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들의 오너 시즌 2 - 完 -
[epilogue]
#1- 마지막 작전.
야마토는 살짝 눈을 굴려 좌우를 둘러보았다.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 미호의 기운에 그는 살짝 눈을 감았다.그에 반해 준 일행은 무려 넷이나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뭔지 모르지만 숨어있는게 둘. 그리고 뒤에는 백법사.앞에는 오너..’
야마토는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가 여유로운 이유는 오직 한가지, 여기저기 베이고 터진 준의 상태 때문이었다.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너냐?”
힘겹게 일어나는 준의 입가에서 분노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은빛의 긴 무기를 들고 있는 그를 바라본 야마토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를 죽인게 나냐고 묻는 것이라면 맞다.”
야마토는 침착하려 애쓰며 중얼거렸다. 손이 파르르 하고 떨렸다.마지막 김노인의 공격을 완벽하게 회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몸의 충격이 남아 있는 듯했다.애초에 공격범위 자체가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 음공을 완벽하게 허공으로 흘리는 것은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천천히 분노로 물든 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동료이자 사부를 잃은 슬픔에 가득한 그의 표정을 본 야마토의 표정은 더더욱 굳어졌다.
‘내 때는..볼수 없던 눈이군.’
누군가를 없에야 한다, 혹은 누군가로 부터 오는 살해의 위협을 피해야만 한다라는 의지만이 지배했던 자신의 세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그런 감정의 흐름 자체를 이해를 하지 못하는 야마토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슈웅!
공기를 가르며 어디선가 예고없이 날아드는 화살에 야마토의 몸이 흐릿해 지며 몇발자국 뒤로 물러섰다.그리고 그의 동선을 따라서 쉴새 없이 수아의 화살이 날아와 지면에 꽃히기 시작했다.
그것이 마지막 전투의 신호탄 이었던 모양이었다. 준과 유나는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고는,어디선가 쉴새 없이 날아드는 수아의 화살을 피하는 야마토의 모습쪽으로 손을 뻗었다.
리미는 계속해서 불규칙하게 변하는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를 썼다.마나가 새어 나가지 않는 진을 구축하고 그 곳에 기절한 세라를 눕힌 리미는 조금의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듯 그녀의 옆에 털썩 하고 주저 앉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상식 이상의 속도로 움직이는 야마토의 모습이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위험하다.’
리미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아무리 상대가 한명이라지만 김노인을 제압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게다가 준의 상태는 리미가 봐도 너무나 좋지 않았다.세라와 노아같은 강한 페어리가 없는 지금,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장의 상황은 너무나 좋지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결국 오너와 오너의 싸움이라 볼때, 이건 정말 위험하다.’
오너가 강해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어차피 페어리가 아무리 강해도 오너가 죽으면 모든것이 끝장이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오너와 오너간의 대결로 불거지는 이유도 바로 같은 맥락이었다.
리미는 피가 베어나오는 붕대위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상대는 고작 한명이었지만, 역대 대전 상대중 가장 최악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나..주인님..”
리미는 침착하게 통신구를 통해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유나와 준의 통신구는 세라를 막아낼때 이미 파괴가 되어버린 모양이었다.리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전장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준이 발생시키는 음공의 범위를 교묘하게 벗어나며 공격까지 날리는 야마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공격력은 평범한 수준이다. 범위가 큰 것도 아니야. 그저 마나를 다룰수 있다는 것일뿐. 문제는 스피드다. 스피드를 제외하면 예전 크리스틴 하고 별반 차이가 없는 정도.’
리미의 분석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 분석이 있음에도 야마토를 공략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게다가 그는 꾸준히 준만을 노리고 있어, 언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리미의 두 눈이 야마토를 향했다. 리미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그의 움직임은 쉴새 없이 수아와 유나의 공격들을 피해내며 준을 향해 공격을 날리고 있었다. 준 역시 음파공을 파생시켜 야마토를 압박했지만, 그에게 직접적인 타격은 주지 못하고 있었다.
‘저건?’
리미의 눈망울이 반짝 하고 빛이 났다.
“프로즌 웨이브!”
유나의 시동어가 울리고, 곧이어 수아의 화살이 반대편에서 날아 들었지만, 야마토는 그것들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피해내며 준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준이 강하게 뮤즈를 휘두르며 저항하지 않았더라면, 야마토의 손에 맺힌 마나는 준의 심장으로 파고들었을 지도 몰랐다.
‘유나와 수아의 공격을 보지 않고 피하고 있다..’
어떻게든 즉석에서 무기를 연성하여 지원사격을 하려던 리미는 생각을 고쳐 먹었다.초반에만 해도 유나쪽을 바라보며 그녀의 마법을 견제하면서 움직였던 야마토가,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여유롭게 유나의 마법을 피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리는 동선은 일정한 규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구나..그가 처음에 유나와 수아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던 이유는 그녀들의 공격패턴을 감지하기 위해서였다.’
야마토는 리미의 생각보다 훨씬 더 전략적인 인물이었다.미호가 없는 상황에서 처음부터 준을 노리고 무턱대고 달려들었다가는 이미 수준급에 달한 수아의 궁술과 유나의 마법을 막아낼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준이 그녀들의 공격을 열어주기 위해 접근전을 하지 않는것 역시, 야마토는 한수 앞서 읽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주인님을 향해 접근전을 펼친다는 것은, 이미 그녀들의 공격 패턴을 철저하게 믿고 움직이기 때문일수도 있다. 더불어 수아와 유나로서는 주인님과 바싹 붙어 있는 야마토에게 공격을 날리기가 쉽지 않겠지.’
공기의 저항막을 씌운 채로,야마토의 강권들을 힘겹게 막아내는 준의 모습에 유나는 더이상 공격을 하지 못했다. 준에게서 붙지 못하도록 초반에 마법공세를 펼친것이, 오히려 야마토를 이롭게 하는 결과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래..그렇다면 저것을 역이용하는 거다. 어차피 야마토에게는 이미 수아와 유나는 안중에도 없어.’
거기까지 생각한 리미는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수아가 있을법한 숲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아.들려?”
제발 들려야만 했다. 리미는 그렇게 속으로 쉴새 없이 외치고 있었다.어쩌면 이 싸움의 히든카드는 수아가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리미의 귓가에 긴박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으아아 리미! 너 지금 어디있는 거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틈도 없이, 리미는 재빨리 수아에게 말했다.
“잘들어 수아.지금 화살이 몇개 정도 남아있어?”
-두개...밖에 없어.-
리미의 시선이 고군분투하는 준에게로 향했다.쉴새 없이 이동하며 준을 공격하는 야마토의 모습이 보여왔고, 준은 미쳐 공격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방어막을 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간혹가다 유나역시 공격을 날렸지만,역시나 준을 의식해서 큰 마법을 날리지 못했다. 아직까지 준이 잘 버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리미는 재빨리 통신구를 향해 속삭였다.
“수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2-상처, 그리고...
“하아..하아..”
또다시 땅바닥을 구르던 준은 굴러가는 그 순간 뮤즈를 힘껏 땅에 꽂아 넣으며 튕겨내듯 몸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유나에게 받은 한기를 이끌어 내어 방어했지만, 야마토는 몸에 붙은 얼음덩이들을 여유롭게 부수며 준쪽으로 파고들었다. 치고 빠지는게 워낙 빠르니, 유나는 좌표지정을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사부님이 돌아가셨습니다.덧붙여...차우씨도.-
노아가 미호와 야마토를 막아섰던 바로 그때, 리미가 들려준 말이 아직도 준의 머릿속에 메아리쳤다.그리고, 소멸되어 버린 마유미의 마지막 모습이 계속해서 준의 상념속에서 반복되며 그려지고 있었다.
눈물이 터져나왔다. 오너라는 원치 않는 길을 가게 된 후로, 알던 지인들도 멀리해야만 했고 소중한 동료들을 잃어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그걸 쓴다면..’
폐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 여기저기 뼈에도 이상이 있는 것만 같았다. 최후의 한방을 노리는 야마토의 공격은 독사처럼 집요하게 준의 숨통을 노리고 쇄도하고 있었다. 지면의 마나를 틀어버리는 그 공격을 행한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야마토가 갖고 있는 전후후무한 스피드에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사부를 죽인 사람.’
