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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나의 인생 6

세상을 많이 아는 것과 세상을 보려고 하는 것과의 차이를 물으면 나는 일단 침묵한다. 그것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대답하지 않으면 마치 내가 동물원 우리 안에 멍청하게 서서 서성거리는 사자로 보일 것 같아서 띄엄띄엄이라도 단어를 조립해서 대답한다. 이미 잃어버린 야성이란 것이 다시 회복되지는 않겠지만.


아마, 내 기분이, 딱, 그랬다.


우리 안에서 서성거리다가 갑자기 그동안의 삶으로서는 어떻게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린 사자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굳이 사자가 아니라 쥐새끼로 비유해도 상관없다. 마치 이건 야설을 쓰면서 단어 선택에 신경을 기울이고, 개연성에도 어느 정도 투자하고, 어법에도 어긋나지 않게 모국어를 사용하고, 그러면서 하고 싶은 얘기도 하고, 뭐 그런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자든 쥐새끼든 우리 안의 삶에 길들여져서 파블로프 식 조건 반사에 어울리지 않는 자극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쩔쩔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 여자, 활짝 웃는 여자, 이를 다 드러내도 윗몸이 보이지 않는 여자, 그러면서 웃음에 청춘을 담고 있는 여자, 그러나 지금 재수생이 되려는 아들을 내게 과외 시키려는 여자. 도대체 이 여자의 나이는? 이 여자는 분명히 내 청춘의 그 시절에 남아 있는 여자인데, 아니 나를 순식간에 그 청춘으로 되돌린 여자인데, 아니 그렇게 착각에 빠지도록 만들려는 여자인데.


뭐지? 정말 이건 뭐야? 다시 봐야 해. 아니 진짜 제대로 봐. 두 눈 똑바로 뜨고 현재의 너를 직시해서 네가 경험적으로 혹은 추론적으로 확보한 선입견에 얽매이지 말고 진짜로 저 여자를 제대로 쳐다보고 그리고 네 밑에서 언제나 헐떡거리던 그 살덩어리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야 해. 평소처럼 몸매를 살펴봐서 견적을 뽑아보고, 각 부위별로 평점을 매겨서 어느 부분에 더 점수를 줄 것인지 그런 것들만 봐. 어차피 여자는 살결, 그 위에 요철이 심한 곡선 덩어리, 그리고 결국 내 자지를 받아 줄 수 있는 구멍이라는 종착지를 갖고 있을 뿐이야.


무슨 얘기를 나누면서 시간이 지나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의례적인 얘기였을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 나는 재수생이 되려는 아들이 아니라 그녀를 보기로 약속했다. 물론 내 마음 속의 약속이었지만. 나는 그녀를 보기 위해 올 것이다. 아파트 현관을 빠져 나오면서 등 뒤로 스르르 닫히는 자동문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형형색색으로 뱅글거리며 돌고 있었다. 꼭 막대 사탕처럼. 소용돌이치는 원형으로 돌아가는 색소가 칠해진 그 사탕.


차가운 바람이 아파트 광장에 주차된 차들 위로 아직 사라지지 않은 나뭇잎들을 날려 보내고 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맞바람이 얼굴 정면으로 몰아쳐서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고 볼이 얼얼해지도록 뺨을 때렸다. 나는 바람으로부터 등을 돌려서 남은 담배를 피웠다. 몸이 떨리고 손이 떨렸다. 머릿속에는 그 여자의 얼굴, 활짝 웃는 얼굴이 도저히 지워지지 않을 부조처럼 새겨져 있었다.


“언제든 아이 때문에 연락할 일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주세요.”


나는 명함을 내밀면서 덧붙였다.


“혹시 어머님께 제가 연락드릴 일도 있으니 번호 좀 가르쳐주세요.”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말했다. 무슨 방법이든 만들어 내야 해. 내 머릿속에는 그 생각이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전화번호를 받아둬야 해.


“아, 그럼요. 언제든 전화 하세요.”


