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들의 오너 시즌 2 - 42 -
<42부>
#1-유일한 생존자
“무슨일이에요?기껏 배고프다고 했더니 폼이나 잡고.”
유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김노인을 원망하듯 입을 열었다.당사자인 김노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는 벌서 세가피째의 담배를 입에 물며 한숨섞인 연기를 토해내었다.
“이제 그런거 안속아요. 나이먹어서 장난도 늘어가지고.”
초희도 유희를 거들듯 말했다.일상생활에서 진지함이란 거의 찾아볼수 없는 그에게 지금의 행동이 그녀들에게 일말의 긴장감도 줄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인 모양이었다.
“왜요?아끼던 야한 동영상을 날리기라도 했나요?”
유희는 윤기나는 머리칼을 뒤로 쓸어올려 묶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산속에 위치한 조그마한 통나무 집. 목재의 향기가 가공되지 않은 그대로의 은은한 내음을 전달하는 수수하지만 아늑한 그들만의 보금자리였다.김노인은 창밖으로 피우던 담배를 집어 던져 버렸다.
“니들..7년전의 일을 기억하냐?”
김노인의 말에 무뚝뚝하던 유희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초희 역시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오너를 뒤 돌아 보았다.
“갑자기 그건 왜요..”
유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늘 하이톤인 그녀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것은 약간 힘이 빠져 축쳐져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7년전의 기억이란 김노인은 물론이고 유희와 초희에게 있어서도 결코 유쾌한 기억이 아니었다.이계의 존재에 대응하기 위해 온 1세대 페어리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과 직접 싸워본적이 단한번도 없었다. 2세대 부터 크룬이 난입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더 정확히 말하자면,7년전의 기억은 1세대 오너끼리 서로의 피로 몸을 적시던 암흑의 시대뿐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희는 그때의 기억이 몸서리쳐지게 싫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마나량에 있어 타고났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김노인이 아니었더라면 유희는 아마 그때 입은 상처때문에 소멸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같은길을 걸어야할 오너들이 동지의 몸에 칼을 대야했던 그날의 기억들.
“그 이야긴 왜 꺼내요? 또 죄책감 때문인가요?그런것이라면 이제 그만 잊을때도 되지 않았어요?”
유희는 불만가득한 표정으로 김노인에게 말했다.평소 말이 없고 냉철한 편인 그녀의 성격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초희만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김노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야마토가 살아있다.”
신음을 하듯 들려오는 김노인의 말에 그녀들의 표정은 심하게 동요하기 시작했다.잔잔한 호수에 큰 바위가 떨어진것처럼, 늘 평정심을 유지하던 두 여인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소리죠?”
김노인은 여전히 등만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지만,초희는 그 역시 심하게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수 있었다. 평소의 그 답지 않은 긴장어린 말투때문이었다.
좀처럼 대답이 떨어지지 않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초희의 회상은 7년전으로 되돌아 갔다. 단 한번 대적했을 뿐인 야마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야마토의 페어리인 미호의 모습이 떠올랐다고 표현하는 편이 옳았다. 최후의 10인이 흡사 서바이벌을 벌이는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서로를 배척했던 시절. 미호는 1세대 페어리중에서도 최강이라 할수 있는 페어리였다.페어리를 단 한명 갖고 있는 야마토가 나머지 오너들의 공공의 적으로 일순간 떠오른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초희는 미간을 찡그렸다.당시의 전투는 10명의 오너가 펼치는 개인전이나 다름없었다.2세대의 전쟁처럼 흑과 백의 싸움이 아닌, 다양한 색을 지닌 오너들이 서로 유일한 색이 되기 위한 싸움이었던 것이다.초희의 기억 속에도 미호와 대적한 적은 있으나 야마토의 최후를 봤다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직접 확인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죽지 않았다고 할수는 없지요.”
초희의 말에 김노인은 고개를 저었다.생각에 잠기던 유희역시 반박하듯 말을 이었다.
“7년이나 흘렀고, 그는 단 한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요.이제와서 살아있다고 단정하고 걱정하는 이유가 뭐죠?”
“죽었다고 단정하는 것보다, 살아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단정하는 편이 훨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지.”
그의 말에 유희는 할말을 잃은듯 입을 다물었다. 그녀역시 반박할 길이 없었다.지금의 유희는 고등의 수준에 다다라 상대방의 마나를 직감적으로 데이터화 시킬수 있었지만, 문제는 당시에는 그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그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가설은 논증 자체가 없는 것이었다.
“야마토는 약하다. 오너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정도지. 체술가도 아니고, 마법을 다루지도 못해. 단지 마나 자체가 어마어마 하다는 것. 그리고 그 큰 마나에 기생하는 미호라는 걸출한 페어리가 있다는 것.그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유일한 오너가 되길 희망하는 이들의 첫번째 타겟이었다.”
유희도, 초희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녀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또다시 담배를 피워무는 자신들의 오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야마토는 상처가 있는 녀석이었고, 더불어 야망도 강했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잘못된 방향으로 해결하려 하는게 문제였지.준이가 요새 전쟁 후의 어긋난 벨런스를 바로잡아가는 과정에서 발견한 수수께끼의 일들은 야마토가 꾸몄을지도 모르는 거야.”
“어째서?어째서죠?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왜 7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건가요?”
“우린 야마토가 죽었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엔 너무나 정신이 없었고, 또 전쟁이 끝난후 아무런 일도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야마토도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야마토는 나 보다 먼저 준이나 차우가 속해 있는 2세대 오너들의 존재를 인식한 것일지도 모른다.똑똑한 녀석이니 곧 이종족이 올것을 예감했을수도 있지.야마토는 기다린거다.2세대 오너들이 이종족을 몰아내고,또 서로를 견제하며 싸우고 죽이는 것을..그것을 기다리며 힘을 쌓고 있었을거다.녀석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김노인의 말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유희는 너무나 오랜만에 전신에 흐르는 긴장감을 느끼며 꼴깍 하고 침을 삼켰다.김노인의 말대로 두려운 것은 야마토가 아닌, 그녀의 페어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야마토 혼자서 무슨일을 할수 있겠어요?아무리 미호가 있다지만..”
“아냐. 오너로 선택되지 않았을뿐. 이 세상엔 너무나 많은 능력자들이 있다.야마토는 한때 1세대 오너들의 수장을 맡기까지 했던 리더쉽있는 녀석이야.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소외되어 있던 능력자들에게 야망을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이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내가 어리석었어. 준이가 비현실적인 일들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소리를 들었을때 무심히 흘려들은게 큰 불찰이었다.”
성질이 급한 초희가 벌떡 하고 일어났다. 김노인의 말이 단지 추측과 가설뿐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알아봐야할 필요가 있는 가설이었다.유희는 침착해지려 애를 쓰며 김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그는 한참만에 등을 돌려 그녀들을 바라보았다.후회와 회한, 그리고 당황이 섞인 미묘한 표정을 짓는 김노인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땀방울마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찾아야지. 이건 준이에게 맡길정도의 수준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가 해결해야만 해. 그의 수하들이면 모를까..야마토는 너무나 위험한 녀석이야.”
드디어 유희도 몸을 일으켰다. 집안에서 입는 편안한 복장이었던 그녀는 황급히 후드가 달린 긴 자켓을 걸치고는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쓰며 백발의 머리를 가렸다. 초희역시 유희와 비슷한 방법으로 마스크를 착용하며 얼굴의 반을 가린 가면을 교묘히 가려버렸다.
