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추억2부1권-18 5호실의 남녀
18 5호실의 남녀
그날 밤이었다.
책상을 마주하고 책을 읽고 있으려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대답을 하고 일어나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여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스물 서넛쯤 될까? 노란 원피스 차림의 둥근 얼굴에 눈이 매우 큰 여자였다.
“저는 5호실에 있는 고노 히루까라고 해요.”
“아, 그렇습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마사오는 급한대로 인사를 했다. 5호실 쪽을 바라보니 문에는 열쇠가 걸려 있었다.
“댁은 이곳 거주자 기입용 서류를 받으셨겠지요?”
“아, 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사오는 방으로 들어가 서류가 든 봉투를 가지고 다시 나왔다.
“자,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이것을 받으러 왔어요.”
“이거 일부러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혹시 미야모또 씨에게서 나에 대한 얘기 못들으셨나요?”
“아니 전혀 못들었습니다. 이 아파트에 관한 아무런 예비 지식도 없습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댁은 미야모또 씨보다 미남이군요.”
“감사합니다.”
“나는 사실 5호실에서 남자와 동거하고 있어요.”
“아, 예.”
“남자의 이름은 사또 가닌이라고 해요.”
“아부 전해 주십시오.”
“지금, 시간 있어요?”
“있습니다.”
“그럼 우리방으로 건너 오셔서 재판관 노릇 좀 해주세요. 사실은 이 서류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재판을 좀 해주십사 하고 온 거예요.”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저희 두 사람이 서로 으르렁거기 때문이에요. 저희 둘 중에서 어느 쪽이 옳은지 당신이 우리 이야기를 좀더 들어 주세요.”
“다른 방 사람에게 부탁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어쨌든 오늘 이사 온 신출내기이니까요.”
“하지만 일류대학의 학생이잖아요? 다른 방에는 모두 변변찮은 인물들뿐이에요. 그러니 와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일단 가기는 하겠습니다.”
마사오는 하루까에게 이끌려 5호실로 들어갔다. 5호실은 마사오의 방과 맞은편으로 비스듬한 위치에 있었다.
방의 크기는 마사오의 방과 같고 방 가운데에 작은 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 앞에서 윗도리를 벗어제낀 잠방이 차림의 사내가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아아, 모셔 왔나?”
하루까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가닌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거친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나이는 하루까와 비슷한 것 같았다.
그래도 마사오를 보자 셔츠를 걸쳐 입고 정좌하여 마사오와 인사를 나누기는 했다.
사내가 겁을 마사오 앞으로 내밀었다.
“마시겠소?”
“아닙니다. 오늘밤은 마시면 안 됩니다. 밀린 리포트를 써야 하거든요.”
“그것 다행이오. 사실 내가 마실 분량밖에 안 되던 터니까.”
술상을 경계로 마사오와 사또는 마주 보는 꼴이 되고, 하루까는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당신, 이의 없지요? 나나 당신이나 이 사람과는 첫 대면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부당하게 한쪽 편만 들지는 않을 테니 이 사람의 판결을 따르도록 해요.”
“좋다구.”
사또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따르지. 당신도 따라야 한다구.”
“나도 물론이에요.”
하루까가 시선을 마사오에게 옮겼다.
“설명하지요. 이 사람 어제 아침에 나가서 오늘 다섯 시가 넘어서야 들어온 거예요.”사또가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당신은 잠자코 있어요.”하루까가 사내를 쏘아붙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글세, 알고 보니 내 친구 방에서 잤던 거예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 친구 방에서.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구요.”
“...............”
“그것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쭈욱 그 방에 있었다구요. 내가 걱정하고 있는데 연락도 하지 않고.”
알콜 탓인지 사또의 얼굴은 거무스름하게 기름살이 올라 사각진 얼굴이 울퉁불퉁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너무 하신 것 같군요.”
마사오는 처음으로 소감을 한마디 하며, 이런 류의 싸움에는 제3자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연락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잘못했어. 그건 사과한다구. 하지만 난 말이야, 이도꼬를 품긴 품었지만 그 여자에게 정을 통할 기분은 안 들었다구. 게다가 사정도 하지 않았어. 정말이야. 단지 이도꼬에게 서비스하러 갔던 것뿐이야. 나는 하지 않았다구. 당신도 못믿겠소?”
“그걸 알게 뭐야!”
입이 뾰로통해진 하루까가 사또를 노려보며 계속 말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돌리지 말아요. 저어, 마사오씨. 자신의 남자가 친구와 관계하는 걸 허락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사람의 논리대로라면 여자일 경우에도 누구와 자든 괜찮은 게 된다구요. 하지만 같이 있었던 것 자체가 이미 문제가 돼요. 그렇지 않아요? 이 사람이 나쁘죠?”
마사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것으로 판결이 났어요. 바깥분이 잘못하셨습니다. 사과하셔야겠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안 돼요!”
하루까가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사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이 남자가 여길 나가 줘야 한다구요. 나가 줘야 할 이유는 충분히 되겠지요? 내가 듣고 싶은 것은 그것이에요.”
“글세, 그 점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쪽이 부정을 일방적으로 저질렀을 경우 다른 쪽이 결별할 수 있는 권리는 있겠지요.”
“그렇죠? 그리고 이 방은 원래 내가 빌려서 살았고, 이 남자는 나중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방세도 내가 지불하니까...........”
“부인, 정말 결별하시고 싶십니까?”