웃음. 그녀는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펜을 들고 자신의 번호를 메모지에 적어서 내게 주었다. 통통하지 않은, 날씬한 손가락과 손등이었다. 나는 그 손에서 얼른 시선을 돌려 메모지를 받았다. 잠깐, 그녀의 손가락과 내 손가락이 닿았다. 심장의 회전수가 순식간에 빨라졌고 드럼 스틱으로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가 커졌다.


나는 담배를 끈 후 휴대 전화를 끄집어냈다. 전화번호부를 액정에 띄었다. 강 민희란 글자와 숫자. 나는 오른손으로 그 이름과 숫자를 쓰다듬었다. 액정에 손자국이 선명하게 묻어났다. 그것은 마치 내가 민희의 얼굴을 쓰다듬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내려와 가리는 그녀의 하얀 이마, 그리고 온통 그것밖에 보이지 않던 동그라면서도 갸름한 눈, 그 눈은 멈추지 않고 계속 웃음을 짓고 있었고, 시원하게 각도를 그리며 내려간 코, 얇은 윗입술과 두터운 아랫입술, 갸름한 얼굴의 양 옆을 차지하는 볼은 웃을 때마다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곤 했다.


수업은 어느 새 네 번이나 진행되었다. 그 중 나는 민희를 두 번 밖에 보지 못했다. 두 번은 외출했는지 현관문을 열어주는 이는 내가 가르치는 성민이었다. 과외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그녀는 돌아와 있지 않았다. 나는 실망한 기분으로 어두워진 아파트 광장을 가로질러 주차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 오늘 몇 시에 학교에서 나올 수 있어?


차의 시동을 걸기 전 나는 유리의 폰으로 문자를 전송한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데 휴대전화에 신호음이 들려온다. 나는 오른 손으로 액정에 찍힌 문자를 확인한다.


-- 담임샘이 야자 안 빼주신데ㅠㅠ 9시 30분 아악


나는 이어폰으로 단축키를 누른다. 요란한 아이돌 그룹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것을 한참동안 듣는다. 정말이지 얘한테 전화할 때마다 고욕이다. 듣기 싫은 노래를 한동안 듣고 있어야 하다니......


“여보세요?”
“어, 진원이니? 오늘 수업할 수 있지?”
“아, 선생님. 네, 할 수 있어요. 지금 어디......”
“알았다. 시간 맞춰 갈게.”


나는 진원의 투명한 고음을 자르고 할 말을 마친 후 전화를 끊는다. 가슴 한 편에서 무엇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차가 내 앞을 지나 좌회전을 해 가는 것을 보면서 손바닥으로 여러 번 경음기를 울려댔다. 검은 색 어둠을 뚫고 그 소리는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며 거리에 퍼져 갔다.


진원의 아파트 상가에서 초밥 다섯 개와 미소 국을 마신 후 차 옆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파르스름한 연기가 진회색 공기에 섞여 사면팔방으로 흩어지고 있다. 나는 재가 자기 무게를 못 이겨 떨어질 때까지 계속 입에 담배를 문 채로 서 있었다. 진원의 집이 있는 아파트 동을 쳐다보았다. 그 동의 창문들은 대부분 불이 켜져 있다. 거실의 하얀 불, 욕실의 노란 불이 뒤섞여서 모두 서로 다른 삶을 살도록 하고 있다. 각자 서로 다른 시간의 진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속에는.


“선생님, 미워요. 제가 할 말이 있는데 끊으시다니.....”
“집안에 네 혼자 있어?”
“또......”
“미안. 무슨 얘기하려던 거였는데?”
“쳇, 엎드려 절 받기네요.”
“미안하다. 선생님이 잘못했어.”
“엄마가 선생님 연락 오시면 전화해 달라고 그러셨어요. 오시기 전 연락 달라고 하셨는데......”
“그랬구나.”


