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열한 수작
1.
동호회에서 알고 지내던, 친한 사람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경숙이라고 알죠? 그때 내가 빠에 데리고 왔던...."
"알죠. 거기 말고도 다른데서 한번 만나지 않았나요?"
동호회 생활을 하다보면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이 있고, 호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만남도 잦아지고 친해지게 되고 마치 친구처럼 지내곤 하는 일이 종종 생깁니다.
그 인연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은 단점도 있지만
만나고 지낼 때는 상당히 친하게 지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게 알게 된 아무개씨와 자주 만나던 어느날.
우리 조직에서는 보기 드물게 어떤 여자를 데리고 아지트로 삼고 있는
서울 어느 빠에 나타났습니다.
마누라일 리는 전혀 없고, 여자의 차림새나 행동거지가 전혀 개성이 없고
두드러지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나름대로 잘 사귀고 있는 사이 같았습니다.
두사람 사이가 매우 궁금했지만 나이 40살도 넘은 사람들이
떡도 치는 사이세요?, 맛은 있던가요?, 물은 많나요? 등등의 질문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궁금했지만 세상사가 다 그렇듯
그저 잘 만나면서 자주 떡도 치고 인생 얘기도 나누는 사이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그 아무개씨가 그 여자를 또 만난다고 함께 자리 하자고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뭐 시간은 있지만 두분 오붓하게 보내시지 왜 나를....."
대답 그대로 완곡하게 자리를 피하려 했습니다.
굳이 내가 낄 자리 같지도 않았고 오히려 내게 동석을 요구하는 제안 자체가 못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이어 나온 아무개씨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아니, 그 친구(당연히 여자를 말함)가
일산마루님 혼자 있는게 안돼 보인다고 친구 한명 데리고 나온다네요."
"......!"
갑자기 입이 찢어질 정도로 행복해졌습니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그렇다고 조금전까지 안나갈 것 같이 말한 놈이 바로 나간다는 말을 하자니
그것도 민망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뻔뻔하고 강하게 나가야 합니다.
여기서 체면 차리면 바보같은 짓입니다.
그래서 약간은 엉뚱하게, 한편으로는 매우 대범한 듯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먹어도 되는 여자입니까?"
"......."
수화기 너머의 아무개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전화였으니 망정이지 얼굴 마주보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상당히 불쌍한 표정을 지었을 거라는 생각이 번쩍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불쌍한 생각이 어떻게 대가리에 든게 그거 뿐이냐? 라는 식이 아니라
떡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하는 거지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란 말이냐....."로
생각해주길 바랄 뿐이었습니다.
2.
아무튼 저녁 약속을 했습니다.
누가 나올지 모르지만 일단 누군가 나오는 건 확실했습니다.
그리고 다 큰 사람들이 만나서 묵찌빠를 하겠습니까? FTA 관련 토론을 하겠습니까?
밥먹고 술마시다가 노래방 가고 그러다 눈맞으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좋은 인연이 생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은 정말 보기 드문 경우였습니다.
누가 내게 여자를 소개해준 적이 도대체 언제적 일인지 기억에도 가물거렸습니다.
보통은 채팅이나 인터넷 또는 예전의 전화방을 통해서 만났으니,
일부 취향이나 습성 또는 성격에 대해 알고 나가는 셈인데
이렇게 대면부터 하는 일은 좀처럼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쓰던 장기적 계획에서 벗어나
상당히 직접적인 효과를 노리는 작전을 쓰기로 했습니다.
이 작전은 나름대로 일리는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무척 비열하고 매우 졸열한 수작이었습니다.
돈, 외모, 말빨, 조명빨, 옷빨 등등 하나도 내세울 것이 없을 때 가장 강력한 방법은
지적인 면을 보여주는 겁니다. 지적인 면도 강하게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가끔, 아주 가끔 상황에 맞춰 쓰는 졸렬한 방법이 있습니다.
일단 여자를 만나고 대화를 합니다.
내용은 지성적으로 그러나 말투는 다분히 무식하게 합니다.
무식하다기 보단 과격한 표현을 많아 합니다. 욕도 가끔 섞어서 합니다.
1시간 정도 지날 때 전화 한통을 받습니다. 이미 약속된 전화입니다.