“그래요. 이젠 꼴도 보기 싫어요. 그리고 난 부인이 아니에요!”
“이봐요, 학생. 내 말도 들어 보라구 나는 원래 숙부님 댁에 살았는데, 이 여자가 이리로 와서 함께 살자고 해서 온 거요. 이제 숙부님 댁의 내가 쓰던 방은 다른 사람이 세들어 산다구. 나는 돌아갈 수가 없단 말이오. 그리고 내 주소도 이 쇼와 장 5호실로 되어 있소. 인간에게는 거주권이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소. 나와 이여자가 헤어지는 건 좋다구. 하지만 나도 여기서 살 권리가 있어!”
“이도꼬 씨한테 가면 되잖아요?”
“그게 그렇지가 않소. 저쪽이나 이쪽이나 그냥 하룻밤 논 것 뿐이오. 그러니까 내가 여기 돌아와 사정하는 게 아닌가?”
“이제 당신 같은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기분 바빠요.”
그리고 나서 하루까는 마사오를 보며 말했다.
“내가 질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정말로 이 사람이 여길 나가 주길 바라는 거라구요. 이제 타인이 된 이상 이 사람이 여기서 살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에요.”
어쩐지 단순한 질투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게 여겨졌다.
‘나를 부른 것은 이 남자가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제서야 마사오는 하루까의 의도를 살폈다.
마사오는 하루까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이 사람이 바람 피우기 이전부터 헤어지고 싶었던 것입니까?”
“그래요.”
하루까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참아 왔어요. 그런데도 제멋대로 내 친구와 놀아나다니. 이젠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럴까요? 사실은 화가 나서 하시는 말씀이겠지요?”
“농담이 아니에요. 이런 남자는 기꺼이 이도꼬에게 줘버리고 말겠어요.”
“하지만 동거할 때는 좋아서 했을 테지요?”
“내가 속은 거죠.”
“난 속인 적 없어! 혹시 남자가 생긴 것 아냐? 그래서 내가 거추장스러진 거지?”
사또가 울부짖었다.
“우스운 소리 말아요!”
하루까가 다시 말했다.
“난 당신과 틀려요. 그런 일은 없으니 걱정 말아요. 남자라면 이젠 지긋지긋해요. 좋은 공부를 한 셈이니 위자료는 받지 않겠어요. 내일 나가 주세요.”
“이봐, 하루까. 정말이지 이제 다시는 이도꼬에게 가지 않겠어. 그 여자는 징징거리기만 할 줄 알아. 당신이 훨씬 낫다구. 비교도 안 돼.”
하루까가 한숨을 지었다.
“이 남자 아까부터 이러고만 있어요. 전혀 뭘 모르고 있다구요.”
이번에는 사또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경멸하는 빛이 섞여 있었다.
하루까가 정말로 사또를 내쫓을 작정인 건지. 아니면 화가 나서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것뿐인지 두 사람의 내력을 모르는 마사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하루까가 이제는 사또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이 남자, 일정한 작업도 없는 기생충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자를 품었지만 정을 통할 기분이 못되어 사정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마사오로서는 동감할 수 있는 점이 있었다. 재미있는 발상이었다.
‘이리하여 이사하는 날부터 이상한 싸움을 견학하게 되는군.’
사또가 말했다.
“뭣하면 이제부터 이도꼬가 있는 곳으로 같이 가보자구. 내 말이 사실이었다고 그 여자도 말할 텐니까.”
“그런 건 상관없어요. 그리고 저어, 당신.........”
하루까가 심각한 표정으로 마사오를 보았다.
“이사람은 말이에요. 여자의 마음을 조금도 모른다구요. 그걸 하는 횟수만 많으면 여자가 만족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또가 어깨를 움찔했다.
“결국은 그런 게 아닐까? 이봐요, 학생. 저 여자가 지금은 저렇게 부처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세 끼 밥보다도 남자를 더 좋아하는 여자요. 하루라도 남자 없이는 못살아가는 여자니까. 학생은 아직 저런 여자에게 걸려 본 적이 없겠지? 이런 여자에게 걸려들면 끝장이라구.덕분에 나는 공장에서 쫓겨나고, 친척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정말이지 헤어지고 싶은 쪽은 나요.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곳을 나가게 되면 갈 데가 없다구. 좋아, 하루까.”
사또가 가슴을 내밀며 계속 말했다.
“지금 여기서 당신이 직접 확인하면 되지 않아? 이도꼬에게 내것을 쏟아 넣고 왔다면 지금 은 조금밖에 나오지 않을 테니까.”
“또 그런 소릴 하고 있어!”
하루까가 입을 삐죽거렸다.
“무엇보다도 난 당신을 부양하겠다고 약속한 기억이 없어요. 그런데 뭐죠? 그런 뻔뻔스런 말을 하다니 색남인 주제에.”
“뭐라구!”
사또는 눈을 부라렸다.
“야! 남자를 뭘로 아는 거야! 죽여 버리겠어!”
사또는 주먹을 흔들어 대며 돌진하려고 했다. 당황한 마사오가 양팔을 벌리고 사또를 껴안았다.
“자아, 자아, 진정하세요. 화가 나면 무슨 소릴 못하겠어요. 자아, 이제 앉으세요.”
힘을 주어 사또에게 어깨를 아래로 눌렀다. 사또는 다시 일어나려고 기를 썼으나 마사오의 완력에 놀랐는지 결국은 그 자리에 앉았다.
마사오는 사또에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신참인데 주제넘은 짓을 해서 죄송합니다.”
