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번 째 부인!, 양공주가 된 누나
나는 육이오 동란이 벌어지기 3년 전에 태어났다. 그런데 전쟁 전에, 그러니까 3세 전에 경험했고, 보았던 몇 가지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때 우리 부모는 해방 때, 일본 사람이 살았던 집을 싼값으로 샀다. 그 집에는 나무로 만든 목간통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나를 안고 뜨거운 물 속으로 들어갔을 때 질겁을 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전쟁 후 그 지역의 모든 집처럼 그 집은 불이나서 완전히 폐허로 변했다). 밥상 위 접시에 떡을 집어먹었는데 달콤한 설탕 맛을 기억한다. 다다미 방에서 내 또래의 애와 기어서 베개 같은 것을 가져오는 시합을 벌렸던 기억도 난다. 그때 나의 엄마와 다른 애의 엄마가 자기 아들이 이기라고 요란하게 응원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나무를 썰고 깎던 일도 생각난다. 그러나 당신의 기억은 연속된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장면들이다.
포탄소리와 비행기에서 기총 소사할 때 지하실에 숨었던 어른들이 벌벌 떠는 모습, 피난을 가다 구루마에서 떨어졌던 기억, 엄마가 불타버린 집 마당에 묻어두었던 사발, 접시, 숟갈 등을 파내며 우시던 장면 등은 비교적 선명하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입학하기 2, 3년 전쯤이다. 당시 내가 살았던 지역은 거의 모두 흙과 판자로 만든 소위 하꼬방이었다. 거리에 멀쩡한 남자들은 드물었고, 환자, 상이군인, 정신이상자들, 특히 거지들이 아주 많았다. 한 번은 친구 집에 갔었는데 사방 벽에 새빨간 꽃무늬들이 것이 아주 많았다.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말했더니 다시는 그 친구 집에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 친구 아버지는 폐결핵으로 각혈을 많이 하다 죽었던 것이다.
당시 내 또래 사내애들은 딱지치기(쑤구, 덴스 등 일본말을 사용하면서), 구슬치기, 잣치기 등을 많이 했고, 여자애들은 공기놀이, 고무줄넘기 등을 즐겼다. 그런데 나와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여자애(이름은 분명히 신혜순이었다.)는 늘 같이 어울려 놀았다. 그애는 다른 여자애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무척 예쁘고, 착했고, 나를 무척 따랐다. 그래서 같이 제법 멀리 떨어진 공원과 바닷가에도 갔었고, 동네에서는 소꿉장난을 많이 했다. 주로 미군부대에서 나온 여러 가지 종류의 통조림 깡통, 상자, 병, 그리고 조개껍질 등은 훌륭한 장난감들이었다. 우리는 어른 부부들의 흉내를 곧잘 했다.
"여보, 밥하게 물 좀 길어 오세요. 오늘은 아주 맛있는 거 해줄게요."
"나는 땔나무 구하러 갔다 올게."
"저녁을 먹었으니까 일찍 등잔불(당시는 대개 석유를 사용했는데 귀했다)을 끄고 자요."
"자기 전에 뽀뽀해야지."
당시는 눈이 많이 왔고 지붕이 양철로 되었기 때문에 고드름이 많아서 아주 배가 고팠을 때, 우리는 눈과 고드름을 먹은 적도 있었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는데, 며칠 동안 혜선이가 보이지 않았다. 보고싶고 궁금해서 그녀의 집으로 갔다. 대개 낮에는 그녀의 부모들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게꾼이었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콩나물을 팔았다). 집안은 조용했고 그녀의 이름을 여러 번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돌아서려는데 방안에서 가벼운 신음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혜선이가 아주 두꺼운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방바닥은 차가웠다. 한쪽 구석에는 물이 들어있는 사발이 깨져있었다.
바짝 마르고 창백해진 혜선이는 일어나지도 목하고 이불 속에 누운 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나 아파서 못 일어나. 오빠가 이불 속으로 들어와. 우린 부부잖어....."
나는 두터운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그녀 옆에 누워 서로 끌어안았다 (전에도 공원 호젓한 곳에서 소꿉장난을 하면서 끌어안고 누운 적이 많았다). 그녀는 한참 재미나게 종알거리다 갑자기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의 몸에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여보, 목이 말라요. 고드름이 먹고 싶어요."