이때 그 전화를 영어로 받습니다. 나름대로 상당히 유창한 듯한 영어로 받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상대방에 대한 파악을 정확히 해야 합니다.
외국 유학파 박사 출신이라거나, 현직 영어학원 강사 등이면 잘 먹히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손해볼 것은 없습니다. 왜냐면 받은 전화 내용이 상당히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대충 세 문장입니다.
- 응... 아, 지금 비즈니스 미팅중이라 전화하기 곤란한데
- 뭐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지?
- 내가 미팅 끝나고 바로 전화해줄게.
딱 세문장입니다. 이 세 문장은 비교적 길면서도 세련되게 말해야 합니다.
물론 중간중간에 오 예스, 굿, 오케이 등등을 섞으면 더 효과적입니다.
그러니 영어 잘하는 사람이 앞에 앉아 있어도 그리 큰일은 없습니다.
절대로 책읽듯이 말하면 안됩니다. 그건 더 웃깁니다. 안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런데 이 좋은 계획이 왜 비열하고 졸렬하냐면 거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3.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자기 자랑 좀 한다고 졸렬하고 비열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영어를 잘하느냐?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 영어도 좆도 못하는 놈이 잘하는 척하는 셈이니 상당히 비열한 수작인 셈입니다.
이 방법은 사실 영어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어야 따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어도 못하는 내가 이런 비열한 수작으로 근근히 버티는 이유는
마치 영어를 잘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변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상대가 물어본다 치면 -
"영어 상당히 잘하시네요. 저도 잘하고 싶지만.... 어떻게 그렇게 잘해요?"
아는 문장만 말하듯 했으니 잘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나는 정말 아무 연고도 없는 외국에서, 그것도 혼자서 비행기를
무려 2번이나 놓친 적이 있습니다. (사실 3번인데 한번은 인천공항이니 패쓰!)
대충 이렇게 얘기하면 외국 여행도 좀 다니는 놈이 되고
그러니 외국말도 조금 할 줄 아는 놈이 됩니다.
그러면 졸지에 지성 점수가 획기적으로 올라가며, 앞서 보여줬던 무식한 말투가
졸지에 수준높고 세련된 매너로 바뀌어 버립니다.
가끔 이 수작으로 상당한 효과를 본적도 있습니다.
사실 이 방법은 오랜 연구 끝에 찾은 방법이 아니라 우연히 알게 된 방법입니다.
예전에 어쩌구 저쩌구 해서 알게 된 여자가 있었는데,
퇴근시간 사무실 앞에서 만나 저녁먹었습니다.
그러다 사무실에 무언가를 두고 온 사실이 생각나 사무실에 같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전화 벨이 울려서 받았는데 그게 외국에서 온 전화였습니다.
당시 그 사무실 번호로 우리나라 무슨 은행이냐는 전화가 자주 걸려왔습니다.
외국업무 번호인지 외국전화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전혀 당황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딱 두 문장입니다.
- 너 전화 잘못 걸었다.
- 여기 번호는 588-1233인데, 번호는 맞는데 여긴 XX뱅크가 아니다.
근데 이 두 문장을 비교적 유창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숫자 나오는 부분은 처음이라면 더듬더듬 읽겠지만 자주 하다보니
줄줄줄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여자 날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갑자기 지성포인트가 급상승하여 이후 만남이 상당히 원활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만남에서도 나름대로 필살기인 이 작전을 강행하기로 했습니다.
저녁 7시 약속인데 8시에 전화해달라고 또 다른 동호회원에게 부탁했습니다.
전화는 반드시 벨소리로 해두고 어디선가 걸려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또한 이짓할 때는 전화 받을 상대방이 장단을 잘 맞춰줘야 합니다.
일단 그래야 정말 대화하는 것처럼 말을 주고 받을 수 있고,
혹시 수화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커서 상대가 들을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쪽에서는 영어로 얘기하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 상대방이
뭐하는 지랄이래? 라는 투로 말하는 걸 남이 들었다고 생각해보면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일엔 절대로 친구 빛나리에게 부탁하지 않습니다.
4.
저녁이 되어 약속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일행들을 만났습니다.
초면이라 조금 낯설기는 했지만 얼굴이 익으니 곧 괜찮아 졌습니다.
