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보트-19
자판기 커피를 뽑아 양 손에 한 잔씩 들고 걸어오는 여자의 걸음걸이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우면서도 절제된 긴장미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스물여덟, 아홉쯤 됐을까?
희수는 인도어 골프장의 대기석에 앉아 이쪽으로 걸어오는 여자를 예의 주시했다. 체크무늬의 타이트한 스포츠웨어와 눈부시도록 하얀 골프화를 착용한 여자는 섹시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니트 소재로 된 골프복의 품은 원래 넉넉하지만, 그녀의 알찬 몸매가 은근하게 타이트한 자태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녀가 희수에게 다가와 커피를 건네며 목례했다.
『분위기가 어수선하죠?』
『좋은데요. 공기도 상쾌하고요.』
『죄송해요, 이런 곳으로 약속장소를 정해서. 차분하게 만났어야 하는데.』
가까이서 본 여자의 얼굴은 또 느낌이 새로웠다. 완벽하게 균형잡힌 이목구비와 화장기가 전혀 없는 건강한 살결에서 여자의 자신감이 물씬 풍겨났다. 아니 자신감의 차원을 넘어서 오만하고 도도한 인상이라고 해도 좋았다.
희수의 옆, 빈 자리에 앉은 그녀의 자세 역시 흐트러짐이 없었다. 과연 미스 코리아 출신다웠다.
『어떤 프로그램이라고 했죠?』
여자가 다시 희수의 방문목적을 확인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W-net 의 인터뷰 형식으로 면담을 청했기 때문이었다.
희수가 어렵게 전화를 했을 때, 여자는 별로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미스 코리아 출신이긴 해도 자신은 연예인이 아니므로 방송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거였다.
그런 이유로 여자는 희수에게 특별한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대신 정 만나기를 원한다면 자신이 운동을 하는 시간에 잠깐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희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사당동의 인도어 골프장까지 나와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었다.
『바쁘신데 번거롭게 찾아와서 죄송해요. 얼마 전 검찰에 불려간 적이 있었죠? 그 문제와 관련해서 유나영 씨의 견해를 몇 마디 듣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희수는 명함을 건네 주며 단도직입으로 질문을 던졌다. 빈틈을 내 주지 않는 상대에게 형식적인 인터뷰는 오히려 변명의 기회만 줄 뿐이었으므로.
희수의 예상대로 여자는 허를 찔린 듯 당황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희수의 명함을 확인하더니 갸우뚱했다.
『그걸 어떻게 아셨죠, 방송국에서?』
『방송국뿐만 아니라 신문사까지 정보가 들어간 걸로 알고 있어요. 그 사건이 어떻게 비화됐는지 아직 모르고 계시나 보죠?』
『세상에, 누가 그런 악소문을!』
『너무 걱정은 마세요. 그렇다고 이동선 스캔들에 연루된 여성들이 죄를 지은 건 아니니까, 언론에서 함부로 명단을 공개하진 않을 거예요. 저는 같은 여성으로 남성우위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고 싶어요. 문제도 아닌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사회에 우리도 당당하게 할말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희수의 설명에 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데서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공 한 박스 칠 동안만 기다려 줄 수 있겠어요? 대신 제가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죠.』
희수는 쾌히 승낙했다. 한 치의 틈도 없다는 여자가 갑자기 저녁식사 할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알 바는 없지만, 어쨌든 작전은 멋드러지게 성공한 셈이었다. 나영은 자신의 타석으로 가 골프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시원스런 스윙자세와 쭉쭉 뻗어 나가는 공의 궤도로 미루어 상당한 실력임을 알 수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해 보였다.
예술의 전당 건너편 일식집.