“갈게요. 가겠는데...만약 주인님이 추측이 잘못된 거라면..각오하라구요.”
#2-체술가들의 혈투.
태항산의 험준한 산맥과 그것에 펼쳐진 아슬아슬한 능선. 그리고 자연이 조산작용으로 만들어낸 산속의 평원에서는 무언가 빠른 두개의 존재가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범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움직임들은 각각 검은색과 청색의 환영을 자아내며 서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동을 멈췄다.
“하아..하아..”
차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눈앞에 있는 우경을 잠시나마 얕잡아 본것은 크나큰 실수가 아닐수 없었다.
철권과도 같은 차우의 두 주먹이 불끈 하고 쥐어졌고, 그와 동시에 물먹은 스펀지를 짜낸것처럼 핏물이 베어나왔다.왼쪽 어깨가 관통당한 통증이 아득하게 전해져왔다.
쉬이이익!
차우는 황급하게 제자리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자신에게 날아오던 그 무언가를 피해내었다.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지는 물체. 볼것도 없이 우경이 날린 단도일 것이었다.하지만 차우는 그것을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이번엔 좌우로 칼과는 다른 둔탁한 느낌의 무언가가 맹렬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투두둑!
그의 몸이 지상에 착지하자마자 꽈배기처럼 뒤틀리며 지면에 손을 댄체 몸을 회전시켰다. 역시나 아슬아슬하게 차우의 몸을 스쳐지나가는 물체들. 차우가 수련을 위해 팔찌와 발찌의 형태로 달고 다니던 쇳덩이 들이었다.
‘말도 안돼..저정도의 술법을 부릴정도로 고강해 보이는 무공이 아닌데.’
차우는 당황하고 있었다. 우경의 검과, 차우가 해제해 두었던 쇳덩이들은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우경의 의지대로 자유비행하며 차우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날렵하게 피해서 우경에게 일격을 날리려 하면 그것은 방향을 바꿔 다시금 차우에게 날아들었다.
‘확실해.어기어검이나 격공섭물을 부릴정도의 실력자는 결코 아니다.그럼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차우는 계속해서 날아드는 방해물들을 피하면서도 냉정해지려 애를 썼다.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유있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우경의 모습에 시야에 들어왔다.
우우우우..
우경의 손으로 무형의 기운들이 뭉쳐지기 시작했다.그의 눈은 냉철한 시선으로 쇳덩이 들과 단도를 피해내는 차우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패턴이 있군.’
우경은 씩 하고 웃었다.완벽에 가까운 날렵함과 회피 능력으로 자신의 공격들을 피하고는 있었지만, 분명 차우의 움직임에는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 남은 것은 단 하나.타이밍을 맞춰 녀석에게 결정타를 먹이면 종료.’
이번임무가 생각보다는 쉽다는 생각에 우경은 웃었다.여섯에 달하는 페어리를 거느린 오너를 상대해야 하는 자신의 친구, 리키에게 미안한 감정마저 들어왔다.
‘으응?’
몸을 풀고 차우에게 달려들려 했던 우경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멎었다.사방에서 자유롭게 날아드는 방해물들을 피해내던 그의 몸이 일순간 뒤로 쑥 하고 빠졌기 때문이었다.그것은 우경이 지금까지 눈여겨보던 차우의 행동패턴에서 벗어난 돌발행위였다.
콰아앙!
차우의 손이 강하게 지면을 강타했다.그와 동시에 그의 몸을 중심으로 원형의 형태로 공간이 일그러졌다.팔괘에서 다수의 적을 섬멸할때 쓰는 회류(回流)가 발동된 탓이었다.
투드드드드...
우경은 재빨리 몸을 날렸다.차우가 지면을 내리치는 그 순간, 지면에 있던 바위며 모래알들이 일순간 지면에서 60센티 정도로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것들은 차우의 주변에 흐르는 원형의 기운을 타고 돌다가 이윽고 사방으로 튀어나가듯 날아갔다.
‘뭐 저런 무식한 초식이..’
순식간에 나무위로 뛰어 올라간 우경의 눈이 꿈틀했다.자신의 단도와 차우가 벗어놓은 쇳덩이들은 무차별로 날아드는 바위와 모래알에 밀려 땅바닥으로 뒹굴어 버렸다.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마나가 실린 바위와 모래들은 흡사 크레모어를 터트린 것처럼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방어와 동시에 공격..을 한다는 건가.’
그제서야 우경은 차우의 데이터에 적혀져 있던 팔괘라는 무공에 대해 다시한번 고찰할수 밖에 없었다.그저 시시껄렁하고 흔해빠진, 이론만 거창한 중국 가전무공의 일파라고 생각했던 추측을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차우의 시선이 정확하게 우경이 피해있는 나무위로 향했다.그의 허벅지 근육이 일순간 팽창되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의 다리는 강하게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대포알이 쏘아지는 것처럼 작용반작용 법칙에서 이뤄질수 있는 최속의 스피드나 다름없었다.
“큭!”
갑자기 자신의 눈앞으로 나타난 차우가 휘두르는 강권에 우경은 재빨리 양손을 머리위로 교차시켜 막아내었다. 하지만 이윽고 차우의 무릎은 우경이 팔을 교차한 그 작은 틈바구니로 파고들었다.
“헉!”
자신의 강한 한방으로 우경이 지면에 추락하여 형편없이 나뒹구는 것을 확인한 차우의 동공이 커졌다. 양 팔에서 칼로 베인듯한 통증이 전달되어 왔고, 뜨끈한 선혈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으으윽..”
차우역시 그대로 지면으로 추락해 버렸다.그는 황급히 무복의 팔부분을 찢어내어 자신의 살갖을 바라보았다.
‘이..이건..’
수십개의 작은 알갱이들이 피부를 해집고 다니며 피를 짜내고 있었다.차우의 시선이 황급히 우경이 있는 곳을 향했다.그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보험에 들어두길 잘했군..위험했어.”
“너..무..무슨짓을..”
차우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날렵하게 옆으로 굴렀다.그와 동시에 그를 노리고 날아들던 단도가 목적지를 잃고 지면에 푹 하고 박혀버렸다.
‘쇳가루...이건 설마..’
자신의 살갖을 계속해서 파고드는 알갱이들.차우는 그제서야 깨달은듯 고개를 들었다. 비릿하게 웃고 있는 우경의 주변으로 차우가 착용했던 쇳덩어리가 가루로 분해되며 흩날리고 있는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쓸수있는 능력치를 다 쏟아부어서 널 죽이고 싶진 않았는데..내 자만의 탓이 크겠지.큭.”
차우는 재빨리 팔을 움켜쥐어 선혈을 짜내었지만 살갖으로 파고드는 쇳가루 하나하나를 빼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서, 우경은 두덩어리의 쇠뭉치를 모두 가루로 분해시키며 차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흡사 수천마리의 파리들이 날아다니는 듯한 착각을 자아내며,쇳가루들은 금방이라도 차우를 삼켜버릴듯 허공에 뜬 상태 그대로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그것이었구나. 어검술이나..격공섭물 같은 전설적이고 거창한것이 아니었어.녀석은..’
급기야 뭉쳐있던 쇳가루들은 양분되며 우경의 양손을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차우는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쇳가루들이 몸에 더 깊이 파고들게 되면 위험했다.아니, 그것을 떠나서 지금 우경이 준비하고 있는 공격은 여태까지의 공격들보다 몇배는 위험해 보였다. 그는 서둘러 단전에 마나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눈치를 챈 모양이지만..사실 그것이 별 의미가 없지. 나는 자기장(磁氣場)을 다룬다.오직 이 능력 하나로.. 블랙맘바에 들어갈수 있었고.”