사또는 자신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당신, 단순한 학생만은 아니군.”
“그렇지 않습니다. 전 다만 학생일 뿐입니다.”
“당신, 혹시 이전부터 이 여자를 알고 있었던 것 아니오? 아무래도 수상한데.”
“당치 않습니다.”
“이 여자는 오늘밤이라도 당장 내가 나가길 바래. 당신 방에 좀 머물게 해주면 안 되겠소?”
“그건 곤란합니다.”
“그럼 내 편이라도 되어 줘야겠소.”
“이도꼬 씨 있는 곳으로는 갈 수 없겠습니까? 저쪽도 친구의 소중한 남자를 훔쳤으니까 책임은 있습니다. 좋게 생각하고 있을 테니 2,3일은 머물게 해주겠지요.”
“그래요. 이도꼬에게로 가서 내가 내쫓았다고 해요. 그런 짓을 한 여자라면 책임질 각오쯤은 되어 있을 것 아녜요.”
“아니, 기뻐서 환영해 줄 지도 모릅니다.”
“나는.............”
사또는 갑자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숙부댁에 있을 때는 착실한 직공이었소. 나쁜 점도 많았지만 말이오. 그렇지만 일 하나는 잘해 냈어요. 솜씨도 있었고. 그래서 숙부의 주선으로 얌전한 아가씨와 결혼할 예정이었는데, 이 여자가 그 아가씨를 만나 나와의 일을 죄다 털어 놓고 훼방을 놓았소.”
“흐흠.”
하루까는 어깨를 움찔했다.
“아가씨는 무슨 아가씨예요? 네 칸짜리 연립주택의 딸인 주제에.”
“그렇지만!”
사또는 다시금 소리를 크게 질렀다.
“너처럼 남자나 꼬득여서 장사하는 닳고 닳은 여자와는 달라. 그 여자는 건실한 처녀야. 너 같은 여자는 좀 책임감을 느낄 줄 알아야해.”
“그게 남자가 할 말이에요? 치사하게!”
하루까도 앙칼지게 대들었다.
마사오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쓸데없는 참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부디 서로 화해해 주십시오. 나는 내일 아침까지 꼭 해야 될 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잠깐 기다려요!”
하루까가 나가려는 마사오를 붙들며 일어섰다.
“오늘밤은 이 사람이 나가지 않는다니 나는 딴 곳에 자러 가겠어요. 이제 결코 이 남자와 같이 자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나 혼자 있으면 무서우니 그때까지만 여기 있어 줘요.”
‘어쩌면 이 남녀는 이렇게 늘상 으르렁거리면서도 결국은 미운 정으로 화해하고 지내는 건진도 모른다. 내가 있다면 계속 으르렁거리기만 하겠지.’
마사오는 그렇게 판단했다.
“아니, 저는 가봐야겠습니다. 뭣 하시면 관리인을 부르십시오.”
“공부하는 중인 것 같은데, 안됐수다.”
사또는 앉은 채로 그렇게 말하며 마사오가 나가는 것에 동의를 나타냈다. 마사오는 방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번의 방문객은 이웃방의 학생이었다. 문에는 요시무라라는 명찰이 걸려 있고, 오늘 낯에 마사오가 인사하러 갔을 때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뒹굴며 라디오에서 나오는 만담을 듣고 있었다. 작은 체구로 눈동자는 움푹 패인 듯했다. 그때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같은 또래이고 해서 터놓고 지내기로 했었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어?”
“어서 와.”
방석을 권하자 그 위에 책상다리로 앉은 요시무라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고노 하루까의 방에 있었지?”
“그래.”
“그 여자는 술집에 나가는 여자야. 사또라는 남자는 경륜(역주: 자전거 경기로 하는 공인 도박)에 미쳐 있는 건달인데, 교제를 안 하는 것이 좋을 거야. 늘상 헤어지니 어쩌니 하며 시끌럽지.”“그래?”
“언제나 그렇다구. 그 사또라는 남자, 건달인 주제에 질투심이 대단하지. 그래서 언제나 시끄러워.”
“아니, 오늘밤은 그 반대던데. 그런데 언제나 남자가 질투를 했어?”
“그 반대라? 그 반대라면 어떤 의미지?”
남자가 바람을 피웠으니까 말해도 상관없으리라고 생각한 마사오는 소동이 일어난 원인을 설명했다.
“놀랍군. 그리고 그 여자가 화를 냈다구? 그것 참 재미있군. 이윽고 뭔가가 시작되겠군.”
“시작이라니?”
“낮에 네가 행한 것과 같은 일 말이야.”
요시무라가 말을 마치고 히죽히죽 웃었다. 옆방이니까 소리가 들렸던 모양이다. 그래도 마사오는 기가 죽지 않고 요시무라를 바라보았다.
요시무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나 그런 건 아니지만 여자가 귀가가 늦어지면 그 남자는 밖으로 나가 몸을 숨기고 기다리기까지 해. 대단한 질투심이지.”
“그렇군.”
“내가 아는 한은 여자가 일찍 귀가한 적이 딱 한 번 있었지. 그때는 굉장했어. 사또는 여자를 완전 나체로 벗겨 놓고 나를 억지로 깨워 그 방으로 데리고 갔어.”
“흐음.”
“날더러 ‘하루까를 껴안아!’라고 말하는 거야. 여자는 알몸으로 이불 속에 들어가 았으니 나도 알몸이 되어 들어가라는 것이었지.”
