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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의 머나먼 여정 ( 1-23 )

 


9장.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



오랜만에 자미정이 활기에 넘쳐나고 있었다. 어디 단체 회식 손님들이라도 놀러 왔는지 매화 방은 물론 국화 방까지 시끌벅적 요란했다.


큰길에서 올라오는 도중에 저녁이나 함께 먹으려고 순애에게 두 번이나 전화했다.

평소 이 시간이면 혼자 수(繡)를 놓거나 난을 칠 시간일 테니까.

그러나 가게 전화는 물론 내실 전화도 신호만 갈 뿐 받는 사람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내실 방문을 열어 보아도, 그리고 내 방에 들러 상의만 갈아입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돌아다녀도 후원 쪽은 물론 그 어디에도 순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얘가 어디 심부름을 하러 갔나?"


몇 안 되는 여자들도 다, 연희 방으로 불려 들어갔는지 대기실도 텅 비어있다.

다시 한번 샅샅이 훑다시피 화장실까지 들어가 찾아보았지만, 기척도 없다.

맥이 쭉 빠진 나는 터덜거리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주연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본채 연회장 쪽으로 걸어 나왔다.


바로 그때, 굳게 닫혀있던 매화 방의 미닫이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누군가가 막 나오고 있었다.

손님이든 여자들이든 누군가 화장실이라도 가는가 보다 하고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등롱이 휘황하게 밝혀진 대청마루로 한 걸음을 내딛던 여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휘청거리며 흠칫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멈추어 섰다.


그리고, <와장창! 쨍그랑!>


쟁반에 받쳐진 자기 술병이 바닥에 떨어지며 박살 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 날카로운 파괴음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믿음이 깨어지는 소리이기도 했다


"...오, 오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입 모양만으로 그렇게 부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순애였다.


"아니?"


뭔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몹시 당황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순애. 비록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이지만 얼굴색도 하얗게 창백해진 듯 보였다.


처음에 나는, 모처럼 단체 손님들이 찾아와 바쁘니까 잠깐 심부름이라도 하는 줄로만 알았다.

근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게 아니란 걸 짐작으로 느꼈으니, 순애는 설향 누나나 이화 누님이 입는 그런, 연회용 한복을 입고 있었다.

마치 갓 시집온 새색시처럼 맵시 있고 곱게 차려입은 녹의홍상의 아름다운 모습.

순간적으로 앞뒤 살펴볼 겨를도 없이 곧장, 내 입에서는 고함에 가까운 탁한 목소리가 뱉어졌다.


"뭐야? 순애 네가 왜? 매화 방에서 나오는 거야?"


"........?"


"그 옷차림은 또 어떻게 된 거야? 누구야? 너를 연회 방에 넣은 사람이?"


".........?"


순애는 깨어진 병 조각을 주울 생각도, 내 말에 대답할 정신도 없는 듯 그저 멍한 표정으로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야! 누구냐고? 누구야?"


".........!"


연타로 거친 물음표를 마구 던졌지만. 내 전력을 잘 아는 순애는 입을 꾹 다문 채 가볍게 몸을 떨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못한다.


"왜 대답을 못해? 말해봐, 은혜 이모가 시켰어? 이제 가르칠 만큼 가르쳤으니 연회에 나가도 좋다고 허락한 거야? 응? 그런 거야?"


"아, 아니에요. 오빠! 그, 그런 게"


거칠게 다그치자 그제야 순애는 더듬더듬 겨우 두어 마디,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그것도 마룻바닥으로 기어들어 가는 모깃소리만 한 작은 목소리로 말이다.


"뭐야?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래, 그랬어. 결국은 그랬군, 은혜 이모 말을 믿었던 내가 잘못이지. 내가 바보 병신이지. 젠장."


여흥에 소란스러운 방안에서도 바깥에서 무언가가 요란하게 깨어지고, 누군가가 거칠게 고함치는 소리를 들었나 보다.

또 한 사람의 여인이 매화 방 방문을 열고 나왔다. 마담 누님이었다.

나는 불끈 움켜쥐었던 주먹을 풀며,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지도록 인상을 팍팍 그렸다.


"순애. 너 왜 그러니? 어? 일영아!"


"여어, 아가씨 빨리 들어오라고 그래. 아니, 술 가지러 간 처자가 밀밭엘 갔나."


이미 술이 꽤 취한 듯한 컬컬한 남자 목소리가 방안에서 흘러나왔다.