먹음직스런 우럭회를 놓고서도 두 여자는 식욕을 드러내지 않았다. 『실례지만 담배 한 대 태워도 괜찮겠어요?』
유나영은 핸드백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며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벌써 오래 전 일인데 이제 와서 구설수에 오르는 게 참 억울해요. 미스 코리아 출전하기 전에 만난 사람이거든요.』
희수는 그녀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겠다는 고개짓을 해 보였다. 미스 코리아 선발 이전의 행실에 면죄부를 구하려는 그녀의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그 사람 아까 그 인도어 골프장에서 만났어요. 같은 회원이었거든요. 회원들끼리 가끔 필드에 나가 시합할 기회가 있었죠. 언젠가 그 사람하고 같은 조로 라운딩을 했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서 몇 번 만났어요.』
『구체적으로 몇 번인지 기억하세요?』
『글쎄요, 한 서너 번? 그때 전 골프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니고 있었어요. 아마추어 대회에 참가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기억이 나요.』
『서너 번 만났는데 구설수에 오르다니 유나영 씨가 운이 없는 모양이군요.』
『그러게 말예요. 저도 검찰에서 불렀을 때 깜짝 놀랐어요. 처음엔 그 사람 이름도 가물가물해서 부인할 정도였으니까요.』
『짧은 만남이었어도 나영 씨가 너무 많은 흔적을 남긴 게 문제였을 거예요. 저도 그 사람 앨범에서 나영 씨의 아름다운 누드를 감상했거든요.』
『네에? 제 누드 사진이 앨범에 들어 있었다구요?』
『나영 씨뿐만 아니라 수십 명의 누드가 진열되어 있었어요. 불운한 것은 그 여자들 중에서도 나영 씨의 몸매가 가장 완벽한 탓에 그만큼 돋보였다는 거예요.』
『믿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나영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여태껏 오만함을 잃지 않고 당당하던 여자의 몸이 균형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저뿐이니까요. 또 나영 씨 얼굴이 그때와 많이 달라져 있어서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희수 씨는 어떻게 알아봤죠?』
『사진과 이름과 연락처, 그리고 지금 이렇게 직접 만나 확인을 했으니까요.』
『그 앨범이 지금 어디 있죠? 만약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전 끝장이에요. 그 사진을 돌려받을 수는 없나요? 도와 주신다면 성의껏 사례하겠어요.』
『제가 명함을 드렸었죠? 앨범은 절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요.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죠. 대신 저한테 허물없이 그 사람 이야길 해 주세요. 전 나영 씨 편이니까요.』
희수는 그녀에게 음식을 권하며 따뜻하게 화제를 풀어 나갔다. 남의 약점을 추궁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막상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재미도 쏠쏠한 게 사실이었다.
『그 사람이랑 라운딩했던 날, 첫눈에 반했어요. 남녀 한 쌍씩 페어게임을 했는데 우리 둘이서 같은 편이 됐었죠. 그 사람 덕분에 우승을 했어요. 퍼팅의 귀재였죠.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무서운 승부근성으로 홀컵을 공략했어요. 그가 퍼팅에 성공할 때마다 오금이 저릴 정도였어요. 게임에 참가했던 사람들끼리 거액의 내기가 걸려 있던 터여서 시합이 끝난 후 큰 상금을 획득했어요. 사실 저는 상금을 받을 자격이 없었어요. 학생 신분이라 돈을 걸 만한 재력도 없었고, 내기골프를 쳤다가 발각되면 자격을 상실하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은 둘이서 합심해서 번 돈이니까 똑같이 나누어야 된다고 고집했죠. 그래도 한사코 사양했더니 그러면 당일 내로 다 써 버리자는 제의를 했어요. 그건 선뜻 승낙했어요. 돈을 펑펑 써 보자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겠어요? 그날 원없이 돌아다녔어요. 인터컨티넨탈에서 뷔페도 먹었고, 미국제 골프세트도 선물 받았죠.』
『그런 후에 그 사람 집에 동행하게 된 거군요?』
『네, 약간 술에 취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가 좋아 따라간 거예요. 너무 큰 선물을 받아서 마음의 부담도 있었고…….』
『저를 어려워하지 마세요. 저라도 나영 씨 입장이었다면 그 사람을 따라갔을 거예요. 제 생각엔 나영 씨가 그 사람에게 끌린 건 돈 때문이 아니라 골프장에서 맺어진 동료의식이 연장된 게 아닌가 싶은데요.』
희수가 거들어 주자 나영의 어휘구사도 한결 노골적으로 발전했다.
