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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雨緣) (19)

 

‘ 탕~’


 


택시를 내려서 문을 닫자마자 고개부터 돌려 주변을 살폈다.


오는 사이에 보슬비가 조금씩 뿌리더니 어느새 이제는 제법 굵어진 빗방울로 얼굴을 적신다.


옷이 축축하게 젖어오는 거야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지만, 속눈썹을 때리는 물방울이 자꾸 시야를 가리는 게 약간은 짜증스러웠다.


 


“ 어디에 있는 거지?”


 


가슴이 미친 듯이 뛰는 걸 겨우 참고서 다시 한번 시계를 봤다.


택시기사에게 연신 사과를 하면서까지 재촉을 한 덕분에 다행히도 아직 몇 분의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민지가 이야기했던 건물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시계가 잘못되었나 싶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해보자 틀림없었다.


마지막으로 걸려왔던 통화시간으로부터 30분이 아직 지나지는 않았다.


 


‘ 가만? 얘가 핸드폰을 꺼버렸잖아?’


 


잠깐 가라앉는 것 같던 심장이 다시 요동을 쳤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많이 취한 민지가 착각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로 별다른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며, 은근히 다행스러워하고 있던 바보 같은 자신이 너무나 미웠다.


 


‘ 후두둑~ 후득~’


 


이제는 가랑비가 아니라 본격적인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니, 내 마음 속에는 이미 홍수가 지고 있었다.


 


“ 민지야~ 민지야~”


 


12시가 넘은 새벽시간 게다가 비마저 내리는 길거리에서,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대부분 불이 꺼져버린 어두운 대로변에서 마땅히 민지가 갔을 만한 곳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도저히 믿고 싶지가 않지만, 상상도 하기 싫었지만, 정말로 이 상황에서는 갈만한 곳이 오직 모텔 밖에 없었다.


 


“ 민지...야...”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마 위로 축 늘어진 머리카락을 타고서 빗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차가운 빗물과는 다른 뜨듯한 무언가가 뺨을 적시고 있었다.


민지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내 입 속으로 빗물과 같이 스며 들어온 그 액체가 짭짤한 맛을 전해주었다.


건물의 벽에다 맥없이 등을 기댔다.


 


“ ..오...빠...”


“ ..민..지...헉~! 미, 민지? 민지니?”


 


떨어지는 빗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온 음성,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그걸 못 알아들을 수는 절대 없었다.


순간적으로 절정의 환희까지 느껴지면서, 혹시나 환청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 나왔다.


 


‘ 제발, 제발....’


 


마음은 너무나 초조했지만, 천천히 최대한 천천히 간절한 염원을 담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건물의 입구 안에서 반쯤 몸을 드러낸 희미한 모습이 보였다.


있었다.


그녀가 있었다.


민지가 바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 민지야...흑...”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왔다.


언제나 희비가 엇갈리게 만들던 이 비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날 배신하지 않았던 것이다.


달려가서 와락 껴안았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살결이 달라붙으면서 빗물로 차가워졌던 내 몸을 순식간에 데웠다.


나 때문에 민지의 옷이 젖어 들고 있었지만 그 따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사랑해, 사랑해, 민지야...’


 


마음 속으로 외쳤다.


지금에야 확실히 깨달았다.


이미 민지는 내 심장의 한가운데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겉으로까지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 결과가 어떨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 ..가자...어서 집으로 가...”


“ 싫어...”


“ 민지야...제발...”


 


정신을 차리고서 민지를 이끌자 강하게 버틴다.


그제서야 진한 술 냄새가 풍겨 나오는 걸 깨달았다.


나로 인해 젖은 채 달라붙은 옷, 흐릿한 눈동자, 그리고 새빨간 입술을 벌리고서 몰아 쉬는 가쁜 숨소리, 내부에서 뭔가가 빠져 나가버린 듯한 그녀의 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다우면서도 날 슬프게 한다.


 


“ 잘못했어...내가 잘못했으니까 여기서 이러지 말고...”


“ 오빠가 뭘 잘못했는데?”


“ 모두..뭐든지...미안해...제발...민지야...”


 


나를 노려보면서 쏘아 부치는 민지의 입술 사이로 새하얀 이빨이 반짝거려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다.


 


‘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자신이 조금 전 마음 속으로 외쳤던 말을 지금이라도 내뱉기만 한다면, 이 모든 갈등은 눈 녹듯이 한 순간에 사라질 거란 걸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알 수 없는 서러움에 슬픔이 마구 밀려들었다.


