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야설) 야도[夜盜] - 1
인연의 시작.
월드컵의 광풍을 두 달여 남겨 놓고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사방에 들썩이던 그해 초여름, 그 어수선한 열기 속에 들떠있는 서울의 한 터미널에서 그 아이를 처음 만났다.
이젠 추억 속으로 잊혀가는 벙개.
다들 색안경 쓰고 무슨 위험한 만남인 것처럼 잔소리하지만, 적어도 나이트 클럽에서 부킹이나 급 만남으로 원나잇을 보내는 것 보다는 훨씬 건전하다고 변명하고 싶어진다.
어차피 실망을 각오하는 만남. 미니 홈피에 올려진 사진 몇 장으로 그 생김새 정도는 확인했지만, 뽀샵 공주를 구분해 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젠 추억 속으로 사라진 벙개를 스물아홉이나 되어서 몇 년 만에 하고 있다는 감회에 빠지게 된다.
자그마치 두 달!
시도 때도 없이 모니터 앞에 앉아서 그 녀석을 상대하던 시간. 지독한 열병에 시달렸던 것 같다.
이젠 꽤 오래된 친구를 기다리는 기분까지 든다.
몇 시간 전에 보았던 사진 속 얼굴을 떠올리면서, 터미널 대합실을 오가길 십여 분, 멀리서 나를 알아보고 웃어 보이는 소녀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하늘하늘 무릎 위를 날리는 연한 자주색 롱스커트에 아래 반쯤 해진 운동화 위로 새하얀 발목이 부러질 듯 가늘다.
한 걸음씩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오면서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순백의 면티 어깨 위로 찰랑이는 네추럴 웨이브 머리 스타일과 단정해 보이는 무테안경을 쓰고 있는 얼굴. 귀여운 얼굴로 살짝 웃어 보이는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창백해 보인다.
무테안경 너머로… 말없이 웃는 내 얼굴을 살피는 아이, 너무 앳되어 보여서 나이를 어림잡아 보아도 이건 너무 애 같다. 설마 고딩? 순간 착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난 이미 이 소녀의 미니홈피와 전공 학부 서버까지 접속해서 나름의 신원조회까지 마친 상태였다.
`괜한 기우에 당황하다니.`
피식… 웃음이 나오고 자꾸 랩실 두목 격인 선배 조교의 투정 어린 조언이 떠오른다.
"자식! 발정기냐? 요즘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댄데 아직도 번개하냐? 얼마나 굶주렸다고, 이젠 소개팅도 모자라서. 쯧쯧. 정신 차려 짜샤! 번개같이 만나서, 폭탄 확인하고 번개같이 헤어지는 거야. 안 봐도 훤하지만 빨리 끝내면, 전화 보고하는 거 알지?"
길고도 힘들었던 전파공학과 Earn Master 코스 석사 졸업논문 패스를 축하하기 위한 쫑파티 자리를 마다하고, 한걸음에 터미널까지 왔는데, 이제 막 실연당했다는 이 아이.
예상외로 그동안 품었던 과거 년들과는 격이 다르다!
투명 메이크업인지도 모르겠지만 조그마한 얼굴 위로 화장 한 점 없이 새하얀 피부. 그래도 진한 눈썹과 선명한 얼굴 윤곽에 앳돼 보이는 저 청순함이란!
나를 알아보고 조금 수줍은 얼굴로 깍듯하게 인사하는 은정의 귀여운 외모에 만족스러웠을까. 나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나온다.
어딘지 모르게 보이는 피곤함이 보이지만, 그건 지난밤에도 게임과 채팅으로 함께 날밤을 새웠기 때문일 것이다.
"동은 오빠? 아! 맞다. 안녕하세요?"
"응. 은정이? 방가 방가…"
유치하지만, 지난 새벽에 하던 인사 그대로 대답하게 된다. 그래도 정말 반갑게 손목까지 흔들어 주면서 살인적인 미소도 잊지 않았다.
"푸훗! 어쩜 인사도 똑같아요."
"그럼! 오늘 아침까지 같이 있었는데 몇 시간 만에 사람이 변하나? 저녁 시간 다 됐는데 점심은 먹고 올라 온 거야?"
"맞다. 몇 시간 안 됐네요. 히히. 점심, 당근 안 안 먹었죠. 배고파요. 밥 사주실 거죠?"
꽤 오래 알고 지낸 동생처럼 즐겁게 조르는 미소 속에 뭐라 딱 꼬집을 수 없는 상념을 담고 있다.
"뭐야? 집에 왔다면서 굶고 다녀?"
"여기까지 왔는데 오빠가 사주시는 거죠? 비싼 거로. 헤헷…"
"이런, 차비는 있지? 학교 내려가면서 설마 생활비 없다고, 나한테 늘어 붙는 거 아니겠지?"
"치이. 콱 늘어 붙어 버릴까 보다. 책임진다고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남자가 치사하게. 저, 전화 한 통화면 당장 달려 올 사람들 많거든요?"
"하핫! 아냐, 아냐. 그게 아니라, 이쁜 딸래미가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집에서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안 챙겨주셨어?"
"딸래미? 푸후훗… 웃겨요. 말하는 거 보면, 정말 아저씨 같아."
"아, 그 말은 내 외모는 출중한데, 말투가 좀 그렇다는 얘기지?"
"네?"
반응은 예상했지만, 얘가 정말 당황스러운 얼굴로 흘겨본다. 순진하다.
"왜? 아닌가?"
"지금 그걸 진짜처럼 말하는 거예요? 와, 완전 좌절이다!"
"흠, 그래? 난, 지금껏 그런 실망감 안겨 준 적이 없는데?"
"어머? 정말 자신만만하시네요. 오빤 벙개 많이 했나 봐요. 그렇죠?"
"난 오늘 첨인데, 은정인 꽤 해봤나 봐?"
