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雨緣) (17)
거칠게 키스를 퍼부으며 웃옷을 브래지어와 함께 가슴 위로 밀어 올려버리고서 젖가슴을 거머쥐었다.
속까지 손가락이 파고드는 것만 같은 너무나 부드러운 살덩이가, 으깨어지는 오렌지처럼 왕창 짜그라졌다가 금새 반발을 하면서 출렁거렸다.
그러자, 그 사이에 내 하의를 끌어내려 하늘로 치솟은 성기를 꺼낸 수아의 손이, 등나무 넝쿨같이 칭칭 휘감겨와서는 굵고 튼튼한 기둥을 타고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손과 아랫도리로부터 동시에 밀려드는 아찔한 느낌들,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거세게 소용돌이를 치면서 미칠 듯한 욕정까지 끌어들였다.
숨결이 점점 더 가빠지고 가슴 속에서는 용암이 흘러 넘쳐 그 뜨거움으로 온 세상을 녹여버릴 것만 같다.
무자비한 손짓에 항의라도 하듯이 손바닥을 간질이고 있던 젖꼭지를 붙잡자, 그녀도 손가락으로 귀두를 문질러 짜르르한 쾌감이 내 욕정의 불꽃에다 기름을 들이붓는다.
이제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심경이나 잡념 따위는 완전히 저 기억너머로 사라지고, 오로지 본능적인 욕구만이 남았다.
어쩌면 난 이런 걸 원했는지도 모른다.
민지를 향한 타오르는 갈망, 예지와 함께 떠올리게 되는 당혹감, 그리고 자연스레 수아에게 가져지는 미안함 등등, 이 모든 걸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싶은, 아니, 회피하기 위해서일 거다.
그랬기에 자석에라도 끌리듯 발걸음이 이리로 향해 지금 이렇게 수아를 미친 듯이 탐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던지 알 수 없는 뭔가가 내면에서 재촉을 하고 있었다.
그게 정액을 쏟아내는 일이 되었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는 게 되었든 간에, 한시바삐 토해내 버리라고 경고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속에서 폭발을 일으켜,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 모두를 산산조각으로 날려버릴지도 모른다는 육감이었을 수도 있다.
“ 하아~ 오빠!?”
“ 나중에, 자지를 먹는 건 나중에 해, 어서, 급해!!”
“ 흡~ 네? 네, 아, 알았어요...”
작은 손으로 성기를 거머쥔 채 귀두에다 입술을 가져가던 수아를 붙들었다.
그리고서, 얼떨떨해하는 그녀에게 빠르게 말하며 허리를 잡아 돌려세운 다음 등을 눌렀다.
거칠어진 내 말투와 손짓에 당황하는 듯한 모습으로, 소파 위에다 무릎을 꿇어 등받이에 손을 짚고서 엉덩이를 뒤로 뺀다.
가느다랗게 휘어진 허리 위로 치마를 걷어 올리자, 새하얀 엉덩이의 가운데만 겨우 가린 작은 천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아까 침대에 눕힌 민지의 팬티가 얼핏 떠오르면서, 수아에게 미안함이 드는 동시에 이율배반적이게도 너무나 큰 흥분이 밀려들었다.
더군다나 계곡 사이로 쏙 밀려들어간 곳이 축축하게 젖어, 그 안에 숨은 불그죽죽한 꽃잎의 빛깔마저 비치는 음란한 광경이었다.
‘ 수아의 얼굴을 보기가 미안했던 걸까?’
젖은 팬티를 끌어내리면서 드러나는 탐스러운 엉덩이가 왠지 내게 미소를 짓는 것같이 느껴졌다.
보통 때면 소파에 드러누운 수아에게 올라가든지, 앉은 채로 마주 안아서 서로 얼굴을 보길 더 좋아했다.
그런데, 초조하게 쫓기는 와중에도 이렇게 뒤를 이쪽으로 향하게 만든 건, 아마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크고 맑은 눈동자와 마주치기를 꺼려한 것 같았다.
“ 아~ 뜨거워요...”
쉴새 없이 파도를 치는 머리 속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내 손과 하체는 제각각 할 일을 하느라 여전히 바쁘기만 했다.
미끈미끈한 꽃잎을 더듬어 벌리고는 그 사이를 귀두로 문지르자 수아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뜨겁단다.