“모두들 나만 빼놓고 다 자기들은 놀러 갔어요. 아빠와 오빠는 할아버지 댁에 가셨고요. 엄마는 정연 아줌마 댁에서 자고 온대요. 나 혼자만 쓸쓸히 공부나 해야 한다고요. 저녁밥도 시켜 먹었어요. 선생님, 진원이 완전히 버림 받은 거라고요.”
“정연 아줌마?”
“아, 엄마랑 같이 약국 하시는 아줌마요.”
“그래?”


진원은 양 주먹을 눈에 갖다 대고 우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나는 진원의 페이스에 맞춰서 같이 말을 섞어 주거나 달래는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러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에잇, 오늘 정말 선생님 밉다. 내가 슬픈데도 위로해 주지 않다니.......”
“공부나 하자.”


나는 진원보다 앞서서 과외 하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가 의자에 앉을 때까지 진원은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책을 끄집어냈다. 윗도리를 벗어서 의자에 걸어두었다. 여전히 진원이 들어올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뭐해? 진원아, 빨리 들어와.”


나는 조금 언성을 높여서 진원을 불렀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고, 진원의 모습이 방안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슬쩍 침대 위를 보았으나 지난번처럼 진원의 팬티가 놓여 있지도 않다.


나는 다시 방밖으로 나갔다. 통로에는 진원이 없었다. 거실 쪽을 보았다. 그곳에도 진원은 없었다.


“진원아, 어디 있어?”


나는 소리를 높여 불러본 후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벽걸이 텔레비전 위에 미선의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보통 어느 집에 걸려 있는 사진처럼 비슷한 포즈를 하고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 아마 전국 사진관 연합회라는 곳이 있어 그곳에 소속된 모든 사진사들이 저런 포즈, 저런 미소로 모델들을 찍도록 집단 교육이라도 받은 듯하다.


“진원아. 네 방에 있니?”


나는 진원의 방으로 갔다. 십 센티미터쯤 열려진 진원의 방안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훌쩍, 훌쩍. 나는 그 방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원은 침대 위에 앉아서 훌쩍거리고 있었다. 학용품과 뒤섞인 사춘기 소녀 애 특유의 냄새가 방안에 퍼져 있다.


“선생님한테 화났구나. 미안해. 오늘 선생님 기분이 별로였거든. 그랬던 거야.”


나는 진원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덕분에 내 어깨와 진원의 어깨가 닿았다. 진원에게는 향수 냄새가 났다. 미선의 향수, 내가 선물한 그 향수.


“선생님, 미워.”


진원은 우앙 울면서 갑자기 상체를 돌려 내 가슴에 손으로 가린 얼굴을 묻는다. 나는 엉겁결에 두 손을 들었다가 품에 안긴 진원의 뒷머리에 올려놓는다. 손바닥으로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어 준다. 언제나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보이는 예측 불가능한 변덕을 봐 온 탓인지 별로 당황스럽지는 않다. 스스로 감정을 가라앉힐 때까지 그냥 기다려 주면 된다. 경험적으로 그것만큼 최상의 대응 방법은 없었다.


“선생님이 무심했어. 네가 섭섭한 줄 몰랐구나. 미안해.”


나는 오른쪽 손바닥으로 진원의 머릿결을 위 아래로 몇 번 부드럽게 문질러 준다. 진원의 두 손바닥이 자신의 얼굴과 내 가슴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가 스르르 빠져 나간다. 그러자 내 가슴에 진원의 이마와 콧등이 느껴진다.


“자, 그런 의미로 오늘 공부 일찍 마쳐줄게. 그걸로 선생님 용서해 줘.”
“키스해.......”
“......”
“키스해 줘요.”


아주 작은 목소리가 가슴 앞에서 들려온다. 데시벨을 측정하는 기구로 측정해도 거의 수치로 잡을 수 없는 소리 같았다. 대신 셔츠만 입고 있는 내 가슴팍에 말을 하느라 벌린 입에서 뜨거운 김이 느껴진다.


“무슨 소리야?”
“제게 키스해 주세요. 그럼 용서해 드릴게요.”


진원은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본다. 밤하늘에 빛나는 순수한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와 전혀 밤하늘의 별과 상관없는 내 눈이 마주친다. 진원의 눈물은 눈 주위에 자국만 남기고 말라 있다.


