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雨緣) (18)
회사에서 인터넷의 몇몇 부동산관련 사이트에 올리고, 정보지에다가도 송금을 해 광고를 실었다.
하지만, 퇴근을 하자마자 쫓아왔는데도 중개사사무실이 열린 곳은 한군데 밖에 없었다.
어차피 옮길 집도 찾아야 하는 입장이라, 아무래도 다른 곳들은 겸사겸사 주말의 낮에나 둘러봐야 할 것 같았다.
어제 너무 무리를 한 탓인지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 어? 민지야..”
“ 으, 응....삼촌...이제 퇴근하는 거야?”
“ 그래...”
현관을 들어서자 자다가 막 깼는지 부스스한 얼굴로 안방에서 나오는 민지가 보였다.
윤기가 흐르던 촉촉한 입술이 바싹 말라 꺼칠하고 눈두덩까지 거뭇거뭇해진 초췌한 얼굴이, 평소의 단아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저게 단순히 과음 때문인지, 아니면 심적인 갈등의 영향이 더 큰 건지는 자신할 수가 없다.
문제는 그 어느 쪽이든 모두가 나로 인한 거라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는 것이다.
“ 종일 누워있었던 거야? 밥은?”
“ 으, 응...낮에 조금 먹기는 했는데...속이 안 좋아서...”
“ 지금은 어때? 좀 가라앉았어?”
“ 응...괜찮은 것 같아...”
“ 예지는?”
이렇게 둘의 말소리가 나고 있는데도 보이지 않는 예지가 마음에 걸렸다.
민지보다는 그 아이가 심적인 충격이 더 컸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입맞춤과 함께 내게 웃음을 던지던 모습이 떠오르며 가슴을 둔중하게 만든다.
“ 응..아까 나갔어. 친구들하고 약속이 있다면서..영화를 보기로 했나 봐...”
“ 그래? 그러면 간단하게 세수만 하고 나와.
나도 저녁을 먹어야 하니깐 시원하게 해장국이라도 먹으러 가게...”
“ 난 그냥...예지가 끓여놓은 죽을 먹으면 되는데...”
“ 어서~”
“ 으, 응..알았어...삼촌...”
아마 예지는 힘든 마음을 조금이나마 추스르려고 외출을 한 모양이었다.
미안한 기색을 보이는 민지에게 재촉을 하자 주춤거리며 욕실로 향한다.
왜 이 아이들은 저렇게 착하기만 한 건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화를 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오히려 조심스러워하고, 내 작은 배려에 미안함 정도를 넘어서 감격까지 하는 눈치다.
이럴 때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는 것이 정말로 싫어진다.
다른 걸 모두 떠나서 그저 내 스스로의 미안함을 덜기 위해서라도, 두 아이를 보듬어 달래주고 싶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다.
같은 남자였다면 하다못해 치고 받기라도 하고서 술잔을 기울이며 툭 털어버릴 수도 있으련만, 그깟 남녀 사이라는 게 무엇이관데 이것마저 막는지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하기야 애초부터 그 놈의 이성간이라는 문제가 모든 일의 시발점이긴 하다.
그리고, 이렇게 달관한 척해보지만 나 역시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하찮은 녀석이긴 마찬가지였다.
“ 후우~ 후~”
“ 델라, 조심해서 먹어. 자~ 땀도 좀 닦고...”
“ 응, 삼촌~ 고마워~”
말간 복지리 국물을 불어가면서 열심히 먹는 민지에게 냅킨을 내밀었다.
아까 머뭇거리며 사양을 하던 것과는 달리 아주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이 흐뭇하면서도 가슴을 싸하게 만든다.
온종일 거의 굶은 채로 몸과 마음을 고생시키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쉴새 없이 흘러내리는 땀방울로 알코올 찌꺼기가 배출되는 건지 이제야 제법 사람의 몰골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약간 파리한 듯하면서도 두 뺨이 발그레한 얼굴과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자태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애잔함과 화려함이 공존하는 묘한 매력이 그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하지만, 저런 아름다움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마치 촛불처럼 스스로 생명력을 조금씩 태우며 발하는 찰나의 빛일 뿐이다.
만에 하나라도 나와 부부가 된다면 왠지 저런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될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든다.
“ 이제 곧 개강을 하지?”
“ 응...”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바쁜 학교생활과 더불어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어느덧 아픈 기억들이 희미해질 것이다.