빈 술병은 따로 챙겨 새 술병을 준비해 주는 여자가 예전에는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의 인원으로 자미정을 꾸려나가는 최근에는 연회에 참석한 여자들이 그런 잡다한 시중까지 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내가 순애에게 쏘아대던 화살은 과녁을 바꿔 이화 누님에게로 날아갔다. 설마 순애를 은혜 이모가 직접 연회에 참석시킨 것은 아닐 거라는 지레짐작.


"언제부터야? 순애 일 시킨 게?"


"얘는, 그게 무슨 말이니? 누가 누굴 일을 시켜?


대청마루 바닥에는 깨진 병 조각이 나뒹굴고, 순애는 한쪽에서 초라하게 웅크린 채 오돌오돌 떨고만 있고, 있는 대로 인상을 팍팍 긁어 올려 구기면서 내가 씨근벌떡 누님에게 다그치니 덩달아 누님의 미간에도 갈매기가 훨훨 날아올랐다.


"여기에 뭐, 다른 사람이 있어? 그리고...."


"내가 순애를? 오라, 마담이니까 내가 순애를 연회에 참석시켰다. 그 말이니?"


"그럼 아냐? 순애 연회복 입은 거랑 이렇게 뻔하게 다 보이는데."


"너! 이. 하여튼, 그놈의 성질머리하고는, 순애는 얼른 챙겨 들어가 봐."


"어딜 들어가. 계집애 너! 술병 챙겨오기만 해봐라. 그래, 오늘,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순애를 알고부터 그토록 순화시키려고 노력했는데 부지불식간에 과격하고 거친 말투가 분별없이 툭툭 튀어나온다.

나의 거친 언행에 순애는 더욱더 어쩔 줄 몰라 계속해서 벌벌 떨기만 하고 이화 누님은 아미를 찌푸리며 혀만 끌끌 차고 있었다.


모든 사건은 사소한 오해에서부터 발단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은혜 이모나 이화 누님이 내색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미정의 영업 사정이 몹시 어렵다는 걸 모르고 있을 정도로 내가 그렇게 멍청한 놈은 아니다.

어렴풋이나마 자미정 식구들이 모두 힘들어한다는 걸 이미 알고는 있었다.


근데, 처음부터 기생질시킬 아이가 아니라고, 자기가 수양딸 삼았다고, 그리고 바로 엊그제도 어떻게 여동생과 연애질하고 함께 나가 살기를 바라냐고 나에게 일침을 놓았던 은혜 이모.

은혜 이모의 그런 말만 듣지 않았어도 나는 이해했을 것이다


그래, 모처럼 단체 손님들이 자미정을 찾아왔으니 오늘 하루 연회석에 나와 바쁜 일손을 도운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때의 내 머릿속은 전후 사정을 판단하고 이해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였고, 또 나는 바다처럼 넓고 깊은 마음을 가진 사내가 아니었다. 옹졸하리만치 내 것밖에 모르는 아집과 이기적인 욕심.


정말 내 짐작대로 은혜 이모가 순애에게 연회장에 나가도록 종용했다고 치자, 영업 사정이 어려운 자미정을 위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내가 왜 나서서 버럭버럭 화를 내야 하는데?

하지만 그 속 깊은 내막을 몰랐던 나는 이미 외골수적인 사랑의 늪에 깊이 빠져있었고, 나만 바라보고 나만을 위해 존재해야 할 이쁜 순애가 낯선 남자 곁에서 술 시중을 들고 희롱을 당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확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 바닥의 생리를 모른다면 또 모를까. 아무리 격식 높고 전통을 자랑하는 요정이면 뭐하냐고.

결국은 술 팔고 여자들 웃음 파는, 그렇고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말이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잖으냐고. 술 취하면 개가 되는걸.


요즘 세상에 우아하게 풍류나 즐기자고 비싼 요릿값 내고 요정에 찾아오는 놈들이 어딨어.

말 타면 종 부리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여자 생각나는 게 인간들 심린걸.


어떤 놈이 순애의 그 도톰하고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덥석 물고 빨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그 수밀도처럼 물 많고 껍질 얇은 젖가슴에 더러운 손자국이 남은 건 아닐까.

그리고 어떻게 아냐고. 교자상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데. 순애 치마 속까지 더듬었는지도 모르잖아.


주먹을 말아쥐었다 폈다 하는 와중에도 자꾸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뚜껑이 팍! 열리는 느낌이었다.

아~시바. 이래서 음식은 맛난 것부터 먼저 먹어야지 아껴 먹으면 안 된다니까.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맛있는 요리도 쉬어버리고 벌레가 꼬이니까 말이다.