“그래서?”
“물론, 그럴 수야 없었지. 도망치듯 내 방으로 돌아와 버렸지만 그 여자 정말 살갗이 뽀얗더군.”
“그럼, 여자 또한 몇 번이나 바람을 피운 적이 있겠군.”
“모르지. 말로는 키스는 도리가 없고, 유방에 손을 대는 것까지는 허용하지만 영업상 금하는 것은 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고 하더군. 그 이상의 짓거리는 하지 않는데도 날이 밝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가게 일로 매니저나 마스터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라는 거야. 언제나 그렇게 주장하고 있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여자는 철저하게 잡아떼는 걸 배웠거든. 그 점에 있어서는 남자보다 여자가 한결 고단수야.”
“음.”
“너, 라디오를 갖고 있어?”
“가지고 있어.”
“여자와 즐길 때는 라디오를 켜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여자들 가운데는 라디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지만.”
“좋은 걸 하나 배웠군.”
“여긴 갖가지 사람이 사니까 잘 관찰해 보면 재미있어. 아파트란 사회를 압축한 것 같으니까.”
“그런 일면이 있겠지.”
“하루까가 널 유혹할지는 모르지만, 아래층 2호실의 히노시다베 도끼에 부인에게는 특별히 주의 해야 될 거야. 나의 추리로는 네 친구인 미야모또도 한번은 그 여자에게 먹혔을 거야.”
“그럼 넌?”
“나도 딱 한 번. 이 한 번만이라는 사실이 결코 방심할 수 없는 것이지. 꼬리를 밟혀 그 남편에게 들키면 피가 튀길 테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학교에게 미야모또에게 물어 봐.”
이윽고 요시무라가 가고 나자 주위는 조용해졌다. 마사오는 책상 앞에 앉았다.
다음날 아침.
등교하기 위해 5호실 앞을 지나자 갑자기 문이 열리고 잠옷 바람인 하루까가 나타났다.
“잠깐.”
인사는 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팔을 끌고 갔다.
이불이 깔려 있고 사또는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어찌 된 겁니까?”
“이도꼬에게로 갔어요. 잘 쫓아 보냈죠. 이 모든 게 당신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아니, 난 아무것도...........”
“그래도 지금끼지는 다루기가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먹혀 들더군요. 미안해요. 그 작자가 나갔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점심 시간에 마사오는 미야모또와 정문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가 이웃방의 요시무라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아, 히노시다베 도끼에 말이군. 호색적인 여자지?”
“아니, 그 남편과는 인사했지만 부인은 만난 적이 없어. 주인은 점잖은 분이던데.”
“그래, 그 사람은 점잖지. 치공기사라구. 의치 만드는 사람 말야.”
“그런데 넌 그 부인과 어떤 사이지?”
“요시무라의 말 그대로야. 나도 한 번만 상대를 해주더군. 하여튼 그런 일이 있은 뒤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틈을 주지 않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얼굴의 색기도 지워 버리지. 알 수 없는 여자야. 내게도 반드시 유혹해 올 거야.”
“남편은 모르고 있니?”
“아마 모를 거야. 그리고 한번 한 걸 가지고 우쭐거리다간 큰일 나. 그러다가 혼줄이 난 남자도 있다고. 아무튼 그여자, 그 아파트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야.”
“사또와 그 내연의 처인 하루까는 어때?”
어젯밤에 일어났던 그 커풀의 트러블을 이야기했다.
“아, 그 두 사람 말이야? 그건 이제 어쩔 것도 없어. 하루까는 깔끔한 성격의 좋은 여자이지. 사또는 그렇지가 않아. 나도 이제까지 섹스에 관해 우쭐거리는 남자를 상당히 만났지만 그자는 도가 지나쳐.”
“그런데 어째서 질투를 하는 거지?”
“그건 질투가 아냐. 상대편 남자를 협박하기 위해서지. 미인계를 쓰지 않는 것은 하루까가 나쁜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야. 그래서 언제나 싸움을 하는 거라구.”
이것은 요시무라의 말과는 상당히 달랐다.
“나는 여태껏 일반 가정에서 하숙 생활을 해왔지만 세상은 정말 가지가지군.”
“그러나 자유롭게 된 건 좋지 않아? 저마다 마음대로 살아가는 거지. 누구도 너에게 간섭은 하지 않잖아?”
“그렇긴 하지만..........”
“아직도 갖가지 재미있는 자들이 많아. 그러나 나는 아무 말 않겠어. 선입관을 갖지 말고 접해 보도록 해.”
“그런데 너와 미망인과의 사이는 잘 진행되고 있어?”
“순조로운 편이야. 말할까?”
미야모또는 소리를 낮추었다.
“이제 나는 알게 됐지. 남자와 여자란 성생활만 잘 진행된다면 그 뒤는 문제될 게 없다는 걸 말야. 그런 점에서 그녀에 대해 내가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 집으로 들어간 거야.”
“그러니까 잘 진행되고 있다는 애기군?”
“그래, 장래의 일은 그다지 생각지 않고 있으니까.”
미야모또는 천연덕스러웠다.
“취해서 돌아갈 때도 했지. 취했기 때문에 여기는 좀처럼 발사하지 않았어. 자고 나면 아침이 되지. 그때 상대방이 구애를 해. 이봐, 여자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쫒 본능과 동시에 남자의 에센스를 내뿜게 마들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는 것 같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는 듯해.”
“무리도 아니지. 상대가 삼십대이기 때문에 한층 심할 테지만.”