‘ 나도 저럴 때가 바로 엊그제 같았는데....’
찬란하게 빛나기도 했지만 너무나 큰 아픔 역시 간직한 지난 추억들이 언뜻 떠올랐다.
민지의 하얀 이마 위에서 또르르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불빛에 반사되며 눈을 부시게 했다.
그러자, 뜨거운 키스와 함께 감기듯이 착 달라붙던 부드러운 여체가 생생하게 기억나 가슴이 뛰었다.
마음을 다잡고 이사까지 서두르도록 일부러 일을 만들어두었는데도, 이미 한번 흔들려버린 감정은 이런 작은 자극에도 쉽게 동요를 한다.
‘ ...기억을 할까?’
지금까지의 반응으로 볼 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안심이 되면서도 약간의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비록 서로 공유할 수는 없다지만 그 달콤한 추억을 가지게 된 것만해도 내겐 과분했다.
더 이상의 미련은 추한 욕심일 뿐이다.
“ 삼촌, 또 술 먹게?”
“ 응..그냥 가볍게 속을 푸는 정도만...취할 만큼은 나도 안 마실 거야...”
“ 이리 줘, 내가 따라 줄게...”
“ 하하~ 그래? 고마워~”
몸은 거부를 하지만 가슴이 원했다.
맑은 정신으로 저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자꾸만 울적해지는 것만 같았다.
소주를 주문해 마개를 따자 민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을 했다.
저 눈빛, 항상 저게 문제였다.
걱정과 애닯음이 가득한 다정스러운 저것은, 엄마의 마지막 눈동자에 서렸던 것과 흡사했다.
내게는 너무나 큰 트라우마로 남은 그 사건 때문인지 저런 눈빛을 보면 감정이 순식간에 격류를 타고 만다.
수아에게 정신 없이 빠져든 것도 바로 그 크고 맑은 눈에 은은하게 깔린 따스함 때문이었다.
가슴 속이 축축해지는 듯한 그리움과 더불어 죄어드는 느낌까지 드는 걸 보면, 난 아직도 엄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싶으면서도 왠지 그러기가 힘든 민지의 시선을 넌지시 피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 나두~”
“ 응? 안돼!”
술을 들이키려는 순간 눈앞으로 쑥 내밀어져 온 술잔, 그 투명한 유리를 감싼 가느다란 손가락이 대리석조각처럼 매끄러웠다.
“ 딱 한잔만~ 응? 삼초~온~ 나도 속을 풀게...헤헤~”
“ 허~~”
민지로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교를 부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동생을 늘 지켜보면서 한두 번쯤은 상상으로 해봤을지도 모른다.
두 치수는 큰 옷을 입은 것처럼 너무나 어색한 모습,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사랑스러웠다.
아직 얼굴빛이 다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제가 무슨 술꾼이라고 해장술을 먹고 싶을까? 저건 단지 대작을 해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게 분명했다.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만큼이나 외롭고 처량해 보이는 행색도 드물다.
아마 저 애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싶지가 않았던 걸 거다.
하기야 나라도 내 앞에서 누가 그런다면 똑같은 행동을 하긴 마찬가지이겠지만.
“ 좋아, 대신에 최소한 3번 이상 나누어 마시기야? 네 한 모금에 나도 한잔, 알았지?”
“ 웅~ 알았어~ 짠~~”
“ 그래...짠~ 후후후~”
하는 행동, 말 하나가 예쁘다.
외면만이 아니라 마음씀씀이까지 너무 예뻐서 서러운 기분마저 든다.
민지는 그대로 두고 나 혼자서 한 5년만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면 좋겠다.
수아에게는 너무나 미안한 생각이긴 해도 솔직한, 정말로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쩌면 그런 게 불가능하기에 더 간절한지도 모르겠다.
이런 갈등과 아쉬움도 이 술잔을 마지막으로 끝을 내리라 다짐했다.
목구멍을 매끄럽게 넘어가는 차가운 액체가 그 쓰고도 싸한 감각으로 코끝을 짜르르 울렸다.
어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한번 해본 때문인지 식당을 나오자 민지는 자연스럽게 팔짱을 껴왔다.
그 따스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달콤하게 느껴질수록 가슴은 더 답답해지면서 결심을 다지게 만들었다.