나는 집으로 달려가 어제 저녁에 먹었던 빵 2개와 수돗물(당시 그 지역에 수도는 드물었는데 다행히 우리 집에는 있었다)을 떠서 그녀에게 갖다주었다. 그녀는 빵과 물을 다 마시고 말했다. "여보, 고마워요....나 먼저 잘게요."
그날 집에 돌아온 후 나도 몸에서 열이 나고 머리가 아파 집에서 여러 날 누웠다. 겐게락이라는 노란색 약을 먹었는데 엄청나게 썼다. (지금 생각하니 미군들이 사용하는 키니네로 만든 약이었던 것 같다) 병기운이 가시자마자 나는 혜선이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혜선이네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아, 너 아직 몰랐구나. 혜선이는 네가 아프던 날 저녁에 죽었단다. 홍역으로...."
지금도 나는 그녀의 착하고 예쁜 얼굴을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나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면 크게 잘못된 것일가. 어쨌든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더라면 우리는 진짜 부부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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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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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방 뿐만 아니라 네이버3의 다른 게시판에서도 3연짱은 암묵적 금기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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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 3, 4학년 때만해도 거리와 동네에 밥을 얻어먹으려는 거지들이 흔했다. 많은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이었다. 나도 죽으로 끼니를 때웠던 기억이 있다. 당시 저축의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불타고 다 깨어진 조국 강산을 그대여 다시 한번 바라보아라. 저축은 우리의 힘, 내일의 희망......"
내가 살던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미군 부대가 있었다. 끼니 때가 되면 우리 어린 꼬마들은 미군부대 철조망 주위로 모였다. 그리고 미군만 보면 "헬로, 기브 미 껌, 프리스!"라고 외쳤다. 식사를 마친 미군들은 짬빵통에 먹다 남은 음식들을 쏟으며 우리를 보고 웃으며 소리를 지르거나 손을 흔들었다. 어떤 미군들은 철조망을 통해 빵, 통조림, 우유, 오렌지 등을 아이들에게 건네주었다. 어떤 미군은 통조림 같은 것을 높이 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꼬마들이 그것을 잡으러 달려가는 모습을 즐겼다. 겁이 많은 나는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했고, 멀리 떨어져서 구경만 했는데 한번은 통조림 하나가 내 앞으로 굴러와 주운 적이 생각난다. 우리는 학교에서 나누어주는 우유가루를 많이 먹었는데 교실에서 설사하는 애들도 있었다.
당시 학교 숙제 중에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쥐꼬리 10개씩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그 시절 쥐와의 전쟁은 대단했다. 쥐가 먹어치우는 식량이 엄청나다며 쥐잡기에 열을 올렸다. 어디에나 쥐덫이 설치되었고, 일제히 쥐약을 살포하는 날이 많았다. 나는 죽은 쥐의 꼬리는 자르는 것도 못할 정도로 마음이 약했다. 그래서 나는 학급 친구들에게 다른 숙제들을 해주고 그들은 내게 쥐꼬리를 나누어주었다.
눈이 많이 내렸던 날 저녁이었다. 당시에는 집안에 변소가 없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동네 공동변소가 있었다. 그곳을 지나는데 커다란 쥐 한 마리가 보였다. 내가 접근했는데도 그 쥐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아마 늙고 병든 쥐였던 것 같다. 갑자기 오기가 생긴 나는 큼지막한 각목으로 쥐를 내리쳤다. 각목이 살짝 빗나가자 그때야 쥐는 공동변소 뒤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약이 오른 나는 쥐의 뒤를 쫓아 달려갔다. 그때, "엄마야!"하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공동변소 뒤에서 일을 보고 있던 S 누나였다. 그녀는 당시 중학교 3년 생이었고 그녀의 부모가 시장에서 기름 짜는 일을 하기 때문에 기름집 딸로 통했다. 뒤로 나둥그러진 누나를 일으켜주려고 했는데 그녀는 "저리 비켜!"하고 소리쳤다. 그녀는 아직 속옷이 벗겨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S 누나와 나는 이상하게 가까워졌다. 키가 늘씬하고 서구적인 미모를 지닌 S 누나를 나를 무척 좋아했고 그녀도 나를 귀여워했다. 그 누나는 등록금을 제 때에 내지 못해서 수업 중간에 집으로 쫓겨오거나 아예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때 누나는 집에서 혼자 영어 사전을 가지고 미국 만화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종이 봉지가 미국 만화와 잡지들로 만들어졌다.) 누나는 내게 만화 내용을 설명해주었는데 무척 재미있었다. Little Lulu, Donald Duck, Mickey Mouse, Woody Woodpecker 등이 생각난다.