차우는 질끈하고 입술을 깨물었다.전투는 당초 차우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듯했다.
#3-Snake eyes
세라의 눈이 차분함을 머금고 좌우로 움직였다. 저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분장을 하고는 있었지만,들고 있는 검이며 무기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있지는 않았지만 입출국객이 오가던 공항의 홀은 금세 썰렁해져 버렸다. 공항직원이나 혹은 경찰의 통제가 오랜시간 동안 들어오지 않는것으로 보아,그들은 분명 살의로 공항을 통제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큭!”
세라의 검에 얻어맞은 사내는 신음성을 흘리며 몇미터나 날아가 뒹굴어 버렸다.검날로 베어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세라는 굳이 검의 넓은 부분으로 타격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오너 전쟁이 끝나고 나서의 준의 명령때문이었다.
-앞으로는 싸울일도 없겠지만..설사 있다 하더라도 일반인에게 살수를 펼쳐서는 안돼-
얼마전에 유나역시 그 명령이 걸려 준에게 보고를 못한것도 있었지만, 세라의 경우에는 그것이 준과의 약속이라 여겼기에 더욱더 지켜야 할 금칙이었다.하지만 자신만의 검술세계를 완벽히 다진 세라에게 있어서 검을 들고 살의를 펼치지 않는것은 오히려 죽이는것보다 몇배는 더 까다로웠다.
세라의 주변을 원형으로 감싼 인물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각오했던 것과 달리 세라의 검에 마나가 입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런 상태라면 모두 함께 달려들면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 선 그들은 세라를 노리며 한번에 달려들었다.
세라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그냥 뭣도 모르는 일반인들이 칼들고 칼싸움 흉내를 내는 수준이 아니었다.세라에 비해 몇수 아래일수는 있지만, 그들은 분명 전문적으로 검을 다루는 훈련을 받은 이들이 틀림없었다. 총을 비롯해 각종 과학적 무기들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전문적 교육을 받은 검사들이 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볼만한 일이 아니었다.
세라는 사뿐히 몸을 숙이며 낮은 자세로 검을 등뒤에서 얼굴앞으로 팔자를 그리며 회전시켰다.세라를 노리고 들어오던 무기들은 팅!하는 금속음을 내며 모두 하늘로 향해지며 솟구쳤다.
“큭!”
검날이 넓은 바스타드 소드가 사내들의 얼굴을 차례로 후려쳤다.걔중에는 신속한 임기응변으로 검을 끌어내려 막으려 하는 자도 있었지만, 급격하게 힘을 주어 칼을 내리다가 손목에 들어가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기를 떨구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음..놀라워..정말 놀랍군.”
세라가 고군분투 하는 모습을 2층에서 내려다 보던 리키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수십명이 몰려들어 애워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라의 머리털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자신의 수하들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는 커녕 당연해 보였다. 흡사 추풍낙옆마냥 하나하나 바닥을 뒹구는 그들을 보며, 리키는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저게 블랙나이트로군. 보스가 검만 들었을뿐 별거 아니라고 했는데...절대 그렇지 않잖아?”
리키는 세라의 검술이 살의(殺意)를 담고 있지 않음을 단박에 파악해 내었다.왜인지 모르지만 그녀는 검을 방어와 타격기의 용도로만 사용하고 있었다.급한 마음에 총을 꺼내들어 쏘는 자도 있었지만,그것은 여지없이 세라의 검에 맞고 튕겨나가 버렸다.
“바보같은 녀석.총을쓰면 검에 튕겨나가 아군이 다칠수 있다는것도 모르나.”
리키는 피식 하고 웃었다. 세라가 어떤 이유로 직접 베지 않는지는 그역시 알수 없었지만,그는 부하들을 이용해 그녀의 힘을 빼려했던 자신의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응?”
세라는 무언가 강맹한 기운이 자신을 덮치는 느낌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그녀를 노리고 파고드는 예리한 기운. 고도의 검기라고는 할수 없었지만 절대 무시할수 없는 기운이었다.세라는 황급히 자신을 노리는 다른 사내를 발로 걷어차 떼어내 버리고는,검을 거꾸로 쥐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청랑 십이검(靑狼十二劍) 와랑출수(臥狼出手)-
한동안 쓸일이 없었던 세라의 짙푸른 검기가 마치 벽을 감싸는 담쟁이 덩쿨처럼 세라의 검을 감싸는가 싶더니,세라의 검은 이윽고 허공에 반원을 그리며 움직여졌다.
콰콰쾅!
리키가 쏘아낸 검기는 세라의 기운과 맞부딪혀 밀려나며 주변의 지형지물로 튕겨나갔고, 그것들은 곧 대포를 맞은 것마냥 요란한 폭발음을 내며 부숴지기 시작했다.리키는 망설임없이 2층에서 세라를 향해 뛰어 내렸다.
채애애앵!
엄청난 속도에 세라의 미간이 꿈틀했다.어느덧 그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검을 위에서 아래로 그었고, 그녀는 가까스로 검을 올려 공격을 막아낸 것이었다.세라의 눈에 난생 처음보는 금발의 사내가 비춰졌다.
“너..생각외로 강하구나?”
빈정대는 리키의 말에 세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반면 블랙맘바의 하수인들은 당초의 작전보다 훨씬 빨리 싸움에 개입한 상관의 모습에 당황을 하며 술렁거렸다.
“다들 비켜! 멍청히 서있다가 오러 블레이드에 쏘인다.”
그것은 그 어떤것보다 무서운 협박인 모양인지,그들은 일사 분란하게 리키와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자..그럼 먼저 검술 실력부터 보실까나?”
세라의 눈빛이 변했다.이미 검사로서는 고수의 반열에 들어간 세라에게는 단한번 맞부딪힌 검으로도 리키의 대한 정보가 어렴풋이 입력되고 있었다. 검기를 사용한 것은 둘째 치고라도, 그는 결코 취미삼아 검을 잡은자의 수준이 아니었다.
트트트트..
리키의 손목이 가볍게 꺽이며,그와 동시에 그의 검 역시 세라의 검날 위에서 팽그르르 돌면서 듣기싫은 금속음을 만들어 내었다.자신의 손목을 노리는 리키의 수에, 세라는 반대로 검을 회전시키며 그와 거리를 벌려 떨어져 섰다.
“자..보여주지 그래? 애송이들 상대로 살살 노느라 몸이 근질근질 했을텐데..그렇지?”
피식 웃는 리키의 검으로 푸른빛의 기운이 아른거렸다.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세라의 아름다운 입술도 이 순간 만큼은 움찔하지 않을수 없었다.
‘일반인이 검기를..’
하지만 멍해져 있을수만은 없었다.리키의 몸이 빠르게 움직이며 자신을 노리고 검기를 머금은 검을 휘둘러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채애앵!채앵!
‘이건..’
그의 공격을 받아내며 세라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리키의 긴 장검은 베는 공격이 아닌 찌르기 위주의 공격이었다.세라는 살짝 펜싱이라는 스포츠를 떠올렸지만,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쾌검술로 승부를 보는 타입인가?’
리키의 검은 마나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렇게 파워있는 공격은 아니었다.하지만 세라가 검을 쳐내면 쳐낼수록 그것은 마치 독사처럼 곡선을 그리며 세라의 몸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한번 무위가 된 이후에 다시 공격으로 전환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페어리라고 해도 믿을수 있을 정도의 쾌검술이었다.