안으로 들어간 이후였든지 깊은 곳에다가 정액을 쏟아 부을 때나 내뱉던 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성기가 정말로 불덩이처럼 달아올라있다는 뜻일 거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라 온몸이 열기로 들끓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랬기에 기둥을 거머쥔 내 손으로 평상시와는 다른 온도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 술 때문일까?’
아니면, 그 무엇인가에 대한 갈증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은 깊이 생각하기가 싫다는 듯이 허리를 강하게 밀었다.
“ 아학~ 너무 커~”
“ 수아야~”
어떤 배려도 없이 거칠게 몰아붙이기만 하는데도 수아는 그 여린 몸으로 잘 버텨냈다.
아니, 오히려 뒤로 엉덩이를 밀어오면서까지 격려를 했다.
물기를 타고 미끄러진 귀두가 깊은 속까지 완전히 들어서자 말랑거리는 부드러운 살집이 내 두덩에 부딪쳐왔다.
내게 뜨겁다고 말을 했지만 진짜는 바로 이곳이었다.
생고무처럼 탄력 있게 조여오는 이 질 속이야말로 절절 끓고 있는 뜨거운 온천이었다.
게다가 단순히 뜨겁기만 한 게 아니라, 잘게 물결을 치면서 기둥을 에워싼 벽의 주름으로 마구 비벼오기까지 한다.
“ 헉헉~ 헉~”
“ 아학~ 아~”
‘ 찌걱~ 탁~ 찌걱~ 탁’
단순하게 직선으로만 움직였다.
전과같이 강약을 조절하고 간간히 회전운동을 넣는 등의 상대를 위한 배려 따위는 전혀 없었다.
오로지 최단시간내의 사정만을 목표로 한 너무나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자칫 부러질 듯이 연약하기만 한 허리를 강하게 거머쥔 채로, 아랫배와 두덩이 화끈거릴 만큼 아주 빠르고 거칠게 부딪쳐갔다.
수아의 뽀얀 엉덩이도 마치 손바닥으로 매를 맞은 양 벌겋게 되어, 내 손에 잡힌 잘록한 허리가 대나무처럼 휘청휘청 휘어지면서 잔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 아앙~ 아~ 오빠 자지가 더 커져요~ 아흑~ 좋아~ 그대로 해요~ 어서~ 보지 안에다 싸요~ 아아~”
거품욕조 안에서 물거품이 올라오며 가랑이 사이를 스치는 것 같은 느낌이 왔다.
간질간질하면서도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한 짜릿한 쾌감, 동시에 기둥이 조여 들면서 더욱더 단단해지고 대신에 귀두는 크게 부풀었다.
수아도 내 성기의 그런 변화를 느낀 건지 커다랗게 소리를 쳤다.
안다.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내가 어떤 혼란을 겪고 있어서 자신에게 위안을 찾으려 한다는 걸 느낀 것이다.
그렇기에 나를 위해서 저런 과장된 말을 내뱉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의 자극적인 말투가 발화점이 된 건지, 답답하기만 하던 가슴 속이 순간적으로 뻥 뚫리는 기분과 함께 아래쪽에서부터 거센 물줄기가 발사되었다.
“ 아하학~ 뜨거워~ 아아~ 좋아~ 오빠~ 가득 들어와요~ 아아~ 사랑해요~”
“ 으헉~ 수아야~아~~”
순간적으로 요도 끝이 파열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아주 강한 분출이었다.
지독한 쾌감은 통증과도 비슷한 것 같다.
귀두가 저릿저릿하게 아파오는 듯한 느낌마저 오고 있었다.
어쩌면, 두 사람 몫의 욕정이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른다.
사정과 동시에 언뜻 민지의 그 뜨겁던 키스와 새하얀 하체에 걸린 작은 팬티를 떠올렸던 것이다.
금지된 상상, 죄책감, 그리고 미칠 것 같은 쾌감은 종합선물세트처럼 한 묶음이었든지 무릎이 덜덜 떨려올 정도로 아찔했다.
수아의 질 속 저 깊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줄기를 따라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 하아~ 하아~ 너무 좋았어요...오빠...”
수아가 손을 뒤로 돌려 내 허리를 쓰다듬으면서 부드럽게 소곤거렸다.
더더욱 미안하면서도 가슴이 너무나 푸근해진다.
