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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드림보트-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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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이(關西) 공항에서 오사카로 들어오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김포에서 오사카까지 날아온 시간과 엇비슷한 것 같았다.
공항 리무진 버스의 종점에서 내린 일권은 막막했다. 오사카의 최대 번화가인 난바(難波) 대로의 현란한 풍경에 압도되어 방향감각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자동차 진행방향이 서울과 거꾸로여서 더욱 당황했다.
한 블록 정도 천천히 걸으며 이국의 거리를 눈에 익힌 뒤, 그는 택시를 잡아탔다. 행선지를 묻는 택시기사한테 말없이 명함을 내밀자, 택시기사는 군소리 없이 차를 몰기 시작했다.
이십여 분을 달린 뒤 택시가 멎은 곳은 데라다쵸(寺田町) 거리. 허공에 전철 전선주가 즐비한 오래 된 거리였다.
일권은 택시기사가 손짓으로 가르쳐 준 빌딩 앞에서 명함에 씌어 있는 주소를 확인했다.

아오끼의 사무실은 306호였다.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문이 열리며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뭐라고 물었지만 그는 대꾸없이 아오끼의 명함을 내밀었다.
다행히 아오끼는 사무실 안쪽의 또 다른 방에 앉아 있었다.
일권이 한국에서 왔노라고 밝히자 아오끼는 벌떡 일어나며 환대했다. 화숙에게 그가 재일교포라는 말을 들었지만, 지독한 곱슬머리와 좁은 이마가 전형적인 일본인의 얼굴이었다.
담배를 권하고 커피를 내오는 등, 부산을 떨던 아오끼는 일권의 방문목적을 듣고 나서 저으기 실망하는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어떤 사람이 저를 소개해 주던가요? 번지를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
『동포시니까 우리 민족의 전통을 잘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찾는 여자의 모친께서 몹시 위독합니다. 불효 중에서 가장 큰 불효가 부모의 임종을 못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뜻은 없으니까 좀 도와 주십시오.』
『제가 안다면야 응당 도와 드려야죠. 하지만 전 모릅니다. 저는 사업관계로 한국을 드나드는 사람이지 접대부들 모집해 장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아오끼는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고 있었다. 그 말에 일권은 아오끼가 틀림없이 국제인신매매업자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아오끼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절박한 사정이 있다 해도 인신매매꾼이 자신의 거래를 낯모르는 사람에게 들춰보이지 않을 게 뻔했다.
일권은 난처한 표정으로 아오끼의 동정을 구하며 은근히 실내 구석구석을 살폈다. 전체 사무실의 1/3쯤을 따로 막은 사장실은 의외로 단출했다. 사장실이라고 해서 특별한 가구가 있다거나 치장을 한 게 아니고 오래 된 티크책상 하나와 책장, 가죽 소파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TV가 놓인 책장에는 책 대신 비디오테이프들이 가득하게 세로로 꽂혀 있었다. 얼핏 뽕2, 산딸기, 어우동, 무릎과 무릎 사이, 애마부인4 등등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 테이프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에로물이었다.
그렇다면 그 밑에 아무 글씨도 써 있지 않은 것들은 무엇일까? 한국에서 찍어온 포르노 테이프가 아닐까?
『멀리서 찾아오셨는데 도와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퇴근시간이라서 이만.』
아오끼가 일권의 눈길을 의식해서인지 서둘러 악수를 청했다. 그만 나가 달라는 뜻이었다.
건물을 나왔을 때, 밖은 황혼이었다. 일권은 또 택시를 잡아타고 코리아 타운으로 데려다 줄 것을 영어로 부탁했다.

거리의 가로등에 깜박깜박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일권은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거리를 거슬러 오르다가 눈에 띄는 한국 식당으로 들어가 비빔밥을 시켰다. 파마 머리에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아주머니가 그를 반겼다.
그는 밥을 먹으면서 이것 저것 자꾸 말을 걸어 그녀의 관심을 유도한 다음, 조심스럽게 일본에 오게 된 내력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했다. 아주머니는 자기 일인 양 안쓰러워하며 다가와 마주 앉았다.