그날 밤이었다.
책상을 마주하고 책을 읽고 있으려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대답을 하고 일어나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여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스물 서넛쯤 될까? 노란 원피스 차림의 둥근 얼굴에 눈이 매우 큰 여자였다.
“저는 5호실에 있는 고노 히루까라고 해요.”
“아, 그렇습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마사오는 급한대로 인사를 했다. 5호실 쪽을 바라보니 문에는 열쇠가 걸려 있었다.
“댁은 이곳 거주자 기입용 서류를 받으셨겠지요?”
“아, 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사오는 방으로 들어가 서류가 든 봉투를 가지고 다시 나왔다.
“자,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이것을 받으러 왔어요.”
“이거 일부러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혹시 미야모또 씨에게서 나에 대한 얘기 못들으셨나요?”
“아니 전혀 못들었습니다. 이 아파트에 관한 아무런 예비 지식도 없습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댁은 미야모또 씨보다 미남이군요.”
“감사합니다.”
“나는 사실 5호실에서 남자와 동거하고 있어요.”
“아, 예.”
“남자의 이름은 사또 가닌이라고 해요.”
“아부 전해 주십시오.”
“지금, 시간 있어요?”
“있습니다.”
“그럼 우리방으로 건너 오셔서 재판관 노릇 좀 해주세요. 사실은 이 서류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재판을 좀 해주십사 하고 온 거예요.”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저희 두 사람이 서로 으르렁거기 때문이에요. 저희 둘 중에서 어느 쪽이 옳은지 당신이 우리 이야기를 좀더 들어 주세요.”
“다른 방 사람에게 부탁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어쨌든 오늘 이사 온 신출내기이니까요.”
“하지만 일류대학의 학생이잖아요? 다른 방에는 모두 변변찮은 인물들뿐이에요. 그러니 와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일단 가기는 하겠습니다.”
마사오는 하루까에게 이끌려 5호실로 들어갔다. 5호실은 마사오의 방과 맞은편으로 비스듬한 위치에 있었다.
방의 크기는 마사오의 방과 같고 방 가운데에 작은 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 앞에서 윗도리를 벗어제낀 잠방이 차림의 사내가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아아, 모셔 왔나?”
하루까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가닌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거친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나이는 하루까와 비슷한 것 같았다.
그래도 마사오를 보자 셔츠를 걸쳐 입고 정좌하여 마사오와 인사를 나누기는 했다.
사내가 겁을 마사오 앞으로 내밀었다.
“마시겠소?”
“아닙니다. 오늘밤은 마시면 안 됩니다. 밀린 리포트를 써야 하거든요.”
“그것 다행이오. 사실 내가 마실 분량밖에 안 되던 터니까.”
술상을 경계로 마사오와 사또는 마주 보는 꼴이 되고, 하루까는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당신, 이의 없지요? 나나 당신이나 이 사람과는 첫 대면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부당하게 한쪽 편만 들지는 않을 테니 이 사람의 판결을 따르도록 해요.”
“좋다구.”
사또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따르지. 당신도 따라야 한다구.”
“나도 물론이에요.”
하루까가 시선을 마사오에게 옮겼다.
“설명하지요. 이 사람 어제 아침에 나가서 오늘 다섯 시가 넘어서야 들어온 거예요.”사또가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당신은 잠자코 있어요.”하루까가 사내를 쏘아붙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글세, 알고 보니 내 친구 방에서 잤던 거예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 친구 방에서.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구요.”
“...............”
“그것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쭈욱 그 방에 있었다구요. 내가 걱정하고 있는데 연락도 하지 않고.”
알콜 탓인지 사또의 얼굴은 거무스름하게 기름살이 올라 사각진 얼굴이 울퉁불퉁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너무 하신 것 같군요.”
마사오는 처음으로 소감을 한마디 하며, 이런 류의 싸움에는 제3자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연락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잘못했어. 그건 사과한다구. 하지만 난 말이야, 이도꼬를 품긴 품었지만 그 여자에게 정을 통할 기분은 안 들었다구. 게다가 사정도 하지 않았어. 정말이야. 단지 이도꼬에게 서비스하러 갔던 것뿐이야. 나는 하지 않았다구. 당신도 못믿겠소?”
“그걸 알게 뭐야!”
입이 뾰로통해진 하루까가 사또를 노려보며 계속 말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돌리지 말아요. 저어, 마사오씨. 자신의 남자가 친구와 관계하는 걸 허락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사람의 논리대로라면 여자일 경우에도 누구와 자든 괜찮은 게 된다구요. 하지만 같이 있었던 것 자체가 이미 문제가 돼요. 그렇지 않아요? 이 사람이 나쁘죠?”
마사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것으로 판결이 났어요. 바깥분이 잘못하셨습니다. 사과하셔야겠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안 돼요!”
하루까가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사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이 남자가 여길 나가 줘야 한다구요. 나가 줘야 할 이유는 충분히 되겠지요? 내가 듣고 싶은 것은 그것이에요.”
“글세, 그 점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쪽이 부정을 일방적으로 저질렀을 경우 다른 쪽이 결별할 수 있는 권리는 있겠지요.”
“그렇죠? 그리고 이 방은 원래 내가 빌려서 살았고, 이 남자는 나중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방세도 내가 지불하니까...........”
“부인, 정말 결별하시고 싶십니까?”
“그래요. 이젠 꼴도 보기 싫어요. 그리고 난 부인이 아니에요!”