‘응?’
그녀에게 공격을 퍼붓던 리키의 눈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그녀의 검에서 강맹한 검기다발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 틈을 주지 않으려던 리키는 재빨리 검을 뻗어 세라의 목줄기를 향해 검을 뻗었다.
‘아..안돼.할수 없다.’
쾌검술에 대적할수 있는 무한연환검무를 시전하려던 세라는 생각을 고쳐 먹으며 검을 휘둘렀다.이종족인 크룬이나 같은 페어리라면 모를까, 말그대로 무한대로 연계공격을 퍼붓는 그 초식을 일반인에게 쓸수는 없었다.
“당신 정체가 뭐지?”
세라는 고심끝에 강하게 검을 휘둘름으로서 그와 거리를 벌려 놓고는 입을 열었다.그녀의 검기를 피해 뒤로 빠졌던 리키는 살짝 웃으며 검을 든 손을 까딱 거렸다.
“얼굴 만큼이나 목소리도 아름답군.”
“정체가 뭐냐고 물었다.”
“나는 블랙맘바라고 하는 조직의 일원인데?”
“목적은?”
“오너와 페어리의 말살.아..정정하지.2세대 오너와 페어리의 말살..정도가 적당하겠군.”
세라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이렇게 정확하게, 그것도 자신의 전대(前代)의 오너와 페어리마저 아울러서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갖고 있는 그의 말은 좀처럼 놀라지 않는 세라에게도 약간의 쇼크였다.
세라는 살짝 힘을 뺐던 팔에 조금씩 힘을 주었다.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고,제거하려는 이상 그 목적은 알지 못해도 적이라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었다.게다가 방금 리키와 검을 섞어본 결과, 그는 설렁설렁 봐줄 정도의 레벨이 분명 아니었다.
세라가 검을 고쳐쥔 것을 신호탄으로, 다시금 리키의 몸이 튕겨지듯 세라에게 쏘아져 나갔다.그가 그리는 은빛궤도를 좌우로 횡이동하며 모두 피해버린 세라의 검은 이윽고 푸른빛을 머금으며 크게 휘둘러졌다.
“큭!”
이번엔 그것을 막아낸 리키쪽에서 신음성이 울렸다.그것이 동양무예의 검술의 초식중 하나인것 까지는 리키가 알아챌수 없었으나, 중요한것은 리키역시 검기를 다루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힘겹게 막아냈다는 사실이었다.
리키와 세라의 검이 한곳에서 만나며 힘대결을 하기 시작했다.단순히 근육에서 나오는 힘이 아닌, 검기와 검기의 싸움이라 하는 것이 옳았다.리키는 자신도 모르게 눈에 힘을 주었다.
‘칫..벌써..써야하나..’
리키는 이를 악물며 세라의 맑은 눈망울을 노려보았다.순간 세라는 온몸에 오싹한 한기가 돋는것이 느껴졌다.
“네 년은 죽일수 없어..넌 이제부터 니 오너를 죽여야 하거든..”
“읍!”
갑자기 리키의 검기가 좌우로 넓어졌고,그것은 곧 세라의 검기와 직접 맞닿아 버렸다.비슷한 두개의 힘이 닿음으로서 파생된 척력(斥力)때문에 세라는 뒤로 주르륵 하고 밀려나며 리키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검기를 다루는 것이..프로센의 왠만한 익스퍼트 수준을 상회한다.’
그것은 분명 세라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세라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몸이 무겁다..어째서..’
방금전 리키와 칼을 부딪힌 그 이후로, 세라의 몸은 알수없는 기운에 눌려 있는 것만 같았다.흡사 물을 잔뜩 먹은 옷을 입고 백사장을 걷는 것처럼 몸이 너무나 무거웠다.누군가가 만근이 되는 추를 전신에 달아놓은 것처럼 동작이 더뎌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왜그러지?몸이 이상하기라도 한가?”
리키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세라를 응시했다.그와 동시에 리키의 검날에 맺혀있던 검기들은 순식간에 세라가 있던 쪽으로 쭉 늘어지며 그녀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ㅤㅋㅡㅅ!”
세라는 그녀답지 않게 굼뜬 동작으로 검을 휘둘러 그것을 막아내었다.비록 옆에 있던 작은 시계탑으로 검기를 튕겨내어,기물을 파손하는 정도로 끝이 났지만 손은 지릿지릿 떨리고 있었다.
‘이건 무슨 조화란 말인가..어째서 갑자기 몸이..’
마치 환각제를 복용한것처럼 세라의 눈에는 주변의 모든것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몽롱하게 변하고 있었다.리키의 빈정대는 듯한 표정도,이미 쑥대밭이 되어 있는 주변의 정경들도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 보였다.
채애앵!
어느새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리키의 검이 또 한번 세라의 머리위로 떨어졌다.하지만 세라는 아까처럼 날렵하게 막지 못하고 겨우겨우 검을 휘둘러 몸이 두동강 나는 것을 막아낼 뿐이었다.한쪽 무릎은 힘없이 땅에 닿아버렸고,이를 악문 그녀의 얼굴위로 리키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나는 검술로만 따지자면 너보다 한참이나 하수일거야.”
세라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온몸에 힘을 주었다.그녀를 검으로 짓누르는 동시에 다가온 리키의 얼굴은 세라와 불과 10센티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블랙맘바라는 이름에 걸맞게..나는 스네이크 아이즈를 갖고 있거든..바로 이렇게.”
리키의 눈과 마주친 세라의 동공이 점점 희미해 지기 시작했다.리키의 눈동자가 흡사 뱀처럼 예리해 지는가 싶더니,이내 푸른빛의 기운이 세라의 눈앞을 가득 매워버렸기 때문이었다.
“큭!”
리키는 미련없이 세라를 발로 걷어차 버렸고, 그녀는 몇미터나 날아가며 바닥에 뒹굴렀다.
“에이. 처음부터 스네이크 아이즈를 쓰는게 아니었나?”
리키는 기절하듯 정신을 잃고 쓰러진 세라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처음 세라에게 검기를 날리고 뛰어내려, 검과 검끼리 맞부딪히자 마자 자신도 모르게 그 기술을 써버린 자신이 약간은 한심하게 느껴졌다. 검을 맞부딪히자마자, 세라에게서 느낀 기운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자신의 특기인 환술을 끄집어 낸 것이었다.
‘하지만 뭐..그렇게 안했더라면 검술승부에서 두동강이 났을지도 모르겠군..’
리키는 자신의 실력에 회의감이 들어오는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등에 있는 검집으로 검을 가져다 밀어넣었다. 그는 품안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엄지손톱만한 붉은 구슬이었다.
“야.뭣들하고 있어?저렇게 의지가 강한 아이는 환술에서 빨리 깨어나는거 몰라?얼른 옮겨!”
그제서야 저만치서 대피하고 있던 인원들은 우르르 세라에게 몰려들었다.잠깐의 경합이었지만 대동하고 온 수하들의 절반 이상이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리키는 짜증이 난듯 얼굴을 찡그렸다.
‘쳇..남걱정 할때가 아니지.나도 이 빌어먹을 능력만 쓰면 머리가 어지러우니..’
그는 살짝 비틀대면서도 희미하게 웃었다.축 늘어진 세라의 몸을 어깨에 걸쳐 메고는 서둘러 미리 정해 두었던 곳으로 탈출하는 부하들의 모습을 보며,그는 작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작전대로 아지트로 돌아간다. 은발머리 계집이 오기전에..다들 서둘러.”
