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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이모탈-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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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샤가 커틸렘 총독령 -구 오르테가 왕국-에서 인체 개조의 신비를 만끽하고 있을 무렵 대륙의 남북을 가르는 국경 지대는 썩은 피와 시체들로 찰랑찰랑 넘쳐나고 있었다.

크툴의 수도로 모였다 싶은 병사들은 난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총 50만에 달하는 대군이 향할 곳은 주다스피스트일 것이라는 예측이 난무하긴 했지만 제국령 내로는 첩자조차 파견할 수 없어 쉽게 정보를 얻지 못해 북쪽의 왕국들은 선뜻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활동하기 시작한 99마인의 태동은 무서웠다.

단신으로 전쟁에 단련된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국경 지대의 왕국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는 가공할 힘에, 우연히 마인들과 마주친 대륙 검사들마저도 미처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맞짱에서 하나하나 발려가니 진정 제국의 기둥이라 할만한 신위였다.



국경 지대의 백성들은 그런 악의 무리의 위협 속에서 한시라도 빨리 태권 브이 같은 정의의 용사가 튀어나와 비범한 응징을 가해줄 것만을 학수고대하며 이불 속에서 조낸 벌벌벌 떠는 수 밖에 없었다.


.............................................................................

 

"아흐흥, 아흥!!"

촉촉촉촉촉!!



버터 플라이 나이프가 여자의 배때지를 쑤시며 귀엽고 앙증맞은 하모니를 찍찍 뱉어내자 닭대가리의 남자는 오르가즘을 느끼며 손을 더더욱 빨리 쑤셔 대었다.


초록색 히피 머리가 앞뒤로 격렬하게 요동치며 허리가 신나는 리듬에 맞춰 꺼떡꺼떡 움직이니 뒤에서 본다면 한참 손빨래에 열을 올리는 남정네에 다름이 아니었지만, 이미 수백번을 담근 여자의 복부에서는 시뻘건 선지와 잘려나간 내장 조각이 바닥에 툭툭 떨어지며 엽기스런 풍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물론 제지하는 사람이 있을리 만무했다. 제정신이 박힌 놈들 중에 아직 고깃덩어리가 되지 않은 놈은 없었으니까.


"하아, 하아!! 백색 돼지년들은 역시 손맛이 다르다니까!! 야들야들한 것이 내 손맛에 딱 맞아!! 크툴 년들은 질겨서 쑤시기도 힘들더만."


막 멜부른 왕국 최후의 생존자였던 아멜리아 공주를 담그고 눈물을 흘리며 죽어간 얼굴에 오줌을 휘갈기고 있는 남자는 99마인의 한 명으로 리코라고 했다.


어디로보나 아메리칸 히피족같이 차려입은 그는 뽕이라도 맞았는지 두 눈이 몽롱하게 풀린 채로 버터 플라이 나이프를 접어 안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이히히...!! 하멜님께서 하달하신 명령은 끝났다. 이제 슬슬 나도 합류하러 가 볼까."


카멜레온처럼 뒤룩거리는 두 눈동자가 주변의 생존자를 찾아 헤매였다. 꼬라지하고는 정 반대로 치밀하고 계획적인 그는 신경질적이라는 평가를 듣긴 했지만 하멜이 신뢰하는 유능한 살인마 중 하나였다.


"스멜 커터". 그 흉명 높은 이름에 비해 겉으로는 정신 병자와 흡사한 외모였지만 누구라도 이 남자를 겉보기만으로 판단했다가는 자다가도 생기는 떡을 두번 다시 보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번 특수 임무에 파견된 99마인은 그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강한 자들로만 간추려서 파견된 것이었으니 리코의 실력도 두말하면 엄마가 용돈 주면서 참고서 사 쓰라고 하는 소리에 불과했다.


"음..."


리코의 왼쪽 눈동자에 생존자가 포착되었다. 마치 적외선 스코프마냥 사람의 체온을 눈으로 감지하는 능력이 있는 리코는 저 생존자가 무척이나 수상스럽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피바다가 된 주변의 광경은 보기만 해도 심장이 똥구녕처럼 벌렁벌렁거려야 정상인데, 남자의 체온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오히려 일반사람들보다 더욱 낮기까지 했다.