그녀는 내게 영어를 가르쳐주고, 나는 집에서 빵과 고구마를 가져다 누나에게 주었다. 한번은 둘이서 아주 야한 잡지를 보았다. 남녀가 성교를 하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나는 얼굴이 붉어져서 돌아섰는데 누나는 재미있다는 듯 계속 보면서 깔깔 웃기까지 했다. "예, 이거 나쁜 거 아냐! 남자하고 여자하고 사랑하는 거야. 너 고추 딱딱해졌지? 누나가 한번 만져볼까?"
어느 여름 날 밤, 갑자기 누나는 나를 데리고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는 공원으로 갔다. 우리는 살금살금 걸어서 불이 환하게 켜진 미군 천막으로 접근했다.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10여명 정도의 발가벗은 미군들과 한국 여자들이 서로 껴안고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후 1년 정도 지난 어느 날부터 누나는 미군들이 먹는 음식들(주로 C 레이션이라는 것)을 내게 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골목에 쓸어져 있는 누나를 보고 크게 놀랐다. 그녀의 부모에게서 심하게 매를 맞고 쫓겨난 것이었다. 그녀의 코와 입에 핏자국이 있었고, 허리와 다리가 아파서 일어서지도 못했다. 그녀를 나를 보고 중얼거렸다. "시팔, 굶어죽는 거보다 낫지....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 때려....얘, SJ야, 이제 앞으로 누나를 못 보게 될 거다. 너는 공부 잘하고 똑똑하니까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며칠 후부터 그녀는 동네에서 사라졌다. 동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가 "어린 양공주"가 되었다고 했다.
그후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어느 날, 통학 열차 안에서 매우 야하지만 아름다운 젊은 여자를 만났다. 그녀 옆에는 흑인 미군 병사가 있었다. 사람들은 흘깃흘깃 그쪽을 보고 손가락질까지 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서서히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왔다. 그리고 소리쳤다, "야, 너 SJ지? 나 모르겠니?" 나는 당장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내가 입고 있던 교복(당시는 옷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생들도 대개 교복을 입었다)을 보고, 그녀가 말했다. "난 네가 그 대학에 다닐 줄 알았어. 영어과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 S 누나는 한국이 싫어서 곧 미군병사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갈 거라고 했다. 그때 그녀는 내게 1달러 짜리 다섯 장을 주면서 "난 네 생각이 많이 날거다. 너도 가끔 누나 생각 이 나겠지?...." 나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문득 S 누나 생각이 난다. (이상입니다.)
포탄소리와 비행기에서 기총 소사할 때 지하실에 숨었던 어른들이 벌벌 떠는 모습, 피난을 가다 구루마에서 떨어졌던 기억, 엄마가 불타버린 집 마당에 묻어두었던 사발, 접시, 숟갈 등을 파내며 우시던 장면 등은 비교적 선명하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입학하기 2, 3년 전쯤이다. 당시 내가 살았던 지역은 거의 모두 흙과 판자로 만든 소위 하꼬방이었다. 거리에 멀쩡한 남자들은 드물었고, 환자, 상이군인, 정신이상자들, 특히 거지들이 아주 많았다. 한 번은 친구 집에 갔었는데 사방 벽에 새빨간 꽃무늬들이 것이 아주 많았다.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말했더니 다시는 그 친구 집에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 친구 아버지는 폐결핵으로 각혈을 많이 하다 죽었던 것이다.
당시 내 또래 사내애들은 딱지치기(쑤구, 덴스 등 일본말을 사용하면서), 구슬치기, 잣치기 등을 많이 했고, 여자애들은 공기놀이, 고무줄넘기 등을 즐겼다. 그런데 나와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여자애(이름은 분명히 신혜순이었다.)는 늘 같이 어울려 놀았다. 그애는 다른 여자애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무척 예쁘고, 착했고, 나를 무척 따랐다. 그래서 같이 제법 멀리 떨어진 공원과 바닷가에도 갔었고, 동네에서는 소꿉장난을 많이 했다. 주로 미군부대에서 나온 여러 가지 종류의 통조림 깡통, 상자, 병, 그리고 조개껍질 등은 훌륭한 장난감들이었다. 우리는 어른 부부들의 흉내를 곧잘 했다.