#1-유일한 생존자
“무슨일이에요?기껏 배고프다고 했더니 폼이나 잡고.”
유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김노인을 원망하듯 입을 열었다.당사자인 김노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는 벌서 세가피째의 담배를 입에 물며 한숨섞인 연기를 토해내었다.
“이제 그런거 안속아요. 나이먹어서 장난도 늘어가지고.”
초희도 유희를 거들듯 말했다.일상생활에서 진지함이란 거의 찾아볼수 없는 그에게 지금의 행동이 그녀들에게 일말의 긴장감도 줄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인 모양이었다.
“왜요?아끼던 야한 동영상을 날리기라도 했나요?”
유희는 윤기나는 머리칼을 뒤로 쓸어올려 묶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산속에 위치한 조그마한 통나무 집. 목재의 향기가 가공되지 않은 그대로의 은은한 내음을 전달하는 수수하지만 아늑한 그들만의 보금자리였다.김노인은 창밖으로 피우던 담배를 집어 던져 버렸다.
“니들..7년전의 일을 기억하냐?”
김노인의 말에 무뚝뚝하던 유희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초희 역시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오너를 뒤 돌아 보았다.
“갑자기 그건 왜요..”
유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늘 하이톤인 그녀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것은 약간 힘이 빠져 축쳐져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7년전의 기억이란 김노인은 물론이고 유희와 초희에게 있어서도 결코 유쾌한 기억이 아니었다.이계의 존재에 대응하기 위해 온 1세대 페어리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과 직접 싸워본적이 단한번도 없었다. 2세대 부터 크룬이 난입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더 정확히 말하자면,7년전의 기억은 1세대 오너끼리 서로의 피로 몸을 적시던 암흑의 시대뿐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희는 그때의 기억이 몸서리쳐지게 싫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마나량에 있어 타고났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김노인이 아니었더라면 유희는 아마 그때 입은 상처때문에 소멸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같은길을 걸어야할 오너들이 동지의 몸에 칼을 대야했던 그날의 기억들.
“그 이야긴 왜 꺼내요? 또 죄책감 때문인가요?그런것이라면 이제 그만 잊을때도 되지 않았어요?”
유희는 불만가득한 표정으로 김노인에게 말했다.평소 말이 없고 냉철한 편인 그녀의 성격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초희만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김노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야마토가 살아있다.”
신음을 하듯 들려오는 김노인의 말에 그녀들의 표정은 심하게 동요하기 시작했다.잔잔한 호수에 큰 바위가 떨어진것처럼, 늘 평정심을 유지하던 두 여인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소리죠?”
김노인은 여전히 등만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지만,초희는 그 역시 심하게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수 있었다. 평소의 그 답지 않은 긴장어린 말투때문이었다.
좀처럼 대답이 떨어지지 않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초희의 회상은 7년전으로 되돌아 갔다. 단 한번 대적했을 뿐인 야마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야마토의 페어리인 미호의 모습이 떠올랐다고 표현하는 편이 옳았다. 최후의 10인이 흡사 서바이벌을 벌이는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서로를 배척했던 시절. 미호는 1세대 페어리중에서도 최강이라 할수 있는 페어리였다.페어리를 단 한명 갖고 있는 야마토가 나머지 오너들의 공공의 적으로 일순간 떠오른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초희는 미간을 찡그렸다.당시의 전투는 10명의 오너가 펼치는 개인전이나 다름없었다.2세대의 전쟁처럼 흑과 백의 싸움이 아닌, 다양한 색을 지닌 오너들이 서로 유일한 색이 되기 위한 싸움이었던 것이다.초희의 기억 속에도 미호와 대적한 적은 있으나 야마토의 최후를 봤다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직접 확인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죽지 않았다고 할수는 없지요.”
초희의 말에 김노인은 고개를 저었다.생각에 잠기던 유희역시 반박하듯 말을 이었다.
“7년이나 흘렀고, 그는 단 한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요.이제와서 살아있다고 단정하고 걱정하는 이유가 뭐죠?”
“죽었다고 단정하는 것보다, 살아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단정하는 편이 훨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지.”
그의 말에 유희는 할말을 잃은듯 입을 다물었다. 그녀역시 반박할 길이 없었다.지금의 유희는 고등의 수준에 다다라 상대방의 마나를 직감적으로 데이터화 시킬수 있었지만, 문제는 당시에는 그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그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가설은 논증 자체가 없는 것이었다.
“야마토는 약하다. 오너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정도지. 체술가도 아니고, 마법을 다루지도 못해. 단지 마나 자체가 어마어마 하다는 것. 그리고 그 큰 마나에 기생하는 미호라는 걸출한 페어리가 있다는 것.그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유일한 오너가 되길 희망하는 이들의 첫번째 타겟이었다.”
유희도, 초희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녀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또다시 담배를 피워무는 자신들의 오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야마토는 상처가 있는 녀석이었고, 더불어 야망도 강했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잘못된 방향으로 해결하려 하는게 문제였지.준이가 요새 전쟁 후의 어긋난 벨런스를 바로잡아가는 과정에서 발견한 수수께끼의 일들은 야마토가 꾸몄을지도 모르는 거야.”
“어째서?어째서죠?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왜 7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건가요?”
“우린 야마토가 죽었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엔 너무나 정신이 없었고, 또 전쟁이 끝난후 아무런 일도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야마토도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야마토는 나 보다 먼저 준이나 차우가 속해 있는 2세대 오너들의 존재를 인식한 것일지도 모른다.똑똑한 녀석이니 곧 이종족이 올것을 예감했을수도 있지.야마토는 기다린거다.2세대 오너들이 이종족을 몰아내고,또 서로를 견제하며 싸우고 죽이는 것을..그것을 기다리며 힘을 쌓고 있었을거다.녀석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김노인의 말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유희는 너무나 오랜만에 전신에 흐르는 긴장감을 느끼며 꼴깍 하고 침을 삼켰다.김노인의 말대로 두려운 것은 야마토가 아닌, 그녀의 페어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야마토 혼자서 무슨일을 할수 있겠어요?아무리 미호가 있다지만..”
“아냐. 오너로 선택되지 않았을뿐. 이 세상엔 너무나 많은 능력자들이 있다.야마토는 한때 1세대 오너들의 수장을 맡기까지 했던 리더쉽있는 녀석이야.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소외되어 있던 능력자들에게 야망을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이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내가 어리석었어. 준이가 비현실적인 일들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소리를 들었을때 무심히 흘려들은게 큰 불찰이었다.”
성질이 급한 초희가 벌떡 하고 일어났다. 김노인의 말이 단지 추측과 가설뿐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알아봐야할 필요가 있는 가설이었다.유희는 침착해지려 애를 쓰며 김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그는 한참만에 등을 돌려 그녀들을 바라보았다.후회와 회한, 그리고 당황이 섞인 미묘한 표정을 짓는 김노인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땀방울마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찾아야지. 이건 준이에게 맡길정도의 수준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가 해결해야만 해. 그의 수하들이면 모를까..야마토는 너무나 위험한 녀석이야.”
드디어 유희도 몸을 일으켰다. 집안에서 입는 편안한 복장이었던 그녀는 황급히 후드가 달린 긴 자켓을 걸치고는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쓰며 백발의 머리를 가렸다. 초희역시 유희와 비슷한 방법으로 마스크를 착용하며 얼굴의 반을 가린 가면을 교묘히 가려버렸다.
“갈게요. 가겠는데...만약 주인님이 추측이 잘못된 거라면..각오하라구요.”
