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좌절은 없다 다만 힘겨울뿐이지.
아빠 여기가 조용해서 좋긴 한대 교통이 너무 불편해"
올 대학 졸업반인 딸아이가 말한다..
2개월전 여기 시흥시로 이사올때는 많은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자기들방이 있어서 좋다고 함박 웃음을
짓던 딸과 아들이였는대.
2년전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새천년 이라고 모두들
마음 들떠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2000년 7월4일
우린 이혼을 했다.
20여년 넘는 인연을 단 몇분만에 판사라는 사람앞에서
이혼의사 확인을 했다.
다 큰 아들과 딸과 같이 나들이 하는 기분으로 인천 지방법원
에가서....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당시만 해도 우린 이걸로 끝이 아닐거야.
아직 서로의 대한 존재의 필요성을 모르기에
잠시 떨어져 있으면 서로가 자신의 잘못을 알때
그리고 서로를 필요로 할때 다시 합치게 됄수있을거란
실낱 같은 희망이 있었다.
허나 그 희망이 한낱 부질 없는 것이란것을 알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혼하기전 ..우린 근 1년여를 서로가 노력을 했다.
지금에 와서 뒤돌아보면 다시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많은 노력을 했다.
허나 부질없었다..
한번 깨진 신뢰와 믿음은 다시 복구 하기엔 너무도
많은 아픔을 갖고 있었다.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황폐해 가는 마음 마음..
우린 이제 서로를 위하여 결심을 하게됐다.
이혼..!!
어째 이혼이란 단어앞에 웃음 밖에 안나왔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나 있을것 같은 이혼이 나에게
현실로 다가온것이였다.
내 나이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혼이란것이 나에게..
현찰을 박박 긇었다.
2,300여만원..
어림없는 돈이였다..
이혼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금액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난 알았다..
죽는대도 돈들고 살기위해서도 돈들고
그리고 이혼을 하기 위해서도 돈이 든다는것을.
부동산을 같다.
살고있는 아파트를 현시세보다 싸게 내놨다.
헌대 지금과 달리 그 당시는 부동산 경기가 불황이였다
안팔렸다..
이왕 결정한 것이기에 이왕이면 하루 빨리 정리하고 싶었다
전세는 잘 나간다 한다.
다행인지 전세로 전환하자마자 금새 나갔다.
전세금과 집에 있던 현찰을 합쳐서 인천 연수동에
자그마한 아파트를 하나 샀다.
그리고 등기도 마쳤다..
애 엄마에게 전해주면서 말했다.
"당신 앞으로 되어있는 등기 권리증이야"
"아직까지 내 그늘에서 움추리고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마음껏 자유롭게 멋있게 후회 없이
살길 바래"
통장을 펼쳐봤다.
1,300만원이 있다.
이제부터는 내가 살집을 구해야 한다.
막막했다.
언제였던가..
아마 15.6년전일것 같다.
전세집 구하러 다닌적이.......
그런대 지금 내가 방을 구하러 다니는것이다.
내일모래면 50을 바라보는 내가 전세집도 아니고
전세방을 ..
기가 막혔다.
딸아이가 말한다..
"아빠 원룸이 있는대 거기얻자"
1,200만원주고 원룸을 얻었다.
웬지 모르게 마음이 홀가분함을 느낀다.
너무도 평안함을 느꼈다.
그동안 너무 지쳤던것 같다.
속으로 마음을 다져 먹는다....
"그래..이제 다시 시작이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거야"
"아빠 나 학교 휴학했어..졸업해야
취업도 어려운대 시간도 벌고 그동안 다른 공부좀 하려고"
머리가 띵하다.
딸아이는 내가 돈이 없는줄 알고 휴학을 한것이다.
이혼후 첫번째 아픔이다.
당시 작은애는 고3 큰애는 대학 2학년인대
빈털털이로 전락한 내가 어찌 두아이들을
대학 공부 시키랴.
가슴이 저려왔다..
회사에 사표를 내 던졌다.
근 20여년간이나 다니던 회사다.
한때 우리나라 5대 그룹중에서 모기업이라 불리던
그런 회사다.
아니 사표를 내 던진것이 아니고 던질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것이 옳을것이다.
지난 1년여간의 지리한 싸움속에서 어찌 회사일을
제대로 할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구조조정이다 하면서 한달이 멀다않고서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이 어느날 갑작이 책상이 없어지던
그런 시절인대.
그간 퇴직금 미리 정산하였기에 퇴직금이 얼마 안됐다
"그래~ 전화 위복이란 말도 있잖은가"
"해보자..해보는대 까지 해보자.."
그간 20여년간 직장 생활을 하였기에
사업을 하는대 큰 무리가 없을것 같았다.