“ 우리 밖에서 잠깐 바람이나 쐬다 들어갈까?”
“ 응, 삼촌~”
몸을 바짝 붙이면서 머리까지 기대어오는 민지가 애처롭기만 했다.
이제 곧 어제보다 더 심한 충격을 받아야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하리라.
집 근처의 조용한 놀이터로 향했다.
원래 한적한데다가 이 시간이면 아무도 없어서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기에는 아주 좋았다.
물론 둘만 있는 집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탁 트인 곳이 가슴을 짓누를 이야기를 듣기에는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이제는 제법 선선한 느낌이 드는 밤공기였다.
놀이터 구석의 벤치에 앉자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싱그럽게 들려왔다.
“ 춥지는 않아?”
“ 응...시원해서 좋아...”
저녁을 먹으면서 땀을 많이 흘렸던 민지가 혹시 감기나 들지 않을까 약간 걱정이 되었다.
아니, 솔직하게는 그걸 핑계로 포근히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는 일이다.
더군다나 지금부터 할 이야기를 생각하면 그건 농락을 하는 거나 다름없다.
“ 민지야...”
“ 응, 삼촌..”
안아주기까지는 못하더라도 어깨에다 머리를 기대어오는 것을 밀어낼 수는 없었다.
그나마 그것도 무거울까 걱정이라도 되는지, 아주 가볍게만 얹어 말을 꺼내기가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그래도 지금을 놓치면 정말로 하기가 힘들어질 걸 알고 있었다.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기라도 하듯이 작게 대답하는 말소리가 귓가를 부드럽게 간질였다.
“ 어제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있어...”
“ 응, 해봐...”
“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
“ ...삼...촌....”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던 걸까? 민지의 말소리가 떨려 나온다.
그와 더불어 가늘게 흔들리는 듯한 그녀의 어깨를 안아주어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 ..그냥 두는 게 낫겠지..’
조금은 냉정하더라도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을 받아들이는 데는 그게 차라리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나, 곧 결혼을 하게 될 거야....미안해...”
“ .........”
“ ..민...지야...”
뜨거운 물에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흠칫하고서 딱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는,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임은 고사하고 숨소리마저 들리지를 않았다.
다시 한번 불러보지만 여전히 꼼짝하지 않는다.
‘ 이대로 기다려야 하는 걸까?’
잠시 그대로 두어야 할지, 몸을 돌이켜 마주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나을지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예지가 어제 내게 해준 배려가 얼마나 큰지를 새삼 다시 깨닫게 된다.
그런 만큼 속으로 삭인 상처가 더욱 깊을 거라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지금 민지에 대한 미안함 역시 너무나 당연했다.
“ 휴~ 그래...지금 내 얼굴을 보거나 말을 하기도 싫겠지...그냥 듣기만 해...”
“ .....”
가느다란 숨결이 턱 끝을 살짝 스치는 게 느껴지자 그나마 안심이 된다.
솔직히 이대로 영영 숨이 멎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만큼 지나치게 조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민지의 심장은 싸늘히 식어가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멈출 순 없었다.
속이려면 아예 처음부터 철저히 숨기고 떠났어야 했다.
그랬다면 나중에 그게 어떤 큰 파장을 일으킬진 몰라도 당장에는 약간의 아쉬움만 남겼을 것이다.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몇 년 정도의 해외파견을 핑계 삼는 것쯤이야 문제도 아니었다.
단지,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을 속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이렇게 한 것이었는데, 이제 와서는 그마저도 옳은 선택이었는지가 확신이 안 선다.
아주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거의 기계적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 ..너희한테는 조금 더 일찍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데...워낙 급작스럽게 진행된 일이라...미안해...”
“ ...거..짓말....”
처음으로 흘러나온 민지의 반응은 강한 부정이었다.
등골로 찬바람이 파고들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오래 전 자신의 모습과 한치도 틀림이 없었다.
그때 청첩장을 펴서 한참을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내가 뱉은 첫마디가 바로 저거였다.
지금 민지의 머리와 가슴 속이 어떨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지금껏 살아왔던 세상이라는 체계가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 이 악몽을 깨고 싶어서 달려오는 차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충동, 바로 그런 걸 거다.
“ 미안해...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사실이야...
그래서, 난 조만간 이사를 할 준비를 하고 있어...
아저씨와 아주머니께 이미 말씀을 드렸어...