“ 사랑해, 수아야~”
“ 아~ 오빠~ 저도 사랑해요~”
뒤늦게야 이렇게 뒤쪽에서 안은 걸 후회했다.
이 상냥하고 따사로운 얼굴을 보고만 싶었다.
고개를 뒤로 돌리게 만들어 수아의 등에다 내 가슴을 갖다 붙이면서 키스를 했다.
촉촉하고 보드라운 입술의 감촉과 함께 말랑거리는 혀가 들어와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낭창낭창하게 휘어진 그녀의 허리가 내 아랫배를 든든하게 받쳐주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신혼부부의 예쁜 수저 세트처럼 한 쌍의 숟갈이 겹쳐진듯한 모습으로 일체감을 느끼고 있었다.
“ 쩝쩝~ 쓰읍~”
“ 이젠 그만해 수아야...”
바닥에 쪼그려 앉아, 시들시들해진 성기를 정말로 맛있다는 듯이 소리까지 내고서 빨고 있는 수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 우웅~ 정말로 이거...오빠 자지를 빨고 싶었단 말이에요...너무 맛있어요~ 헤헤~ 쪼옥~”
“ 이리와...내게 키스를 해줄래?”
생글생글 웃음을 지으며 다시 귀두에다 입을 맞추는 수아, 정말로 맛있어서 저러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너무나 잘 안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뭔가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저렇게 시키는 거다.
자신의 행동이나 말이 모두 과장되어 있다는 걸 그녀 스스로는 모를 것이다.
과장이면 어떻고 꾸민 거면 무슨 문제인가? 거기에 담긴 그 진실된 마음이 중요할 뿐이다.
손을 잡아 끌자 안겨오면서 따스한 입술을 붙여온다.
아직도 드러난 채로 새하얗게 흔들리는 젖가슴을 살며시 쥐어보자, 그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이 너무나 포근하다.
‘ 그래...이거야...’
이 따스함, 포근함, 그리고 아늑한 기분, 머리 속이 이제야 맑아지는 것 같았다.
지금도 민지를 생각하면 매혹을 느끼고 욕심이 난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 숙명이자 인연은 바로 수아인 것이다.
“ 사랑해...수아야...”
“ 흐응~ 이제는 괜찮아요?”
“ 으, 응...사실은 말이야...”
“ 쉿~!”
품에 안긴 수아의 젖가슴을 만지작거리면서 망설이다가 말문을 열자, 그녀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눌렀다.
“ 오빠...기분이 좀 풀어졌다면 전 그걸로 좋아요...힘들게 그러지 말아요...
호호호~ 사실은 괜히 오빠의 고민을 들으면 저도 머리가 아플까 겁이 나서 그래요...”
“ ...그래...네 덕분에 이제는 아주 생생해졌어~ 후후~”
다시 한번 내 결심에다 확신을 준다.
아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타인의 심적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때로는 알아도 모른 척을 해주는 건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에서 나오는 지혜였다.
물론 그런 걸 배우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쯤이야, 이미 내 몸으로 겪어본 처지기에 더욱더 잘 알 수 밖에 없었다.
수아는 내게 난 수아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 수아 넌 내가 옮기기만 하면 언제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지?”
“ 네? 네...그건 그래요...왜요?”
“ 으, 응...조금 더 서둘까 싶어서...”
“ ..오빠가 알아서 하세요...그건...”
“ 그래...”
내일부터 중개사사무실 몇 군데에 이야기를 더해두고, 생활정보지와 인터넷에도 올릴 생각이었다.
정 안되면 보증금은 나중에 받더라도 일단은 먼저 옮기는 극단적인 방법도 고려했다.
새로운 입주자가 들어올 때까지 월세를 내가 부담할 각오도 하지만, 솔직히 아저씨가 그걸 받으려 하시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저씨 부부께 죄송스럽고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이유로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이 제일 위험한 존재였다.
이미 스스로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려버렸다.
무리가 되더라도 어떤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연에 방지하는 게 제일 나았다.
“ 좀 늦은 것 같으니까 아예 택시를 타고 사당으로 가는 게 낫겠지? 데려다 줄게...”
“ 네..오빠...”
그냥 이렇게 둘이서 같이 밤을 지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물론 억지로 하면야 가게에서 소파를 붙여 하룻밤 정도를 보내거나 근처의 모텔로 가도 된다.
