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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내 인생!


글을 쓰기 전에 [잠깐 경고! 이 글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잘난 체
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즉, 이 글은 여러 사람에게 염장을 지를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을 다 읽고 내게 돌을 던질 분들은 지금
읽기를 중단하기 바랍니다. 반면에 "저 아저씨가 얼마나 우울하
고 속이 상했기에 저런 글을 쓸까?"하고 동정해주실 분은 계속
읽어주기 바랍니다.]


우선 나는 자랑스런 S대 영어교육과를 나왔다(중학생 때부터 나
는 영어교사가 될 결심을 굳혔고, 당시 가정형편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입학할 때, 5000원 정도 냈고, 졸업할 때 10000
원 정도 냈다. 당시 가정교사를 하면 매달 2만원 정도 받았다.

나는 대학 2년을 마치고 사병으로 육군에 입대했다. 수색 훈련소
에서 받은 내 군번은 809번이다. 훈련을 마치고 광주에 가서 1개
월간 교육을 받고, 최전방에서 몇 개월 근무했는데, 무척 힘들었
다. 그래서 월남 전쟁터에 자원했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하룻강
아지 범 무서운 줄 몰랐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춘천에서 옴리
까지 6시간 정도 행군한 기억이 인상적이었다. 떠불빽을 짊어지
고 백치령을 넘는데 정신을 바짝 차렸지만 수없이 넘어졌다.

백마사령부 통신중대에서 근무했는데 나는 총을 단 한발도 쏘아
본 기억이 없다. 내가 하는 일은 영어 번역, 통역 그리고 영어회
화 가르치기, 영어 서류작성하기, 귀국하는 장교들의 박스를 채워
주기 위해 미군부대 PX에서 냉장고, 세탁기 같은 것 사주기 등
이었다. 당시는 월남에서 현지 제대하여 미국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큰 희망이었다. 나는 밤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바빴지만
적지 않은 돈이 모였다. 제대했을 때 50여만을 찾았는데 엄청난
거액이었다. 당시 육군 일등병의 봉급은 330원이었다.

1972년도 가을에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는데 처음부터 고3을 가르
쳤다. 그들의 나이는 지금 50대 초반이다. 당시 고등학교 교사의
초봉은 5만원이 되지 않았다. 보나스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어떤
나이든 선생님이 이런 한탄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대학에
보냈는데, 나는 내 아들을 대학에 보낼 수 없다."

나는 70대 중반에 교육위원회에 "잠시 교직을 떠나겠다."는 편지
를 보내고 현대건설에 들어갔다 (당시는 교사 의무 기간이 3년이
었다). 입사 시험 때 나는 영어에서 1문제 틀렸다. 당신 현대건설
은 지금의 중소기업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기껏해야 인도네시아,
태국, 괌 지역에서 도로 건설을 할 뿐이었는데 번번이 손해만 보
았다. 솔직히 당시 현대건설에서 영어를 나만큼 하는 사람은 드
물었다. 중동 붐이 한창이었는데 현대건설은 아직 발판도 마련하
지 못했다. 이란에 진출했는데 실패했다. 나는 현대건설이 발전하
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바레인 드라이도크 건설
공사에 사전 입찰 자격 서류를(pre-qualification) 거의 내가 만들
어서 입찰자격을 얻어냈고 나도 그 공사에 참여했다. 영어로 수
백 페이지가 되는 책으로 된 서류를 만드는 것은 장난이 아니었
다. 일요일도 없고 성탄절까지 밤새도록 일했다. 세계적인 건설회
사들과 경쟁을 벌렸기 때문에 솔직히 뻥과 구라를 안 칠 수가 없
는 입장이었는데 다행히 나는 그런데 소질이 있었다.

만 2년 후, 하는 일이 너무 힘이 들었고, 나의 노력과 공로에 무
관심한 현대건설을 그만 두고 다시 교직으로 돌아왔다. 유신체제
였던 당시 고등학교는 정말 썩을 데로 썩었다. 촌지는 관행이고
수학여행에서도 교사들이 적지 않은 돈을 떼어먹었다. 그래도 목
구멍이 포도청이라 나는 고등학교에서 17년 정도를 견디었다. 그
동안 담임을 해본 것은 세 번뿐이다. 나는 다행히 대입 영어 참
고서를 여러 권 써서 그중 두 권이 약간 히트해서 돈을 좀 벌었
다.

결국 진절머리나는 학교를 떠난 입시학원 강사가 된 것은 1990년
이었다. 힘과 스트레스는 학교보다 덜 들었고 월수입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았다. 낮에는 시간당 5만원, 밤에는 15만원정도였
다. 출제비, 원고료, 인세 등을 합하면 월수입이 1000만이 넘었다.
장난끼가 많은 원장은 돈을 은행으로 보내지 않고, 수표로 주지
도 않고 만원권을 쇼핑백에 넣어주었다. 집에 가서 돈을 쏟아놓
으면 방바닥에 수북하게 쌓였다. 나는 월급과 보너스에서 한푼도
떼지 않고 모두 아내에게 바쳤다. 그래도 내 지갑 속에는 언제나
수표가 여러 장 들어 있었다.

그러던 나는 출판사를 해서 1억원 정도 날렸다. 학원강사를 집어
치우고 수학을 가르치는 친구와 입시학원을 한다고 2억원 정도
날렸다. 주식투자로 1억원 정도 날렸다. 아내가 자기 친구에게
5000만원 정도 빌려주고 떼었다. 나는 졸지에 백수가 되었고 심
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굴러다니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 나는 여행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젊었을 때, 방랑자처럼 살았다. 군대에 있을 때 충청도와 제주도
를 제외하고 모든 도에서 근무했었다. 그리고 순전히 먹고살기
위해 싫지만 억지로 세계 여행을 많이 했다.

오직 교직생활만을 했던 내 친구들은 지금 모두 중고등학교 교장
들이다 (교감은 없다). 나는 지금 내 친구가 교장으로 있는 고등
학교(남녀공학)에서 기간제 영어교사를 하고 있다. 아마 교사 정
년 퇴직 62세까지는 할 것이다. 고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끝으로 서울공대를 졸업한 우리 큰아들은 기술직 5급 공무원이
고,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작은아들은 7급 건축직 공무원
이다.

나는 내 인생이 자랑스럽다. Let it be (어떤 것이라도 회피하거나
부인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가 나의 인생철학이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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