두 분은 내가 힘들까 너희에게 나중에 천천히 알려주겠다고 하셨지만...아무래도 내가 직접...”
“ 거짓말~~!!!!”
“ 미, 민지야?”
갑자기 민지가 발악을 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어둠 속에서 가로등 불빛만 은은하게 비치던 이곳의 정적이 깨어지면서, 묵직한 밤공기마저 출렁거리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음성이 메아리를 치는 것처럼 울려 퍼지더니 점점 더 가늘게 사라졌다.
어느 집에선가 놀란 듯한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그런 데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 거짓말, 거짓말이지? 그렇지? 내가 부담을 주니까 괜히 그러는 거지? 응? 삼촌? 맞지?”
“ 민...지..야...”
“ 미안해, 삼촌...내가 삼촌을 너무 힘들게 했나 봐. 이제는 안 그럴 테니까 제발 그런 말은 마, 부탁이야..”
내 어깨를 양손으로 붙들고 흔들면서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젓는 민지의 모습이 날 너무나 아프게 한다.
자신이 지른 소리에 겁이라도 먹은 양, 어린아이처럼 애원을 하는 그녀의 음성에는 벌써 물기가 축축하게 배어나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누가 심장에다 커다란 대못을 ‘쾅쾅~’ 박는 것처럼 아득한 통증이 밀려와 온몸을 쥐어짠다.
차라리 내 따귀를 마구 때리고 바락바락 악이라도 쓰면 좋겠다.
‘ 왜? 왜 네가 애원을 하는 거니? 화도 안나? 내가 죽이고 싶도록 밉지 않아?’
아플 정도로 내 어깨를 꽉 잡고 흔들던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럴수록 점점 더 굵어지는 저 물줄기, 민지의 눈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맺히는 것 같던 이슬이 어느새 강물이 되어 흘렀다.
그 순간 내 마음 속에서 뭔가 ‘툭’ 하고 금이 가더니, 곧 깨지는 거울처럼 산산조각이 나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역시 난 드라마 속에서 나오는 멋지고 쿨한 남자는 못 되는 소심한 놈인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마음 속으로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건만, 이미 떨리는 손으로 민지의 가녀린 어깨를 안아가고 있었다.
“ 미안해, 미안해, 민지야...정말 미안해...”
“ 놔~! 놓으란 말이야~ 이 거짓말쟁이~! 흑흑흑~ 흑흑~”
연약하고 부드러운 몸이 내 품에 갇혀서는 발버둥을 쳤다.
그러면서도 기껏 하는 게 작은 원망과 함께 내 가슴을 ‘콩콩~’ 두드리는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이 작고 힘없는 주먹의 울림이 언젠가 군대서 채여본 고참의 군화발길질보다 더 아팠다.
거짓말쟁이라는 말 한마디가, 신입시절 잘못 계산한 숫자 하나로 인해 기안서류로 뺨을 ‘툭툭~’ 맞아가면서 욕을 들을 때 느끼던 모멸감보다 더욱 크게 가슴 속을 파고 들었다.
“ 흑흑~ 제발~ 거짓말이라고 말해줘...삼촌...제발...흑흑흑~”
이번에는 다시 애원을 해온다.
흥건하게 젖은 새하얀 얼굴로 올려다보는 저 투명한 눈동자에 서린 간절함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만 싶다.
“ ..미안해...”
“ 흑흑흑~ 흑흑~ 와앙~”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내 가슴에다 얼굴을 와락 파묻으면서 오열을 하는 민지의 얼굴이 맞닿은 곳으로부터 미지근한 물기가 빠르게 번져나갔다.
차라리 비라도 내리면 좋으련만, 내게 그토록 많을 걸 주고 또한 빼앗아갔던 빗줄기가 지금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듯만 하다.
“ 흑~ 날 보고 그걸 믿으라고? 못 믿어. 싫어, 인정 못해.
내가 몇 년을 삼촌, 아니 오빠, 장우 오빠를 바라만 봤는데? 절대 안돼! 흑흑~”
“ 미, 민지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개를 발딱 쳐든 민지의 눈이 물기에 젖어서 빛나고 있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으로도 저렇게 반짝일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반들거렸다.
‘ 오빠? 오빠라니?’
그 어떤 말보다 단호하게 들려왔다.
이건 그녀 자신의 확고한 결심에 대한 선언이었다.