좋지 않은 예감에 가만히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 속에 든 버터 플라이 나이프를 움켜 쥐었다.


"새끼야!! 폼 잡지 말고 튀어 나와!!"


바닥에 침을 찍찍 뱉으며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리를 절절 저는 모습은 누구나 방심하기 좋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장내에 조용히 나타난 남자에게서는 결코 방심하는 기운을 읽을 수 없었다.


분노와 증오로 점철된 두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독할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남자를 본 리코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새벽에 먹었던 감자 스프의 맛이 잇몸 사이로 짭짤하게 배어 나왔다.


"이 씨발..!!! 뭐 꼴아 봐!!! 꼽냐? 꼽냐!!! 니가 엄마 친구 아들이야!? 그런거야!? 카~~~~~~~~~~~아가라라라라라....!!! 퉤에엑!!!!!"


리코는 싸가지 없게 욕 한 번 침 한 번의 규칙을 준수하며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싯누런 가래침이 바닥에 철떡 달라붙는 그 순간, 리코의 몸이 한껏 눌린 용수철처럼 앞으로 강하게 쏘아져 나가는 동시에 주머니 안에 있던 손이 살아있는 뱀처럼 요동치며 밖으로 튀어 나왔다.


양아치들이나 쓰는 버터 플라이 나이프가 틀림없었지만 리코가 손을 뻗자 칼날 위로 파란 오라가 덧씌워져 순식간에 칼의 길이가 2미터 이상으로 늘어났다. 숨어드는 잠입 침투 기술이 좋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최적의 무기였다.


"죽던지 말던지 니 꼴리는대로 하세요!!"


무기를 들고 있지 않던 양아치의 손에서 갑자기 2미터가 넘는 무기가 날아오면 어지간한 실력자도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한 순간에 머리통이 날아가게 마련이었다.


방심, 그리고 의외성에 기초를 둔 기습. 리코의 치밀함을 증명하는 작전이었다.


"이 더러운 놈들!!! 천벌을 받을 놈들!!! 네 놈들을 모조리 십만 갈래로 찢어 죽여 억울하게 죽어간 망자의 넋을 달래 주겠다!!"


갑작스러운 남자의 대갈성에 리코의 머리가 쭈뼛 섰다. 이건 아니다. 위험 신호가 삐요삐요 머리통 속에서 마구 울려 퍼졌다. 과연 리코의 칼날이 목을 관통하기 직전 남자의 몸이 흔들리며 어느 사이엔가 양쪽으로 칼날이 달린 더블 블레이드가 나타났다.


빠구리도 자지 크기보다 테크닉이 중요하듯 -절대 작가 이야기가 아니다- 무기 크기야 무슨 걱정이겠냐마는 남자의 더블 블레이드에서 새파란 검기가 우람하게 솟구치자 리코는 대경했다.

 

안 그래도 길이 150센티미터에 달하는 무기에 각각 3미터에 가까운 오라. 더구나 대해의 수면처럼 잔잔한 평정심으로 판단하건데 남자의 실력 또한 자신의 하수가 아니었다.

리코는 주저없이 버터 플라이 나이프를 던지고 뒷걸음질을 쳤다. 일반 장검이었다면 버터 플라이 나이프를 손가락에 끼운 채 빙글빙글 돌리며 막아내면 그만이었지만 저 무식한 기둥 같은 오라검은 버터 플라이 나이프로 막아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더러운 네 놈 크툴의 짐승들을 죽어도 죽지 못할 것이고, 살아도 살지 못하게 만들어 주고야 말겠다!! 으허헝!!!"

"이런 쉬댕...!!"

리코가 엉거주춤 뒷걸음질을 치는 와중에도 남자는 버터 플라이 나이프를 쳐내고 한걸음 한걸음 뚜벅뚜벅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다가왔다. 그리고 남자가 반쯤 뛰는 속도가 되자, 리코도 그제야 몸을 돌려 왕궁 안 쪽으로 달아났다.



"어디를 도망가는 거냐!! 죽어라, 죽어!! 그리하여 죽어서도 갚지 못할 죄의 댓가를 조금이라도 치루어라!!!"