"호홋! 거짓말쟁이. 난 전에 말했잖아요. 첨이라고."
"글쎄, 난 안 믿어지는데."
"치! 진짜라니까요. 못 믿으시네."
"뭐.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믿어 줘야지."
"믿어 주다니요. 진짜라니까. 고속버스 타면서부터 여기 올 때까지 얼마나 떨렸는데…"
혹 떼려다가 혹을 붙여 주니까 순진하게 해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도 쉽게 헌팅되서 넘어오는 흔한 여자 취급받는 건 싫었는지 새침하게 입술까지 베어 물고, 정말 토라진 얼굴로 노려본다.
그러고 보니 헌팅이라고 단정 지을 만큼 특별한 만남을 약속한 것도 없다.
그러다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거리에서 방황하는 가출 소녀를 대하듯 팔짱을 끼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은정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아. 진짜예요."
역시 금세 먹힌다. 진짜 믿어 달라는 애원처럼 나를 바라보는 저 진심 어린 눈동자가 고양이 같다.
"하하!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 의미에서 밥 사면 되지?"
"사람을 어떻게 보고. 당근 사야죠! 친구들 다 불러서 확 벗겨 먹을까 보다…"
"야, 그러고 보니 은정이 무섭네? 집에 왔다면서 밥도 안 먹고, 이 멋있는 오라버니 벗겨 먹으려고 작정하고 나왔단 말이지?"
"내가 미쳐요. 집에 들러서 왔으면 제가 여기 있을 수 있었겠어요?"
"그럼, 집에도 안 갔어? 아, 그렇구나. 여기로 바로 왔지."
"오늘 평일이고 수업 있는 거 뻔히 아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걸리면 진짜 쫓겨나죠. 대학원생이라고 몰라도 한참을 모르시는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청주에서 나를 만나기 위해 방금 터미널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실연의 아픔이 집에는 들르지도 않고 여기서 방황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걸까? 요즘 같은 시대에, 그게 사실이라면 보기 드문 순정파일지도 모른다.
"은정이 보니까 반가워서 깜박했네. 가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줄게."
"피이! 각오하세요. 진짜 눌어붙을 거야!"
"으응? 그건 좀 곤란한데."
"호홋! 그러게 왜 큰소리를 쳐요."
그렇게 은정이 먼저 처음 내 손을 잡아끌고 가서 거창하게 자리 잡은 곳은 고속버스 터미널 내부에 있는 허름한 간이 식당이었다.
작은 손으로 수저와 젓가락을 일일이 챙겨주는 소녀. 가녀린 어깨 아래로 가느다란 손목과 손가락 마디가 떨고 있다. 어쩌면 지금 아무렇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밝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얼마 먹지도 못하면서 배고픈 척은 왜 하는지. 밥 사달라고 조르는 모습도 여느 학부생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새삼 첫사랑이 남긴 흉터를 숨기고 있다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어떤 놈일까? 이런 미녀. 아니, 이 정도 미소녀에게 상처를 주고 나 몰라라 하는 자식은.
`짝사랑? 풋사랑?`
"오빠 자취방은 어디에요?"
벌써 날이 어둑해진 터미널.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횡단보도 보행신호를 기다리면서 담배를 꺼내 무는 나에게 은정이가 먼저 내 겨드랑이 사이에 처음 팔짱을 끼고 살포시 기대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깨너머로 팔만 감아 준다면, 커플로는 가장 이상적인 키 조합. 운동화를 신은 상태를 참작해서 155, 160 정도?
그리고 제법 익숙한 포지션과 착 붙은 한쪽 가슴의 탄력.
작은 어깨 위에 거추장스럽게 걸친 핸드백 녀석의 방해만 아니면 더없이 좋았을 것이다.
괜히 얼굴도 모르는 은정의 애인이라는 놈에게 질투가 생긴다.
"멀어요?"
"버스 갈아타서 한 시간 정도?"
꿈 같이 하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그 순간, 엉뚱하게도 모텔을 생각하고 있었다.
모텔에는 침대가 있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있고, 그리고 푹신한 침대 쿠션.
그 위에선, 무릎 통증 없이 장시간 여러 체위가 가능하다.
마음만 먹는다면, 밤새도록 이 어린 것의 몸속을 드나들면서 하룻밤 일탈이 주는 깊은 맛에 흠뻑 취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역시, 난 침대 타입이다.
그러고 보니 서로 거기까지 약속한 적도 없었는데, 별 실없는 생각을 다 하고 있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있다.
"자꾸 왜 이러실까? 오빠가 이럴 줄 몰랐는데 밤엔 늑대로 변하는 거 아니죠? 훗! 우리 그동안 너무 밤에만 함께 보냈나 봐요. 난 그냥 하루 이틀 바람이나 쏘이려고 오빠 만나는 거 알죠? 그러니까 너무 욕심부리지 마세요. 자꾸 이러면, 나 정말 힘들어져요."
첫 만남을 약속한 이후로, 바로 지난밤 새벽까지 집요하게 잠자리를 함께하겠다는 암시에 대해서, 은정이 마지못해 들려준 대답이었다.
단언컨대 이만하면 모텔까지 유인해 낼 수 있는 확률이 팔십 퍼센트 이상이다. 예측 불가능한 15퍼센트와 언제나 뒤따르는 불운의 5퍼센트.
문제가 있다면 아직 백 퍼센트를 위한 구체적인 대비책이 없다는 점뿐.
그래도 남자는 양다리에 능하고, 여자는 이별의 순간을 미리 준비한다고 했던가?
그 말이 맞는다면 은정은 이미 두 달 전부터 연인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두 달여간의 열병, 그것도 주로 밤을 이용해서 피어온 이야기꽃.
어둠은 편견으로 가득한 세상의 안목을 차단한다.
그런 솔직한 분위기 속에서 수컷의 욕정을 도발한 은정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 처음 만난 은정은 수컷의 욕정을 채워 줄 수 있을 만큼 쉬운 상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막돼먹은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어쩐지 그 점이 더 불안해진다.