머리 속이 아찔해지면서 맥이 쫙 빠졌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 민지..흡~”
그때 갑자기 민지의 입술이 벌컥 덮쳐왔다.
어젯밤 느꼈던 그 부드러우면서도 거친 움직임과 함께 화상을 입을 듯한 뜨거움이 다시 다가왔다.
‘아차~’ 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한없이 말랑거리는 살점이 내 입 속을 휘젓고 있었다.
너무나 강렬하게 유혹하는 달콤한 느낌이었다.
순간적으로 모든 생각을 떨쳐버리고 여기에 빨려 들어가고만 싶어진다.
“ 그, 그만...제발...민지야..이러면 안돼...”
“ 그러면 어제는? 어젯밤에는 왜 되었던 건데?”
“ 미, 민지야? 흡~”
본능을 억누르고 간신히 민지를 떼어냈지만, 바로 들려오는 말에 완전히 수포가 되어버렸다.
나의 간절한 바램과는 달리 그녀는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덮쳐온 입술이 마구 비비면서 내 혀를 빨아당기는 감각도, 왠지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남의 일인 것처럼 아련하게만 느껴졌다.
머리 속이 멍하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내 무릎 위로 올라앉아 목을 껴안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으면서, 뭉클하게 눌러오는 젖가슴의 아찔한 감촉마저도 무덤덤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런 내면과 달리 아랫도리는 급격하게 반응을 보였다.
푹신하게 비벼오는 여체의 깊은 곳을 어느새 단단해진 성기가 찌르고 있었다.
‘ 헉~!’
육체와 겉돌기만 하던 정신이 갑자기 되돌아온 건 바로 그때였다.
도저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내 목을 꽉 껴안고 있던 민지의 한 팔이 스르르 풀리는가 싶더니, 겨울잠을 자기 위해 굴 속으로 찾아 드는 뱀처럼 아래쪽으로 내려와 단단해진 기둥을 거머쥐었다.
흐느적거리는 손아귀에 그런 힘이 있으리라고 짐작도 못했을 만큼 아주 강하게 조여왔다.
마치 이것은 내 것이라고 손도장을 찍기라도 할 것처럼 아프게 붙들었다.
하지만, 그런 아픔조차도 이 미칠 것만 같은 흥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귀두가 크게 부푸는 느낌이 드는 게 당장에라도 사정을 해버릴 것만 같았다.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소리와 함께 뇌가 곤죽이 된 것처럼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다.
“ 미, 민지야! 제발...이 손...”
겨우 입술은 떼어냈지만 이 가는 손목을 잡기만 하고서 어떻게 하지를 못했다.
그냥 붙든 채로 눈을 마주치고서 속삭일 뿐이었다.
“ 난 오빠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착하고 순진하기만 한 애가 아니야..”
“ 민지야...”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오빠’라고 내뱉는 민지에 손목을 붙든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단단하고 두꺼운 장벽, 도저히 넘을 엄두가 안 나는 그런 견고함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 절대! 인정 못해!”
“ 민지야...”
“ 두고 봐, 오빠, 내 말이 거짓말인지...먼저 갈게...천천히 와...”
“ 미, 민..지...”
내 눈이 파열될 것만 같은 뜨거운 열기를 풀풀 풍겨내는 눈빛으로, 한자씩 분명하게 내뱉은 민지가 갑자기 등을 돌려 가는 걸 보면서도 중얼거리기만 했다.
“ 후우~”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앉아서 민지가 사라진 어둠을 지켜보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결국에는 가장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야릇한 환희가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난 정말로 이중적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남자의 본능인지, 아니면, 한 여자에게 받았던 커다란 배반감에 대한 비열하기 짝이 없는 보상심리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여간에 일은 이미 벌어져버렸다.
예지와의 고비를 너무나 순탄하게 넘으면서 자만을 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야 들었다.
‘ 차라리 아주머니의 말씀처럼 맡겨두는 게 나았을지도....’
하지만 때늦은 후회일 뿐이다.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
벌여놓은 일들은 일대로 추진하면서 민지와의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모색할 수 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 시간이라는 해결사에게 맡겨야 하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내가 가장 원하지 않던 결과가 나올 게 뻔했다.
겨우 다시 가졌던 소중한 사람들을 잃게 될 것이었다.