자신은 절대 바라보지도 못할 경지에 이른 그를 죽인 남자였다. 세라나 노아가 발목을 묶어준다면 해 볼만한 작전이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 야마토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원거리 타입의 수아와 유나가 지금의 상황에서는 거의 도움을 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영리하군.’
야마토는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치고 빠지면서 준이 큰 기술을 노리도록 유도하던 그는 의외로 준이 방어에 치중하며 열심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이자 약간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기술을 쓴다면, 그만큼 딜레이도 길게 존재하는 법이지.’
김노인의 실수가 바로 그것이었다. 무언가를 방어하는것이 아닌 회피하는 것에 능숙한 자신을 상대로, 음공의 절기를 펼친것은 김노인의 잘못이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무방비 상태가 길게 존재하는 것이었고, 야마토는 특유의 그 ‘속도’로 김노인의 뒤를 점하여 그를 제압한 것이었다. 별다른 큰 기술이 없고, 마나를 다루는 수준 역시 오너들의 평균치를 벗어나지 않는 야마토가 고수를 제압한 것은 단지 발빠른 움직임과 회피능력, 그리고 상대의 공격패턴을 빠르게 계산하여 헛점을 파악하는 통찰력 뿐이었다.
“프로즌 스피어!”
좌측면에서 들려오는 유나의 목소리. 그리고 날아드는 얼음의 창을 가벼운 몸동작으로 피해 버린 야마토는, 유나쪽은 돌아보지도 않은채 피식 하고 웃었다. 목표물인 준, 그는 이미 거친 호흡을 내쉬며 한계에 다달아 있는 듯했다.
‘자자.이 긴 시간동안의 전쟁도 이제 슬슬 끝을 내자구.’
‘그..그게 가능할까?’
리미를 통해 작전을 하달받은 수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발을 동동 굴렀다.남은 화살은 단 두개. 그리고 리미가 내린 작전명령은 그녀로서는 너무나 부담이 되는 한 수가 아닐수 없었다.
‘연습 좀 해 둘걸..’
금세 수아의 얼굴은 울상이 되어 있었다. 늘 노아와 함께 주둔지에서 수련을 지시했던 리미의 말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았던 것에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의 기억 저편으로. 리미가 해줬던 말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아.앞으로 어떤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날지 몰라.그때가 되면, 너의 궁술이 승패를 좌우하는 열쇠로 작용할 수도 있어.-
-지금은 아니고?-
-애석하게도..아직은 부족해-
리미의 말에 수아가 입술을 삐죽하고 내밀때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트루피의 궁술은 유명해. 일정 경지에 오르면 불의 속성, 얼음의 속성을 활에 실어 날릴수도 있다고 들었어.-
-응.그건 사실이야.나도 이제 곧 그것을 쓸수 있게 될 거라구-
-하지만 수아. 문제는 화살이라는 무기가 갖는 극단적인 단점이 있다는 거야.-
-그게 뭔데?-
-원거리 무기이기 때문에, 피하기가 용이 하다는 거지.물론 니 궁술은 예외일수도 있어.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이라 볼수는 없지.-
-그..그건 알지만!-
-잘 들어 수아. 예전에 TV만화 영화에서 본적이 있지?유도탄이라는 것.-
수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리미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바로 그것처럼 상대의 마나를 따라갈수 있는...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추적궁(追跡弓)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떤 상대라도 우리쪽에서 승기를 잡을수 있는 기회를 네가 마련할 수 있는거야.-
-그..그런게 가능해?-
-이론적으로는 가능해.우선...-
리미가 가르쳐 준대로 연습은 해 보았지만,늘상 빈둥거리며 놀기만 했던 자신이 너무나 후회되는 수아였다.하지만 그녀도 오늘만큼은 ‘노아도 놀았는데 나만 이렇게 곤란해져야 한다니’하는 철없는 후회따윈 하지 않았다.
‘우선..상대의 마나를 느낀다.’
수아는 침착하게 야마토의 손에 맺힌 푸른빛 마나에 조금씩 집중하기 시작했다.리미만큼 마나를 수족처럼 다루지는 못하였지만, 다행히도 수아는 준 일행 모두의 마나를 조금이나마 잘 알고 있었다.즉, 그녀가 알고 있지 않은, 이질감이 느껴지는 마나를 분류해버리면 그것이 야마토의 것이 되는 셈이었다.
‘상대의 마나를 기억하고, 화살에 마나를 주입한다.’
트루피의 궁술은 마나를 무기에 실어 날리는 수법의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수아는 리미가 해준 조언을 차분하게 머릿속에 정리하며, 남은 두개의 활중 하나를 화살줄에 먹였다. 지금 쏘는 것이 야마토의 주의력 분산을 노린것이라면, 그의 숨통을 노릴 것은 바로 다음에 쏠 화살이었다.
‘할 수있다. 마나는 자력과도 같아서 서로 상반된 마나끼리는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다고 리미가 그랬어.그렇다면, 내가 느끼고 있는 저 놈의 마나와 다른 것을 실어 날리면 된다.리미가 거짓말을 할리가 없어!’
머리칼을 묶어올린 그녀의 고운 아미로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나머지 화살 한 촉을 입에 문 그녀는, 줄을 팽팽하게 당겨 야마토의 쪽을 겨누기 시작했다.
‘게다가 저 놈은 세라처럼 화살을 튕겨내는 타입이 아니야.회피를 하려는 놈이라면, 오히려 더 승산이 있다. 잘못하면..주인님이 다치겠지만....’
손이 떨려왔다. 지금의 이 한 방 보다는, 바로 연이어 쏠 입에 물린 한 개의 화살에 정신을 집중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으응?’
심상치 않은 기운에 야마토는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예상대로 그가 서있던 자리는 움푹 패이는가 싶더니, 이윽고 몇개의 돌맹이가 타악 하고 튀어올랐다.
‘의외로 지 스승보다 많은 기술을 보유한 녀석이로군.’
뮤즈를 불었을 뿐인데 마치 무형의 창을 던진 것처럼 지면이 패이는 것을 보고는 야마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그가 살짝 몸을 비틀자, 이번에도 목표를 잃은 유나의 마법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라 야마토의 옆에 있던 나무를 얼음동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큭!”
준은 온몸이 지릿한 통증에 이가 부숴질 만큼 입을 앙다물고는, 뮤즈를 회전하며 야마토쪽으로 뛰어나갔다.섣불리 공격을 하다가는 헛점이 드러나 결정타를 맞을수도 있었지만, 계속해서 야마토가 힘을 비축할 시간을 줘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흥..저런 어림없는 공격으로...응?’
자신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은빛 궤선을 여유롭게 피해낸 야마토는 익숙한 파공음이 들려오자 본능적으로 손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한바퀴 회전시켰다. 그런 그의 움직임 사이로, 수아의 화살 하나가 일직선으로 날아들며 그의 팔과 옆구리 사이로 허무하게 빠져나가 버렸다.
‘흥.아직도 저 공격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군.뻔한 공격을..’
야마토는 수아쪽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일반적인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드는 것에 비해, 수아의 화살은 마나가 실려있어 일직선으로 날아드는 특징이 있었다. 보통사람에게는 총알과도 같은 스피드 일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회피하기가 더욱더 수월해 보였다.
파직!
또한번 준의 뮤즈가 휘둘러졌고, 야마토는 그것에서 파생되는 무형의 공격을 피하려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렸다.다시한번 들려오는 공기를 가르는 소리.그는 움직이는 그 와중에도 조소를 흘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느낄수 있었다. 수아의 화살이 또한번 자신을 노리고 날아들고 있음을.
부우웅!
이번엔 야마토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화살. 그는 여유롭기 까지 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여버렸고, 그것은 허무하게 야마토를 스쳐 지나가 숲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준은 단전이 뜨거워지는 듯한 착각이 들어왔다.공기를 흡입하여 악기를 불어야 음공이 발동되는 것임에도, 폐 부분이 지릿지릿 저려 제대로 그것을 불 수가 없었다.하지만, 준의 눈앞에 있는 야마토의 몸은 뒤쪽으로 심하게 중심이 쏠려 있었다. 공격을 한다면 지금이 최적의 기회였다.