"여보, 밥하게 물 좀 길어 오세요. 오늘은 아주 맛있는 거 해줄게요."
"나는 땔나무 구하러 갔다 올게."
"저녁을 먹었으니까 일찍 등잔불(당시는 대개 석유를 사용했는데 귀했다)을 끄고 자요."
"자기 전에 뽀뽀해야지."
당시는 눈이 많이 왔고 지붕이 양철로 되었기 때문에 고드름이 많아서 아주 배가 고팠을 때, 우리는 눈과 고드름을 먹은 적도 있었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는데, 며칠 동안 혜선이가 보이지 않았다. 보고싶고 궁금해서 그녀의 집으로 갔다. 대개 낮에는 그녀의 부모들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게꾼이었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콩나물을 팔았다). 집안은 조용했고 그녀의 이름을 여러 번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돌아서려는데 방안에서 가벼운 신음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혜선이가 아주 두꺼운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방바닥은 차가웠다. 한쪽 구석에는 물이 들어있는 사발이 깨져있었다.
바짝 마르고 창백해진 혜선이는 일어나지도 목하고 이불 속에 누운 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나 아파서 못 일어나. 오빠가 이불 속으로 들어와. 우린 부부잖어....."
나는 두터운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그녀 옆에 누워 서로 끌어안았다 (전에도 공원 호젓한 곳에서 소꿉장난을 하면서 끌어안고 누운 적이 많았다). 그녀는 한참 재미나게 종알거리다 갑자기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의 몸에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여보, 목이 말라요. 고드름이 먹고 싶어요."
나는 집으로 달려가 어제 저녁에 먹었던 빵 2개와 수돗물(당시 그 지역에 수도는 드물었는데 다행히 우리 집에는 있었다)을 떠서 그녀에게 갖다주었다. 그녀는 빵과 물을 다 마시고 말했다. "여보, 고마워요....나 먼저 잘게요."
그날 집에 돌아온 후 나도 몸에서 열이 나고 머리가 아파 집에서 여러 날 누웠다. 겐게락이라는 노란색 약을 먹었는데 엄청나게 썼다. (지금 생각하니 미군들이 사용하는 키니네로 만든 약이었던 것 같다) 병기운이 가시자마자 나는 혜선이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혜선이네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아, 너 아직 몰랐구나. 혜선이는 네가 아프던 날 저녁에 죽었단다. 홍역으로...."
지금도 나는 그녀의 착하고 예쁜 얼굴을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나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면 크게 잘못된 것일가. 어쨌든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더라면 우리는 진짜 부부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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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입니다.
위의 게시글을 아래로 합칩니다.
경방 뿐만 아니라 네이버3의 다른 게시판에서도 3연짱은 암묵적 금기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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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 3, 4학년 때만해도 거리와 동네에 밥을 얻어먹으려는 거지들이 흔했다. 많은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이었다. 나도 죽으로 끼니를 때웠던 기억이 있다. 당시 저축의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불타고 다 깨어진 조국 강산을 그대여 다시 한번 바라보아라. 저축은 우리의 힘, 내일의 희망......"
내가 살던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미군 부대가 있었다. 끼니 때가 되면 우리 어린 꼬마들은 미군부대 철조망 주위로 모였다. 그리고 미군만 보면 "헬로, 기브 미 껌, 프리스!"라고 외쳤다. 식사를 마친 미군들은 짬빵통에 먹다 남은 음식들을 쏟으며 우리를 보고 웃으며 소리를 지르거나 손을 흔들었다. 어떤 미군들은 철조망을 통해 빵, 통조림, 우유, 오렌지 등을 아이들에게 건네주었다. 어떤 미군은 통조림 같은 것을 높이 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꼬마들이 그것을 잡으러 달려가는 모습을 즐겼다. 겁이 많은 나는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했고, 멀리 떨어져서 구경만 했는데 한번은 통조림 하나가 내 앞으로 굴러와 주운 적이 생각난다. 우리는 학교에서 나누어주는 우유가루를 많이 먹었는데 교실에서 설사하는 애들도 있었다.
당시 학교 숙제 중에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쥐꼬리 10개씩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그 시절 쥐와의 전쟁은 대단했다. 쥐가 먹어치우는 식량이 엄청나다며 쥐잡기에 열을 올렸다. 어디에나 쥐덫이 설치되었고, 일제히 쥐약을 살포하는 날이 많았다. 나는 죽은 쥐의 꼬리는 자르는 것도 못할 정도로 마음이 약했다. 그래서 나는 학급 친구들에게 다른 숙제들을 해주고 그들은 내게 쥐꼬리를 나누어주었다.