"야이 호모 새끼야!! 소싯적에 시 좀 읊었나 보구나!?"


거대한 칼날이 풍차처럼 돌아가며 궁성 내의 기둥을 무 자르듯이 댕겅댕겅 잘라내었다.


리코는 소름이 오싹 돋았다.


상성이 너무 좋지 않았다. 자신에게 마인이라는 칭호를 가져다 준 능력은 정면 승부용이 아니었다. 리코의 능력은 첩보와 암살에 최적화 되어 있기에 이렇게 어이없이 드러난 상황에서는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한 나라의 왕궁을 몰살시킨 리코가 절대 약한 것만도 아니었지만, 같은 급수의 마인들에 비해서는 다소 손색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고 무엇보다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다.



기습이 실패한 이상 달아나야 했는데 저 더블 블레이드를 풍차처럼 휘두르는 아르만인 전사는 자신의 실력으로 상대할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힘과 힘의 정면 승부라면 결코 자신의 동료인 마스터 울프에 뒤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끄아악!! 하멜님!!"


리코가 발악처럼 내던진 버터 플라이 나이프가 더블 블레이드에 격중당한 순간 공중에서 폭죽처럼 터져 나가며 쇠파편을 뿌려 대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 파편을 하나하나 모조리 쳐내고 두 발에 속도를 더했다. 저항을 포기했건만 적당한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차라리 싸울걸 하며 리코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 나왔지만 이미 저질러버린 후였다. 설마 이렇게 집요할 줄이야!!


"안돼!!!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안돼에!!!!"


리코가 막 바닥을 내딛던 왼쪽 발목이 잘려 나갔다.


고통에 입을 크게 벌린 순간, 그의 팔과 손가락이 길게 늘어나며 벽면 높이 걸려 있는 멜부른 왕국의 휘장을 움켜 쥐었다.

그리고 늘어난 팔이 리코의 몸을 끌어 올리기 전에 깨끗하게 잘려 나가고, 마치 팽팽하게 늘어난 고무줄이 끊어지듯 잘린 팔은 빠르게 수축하며 절단면에서 튀어 나온 피로 사방을 적셨다.



이어서 한 팔과 한 발목이 잘린 채 바닥에 자빠진 리코의 양 허벅지가 잘려 나가고, 미처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나머지 한 팔마저 잘려 나갔다. 그제서야 리코는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


"으아아아악!!!!"


비명과 비명 사이의 아주 찰나 간에 사지가 잘려 나갔다. 두 눈이 온통 새빨간 색으로 물들었다. 절단면이 따꼼따꼼 해 오자 그제서야 리코는 팔다리가 잘려 나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극렬한 상실감과 고통에 사로 잡혔다.


"아아악!!! 꺄아악!!!! 아악!!! 까아아악!!!"


애벌레처럼 꿈틀대는 몸통은 뒤를 쫓던 남자의 넓적한 발에 짓밟혀 있었다. 리코는 그제서야 남자의 본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용광로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전신의 체온. 너무나도 선명해 두 눈이 타 들어갈 것만 같은 분노가 잠시 고톨에 몸부림치던 리코의 신경을 마비시킬 정도였다.


"누, 누구냐 대체.... 누구길래 이 토록 뿌리 깊은 증오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냐...!!"


평정심으로 가장한 뒤에는 격렬하게 타오르는 증오의 얼굴이 있었다. 마치 동전의 면을 뒤집듯 한순간에 뒤바뀐 남자의 체온에 리코는 소름이 오싹 돋았다.


한순간이라도 흥분하거나 방심했다면 자신이 달아날 수도 있었을 것을. 남자는 덩치에 맞지 않게 무서울 정도로 냉정했다. 최후에 이렇게 본색을 드러내긴 했지만.


이 자는 위험했다.


"누구냐, 너는...!!"


이제 30살 정도?


지저분한 외모였지만 두 눈동자는 너무나도 맑았다. 너무나도 맑고 순수한 분노로 채색된 눈동자의 주인은 조용히 침묵한 채 리코의 얼굴에 더블 블레이드를 쑤셔 박았다.