"나도 술상 하나 봐줘."


누님에게 술상을 주문하면서, 그런 나의 의심스러운 상상을 증명해 줄 꼬투리라도 잡겠다는 듯이 새삼스럽게 순애의 입술과 옷매무새를 두 눈으로 날카롭게 훑어보았으나 별반 이상한 점은 찾지 못한 것 같다.


"예약해."


"뭐라고?"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누님 입에서도 고운 말이 나올 리 없다.


뭐, 남도 아니고, 그냥 술상 하나 봐 달라는데 대뜸 예약하란다.

나 참. 열 받는데 기름을 끼얹고 불을 댕겨도 유분수가 있지.


"여기가 뭐 목로주점이니? 술 마시고 싶으면 정식으로 예약하라고... 오늘은 손님이 꽉 차서 안 되니까 내일 저녁으로 시간 잡아줄게."


"뭐? 예약? 내일 저녁? 말 다했어?"


"그래, 말 다했다. 왜? 술 안 판다고 행패라도 부리려고? 맘대로 해."


"나 참, 기가 막혀서."


"뭐하니? 순애는 손님들 기다리시는데."


"...큰 언니. 그, 그게."


"너, 이 계집애. 가기만 해봐. 진짜 오늘 누가 보던 피 본다."



아무 죄없이 애꿎은 순애만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아니, 이 마담 뭐 하셔? 술 떨어졌다니깐. 두루"


처음 술 취한 목소리로 아가씨 운운하며 밀밭을 들먹거렸던 그 작자가 또다시 누님을 채근하며 연회 방안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한눈에 척 봐도 인텔리였다.


괜찮은 직장의 간부급은 되는지 비록 타이는 흐트러져 있었지만, 낯짝에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얼굴이다. 덩치도 좋고 꽤 미남형이다.

운명적인 민성기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신무일 사장의 둘째 사위였던 민성기는 그 무렵 시온전자의 재무실장을 맡고 있었고, 직급은 부장이었으나 고속 승진한 그는 그 이듬해 파격적으로 전무 자리에 오른다.


누님은 순애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손수 깨진 술병 조각들을 주섬주섬 주워 담아 챙긴다.

그리고 술을 준비하려는지 회랑으로 내려섰다.


"건달 자식이. 근래에 좀 착해진다 생각했더니 그래, 흥. 지 버릇 개 못 주지!"


"뭐. 뭐야? 거, 건달? 으악! 시바. 콱!"


내게 들으라는 듯이 콧방귀까지 뀌면서 야무진 비아냥을 던진 누님은 고개를 꼿꼿하게 세운 채 치마꼬리에 찬바람을 일으키며 몸을 돌렸다.

뻔히 순애가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그런 퉁을 먹으니 눈앞에 뵈는 게 없어진다.

그렇다고 누님을 상대로 주먹을 휘두르며 싸울 수도 없고, 기분이 엉망이 된 나는 혼자 속으로 분을 삭이며 대청마루 가까이 다가갔다.


"신발 신고 내려와. 네 방에 가서 그 옷 갈아입어."


".........!"


"갑자기 귀라도 먹었니? 내 말 안 들려?"


"저어, .오, 오빠. 나, 지금은."


"아니, 이 계집애가 정말 나 죽는 꼴 보고 싶은가 보네?"


"어머! 아, 이러지 말아요. 오, 오빠!"


신발을 신은 채 성큼 청마루에 올라선 나는 주춤 물러서는 순애를 덥석 안아 마치 보쌈하듯 한쪽 어깨에 둘러멨다.

순간, 훅~끼쳐오는 상큼한 딸기 향.

그리고 풋풋하게 익어가는 복숭아의 은은한 과육 향기가 내 콧속을 가득 채운다.


비록 옷 속에 감춰져 있었으나 뭉클하며 스치는 젖가슴의 감촉이 내 어깨를 통해 느껴지고 치마 위로 감싸 안은 손바닥에 탱탱볼 같은 촉감을 전해주는 순애 엉덩이.


나는 순간적으로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콘크리트 교각처럼 단단하게 버티고 선 내 두 다리에 일시에 힘이 쭉 빠지며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던 화가 눈 녹듯 스르르 사라진다.


흐미. 사랑의 마법에 걸리면 모두 이렇게 되는 것일까?

나는 그 어떤 다음 동작도 취하지 못한 채 멍하니 골만 때리고 한참을 서 있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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