다 고백해버리라고 뭔가가 자꾸만 유혹을 한다.


 


‘ 짝~’


 


그때였다.


눈앞이 번쩍거리더니 뺨이 화끈해졌다.


 


‘ 짝~’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번에는 반대쪽이 뜨거워졌다.


 


“ 이 나쁜 놈, 나쁜 자식~ 흑흑~”


“ 민지야~ 민지야~”


“ 놔~ 놔~”


 


발악을 하면서 버둥대는 민지를 꼭 끌어안았다.


손자국이 났을 게 분명할 정도로 강하게 맞은 뺨은 그저 화끈대는 정도였지만, 내 가슴 속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칼로 헤집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민지가 마음으로 느끼고 있을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리라.


내게 뱉고 있는 저 비난과 욕설들은 내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를 자해하고 있었다.


 


“ 뭐야~? 싫다잖아? 왜 자꾸 추근대?”


 


그때였다.


갑자기 뒤쪽으로부터 술에 취한 듯 껄렁껄렁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머리끝이 쭈뼛해지면서 위기감이 들었다.


비가 오는 늦은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조금 전에 살펴봤다시피 근처엔 아무도 없는데다가 가게들까지 모두 문을 닫았었다.


민지! 그녀가 위험했다!


민지의 몸을 막아서면서 재빨리 돌아섰다.


 


‘ 쾅~’


 


돌진해오는 트럭에 부딪치기라도 한 것처럼 강한 충격이 몰려들면서 몸이 뒤로 확 밀렸다.


눈앞이 새하얘지며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고 머리 속이 빙글빙글 돌면서 귀까지 ‘윙윙~’ 울렸다.


 


‘ 주먹에 맞은 건가?’


 


입 안으로 뭔가 뜨겁고 비릿한 게 느껴졌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에 최대한 몸을 가누려 했지만, 눈앞이 흔들리면서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 퍽~’


 


이번에는 배에서 충격이 느껴지더니 숨이 콱 막혀왔다.


속이 뒤집어지면서 상체가 저절로 구부려지는 걸 억지로 참고, 팔을 뻗쳐 앞에서 어른거리는 누군가의 허리춤을 감았다.


하체가 후들거리고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으려는 걸 겨우 버티며 두 손의 깍지를 꽉 꼈다.


어금니를 악물자 약간 숨통이 트이면서 다리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마지막 기회였다.


이 짧은 순간을 놓친다면 정말 천추의 한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 민지, 민지만은 절대...’


 


무릎을 구부린 다음 있는 힘을 다 짜내 발끝에다 모으고서 단거리 스타트를 하듯이 몸을 날렸다.


 


‘ 쿵~’


 


벽을 울리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을 통해 내게도 충격이 전해졌다.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안심이 되면서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어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아직은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제일 중요한 목적이 남은 것이었다.


 


“ 허억~ 미..민..지야..빨리...도망가...어...서...”


 


숨쉬기가 곤란해서 잘 나오지 않는 음성을 최대한으로 쥐어짰다.


이 말소리가 왜 이리 느린지, 또 왜 그렇게나 작은지에 분통이 터졌다.


그나마, 내 귀에도 똑똑히 들려올 정도니 민지에게도 충분히 전달되었을 거라는 사실이 위안이었다.


 


“ 이~ 씨발 놈, 안 놔~?”


 


씨근덕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남자의 거친 욕설이 들려왔다.


 


‘ 퍽퍽~ 퍽~’


 


그와 동시에 등과 옆구리로 주먹과 팔꿈치가 마구 날아들었다.


아프다.


너무나 아파서 그냥 주저앉고만 싶었다.


뼈가 부러지고 장이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파도처럼 연이어 밀려들었다.


원통하고 분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고는 해도 그렇게 뒤로 바짝 다가올 때까지 몰랐다니, 자신의 어리석음에 저주를 퍼부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두 눈을 뜬 채로 또다시 빗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말 것이다.


힘이 점점 더 빠져나간다.


얼마 이상은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소나기처럼 퍼부어지는 주먹질에 정신마저 흐릿해져 오고 있었다.


 


“ 허억~ 가...민...지...야...제발...”