#2-체술가들의 혈투.
태항산의 험준한 산맥과 그것에 펼쳐진 아슬아슬한 능선. 그리고 자연이 조산작용으로 만들어낸 산속의 평원에서는 무언가 빠른 두개의 존재가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범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움직임들은 각각 검은색과 청색의 환영을 자아내며 서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이동을 멈췄다.
“하아..하아..”
차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눈앞에 있는 우경을 잠시나마 얕잡아 본것은 크나큰 실수가 아닐수 없었다.
철권과도 같은 차우의 두 주먹이 불끈 하고 쥐어졌고, 그와 동시에 물먹은 스펀지를 짜낸것처럼 핏물이 베어나왔다.왼쪽 어깨가 관통당한 통증이 아득하게 전해져왔다.
쉬이이익!
차우는 황급하게 제자리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자신에게 날아오던 그 무언가를 피해내었다.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지는 물체. 볼것도 없이 우경이 날린 단도일 것이었다.하지만 차우는 그것을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이번엔 좌우로 칼과는 다른 둔탁한 느낌의 무언가가 맹렬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투두둑!
그의 몸이 지상에 착지하자마자 꽈배기처럼 뒤틀리며 지면에 손을 댄체 몸을 회전시켰다. 역시나 아슬아슬하게 차우의 몸을 스쳐지나가는 물체들. 차우가 수련을 위해 팔찌와 발찌의 형태로 달고 다니던 쇳덩이 들이었다.
‘말도 안돼..저정도의 술법을 부릴정도로 고강해 보이는 무공이 아닌데.’
차우는 당황하고 있었다. 우경의 검과, 차우가 해제해 두었던 쇳덩이들은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우경의 의지대로 자유비행하며 차우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날렵하게 피해서 우경에게 일격을 날리려 하면 그것은 방향을 바꿔 다시금 차우에게 날아들었다.
‘확실해.어기어검이나 격공섭물을 부릴정도의 실력자는 결코 아니다.그럼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차우는 계속해서 날아드는 방해물들을 피하면서도 냉정해지려 애를 썼다.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유있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우경의 모습에 시야에 들어왔다.
우우우우..
우경의 손으로 무형의 기운들이 뭉쳐지기 시작했다.그의 눈은 냉철한 시선으로 쇳덩이 들과 단도를 피해내는 차우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패턴이 있군.’
우경은 씩 하고 웃었다.완벽에 가까운 날렵함과 회피 능력으로 자신의 공격들을 피하고는 있었지만, 분명 차우의 움직임에는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 남은 것은 단 하나.타이밍을 맞춰 녀석에게 결정타를 먹이면 종료.’
이번임무가 생각보다는 쉽다는 생각에 우경은 웃었다.여섯에 달하는 페어리를 거느린 오너를 상대해야 하는 자신의 친구, 리키에게 미안한 감정마저 들어왔다.
‘으응?’
몸을 풀고 차우에게 달려들려 했던 우경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멎었다.사방에서 자유롭게 날아드는 방해물들을 피해내던 그의 몸이 일순간 뒤로 쑥 하고 빠졌기 때문이었다.그것은 우경이 지금까지 눈여겨보던 차우의 행동패턴에서 벗어난 돌발행위였다.
콰아앙!
차우의 손이 강하게 지면을 강타했다.그와 동시에 그의 몸을 중심으로 원형의 형태로 공간이 일그러졌다.팔괘에서 다수의 적을 섬멸할때 쓰는 회류(回流)가 발동된 탓이었다.
투드드드드...
우경은 재빨리 몸을 날렸다.차우가 지면을 내리치는 그 순간, 지면에 있던 바위며 모래알들이 일순간 지면에서 60센티 정도로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것들은 차우의 주변에 흐르는 원형의 기운을 타고 돌다가 이윽고 사방으로 튀어나가듯 날아갔다.
‘뭐 저런 무식한 초식이..’
순식간에 나무위로 뛰어 올라간 우경의 눈이 꿈틀했다.자신의 단도와 차우가 벗어놓은 쇳덩이들은 무차별로 날아드는 바위와 모래알에 밀려 땅바닥으로 뒹굴어 버렸다.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마나가 실린 바위와 모래들은 흡사 크레모어를 터트린 것처럼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방어와 동시에 공격..을 한다는 건가.’
그제서야 우경은 차우의 데이터에 적혀져 있던 팔괘라는 무공에 대해 다시한번 고찰할수 밖에 없었다.그저 시시껄렁하고 흔해빠진, 이론만 거창한 중국 가전무공의 일파라고 생각했던 추측을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차우의 시선이 정확하게 우경이 피해있는 나무위로 향했다.그의 허벅지 근육이 일순간 팽창되는가 싶더니, 이윽고 그의 다리는 강하게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대포알이 쏘아지는 것처럼 작용반작용 법칙에서 이뤄질수 있는 최속의 스피드나 다름없었다.
“큭!”
갑자기 자신의 눈앞으로 나타난 차우가 휘두르는 강권에 우경은 재빨리 양손을 머리위로 교차시켜 막아내었다. 하지만 이윽고 차우의 무릎은 우경이 팔을 교차한 그 작은 틈바구니로 파고들었다.
“헉!”
자신의 강한 한방으로 우경이 지면에 추락하여 형편없이 나뒹구는 것을 확인한 차우의 동공이 커졌다. 양 팔에서 칼로 베인듯한 통증이 전달되어 왔고, 뜨끈한 선혈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으으윽..”
차우역시 그대로 지면으로 추락해 버렸다.그는 황급히 무복의 팔부분을 찢어내어 자신의 살갖을 바라보았다.
‘이..이건..’
수십개의 작은 알갱이들이 피부를 해집고 다니며 피를 짜내고 있었다.차우의 시선이 황급히 우경이 있는 곳을 향했다.그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보험에 들어두길 잘했군..위험했어.”
“너..무..무슨짓을..”
차우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날렵하게 옆으로 굴렀다.그와 동시에 그를 노리고 날아들던 단도가 목적지를 잃고 지면에 푹 하고 박혀버렸다.
‘쇳가루...이건 설마..’
자신의 살갖을 계속해서 파고드는 알갱이들.차우는 그제서야 깨달은듯 고개를 들었다. 비릿하게 웃고 있는 우경의 주변으로 차우가 착용했던 쇳덩어리가 가루로 분해되며 흩날리고 있는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쓸수있는 능력치를 다 쏟아부어서 널 죽이고 싶진 않았는데..내 자만의 탓이 크겠지.큭.”
차우는 재빨리 팔을 움켜쥐어 선혈을 짜내었지만 살갖으로 파고드는 쇳가루 하나하나를 빼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서, 우경은 두덩어리의 쇠뭉치를 모두 가루로 분해시키며 차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흡사 수천마리의 파리들이 날아다니는 듯한 착각을 자아내며,쇳가루들은 금방이라도 차우를 삼켜버릴듯 허공에 뜬 상태 그대로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그것이었구나. 어검술이나..격공섭물 같은 전설적이고 거창한것이 아니었어.녀석은..’
급기야 뭉쳐있던 쇳가루들은 양분되며 우경의 양손을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차우는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쇳가루들이 몸에 더 깊이 파고들게 되면 위험했다.아니, 그것을 떠나서 지금 우경이 준비하고 있는 공격은 여태까지의 공격들보다 몇배는 위험해 보였다. 그는 서둘러 단전에 마나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눈치를 챈 모양이지만..사실 그것이 별 의미가 없지. 나는 자기장(磁氣場)을 다룬다.오직 이 능력 하나로.. 블랙맘바에 들어갈수 있었고.”