눈이 많이 내렸던 날 저녁이었다. 당시에는 집안에 변소가 없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동네 공동변소가 있었다. 그곳을 지나는데 커다란 쥐 한 마리가 보였다. 내가 접근했는데도 그 쥐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아마 늙고 병든 쥐였던 것 같다. 갑자기 오기가 생긴 나는 큼지막한 각목으로 쥐를 내리쳤다. 각목이 살짝 빗나가자 그때야 쥐는 공동변소 뒤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약이 오른 나는 쥐의 뒤를 쫓아 달려갔다. 그때, "엄마야!"하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공동변소 뒤에서 일을 보고 있던 S 누나였다. 그녀는 당시 중학교 3년 생이었고 그녀의 부모가 시장에서 기름 짜는 일을 하기 때문에 기름집 딸로 통했다. 뒤로 나둥그러진 누나를 일으켜주려고 했는데 그녀는 "저리 비켜!"하고 소리쳤다. 그녀는 아직 속옷이 벗겨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S 누나와 나는 이상하게 가까워졌다. 키가 늘씬하고 서구적인 미모를 지닌 S 누나를 나를 무척 좋아했고 그녀도 나를 귀여워했다. 그 누나는 등록금을 제 때에 내지 못해서 수업 중간에 집으로 쫓겨오거나 아예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때 누나는 집에서 혼자 영어 사전을 가지고 미국 만화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종이 봉지가 미국 만화와 잡지들로 만들어졌다.) 누나는 내게 만화 내용을 설명해주었는데 무척 재미있었다. Little Lulu, Donald Duck, Mickey Mouse, Woody Woodpecker 등이 생각난다.
그녀는 내게 영어를 가르쳐주고, 나는 집에서 빵과 고구마를 가져다 누나에게 주었다. 한번은 둘이서 아주 야한 잡지를 보았다. 남녀가 성교를 하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나는 얼굴이 붉어져서 돌아섰는데 누나는 재미있다는 듯 계속 보면서 깔깔 웃기까지 했다. "예, 이거 나쁜 거 아냐! 남자하고 여자하고 사랑하는 거야. 너 고추 딱딱해졌지? 누나가 한번 만져볼까?"
어느 여름 날 밤, 갑자기 누나는 나를 데리고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는 공원으로 갔다. 우리는 살금살금 걸어서 불이 환하게 켜진 미군 천막으로 접근했다.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10여명 정도의 발가벗은 미군들과 한국 여자들이 서로 껴안고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후 1년 정도 지난 어느 날부터 누나는 미군들이 먹는 음식들(주로 C 레이션이라는 것)을 내게 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골목에 쓸어져 있는 누나를 보고 크게 놀랐다. 그녀의 부모에게서 심하게 매를 맞고 쫓겨난 것이었다. 그녀의 코와 입에 핏자국이 있었고, 허리와 다리가 아파서 일어서지도 못했다. 그녀를 나를 보고 중얼거렸다. "시팔, 굶어죽는 거보다 낫지....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 때려....얘, SJ야, 이제 앞으로 누나를 못 보게 될 거다. 너는 공부 잘하고 똑똑하니까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며칠 후부터 그녀는 동네에서 사라졌다. 동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가 "어린 양공주"가 되었다고 했다.
그후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어느 날, 통학 열차 안에서 매우 야하지만 아름다운 젊은 여자를 만났다. 그녀 옆에는 흑인 미군 병사가 있었다. 사람들은 흘깃흘깃 그쪽을 보고 손가락질까지 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서서히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왔다. 그리고 소리쳤다, "야, 너 SJ지? 나 모르겠니?" 나는 당장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내가 입고 있던 교복(당시는 옷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생들도 대개 교복을 입었다)을 보고, 그녀가 말했다. "난 네가 그 대학에 다닐 줄 알았어. 영어과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 S 누나는 한국이 싫어서 곧 미군병사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갈 거라고 했다. 그때 그녀는 내게 1달러 짜리 다섯 장을 주면서 "난 네 생각이 많이 날거다. 너도 가끔 누나 생각 이 나겠지?...." 나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문득 S 누나 생각이 난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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