아직 내겐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아쉬움을 접고, 일단 버스에 올라야 했다.
"여기요. 오빠…"
좌석 버스 안쪽 자리를 먼저 차지한 은정이 오라고 손짓한다. 다행히 버스는 한산해 보였다.
해가 지고 어두운 찻간에서 날이 쌀랑해져서일까? 좌석 바깥쪽에 자리를 잡자마자 은정이 작은 어깨를 내 쪽으로 기대더니 의자 뒤로 고개를 꺾는다.
그러고 눈치가 보였는지 살짝 부끄러운 기색으로 말을 건넨다.
"괜찮죠? 아까부터 졸려서…"
"추워?"
"아뇨. 정말 졸려서요. 어제, 그제 잠도 못 잤는데, 한 시간 걸린다면서요."
"여자가 아무 데서나 그렇게 퍼져 자면 안 되지. 그런 게 바로 늑대들이 노리는 틈이야. 누가 업어 가면 어쩌려고…"
앞으로 무료해질 거라는 생각에 농을 던졌다가 너무 속이 빤히 보이는 말을 하고 말았다. 후회된다.
"피이! 그거, 나 겁주려고 하는 소리예요? 업어 가서 뭐 하게요?"
무슨 추측을 했을까? 아주 잠깐이지만, 본능적으로 소녀의 얼굴에 스치는 야릇한 기색을 캐치했다.
내 예상은 정확했다. 이런 표정 변화를 대수롭지 않게 그냥 넘길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빨래하고, 설거지시켜야지…"
어이없는 질문에, 정말 엉뚱한 대답이 나오고 말았지만, 내 나름대로 의미 있는 대답이라 묘한 기대감으로 들뜨게 된다.
`고추 빨래, 부랄 설거지. 순진한 것. 이건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자꾸 실없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야 했다.
"나, 그거 잘하는데, 하나도 안 무섭다."
"그래? 안 무서워? 그건 두고 봐야지, 어디 혼 좀 나 봐야 알겠는데…"
슬쩍 손가락 몇 개를 겨드랑이 사이에 넣고 간질여 주었다.
호감 가는 계집이 꽤 가까이 접근해 있을 때만 통하는 스킨십! 이 정도는 내 필살기 축에 들지도 않지만, 너무 쉽게 먹힌다.
"아호홋! 손 치워요. 호호, 간지러워. 그 손 안 치워요! 아… 아호홋! 뭐에요. 아하학…"
정말 간지러움을 많이 타는 체질인지, 요 귀여운 것이 거의 자지러지는 수준으로 몸부림친다.
"아하하. 알았어요, 알았어. 아… 나, 진짜 졸린단 말이에요. 잉…"
안경을 벗어 놓고 핸드백 속에 고이 간직하고는, 정말 피곤한 얼굴로 진한 하품까지 하면서 눈가에 물기가 맺힌다.
"그래.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까 눈 좀 붙이고 있어."
"으응…."
내 어깨 쪽에 얼굴을 기댈 줄 알았는데 눈치가 보였는지 지저분한 창가 쪽에 이쁜 볼을 대고 눈을 감는다.
좀 실망스럽지만 이제 와서 어깨 빌려주겠다고 하면 더 속 보이는 짓일 것이다.
…………………………
한번 눈을 감더니, 금세 단잠에 빠져들었는지 꼼짝도 안 한다.
지도 피곤 할만하겠지. 그 잘난 남자친구 놈 때문에 지난봄 내내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하소연하던 글들이 생각났다.
헤어졌다고 했던가? 그냥 싸웠다고 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덕분에 죄 없는 내가 은정의 밤동무가 돼 주어야 했고,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메신저를 상대해야 하느라 종일 졸음이라는 놈을 상대해야 했다.
랩실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교수님의 헛기침에 망신당한 것이 몇 번이던가.
그리고 오늘 처음 은정이와 만나게 되기까지 참, 긴 시간을 돌아왔다는 상념에 빠지게 된다.
`오늘에서야 그 결실을 보게 되는 셈인가?`
…………………………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득 버스 엔진 소리와 차창 밖의 바람 속에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내리는 손님도 없이 달리던 버스가 코너를 돌자, 은정의 자그마한 얼굴이 내 어깨 옆으로 스르륵 다가와서 붙는다.
그러고도 세상모르게 잠에 빠진 소녀.
오뚝한 콧날에서 나오는 숨소리가 귓전에 닿을 듯 아련하다.
그리고 보니 은정의 얼굴과 맞닿아 있는 어깨 부위가 무척이나 뜨겁게 느껴졌다. 착각일까.
손등을 은정의 볼에 살짝 가져다 댔다. 역시 뜨겁다. 한여름에 몸살감기를 치르나? 더위? 열병? 지그시 눈을 감싸고 가만히 은정의 호홉을 확인하다가 조금 있다가 눈을 떠봤다.
은정은 좀전의 모습 그대로 잠에 빠져 있다.
이젠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은정의 자그마한 얼굴을 들여다보게 된다.
파운데이션도 없이 새하얀 피부와 넓고 정갈한 이마. 눈썹 끝이 살짝 지켜 올라가서 왠지 색스러움을 풍기는 눈매. 그리고 그 아래에 아까 낮에 봤던 여우 같은 눈망울이 긴 속눈썹으로 덮여 있다.
어쩌면 새하얀 피부위에 솟은 오뚝한 콧날과 순진해 보이는 눈망울이 스물 두 살의 은정이를 더 어려 보이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결 같은 머릿결 경계 주위와 귓불 아래로 드리우고 있는 솜털을 보고 있자니, 이 어린 것을 제 것처럼 다루었을 은정의 남자친구라는 놈이 자꾸 궁금해진다.