두개골이 깨지고, 뇌가 뭉그러지고, 혀가 잘려 나가고. 기계적인 동작으로 리코의 머리를 완전힌 뭉개버린 남자는 이제 몸통만 남은 리코를 찍어 올려 공중으로 던져 올렸다.


"오라앗!!!"


더블 블레이드가 다시 풍차처럼 돌아가며 리코의 몸을 인수분해하기 시작했다. 살이 뜯기고 뼈가 작살나며 세상에 리코라는 남자가 있었던 증거를 완전히 없애버릴 기세로 그 몸통을 갈아버리자 순식간에 다진 고깃더미가 남자의 사방에 수북하게 쌓였다. 난데없이 뿌연 핏빛 안개가 주변에 자욱하게 깔렸다.


"으아악!!! 아악!!!"


리코의 몸이 완전히 다져진 뒤에도 칼날의 광무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미친듯이 칼을 돌리던 남자는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왜 이다지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일까. 한참 후에야 남자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리코가 있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안아 올린 두 팔에는 오줌으로 더럽혀진 아멜리아 공주의 시신이 안겨 있었다.


"나의 공주님...!!! 이제서야, 이제서야 이렇게 대륙 검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공주님의 소원대로, 이 제페트가 대륙 검사가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러니 어서 일어나 저를 위한 노래를 불러 주십시오, 나의 공주님...!!"


.........................

"...제패트."

제패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삶의 목표가 너무나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 지금에 와서야 그가 꿈꾸어 오던 이상과 희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일까. 그저 이것이 현실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



여성의 목소리는 안타까움을 담아 다시 한번 제패트를 불렀다.


"...제패트."


"내버려 둬. 당분간은."


락셰는 글로리아의 어깨를 잡고 제패트에게 다가서려는 그녀를 만류했다. 남자에게는, 아니 사람에게는 혼자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있다. 제패트에게 있어서는 지금이 그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나가자."


피로 물든 왕궁 안은 온갖 취악한 냄새들로 가득 차 있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였다. 락셰로서는 이성적인 사고가 마비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이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제패트만을 멍하게 바라보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락셰. 왠지 나... 가슴이 아퍼."


글로리아를 바라보는 락셰의 눈동자에 왠지 모를 서글픔이 잠시 머물렀다.


"이건 저 녀석이 홀로 극복해 내야 할 과제야. 스승님이 와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평소에 얼마나 아멜리아 공주에 대한 칭송을 들어 왔던가. 한편으로는 돌아갈 장소가 있는 그가 부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측은할 따름이었다. 물론 동정은 금물이었지만.


결국 락셰는 움직이지 않는 글로리아를 내버려 둔 채 홀로 왕궁 테라스로 나갔다.


짙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간간히 빛을 뿌리며 곳곳에서 역동적인 생명의 향기를 느끼게 하는 수도의 거리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내일 왕궁의 참사를 알게 된다면 이 평화로움도 깨지겠지만. 오늘 하루는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허락된 안식의 밤일 것이다.


"...그나마 나은 건지도 모르겠군."


이미 크툴의 마인들에 의해 많은 나라가 쓰러졌지만 그나마 나은 상황일런지도 모른다. 저 "콥스 플레이어"가 쓸고 지나간 왕국은 산 자라고는 오직 하늘을 나는 새와 물 밑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유일했으니까.


락셰가 그 푸른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숨겨져 있던 그의 오른 눈이 드러났다. 푸른색의 반대쪽 눈에 비해 흰자위만 엉그러니 남아 있는 눈은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며 그 위에 미래의 모습을 투영시켜 자신의 소유주에게 불길한 미래에 대한 암시를 전해 주었다.


"전운이 감돌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진하게."


락셰의 왼쪽 눈 위에 투영된 장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끔찍했다. 하늘은 붉게 물들고, 대지에는 피의 강이 흘러 넘쳤다. 하얀 피부를 가진 전사들은 사지가 찢어져 내장을 토해내고 여자들은 끊임없이 강간 당하며 죽기 직전까지 짐승의 씨앗을 뱃속에 잉태하는 장면이 몸서리쳐질 정도로 선명하게 락셰의 예지안에 비추어졌다. 산자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고 죽은 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니 세상이 곧 지옥이었다.