“ 꺄악~”


 


겨우 다시 내뱉는 순간 이제야 제정신을 차린 민지의 비명소리가 들려와 내 가슴을 갈갈이 찢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흐려지던 의식이 다시 되돌아왔다.


 


“ 빠, 빨리...허억~”


“ 그만~ 그만~ 이 나쁜 새끼~ 그만하란 말이야~ 엉엉~ 꺄악~”


“ 어? 어~ 어~!”


 


토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민지의 비명과 욕설 그리고 울음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 민지야...제발...제발...도망가...’


 


이제는 목소리조차 나오지를 않았다.


결사적으로 깍지를 끼었던 손마저 스르르 풀렸다.


그리고서 바닥으로 가라앉는 몸, 차갑고 딱딱한 시멘트가 무르팍에 닿더니 곧 내 이마로 느껴졌다.


숨이 막히고 구토가 넘어오는 와중에도, 민지가 울부짖으며 남자의 등과 뺨을 손바닥으로 마구 때리는 게 흐릿하게 보였다.


 


‘ ..민지야...미안해...결국에 이렇게 널 지켜주지 못하는구나...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할 걸...흑흑흑...’


 


지켜주기는 고사하고 결국엔 피신시키지도 못했다.


저 작고 연약한 손으로 남자에게 대항을 하는, 철없고 어리석은 아이에게 가해질 엄청난 불행을 이대로 지켜봐야만 하는 것이다.


 


‘ 엄마...왜 그때 날 구했어? 차라리...차라리...흑흑흑...’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그리고 이 나약하기만 한 육체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그때 이후 처음으로 나 대신 생명을 바친 엄마를 탓했다.


흘러 넘치는 눈물이 시멘트 바닥은 물론이고 내 얼굴까지 축축하게 적셨다.


이 차가운 바닥에서 꿈틀대고 있는 스스로가 마치 지렁이처럼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 자, 잠깐만~ 미, 민지야~”


“ 엉엉엉~ 이 나쁜 새끼~ 엉엉~ 가~ 가란 말이야~ 엉엉엉~ 오빠~ 오빠~”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대화가 들려왔다.


갑자기 나타나 폭력을 휘둘렀던 저 남자가 민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나를 그렇게나 무자비하게 팼던 남자가 민지에게는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쩔쩔매고만 있었다.


그리고, 민지가 달려와서는 통곡을 하면서 나를 쓰다듬었다.


따스하고 보드라운 손길이 덜덜 떨며 내 얼굴을 스쳤다.


 


“ 미, 민지야...미, 미안해...난 그냥...”


“ 흑흑흑~ 오빠~ 어떡해~? 이 피 좀 봐...흑흑흑~ 엉엉~”


“ 내, 내가 도와줄게..”


“ 손대지마~!!! 손을 대면 죽여버릴 거야~ 엉엉엉~”


 


민지가 나를 부축해 일으키려 하자 남자가 주저하면서 말을 붙였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민지의 날카로운 음성에 화들짝 놀라 불에라도 덴 듯이 물러섰다.


 


‘ 그렇구나...둘이 서로 아는 사이였구나...다행이야...정말로 다행이야...엄마, 고마워...흑...’


 


조금 전까지 엄마를 원망했던 게 너무나 미안했다.


긴장이 확 풀어지면서 곧바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뭔가가 얼굴 위로 똑똑 떨어지는 느낌에 정신이 들었다.


 


“ 흑흑흑~ 삼촌~ 삼촌~ 흑흑흑~ 제발 정신 좀 차려봐...흑흑~”


 


내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과 함께 민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훗~ 녀석..급하니까...이제야 삼촌이라는 소리가 나오는구나...’


 


대뜸 그런 우스운 생각부터 들었다.


실눈을 뜨자 아직도 그 건물 안쪽의 계단 입구였다.


바깥의 어두운 길거리에서 쏟아지는 빗줄기가 가슴 속을 후련하게 해준다.


 


‘ 이 녀석, 도대체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야?’


 


그제서야 민지가 무릎베개를 해준 채로 계단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걸 알았다.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상태라 아직도 내가 깨어난 줄은 모르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 가슴 속이 뜨거워지면서 나도 모르게 아래가 단단해져 버렸다.


 


‘ 나..참...이 와중에도...미친 놈 같으니...’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울고 있는 민지의 처량한 모습이 나를 너무나 슬프게 한다.


 


“ ..얼마나...지난..거야...”