『어머, 어쩜 그렇게 칼이세요? 역시 방송작가다우시네요. 그래요, 동료의식의 연장이라는 말이 정확하겠네요. 팀메이트로 18홀을 돌 때 이미 우리편이라는 연대감이 강하게 둘 사이를 밀착시켰어요. 나는 유달리 피아 구분이 화끈한 스타일이거든요.』
『충분히 이해해요. 연대감이 지나쳐서 탈이었겠죠. 하지만 아무리 우리편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남성적인 매력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없었겠죠?』
『그럼요, 한 마디로 표현해서 캡이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미남에 매너 좋죠, 강한 승부욕에 씀씀이 화끈하죠. 그 사람은 정말 강한 남자였어요. 스포티하면서도 야비한 게 아니라 정열적인 남자. 골프채를 선물 받기 전에도 난 그 남자한테 홀딱 반해 있었어요. 또 순진한 여대생으로서 호기심도 동했구요. 내가 그때까지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완벽한 이상형이었죠. 지금 와서 그 사람이 플레이보이라는 걸 알았지만 난 한 번도 그와 만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그 일로 피해를 당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도 내 머릿속엔 달콤한 로맨스로 남아 있을 거구요.』
『나영 씨는 솔직해서 마음에 드네요.』
『뭘요,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것뿐인데.』
『그토록 마음에 드는 남자와 사랑을 불태웠다면 결혼까지도 생각했을 법한데, 왜 서너 번 만나고 끝냈죠?』
『끝을 내다뇨, 시작한 것도 없는데!』
『남녀관계란 한 번 불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불길이 번지는 거 아닌가요?』
『섹스 한 번 했다고 꼭 결혼까지 생각하라는 법이 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린 서로의 건강한 육체에 서로 반했을 뿐이에요. 건강한 남녀가 서로 아름다움을 교환했는데 더 바랄 게 뭐 있겠어요? 그 이상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불순한 거 아녜요?』
희수는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적어도 연애론에 관해서는 유나영이 한 수 위였고, 한 발 앞이었다.
유나영의 논리는 당당하고도 정연했다. 희수는 그녀의 철학에 압도되어 그때부터 마치 성교육을 받는 기분으로 경청하고 있어야 했다.
청평 휴게소.
동선의 지프가 주차장에 들어서자, 바로 그 뒤에 그림자처럼 흰색 뉴그랜저가 따라와 멈췄다. 그러나 동선은 뒤따라오는 차량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동선이 유원지 전망대 쪽으로 걸어가자, 뉴그랜저에서 선글라스에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여자가 내렸다. 여자는 동선이 전망대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걸 확인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 후, 볼일을 마치고 나온 여자가 나뭇가지 사이로 전망대를 살폈다. 그녀는 다름아닌 노상미였다.
상미는 마포 오피스텔부터 줄곧 동선의 뒤를 미행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강변대로와 경춘가도에서 몇 번 놓쳤지만 동선의 지프가 워낙 독특해서 예까지 무사히 따라올 수 있었다.
상미는 다시 선글라스를 끼고 차로 돌아와 전망대를 감시했다. 그녀가 타고 있는 그랜저의 창은 짙게 선팅이 돼 있어 바깥에선 그 누구도 그녀의 눈길을 의식할 수 없었다.
동선은 그 사이 한 여자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언젠가 바로 이 장소에서 만나 청평호의 요트까지 올라가 섹스파티를 벌였던 청바지의 여자였다. 여자는 이번에도 청바지 차림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어요.』
『나는 늘, 항상, 날마다, 두고두고 너를 생각했는데 억울하군.』
『그런 뜻이 아녜요. 아저씨의 전화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이었어요.』
『그럼 내 생각을 하긴 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군.』
『……아저씨를 만난 이후로 변화가 많았죠. 그 말 혹시 기억하세요? 내 마음의 주인은 나라는 말.』
『기억하고말고. 너랑 헤어지기 직전에 내가 해준 말인데.』
『아저씨가 건네 준 그 한마디가 제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어요. 그 동안 참 흐리멍텅하게 살아 왔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바짝 들더라구요. 그때부터는 누구 눈치도 안 보고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살기로 작정했죠.』
『잘 해낼 줄 알았어. 너라는 여자는 도시의 때가 묻지 않아서.』
『사실 저도 모르게 때가 많이 묻었었죠.』
『천만에, 그런 여자 같았으면 내가 관심을 갖지도 않았을걸.』
동선은 그녀의 귀밑머리를 가볍게 쓸어 주었다. 그녀는 수줍어하면서도 그의 손길에 얼굴을 내맡기고 있었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지프에 동승해 출발하자 상미의 그랜저도 적당한 간격을 두고 뒤따랐다.