제길, 밤낮없이 책에 눈을 맞추고 컴퓨터와 씨름하면서 지나간 세월. 학사모 4년도 모자라서 대학원 2년, 거기다가 방산 대체복무 3년.
학교 늦게 들어간 죄로 어느덧 스물하고 아홉 해.
내년엔 벌써 삼십 대 줄에 접어드는데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난 세월을 건전하게 보낸 건 아니지만, 아쉬운 청춘에 자꾸 쓴웃음만 나온다.
"으응…."
아기가 잠결에 옹알이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더니 은정의 얼굴이 어깨 아래로 미끄러진다.
단잠을 깰까 싶어 얼른 팔을 들어서 목 한편을 잡아 주곤, 자그마한 얼굴을 어깨 옆에 붙여주었다.
그러고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팔이 은정의 어깨 위를 감싸고 있다.
괜히 죄지은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보다가 피식 바보 같이 웃음이 나온다.
"거의 다 왔는데, 더 잘래?"
…………………………
아직 멀었지만, 반쯤 안긴 지금의 자세에 대해서 변명하기 위해 말을 걸어 본 건데 대답이 없다.
이번엔 입술을 귓가에 가까이 가져가서 다시 말을 걸어 보았다.
"은정아. 어디 아파?"
"으응? 네?"
"어디 아프냐고."
"아뇨. 아픈 데 없어요. 오빠, 다 와 가면 깨워줘요."
"그래."
정말 잠에 취한 듯한 나른한 목소리와 단잠에 빠진 아기처럼 만사가 귀찮아서 찡그리는 얼굴.
다시 소중한 시간이 안타깝게 흘렀다.
…………………………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은정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팔을 길게 뻗어서 슬그머니 가슴께로 내려보냈다.
가느다란 어깨에 비해 터무니없이 크게 느껴지는 반소매의 면티 소매. 우연을 가장해서 자연스럽게 손가락 두 개를 겨드랑이 밑에 넣었다.
털 한 올 만져지지 않는 겨드랑이 안쪽의 여린 살결이 꽤 뜨겁다. 어디 아픈 걸까? 다시 걱정된다.
살며시 손가락을 빼고, 이번엔 봉긋하게 솟은 가슴에 손을 늘어뜨렸다.
버스의 진동에 따라 가슴의 탄력감이 고스란히 손끝에 전해진다.
그 흔한 에어 브래지어나 뽕이 아닌 얇은 옷감의 브래지어에서만 느껴지는 감촉. 마른 체형으로 알았는데 적당히 오른 가슴 굴곡은 정말 예술이다.
여전히 은정은 세상 모르게 잠에 빠져있다.
달리는 좌석버스의 진동과 밤 어스름. 그 안에 묻힌 손을 조금 더 밑으로 늘어뜨려서 가슴 봉오리 아래를 쥐었다.
역시 고요했다.
한산한 도로에 들어선 버스가 갑자기 커진 엔진소리를 내면서 한층 가속을 붙인다.
버스의 진동과 함께 내 손도 차분하게 가슴살을 쥐었다 펴면서 그 탄력을 즐긴다.
희미한 가로등을 스치고 지나가는 어둠. 그 어둠만큼이나 내 욕망도 서서히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도착지점이 다가올수록 알 수 없는 안타까움 속에서 내 눈도 바빠졌다.
처음 내 눈을 사로잡은 봉긋한 가슴.
면티 위로 작게 둔덕진 젖살을 노려봤다.
탐스러울 만치 하얗다.
한눈에 짐작하기에도 타이트하게 조여진 브래지어가 답답해 보인다.
이제 그 속살의 감촉이 궁금한데, 너무 꽉 조여진 브래지어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조용하고 신중하게 은정의 등을 만져 보았다.
아무 의미 없는 움직임으로 가볍게 몇 번 쓸어보면서 손끝에 닿는 촉감만으로 뒤편 어딘가에 있을 브래지어 호크를 탐색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어딘가 있어야 할 호크가 잡히지 않는다.
내친김에 작은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에 살짝 힘을 실어서 등 뒤를 살폈다.
면티 위에 브래지어끈 자국은 확연히 보이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지 않는 훅!
당황스럽다.
얼른 눈을 돌려서 두 덩이의 젖가슴 사이를 살폈다.
스물 아홉 해 동안의 경험상, 등 쪽에 있어야 할 접합부가 없다면 가슴 사이 명치께에 있을 것이다.
목 아래를 덮고 있는 면티를 손가락으로 쥐고 살짝 잡아당기자 신축력 좋은 티셔츠가 늘어나고,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새하얀 피부와 연한 회색 브래지어.
그리고 두 개의 젖가리개 사이로 확연히 눈에 띄는 브래지어 호크.
역시 한번 빗나간 예상은 두 번 어긋나지 않는다.
그간 쌓아온 경륜이 녹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소리 없이 미소 짓게 된다.
당겨 쥐고 있던 면티 자락을 놓고 안전하게 면티 위에서 손끝 탐색을 재개했다.
단단히 맞물려 있는 작은 클립 조각의 이음새와 그 틈까지 세심한 점검을 마치고 잠시 머뭇거려야 했다.
여기까지는 은정이 잠을 깬다 해도 변명의 여지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갈등하는 사이 버스가 덜컹거리고, 무의식중에 거의 반사적으로 브래지어 호크 양쪽 이음새를 교차시켰다.
툭…
들리지도 않는 소리가 내 귓가를 긴장하게 했다.
굉음을 울려 줬으면 했던 버스가 시내로 접어드는지 속도를 줄여 가다가 정차한다.
제일 앞줄에 앉아 있던 샐러리맨 차림의 승객 하나가, 피곤한 얼굴로 차에서 내린다.
버스가 다시 출발하고 버스 안의 풍경은 달라진 게 없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전보다 많이 부풀어 오른 은정의 가슴 위를 덮고 있는 손뿐.