『쯔쯔, 일본 천지에 깔린 게 한국 가시내들인데 무신 수로 찾노? 신문에서 본께로 한국에서 건너온 술집 접대부 숫자가 십만 명도 넘는다 카던데.』
『오사카에도 많겠죠?』
『하모, 도쿄보다 더 많을 기라. 난바 같은 곳에 가 보면 부딪히는 기 죄다 그런 가시나들이라 카던데. 갸들이 나라 망신 도맡아서 시킨다 아이가.』
그녀는 비빔밥을 내온 뒤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설렁탕 국물 한 도가니를 더 가져왔다.
『사골 곰국이라요.』
일권은 밥을 섞기 전에 두 손으로 도가니를 받쳐들고 후루루 국물을 마셨다. 뱃속 깊은 곳까지 짜르르한 열기가 미끄러져 내려갔다.

동선의 오피스텔에 가까이 갈수록 희수의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할말이 있다며 지금 즉시 와 달라는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마음은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나 그의 단호한 어투가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일까?
희수는 자력에 이끌리듯 마포로 오면서 그의 초청에 대해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니 될대로 되라는 식의 투지가 솟구쳤다. 어쩌면 오늘쯤 모든 걸 털어놓고 속 시원하게 비밀을 까발리는 것도 시기적절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동선의 방으로 걸어가던 희수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의 방문 앞에 한 여자가 서성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도 희수를 발견하고 당황했다.
희수는 그녀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애써 희수의 시선을 외면하더니 비켜 가려고 했다. 희수는 동선의 방문 앞에 선 상태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돌아보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여자가 홱 돌아보았다. 눈길이 마주치자, 그녀는 죄지은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지더니 주춤주춤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제가 저번에 전화 드렸던 심은영이에요. 잠깐 시간 좀 내 주시겠어요?』
희수는 말없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희수는 그녀를 만난 적도, 통화를 한 기억도 없었다. 이 여자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동선과 관련이 있어 보였으므로 얘기나 들어 보자는 호기심이 동했다.
건물 1층의 전통 찻집에 들어온 심은영은 의식적으로 후미진 자리를 택해 앉았다.
『절대 여기 올 생각은 없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제가 여기 온 이유는 사진을 돌려받기 위해서예요. 아저씨한테 전화 드리려다 말고 그냥 온 거예요. 차라리 사모님께 부탁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희수는 그 말을 듣고 단번에 그녀의 정체와 입장을 간파할 수 있었다.
헌데 사모님이라니? 그럼 동선에게 부인이 있단 말인가?
희수는 조금 더 그녀의 말을 유도해 보기로 했다.
『아가씨도 그 방에서 촬영한 적이 있었나요?』
『네, 손을 찍고 싶다고 하시길래…….』
『내가 알기로는 손만 찍은 게 아닌 모양이던데?』
『그 사진을 보셨나요?』
은영의 귓불이 다시 빨갛게 물들었다.
『그날 정말이지 제가 미쳤었나 봐요. 제가 그런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다는 게 지금도 이해가 안 돼요. 사모님께는 죽을 죄를 졌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발 그 사진들만 도로 돌려 주세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하느님께 맹세코 이 곳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두 번 다시 전화하는 일도 없을 거구요.』
은영은 말을 맺으면서 자꾸 눈을 깜박거렸다. 고이는 눈물을 삼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양볼엔 이미 두 줄기 물방울이 빠르게 궤적을 긋고 있었다.
희수는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의 때묻지 않은 순진성을 보니 와락 끌어안고 등이라도 토닥거려 주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저는 그 사람 부인이 아니에요. 하지만 은영 씨와 좀더 얘기를 하고 싶어요. 제가 은영 씨한테 조금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그때 저와 통화하신 분 아니세요? 아저씨와 함께 살고 계신다는…….』
『어떤 통화를 누구와 했는데요?』
『실례지만……누구시죠?』
은영이 잔뜩 경계하며 되물었다.
『놀라지 마세요. 내가 어떤 사람이든 은영 씨가 원하는 사진을 빨리 돌려받는 게 중요하지 않겠어요?』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은영 씨가 원한다면 돌려 줄 거예요. 그 사람도 악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잖아요. 편하게 직접 만나서 반환을 청해 보시지 왜?』
『그분을 뵐 수가 없었어요.』
그때 주문했던 설록차가 나왔다.