화르르르르
유나의 한기처럼 조절할수 없었던 마유미가 주고 간 열화의 기운. 뮤즈를 통해 방출되는 준의 숨결과 마나는 공기중에서 삽시간에 불꽃으로 화했다.뮤즈가 마치 화염방사기로 변한 듯한 착각이 들어왔다.뮤즈의 앞으로 엄청난 양의 불꽃들이 생성되며 야마토의 전신으로 폭사해 갔다.그것마져 빠르게 회피하는 그. 그리고 다급하게 야마토의 반격을 방어할 자세를 취하려던 준의 눈에, 방금 스쳐지나갔던 수아의 화살이 허공에서 급선회하는 모습이 똑똑히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어...아...”
야마토의 두 눈은 불신으로 물들었다.무언가가 뜨거운 것이 자신의 뇌를 훑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매만진 그는, 이윽고 자신의 머리쪽에 작은 구멍이 뚫려 버린것을 느낄수 있었다.
“이...이럴...수...”
늘 냉정했던 그의 눈망울이 떨려왔다.자신이 피했던 화살이, 마치 독사처럼 몸을 구부려 다시금 자신의 관자놀이를 뚫고 지나갔음을 그가 알리 없었다.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그의 몸으로, 준이 생성해 낸 화산의 용암과도 같은 뜨거운 불길이 휩싸고 돌기 시작했다.
‘해냈다...’
자신의 화살이 야마토에게 적중하고, 연이어 준의 화염공격이 그를 활활 태워버리는 모습을 보고야 수아는 나무가지 위로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지나치게 집중을 한 탓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긴장감이 풀린 그녀의 손은 쉴새 없이 떨리고 있었고, 멈춰 버린줄 알았던 땀방울들은 끊임없이 그녀의 몸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땡그랑.
“흑...흑...”
준은 뮤즈를 놓쳐버리며, 그제서야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다리가 풀려버려 땅바닥에 주저앉은 그에게 유나와 리미가 달려오고 있었다. 살이 타는 고약한 냄새가 협곡을 메웠다.스산한 산바람 사이로 연신 잿가루가 휘날리고 있었지만, 준은 한참동안이나 유나를 껴안고 오열할 뿐이었다.
#3- 참혹한 분쟁의 끝.
‘니가 있어서...나는 안심할 수 있는거야.니가 날 지켜주니까.’
세라는 괴로움에 몸부림 쳤다.예전에 무인도에서 준이 해줬던 그 말이 쉴새없이 그녀의 머리속에서 메아리쳤다. 긴 머리카락이 수아의 의해 단발머리가 되었음에도, 눈물젖은 세라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녀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끊임없이 자책했다. 다른이도 아닌 준에게 살기를 드리웠다는 사실은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최면이 풀리고 나서 그간의 일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게다가 모두가 세라에게 쉬쉬하고 있었지만 세라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준의 몸에 자신의 공격에 의한 상처도 포함되어 있음을.
전쟁의 규모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때보다 작았지만,피해만큼은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느 전쟁보다 무시무시했다. 늘 밝은 차우의 모습.그리고 그를 따르던 아리따운 두명의 페어리 역시 이제는 더이상 볼수 없는 것이었다. 준에게 있어 정신적 지주였던 김노인도, 그리고 그를 따르는, 최강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던 유희와 초희의 모습마저도.
‘마유미..’
준은 힘없이 마유미의 카드를 꺼내들었다.붉은 머리칼을 가진 소녀의 그림이 투영된 마유미의 카드는 늘 그랬던 것처럼 준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언제나 헌신적이었던 그녀의 모습과 차우, 김노인의 모습이 차례로 지나갈때마다 준의 가슴은 불에 데인듯 쓰라리고 아파왔다.
‘그녀를...나오지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성장은 준의 마나를 먹으면서 하지만, 부활 만큼은 원래의 오너인 J의 손에 의해 이루어져야만 하는 얄궂은 운명을 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울지마 세라.너의 잘못이 아니야.”
준은 짧아져 버린 세라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한번도 자신의 앞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을 보인적 없는 그녀가, 자신의 옷깃을 촉촉히 적실 정도로 우는 모습에 그의 마음도 찢어지게 아파왔다.
‘죄송해요 사부.이렇게 밖에...해드리지 못해서.’
준은 자신의 뒤에서 아무말 없이 서있는 유나,리미,수아와 노아의 시선을 뒤로 하고, 세라를 품에 안은 채로 눈앞에 있는 작은 무덤을 바라보았다. 김노인이 유일하게 오랫동안 머물렀던 이름없는 작은 산의 언덕. 그리고 늘 유희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었던 바로 그 곳에 조촐한 무덤이 마련되어 있었다.
검흔이 길게 나있는 준의 볼위로 말라버린줄만 알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모든게 자신의 부주의였다.블랙맘바의 정체를 조금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아마 모두가 살아서 서로 술잔을 기울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많은 능력자를 데리고 있는 그로서도, 지나가버린 시간의 태엽을 다시 전으로 감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우씨는 찾을수가 없을것 같습니다.몸이 분해되어 버렸을 테니...아마 그가 있을법한 위치를 뒤진다 해도 힘든 일이겠지요.”
리미의 말에 준은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내었다.어느새 그의 옆으로 다가온 노아가 준의 옷자락을 잡아 끌었다. 어느새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 귀여운 두 눈망울에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준을 더욱더 아프게 만들었다.
“너무 많은것을 잃었어.너무...”
준의 말에 세라는 간신히 눈물을 참고 그의 품안에서 떨어져 나왔다.그 누구도 그녀를 탓하지 않았지만, 세라가 갖은 상처는 누구보다 깊은 것이었다.
재정비를 모두 마쳤지만, 이미 전투로 인해 황폐해질 때로 황폐해진 숲속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준은 손에 잡히는 마유미의 카드를 저도 모르게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마유미를 살릴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뭐?”
조용히 들려오는 리미의 말에 준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우경과의 접전 때문에 여기저기 붕대를 감고 있는 리미는,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소리야?”
“말 그대로...마유미를 구할 방법이 있습니다.딱..하나있지요.”
“그게 뭔데?”
“아시겠지만... 이 세계에서의 페어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때문에 완벽한 죽음도 존재하지 않지요.”
“하지만...그녀를 깨울수 있는 사람은...”
“네.알고 있습니다.J뿐이지요. 그는 죽었구요. 하지만 말씀 드렸다시피 그녀는 존재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다만 카드에 갇혀 있을 뿐이지요.”
“그럼...깨어나게 할 방법이 있다는 말이야?”
이번에는 수아의 독촉이었다. 궁금증이 가득한 모두의 시선을 둘러본 리미는, 침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네...그녀가...아니, 여기있는 페어리 모두가 완벽한 존재가 되는 세계.프로센으로 그녀의 카드를 가지고 돌아간다면...그녀는 다시 깨어나게 되겠죠.”
#4-끝나지 않은 여행.
늘상 밝았던 그들의 저녁은 그 어느때보다 초라했고 침울했다. 이미 부숴질때로 부숴져 버린 통나무집을 치우고 나서, 그나마 형태가 남아있는 곳에 모닥불을 피워 임시 방편을 마련한 준 일행은 원형으로 둥글게 모여 앉았다.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리미가 낮에 했던 그 말이후로 모두가 저마다의 깊은 상념에 빠져있음에 틀림없었다.타다닥 하는 장작이 타는 소리와 풀벌레 우는 소리들이 고요한 달빛 아래 주기적으로 울려퍼졌다.
“제대로 될 확률이 있을까?”
한참의 침묵끝에 준이 입을 열었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은 리미에게로 슬며시 돌아갔다.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은 세라 역시 짧아진 자신의 머리칼이 어색했는지 연신 머리를 매만지며 리미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크룬들이야 프로센으로 갔다가 다시 이 쪽 세계로 넘어오는 이중작업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50년이라는 주기가 필요하지만, 저희는 다릅니다.원래부터가 프로센에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든 프로센으로 되돌아 갈수 있습니다. 다만...”
“다만...?”