“이봐요, 학생. 내 말도 들어 보라구 나는 원래 숙부님 댁에 살았는데, 이 여자가 이리로 와서 함께 살자고 해서 온 거요. 이제 숙부님 댁의 내가 쓰던 방은 다른 사람이 세들어 산다구. 나는 돌아갈 수가 없단 말이오. 그리고 내 주소도 이 쇼와 장 5호실로 되어 있소. 인간에게는 거주권이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소. 나와 이여자가 헤어지는 건 좋다구. 하지만 나도 여기서 살 권리가 있어!”
“이도꼬 씨한테 가면 되잖아요?”
“그게 그렇지가 않소. 저쪽이나 이쪽이나 그냥 하룻밤 논 것 뿐이오. 그러니까 내가 여기 돌아와 사정하는 게 아닌가?”
“이제 당신 같은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기분 바빠요.”
그리고 나서 하루까는 마사오를 보며 말했다.
“내가 질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정말로 이 사람이 여길 나가 주길 바라는 거라구요. 이제 타인이 된 이상 이 사람이 여기서 살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에요.”
어쩐지 단순한 질투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게 여겨졌다.
‘나를 부른 것은 이 남자가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제서야 마사오는 하루까의 의도를 살폈다.
마사오는 하루까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이 사람이 바람 피우기 이전부터 헤어지고 싶었던 것입니까?”
“그래요.”
하루까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참아 왔어요. 그런데도 제멋대로 내 친구와 놀아나다니. 이젠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럴까요? 사실은 화가 나서 하시는 말씀이겠지요?”
“농담이 아니에요. 이런 남자는 기꺼이 이도꼬에게 줘버리고 말겠어요.”
“하지만 동거할 때는 좋아서 했을 테지요?”
“내가 속은 거죠.”
“난 속인 적 없어! 혹시 남자가 생긴 것 아냐? 그래서 내가 거추장스러진 거지?”
사또가 울부짖었다.
“우스운 소리 말아요!”
하루까가 다시 말했다.
“난 당신과 틀려요. 그런 일은 없으니 걱정 말아요. 남자라면 이젠 지긋지긋해요. 좋은 공부를 한 셈이니 위자료는 받지 않겠어요. 내일 나가 주세요.”
“이봐, 하루까. 정말이지 이제 다시는 이도꼬에게 가지 않겠어. 그 여자는 징징거리기만 할 줄 알아. 당신이 훨씬 낫다구. 비교도 안 돼.”
하루까가 한숨을 지었다.
“이 남자 아까부터 이러고만 있어요. 전혀 뭘 모르고 있다구요.”
이번에는 사또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경멸하는 빛이 섞여 있었다.
하루까가 정말로 사또를 내쫓을 작정인 건지. 아니면 화가 나서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것뿐인지 두 사람의 내력을 모르는 마사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하루까가 이제는 사또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이 남자, 일정한 작업도 없는 기생충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자를 품었지만 정을 통할 기분이 못되어 사정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마사오로서는 동감할 수 있는 점이 있었다. 재미있는 발상이었다.
‘이리하여 이사하는 날부터 이상한 싸움을 견학하게 되는군.’
사또가 말했다.
“뭣하면 이제부터 이도꼬가 있는 곳으로 같이 가보자구. 내 말이 사실이었다고 그 여자도 말할 텐니까.”
“그런 건 상관없어요. 그리고 저어, 당신.........”
하루까가 심각한 표정으로 마사오를 보았다.
“이사람은 말이에요. 여자의 마음을 조금도 모른다구요. 그걸 하는 횟수만 많으면 여자가 만족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또가 어깨를 움찔했다.
“결국은 그런 게 아닐까? 이봐요, 학생. 저 여자가 지금은 저렇게 부처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세 끼 밥보다도 남자를 더 좋아하는 여자요. 하루라도 남자 없이는 못살아가는 여자니까. 학생은 아직 저런 여자에게 걸려 본 적이 없겠지? 이런 여자에게 걸려들면 끝장이라구.덕분에 나는 공장에서 쫓겨나고, 친척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정말이지 헤어지고 싶은 쪽은 나요.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곳을 나가게 되면 갈 데가 없다구. 좋아, 하루까.”
사또가 가슴을 내밀며 계속 말했다.
“지금 여기서 당신이 직접 확인하면 되지 않아? 이도꼬에게 내것을 쏟아 넣고 왔다면 지금 은 조금밖에 나오지 않을 테니까.”
“또 그런 소릴 하고 있어!”
하루까가 입을 삐죽거렸다.
“무엇보다도 난 당신을 부양하겠다고 약속한 기억이 없어요. 그런데 뭐죠? 그런 뻔뻔스런 말을 하다니 색남인 주제에.”
“뭐라구!”
사또는 눈을 부라렸다.
“야! 남자를 뭘로 아는 거야! 죽여 버리겠어!”
사또는 주먹을 흔들어 대며 돌진하려고 했다. 당황한 마사오가 양팔을 벌리고 사또를 껴안았다.
“자아, 자아, 진정하세요. 화가 나면 무슨 소릴 못하겠어요. 자아, 이제 앉으세요.”
힘을 주어 사또에게 어깨를 아래로 눌렀다. 사또는 다시 일어나려고 기를 썼으나 마사오의 완력에 놀랐는지 결국은 그 자리에 앉았다.
마사오는 사또에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신참인데 주제넘은 짓을 해서 죄송합니다.”