차우는 질끈하고 입술을 깨물었다.전투는 당초 차우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듯했다.
#3-Snake eyes
세라의 눈이 차분함을 머금고 좌우로 움직였다. 저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분장을 하고는 있었지만,들고 있는 검이며 무기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있지는 않았지만 입출국객이 오가던 공항의 홀은 금세 썰렁해져 버렸다. 공항직원이나 혹은 경찰의 통제가 오랜시간 동안 들어오지 않는것으로 보아,그들은 분명 살의로 공항을 통제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큭!”
세라의 검에 얻어맞은 사내는 신음성을 흘리며 몇미터나 날아가 뒹굴어 버렸다.검날로 베어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세라는 굳이 검의 넓은 부분으로 타격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오너 전쟁이 끝나고 나서의 준의 명령때문이었다.
-앞으로는 싸울일도 없겠지만..설사 있다 하더라도 일반인에게 살수를 펼쳐서는 안돼-
얼마전에 유나역시 그 명령이 걸려 준에게 보고를 못한것도 있었지만, 세라의 경우에는 그것이 준과의 약속이라 여겼기에 더욱더 지켜야 할 금칙이었다.하지만 자신만의 검술세계를 완벽히 다진 세라에게 있어서 검을 들고 살의를 펼치지 않는것은 오히려 죽이는것보다 몇배는 더 까다로웠다.
세라의 주변을 원형으로 감싼 인물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각오했던 것과 달리 세라의 검에 마나가 입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런 상태라면 모두 함께 달려들면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 선 그들은 세라를 노리며 한번에 달려들었다.
세라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그냥 뭣도 모르는 일반인들이 칼들고 칼싸움 흉내를 내는 수준이 아니었다.세라에 비해 몇수 아래일수는 있지만, 그들은 분명 전문적으로 검을 다루는 훈련을 받은 이들이 틀림없었다. 총을 비롯해 각종 과학적 무기들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전문적 교육을 받은 검사들이 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볼만한 일이 아니었다.
세라는 사뿐히 몸을 숙이며 낮은 자세로 검을 등뒤에서 얼굴앞으로 팔자를 그리며 회전시켰다.세라를 노리고 들어오던 무기들은 팅!하는 금속음을 내며 모두 하늘로 향해지며 솟구쳤다.
“큭!”
검날이 넓은 바스타드 소드가 사내들의 얼굴을 차례로 후려쳤다.걔중에는 신속한 임기응변으로 검을 끌어내려 막으려 하는 자도 있었지만, 급격하게 힘을 주어 칼을 내리다가 손목에 들어가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기를 떨구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음..놀라워..정말 놀랍군.”
세라가 고군분투 하는 모습을 2층에서 내려다 보던 리키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수십명이 몰려들어 애워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라의 머리털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자신의 수하들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는 커녕 당연해 보였다. 흡사 추풍낙옆마냥 하나하나 바닥을 뒹구는 그들을 보며, 리키는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저게 블랙나이트로군. 보스가 검만 들었을뿐 별거 아니라고 했는데...절대 그렇지 않잖아?”
리키는 세라의 검술이 살의(殺意)를 담고 있지 않음을 단박에 파악해 내었다.왜인지 모르지만 그녀는 검을 방어와 타격기의 용도로만 사용하고 있었다.급한 마음에 총을 꺼내들어 쏘는 자도 있었지만,그것은 여지없이 세라의 검에 맞고 튕겨나가 버렸다.
“바보같은 녀석.총을쓰면 검에 튕겨나가 아군이 다칠수 있다는것도 모르나.”
리키는 피식 하고 웃었다. 세라가 어떤 이유로 직접 베지 않는지는 그역시 알수 없었지만,그는 부하들을 이용해 그녀의 힘을 빼려했던 자신의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응?”
세라는 무언가 강맹한 기운이 자신을 덮치는 느낌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그녀를 노리고 파고드는 예리한 기운. 고도의 검기라고는 할수 없었지만 절대 무시할수 없는 기운이었다.세라는 황급히 자신을 노리는 다른 사내를 발로 걷어차 떼어내 버리고는,검을 거꾸로 쥐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청랑 십이검(靑狼十二劍) 와랑출수(臥狼出手)-
한동안 쓸일이 없었던 세라의 짙푸른 검기가 마치 벽을 감싸는 담쟁이 덩쿨처럼 세라의 검을 감싸는가 싶더니,세라의 검은 이윽고 허공에 반원을 그리며 움직여졌다.
콰콰쾅!
리키가 쏘아낸 검기는 세라의 기운과 맞부딪혀 밀려나며 주변의 지형지물로 튕겨나갔고, 그것들은 곧 대포를 맞은 것마냥 요란한 폭발음을 내며 부숴지기 시작했다.리키는 망설임없이 2층에서 세라를 향해 뛰어 내렸다.
채애애앵!
엄청난 속도에 세라의 미간이 꿈틀했다.어느덧 그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검을 위에서 아래로 그었고, 그녀는 가까스로 검을 올려 공격을 막아낸 것이었다.세라의 눈에 난생 처음보는 금발의 사내가 비춰졌다.
“너..생각외로 강하구나?”
빈정대는 리키의 말에 세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반면 블랙맘바의 하수인들은 당초의 작전보다 훨씬 빨리 싸움에 개입한 상관의 모습에 당황을 하며 술렁거렸다.
“다들 비켜! 멍청히 서있다가 오러 블레이드에 쏘인다.”
그것은 그 어떤것보다 무서운 협박인 모양인지,그들은 일사 분란하게 리키와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자..그럼 먼저 검술 실력부터 보실까나?”
세라의 눈빛이 변했다.이미 검사로서는 고수의 반열에 들어간 세라에게는 단한번 맞부딪힌 검으로도 리키의 대한 정보가 어렴풋이 입력되고 있었다. 검기를 사용한 것은 둘째 치고라도, 그는 결코 취미삼아 검을 잡은자의 수준이 아니었다.
트트트트..
리키의 손목이 가볍게 꺽이며,그와 동시에 그의 검 역시 세라의 검날 위에서 팽그르르 돌면서 듣기싫은 금속음을 만들어 내었다.자신의 손목을 노리는 리키의 수에, 세라는 반대로 검을 회전시키며 그와 거리를 벌려 떨어져 섰다.
“자..보여주지 그래? 애송이들 상대로 살살 노느라 몸이 근질근질 했을텐데..그렇지?”
피식 웃는 리키의 검으로 푸른빛의 기운이 아른거렸다.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세라의 아름다운 입술도 이 순간 만큼은 움찔하지 않을수 없었다.
‘일반인이 검기를..’
하지만 멍해져 있을수만은 없었다.리키의 몸이 빠르게 움직이며 자신을 노리고 검기를 머금은 검을 휘둘러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채애앵!채앵!
‘이건..’
그의 공격을 받아내며 세라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리키의 긴 장검은 베는 공격이 아닌 찌르기 위주의 공격이었다.세라는 살짝 펜싱이라는 스포츠를 떠올렸지만,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쾌검술로 승부를 보는 타입인가?’
리키의 검은 마나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렇게 파워있는 공격은 아니었다.하지만 세라가 검을 쳐내면 쳐낼수록 그것은 마치 독사처럼 곡선을 그리며 세라의 몸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한번 무위가 된 이후에 다시 공격으로 전환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페어리라고 해도 믿을수 있을 정도의 쾌검술이었다.