리미는 준의 되물음에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하얀 그녀의 피부가 모닥불 때문에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차원을 넘게되면 모든 존재는 불완전 해집니다. 페어리에게 오너라는 존재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요. 오너와의 마나에 기생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라나 유나가 프로센에서 이루기 힘든 경지를 이곳에서는 쉽게 오른것 역시 오너의 마나를 먹으며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저희가 프로센으로 돌아가게 되면 완벽한 존재로 바뀌겠지요.지금 주인님이 이 세계에서 아무런 이상없이 살아갈수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반대로 프로센에서는 주인님의 존재가 불완전 해지는 겁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준의 목으로 마른침이 꿀꺽 하고 넘어갔다.그의 얼굴에 감도는 긴장감을 읽은 것일까? 리미의 작은 입술이 조용히 열린다.
“덧붙여서 페어리들의 실력역시 프로센에서의 실력으로 되돌아 가겠지요.물론 모두 그 곳에서도 강했기 때문에 페어리라는 존재가 된 것이겠지만, 이 곳에 와서 많이 성장한 것도 사실이니까요. 오너의 마나를 통해 이룩한 경지는 프로센에 가면 초기화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나는 프로센으로 가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입장이 반대가 되는 거겠죠. 주인님이 저희들의 마나에 기생을 하는 방식으로. 물론 저희는 다수이니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어떤 방식으로 마나에 기생을 하는 건지 나는 알수 없잖아.”
“제가 사용하는 연성진 중에 임의로 복수의 마나를 단수화 시키는 진법이 있습니다. 프로센에 떨어지자 마자 그것을 행한다면 자연스럽게 저희들의 마나를 주인님이 공유하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리미 그럼 너는 프로센에 가는 것을 찬성하는 거야?”
이번엔 유나의 질문이었다.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는 그 질문에, 리미는 침착하게 두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언제나..늘 그래왔듯이...주인님의 선택에 따를 뿐.”
준은 고개를 떨구며 마유미의 카드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와서 더욱더 고생만 시킨것 같은 미안함이 뒤늦게 밀려왔다.
“가면..마유미를 살릴수 있는 거겠지?”
“물론 입니다. 카드를 갖고 있는 이상 전혀 무리가 되지 않습니다.”
“유희씨와 초희씨는?”
세라의 질문에 리미는 고개를 저었다.일종의 간절함 마저 깃든 세라의 두 눈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힘들어. 두 분의 카드는 발견되지 않았으니까.게다가 그게 가능하다고 할 지라도... 그 두사람에게는 그것이 배려가 아닐수도 있겠지.”
유나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고향으로 돌아간다 해도, 많은 세월을 공유한 오너의 기억은 떨칠수 없을 테니까.오히려 다시만날 수 없는 오너와의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갖은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 더욱더 가혹한 일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겠어. 마유미를 살릴 수 있다면.”
“주인님.섯불리 결정할 일이 아닐수도 있어요.”
유나의 말에도 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노아는 여전히 이리저리 눈망울을 굴리며 준의 옆에 붙어있을 뿐이었고, 항상 말이 많은 수아도 오늘만큼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준은 신념에 가득찬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모두를 바라보았다.
“차우를 잃었고, 사부를 잃었어. 마유미를 살릴수 있다면 그 방법을 택할래. 내가 불완전한 존재가 되어 버리더라도...마유미는 나를 막기 위해서 몸을 날려 소멸되었으니까.”
이윽고 노아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누구보다도 마유미를 잘 따랐던 그녀에게는 눈물을 글썽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일지도 몰랐다.조용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준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모두..내가 간다면 따라와 주겠어? 너희들이 가지 않는 다면 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하겠지만...”
“전 갈래요.”
성격급한 유나의 대답이었다. 모두의 얼굴을 쭉 둘러본 그녀는, 달빛을 받아 더욱더 반짝이는 은발 머리사이로 결의 찬 눈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 괴물이 그랬어요.프로센에...내 아빠가 있다고...”
“그럼..프로센에 간다면 기억이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준의 질문에 리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기억은 이미 페어리가 되기 전에 삭제되었습니다.돌아간다 해도 저희가 기억하는 것은 지금과 똑같은 수준입니다. 유일하게 기억이 남아있는 세라에게 의존해야 겠지요. 세라를 따라 프로센의 궁으로 찾아가 유나의 아버지라는 그 대 마법사를 만난다면, 삭제된 기억을 되찾을수 있습니다. 더불어서...유나와 마유미가 빙계, 화염계로 한정지어진 그 경계선 역시 허물수 있겠죠.”
리미의 말에 유나의 얼굴에는 금세 화색이 돌았다.빙계 이외에 다른 마법까지 익힐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늘 마법에 대한 탐구욕이 강했던 유나에게는 가뭄의 단비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아닐수 없었다.
“그럼...언제 갈수 있는 거야?프로센으로.”
준의 질문에 리미는 상처가 난 곳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번 질문만큼은 준을 제외한 전원이 다 알고 있는듯, 리미에게 시선이 집중되지 않았다.약간은 썰렁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리미가 그녀들을 대표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준비과정은 상당히 길었다.
준은 바닥에 그려지는 문양들이 워프의 마법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복잡한 것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신기한것은 늘 마법진에 관해서 유나와 리미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는데, 이번만큼은 모두가 달라붙어 묵묵히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것이었다.마법을 모르는 세라,노아와 수아마저도 진지하게 마법진을 완성해 가는 모습에 준은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가져가야할 물건들은 별로 없었다. 사부인 김노인의 묘에 마지막 인사를 한 준은, 대부분이 파괴된 집기들 사이에서 쓸만한 것들을 챙겨 마법진 쪽으로 조금씩 옮기기 시작했다.가장 중요한 마유미의 카드는 준의 품속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그는 그것이 빠질까 매번 손을 더듬어 확인하며, 모두를 수용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거대하게 그려진 마법진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다...된거야?”
“네.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요.”
무려 두시간에 걸친 진법의 완성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본 준은 리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끝나지 않은, 아니,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될 여행에 모두는 긴장했는지 말이 없었다.
“일반적인 워프보다...열배는 어지러우실 거에요.”
리미의 말에 준은 워프할때의 그 멀미날 것 같은 기분이 생각나 미간을 찡그렸다. 그것도 겨우 익숙해진 준에게 리미의 말은 엄포나 다름없는 강한 것이었지만, 준은 굳게 마음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마법진 위로.”
오너 전쟁을 위해 영국으로 가던 그때와 비슷한 광경이었다.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지만, 준은 신중하게 싸놓은 물건들을 마법진 위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때처럼, 노아는 준의 허리를 끌어 안으며 마법진 위로 올라섰고, 모두가 올라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리미가 마법진 위에 위치했다.
“주인님.”
“응.”
“이제...돌이킬수 없을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어.”
“후회하지...않으실 건가요?”
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페어리들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준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을거야.너희들이 있으니까...불완전하다는 건 말이 안되는 거잖아.너희들로 인해 완전해 진다고 해야 옳은 거지.”
준의 대답이 마음에 든 것일까. 수아는 반짝이는 금발머리를 뒤로 넘기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런 그의 옆으로 다가온 세라는,조용히 준의 차가워진 손을 잡아주었다.
“시작합니다.”
유나의 주문에 따라 마법진은 영롱한 빛으로 감싸지기 시작했다. 준은 눈을 찌를듯한 광채에 노아와 세라의 손을 잡은채로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수아도 준의 뒤에 서서 그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 안았다.고글을 쓴 리미는 유나의 주문에 따라 하나하나 발동되는 마법진 위의 문양들을 일일이 다 체크하고 나서야,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유나의 눈망울이 워프진에서 나오는 광채 때문에 푸른빛으로 일렁거린다. 모두가 눈을 감고 있는 것까지 확인한 유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마법진위로 써두었던 문양들이 하나하나 빛이 나며 마법진 전체가 회전하기 시작했다.흡사 거대한 시계의 내부처럼, 큰 마법진안에 있는 수십개의 작은 마법진 들은 톱니바퀴를 서로 맞추어 돌고 있었다.달빛과 별빛이 지배한 어느 야산의 밤. 그리고 신비한 빛을 뿜어대는 그 마법진 위에서, 유나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워프 게이트!”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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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지막 작전.