사또는 자신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당신, 단순한 학생만은 아니군.”
“그렇지 않습니다. 전 다만 학생일 뿐입니다.”
“당신, 혹시 이전부터 이 여자를 알고 있었던 것 아니오? 아무래도 수상한데.”
“당치 않습니다.”
“이 여자는 오늘밤이라도 당장 내가 나가길 바래. 당신 방에 좀 머물게 해주면 안 되겠소?”
“그건 곤란합니다.”
“그럼 내 편이라도 되어 줘야겠소.”
“이도꼬 씨 있는 곳으로는 갈 수 없겠습니까? 저쪽도 친구의 소중한 남자를 훔쳤으니까 책임은 있습니다. 좋게 생각하고 있을 테니 2,3일은 머물게 해주겠지요.”
“그래요. 이도꼬에게로 가서 내가 내쫓았다고 해요. 그런 짓을 한 여자라면 책임질 각오쯤은 되어 있을 것 아녜요.”
“아니, 기뻐서 환영해 줄 지도 모릅니다.”
“나는.............”
사또는 갑자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숙부댁에 있을 때는 착실한 직공이었소. 나쁜 점도 많았지만 말이오. 그렇지만 일 하나는 잘해 냈어요. 솜씨도 있었고. 그래서 숙부의 주선으로 얌전한 아가씨와 결혼할 예정이었는데, 이 여자가 그 아가씨를 만나 나와의 일을 죄다 털어 놓고 훼방을 놓았소.”
“흐흠.”
하루까는 어깨를 움찔했다.
“아가씨는 무슨 아가씨예요? 네 칸짜리 연립주택의 딸인 주제에.”
“그렇지만!”
사또는 다시금 소리를 크게 질렀다.
“너처럼 남자나 꼬득여서 장사하는 닳고 닳은 여자와는 달라. 그 여자는 건실한 처녀야. 너 같은 여자는 좀 책임감을 느낄 줄 알아야해.”
“그게 남자가 할 말이에요? 치사하게!”
하루까도 앙칼지게 대들었다.
마사오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쓸데없는 참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부디 서로 화해해 주십시오. 나는 내일 아침까지 꼭 해야 될 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잠깐 기다려요!”
하루까가 나가려는 마사오를 붙들며 일어섰다.
“오늘밤은 이 사람이 나가지 않는다니 나는 딴 곳에 자러 가겠어요. 이제 결코 이 남자와 같이 자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나 혼자 있으면 무서우니 그때까지만 여기 있어 줘요.”
‘어쩌면 이 남녀는 이렇게 늘상 으르렁거리면서도 결국은 미운 정으로 화해하고 지내는 건진도 모른다. 내가 있다면 계속 으르렁거리기만 하겠지.’
마사오는 그렇게 판단했다.
“아니, 저는 가봐야겠습니다. 뭣 하시면 관리인을 부르십시오.”
“공부하는 중인 것 같은데, 안됐수다.”
사또는 앉은 채로 그렇게 말하며 마사오가 나가는 것에 동의를 나타냈다. 마사오는 방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번의 방문객은 이웃방의 학생이었다. 문에는 요시무라라는 명찰이 걸려 있고, 오늘 낯에 마사오가 인사하러 갔을 때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뒹굴며 라디오에서 나오는 만담을 듣고 있었다. 작은 체구로 눈동자는 움푹 패인 듯했다. 그때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같은 또래이고 해서 터놓고 지내기로 했었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어?”
“어서 와.”
방석을 권하자 그 위에 책상다리로 앉은 요시무라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고노 하루까의 방에 있었지?”
“그래.”
“그 여자는 술집에 나가는 여자야. 사또라는 남자는 경륜(역주: 자전거 경기로 하는 공인 도박)에 미쳐 있는 건달인데, 교제를 안 하는 것이 좋을 거야. 늘상 헤어지니 어쩌니 하며 시끌럽지.”“그래?”
“언제나 그렇다구. 그 사또라는 남자, 건달인 주제에 질투심이 대단하지. 그래서 언제나 시끄러워.”
“아니, 오늘밤은 그 반대던데. 그런데 언제나 남자가 질투를 했어?”
“그 반대라? 그 반대라면 어떤 의미지?”
남자가 바람을 피웠으니까 말해도 상관없으리라고 생각한 마사오는 소동이 일어난 원인을 설명했다.
“놀랍군. 그리고 그 여자가 화를 냈다구? 그것 참 재미있군. 이윽고 뭔가가 시작되겠군.”
“시작이라니?”
“낮에 네가 행한 것과 같은 일 말이야.”
요시무라가 말을 마치고 히죽히죽 웃었다. 옆방이니까 소리가 들렸던 모양이다. 그래도 마사오는 기가 죽지 않고 요시무라를 바라보았다.
요시무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나 그런 건 아니지만 여자가 귀가가 늦어지면 그 남자는 밖으로 나가 몸을 숨기고 기다리기까지 해. 대단한 질투심이지.”
“그렇군.”
“내가 아는 한은 여자가 일찍 귀가한 적이 딱 한 번 있었지. 그때는 굉장했어. 사또는 여자를 완전 나체로 벗겨 놓고 나를 억지로 깨워 그 방으로 데리고 갔어.”
“흐음.”
“날더러 ‘하루까를 껴안아!’라고 말하는 거야. 여자는 알몸으로 이불 속에 들어가 았으니 나도 알몸이 되어 들어가라는 것이었지.”
“그래서?”