"오래지 않아 세상은 뒤집힌다. 이족의 짐승들은 대륙을 철저하게 유린할 것이고, 우리 아르만 백성들의 앞날에 희망은 보이지 않는구나...!!"


그러나 깊게 한탄하던 락셰의 얼굴이 갑자기 놀라움으로 변했다.


"...응? 뭐지 이건? 작지만 무언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물체가 지상으로 떨어졌어...!! 사람인가? 빛이 점점 커지고 있어. 누구지 이건? 크툴의 짐승들을 쓸어 넘기고 있어!!! 우리 아르만의 구세주인가?"


희망에 찬 그의 목소리는 잠시 후 또다른 절망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했다.


"아냐..!! 이건...!! 피부가 하얀 자와 검은 자를 가라지 않고 쓸어 넘기고 있어!! 마왕, 마왕이다!! 전란을 틈타 마왕이 강림한다는 예지인건가!!! 안돼, 막아야만 해!!"


황금빛으로 빛나는 그 무엇은 용서가 없었다. 모든 생명을 탐욕스럽게 집어 삼키며 덩치를 불려 가더니 종래에는 예지안을 뜨고 있기 힘들 정도로 찬란한 빛을 사방에 뿌리기 시작했다. 락셰의 이마에 식은 땀이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안돼, 안돼!! 이 땅에서 인간을 모두 멸할 셈인가!!!! 멈춰!!! 멈추라고!!!!"


파악!!!


"커헉!!!"


황금빛이 시야를 가득 채우자 미지의 힘에 의해 예지안이 터져 나가며 락셰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락셰, 괜찮아!? 왜그래??"


어느 사이엔가 다가온 글로리아가 바닥에 쓰러진 락셰의 상체를 일으켰지만 그의 반응은 평소와 달랐다. 자신감이 넘쳐 흐르며 약간 오만하기까지 하던 청년이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스, 스승님, 스승님에게 알려야 해!! 마왕, 마왕이 강림한다. 크툴의 짐승들도 무섭지만 마왕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야...!! 그가 각성하기 전에 죽여야 해!!!"


"...마왕!?"


글로리아의 안색도 딱딱하게 굳었다.


락셰의 예지안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근 미래에서 일년 후까지 내다보는 강력한 예지력이 담긴 마술의 눈. 하지만 락셰가 바라본 미래는 확정된 "절대 미래"는 아니었다.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예정된 순서대로 진행될 미래의 광경이었기에 미리 대비한다면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인지오, 거기 있니?"


그녀의 입에서 막내 사제의 이름이 나왔다. 지금껏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이제 갓 20대를 넘긴 것으로 보이는 청년은 이미 글로리아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네, 누님. 스승님에게 보고하면 되겠죠?"


"그래주렴. 지금까지 네가 보아왔던 모든 사실과 함께."

................................................................................

 

제페트는 20대의 꿈 많은 젊은 기사들 중 하나였다.

실력을 인정받아 기사 서임을 받을 때까지는 그도 한껏 꿈에 부풀어 오른 순진한 남자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차가운 현실이 한 청년의 꿈을 조금씩조금씩 갉아 먹기 시작했다.



검을 잊어버린 기사,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기사. 왕궁의 기사를 마치 제집 하인처럼 부리는 고위 귀족들과 그들의 뒤꽁무니를 바쁘게 쫗아다니며 딸랑딸랑 거리는 그렇고 그런 기사, 아니 기사의 탈을 뒤집어 쓴 소인배들.


자신이 찾던 이상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렇게 썩은 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묵묵히 견디며 홀로 고결한 기사의 낭만을 찾길 바랬던 그에게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레이디 아멜리아.


한 송이의 향기로운 꽃을 닮은 그녀는 제패트의 삶의 목표가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제패트는 신분의 벽을 뛰어 넘어 왕국의 공주인 그녀를 소유하길 원했다.


하지만 제패트는 일게 평민 출신의 기사. 크고도 높은 씹 하악하악놈의 세상은 그에게 위험한 모험을 할 것을 강요했다.