하지만, 오늘밤만큼은 외박을 하게 되면 문제의 소지를 남길 공산이 컸다.
문득, 민지와 예지 그 둘이 떠오른 것이었다.
아니, 민지야 취해서 잠이 들었으니 출근 전에 살짝 들어가면 모를 테지만, 나오기 직전에 본 예지의 모습이 도저히 그렇게 하지를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밖으로 나돌아다니기보다는 집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인데다가, 요즘은 계속 늦게 잠들었던 예지였기에 이미 우리 둘을 봤었는지도 모른다.
머리 속이 다시 복잡해져 왔지만 지금 그 모든 걸 정리하기에는 무리였다.
시간도 늦은데다가 몸도 마음도 너무나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일단은 수아를 차에다 태우는 게 먼저였다.
몸을 일으켜 옷을 챙겨 입고는 가게 밖의 테이블을 안으로 들이기 위해 서둘렀다.
‘ 딸깍~’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만 괴괴하게 실내를 울렸다.
수아를 바래다주고 오느라 1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던 것과 달리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예지도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 휴~~”
안방 문 앞에 서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굳게 닫힌 저 문이 왠지 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7년이라는 세월 동안 처음으로 가져보는 기분이었다.
그토록 가까웠던 친 혈육과도 같은 아이들과 이렇게나 멀게 느껴지다니, 마치 저 문이 만리장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 헉~!’
그때였다.
순간 착각인줄만 알았다.
문의 손잡이가 스르르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재빨리 돌아서서 내 방으로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 이 자식, 또 피하려는 거야? 도대체 얼마나 더 멍청한 짓을 하려고?’
다리에 힘을 주고는 어깨를 폈다.
자꾸만 피하려고 한다면 또다시 애들에게 더 큰 상처를 줄 것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아이들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하던 어린애가 아니라 나와 똑같은 성인이었다.
“ ..삼촌....”
“ 으, 응...그래. 아직도 안 잤어?”
“ 응...”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나타난 건 예상했던 것처럼 예지였다.
아마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모습, 어쩌면 또 어젯밤처럼 혼자서 눈물을 흘린 건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나를 포함해서 우리 네 사람 중에서, 자신의 감정을 가장 잘 숨길 줄 아는 게 바로 저 아이였다.
어제의 눈물도 내 옷에 남은 흔적만 아니었다면 도저히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 예지도 날 좋아한 걸까?’
아프다. 마음이 너무나 아프다.
나 따위가 뭐라고 이 예쁜 아이들이 줄줄이 이렇게 힘들어해야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됐다.
그나마 예지만큼은 말 그대로 소녀시절의 두근거리는 그런 풋사랑이기를 빌 뿐이었다.
‘ 엄마, 지금도 보고 있지? 언제나 날 지켜보면서 기도하고 있는 거지?
그러면 좀 도와줘...제발...나한텐 얘들이 정말로 소중해...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이 아이들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난 너무나 힘들 거야...’
마음 속으로 엄마에게 애원을 해본다.
그런데, 왜 지금은 제주도의 방파제에서처럼 날 포근하게 안으며 용기를 주었던 엄마의 따스한 품이 느껴지지가 않는 걸까?
“ 예지야...괜찮으면 커피 한잔만 부탁할까? 너도 잠이 안 오면 나랑 말동무나 좀 해주고...”
“ 으, 응...알았어...삼촌...옷이나 갈아입고 기다려...방으로 가져갈게...”
“ 그래...고마워...”
사실은 눈자위가 욱신거리면서 아파올 정도로 너무나 피곤했다.
술기운까지 섞여서 더더욱 그랬다.
아마 베개에다 머리만 갖다 대면 몇 초안에 당장 골아 떨어질게 뻔했다.
그래도 그럴 수는 없었다.
“ 자...삼촌...”
“ 땡큐~ 너도 이리 와서 앉아...”
“ 응...”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앉아있자 조심스럽게 커피잔을 들고서 예지가 들어왔다.
내게 잔을 건네주고서 머뭇거리며 서있는 모습이 날 너무나 슬프게 한다.
그 동안 연심을 숨기고는 예전과 다름없이 나를 대하면서,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상상하자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 예지는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품었을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속의 깊이를 도저히 알기가 힘든 예지였다.