찻잔을 동그랗게 말아쥐고 입술을 축이던 은영이 격해진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선과 알게 된 내력부터 그날 밤의 정사, 임신의 충격, 중절의 선택과 그 동안의 갈등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자신이 선택한 일인지라 후회하진 않지만,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의 반응을 생각하면 지금도 모멸감을 느낀다고 했다. 물론 그와 통화한 게 아니고 그의 부인과 나눈 통화였지만.
동선의 부인을 자처했던 여자는 은영에게 왜 상의도 없이 뱃속의 아이를 지웠느냐며 호통을 쳤다고 했다.
희수는 그 대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동선에게 부인이 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었고, 또 그 여자가 정말 그의 부인이라면 왜 남편의 정부(情婦)에게 그런 이상한 말을 했는지.

희수는 찻값을 치르고 나온 뒤, 건물의 로비에서 은영의 손을 잡았다. 은영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걱정 마세요. 다 잘 될 거예요.』
『고마워요. 저는 그분한테 부담을 드릴 생각은 없어요. 다 제 탓이니까요. 근데 그 사진만큼은 꼭 돌려받았으면 해요.』
그녀는 간절하게 애원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이제 와서 사진을 찾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그녀의 집착은 간절했다. 잊겠다고 했지만, 아직도 그녀의 눈빛엔 그에 대한 미련 같은 게 남아 있었다.
은영을 배웅하고 돌아서는 길에 희수는 착잡했다. 그녀의 고백은 너무나 놀라운 거였다. 그 동안 만났던 여자들과는 양상이 달랐고 각도가 달랐다. 심은영은 육체적, 정신적 양면으로 분명한 피해를 입은 사랑의 피해자였다.
이동선이 뭐라고 변명하든 간에 그녀의 아픔을 보상할 수 없으리라.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상승했고 11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렸다. 그러나 희수는 동선의 방쪽을 한 번 쏘아보고는 다시 내려가는 단추를 눌렀다.
이런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날 다급히 불렀단 말인가?
스르르 문이 잠겼다. 반짝반짝 잘 닦인 엘리베이터 출입문에 희수의 모습이 반사되었다. 소태를 씹은 듯 씁쓸한 얼굴이었다.

수원 그린피아 호텔.
이동선과 오연화는 초로의 신사로부터 두툼한 봉투를 받고 난감한 표정이었다.
『딸애의 작업실을 정리하다 이걸 찾았지요. 제가 미리 알았다면 일찍 반환했을 텐데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는 하수지의 아버지였다.
딸의 장례식을 치르고 부쩍 늙어 버린 얼굴엔 아직도 수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 돈을 제가 받아도 되는 건지 난처하군요.』
동선은 봉투 속의 통장과 도장을 확인하고 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받으셔야죠. 수지가 계약을 못 지켰으니까요.』
그 돈은 동화조경연구소에서 극장 프로젝트 작업료 명목으로 조각가 하수지에게 지급한 거였다.
하수지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극장주는 즉각 연구소에 책임을 물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입 속에 든 사탕이라도 빼줄 것처럼 호의를 보이던 사람이 안면몰수하고 계약서를 흔들어 대는 거였다.
극장주의 변심 뒤에는 스폰서 최종명 사장의 죽음이 크게 작용했을지도 몰랐다.
그 문제에 관한 한 동선은 비빌 언덕이 없었다. 돈을 받아간 하수지와 프로젝트를 성사시켜 준 최종명이 동시에 떠나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노라며 극장주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오연화에게 대응책을 지시했다. 자금 걱정은 하지 말고, 하수지의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연화더러 직접 작업진행을 해보라고 말했다. 그래서 연화가 본격적으로 그 프로젝트에 뛰어들어 사무실의 인원도 보강했고 극장주의 양해도 구해 둔 터였다.