요트로 들어온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먹서먹한 얼굴로 마주 앉았다. 낯을 가릴 사이는 아니었지만 밀폐된 공간에 들어서자 괜히 어색해진 거였다.
『키가 없으니 호수 가운데로 나갈 수도 없고…….』
동선이 착잡한 얼굴로 선실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했다.
선실의 모든 공간에는 그와 절친했던 친구 최종명의 체취가 묻어 있었다. 동선의 얼굴에는 그와의 즐거웠던 한때를 회상하는 듯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 요트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거야.』
『왜요?』
『소유주가 없어졌거든.』
『…….』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선실을 거닐며 냉장고 손잡이와 벽장, 그리고 거울 등을 어루만지고 다녔다.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 그의 손 안엔 화투 한 모가 들려 있었다.
『그때 생각나? 오늘은 멧돼지 뽑기가 아니라 껍데기 뽑기를 하는 거야.』
『네에? 껍데기가 얼마나 많은데요.』
『어차피 언젠가는 둘 다 껍데기를 벗게 될 텐데 아까운 시간 낭비할 필요 없잖아?』
그는 여자의 대답을 구하지도 않고 화투짝을 섞기 시작했다.
여자는 무척이나 난처한 표정이었다. 지난번에는 밤이었고, 술이라도 몇 잔 들어간 뒤라, 곤혹스러웠어도 그 황당한 게임에 동참했던 것이지만 백주에 맨 얼굴로는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않았던 거였다.
그러나 동선이 먼저 난초 껍질 하나를 까뒤집고 나서 코트를 벗어 던지자 계속 장승처럼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망설임 끝에 슬그머니 화투 윗장을 뒤집었다. 다행히 비 광이었다.
『후후, 광이니까 면제죠?』
『운이 좋군, 초장부터.』
이후 둘은 번갈아가며 패를 떼었다.
그런데 행운은 철저하게 여자의 편을 들고 있었다. 마치 사전에 꾸며 놓기라도 한 것처럼 여자의 손에는 띠나 열끗짜리 멍텅구리만 걸려드는 거였다.
결국 동선은 화투짝을 반도 떼기 전에 전라로 벌거벗겨지고 말았다. 그때까지 그녀는 달랑 점퍼 하나만 벗었을 뿐이었다.
난방을 가동하지 않은 선실의 기온은 바깥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그의 몸엔 삽시간에 소름이 돋아났다. 계속되는 행운에 즐거워하던 여자가 동선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그쳤다.
『그만 해요. 이 게임은 아저씨가 완패한 거예요. 추우시죠?』
『오싹한걸.』
그가 양팔을 X자로 교차시켜 어깨를 문지르자 여자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해요 마구 벗겨서……. 대신 제가 따뜻하게 해드릴게요.』
여자가 테이블에서 일어나 그의 등 뒤로 돌아가더니 포근하게 껴안았다. 그리고 그의 귓불에 입술을 맞추고 나서 속삭였다.
『아저씨, 저를 첨 만났을 때 했던 말 기억나세요?』
『청평의 가을 하늘만큼이나 네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고 말했었지.』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오늘은 그 말을 제가 아저씨한테 해드리고 싶어요. 아까 휴게소에서 뵈었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아저씨 모습이 참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 말이 엉뚱한가요?』
동선은 뒤쪽에서 안겨오는 그녀의 머리를 당겨 입맞춤으로 대답을 했다. 키스는 격렬했다. 그가 그녀를 업어메치듯 앞쪽으로 돌려세웠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의 격렬한 흡입으로 인해 그녀의 양 볼이 홀쭉한 분화구처럼 패였다.
