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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와 민수 이야기 (6부)


   주희와 민수 이야기 (6 부)


민수는 주희네 집이 맘에 들었다. 자신이 꿈꿔왔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널찍한 집, 잘 가꾸어진 정원, 항상 처음이라는 듯이 솟아오르는 조그만 분수,
깨끗한 거실, 또 정확한 발음에 교양이 풍기는 주희..
복작거리던 고아원, 열 둘이 같이 쓰던 사택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특별히 집사님의 부탁도 있고, 공부도 잘 가르쳐 주신다니 편하게 생각하고 지내도록 해요.”
주희는 이층으로 민수를 데리고 올라가 그가 기거할 방을 보여 주었다.
다영이 막내 삼촌이 미국 유학하기 전에 살던 방이었다.


커튼을 새로 달았고, 공부를 많이 할 사람이니 특별히 스탠드와 책상을 새로 마련했다.
원래 있던 책상은 거실로 빼서 그가 다영이를 가르칠 때 쓰도록 했다.


 “입주 과외니 다영이가 물어볼 때마다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 아시죠?”
주희는 집안의 주인으로서, 다영이의 엄마로서 확실하게 일처리를 해나가는 자신이 뿌듯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과외를 받아본 학생은 수학 성적이 평균 20점은 올랐어요.”
 “그럼 원래 85점이었던 학생은 어떻게 되게요?”
주희는 딱딱한 분위기를 좀 누그려뜨리기 위해 이런 유치한 농담까지 아끼지 않았다.


 “말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화났어요?.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저도 나름대로 자존심이 있는데 어머님이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니 좀 섭섭해서요.”
주희가 그의 컴플렉스를 건드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이었지만 거짓으로 지탱하고 있는 자존심이라
민수는 상대가 자신을 못믿는 눈치가 보이면 발끈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솔직하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성마른 그의 반응에 좀 당황했지만 자존심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의 자기 표현이라고
주희는 치부했다.
 “아직 페이 얘기는 못 들었는데...”
 “한 달에 백 만원 드리겠어요. 괜찮아요?”
백만원이면 민수에게 큰 돈이다. 먹고 자고 씻고 다 빼고 백만원,
등록금 내고 용돈쓰고도 한달에 삼십 만원 이상은 저축 할 수 있을 만한 돈이었다.
하지만 욕심이 생겼다.


이런 돈에 감지덕지하며 “하, 감사합니다.” 하는 노예같은 짓은 하지 말자.
남편이 병원 원장이라고 했다. 자식하나 있는 데 돈 아낄리 없다.
수학만 가르치나, 논술과 국어도 좀 봐주고, 또 과학도 좀 봐줘야 하고, 그 값을 하면 된다.


 “그것은 좀 적은데요. 집에 붙어 있으면서 학생한테 계속 시달릴텐데,
 하루의 반은 이 집에 있는데요.”
 “그러면 얼마면 좋겠어요?”
 “한 이 백은 되야 할 것 같습니다.”


주희는 두 배나 높게 부른 그가 허황되다기 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그렇게 평가할 줄 아는
당당함이 믿음직스러웠다.
박집사는 ‘멕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주점부리할 용돈이나 쥐어주라’고 했지만
학비를 생각해서 백 만원을 부른 것이었다.


민수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자신이 좀 부끄러웠다.
코트 하나 산다고 5백 만원은 그 자리에서 눈깜짝 않고 카드를 긁는데
딸을 가르치는 선생을 박대하면 안된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다영이가 좀 들떠서 감당하기 힘들거예요. 좋은 대학 보내주면
 보너스로 차 한대 뽑아드릴게요. 괜찮아요?”
 “뭐,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번 열심히 가르쳐 보겠습니다.”


민수는 도대체 이 여자가 어떻게 생겨먹은 여잔가,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여잔가 싶으면서도, 그런 화끈한 씀씀이에
역시 잘사는 집이라 다르구나 하는 감탄이 일었다.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 고아원 출신임을 밝혀도 그저 신기해하며  ‘그 시절 얘기’를
해보라면 순진하게 귀를 기울일 여자같았다.