허공에 뜬 3억대의 작업료에 대해서는 미련도 없잖아 있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동선은 그 돈을 하수지의 부의금으로 생각했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그녀가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최종명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지도 않았을 거라는 자책 때문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애였는데, 어려서부터 고집이 무척 셌지요. 프랑스로 떠날 때도 애비 속을 태우더니 졸업을 했는데도 돌아오질 않더구만요. 더 배우고 싶다는 거였지요. 거기서 얼마나 더 배웠는지 몰라도 귀국하면 제 뜻대로 전공을 살려나갈 수 있을지 노심초사했었답니다. 그런데 사장님처럼 자상하신 분을 만나 운 좋게 큰 일을 맡았노라고 좋아하던 그 아이의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오죽하셨겠습니까. 수지 씨는 장래가 촉망되는 조각가였습니다. 이론과 창조정신을 겸비한 재원이었죠. 미술계 모든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수지의 노트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사장님을 뵙고자 했던 것은 돈을 반환하려는 뜻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그가 말을 하다 말고 연화를 힐끔 쳐다보았다. 연화는 그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 재빨리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두 분이서 말씀 나누시죠. 로비에 나가 있겠습니다.』
연화가 자리를 뜨자, 그는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노트를 보니까 사장님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오더군요.』
그 말을 던져 놓고 그는 물끄러미 동선의 반응을 살폈다. 동선은 노신사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제 딸애와 무척 가까우셨던 것 같더군요. 그 애 작업실에도 몇 번 오셨던 걸로 적혀 있었습니다.』
노신사의 얼굴에 얼핏 노기가 스쳤다.
『가까웠죠.』
동선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러자 노신사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훔쳤다.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면서 동선을 추궁하고 있었다.
『노트에 적혀 있었다면 선생님께서도 충분히 아셨으리라 생각되는데요.』
동선의 냉정한 대답에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죽은 아이의 과거를 놓고 들먹이는 애비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이 문제 하나만은 꼭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수지에게 그처럼 호의를 베푼 저의가 뭡니까?』
그는 저의라는 말에 힘을 실어 뱉었다. 혹시 불순한 생각을 품고 딸한테 접근한 게 아니냐는 추궁이었다.
동선은 그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경기도의 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수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평생을 교육계에 바친 사람의 윤리관이라면 보나마나 대팻날처럼 예리할 거였다.
동선의 등허리에 식은땀이 맺혔다. 가뜩이나 죄책감을 간직하고 있는 판에 그가 양파껍질 벗기듯 수지와의 관계를 캐물으니 마땅한 대응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수지 양의 실력을 믿었을 뿐입니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제 딸애의 실력을 안단 말입니까? 사장님의 프로젝트 규모가 억대를 상회하는 엄청난 일인데 그런 큰 일을 경험도 없는 아이한테 선뜻 맡겼다는 게 의문입니다.』
『경력만 보고 사람을 쓴다면 신인들은 영원히 데뷔할 기회가 없겠지요.』
『좋습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제 사위에 대해서 묻겠습니다.』
그가 말한 사위는 블루맥주의 최종명 사장을 지칭하는 거였다.
『딸애가 최 사장을 처음 만난 것이 지난 가을이었더군요. 청평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최 사장의 요트에 올라가 파티를 하면서 인연을 맺은 모양인데, 왜 당신은 딸애를 최 사장에게 소개했습니까?』
『최 사장이 수지 양한테 일감을 중개해 준 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거 보시오! 일감을 물어다 줬다고 해서 꼭 그렇게 난잡한 파티에 불러 딸애를 노리갯감으로 삼아야만 시원했단 말입니까? 당신들은 일을 미끼로 딸애를 유혹한 게 틀림없어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어르신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하수지 양에 대한 저의 마음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수지 양의 재능과 끼를 사랑했던 것뿐입니다.』
동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 하자 그가 다급하게 만류했다.
『기다려요,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내가 주책맞게 이런 말을 끄집어낸 걸 오해하지 말아 줬으면 고맙겠소. 이제 와서 딸애의 문제를 밝혀 본들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애비로서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딸애가 최후의 순간을 맞을 때 얼마나 기막힌 꼴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지요. 그게 세상에 밝혀질까 봐 사돈댁과 입을 맞춰 쉬쉬해 가며 영혼 결혼식까지 올린 겁니다. 죽은 아이들보다 살아남은 부모의 체면을 우선 생각했던 거지요. 그런데 딸애의 노트를 보니 더 기막힌 사실을 알게 됐던 겁니다. 걔는 정작 같이 죽은 최 사장은 염두에 없고 당신을 좋아했더군요.』
조금 전까지 노기등등했던 신사의 표정은 어느 새 불쌍하고 늙은 노인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온 겁니다. 제가 횡설수설했습니다만, 널리 양해 바랍니다. 딸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해 드렸으니 후련하군요. 걔의 마음을 받아 주시고 이제 제 딸애의 기억은 가슴 깊숙이 묻어 두시기만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노인이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다. 딸애의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내에게 비밀을 영원히 간직해 달라는 당부를 전하고 싶었던 거였다.