어릴 때부터 과하다 싶을 만큼 총명하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지나쳐버렸던 게 너무나 큰 실수였다.
그런데, 지금 예지는 심정의 동요로 인해서 그런 가면에 살짝 금이 간 모양이었다.
마치 민지를 보는 것 같이 내게 다가오기를 주저하는 모습이라니.
내 옆으로 다가와서 벽에다 등을 기대고 앉는 움직임 또한 조심스럽기만 했다.
그런 모습에 또다시 마음이 싸해진다.
“ 예지야...”
“ 으, 응? 삼촌...”
내 어깨에 살짝 닿은 보드라운 몸을 당겨서 품에다 안았다.
움찔거리면서 조용히 내 가슴팍에 얼굴을 댄 예지, 먼저 안아준 것도 처음이지만 내게 안겨서 이렇게나 긴장한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예민한 아이였다.
특히나 나에 관해서 만큼은 아주 작은 감정의 진폭까지도 느끼는 것 같았다.
이런 아이를 그냥 착한데다 애교가 많아서 그렇다고만 내 편할 대로 생각하고 말았었다.
“ 내가 좋아?”
“ ...응...”
역시, 뜬금없이 단 한마디를 던졌는데도 단숨에 알아듣는 눈치다.
내 말의 진의를 알아채고서 잠시 망설이다가 진중하게 대답을 했다.
나이나 경험 면에서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수아마저도, 내 이런 말버릇에 종종 엉뚱한 오해를 하는 해프닝이 벌어졌었다.
이건 단순히 말에 대한 감각만으로 설명되는 일은 아니었다.
상대방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그리고 상세하게 알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이 아프다.
“ 휴...그래...고마워..정말 고마워...이렇게 예쁜 예지나...민지가 나를 좋아해준다니...”
“ ...이젠...전처럼...안아주고..머리도 쓰다듬어주고...그런 거 안 되는 거지? 삼촌...”
“ ....예..지야...”
가슴이 턱 막히면서 말문이 끊어졌다.
길지도 않은 예지의 몇 마디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내 간절한 바램이 허망하게도 나를 향한 예지의 마음도 그렇게 가볍지가 않았다.
이 아이는 제 언니와는 또 다른 방법으로 자신만의 사랑을 소중하게 키워왔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알기에, 그저 일상 속의 가벼운 접촉에서 아주 작은 보상만을 얻었던 모양이다.
이젠 그마저도 잃어버리게 되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겁을 내면서도 받아들이려 노력을 하고 있는 게 선명히 보였다.
정말로 나보다 훨씬 더 대견하고 어른스러웠다.
결국엔 예지가 아니라 내가 어린애였었다.
“ ..그 언니...좋아해? 아니...사랑해?”
역시 봤었던 거다.
그렇다면 어제의 그것도 눈물이었다는 게 다시 한번 확인됐다.
콧등이 시큰해졌다.
가슴에 안긴 예지의 정수리를 내 턱으로 꾹 누르면서 심호흡을 했다.
이제는 정말로 내가 용감해져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은 피해선 안 된다.
이렇게 여린 아이도 의젓해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 ..그래...맞아...미안해...”
“ ..결혼...할 거야?...그 언니랑....”
“ ...아마도...”
정말로 놀랍다.
그리고, 너무나 미안해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내가 한 말은 몇 마디가 안되었다.
그나마 그마저도 예지가 툭툭 던지는 질문에 짧은 대답이 다였다.
그런데도, 내가 애초에 하려고 그렇게나 고민했던 이야기가 이미 다 끝나버렸다.
이 아이가 내 내면을 얼마나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가 도저히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다만, 나도 확실히 알고 있는 건 한가지가 있었다.
누군가에 대해서 그 정도가 되려면 단순한 관찰이나 관심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 ..역시...안 되는 거였구나...”
“ 예지야....”
“ ..내가 서른 살쯤이 되면...삼촌이 날 쳐다봐줄 줄만 알았는데...
헤헤~ 역시 안 되는 거지? 그러면 삼촌이 너무 힘들 테니까....”
재미있는 농담이라고만 여겼는데 아니었던가 보다.
숨을 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 ..결혼할 때까지만이라도...예전처럼 안아주고 팔베개도 해주고....역시...안되겠지? 삼촌...”
“ ...그래...이제는....”