“ 흐읍~! 사, 삼촌~ 흐흐흑~ 엉엉~ 미안해~ 엉엉엉~”


 


목 안에 피가 말라붙은 건지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 들면서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민지가 화들짝 놀라더니 울음소리가 커지면서 눈물줄기가 더 굵어진다.


삼촌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또다시 미소가 지어졌다.


 


“ 얼마나 지났어? 많이 된 거야?”


“ 흑흑흑~ 아니야...한 5분 정도...흑흑흑...”


“ 녀석...그만 울어..난 괜찮으니까...”


“ 흑흑~ 삼촌....”


 


다행이었다.


아주 잠깐 동안만 깜빡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손을 들어서 민지의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그 보드라운 감촉을 음미할 새도 없이 여기저기가 욱신거리면서 숨이 턱턱 막혀왔다.


아무래도 제대로 맞은 모양이었다.


그나마 어디 뼈를 다치거나 그러진 않은 것 같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 그만 가야지...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 흑흑....괜찮아? 움직일 수 있겠어? 흑흑~”


“ 그래...괜찮으니까 그만 울어...우리 민지가 우니까 더 아파오는 것 같은데?”


“ 흑~ 아, 알았어...훌쩍~ 훌쩍~”


“ 후후후~ 녀석~”


 


억지로 울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이며 봉긋한 가슴을 크게 오르내리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이제야 내가 알고 있는 민지로 되돌아온 것만 같아서, 마음이 푸근해지면서도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불같이 치밀었다.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가고 명치 부근에서 뜨거운 느낌이 들면서, 이미 잔뜩 성이 나있던 성기가 크게 꿈틀거렸다.


 


‘ 으윽~!’


 


그런 내 불순한 마음을 꾸짖기라도 하듯이 대뜸 맞은 데가 당기면서 신음소리가 나올뻔했다.


 


“ 으~음~”


“ 사, 삼촌!”


“ 괘, 괜찮아, 약간 결리는 정도야...”


 


민지가 내 한 팔을 자기 목에다 감고 일으키려 하자, 아랫배에서 통증이 확 밀려들며 나도 모르게 약간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움찔하면서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본다.


아마 여기서 아픈 티를 내면 저 예쁜 눈에서 또다시 물줄기가 마구 쏟아질 게 뻔했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후우~ 후우~”


“ 흑~ 안 되겠어....삼촌...”


 


건물의 입구까지는 겨우 몇 걸음인데도 아랫배가 끊어질 듯이 아파왔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거리를 멍하니 바라다보며 벽에다 등을 기대고 가쁜 숨을 몰아 쉬자, 눈물을 그쳤던 민지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아래로 휘어지면서 금새 물기가 차오른다.


 


“ 이렇게 잠시만 숨을 돌리면 혼자도 걸을 수가 있을 거야...걱정 마...후후후~”


“ 흑....그 나쁜 자식...내가 죽여버릴 거야...흑흑~”


“ 하하하~ 그러면 안돼...우리 예쁜 민지의 입에서 그런 험한 말이 나오는 거 난 싫어...”


“ 흑흑~ 하지만, 하지만...”


“ 그만...알았지? 난 괜찮으니까 그러지마...부탁이야...”


“ 흑~ 알았어...삼촌..흑...흑...”


 


민지를 끌어서 품 안으로 안자 내 가슴에다 얼굴을 묻고는 비비적거리며 흐느낀다.


이 아이가 저런 말을 할 정도면 아마 가까운 친구 사이일 거다.


왠지 웃음이 났다.


그리고, 이 가녀리고 따스한 여체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 후~ 그나저나 큰 일이네? 비도 비지만...걷기가 만만찮은 것 같은데...


더구나 이런 꼴로 들어가면 예지가 또 한바탕 난리를 칠 건 뻔하고...’


 


예지 그 아이를 생각하자 걱정부터 들었다.


겉으로 잘 드러내지를 않을 뿐이지 나를 위하는 마음은 오히려 민지보다 더 깊을 것이다.


자칫 두 자매간에 아주 큰 골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충 겉모양이라도 정리를 하긴 해야 할 것 같았다.


 


“ 민지야...”


“ 훌쩍~ 응...왜?”


 


꽉 끌어안고 있었더니 그래도 마음이 많이 가라앉은 듯한 민지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적으로 저 새빨간 입술에다 키스를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걸 막은 건 도덕이나 자제심 같은 게 아니라, 퉁퉁 부은데다 피 맛까지 느껴지는 내 입술이었다.