거래처를 다녔다...
헌대..
사람의 인심이란것이.이리도 다를줄을 다시 알게됐다.
내가 회사다닐때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던 사람들인대
너무도 변했다..
또 다시 배신감을 느낀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지.
아는 선배가 나한테 자기회사에 와서 물류 운송을
하는게 어떠냐고 한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오케...했다.
있는돈 없는돈 박박 긇어서 5톤 화물차를 샀다.
생각보다 쉬웠다...
머리쓸일이 없기에 몸은 좀 고되도 마음이 너무나 편했다.
그간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인연을 끊었다.
친구들도 일가친척들도..
그리고 술도 끊었다 담배도..
일만 했다..죽어라고 일만했다.......
애들과 약속을 했다...
2년안에 반듯이 우리집을 찾겠노라고..
그때까지만 참아달라고..
애들과 약속하던 2년이 왔다.
헌대..
애들 엄마와 같이 했던 그집으로 다시 돌아갈 마음이 없어졌다.
애들도 전에 살던 그 아파트로 돌아가는것을 망설인다.
다행인지.
아파트 값이 많이 올랐다..
그리고 잘팔리는것 같았다.
팔았다...
제6의 신도시라 일컷던 그곳에 있는 아파트를 팔고서
값이 조금 싼 여기 시흥시로 이사왔다.
전에 살던곳과 같은 평수의 아파트를 구할수 있었다.
방이 새개다 욕실도 두개다.
아들방 딸방 그리고 내방.
딸과 아들은 자기들 방이 있어서 너무 좋다고 했다
허나 내가 왜 모르겠는가.
나와는 달리 젊은 아이들은대.
편의 시설및 위락시설과 교통이 편리한곳에서 살고
싶어하는것을.
여긴 아무것도 없다.
편의 시설도 위락시설도 지하철도.
그저 보이는것은 페염전이여 산이여 그리고 논밭 뿐이다.
모든것이 불편할것이다.
허나 나는 좋다.....
내가 편의 시설을 이용할것도 아니고
위락시설도 그리고 지하철 탈일도 별로 없기에
공기좋고 조용한 이곳이 좋다.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에 마음 고생하던 딸은 이제 휴학을 마치고
복학하여 올해 졸업이다.
아들은 군에가서 비지땀을 흘리며 훈련을 할것이다.
아들아..그리고 딸아....
우리에겐 좌절은 없다..다만 조금 힘들뿐이지.
올 대학 졸업반인 딸아이가 말한다..
2개월전 여기 시흥시로 이사올때는 많은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자기들방이 있어서 좋다고 함박 웃음을
짓던 딸과 아들이였는대.
2년전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새천년 이라고 모두들
마음 들떠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2000년 7월4일
우린 이혼을 했다.
20여년 넘는 인연을 단 몇분만에 판사라는 사람앞에서
이혼의사 확인을 했다.
다 큰 아들과 딸과 같이 나들이 하는 기분으로 인천 지방법원
에가서....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당시만 해도 우린 이걸로 끝이 아닐거야.
아직 서로의 대한 존재의 필요성을 모르기에
잠시 떨어져 있으면 서로가 자신의 잘못을 알때
그리고 서로를 필요로 할때 다시 합치게 됄수있을거란
실낱 같은 희망이 있었다.
허나 그 희망이 한낱 부질 없는 것이란것을 알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혼하기전 ..우린 근 1년여를 서로가 노력을 했다.
지금에 와서 뒤돌아보면 다시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많은 노력을 했다.
허나 부질없었다..
한번 깨진 신뢰와 믿음은 다시 복구 하기엔 너무도
많은 아픔을 갖고 있었다.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황폐해 가는 마음 마음..
우린 이제 서로를 위하여 결심을 하게됐다.
이혼..!!
어째 이혼이란 단어앞에 웃음 밖에 안나왔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나 있을것 같은 이혼이 나에게
현실로 다가온것이였다.
내 나이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혼이란것이 나에게..
현찰을 박박 긇었다.
2,300여만원..
어림없는 돈이였다..
이혼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금액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난 알았다..
죽는대도 돈들고 살기위해서도 돈들고
그리고 이혼을 하기 위해서도 돈이 든다는것을.
부동산을 같다.
살고있는 아파트를 현시세보다 싸게 내놨다.
헌대 지금과 달리 그 당시는 부동산 경기가 불황이였다
안팔렸다..
이왕 결정한 것이기에 이왕이면 하루 빨리 정리하고 싶었다
전세는 잘 나간다 한다.
다행인지 전세로 전환하자마자 금새 나갔다.
전세금과 집에 있던 현찰을 합쳐서 인천 연수동에
자그마한 아파트를 하나 샀다.