"...이대로 가시는 건가요?"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져 오는 차가운 검 손잡이의 느낌이 아니었더라면, 아니 그보다 더 차가운 현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이 순간 또 다시 아멜리아 공주의 품 안에서 한 때의 평온만을 취하며 서서히 썩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순간이 아닌 그녀와의 영원을 소유하기 위해 잠시의 이별을 감내하고자 마음먹었다. 결코 흔들리는 일은 없어야 했다.


"용서하소서, 나의 연인이여. 이 순간 그대의 곁에 있을 수 없음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약속이기에, 그대와 나에게 잠시의 인내를 요구하는 현실이 한없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오."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나 그대만을 믿고 기다릴게요.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한없이 연약해 보이지만 내면의 강함을 간직한 아멜리아의 두 눈에서 구슬같은 눈물이 또르륵 흘러 내렸다. 제패트는 자신의 마음이 약해짐을 느끼며 황급히 새벽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잠시 잠시 하던 시간이 어느새 5년이 흐르고, 제패트는 마침내 스승의 곁에서 대륙 검사의 위명을 얻어내고 멜부른을 향했다.


때는 대륙에 전쟁 전야의 긴장감이 흐르는 시기. 스승은 그에게 사제들과 함께 동행하여 왕국의 수호에 이바지할 것을 명령했고 그도 강인하고 듬직한 사제들을 믿기에 천군 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멜부른으로 향했다.


이미 짓밟힌 수도의 왕성에 발을 디디기 전까지는.


"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이제부터...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허망한 메아리가 빈 왕궁을 울렸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왔다.


"복수를 위해 살아야죠."


"...복수?"


제패트의 메마른 두 눈이 글로리아를 향했다. 호수와도 같이 맑은 두 눈빛이 아멜리아 공주와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여인은 담담하게 상처 입은 야수의 안광을 받아 넘기고 있었다.


"비록 아멜리아 공주의 원수를 갚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99마인, 나아가 크툴 제국이 그 원흉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제패트는 가지만 치고 뿌리는 모른채 하실 생각이신가요?"


복수라. 참으로 이루기 난망한 말이었다. 어찌 단신으로 저 거대한 크툴 제국에 대항한단 말인가. 아니 혼자서는 저 흉험한 99마인을 모두 쳐죽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패트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복수해야지. 복수... 뿌드득...!!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이 두 손을 짐승의 피로 붉게 물들여야지...!!!"


글로리아는 지금껏 보아오지 못했던 제패트의 흉폭한 기운에 순간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제패트에게 또다른 목표를 제시할 생각이었지만 자신이 실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락셰는 그런 글로리아를 등 뒤에서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아 놔... 돌아버리겠네."


허탈하긴 하지만 술 한잔 퍼먹고 푹 자면 어느 정도 잊고 진정할 수 있는 것이 남자다. 여자 죽었다고 질질 짜다 목메는 그런 미친 놈들은 오페라나 뮤지컬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지 실제로 그리 흔할리가 없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예쁘고 골빈 가시내 글로리아가 난데없이 키토산 옆구리 터지는 소리로 바위에 구녕을 내라는 말을 극도의 흥분 상태인 사형에게 주입시키고 말았다. 멀쩡한 사람 하나가 순식간에 바보가 되는 순간이었다.


"사형, 그만둬요!! 지금은 일단 진정하고 내일 아침의 멜부른 시내를 안정시켜야...!!!"


"시끄럽다, 락셰!! 내 어찌 저 흉악한 놈들과 한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있을까!!"


[야 이 귀얇은 소새끼야!!!]


락셰는 정말 힘껏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두들겨 맞는다면 평소처럼 멍 드는 수준이 아니라 상체와 하체가 따로따로 놀것만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락셰가 글로리아를 노려 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담을 뛰어 내리는 제패트를 따라 뛰어내리고 있었다.

 

[아, 좀 기다리라니깐 이 년놈들아!!!]



정말이지 힘껏 소리치고 싶었다. 황금의 마왕을 잡아내야 하는데 동문들 중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제패트의 목표가 크툴에의 복수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머리가 깨질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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