그의 손이 여자의 청바지를 다급하게 벗기기 시작했고, 그녀의 손 역시 상의의 단추를 허겁지겁 열고 있었다.
두 남녀가 공평한 알몸으로 포개어졌을 때, 그가 여자를 벽장 쪽으로 이끌었다. 입을 떼지 않은 상태인지라 둘은 게걸음질로 이동해야 했다.
그가 옆눈질로 벽장의 손잡이를 가늠하고서 문을 연 다음 담요를 거칠게 끌어내렸다. 담요 위로 쓰러진 남녀는 편한 자세로 서로의 혀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길고 긴 키스였다.
요트의 선실 밖에서는 상미가 창틈으로 그들의 사랑을 엿보고 있었다. 하이힐 두 짝을 양손에 쥐고서 요트의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조차 했다. 그러나 무게에 예민한 요트 위로 겁없이 올라와 엿보는 그녀의 대담성은 실로 놀라웠다.
12월 중순이 넘어갈 때까지 희수가 만난 여자들은 얼추 스무 명 가까이 되었다. 그 여자들을 하나하나 순례하느라 희수는 무던히도 고생을 했다. 스무 명과 만나기 위해 거의 하루 종일 전화통을 끌어안고 지냈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재봉 PD가 넘겨 준 명단의 전화번호는 절반 가까이 허탕이었다. 많은 여자들이 검찰의 조사가 끝난 후 전화번호를 바꾸어 버린 모양이었다.
희수의 다이얼에 포착된 대상들은 거의 모두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이었다. 주거지의 전화번호는 아무 때나 바꿀 수 있지만, 직장의 전화번호는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애꿎은 OL들만 희수에게 노출된 것이었다.
희수가 대면한 여자들의 반응은 그들이 갖고 있는 직업만큼이나 다양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이 경계심을 품고 나와 대화를 풀어 나가기가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희수의 대처 또한 상대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변화했다. 더러는 강하게, 더러는 부드럽게.
스무 명의 여자들 모두 동선과 교제한 사실을 부인하진 않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동선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차이점은 동선의 매력에 관한 시각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희수는 그들의 증언을 컴퓨터에 입력하면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여자들은 똑같이 한 남자를 겪었으면서도 전혀 다른 남자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골퍼 출신 미스 코리아는 그의 스포티한 매력에 반했다 하고, 보험회사의 생활설계사는 그의 따듯한 인간미를 높이 샀으며, 헤어 디자이너는 그의 예술적 안목을 사랑했다고 했다.
또 호텔 커피숍에서 일하는 여자는 그의 신사적인 매너를,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는 그의 유머감각을, 시립 도서관의 사서는 그의 몽상가적 기질을, 발레리나는 그의 강인한 육체를, 텔레비전 아나운서는 그의 패션을, 모닝콜 교환원은 그의 음성과 화술을, 항공운항과를 다니는 여대생은 그의 깔끔한 성격을, 그리고 카페 여주인은 그의 담배 피우는 모습에 모성을 베풀어 주고 싶었노라 토로했다.
어떻게 한 남자가 이토록 많은 매력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일까?
여자들의 회상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편집해 본다면 이동선의 형상은 초인이라 해도 좋았다. 강인한 스포츠맨에 정열적인 아티스트였으며, 우수 넘치는 센티멘털리스트와 따스한 로맨티스트의 얼굴을 동시에 갖고 있는 남자였다.
그가 그처럼 완전무결한 남자인가?
희수는 그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 자신도 그의 마성에 휩쓸려 홍역을 치렀지만, 아무리 따져 봐도 점수를 높게 매길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확실한 직업이나 소속이 없고, 정서마저 몹시 불안한 결점투성이 노총각에 불과했다.