그리고 등기도 마쳤다..
애 엄마에게 전해주면서 말했다.
"당신 앞으로 되어있는 등기 권리증이야"
"아직까지 내 그늘에서 움추리고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마음껏 자유롭게 멋있게 후회 없이
살길 바래"
통장을 펼쳐봤다.
1,300만원이 있다.
이제부터는 내가 살집을 구해야 한다.
막막했다.
언제였던가..
아마 15.6년전일것 같다.
전세집 구하러 다닌적이.......
그런대 지금 내가 방을 구하러 다니는것이다.
내일모래면 50을 바라보는 내가 전세집도 아니고
전세방을 ..
기가 막혔다.
딸아이가 말한다..
"아빠 원룸이 있는대 거기얻자"
1,200만원주고 원룸을 얻었다.
웬지 모르게 마음이 홀가분함을 느낀다.
너무도 평안함을 느꼈다.
그동안 너무 지쳤던것 같다.
속으로 마음을 다져 먹는다....
"그래..이제 다시 시작이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거야"
"아빠 나 학교 휴학했어..졸업해야
취업도 어려운대 시간도 벌고 그동안 다른 공부좀 하려고"
머리가 띵하다.
딸아이는 내가 돈이 없는줄 알고 휴학을 한것이다.
이혼후 첫번째 아픔이다.
당시 작은애는 고3 큰애는 대학 2학년인대
빈털털이로 전락한 내가 어찌 두아이들을
대학 공부 시키랴.
가슴이 저려왔다..
회사에 사표를 내 던졌다.
근 20여년간이나 다니던 회사다.
한때 우리나라 5대 그룹중에서 모기업이라 불리던
그런 회사다.
아니 사표를 내 던진것이 아니고 던질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것이 옳을것이다.
지난 1년여간의 지리한 싸움속에서 어찌 회사일을
제대로 할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구조조정이다 하면서 한달이 멀다않고서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이 어느날 갑작이 책상이 없어지던
그런 시절인대.
그간 퇴직금 미리 정산하였기에 퇴직금이 얼마 안됐다
"그래~ 전화 위복이란 말도 있잖은가"
"해보자..해보는대 까지 해보자.."
그간 20여년간 직장 생활을 하였기에
사업을 하는대 큰 무리가 없을것 같았다.
거래처를 다녔다...
헌대..
사람의 인심이란것이.이리도 다를줄을 다시 알게됐다.
내가 회사다닐때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던 사람들인대
너무도 변했다..
또 다시 배신감을 느낀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지.
아는 선배가 나한테 자기회사에 와서 물류 운송을
하는게 어떠냐고 한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오케...했다.
있는돈 없는돈 박박 긇어서 5톤 화물차를 샀다.
생각보다 쉬웠다...
머리쓸일이 없기에 몸은 좀 고되도 마음이 너무나 편했다.
그간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인연을 끊었다.
친구들도 일가친척들도..
그리고 술도 끊었다 담배도..
일만 했다..죽어라고 일만했다.......
애들과 약속을 했다...
2년안에 반듯이 우리집을 찾겠노라고..
그때까지만 참아달라고..
애들과 약속하던 2년이 왔다.
헌대..
애들 엄마와 같이 했던 그집으로 다시 돌아갈 마음이 없어졌다.
애들도 전에 살던 그 아파트로 돌아가는것을 망설인다.
다행인지.
아파트 값이 많이 올랐다..
그리고 잘팔리는것 같았다.
팔았다...
제6의 신도시라 일컷던 그곳에 있는 아파트를 팔고서
값이 조금 싼 여기 시흥시로 이사왔다.
전에 살던곳과 같은 평수의 아파트를 구할수 있었다.
방이 새개다 욕실도 두개다.
아들방 딸방 그리고 내방.
딸과 아들은 자기들 방이 있어서 너무 좋다고 했다
허나 내가 왜 모르겠는가.
나와는 달리 젊은 아이들은대.
편의 시설및 위락시설과 교통이 편리한곳에서 살고
싶어하는것을.
여긴 아무것도 없다.
편의 시설도 위락시설도 지하철도.
그저 보이는것은 페염전이여 산이여 그리고 논밭 뿐이다.
모든것이 불편할것이다.
허나 나는 좋다.....
내가 편의 시설을 이용할것도 아니고
위락시설도 그리고 지하철 탈일도 별로 없기에
공기좋고 조용한 이곳이 좋다.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에 마음 고생하던 딸은 이제 휴학을 마치고
복학하여 올해 졸업이다.
아들은 군에가서 비지땀을 흘리며 훈련을 할것이다.
아들아..그리고 딸아....
우리에겐 좌절은 없다..다만 조금 힘들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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