“안 돼. 그건 말도 안돼.”


가증스러운 정 윤호. 나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침을 뱉는다.


“그럼 공부 안할래요.”


진원은 고개를 떨어뜨린다. 다시 얼굴이 내 가슴에 닿은 상태다.


“그러자. 그럼 선생님 갈게.”


나는 진원의 뒷머리에 올린 두 손을 내려서 진원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젖히며 일어선다. 진원을 보지 않고 방문을 나선다. 여전히 내면에서는 침을 뱉는 소리가 더 커지며 점점 내용이 뚜렷한 말로 바뀌기 시작한다. 봐, 쟤 먹을 수 있을 걸. 먹어 봐. 네가 언제 여자라면 애든 어른이든 가려서 먹었니? 쟤가 너한테 키스해 달라잖아? 그건 뭘 의미할까? 넌 1%의 가능성이 없는 여자라도 어떻게든 먹었잖아. 쟨 거의 50퍼센트 이상의 가능성이 있게 보이는 데도 그만 두려는 거야?


“선생님, 공부할게요.”


과외 하는 방의 탁자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책을 넣는데 진원이 들어온다. 입술을 앙다물고 주먹을 꽉 쥐고 있다. 172센티미터의 키는 미선과 같지만 가슴은 공 모양을 그리며 훨씬 앞으로 튀어 나와 있는 진원이 탁자 앞에 버티고 선다. 내 눈과 마주치면서도 고개를 떨어뜨리지 않는 진원의 눈동자는 아까처럼 밤하늘에 반짝거리며 떠 있는 별이 아니다. 더 이상 순수의 별이 아니다.


“그럼 앉아.”


내가 먼저 시선을 돌린다. 아까처럼 계속 내가 쳐다볼 수가 없다. 탁자 위에 올려놓은 가방을 내려놓으려는데 눈앞으로 큰 지름을 갖지 않고도 럭비공처럼 폭발적으로 돌출해 있는 가슴이 스쳐 지나간다. 진원은 자기 자리에 앉아서 시끄럽게 책을 펼친다. 수업은 정상적인 것처럼 진행된다. 그러나 진원은 평소와 다르게 전혀 말을 하지 않는다. “예.” “아, 그렇구나” 란 말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는 지적하지도 않고 그냥 할 말을 이어간다. 40분쯤 그렇게 수업이 진행된 후, 나는 평소처럼 휴식을 선언한다. 진원은 펜을 쥔 채로 고개를 책으로 떨어뜨린 채 무엇인지 모를 동그라미를 공책 위에 마구 그리고 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방안을 나선다. 거실로 나가 베란다 밖으로 나간다. 미선의 성품대로 베란다 바닥도 베란다 벽도 깨끗이 청소되어 있다. 나는 과외 방에서 대각선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부부 침실 창문 쪽으로 가서 휴대전화의 단축키를 누른다. 1번 길게. 음악도 없이 순수하게 기계적인 신호음을 들으면서 아까 진원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엄마가 선생님 연락 오시면 전화해 달라고 그러셨어요.”


그러고 보니 미선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네 선생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눈앞에 다시 그 웃음이 떠오른다.


“아까 집에서 뵙지 못해서요.”
“네, 제가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외출했어요.”
“제 전화가 실례되는 건 아닌지......”
“아뇨,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자주 전화 드려야지요.”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바쁘시면 제가 다시......”
“아뇨, 아직 밖이지만 괜찮아요. 제가 선생님 전화 받으러 로비로 나왔어요.”
“그렇군요.”
“네.”


다시 웃음. 심장 위에 찍힌 그 부조가 다시 선명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저..... 내일 잠시 뵐 수 있을까요?”
“집에서요?”
“아뇨, 제가 그쪽으로 갈 시간이 나지 않을 듯해서 바깥에서 뵈었으면 합니다.”
“그래요? 좋아요. 안 그래도 선생님께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었어요. 어디서 할까요?”