그린피아 호텔 뒤편의 보통리 저수지. 동선과 연화는 제방을 걷고 있었다.
『무슨 얘길 하던가요? 꽤나 심각해 보이던데.』
『별것 아냐.』
『혹시 수지 씨와의 관계를 추궁당한 거 아녜요?』
『…….』
동선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저수지 수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 추측이 맞군요. 유족들이 수지 씨의 유품을 정리하다 그런 흔적을 발견하고 계약금을 반환하는 자리에서 따져 본 거겠죠. 그거 보세요, 일이 안 될 때는 자꾸 마가 겹친다구요.』
『유족들도 최 사장과 하수지가 사고를 당하는 순간 어떤 상태로 있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야.』
『왜 모르겠어요! 블루맥주 그룹이 아무리 입막음 작전을 편다 해도 한계가 있죠. 벌써 세간에 유언비어로 떠돌아다니고 있는 거 모르세요? 막으면 막을수록 소문은 악성으로 번지게 마련이죠.』
연화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고현장인 강원도 일대에서 번지기 시작한 두 남녀의 해괴한 변사소문은 이미 서울까지 치고 올라와 입에서 입으로 떠돌고 있었다. 그 소문의 진상을 파헤친 주간지도 있었는데, 블루 맥주측에서 그 주에 발행된 전체 분량을 사들였다는 말도 떠돌아다녔다.
『그러니 부모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어. 죽은 것도 서러운데 그런 소문까지 나도니 말야. 다 내 탓이야.』
그가 제방에 걸터앉아 휘네스를 빼물었다. 허공에 부서지는 담배연기만큼이나 마음이 산란한 모양이었다.
『잊어버리세요. 그들의 사고와 우린 아무 관련이 없어요. 어떻게 보면 그들의 업보인지도 몰라요. 달리는 차 속에서 운전하는 사람의 성기를 애무할 정도의 여자라면 수지 씨도 보통 뜨거운 피를 가진 게 아니잖아요? 그게 천성이고 팔자에 씌워진 그녀의 운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거예요.』
『죽은 사람한테 그렇게 잔인한 말 하는 게 아냐.』
『마음에 없는 소리는 못 하는 제 성격 아시잖아요. 저는 사고나기 전부터 수지 씨가 늘 걱정됐어요. 그냥 예감이 그랬어요. 그 차에 최 사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만해!』
동선이 검지 손톱으로 담뱃불을 튕겨날리며 소리쳤다. 연화의 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동선 대신 최 사장이 희생당했다는 논리였다. 최 사장이 아니었다면 뜨거운 피를 가진 여류조각가의 마성에 동선이 무슨 해를 당해도 당했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연화는 더욱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어요. 저는 그 사고가 우리에게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해요. 수지 씨가 펼쳐 놓은 일을 연구소에서 직접 마무리하니까 사무실에 금세 활력이 돌잖아요. 또 은근히 자금압박을 받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던 거액을 되돌려받게 되고 말예요. 지금부터라도 정리할 건 정리하고 새로 출발해야 돼요. 우리한테는 아직 살아야 할 날들이 많으니까요.』
모노드라마의 배우처럼 연화는 허공에 호소했다. 그러나 동선은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수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노친네 마음을 충분히 알 것 같더라구. 세상이 무너져내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겠지.』
『사람을 잃어서 슬퍼하는 것은 미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보다 훨씬 덜 불행한 거라잖아요.』
『다 허무할 따름이지 뭐.』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동선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천천히 비벼 으깨고 있었다. 수면을 처연한 눈으로 바라보는 동선의 겨드랑이에 손을 밀어 넣으며 연화가 말했다.
『또 그 생각하고 있죠? 일어나요. 아무튼 물가에 오면 영락없이 병이 도지는군요.』
그녀의 채근에 그가 맥없이 일어섰다.
『이제부터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세요, 결재도 직접 하시고. 바쁘게 뛰는 게 보약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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