…………………………
최대한 무게감 없이 팔을 움직이느라 어깨가 조금씩 저렸다.
은정은 여전히 자기 몸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고 잠에 곯아떨어져 있다.
오늘 새벽뿐 아니라, 그제 밤도 한잠도 못 자고 청주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쌔근쌔근 잠자는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업어 가도 모르겠다.
이제 한층 더 용기가 생겼다.
다시 한번 주변을 살피고 나서 손끝으로 면티와 브래지어 컵을 동시에 쥐고 서서히 앞으로 당겼다.
슬그머니 벌어지는 상의 속에 보기 좋게 솟은 뽀얀 두 개의 살덩이! 그 끝에 솟은 자그마한 분홍색 젖꼭지가 세상모르게 숙면에 빠져있다.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주인 몰래, 속살을 노리는 시선을 느끼는지, 빡빡하게 조이던 브래지어로부터 자유를 얻은 보드라운 살집의 끝에 착각처럼, 그 젖꼭지가 부끄럽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 같다.
보고 있자니 점점 탐욕으로 불타오르던 가슴이 숯검정이 되어서, 다가오는 밤이 가슴 벅차게 기다려질 정도로 살덩어리가 불끈거렸다.
슬그머니 바지 앞섶을 누르고 있는데 가지런히 뻗고 있던 소녀의 허벅지가 꿈틀하더니 몸을 뒤척인다.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은 위기감!
"으음…"
잡아당겼던 면티를 급히 놓아주고 숨죽이는데… 은정이 잠결에 차창 쪽으로 몸을 돌린다.
시간마저 정지한 듯 긴장으로 몸이 굳어 버렸다.
…………………………
차가운 차창이 싫었는지… 은정이가 다시 이쪽으로 몸을 가눈다.
무서운 정적이 흐르고 다시 고른 숨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좀 대담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은정아… 바로 자야지?"
들릴 듯 말듯 작게 속삭여 주곤, 이번엔 아예 품 안으로 기울여 놓자, 자연스럽게 은정의 등허리 절반이 내 가슴 위에 실렸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다.
다시 한번 호흡 소리를 확인하고 느슨해진 면티 안으로 천천히 오른손을 넣었다.
가슴의 정중앙에서 느껴지는 보드라운 살집의 매끄러움, 그리고 고른 숨소리를 짐작게 하는 심장의 규칙적인 박동이 오른손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확실히 깊은 수면에 빠져있다.
다시 한번 숙면을 확인하자, 버스에서 내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이번엔 좀 더 정확히 가슴의 융기를 가늠하기 위해 손바닥을 미끄러뜨렸다.
밝은 곳에서 보지 않아도 눈이 부시도록 탐스럽게 솟은 가슴 봉오리. 적당한 탄력감과 습기를 먹은 보드라운 감촉까지!
"흠……"
의미 모를 한숨이 나오고, 다시 잡스러운 망상에 빠져들어야 했다.
남자 친구라는 놈, 그놈! 그놈은 이렇게 순진한 은정이 가슴을 마음껏 빨면서 유린했을 것이다.
어쩌면 고이 간직해 오던 처녀성 깊은 곳까지 성난 살덩이로 후벼댔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이 시간까지 오게 된 빌미를 제공해 준 놈, 물론 녀석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것은 놈의 결정적인 실수일 것이다.
그래. 난, 이 기회를 그냥 놓치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호기가 생겼다.
잠을 깨우지 않을 만큼, 손안에 잡힌 살덩이를 가만히 쥐었다가 풀어 보았다.
손 안 가득 잡히는 보드라운 육질!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가로등 사이에 비친 뽀얀 살결이 내 손안에 있었다.
좀 더 움직임을 크게 해서 손바닥 전체로 부드럽게 훑었다.
손바닥이 쓸어 주는 대로 휩쓸리는 살덩이의 정점에 있는 그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자, 작은 힘에도 갑갑해 죽겠다는 듯 잠결 중에도 비밀스럽게 고개를 쳐드는 분홍빛 젖꼭지. 역시 사내를 아는 몸일까?
잔인한 발상이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하룻밤 섹스 파트너 상대로는 다행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원나잇 최고의 맛은 남의 계집의 몸을 탐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래. 오늘 밤에 그놈이 가진 전부를 아니, 그 이상으로 충분히 맛보게 될 것이다.
…………………………
규칙적인 심장 박동수와 고른 숨소리.
점점 여유가 생기면서 오늘 밤의 유희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골몰하기 시작했다.
이십 대의 막바지.
적어도 여자 다루는 흥을 다했다고 자부해왔던 내게 짜릿한 흥분이 몰려왔다.
그래, 오늘 밤은 특별한 밤이어야 한다.
중간중간, 가슴 중앙의 심장박동을 확인하는 여유 속에서 자연스럽게 아래쪽으로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롱스커트 위쪽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속살!
은정이가 깨어 있다면 어쩌면, 결코 범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그곳!
먼저 그 고지부터 점령하고, 하룻밤의 일탈에 대해서 당당하게 동의받아내야 한다.
그러려면, 은정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들자, 갑자기 주춤해진다.
그것도 잠시.
버스 종점이 다가올수록 불리하다는 계산속에 잔인한 미소를 짓게 된다.
우선 고른 호흡을 확인하고, 완전한 어둠 속에 갇힌 하체를 노려보았다.
벌써, 내려야 할 정류장은 조금 전에 지나쳐버렸다.
어차피 버스에서 내려서는 순간부터 목적지는 모텔로 바뀌게 될 것이기에 당장 내려야 할 정류장 따위는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다시 은밀히 왼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릎에서 치맛자락을 쥐고, 스커트를 허벅지 위로 서서히 잡아 올렸다.
힘없이 말려 올라가는 치마단 아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새하얀 허벅지와 곧게 뻗은 종아리.