“ 엄마, 어떻게 하면 좋겠어? 좀 가르쳐줘, 응?”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중얼거리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위태위태하면서도 너무나 평온한 날들이었다.
한밤중에 침대로 쳐들어오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하게 만들었던 민지는 의외로 잠잠했다.
아니, 그날의 일이 정말로 생시였던가 싶게 전과 전혀 다름없이 나를 대했다.
오히려 조심스러워지고 거리를 둔 건 예지였다.
그나마 그런 긴장 속의 일주일도 금방 지나가고 개강이 되자 한결 시름을 덜었다.
두 애들 모두 저녁 늦게야 들어오는 걸 보면 바쁜 모양이었다.
덕분에 난 수아와 간만에 여유로운 시간들을 보냈다.
중개사사무실에서는 애초에 예상했던 것처럼 구할 곳은 얼마든지 있다고 했다.
하지만, 너무 급하지만 않다면 개학이 되면서 이동이 많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하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게다가 덤으로 잘만하면 내 방으로 들어올 사람도 비슷한 시기에 맞출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언뜻 모든 게 잘 풀려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내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쁜 예감은 언제나 잘 맞는다는 속설이 틀리지가 않다는 게 바로 증명이 되었다.
개학이 되면서 수아의 가게도 조금씩 손님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11시에 주방장이 퇴근하고 나서는 버거워했다.
조만간 그 사람도 그만둘 테니 어차피 하루라도 빨리 알바를 구하긴 해야 할 시점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쓴다는 걸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방을 보고 찾아오는 대학생들을 하나씩 면접하면서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때문에 그때까지만이라는 조건으로 11시 이후부터는 내가 주방에서 도와주었다.
오랜 자취생활로 다듬어진 음식솜씨가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나도 몰랐었다.
마지막 손님이 될 가능성이 큰 주문을 받아 안주를 내보내고, 주방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릴 때 전화가 걸려왔다.
“ 여보세요~ 민지니?”
번호를 보는 순간 너무나 반가우면서도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12시가 다된 이 시간에 민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일부터가 느낌이 좋지가 않았다.
“ 흐응~ 오빠~”
“ 민지야?”
이미 오빠라는 호칭이야 대수롭지 않았다.
태도야 전과 같았지만 계속 그렇게 불러왔다.
처음에는 예지도 많이 놀라는 눈치였지만 거기에 대해 별다른 내색을 않았다.
그 아이의 속 깊음에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민지의 목소리가 많이 취해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된 것이었다.
“ 으~응~ 바빠~?’
“ 괜찮으니까 이야기해...많이 취한 것 같은데 어디야?”
“ 호호호~ 그래도 날 걱정은 해주는구나?”
“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그래..어디야?”
역시 겉으로 표현을 안 했을 뿐이지 마음 속에 상처는 그대로였던 모양이다.
민지에게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빈정거리는 말투가 무척이나 아프게 느껴진다.
“ 웅~ 여기는....”
민지의 횡설수설이 길어졌다.
얼마나 취했기에 그런가 하는 생각과 함께 그때 만취가 되었던 모습이 떠올라 걱정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그건 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 ..그래서...얘가 모텔을 가자는데..어떻게 할까?”
“ 미, 민지야?”
소개팅을 했던 남자애와 다시 만나서 술을 먹었다고 한다.
잘 생기고 친절하다는 둥 그런 잡설이 나오고 난 다음의 말이 청천벽력이었던 것이다.
“ 딱 30분만 기다릴게...그때까지 오빠가 안 오면...오늘 집에 안 들어갈 거야...
30분이야...거기서 단 1초라도 넘으면 난 여기에 없을 거야...뚜~~”
“ 미, 민지야~!!”
민지를 불러봤지만 이미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어보자 아예 꺼버렸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꼼짝하지 못하고 서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게 질투심인지, 스스로를 망가뜨리려는 민지에 대한 진실한 우려인지는 상관이 없다.
분명한 건 내가 30분 안에 반드시 그곳에 도착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 수아야..미안해...”
“ 전 괜찮으니까 빨리 가봐요...정리하고 알아서 갈게요...”
“ 그래...나중에 통화해..”
수아에게 자세히는 설명을 하지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주인집 큰 딸이 많이 취해서 데리러 가야겠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서둘러 가게를 나왔다.
입 안이 바짝바짝 타왔다.
택시를 잡으러 가는 내 발걸음은 이미 달음박질을 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