 “제가 한가지 당부드리는 것은, 이건 딸가진 엄마로서 드리는 부탁이예요.
 이제 다영이도 여자로서 다 컸고, 또 호기심도 많은 사춘기예요.
 불미스런 일이 안생기도록 조심했으면 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불미스런 일은 뭐고 부탁은 뭐냐고 따지고 싶었다.
민수는 고아원 시절에는 그 곳을 떠날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나와서는 생계걱정을 하느라
바빳으므로 여자와 사귀어본다, 어떻게 한번 손을 잡아 본다, 뽀뽀를 한다, 같은 것은
남의 애기로 알고 살아왔다.


 “그러니까 친 오빠처럼 지내면 된다는 말씀이지요?”
 “제 말이 바로 그 말이예요. 다영이가 말 안듣고 까불면 참지 말고 혼내주기도 하구요”
 “잘 알겠습니다. 그런 거야 제가 아주 잘합니다. 동생들 혼내주는 데는 뭐...”
하마터면 고아원 시절 얘기가 나올 뻔 했다.


얼마 후 다영이가 학원에서 돌아왔다.
다영이는 지금까지 자신을 거쳐간 과외 선생에게 처음에 대하 듯이
민수에게 눈길도 안주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싸가지 없군.’
민수는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과연 내가 저 애를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다.
고 2라 학생으로 봤는데, 학생티는 안나고 성숙한 여인이 장난감같은 교복을 걸치고
있는 것 같았다.
말 안들을 때 과연 내가 혼내 줄 수나 있을까?


3 일 후부터 민수는 주희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
상조는 사실 아내 주희가 남자 선생을 입주 과외로 두자고 했을 때 극구 반대했다.
주희는 그런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싫다는 거예요. 다영이 교육은 내가 다 맡기로 했잖아요.”
 “글쎄, 남자 선생을 집안에 끌어드리는게 불편하단 말이요.”
 “당신, 다영이가 연수가서 왜 그렇게 영어 실력이 늘었는지 알잖아요.
 학원시간 끝나면 끝나버리는 공부가 아니라 24시간 영어와 접하니 그렇게 늘잖아요.
 수학도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아요.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항상 옆에 물어볼 사람이 있고,
 또 딱 시간을 지켜 지도해줄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제 딱 일년 반이에요.”


상조는 늦잠을 자고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가 런닝 머신위에서 되는 대로 달리고 있었다.
조금 지나자 헉헉대며 거실 바닥으로 내려와 주저 앉았다.
그때 민수가 리어카에다 짐을 싣고 정원으로 들어왔다.
꽤 무거운 책 보따리를 양 어깨에 지고 들어오는 그의 모습을 보자 판조는 위압감을 느꼈다.


 ‘귀찮게 되었군. 이 녀석 못 가르치기만 해봐라.’
상조는 괜한 적대감이 생겼지만,
인간 관계 좋은 그는 이런 속마음을 숨기고도 사람을 대할 줄 알았다.


 “아, 다영이를 가르치기로 했다는 선생님이군요!”
호탕하게 보이려고 억지로 웃으며 다가오는 상조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 줄 몰라
민수는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어깨에 들려 있던 책 보따리를 거실에 던지고는 악수를 받았다.


그때, 다영이가 추리닝 차림으로 방에서 나왔다. 남색 바지에 하얀 면 티를 입었다.
이마에 하얀 띠를 맸는데 하얀 이마가 띠와 잘 어울렸다.
 “선생님 짐 옮기시는데 좀 도와드려라.”
주희가 옷짐을 들고 나무 계단을 올라오며 말했다.
 “나, 운동 나갈래. 정태랑 같이 뛰기로 했어.”