야마토는 살짝 눈을 굴려 좌우를 둘러보았다.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 미호의 기운에 그는 살짝 눈을 감았다.그에 반해 준 일행은 무려 넷이나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뭔지 모르지만 숨어있는게 둘. 그리고 뒤에는 백법사.앞에는 오너..’
야마토는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가 여유로운 이유는 오직 한가지, 여기저기 베이고 터진 준의 상태 때문이었다.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너냐?”
힘겹게 일어나는 준의 입가에서 분노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은빛의 긴 무기를 들고 있는 그를 바라본 야마토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를 죽인게 나냐고 묻는 것이라면 맞다.”
야마토는 침착하려 애쓰며 중얼거렸다. 손이 파르르 하고 떨렸다.마지막 김노인의 공격을 완벽하게 회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몸의 충격이 남아 있는 듯했다.애초에 공격범위 자체가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 음공을 완벽하게 허공으로 흘리는 것은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천천히 분노로 물든 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동료이자 사부를 잃은 슬픔에 가득한 그의 표정을 본 야마토의 표정은 더더욱 굳어졌다.
‘내 때는..볼수 없던 눈이군.’
누군가를 없에야 한다, 혹은 누군가로 부터 오는 살해의 위협을 피해야만 한다라는 의지만이 지배했던 자신의 세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그런 감정의 흐름 자체를 이해를 하지 못하는 야마토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슈웅!
공기를 가르며 어디선가 예고없이 날아드는 화살에 야마토의 몸이 흐릿해 지며 몇발자국 뒤로 물러섰다.그리고 그의 동선을 따라서 쉴새 없이 수아의 화살이 날아와 지면에 꽃히기 시작했다.
그것이 마지막 전투의 신호탄 이었던 모양이었다. 준과 유나는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고는,어디선가 쉴새 없이 날아드는 수아의 화살을 피하는 야마토의 모습쪽으로 손을 뻗었다.
리미는 계속해서 불규칙하게 변하는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를 썼다.마나가 새어 나가지 않는 진을 구축하고 그 곳에 기절한 세라를 눕힌 리미는 조금의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듯 그녀의 옆에 털썩 하고 주저 앉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상식 이상의 속도로 움직이는 야마토의 모습이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위험하다.’
리미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아무리 상대가 한명이라지만 김노인을 제압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게다가 준의 상태는 리미가 봐도 너무나 좋지 않았다.세라와 노아같은 강한 페어리가 없는 지금,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장의 상황은 너무나 좋지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결국 오너와 오너의 싸움이라 볼때, 이건 정말 위험하다.’
오너가 강해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어차피 페어리가 아무리 강해도 오너가 죽으면 모든것이 끝장이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오너와 오너간의 대결로 불거지는 이유도 바로 같은 맥락이었다.
리미는 피가 베어나오는 붕대위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상대는 고작 한명이었지만, 역대 대전 상대중 가장 최악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나..주인님..”
리미는 침착하게 통신구를 통해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유나와 준의 통신구는 세라를 막아낼때 이미 파괴가 되어버린 모양이었다.리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전장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준이 발생시키는 음공의 범위를 교묘하게 벗어나며 공격까지 날리는 야마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공격력은 평범한 수준이다. 범위가 큰 것도 아니야. 그저 마나를 다룰수 있다는 것일뿐. 문제는 스피드다. 스피드를 제외하면 예전 크리스틴 하고 별반 차이가 없는 정도.’
리미의 분석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 분석이 있음에도 야마토를 공략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게다가 그는 꾸준히 준만을 노리고 있어, 언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리미의 두 눈이 야마토를 향했다. 리미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그의 움직임은 쉴새 없이 수아와 유나의 공격들을 피해내며 준을 향해 공격을 날리고 있었다. 준 역시 음파공을 파생시켜 야마토를 압박했지만, 그에게 직접적인 타격은 주지 못하고 있었다.
‘저건?’
리미의 눈망울이 반짝 하고 빛이 났다.
“프로즌 웨이브!”
유나의 시동어가 울리고, 곧이어 수아의 화살이 반대편에서 날아 들었지만, 야마토는 그것들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피해내며 준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준이 강하게 뮤즈를 휘두르며 저항하지 않았더라면, 야마토의 손에 맺힌 마나는 준의 심장으로 파고들었을 지도 몰랐다.
‘유나와 수아의 공격을 보지 않고 피하고 있다..’
어떻게든 즉석에서 무기를 연성하여 지원사격을 하려던 리미는 생각을 고쳐 먹었다.초반에만 해도 유나쪽을 바라보며 그녀의 마법을 견제하면서 움직였던 야마토가,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여유롭게 유나의 마법을 피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리는 동선은 일정한 규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구나..그가 처음에 유나와 수아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던 이유는 그녀들의 공격패턴을 감지하기 위해서였다.’
야마토는 리미의 생각보다 훨씬 더 전략적인 인물이었다.미호가 없는 상황에서 처음부터 준을 노리고 무턱대고 달려들었다가는 이미 수준급에 달한 수아의 궁술과 유나의 마법을 막아낼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준이 그녀들의 공격을 열어주기 위해 접근전을 하지 않는것 역시, 야마토는 한수 앞서 읽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주인님을 향해 접근전을 펼친다는 것은, 이미 그녀들의 공격 패턴을 철저하게 믿고 움직이기 때문일수도 있다. 더불어 수아와 유나로서는 주인님과 바싹 붙어 있는 야마토에게 공격을 날리기가 쉽지 않겠지.’
공기의 저항막을 씌운 채로,야마토의 강권들을 힘겹게 막아내는 준의 모습에 유나는 더이상 공격을 하지 못했다. 준에게서 붙지 못하도록 초반에 마법공세를 펼친것이, 오히려 야마토를 이롭게 하는 결과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래..그렇다면 저것을 역이용하는 거다. 어차피 야마토에게는 이미 수아와 유나는 안중에도 없어.’
거기까지 생각한 리미는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수아가 있을법한 숲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아.들려?”
제발 들려야만 했다. 리미는 그렇게 속으로 쉴새 없이 외치고 있었다.어쩌면 이 싸움의 히든카드는 수아가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리미의 귓가에 긴박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으아아 리미! 너 지금 어디있는 거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틈도 없이, 리미는 재빨리 수아에게 말했다.
“잘들어 수아.지금 화살이 몇개 정도 남아있어?”
-두개...밖에 없어.-
리미의 시선이 고군분투하는 준에게로 향했다.쉴새 없이 이동하며 준을 공격하는 야마토의 모습이 보여왔고, 준은 미쳐 공격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방어막을 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간혹가다 유나역시 공격을 날렸지만,역시나 준을 의식해서 큰 마법을 날리지 못했다. 아직까지 준이 잘 버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리미는 재빨리 통신구를 향해 속삭였다.
“수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2-상처, 그리고...
“하아..하아..”
또다시 땅바닥을 구르던 준은 굴러가는 그 순간 뮤즈를 힘껏 땅에 꽂아 넣으며 튕겨내듯 몸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유나에게 받은 한기를 이끌어 내어 방어했지만, 야마토는 몸에 붙은 얼음덩이들을 여유롭게 부수며 준쪽으로 파고들었다. 치고 빠지는게 워낙 빠르니, 유나는 좌표지정을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사부님이 돌아가셨습니다.덧붙여...차우씨도.-
노아가 미호와 야마토를 막아섰던 바로 그때, 리미가 들려준 말이 아직도 준의 머릿속에 메아리쳤다.그리고, 소멸되어 버린 마유미의 마지막 모습이 계속해서 준의 상념속에서 반복되며 그려지고 있었다.
눈물이 터져나왔다. 오너라는 원치 않는 길을 가게 된 후로, 알던 지인들도 멀리해야만 했고 소중한 동료들을 잃어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그걸 쓴다면..’
폐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 여기저기 뼈에도 이상이 있는 것만 같았다. 최후의 한방을 노리는 야마토의 공격은 독사처럼 집요하게 준의 숨통을 노리고 쇄도하고 있었다. 지면의 마나를 틀어버리는 그 공격을 행한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야마토가 갖고 있는 전후후무한 스피드에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사부를 죽인 사람.’