어둠에 묻힌 차창 쪽에 허리 아래는 바로 옆에서 지나쳐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속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점점 더 상승세를 타고 있는 욕정처럼 힘없이 올라가는 치맛자락.
드디어 하얀 팬티 자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예상대로 안쪽에는 속치마나 거들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치마 단을 허리 위쪽까지 잡아 올려놓고, 앙증맞은 팬티 라인과 그 언저리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살그머니 도로 덮어 두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치밀한 계획을 정리해 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은 그 어떤 계획도 없었지만, 오늘의 뜨거운 밤은 지금, 이 순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려면 계획에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했다.
다행히 고지는 눈앞에 있고 지금까지는 아주 성공적이다.
회심의 미소를 짓는 가운데 머릿속 정리가 끝나자, 최후의 보루인 그곳을 점령하기 위해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환자를 검진하는 의사처럼 면티 속 깊이 넣은 오른손을 젖가슴 아래쪽에 대고 신경을 집중했다.
수면 상태를 증명이라도 하듯 매우 고른 심장 박동수가 느껴졌다.
좀 더 세밀한 수면 상태를 확인하면서 왼손으로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서 언제든 출입이 가능한 공간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비밀의 통로 안으로 손을 잠입시키자, 금세 손끝에 닿는 보드라운 피부.
이어서 허벅지로 짐작되는 피부 위에 살그머니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손바닥 전체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어찌 된 일인지 뜨거워진다.
몸살이라도 앓고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뜨거운 살결.
얼른 다시 심장 박동수를 확인해 봐도 은정은 깊은 수면에 빠져서 지금의 현실에 대해서 전혀 눈치챈 기색은 아니다.
좀 전에 치마를 들어 올려서 시원한 공기를 환기해 준 덕분에 더욱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허벅지 안으로, 안으로 이동해가기 시작했다.
팬티 하나를 앞에 두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허벅지 안쪽 깊은 곳, 비밀스러운 음부를 눈앞에 둔 고지 앞에서 허벅지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여린 살결을 쓸어 보았다.
…………………………
아직 별 눈치가 없었다.
잠깐이지만, 어디 아픈 걸까 또다시 걱정된다.
정말 곤히 자는데, 얼마나 피곤했으면 하는 연민까지 든다.
좀 더 강한 자극을 심어 주기 위해 허벅지 안팎을 부드럽게 쓸어주면서 중간중간 허벅지 안쪽 살집을 주물렀다.
그리고 명치 끝에 올려놓은 손바닥에 심장박동 신호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움찔, 움찔,
작은 어깨도 떨리더니 목 언저리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가 빠진다.
드디어 밑밥을 물고 있다!
됐다! 이제부터는 심리전이다.
가슴 쪽 박동도 확실히 수면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젠 방법을 바꿔서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젖가슴을 쓸어 올렸다.
신중함과 정성을 듬뿍 담아서, 세심한 손가락 움직임으로 젖꼭지를 살짝 쥐었다가 비벼주면서 다시 가슴 전체를 부드럽게 쓸어주자, 심장 박동수가 확연하게 빨라진다.
젖꼭지도 손바닥에 느껴질 정도로 솟아오르고 있다!
역시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듯 싶은데 별 저항이 없다.
기특한 마음에, 답례로 좀 더 세심한 손놀림으로 허벅지 안쪽을 쓸어주면서 반대편 가슴도 부드럽게 주물러주자 심장 박동수가 더욱 빨라진다.
…………………………
호흡도 미세하게 떨리지만, 역시 고요하다!
내 얼굴에 감격에 가까운 미소가 피어나고,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시험해 보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
최대한 차분하게 은정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흠… 후우…"
조소의 웃음처럼 귓가에, 새하얀 목 언저리 피부 중간에 뜨거운 호흡을 불어 넣어주자, 확실하게 꿈틀하고 반응을 보인다.
달리는 차 안이라 생각해서 너무 부끄러웠는지 예상대로 잠에서 깨어 있는 자신을 감추고 있다!
이건 순진해도 너무 순진하다.
두 눈을 덮고 있는 속눈썹의 떨림과 살짝 베어 문 입술, 붉어진 볼 상태를 보아 순진한 은정이 끝까지 참고 있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의 이긴 것이나 진배없다는 확신이 들자, 승자의 여유까지 생겼다.
그리고 묘한 배신감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수컷의 스킨십에 익숙하다는 배반감? 이젠 다 된 밥이라는 기쁨의 이면 뒤에서 투정 같은 오기가 생긴다.
어차피 남자를 아는 몸이라면 오늘 밤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은정 스스로 안기고 싶어서 안달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버스도 어느덧 종착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괜찮지?"
더욱 뜨거운 자극을 심어 주기 위한 선전포고처럼 달콤하게 은밀히 속삭여주자, 순간적으로 몸이 부르르 떨린다.
대답도 기다릴 여유 없이 상의 속에 담긴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쥐고 비벼주면서 허벅지 안쪽을 훑었다.
귓가에 접근한 입술에서도 혀를 내어서, 귓바퀴 안쪽을 정성스럽게 빨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허헉! 오…오빠, 자 잠깐…"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급하게 양 허벅지를 닫고는 은정이 번쩍 눈을 뜬다.
그리곤 고양이 같은 눈망울과 당장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거의 숨이 넘어가는 애원으로 소리죽여 속삭이는 울먹임.
스커트 안에 갇힌 뜨거운 기운이 팔 전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더 이상 팔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꾹 조이고 있는 양 허벅지 사이에서도 강한 힘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미 음부 아래쪽까지 파고든 손목 관절만큼은 움직일 수 있는 여력이 남아있었다.
"은정이가 너무 이뻐서. 미안…"
그리고 다시 손목 관절을 움직여서 손바닥 전체로 팬티의 중심을 꾹 눌러주곤 세심하게 반응을 살폈다.