“물론, 그럴 수야 없었지. 도망치듯 내 방으로 돌아와 버렸지만 그 여자 정말 살갗이 뽀얗더군.”
“그럼, 여자 또한 몇 번이나 바람을 피운 적이 있겠군.”
“모르지. 말로는 키스는 도리가 없고, 유방에 손을 대는 것까지는 허용하지만 영업상 금하는 것은 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고 하더군. 그 이상의 짓거리는 하지 않는데도 날이 밝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가게 일로 매니저나 마스터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라는 거야. 언제나 그렇게 주장하고 있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여자는 철저하게 잡아떼는 걸 배웠거든. 그 점에 있어서는 남자보다 여자가 한결 고단수야.”
“음.”
“너, 라디오를 갖고 있어?”
“가지고 있어.”
“여자와 즐길 때는 라디오를 켜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여자들 가운데는 라디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지만.”
“좋은 걸 하나 배웠군.”
“여긴 갖가지 사람이 사니까 잘 관찰해 보면 재미있어. 아파트란 사회를 압축한 것 같으니까.”
“그런 일면이 있겠지.”
“하루까가 널 유혹할지는 모르지만, 아래층 2호실의 히노시다베 도끼에 부인에게는 특별히 주의 해야 될 거야. 나의 추리로는 네 친구인 미야모또도 한번은 그 여자에게 먹혔을 거야.”
“그럼 넌?”
“나도 딱 한 번. 이 한 번만이라는 사실이 결코 방심할 수 없는 것이지. 꼬리를 밟혀 그 남편에게 들키면 피가 튀길 테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학교에게 미야모또에게 물어 봐.”
이윽고 요시무라가 가고 나자 주위는 조용해졌다. 마사오는 책상 앞에 앉았다.
다음날 아침.
등교하기 위해 5호실 앞을 지나자 갑자기 문이 열리고 잠옷 바람인 하루까가 나타났다.
“잠깐.”
인사는 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팔을 끌고 갔다.
이불이 깔려 있고 사또는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어찌 된 겁니까?”
“이도꼬에게로 갔어요. 잘 쫓아 보냈죠. 이 모든 게 당신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아니, 난 아무것도...........”
“그래도 지금끼지는 다루기가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먹혀 들더군요. 미안해요. 그 작자가 나갔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점심 시간에 마사오는 미야모또와 정문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가 이웃방의 요시무라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아, 히노시다베 도끼에 말이군. 호색적인 여자지?”
“아니, 그 남편과는 인사했지만 부인은 만난 적이 없어. 주인은 점잖은 분이던데.”
“그래, 그 사람은 점잖지. 치공기사라구. 의치 만드는 사람 말야.”
“그런데 넌 그 부인과 어떤 사이지?”
“요시무라의 말 그대로야. 나도 한 번만 상대를 해주더군. 하여튼 그런 일이 있은 뒤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틈을 주지 않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얼굴의 색기도 지워 버리지. 알 수 없는 여자야. 내게도 반드시 유혹해 올 거야.”
“남편은 모르고 있니?”
“아마 모를 거야. 그리고 한번 한 걸 가지고 우쭐거리다간 큰일 나. 그러다가 혼줄이 난 남자도 있다고. 아무튼 그여자, 그 아파트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야.”
“사또와 그 내연의 처인 하루까는 어때?”
어젯밤에 일어났던 그 커풀의 트러블을 이야기했다.
“아, 그 두 사람 말이야? 그건 이제 어쩔 것도 없어. 하루까는 깔끔한 성격의 좋은 여자이지. 사또는 그렇지가 않아. 나도 이제까지 섹스에 관해 우쭐거리는 남자를 상당히 만났지만 그자는 도가 지나쳐.”
“그런데 어째서 질투를 하는 거지?”
“그건 질투가 아냐. 상대편 남자를 협박하기 위해서지. 미인계를 쓰지 않는 것은 하루까가 나쁜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야. 그래서 언제나 싸움을 하는 거라구.”
이것은 요시무라의 말과는 상당히 달랐다.
“나는 여태껏 일반 가정에서 하숙 생활을 해왔지만 세상은 정말 가지가지군.”
“그러나 자유롭게 된 건 좋지 않아? 저마다 마음대로 살아가는 거지. 누구도 너에게 간섭은 하지 않잖아?”
“그렇긴 하지만..........”
“아직도 갖가지 재미있는 자들이 많아. 그러나 나는 아무 말 않겠어. 선입관을 갖지 말고 접해 보도록 해.”
“그런데 너와 미망인과의 사이는 잘 진행되고 있어?”
“순조로운 편이야. 말할까?”
미야모또는 소리를 낮추었다.
“이제 나는 알게 됐지. 남자와 여자란 성생활만 잘 진행된다면 그 뒤는 문제될 게 없다는 걸 말야. 그런 점에서 그녀에 대해 내가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 집으로 들어간 거야.”
“그러니까 잘 진행되고 있다는 애기군?”
“그래, 장래의 일은 그다지 생각지 않고 있으니까.”
미야모또는 천연덕스러웠다.
“취해서 돌아갈 때도 했지. 취했기 때문에 여기는 좀처럼 발사하지 않았어. 자고 나면 아침이 되지. 그때 상대방이 구애를 해. 이봐, 여자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쫒 본능과 동시에 남자의 에센스를 내뿜게 마들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는 것 같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는 듯해.”
“무리도 아니지. 상대가 삼십대이기 때문에 한층 심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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