아마 키스를 한다면 민지는 또다시 아까의 일들을 떠올리고 마음 아파할 게 분명했다.


 


“ 근처에 씻을 만한 화장실이 없어? 거울도 좀 보게...”


“ 훌쩍~ 그게....훌쩍~ 아~”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훌쩍거리는 모습이 너무나 귀엽다.


더 이상 보고 있다가는 못 참을 것 같아서 다시 껴안아버리자 짧게 탄성을 토하며 더 파고든다.


 


‘ 후후~ 이렇게나 내가 좋을까?’


 


온몸으로 기쁘다는 걸 표현하듯이 잘게 떨기까지 한다.


물론 나 역시도 행복한 기분이 든다.


아까 그 절박한 순간에 많은 걸 떠올린 탓인지, 이제는 민지에 대한 스스로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게 꽤나 편안해졌다.


 


“ ...있어...”


“ 그래? 그러면 조금만 도와줄래?”


“ 걸을 수는 있겠어?”


“ 후후후~ 비를 피해서 뛰기까지는 못할 거 같아. 너는 괜찮겠어? 다 젖을 텐데...”


“ 치~ 삼촌은 지금 농담이 나와?”


“ 하하하~ 미안, 미안...내가 원래 눈치가 없잖아?”


“ 몰라...”


 


한참을 생각하던 민지가 드디어 그 장소가 떠올랐는지 조용히 속삭였다.


조금은 기분을 가볍게 해주려고 던진 농담에 샐쭉해지는 걸 보니 그런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다시 민지의 목에다 팔을 두르고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 미, 민지야?”


“ ...지금 시간에 그럴만한 곳은 여기 밖에 없어...”


 


건물을 나와 골목길을 접어들 때만 해도 그저 그러려니 했었다.


그리고, 자꾸만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에 조금은 이상하다고 느끼다가,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골목과 마주치자 깜짝 놀라 우뚝 서고 말았다.


나도 예전의 그녀와 함께 숱하게 드나들었던 곳, 바로 모텔들이었다.


 


“ 제발...삼촌...고집은 그만 피워..씻기도 하고 다친 데도 좀 살펴봐야 하잖아? 응?”


“ 하, 하지만...”


“ 흑...미안..해...이렇게까지 될 줄은...흑...”


“ 그, 그래...알았으니까...울지마..그러자...자~ 어서 들어가자...”


 


애절하게 부탁을 하다가 결국 또다시 글썽이는 민지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니다, 그건 핑계일 뿐이다.


내가 원하고 있었다.


터질 것처럼 부푼 성기와 미칠 듯이 두근거리는 가슴에서 퍼져나가는 짜릿한 환희가 진실을 말해주었다.


 


‘ ...어쩌려는 걸까?’


 


모른다.


어쩌면 민지는 정말로 어쩔 수 없이 이곳을 선택한 건지도 모른다.


아까 마음 속으로 민지에게 사랑한다고 외치는 순간에, 이미 내 욕망은 가슴 한구석에다 당당히 자리를 잡아버렸다.


그래서, 이런 야릇한 기대와 상상을 하는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일수도 있었다.


유리문이 열리면서 ‘짤랑~’ 하고 울리는 방울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이 마치 지옥의 불길처럼 느껴진다.


 


“ 방 있죠? 얼마죠?”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오래 전의 경험들인데도 내 몸은 그걸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 꿀꺽~’


 


엘리베이터 안에서 바뀌는 숫자를 묵묵히 올려보다가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내 손아귀에 잡힌 작은 손을 꼭 쥐어보자 촉촉하게 배인 땀이 느껴졌다.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 너무나 긴장을 한 탓인지 숨을 턱턱 막히게 하던 통증도 어느새 사라진듯했다.


이 정도라면 지금이라도 돌아서서 집으로 향할 수가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오히려 놓칠까 두렵다는 것처럼 민지의 손을 더 강하게 거머쥐었다.


그러자, 내 어깨에다 머리를 살짝 기대어온다.


 


‘ 땡~’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스르르 열렸다.


긴 복도를 따라 벽에 붙은 은은한 불빛이 끈적하게만 느껴진다.


 


“ 가자...”


“ 응....삼촌...”


 


잔뜩 쉰듯한 스스로의 목소리에 미처 놀라기도 전에 민지의 음성 역시 비슷한 걸 깨달았다.