자신은 절대 바라보지도 못할 경지에 이른 그를 죽인 남자였다. 세라나 노아가 발목을 묶어준다면 해 볼만한 작전이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 야마토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원거리 타입의 수아와 유나가 지금의 상황에서는 거의 도움을 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영리하군.’
야마토는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치고 빠지면서 준이 큰 기술을 노리도록 유도하던 그는 의외로 준이 방어에 치중하며 열심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이자 약간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기술을 쓴다면, 그만큼 딜레이도 길게 존재하는 법이지.’
김노인의 실수가 바로 그것이었다. 무언가를 방어하는것이 아닌 회피하는 것에 능숙한 자신을 상대로, 음공의 절기를 펼친것은 김노인의 잘못이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무방비 상태가 길게 존재하는 것이었고, 야마토는 특유의 그 ‘속도’로 김노인의 뒤를 점하여 그를 제압한 것이었다. 별다른 큰 기술이 없고, 마나를 다루는 수준 역시 오너들의 평균치를 벗어나지 않는 야마토가 고수를 제압한 것은 단지 발빠른 움직임과 회피능력, 그리고 상대의 공격패턴을 빠르게 계산하여 헛점을 파악하는 통찰력 뿐이었다.
“프로즌 스피어!”
좌측면에서 들려오는 유나의 목소리. 그리고 날아드는 얼음의 창을 가벼운 몸동작으로 피해 버린 야마토는, 유나쪽은 돌아보지도 않은채 피식 하고 웃었다. 목표물인 준, 그는 이미 거친 호흡을 내쉬며 한계에 다달아 있는 듯했다.
‘자자.이 긴 시간동안의 전쟁도 이제 슬슬 끝을 내자구.’
‘그..그게 가능할까?’
리미를 통해 작전을 하달받은 수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발을 동동 굴렀다.남은 화살은 단 두개. 그리고 리미가 내린 작전명령은 그녀로서는 너무나 부담이 되는 한 수가 아닐수 없었다.
‘연습 좀 해 둘걸..’
금세 수아의 얼굴은 울상이 되어 있었다. 늘 노아와 함께 주둔지에서 수련을 지시했던 리미의 말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았던 것에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의 기억 저편으로. 리미가 해줬던 말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아.앞으로 어떤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날지 몰라.그때가 되면, 너의 궁술이 승패를 좌우하는 열쇠로 작용할 수도 있어.-
-지금은 아니고?-
-애석하게도..아직은 부족해-
리미의 말에 수아가 입술을 삐죽하고 내밀때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트루피의 궁술은 유명해. 일정 경지에 오르면 불의 속성, 얼음의 속성을 활에 실어 날릴수도 있다고 들었어.-
-응.그건 사실이야.나도 이제 곧 그것을 쓸수 있게 될 거라구-
-하지만 수아. 문제는 화살이라는 무기가 갖는 극단적인 단점이 있다는 거야.-
-그게 뭔데?-
-원거리 무기이기 때문에, 피하기가 용이 하다는 거지.물론 니 궁술은 예외일수도 있어.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이라 볼수는 없지.-
-그..그건 알지만!-
-잘 들어 수아. 예전에 TV만화 영화에서 본적이 있지?유도탄이라는 것.-
수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리미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바로 그것처럼 상대의 마나를 따라갈수 있는...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추적궁(追跡弓)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떤 상대라도 우리쪽에서 승기를 잡을수 있는 기회를 네가 마련할 수 있는거야.-
-그..그런게 가능해?-
-이론적으로는 가능해.우선...-
리미가 가르쳐 준대로 연습은 해 보았지만,늘상 빈둥거리며 놀기만 했던 자신이 너무나 후회되는 수아였다.하지만 그녀도 오늘만큼은 ‘노아도 놀았는데 나만 이렇게 곤란해져야 한다니’하는 철없는 후회따윈 하지 않았다.
‘우선..상대의 마나를 느낀다.’
수아는 침착하게 야마토의 손에 맺힌 푸른빛 마나에 조금씩 집중하기 시작했다.리미만큼 마나를 수족처럼 다루지는 못하였지만, 다행히도 수아는 준 일행 모두의 마나를 조금이나마 잘 알고 있었다.즉, 그녀가 알고 있지 않은, 이질감이 느껴지는 마나를 분류해버리면 그것이 야마토의 것이 되는 셈이었다.
‘상대의 마나를 기억하고, 화살에 마나를 주입한다.’
트루피의 궁술은 마나를 무기에 실어 날리는 수법의 정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수아는 리미가 해준 조언을 차분하게 머릿속에 정리하며, 남은 두개의 활중 하나를 화살줄에 먹였다. 지금 쏘는 것이 야마토의 주의력 분산을 노린것이라면, 그의 숨통을 노릴 것은 바로 다음에 쏠 화살이었다.
‘할 수있다. 마나는 자력과도 같아서 서로 상반된 마나끼리는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다고 리미가 그랬어.그렇다면, 내가 느끼고 있는 저 놈의 마나와 다른 것을 실어 날리면 된다.리미가 거짓말을 할리가 없어!’
머리칼을 묶어올린 그녀의 고운 아미로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나머지 화살 한 촉을 입에 문 그녀는, 줄을 팽팽하게 당겨 야마토의 쪽을 겨누기 시작했다.
‘게다가 저 놈은 세라처럼 화살을 튕겨내는 타입이 아니야.회피를 하려는 놈이라면, 오히려 더 승산이 있다. 잘못하면..주인님이 다치겠지만....’
손이 떨려왔다. 지금의 이 한 방 보다는, 바로 연이어 쏠 입에 물린 한 개의 화살에 정신을 집중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으응?’
심상치 않은 기운에 야마토는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예상대로 그가 서있던 자리는 움푹 패이는가 싶더니, 이윽고 몇개의 돌맹이가 타악 하고 튀어올랐다.
‘의외로 지 스승보다 많은 기술을 보유한 녀석이로군.’
뮤즈를 불었을 뿐인데 마치 무형의 창을 던진 것처럼 지면이 패이는 것을 보고는 야마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그가 살짝 몸을 비틀자, 이번에도 목표를 잃은 유나의 마법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라 야마토의 옆에 있던 나무를 얼음동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큭!”
준은 온몸이 지릿한 통증에 이가 부숴질 만큼 입을 앙다물고는, 뮤즈를 회전하며 야마토쪽으로 뛰어나갔다.섣불리 공격을 하다가는 헛점이 드러나 결정타를 맞을수도 있었지만, 계속해서 야마토가 힘을 비축할 시간을 줘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흥..저런 어림없는 공격으로...응?’
자신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은빛 궤선을 여유롭게 피해낸 야마토는 익숙한 파공음이 들려오자 본능적으로 손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한바퀴 회전시켰다. 그런 그의 움직임 사이로, 수아의 화살 하나가 일직선으로 날아들며 그의 팔과 옆구리 사이로 허무하게 빠져나가 버렸다.
‘흥.아직도 저 공격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군.뻔한 공격을..’
야마토는 수아쪽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일반적인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드는 것에 비해, 수아의 화살은 마나가 실려있어 일직선으로 날아드는 특징이 있었다. 보통사람에게는 총알과도 같은 스피드 일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회피하기가 더욱더 수월해 보였다.
파직!
또한번 준의 뮤즈가 휘둘러졌고, 야마토는 그것에서 파생되는 무형의 공격을 피하려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렸다.다시한번 들려오는 공기를 가르는 소리.그는 움직이는 그 와중에도 조소를 흘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느낄수 있었다. 수아의 화살이 또한번 자신을 노리고 날아들고 있음을.
부우웅!
이번엔 야마토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화살. 그는 여유롭기 까지 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여버렸고, 그것은 허무하게 야마토를 스쳐 지나가 숲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준은 단전이 뜨거워지는 듯한 착각이 들어왔다.공기를 흡입하여 악기를 불어야 음공이 발동되는 것임에도, 폐 부분이 지릿지릿 저려 제대로 그것을 불 수가 없었다.하지만, 준의 눈앞에 있는 야마토의 몸은 뒤쪽으로 심하게 중심이 쏠려 있었다. 공격을 한다면 지금이 최적의 기회였다.
