수송받았다. 대서양을 횡단해 물자를 나르는 호송선단은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나 다름 없었다. 만약 이곳이 단절된다면 영국은 고립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점을 잘 아는 독일은 유보트로 공격해 영국의 물자 수송을 교란했다. 1940~1941년 초에 함선으로 통상파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자 독일 해군은 신예 전함 비스마르크를 중심으로 이 컨베이어 벨트에 복구 불가능한 타격을 입히고, 더 나아가 북대서양 해역에서 일시적으로 제해권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작전을 구상한다. 이른바 ‘라인위붕 작전’이다.1941년 5월 18일,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고텐하펜(현재 폴란드 그디니아)을 출발했다. 통상적인 훈련을 시행하는 척하며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를 지나 노르웨이 베르겐까지 나아간 후 대서양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스카게라크 해협을 무사히 통과할 무렵, 노르웨이 해안에 있던 한 청년이 독일 함선들을 목격했다. 레지스탕스 조직의 일원이었던 그는 즉각 이 상황을 보고했고, 얼마 후 영국 해군성에 정보가 들어갔다.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