알 수 없는 야릇한 흥분이 밀려든다.


손을 잡고 나란히 내딛는 발바닥으로 푹신하게 느껴지는 융단이 발목까지 끌어들일 것만 같았다.


방의 호수를 하나씩 확인하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심장은 더욱 빨라지고 코로 더운 김이 나왔다.


두 사람 중의 누구에게서 배어난 건지 애매하기만 한 땀으로 손바닥이 미끈거렸다.


 


“ 여기...구나...”


“ ..응...”


 


키를 건네 받은 그 방문 앞에 서서 중얼거리자 민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둘이 처음 키스를 했던 날 민지가 잠든 안방 문 앞에서 이렇게 멍하니 바라보던 기억이 났다.


당시에 안타까움과 막막함이 느껴졌었다면 지금은 두려움과 설렘이 있었다.


저 너머에 지옥이 있을지 지상낙원이 존재할지는 나도 모른다.


그게 뭐가 됐던지 이제부터 내 손아귀에 잡힌 작고 가냘픈 손과 함께 들어설 것이다.


 


‘ 딸깍~’


 


잠금 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는 너무나 쉽게 그 문이 열렸다.


 


“ 들어가자...”


“ ...응....”


 


서로가 말을 하는 게 두렵다는 듯이 아주 짧게만 주고 받는다.


안으로 들어서 키를 꽂자 실내로 불이 환하게 들어오면서 그 정경이 비쳤다.


저 안으로 보이는 키 작은 냉장고, 화장대, 작은 탁자와 의자, 그리고....침대...심장이 벌떡거리면서 또다시 침이 넘어갔다.


 


“ 올라가자...”


“ 응...”


 


내가 먼저 신발을 벗으며 말하자 민지는 역시나 짧은 대답과 함께 주춤주춤 따라 한다.


참으로 잘 꾸며진 공간이었다.


아담하고 예쁘면서도 아늑한 느낌, 그리고 뭔가 두근거리고 흥분을 하게 만드는 그런 분위기였다.


 


“ 비를 맞아서 추울 텐데, 따뜻한 물로 샤워라도 하지?”


“ 으, 응?”


 


돌아보면서 말을 건네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 아니, 어쩌면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있었는지도 모르는 민지가 화들짝 놀라는 게 보였다.


이상했다.


보통이라면 저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울 텐데, 지금은 너무나 매혹적이면서도 끈적하게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성기가 크게 꿈틀하면서 잠시 잊었던 통증이 다시 느껴졌다.


 


“ 아~! 자, 잠깐만 앉아있어...내가 물수건을 만들어 올게...”


“ 민..지..”


 


고통에 나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던 모양이다.


그제야 정신이 든 듯이 눈이 커다래진 민지가 놀랜 토끼처럼 욕실로 뛰어갔다.


 


‘ 쾅~’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실내를 울리면서 왠지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


 


“ 풋~”


 


바람이 새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슬로비디오로 천천히 돌아가던 필름이 정상속도를 찾은 것처럼, 무겁고 끈적하기만 하던 실내공기가 가벼워졌다.


침대로 다가가서 등을 대고 드러누웠다.


푹신했다.


그리고 아주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 후후후~”


 


오늘의 이 황당한 일을 벌이고, 아까 그 친구에게 악다구니까지 퍼붓던 민지의 모습이 모두 꿈만 같았다.


조금 전 안 닫힐까 두렵다는 듯이 요란하게 욕실 문을 닫던 모습만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어쩌면 지금도 수건을 물에다 적시면서, 혹시나 하고 겁을 먹은 표정으로 문을 힐끔거리고 있을 광경이 상상되었다.


그렇게 당차게 굴었어도 여전히 내가 알고 있던 그 여리고 착한 아이였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가졌던 끈적한 성욕이 스르르 사그라지고 있었다.


전처럼 죄책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내가 민지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내 몸이 그렇게 반응을 하게 만든 것도 당연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자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물소리가 자장가처럼 달콤하다.


 


‘ 아~ 수아한테 전화를 못했구나...’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지만 손가락 하나 꼼짝하기가 싫었다.


기억에 아련하게 남아있는 엄마의 품 속처럼 따스하고 포근한 이 느낌 속에서 영원히 잠들고만 싶었다.


언뜻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몰려드는 몽마(夢魔)를 물리치기엔 도저히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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