"허헉! 오, 오빠! 알았으니까, 제발 그만요,"
음부를 덮고 있는 손을 급히 막아내는가 싶더니 은정이 더욱 품 안에 안겨서 거의 처절에 가깝게 애원한다.
역시, 그동안 애인을 통해서 충분히 겪어 본 성감에서 풍기는 반응이 갑자기 애처롭게 보이면서 모든 동작을 멈추어야 했다.
그러다 갑자기 스커트 깊은 곳의 허벅지 사이에 갇힌 손바닥의 촉감 변화를 알아차렸다.
손가락 마디 마디를 흠뻑 적시고 있는 미끈거림!
…………………………
정신이 퍼뜩 들었다.
확실히 팬티 앞을 축축하게 적시고 손안에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따스함이 애액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얼굴에 스치고 바지 안에서 흉물이 요동을 쳤다.
"하아… 오, 오빠. 부탁이에요. 우리 이러면 안 되잖아요."
"괜찮아. 괜찮아. 잠깐만 있어 봐, 응?"
"아니에요. 이건 아니에요. 제발, 제발 나 힘들게 하지 마세요."
뭔가 잔뜩 내 눈치를 살피는 소녀의 호소,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는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내 마음도 약해진다.
"그래. 알았으니까 이거부터 풀어. 빠져나갈 수가 없잖아."
팬티 전면으로 닿아있던 손가락을 거둬들이는 제스처와 함께 허벅지 사이에 갇힌 팔목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곧 꼭 닫고 있던 허벅지를 슬그머니 풀어준다.
잔인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계획대로 느슨해진 허벅지 사이에서 천천히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다시 배꼽 위로 미리 확인해 두었던 팬티 위쪽 밴드를 신속하게 잡아당겨서 손바닥 전체를 비밀의 화원 안으로 쑥! 단번에 밀어 넣었다.
"헉!"
거의 동시에 은정과 내 입술에서 거친 호흡이 터져 나왔다.
흠뻑 젖은 음모! 갑자기 뜨겁게 익어버린 감자 향이 확 풍기었다.
본능적으로 손가락 몇 개로 푹 젖은 늪지 어딘가를 꼼지락거리자, 정확히 속살 사이의 틈으로 보드랍게 빨려 들어가듯 미끄러지는 손가락 한 개.
"오빠. 이러지 않기로…"
허리를 시작으로 전신을 바들바들 떨다가 더듬더듬,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녀!
그리고 은정의 표정이 차츰 굳어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즈음이었다.
"미안.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예상치 못한 당혹감과 충격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차가운 낯빛으로 품에서 천천히 멀어지는 은정.
싸늘해진 눈가를 시작으로 자그마한 얼굴 전체로 퍼져나가는 냉기가 느껴졌다.
멍해진 내 얼굴을, 차갑게 노려보고 있다!
가슴이 오그라드는 착각 속에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손바닥이 검게 타오르던 욕정과 함께 스커트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러려고, 이러려고 나보고 여기까지 오라고 했어요?"
차창 한 쪽에 놓아둔 핸드백에서 차분하게 안경을 꺼내어 쓰더니 경멸에 가까운 시선으로 노려보는 눈동자!
용기백배했던 자신감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갑자기 할 말을 잃어버렸다.
"으, 은정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잖아."
너무 싸늘하게 변모한 소녀의 얼굴!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비켜! 나, 갈 거야!"
"은정아. 왜, 왜 그래? 그게, 잠깐만 얘기 좀 하자."
"비키라니까!"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은정이 벌떡 일어서더니 버스가 정차하자마자, 내 가슴팍을 밀치다시피 지나쳐서 버스 문 앞에 선다.
"나 먼저 내릴게. 잘 가…"
종착점에 거의 다 와서 내리는 줄도 모르고 홱 차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치밀했던 계획, 심리전, 그리고 승자의 여유. 그 모든 계산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건가?
순진하다고 단정 지었던 은정이, 이 바보가 싹 변해 버렸다는 당혹감!
느닷없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처럼 머릿속이 다 아찔했다.
"은정아, 은정아!"
…………………………
쳐다도 보지 않고 막무가내로 앞만 보고 걷는 그녀를 막아서면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세상의 안목을 기억할 수는 없었다.
한가지 기억한다면 그건, 좀 전까지 버스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하던 은정의 자존심이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그렇게 가지 마. 오빠가 잘못했어. 응?"
"오빠, 치한이야? 뭔가 착각하나 본데요? 오늘 처음 만난 분 맞죠? 저리 비켜요. 내가, 내 집 가겠다는데 왜 이러세요?"
몇 번이나 막아서는 나를 비껴지나 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는 은정.
생판 알지 못하는 사람을 대하듯 냉기만 풀풀 날리는 소녀의 태도에 거의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가버리는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의 심정에 대해서 해명해 줄 필요가 있었다.
"은정아… 잠깐만…"
"아, 됐어요. 저리 비키라니까."
몇 번이고 인도 앞을 막아서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애쓰는 노력도 무색하게 전혀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은정.
조금씩 짜증 섞인 인상으로 변해가더니 결국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다.
"이 아저씨가 정말 미쳤어요? 왜 자꾸, 길을 막고 그래요?"
은정을 만나고 처음 맞닥뜨리게 된 경멸에 찬 안색과 냉혹 서러울 만치 차가워진 말투는 거리를 휘황하게 밝히는 네온 간판이 시야를 어지럽히고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는 착각 속에서 정신마저 혼미해졌다.
빠르게 따라 걷던 두 다리마저 굳어버리고 그 자리에 주춤 서 버렸다.
은정이 이상한 사람을 대하는 눈초리로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다시 몸을 돌린다.
가냘픈 허리 아래로 저만치 점점 멀어지는 치맛자락을 멍하게 지켜보다가 넋을 잃고 말았다.
늦은 저녁, 좁은 인도 위를 부산하게 오가는 행인들과 한산해진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와 머리 위에서 현란하게 번쩍이는 조명.