민희의 말투는 머뭇거림 없이 마치 위에서 아래로 물이 흘러내리듯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 결혼 후 한 번도 고생하지 않고 부유하게 살아온 삶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투였다. 한 번 본 남편과 함께 차를 마셨는데 소아과 의사답게 온화했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남자였다. 아마 강제로 아내를 범하려고 했거나 혹은 아내 몰래 바람 같은 건 피워보지도 않았을 타입이었다. 섹스를 해도 아마 정상위로 얌전하게 했을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선생님, 듣고 계세요?”
“네.”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요? 근사한 곳으로 해 주세요. 호호.”


나는 머릿속으로 재빨리 지도를 그려낸 후, 지금까지 여자와 함께 갔던 레스토랑 중 가장 멋진 곳의 좌표를 찾아냈다.


“좋은 프랑스 식당이 있는데, 거긴 어떻겠습니까?”
“아, 좋아요.”
“제가 시간과 위치를 문자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네, 선생님.”
“내일 뵙겠습니다.”
“네, 내일 뵙지요.”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약속이었는데, 나는 마치 은밀한 연인과의 밀회 장소를 정한 기분이었다. 민희는 아마 자기 자식을 가르치기 시작한 과외 선생에게 저녁 식사라도 대접하는 기분일 것이다. 어쩌면 남편도 함께 나올 지도 모른다. 아, 그제야 내가 얼마나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휴대 전화의 단축키를 눌렀는지 절감하기 시작한다.


나는 베란다 창으로 맞은 편 아파트를 쳐다보았다. 커튼이 젖혀진 어떤 집 거실 풍경이 눈앞에 들어왔다. 여러 색으로 발광하는 텔레비전의 화면과 그것을 보고 있는 한 가족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 표정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형체만으로도 그들의 단란한 저녁 한 때, 가족의 일상적인 풍경이 전원 풍경을 즐겨 그리는 화가들의 그림 속 분위기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민희를 보지 못하고 그 집을 나올 때부터 내 마음 속에 걷잡을 수 없이 몰아치던 폭풍우와 해일은 가라앉은 기분이다. 어쨌든 전화를 하기는 잘 했어.


“선생님, 애인과 약속 잡으셨어요?”


과외 하던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 진원은 입을 삐죽거렸다. 나는 시선을 돌려 책을 펼친다.


“나, 애인 없다고 했잖아.”
“다 들었는데요 뭐. 사귀고 싶어서 작업 거신 거잖아요.”
“......”


내 부주의를 탓하기에는 오히려 전화 소리를 엿들은 진원의 앙큼함이 얄밉다. 앞에 앉은 진원을 쏘아본다. 진원은 내 시선을 맞받으면서 피하지 않는다. 잡티 하나 없이 맑은 피부에 시원한 이목구비를 한 진원은 대학생처럼 보인다. 미선의 20년 전의 얼굴 같으면서도 어딘가 다르다. 아버지 쪽의 유전자를 조금은 받았나 보다.


“저, 자위도 해요.”
“......”


기습적인 진원의 공격에 나는 할 말을 잊는다. 아마 만화였다면 입을 벌리는 신이 지금 순간의 내 캐릭터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나는 입을 벌리지 않는다.


“선생님 생각하면서 자위해요. 매일 밤 해요. 자기 전에요. 제 팬티가 다 젖을 정도로요.”
“진원아.......”


진원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다. 나는 멍하니 진원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진원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나는 아래서 진원을 올려다보고 있다. 진원의 얼굴 너머로 지난 번 이 방 침대 위에 놓여 있던 팬티가 겹쳐진다. 흰 색 바탕에 푸른 줄무늬가 있는 팬티. 내가 집어 올리는 바람에 그만 보게 된 그 팬티의 안. 보지가 닿는 부분에 흰 얼룩이 묻어 있던 그 팬티의 모습이 진원의 얼굴 너머에서 확대되어 선명하게 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 오늘은 어떻게든 맞추려고 했는데(1회 1섹스) 결국 맞추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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