화르르르르
유나의 한기처럼 조절할수 없었던 마유미가 주고 간 열화의 기운. 뮤즈를 통해 방출되는 준의 숨결과 마나는 공기중에서 삽시간에 불꽃으로 화했다.뮤즈가 마치 화염방사기로 변한 듯한 착각이 들어왔다.뮤즈의 앞으로 엄청난 양의 불꽃들이 생성되며 야마토의 전신으로 폭사해 갔다.그것마져 빠르게 회피하는 그. 그리고 다급하게 야마토의 반격을 방어할 자세를 취하려던 준의 눈에, 방금 스쳐지나갔던 수아의 화살이 허공에서 급선회하는 모습이 똑똑히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어...아...”
야마토의 두 눈은 불신으로 물들었다.무언가가 뜨거운 것이 자신의 뇌를 훑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매만진 그는, 이윽고 자신의 머리쪽에 작은 구멍이 뚫려 버린것을 느낄수 있었다.
“이...이럴...수...”
늘 냉정했던 그의 눈망울이 떨려왔다.자신이 피했던 화살이, 마치 독사처럼 몸을 구부려 다시금 자신의 관자놀이를 뚫고 지나갔음을 그가 알리 없었다.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그의 몸으로, 준이 생성해 낸 화산의 용암과도 같은 뜨거운 불길이 휩싸고 돌기 시작했다.
‘해냈다...’
자신의 화살이 야마토에게 적중하고, 연이어 준의 화염공격이 그를 활활 태워버리는 모습을 보고야 수아는 나무가지 위로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지나치게 집중을 한 탓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긴장감이 풀린 그녀의 손은 쉴새 없이 떨리고 있었고, 멈춰 버린줄 알았던 땀방울들은 끊임없이 그녀의 몸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땡그랑.
“흑...흑...”
준은 뮤즈를 놓쳐버리며, 그제서야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다리가 풀려버려 땅바닥에 주저앉은 그에게 유나와 리미가 달려오고 있었다. 살이 타는 고약한 냄새가 협곡을 메웠다.스산한 산바람 사이로 연신 잿가루가 휘날리고 있었지만, 준은 한참동안이나 유나를 껴안고 오열할 뿐이었다.
#3- 참혹한 분쟁의 끝.
‘니가 있어서...나는 안심할 수 있는거야.니가 날 지켜주니까.’
세라는 괴로움에 몸부림 쳤다.예전에 무인도에서 준이 해줬던 그 말이 쉴새없이 그녀의 머리속에서 메아리쳤다. 긴 머리카락이 수아의 의해 단발머리가 되었음에도, 눈물젖은 세라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녀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끊임없이 자책했다. 다른이도 아닌 준에게 살기를 드리웠다는 사실은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최면이 풀리고 나서 그간의 일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게다가 모두가 세라에게 쉬쉬하고 있었지만 세라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준의 몸에 자신의 공격에 의한 상처도 포함되어 있음을.
전쟁의 규모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때보다 작았지만,피해만큼은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느 전쟁보다 무시무시했다. 늘 밝은 차우의 모습.그리고 그를 따르던 아리따운 두명의 페어리 역시 이제는 더이상 볼수 없는 것이었다. 준에게 있어 정신적 지주였던 김노인도, 그리고 그를 따르는, 최강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던 유희와 초희의 모습마저도.
‘마유미..’
준은 힘없이 마유미의 카드를 꺼내들었다.붉은 머리칼을 가진 소녀의 그림이 투영된 마유미의 카드는 늘 그랬던 것처럼 준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언제나 헌신적이었던 그녀의 모습과 차우, 김노인의 모습이 차례로 지나갈때마다 준의 가슴은 불에 데인듯 쓰라리고 아파왔다.
‘그녀를...나오지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성장은 준의 마나를 먹으면서 하지만, 부활 만큼은 원래의 오너인 J의 손에 의해 이루어져야만 하는 얄궂은 운명을 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울지마 세라.너의 잘못이 아니야.”
준은 짧아져 버린 세라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한번도 자신의 앞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을 보인적 없는 그녀가, 자신의 옷깃을 촉촉히 적실 정도로 우는 모습에 그의 마음도 찢어지게 아파왔다.
‘죄송해요 사부.이렇게 밖에...해드리지 못해서.’
준은 자신의 뒤에서 아무말 없이 서있는 유나,리미,수아와 노아의 시선을 뒤로 하고, 세라를 품에 안은 채로 눈앞에 있는 작은 무덤을 바라보았다. 김노인이 유일하게 오랫동안 머물렀던 이름없는 작은 산의 언덕. 그리고 늘 유희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었던 바로 그 곳에 조촐한 무덤이 마련되어 있었다.
검흔이 길게 나있는 준의 볼위로 말라버린줄만 알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모든게 자신의 부주의였다.블랙맘바의 정체를 조금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아마 모두가 살아서 서로 술잔을 기울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많은 능력자를 데리고 있는 그로서도, 지나가버린 시간의 태엽을 다시 전으로 감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우씨는 찾을수가 없을것 같습니다.몸이 분해되어 버렸을 테니...아마 그가 있을법한 위치를 뒤진다 해도 힘든 일이겠지요.”
리미의 말에 준은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내었다.어느새 그의 옆으로 다가온 노아가 준의 옷자락을 잡아 끌었다. 어느새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 귀여운 두 눈망울에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준을 더욱더 아프게 만들었다.
“너무 많은것을 잃었어.너무...”
준의 말에 세라는 간신히 눈물을 참고 그의 품안에서 떨어져 나왔다.그 누구도 그녀를 탓하지 않았지만, 세라가 갖은 상처는 누구보다 깊은 것이었다.
재정비를 모두 마쳤지만, 이미 전투로 인해 황폐해질 때로 황폐해진 숲속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준은 손에 잡히는 마유미의 카드를 저도 모르게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마유미를 살릴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뭐?”
조용히 들려오는 리미의 말에 준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우경과의 접전 때문에 여기저기 붕대를 감고 있는 리미는,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소리야?”
“말 그대로...마유미를 구할 방법이 있습니다.딱..하나있지요.”
“그게 뭔데?”
“아시겠지만... 이 세계에서의 페어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때문에 완벽한 죽음도 존재하지 않지요.”
“하지만...그녀를 깨울수 있는 사람은...”
“네.알고 있습니다.J뿐이지요. 그는 죽었구요. 하지만 말씀 드렸다시피 그녀는 존재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다만 카드에 갇혀 있을 뿐이지요.”
“그럼...깨어나게 할 방법이 있다는 말이야?”
이번에는 수아의 독촉이었다. 궁금증이 가득한 모두의 시선을 둘러본 리미는, 침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네...그녀가...아니, 여기있는 페어리 모두가 완벽한 존재가 되는 세계.프로센으로 그녀의 카드를 가지고 돌아간다면...그녀는 다시 깨어나게 되겠죠.”
#4-끝나지 않은 여행.
늘상 밝았던 그들의 저녁은 그 어느때보다 초라했고 침울했다. 이미 부숴질때로 부숴져 버린 통나무집을 치우고 나서, 그나마 형태가 남아있는 곳에 모닥불을 피워 임시 방편을 마련한 준 일행은 원형으로 둥글게 모여 앉았다.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리미가 낮에 했던 그 말이후로 모두가 저마다의 깊은 상념에 빠져있음에 틀림없었다.타다닥 하는 장작이 타는 소리와 풀벌레 우는 소리들이 고요한 달빛 아래 주기적으로 울려퍼졌다.
“제대로 될 확률이 있을까?”
한참의 침묵끝에 준이 입을 열었다.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은 리미에게로 슬며시 돌아갔다.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은 세라 역시 짧아진 자신의 머리칼이 어색했는지 연신 머리를 매만지며 리미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크룬들이야 프로센으로 갔다가 다시 이 쪽 세계로 넘어오는 이중작업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50년이라는 주기가 필요하지만, 저희는 다릅니다.원래부터가 프로센에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든 프로센으로 되돌아 갈수 있습니다. 다만...”
“다만...?”