‘응?’
그녀에게 공격을 퍼붓던 리키의 눈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그녀의 검에서 강맹한 검기다발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 틈을 주지 않으려던 리키는 재빨리 검을 뻗어 세라의 목줄기를 향해 검을 뻗었다.
‘아..안돼.할수 없다.’
쾌검술에 대적할수 있는 무한연환검무를 시전하려던 세라는 생각을 고쳐 먹으며 검을 휘둘렀다.이종족인 크룬이나 같은 페어리라면 모를까, 말그대로 무한대로 연계공격을 퍼붓는 그 초식을 일반인에게 쓸수는 없었다.
“당신 정체가 뭐지?”
세라는 고심끝에 강하게 검을 휘둘름으로서 그와 거리를 벌려 놓고는 입을 열었다.그녀의 검기를 피해 뒤로 빠졌던 리키는 살짝 웃으며 검을 든 손을 까딱 거렸다.
“얼굴 만큼이나 목소리도 아름답군.”
“정체가 뭐냐고 물었다.”
“나는 블랙맘바라고 하는 조직의 일원인데?”
“목적은?”
“오너와 페어리의 말살.아..정정하지.2세대 오너와 페어리의 말살..정도가 적당하겠군.”
세라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이렇게 정확하게, 그것도 자신의 전대(前代)의 오너와 페어리마저 아울러서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갖고 있는 그의 말은 좀처럼 놀라지 않는 세라에게도 약간의 쇼크였다.
세라는 살짝 힘을 뺐던 팔에 조금씩 힘을 주었다.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고,제거하려는 이상 그 목적은 알지 못해도 적이라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었다.게다가 방금 리키와 검을 섞어본 결과, 그는 설렁설렁 봐줄 정도의 레벨이 분명 아니었다.
세라가 검을 고쳐쥔 것을 신호탄으로, 다시금 리키의 몸이 튕겨지듯 세라에게 쏘아져 나갔다.그가 그리는 은빛궤도를 좌우로 횡이동하며 모두 피해버린 세라의 검은 이윽고 푸른빛을 머금으며 크게 휘둘러졌다.
“큭!”
이번엔 그것을 막아낸 리키쪽에서 신음성이 울렸다.그것이 동양무예의 검술의 초식중 하나인것 까지는 리키가 알아챌수 없었으나, 중요한것은 리키역시 검기를 다루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힘겹게 막아냈다는 사실이었다.
리키와 세라의 검이 한곳에서 만나며 힘대결을 하기 시작했다.단순히 근육에서 나오는 힘이 아닌, 검기와 검기의 싸움이라 하는 것이 옳았다.리키는 자신도 모르게 눈에 힘을 주었다.
‘칫..벌써..써야하나..’
리키는 이를 악물며 세라의 맑은 눈망울을 노려보았다.순간 세라는 온몸에 오싹한 한기가 돋는것이 느껴졌다.
“네 년은 죽일수 없어..넌 이제부터 니 오너를 죽여야 하거든..”
“읍!”
갑자기 리키의 검기가 좌우로 넓어졌고,그것은 곧 세라의 검기와 직접 맞닿아 버렸다.비슷한 두개의 힘이 닿음으로서 파생된 척력(斥力)때문에 세라는 뒤로 주르륵 하고 밀려나며 리키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검기를 다루는 것이..프로센의 왠만한 익스퍼트 수준을 상회한다.’
그것은 분명 세라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세라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몸이 무겁다..어째서..’
방금전 리키와 칼을 부딪힌 그 이후로, 세라의 몸은 알수없는 기운에 눌려 있는 것만 같았다.흡사 물을 잔뜩 먹은 옷을 입고 백사장을 걷는 것처럼 몸이 너무나 무거웠다.누군가가 만근이 되는 추를 전신에 달아놓은 것처럼 동작이 더뎌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왜그러지?몸이 이상하기라도 한가?”
리키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세라를 응시했다.그와 동시에 리키의 검날에 맺혀있던 검기들은 순식간에 세라가 있던 쪽으로 쭉 늘어지며 그녀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ㅤㅋㅡㅅ!”
세라는 그녀답지 않게 굼뜬 동작으로 검을 휘둘러 그것을 막아내었다.비록 옆에 있던 작은 시계탑으로 검기를 튕겨내어,기물을 파손하는 정도로 끝이 났지만 손은 지릿지릿 떨리고 있었다.
‘이건 무슨 조화란 말인가..어째서 갑자기 몸이..’
마치 환각제를 복용한것처럼 세라의 눈에는 주변의 모든것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몽롱하게 변하고 있었다.리키의 빈정대는 듯한 표정도,이미 쑥대밭이 되어 있는 주변의 정경들도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 보였다.
채애앵!
어느새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리키의 검이 또 한번 세라의 머리위로 떨어졌다.하지만 세라는 아까처럼 날렵하게 막지 못하고 겨우겨우 검을 휘둘러 몸이 두동강 나는 것을 막아낼 뿐이었다.한쪽 무릎은 힘없이 땅에 닿아버렸고,이를 악문 그녀의 얼굴위로 리키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나는 검술로만 따지자면 너보다 한참이나 하수일거야.”
세라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온몸에 힘을 주었다.그녀를 검으로 짓누르는 동시에 다가온 리키의 얼굴은 세라와 불과 10센티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블랙맘바라는 이름에 걸맞게..나는 스네이크 아이즈를 갖고 있거든..바로 이렇게.”
리키의 눈과 마주친 세라의 동공이 점점 희미해 지기 시작했다.리키의 눈동자가 흡사 뱀처럼 예리해 지는가 싶더니,이내 푸른빛의 기운이 세라의 눈앞을 가득 매워버렸기 때문이었다.
“큭!”
리키는 미련없이 세라를 발로 걷어차 버렸고, 그녀는 몇미터나 날아가며 바닥에 뒹굴렀다.
“에이. 처음부터 스네이크 아이즈를 쓰는게 아니었나?”
리키는 기절하듯 정신을 잃고 쓰러진 세라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처음 세라에게 검기를 날리고 뛰어내려, 검과 검끼리 맞부딪히자 마자 자신도 모르게 그 기술을 써버린 자신이 약간은 한심하게 느껴졌다. 검을 맞부딪히자마자, 세라에게서 느낀 기운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자신의 특기인 환술을 끄집어 낸 것이었다.
‘하지만 뭐..그렇게 안했더라면 검술승부에서 두동강이 났을지도 모르겠군..’
리키는 자신의 실력에 회의감이 들어오는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등에 있는 검집으로 검을 가져다 밀어넣었다. 그는 품안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엄지손톱만한 붉은 구슬이었다.
“야.뭣들하고 있어?저렇게 의지가 강한 아이는 환술에서 빨리 깨어나는거 몰라?얼른 옮겨!”
그제서야 저만치서 대피하고 있던 인원들은 우르르 세라에게 몰려들었다.잠깐의 경합이었지만 대동하고 온 수하들의 절반 이상이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리키는 짜증이 난듯 얼굴을 찡그렸다.
‘쳇..남걱정 할때가 아니지.나도 이 빌어먹을 능력만 쓰면 머리가 어지러우니..’
그는 살짝 비틀대면서도 희미하게 웃었다.축 늘어진 세라의 몸을 어깨에 걸쳐 메고는 서둘러 미리 정해 두었던 곳으로 탈출하는 부하들의 모습을 보며,그는 작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작전대로 아지트로 돌아간다. 은발머리 계집이 오기전에..다들 서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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