인도를 지나던 누군가 어깨를 가볍게 밀치고 지나가자 비로소 의식을 깨웠다. 이미 소녀의 뒷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패배감에 치가 떨리고 가슴팍 한구석이 아렸다.
…………………………
간신히 감정을 수습하고 있자니 때늦게 밀려드는 후회감과 미련.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계집이라면 항상 여유롭게 요리해 왔건만 오늘의 내 모습은 평소와 달리 성급했다.
좀 더 상대를 탐색했어야 했는데, 성급한 정도가 아니라 이건 너무 뻔한 접근방식이었다.
`제길, 보낼 때 보내더라도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어지러운 한숨을 내쉬다가 이젠 보이지도 않는 은정의 뒷모습을 찾아, 정신없이 인도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몇 분인가를 달려서, 사거리 하나를 끼고 돌자 저만치 사거리 건널목 앞에서 도로를 건너고 있는 낯익은 뒷모습!
막 보행자 신호등이 꺼져버린 상황도 무시하고 급하게 건널목에 뛰어들었다.
건너편 보도블록에 거의 다다를 무렵 반대 차선에서 질주해 오던 차가 경적을 울리자 은정이 흠칫해서 뒤를 돌아본다.
"으… 은정아, 잠깐만…"
…………………………
질주하는 승용차를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친 순간, 은정이 조금 놀란 눈으로 내 얼굴을 한번 보더니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앞만 보고 걷는다.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 걸으면서 전보다 비굴해진 얼굴로 마지막 작별 인사라도 고해야 했다.
"은정이가, 은정이가 너무 이쁘고 사랑스러워서, 아픈 상처 다 잊게 해주고 싶었어."
…………………………
"어차피 그렇게 갈 거면 날 좀, 나를 좀 이해해 줄 수 없겠니? 나도 모르게 저지른 잘못. 은정이가 좀…"
뒷모습을 쫓아서 달려오느라,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가슴이 저리도록 절망감이 밀려와서 작별의 인사까지 마칠 수는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걷더니 은정도 감정이 한풀 꺾였는지 갑자기 걸음을 멈추어 선다.
…………………………
그래도 여전히 말이 없다.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으려고 자꾸 고개 돌리는 은정의 얼굴을 쫓아,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던져 버리고 정말 울 것처럼 매달렸다.
"갈 때 가더라도 미안하다는 말은 전해주고 싶었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신 안 그럴 거야. 정말 또 그러면 내가, 내가 은정이 동생 할 거야… 응, 응?"
"훗! 나 참, 웃기시지 말고 댁 가시던 데나 가시죠? 잊었나 본데요, 우리 집은 서울 OO 동이에요. 그럼, 난 너무 늦어서 이만…"
웃었다!
자존심 다 팔아치우고 횡설수설하는 내 꼴이 우스웠는지 분명히 소리 내서 웃었다.
고통받던 사막에서 단비를 맞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입 밖에서 나오던 작별 인사가 쏙 들어가 버리고 한 가닥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
그래도 분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는지, 다시 내 옆을 지나쳐서 걷는다.
막무가내로 앞만 보고 걷는 은정을 따라가기를 십여 분, 불행 중 다행이라면 버스 운행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과 먼 거리에 있는 지하철까지 걸어서 도착할 시간이면 지하철도 끊기고, 더 이상의 대중교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은정아. 그 이쁜 다리 알배기겠다. 오빠 좀 살려주라. 응?"
…………………………
여전히 분이 안 풀렸는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안경 너머로 노려본다.
또다시 걷기를 이십여 분, 신경질적으로 줄담배만 태우기를 다섯 개비!
앞서 걷던 은정이 슬쩍 뒤를 돌아본다.
"담배 좀 끊죠? 뭐 좋다고! 어디로 가면 돼요? 멀었어요?"
은정이 내 자취방의 위치를 묻고 있다! 그제야 비로소 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 왔어, 다 왔다고. 지금 가고 있잖아. 지금 은정이가 우리 집으로 걷고 있는 거야."
그 순간의 고마움과 감동을 어떻게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꽤 먼 거리를 자취방과는 정반대로 걸어왔건만 드디어, 드디어 은정의 분이 풀어졌다는 안도감에 택시 잡을 요량으로 신이 났다.
"한 번만 더 그렇게 들이대면 오빠랑은 정말 원수 되는 줄 알아."
"알았어, 알았어! 이 오라버니는 이제부터 정말 은정이 말만 들을 거야."
정말 바보가 다 된 사람처럼 말까지 더듬거리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비굴해진 적이 없었다.
"근데, 어디에요?"
"좀만 가면 되니까 우리 택시 타자. 너무 많이 걸어서 배도 고프고. 응?"
그렇게 우리는 택시를 잡았다.
한 블록 거리마다 침대들로 넘쳐나는 모텔들이 즐비한데 이젠 말도 꺼내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이 상황에서 당당하게 다음 골목 OOO펠리스 모텔이요. 라고 한다면 분위기상 은정과 택시 기사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경찰서로 직행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일단, 여기서 추잡한 희망을 접기로 했는데, 택시에 오르고 한참이 지나서야 가슴을 도려낼 듯이 밀려드는 이 서러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었다는 좌절감과 똥 묻은 휴지 조각보다도 못하게 뭉개진 자존심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은정을 데리고 나만의 보금자리에 도달할 즈음해서 택시요금을 내기 위해 기사에게 만 원권 지폐 한 장을 건네던 손!
문득 애액으로 손바닥을 흠뻑 적셨던 기억이 떠오르자 또다시 새록새록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는 육욕의 향기.
뜨거웠던 흔적은 이미 다 말라버리고 사라졌지만, 손바닥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애액의 체취! 그 엄청난 흔적에 대한 미련 모두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고난 후의 성취는 달콤하다!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면 또 다른 궤도 수정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