리미는 준의 되물음에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하얀 그녀의 피부가 모닥불 때문에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차원을 넘게되면 모든 존재는 불완전 해집니다. 페어리에게 오너라는 존재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요. 오너와의 마나에 기생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라나 유나가 프로센에서 이루기 힘든 경지를 이곳에서는 쉽게 오른것 역시 오너의 마나를 먹으며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저희가 프로센으로 돌아가게 되면 완벽한 존재로 바뀌겠지요.지금 주인님이 이 세계에서 아무런 이상없이 살아갈수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반대로 프로센에서는 주인님의 존재가 불완전 해지는 겁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준의 목으로 마른침이 꿀꺽 하고 넘어갔다.그의 얼굴에 감도는 긴장감을 읽은 것일까? 리미의 작은 입술이 조용히 열린다.
“덧붙여서 페어리들의 실력역시 프로센에서의 실력으로 되돌아 가겠지요.물론 모두 그 곳에서도 강했기 때문에 페어리라는 존재가 된 것이겠지만, 이 곳에 와서 많이 성장한 것도 사실이니까요. 오너의 마나를 통해 이룩한 경지는 프로센에 가면 초기화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나는 프로센으로 가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입장이 반대가 되는 거겠죠. 주인님이 저희들의 마나에 기생을 하는 방식으로. 물론 저희는 다수이니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어떤 방식으로 마나에 기생을 하는 건지 나는 알수 없잖아.”
“제가 사용하는 연성진 중에 임의로 복수의 마나를 단수화 시키는 진법이 있습니다. 프로센에 떨어지자 마자 그것을 행한다면 자연스럽게 저희들의 마나를 주인님이 공유하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리미 그럼 너는 프로센에 가는 것을 찬성하는 거야?”
이번엔 유나의 질문이었다.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는 그 질문에, 리미는 침착하게 두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언제나..늘 그래왔듯이...주인님의 선택에 따를 뿐.”
준은 고개를 떨구며 마유미의 카드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와서 더욱더 고생만 시킨것 같은 미안함이 뒤늦게 밀려왔다.
“가면..마유미를 살릴수 있는 거겠지?”
“물론 입니다. 카드를 갖고 있는 이상 전혀 무리가 되지 않습니다.”
“유희씨와 초희씨는?”
세라의 질문에 리미는 고개를 저었다.일종의 간절함 마저 깃든 세라의 두 눈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힘들어. 두 분의 카드는 발견되지 않았으니까.게다가 그게 가능하다고 할 지라도... 그 두사람에게는 그것이 배려가 아닐수도 있겠지.”
유나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고향으로 돌아간다 해도, 많은 세월을 공유한 오너의 기억은 떨칠수 없을 테니까.오히려 다시만날 수 없는 오너와의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갖은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 더욱더 가혹한 일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겠어. 마유미를 살릴 수 있다면.”
“주인님.섯불리 결정할 일이 아닐수도 있어요.”
유나의 말에도 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노아는 여전히 이리저리 눈망울을 굴리며 준의 옆에 붙어있을 뿐이었고, 항상 말이 많은 수아도 오늘만큼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준은 신념에 가득찬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모두를 바라보았다.
“차우를 잃었고, 사부를 잃었어. 마유미를 살릴수 있다면 그 방법을 택할래. 내가 불완전한 존재가 되어 버리더라도...마유미는 나를 막기 위해서 몸을 날려 소멸되었으니까.”
이윽고 노아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누구보다도 마유미를 잘 따랐던 그녀에게는 눈물을 글썽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일지도 몰랐다.조용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준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모두..내가 간다면 따라와 주겠어? 너희들이 가지 않는 다면 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하겠지만...”
“전 갈래요.”
성격급한 유나의 대답이었다. 모두의 얼굴을 쭉 둘러본 그녀는, 달빛을 받아 더욱더 반짝이는 은발 머리사이로 결의 찬 눈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 괴물이 그랬어요.프로센에...내 아빠가 있다고...”
“그럼..프로센에 간다면 기억이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준의 질문에 리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기억은 이미 페어리가 되기 전에 삭제되었습니다.돌아간다 해도 저희가 기억하는 것은 지금과 똑같은 수준입니다. 유일하게 기억이 남아있는 세라에게 의존해야 겠지요. 세라를 따라 프로센의 궁으로 찾아가 유나의 아버지라는 그 대 마법사를 만난다면, 삭제된 기억을 되찾을수 있습니다. 더불어서...유나와 마유미가 빙계, 화염계로 한정지어진 그 경계선 역시 허물수 있겠죠.”
리미의 말에 유나의 얼굴에는 금세 화색이 돌았다.빙계 이외에 다른 마법까지 익힐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늘 마법에 대한 탐구욕이 강했던 유나에게는 가뭄의 단비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아닐수 없었다.
“그럼...언제 갈수 있는 거야?프로센으로.”
준의 질문에 리미는 상처가 난 곳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번 질문만큼은 준을 제외한 전원이 다 알고 있는듯, 리미에게 시선이 집중되지 않았다.약간은 썰렁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리미가 그녀들을 대표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준비과정은 상당히 길었다.
준은 바닥에 그려지는 문양들이 워프의 마법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복잡한 것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신기한것은 늘 마법진에 관해서 유나와 리미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는데, 이번만큼은 모두가 달라붙어 묵묵히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것이었다.마법을 모르는 세라,노아와 수아마저도 진지하게 마법진을 완성해 가는 모습에 준은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가져가야할 물건들은 별로 없었다. 사부인 김노인의 묘에 마지막 인사를 한 준은, 대부분이 파괴된 집기들 사이에서 쓸만한 것들을 챙겨 마법진 쪽으로 조금씩 옮기기 시작했다.가장 중요한 마유미의 카드는 준의 품속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그는 그것이 빠질까 매번 손을 더듬어 확인하며, 모두를 수용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거대하게 그려진 마법진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다...된거야?”
“네.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요.”
무려 두시간에 걸친 진법의 완성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본 준은 리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끝나지 않은, 아니,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될 여행에 모두는 긴장했는지 말이 없었다.
“일반적인 워프보다...열배는 어지러우실 거에요.”
리미의 말에 준은 워프할때의 그 멀미날 것 같은 기분이 생각나 미간을 찡그렸다. 그것도 겨우 익숙해진 준에게 리미의 말은 엄포나 다름없는 강한 것이었지만, 준은 굳게 마음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마법진 위로.”
오너 전쟁을 위해 영국으로 가던 그때와 비슷한 광경이었다. 갑작스러운 결정이었지만, 준은 신중하게 싸놓은 물건들을 마법진 위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때처럼, 노아는 준의 허리를 끌어 안으며 마법진 위로 올라섰고, 모두가 올라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리미가 마법진 위에 위치했다.
“주인님.”
“응.”
“이제...돌이킬수 없을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어.”
“후회하지...않으실 건가요?”
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페어리들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준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을거야.너희들이 있으니까...불완전하다는 건 말이 안되는 거잖아.너희들로 인해 완전해 진다고 해야 옳은 거지.”
준의 대답이 마음에 든 것일까. 수아는 반짝이는 금발머리를 뒤로 넘기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런 그의 옆으로 다가온 세라는,조용히 준의 차가워진 손을 잡아주었다.
“시작합니다.”
유나의 주문에 따라 마법진은 영롱한 빛으로 감싸지기 시작했다. 준은 눈을 찌를듯한 광채에 노아와 세라의 손을 잡은채로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수아도 준의 뒤에 서서 그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 안았다.고글을 쓴 리미는 유나의 주문에 따라 하나하나 발동되는 마법진 위의 문양들을 일일이 다 체크하고 나서야,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유나의 눈망울이 워프진에서 나오는 광채 때문에 푸른빛으로 일렁거린다. 모두가 눈을 감고 있는 것까지 확인한 유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마법진위로 써두었던 문양들이 하나하나 빛이 나며 마법진 전체가 회전하기 시작했다.흡사 거대한 시계의 내부처럼, 큰 마법진안에 있는 수십개의 작은 마법진 들은 톱니바퀴를 서로 맞추어 돌고 있었다.달빛과 별빛이 지배한 어느 야산의 밤. 그리고 신비한 빛을 뿜어대는 그 마법진 위에서, 유나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워프 게이트!”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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