“ 헤헤~ 알아...그래서, 삼촌이 알까...그렇게 조심했는데...결국엔 들켰네? 헤~에~”
“ ...예...지...야...”
결국엔 예지가 겨우 참고 있던 내 눈물샘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게 얼굴을 묻은 채 헤죽거리는 예지의 말투와는 달리,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면서 내 가슴팍을 축축하게 적셔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질끈 감은 눈으로 한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 ..잘자...삼촌...나 그만 자러 갈게...”
“ 그래...너도 잘자...예지야...”
얼마나 그렇게 하염없이 앉아있었는지를 모르겠다.
예지는 내 가슴에다 얼굴을 묻고, 나는 그런 예지의 머리에다 턱을 괸 채로, 서로의 얼굴을 외면하고서는 각자가 소리 없이 울었다.
내 뺨의 물기는 다 말라버렸지만 내 가슴팍의 척척한 느낌은 그대로였다.
그래도, 예지가 내 품에서 빠져나간 걸 보면 울음을 완전히 그친 모양이었다.
그리고서 조용히 밤 인사를 건네는 예지의 얼굴에는 울었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를 않았다.
여전히 맑고 귀여운 얼굴, 그래서 더욱 아프게만 느껴졌다.
“ 안녕..내 신랑~ 쪽~ 헤헤~”
그때 갑자기 예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너무나 부드럽고 촉촉한 살갗이 내 입술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평상시처럼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고서 나가버렸다.
“ ...예..지...야...”
아마 조금 전의 일들을 겪지 않았다면, 예지의 그 밝고 환한 웃음 뒤에 도사리고 있는 커다란 슬픔을 도저히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닫힌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침대 위로 털썩 쓰러져 누웠다.
너무나 크게만 여겨졌던 고비를 엉겁결에 하나 넘었다.
하지만, 안도감보다는 참기 힘든 상실감이 나를 괴롭혔다.
분명히 뭔가를 잃어버리긴 했는데 그게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모르겠다.
어쩌면 그게 너무나 커서 가까이서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걸 거다.
나중에 한참 뒤로 물러서고 나서야 그 정체를 깨닫고서,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심한 허탈감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고마워...예지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껴본 예지의 입술은 너무나 부드러웠다.
마치 꿈이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미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예지로서는 나와의 작은 추억으로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을 거다.
내가 힘들어할 만한 일들은 대부분 그 아이가 자청해서 짊어졌다.
그리고는, 마치 그 대가라는 듯이 내 입술을 훔쳐 가버렸다.
하지만, 그건 내가 지불한 게 아니라 너무나 큰 선물이었다.
내 죄를 사하고 아픈 마음까지 치료해준 천사가 내리는 축복의 입맞춤이었다.
“ 민지...그래...아직 민지가 있었구나....”
무심결에 그 보드라운 예지의 촉감이 남아있는 입술을 더듬어보다가 문득 민지가 떠올랐다.
골목길에서 열정적으로 퍼붓던 키스와 꿈틀대던 몸짓, 그걸 기억하지 못하기를 염원할 뿐이었다.
워낙 많이 취해있었기에 그럴 가능성도 컸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미 카페에서의 대화가 있었기에 그 다음 이야기를 꺼내는 게 한결 수월하다.
아마 예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 아이가 해왔던 거나 조금 전의 모습을 봐도, 제 언니가 기억을 못한다면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는 않을 거다.
가만히 생각을 하면 할수록 예지가 대단한 아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그 어린애가 어떻게 나는 물론 심지어 제 부모님들까지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게 했는지가 너무나 놀라웠다.
자칭 그리고 나도 인정하는 여자에 대한 도사 진철도, 민지의 마음은 잽싸게 엿봤어도 예지에겐 실패한 것이었다.
“ 자자...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내일부터는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
좀 더 빨리 옮길 방도도 알아보고 민지와의 문제도 풀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아저씨 내외분도 조만간 한번 더 찾아 뵈어야 할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민지와 예지의 일로 고심을 시켜드릴 생각은 없다.
그건 내가 직접 풀어야 할 문제이지 그분들이 나설 일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이사를 서둘러야겠다는 이야기를 전화로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마음 속에 죄스러움이 많아서인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눈과 관자놀이가 욱신거릴 정도였지만 너무나 피곤해서인지 오히려 쉽게 잠이 들지를 않는다.
오늘은 정말로 정신이 없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