주선한 사람보다는 미모가 괜찮아 보였고,
특히 몸이 가냘픈데 가슴만 큰 체형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기분이 째졌습니다.
대화도 그럭저럭 잘 되어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결정타를 먹여야 하는데, 그 아줌마가 10여 년전에 미국으로 이민갔다가
한국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째지다 분위기 조졌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충 영어로 받는 척하다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오는 척하며 마무리 해야지요.
큰 효과는 없겠지만 안하는 것보단 나을거라 생각하고 전화를 기다렸습니다.
1시간이 지나서 약속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당연히 처음엔 여보세요 하다가 당황하는 척하며 헬로라고 말하며
이미 약속된 비열한 수작을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잘하는 세 문장을 여전히 능수능란한 솜씨로 마무리지을 즈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전화해준 동호회 회원은 다국어에 능통한 사람인데
이 사람도 필리핀파라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을 이해하리라 믿고 소개받은 여자가 듣게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말하기 곤란하니.... 음.... 따갈로그로 할게. 잘 들어..."
이러면서 필리핀말을 시작했습니다.
필리핀 말을 잘하냐구요? 차라리 영어가 훨씬 낫겠지요.
그러면서 왜 필리핀 말을 선택했냐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주변 사람이 못알아 듣는다는 장점 때문이었습니다.
현지에서 주로 쓰는 말 몇가지를 문장처럼 이어 붙여 말하면 됩니다.
불어나 스페인어 등에 비해 조금 없어보이는 필리핀 말이긴 하지만
주변 사람은 2개 국어를 능숙하게 한다고 생각할 것이니
도움이 되면 되었지 나쁠 것 같진 않았습니다.
필리핀 말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아농 빵알랏 모?" ------> 이름이 뭐냐는, 기본적인 화화 문장입니다.
"왈라 빼라! 메뜨로 따요, 아꼬 빠라 디또!" ------>
왈라 빼라는 돈이 없다는 말로 거지가 따라다닐 때 쓰는 말이고,
메트로 따요는 택시 탔을 때 미터 켜고 달리자는 말입니다.
바가지가 극성인 필리핀 아닙니까?
아꼬 빠라 디또는 택시 미터 켜지 않으면 여기서 내리겠다는 현지 말입니다.
이건 관광가더라도 바가지 쓰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전화로 필리핀 말을 유창하게 하는 척하면서
돈없어, 미터켜고 가자! 여기서 내린다! 등등을 말하고 있는중이었습니다.
이거 말고도 여러가지 했습니다.
"이 여자 데리고 나가는 데 얼마야?"
"(깐또 딴따요!)우리 한번 빠구리나 칠까?" <------- 욕부터 배우게 되는 거 알죠?
"(이까우 마라밍 마간다 바바에) 우와~ 너 좆나리 예쁘다!" <------ 기본이죠?
등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도 금방 끝나니 알고 있는 단어를 막 이어붙여 문장처럼 얘기했습니다.
아꼬, 아노바얀, 바할라까.... 이어서 띠띠 빼빼 등이었습니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띠띠와 뺴빼인데 우리말로 하면 자지와 보지였습니다.
더 진도나가면 뽀롱날까봐 적당한 타이밍에 전화를 끊었습니다.
짧은 통화였지만 예상대로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그건 무슨 말이래?"
자리를 만든 동호회원이 물었습니다.
"아, 이건 필리핀 말인데... 사업 얘기가 있는데 남들이 알면 좀 곤란해서..."
"우와~ 필리핀말도 할줄 안단 말이야?"
"그냥. 아주 쪼금... 간단한 대화 정도."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거만한 동작을 한번 취하곤 더 거만한 자세로
아까 먹던 음식을 다시 먹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흐뭇한 느낌도 잠시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차라리 듣지 말았어야 하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여자를 소개해준 동호회원의 애인 경숙이의 목소리였습니다.
데리고 나온 친구, 나를 소개해주려는 그 친구에게 말하는 소리가
귀언저리살을 뜨겁게 불태우며 메아리 치고 있었습니다.
"어머, 너도 잘 알겠다. 미국 갔다가 남편이 필리핀 발령받아
마닐라에서만 10년 살다 왔다며?"
"마닐라에서만 10년 살다 왔다며??"
- 일산마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