면티가 땀에 젖어 민수의 등짝에 짝 달라붙었는데, 불퉁거리는 몸이 곧이곧대로 드러났다.
짐짓 민수를 무시하는 체 했지만, ‘한 집에서 살 사람’ 이라는 정도는 의식하고 있었다.
 ‘데리고 운동은 같이 할 수 되겠군.’
엄마가 짐을 나르니 다영이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웬 손수레에요 ?"  
다영이는 낡은 리어카가 신기해 민수에게 물었다.
 "태워줄까 ?"  
민수는 다영이랑 어떻게든 가까워져야 했으므로 이런 제안을 했다.
 “정말이요?”
짐을 다 나르고 나서 주희의 걱정을 뒤로 하고 그들은 리어카를 끌고 정원을 나갔다.
집 밖에서 바로 울타리가 쳐진 울울한 숲이 시작되었다. 예전에 죽은 왕의 무덤이었다.


민수는 앞에서 노예처럼 끌고, 다영이는 수레가 흔들리는 것을 즐기며
 “달려! 달려!” 하고 소리쳤다.
이 광경을 내려다 보고 있던 주희는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그들이 너무 허물없어지면 다영이가 긴장하며 배우기 힘들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이었다.
주희는 선생과 제자 사이에는 존경과 훈계가 바탕이 되어야 학습 효과가 높다고 믿고 있었다.


 "다영아 !"  
앞쪽에서 한 남자가 소리쳤다.
다영이는 길가에서 손을 흔들며 서 있는 정태에게 쏙 다가가더니 민수는 이내 잊어버렸다.
정태는 요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고등학생 이었는데 얼굴은 얍사름하고 삐쭉거리는
머리모양에 키는 후리후리했다.
민수는 유행과는 담을 쌓고 살았기 때문에 그런 남자를 보면 ‘여자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팔짱을 끼더니 서로 몸이 간지러운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민수가 얼핏 그들의 대화를 들으니 ‘왠 손수레? 전원일기?’ 하며 뭐라고 하다가 뛰면서,
 ‘과외 선생님... 집에 살기로... 촌스러워...’ 하고 웃으며 멀어졌다.


민수는 집에 돌아와 거실 안에 있는 런닝 머신 위에 올라가 보았다.
 ‘그냥 밖에서 뛰면 되지. 집안에다 이런 요상한 것을 설치해 놓고.
 하여튼 돈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쓰게 된단 말이야.’
민수는 시간 정해서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산에 좀 올라다니거나, 군대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축구를 해본 적은 있었다.
그런데 상조도 그렇고, 다영이도 그렇고,
 이쪽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운동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몸에 관심을 많이 쏟는다고 해야할까.
돈많고 시간많아지면 자연스레 자기 몸 가꾸기에 투자를 많이 하는 것 같았다.


 ‘다영이나, 엄마나 다 생글생글하고 예쁘고 귀티가 나는 이유가 있었군’
민수는 어서 이런 상류층 분위기에 적응하고, 어서 고시에 합격해 이런 가정을
한번 일궈보리라 하는 야망이 더 구체적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짐을 다 정리해가는데, 주희가 차를 들고 올라왔다.
 “쉬었다 해요.” 
 “아, 고맙습니다. 무슨 차예요? 향기가 좋은데.”
민수는 붉은 색을 띠고 떨떠름한 냄새가 나는 차를 받으며 의례적으로 물었다.


 “블랙티예요. 홍차라고... 지난 번 영국가서 사왔어요.”
그는 홍차하면 근대 역사에도 잘 나와있듯이 중국이 생각나는데 주희의 말을 듣고 있으니
마치 홍차의 원산지가 영국같았다. 영국놈들이 중국에 아편팔아먹고 홍차를 사갔구나,
그리고 블랙티라고 그럴싸한 이름을 붙였구구나, 하는 비틀어진 생각이 일었다.


 “처음에는 좀 썼는데 십년 가까이 먹다보니 끊을 수가 없어요.
 영국의 우중충한 날씨가 생각날 때면 이 차를 마셔요.”
민수는 꿈에 젖어 이국의 풍경을 상기하는 주희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홍차 하나 가지고 자기는 아편이나 떫은 맛을 떠올리는데,
먼 먼나라와 어떤 추억을 떠올리는 그녀가 마치 철모르고 순수한 소녀 같았다.


 “영국에 가보셨어요?”
 “가봤죠.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카이로... 제가 항공사에서 일할 때요.”
주희네 아버지는 지방의 큰 항구도시에서 백화점을 열고 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진열대 앞에서 유니폼을 입고 서 있는 여직원 언니들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나도 크면 저렇게 될래 하고 말하면 아버지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특히 보석과 가구 등 수입품목 진열대에 있는 언니는 영어와 일본어를 잘해 더 멋있어 보였다.
주희는 항구 도시에서 들어왔다가 어디론가로 떠나는 배와,
아버지와 가까운 외국인들을 보면서 먼 이국을 동경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타협을 본 게 항공사 스튜디어스였다.


아버지는 디자인같은 것을 전공해서 외국으로 유학보내고 싶어했지만,
그당시 스튜디어스가 지금보다 훨씬 더 선망되던 직종이라 주희의 고집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스튜디어스 하다가 외국에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사업가와 눈이 맞으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라며 눈감아 주었다.


 “책이 다 두껍네요. 무슨 공부를 하세요?”
주희는 박집사에게 대충 민수에 대한 얘기를 들었지만 모른 채하고 다시 물었다.
그녀는 민수가 길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사근사근하고, 상처를 받은 듯이 조용한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거만한 목소리는 질색이었다.


 “외무고시를 공부합니다. 외교관이 되어서 탄자니아나 라이베리아 같은 데 가서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게요. 그게 제 꿈이예요.”


아프리카! 주희에게는 낯설지만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그 광활한 초원은 잘 알고 있다.
민수의 그런 순수한 열정을 듣고 ‘참 젊구나. 젊은이는 이래야 돼’하고 생각했다.
민수의 포부를 듣고 눈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민수는 다영이와 이층을 쓰기로 했다.
주희와 상조는 다영이의 방을 아래층으로 옮기려했으나 어리숙한 민수를 보고,
또 다영이의 반대가 심하기도 해서 그냥 그대로 두기로 했다.
주희는 잠시나마 민수를 의심했던 것을 후회했다.


 ‘젊은 남녀’라고 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고,
다영이가 그에게 남자로서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안심하였다.
상조도 민수와 술을 마셔본 결과 그가 속에 뭘 숨기고 있는 줄은 잘 모르지만
예의와 신념이 있고, 고시준비를 한다니..사회에 잘 적응해서 살려는
규격화된 인물임을 알고 ‘자신을 해롭게 하는 엉뚱한 짓은 하지 않을 사내’라고 그를 평가했다.


무엇보다도 여자를 사귀어본 적도, 그럴 마음도 없는 쑥맥인 것 같았고
나아가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내같아 어느 정도 맘에 들었다.
고시에 합격하면  ‘사윗감...’ 하는 김칫국도 마셔보았다. 하지만 이는 나중 일이었다.


.................7 부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성원 해주시는 회원님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가칭) 아내와 나의 머나먼 여정....아마 늦어도 5월초 쯤에는 선을 뵐 것같습니다.
 줄거리는 대충 잡혔구요, 요즘 올리는 글, 주희와 민수 이야기보다는 한 단계 높은
 수위로 상당히 적나라한 행위들이 펼쳐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as82wxy 배상 
 


  추신!!
 argveron11님, jinprize님, blue kans님, hi1004 님, 바람이려오 님, 돌치리, 배두힙합,
 kijang99, igi111.....이외에도 제 글을 사랑해주시는 다 수의 횐님들 두루두루 행복하십시요.!!


 




추천87 비추천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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