물론 다른 여자들에 비해 희수는 특별한 입장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그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므로 특별한 선입견을 갖고 있을 수도 있었다. 또한 그런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음에도 그의 포로가 되어 있는 현실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가 그런 불완전한 모습으로 그녀를 사로잡았는지도. 그것까지도 동선의 매력으로 친다면, 아아, 그는 흠마저도 장점으로 소화하는 불가사의한 인간이 아닌가.
희수는 몇 번이고 여자들의 증언을 되풀이해서 읽으며 분석에 열중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실체는 잡히지 않았다. 카멜레온처럼 천변만화하며 시선을 교란할 뿐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상대가 누구였든 간에 동선은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상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진실은 그 혼자서만 알고 있겠지만 적어도 여자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희수도 그 점은 인정했다.
열일곱 번째의 여자였던가? 허순화라는 여자를 만났을 때 희수는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검찰의 명단에는 호텔에 근무하는 사무직 여성으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직접 만나 확인해 보니 그녀는 호텔 터키탕의 마사지걸이었다.
『기분 좋은데요. 저 같은 여자도 그분의 애인 명단에 올랐다니 영광이에요.』
허순화는 희수를 만난 자리에서 시종일관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희수의 질문에 망설임이 없었고, 오히려 보충설명까지 장황할 정도로 늘어놓았다. 희수는 그녀의 생경스런 어법과 노골적인 표현에 적잖이 얼굴을 붉혀야 했다.
『그 사람 연락처나 좀 주세요. 검찰 소환 이후로 연락이 끊어지는 바람에 뵙질 못했거든요.』
허순화는 아직도 그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는 표정이었다.
『뵐 때마다 하느라고 했지만 그분한텐 아쉬운 게 많았어요. 지금 만나면 끝내주게 해드릴 수 있을 텐데.』
허순화의 경우는 희수가 그 동안 만난 열여섯 명의 여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녀는 그의 맹목적인 신도였고 열렬한 팬이었다. 허순화는 스스로도 그렇다고 인정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라고 다짐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녀는 명단 속의 다른 여자들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는 듯 보였다.
희수는 그녀의 의지에 기가 질렸다.
『우리들 세계에도 엄격한 규칙이 있어요. 고객과는 철저하게 거래만 할 뿐이죠. 헌데 그분이 규칙을 위반했어요. 업주에게 들켰으면 진작에 목이 잘렸을 텐데 다행히 잘 감춰 온 거죠.』
하지만 허순화는 자신 있게 동선과는 거래가 아니라 사랑을 했노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희수가 구태여 묻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그와의 내력을 깡그리 털어놓았다. 희수가 내민 작가 명함에 고무되어 마치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허순화가 동선을 처음 만난 것은 R호텔 터키탕에 취직한 지 닷새쯤 되었을 때였다.
아직 신참티를 벗지 못해 손님이 방에 들어오면 마냥 불안하기만 했던 그녀는 그날 첫 손님을 맞았을 때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그의 겉옷을 받아 걸었다. 그녀는 그의 나신에 정성껏 비누를 칠해 씻겨 주었고, 마사지 침대로 안내한 다음 자신도 유니폼을 벗어 던졌다.
손님의 등에 올리브유를 바르고 그녀는 자신의 몸을 던져 보디 마사지를 시작했다.
후면 마사지가 끝나면 손님을 돌려눕힌 후 전면 마사지, 그리고 그의 말초신경을 자극해 하복부로 쓸어내린 다음, 하복부로 강하게 마찰시켜 사정을 유도하는 게 터키탕의 순서였다. 그녀는 배운 대로 충실하게 순서를 밟아 나갔다. 몸의 전면을 위로 향하고 누웠을 때, 이미 손님의 물건은 대공포처럼 잔뜩 화가 나서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리 쪽으로 활강한 다음, 풍만한 가슴으로 돌출한 그놈을 사로잡았다.
비록 닷새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동안 하루 평균 세 명 정도의 손님을 맞았으므로 도합 열댓 명의 물건을 지켜볼 수 있었다. 물론 수치심은 없었다. 터키탕 룸에 배정되기 직전에 한 달 가량 피나는 훈련을 했기 때문이었다. 강습기간 때 그녀는 신물이 나도록 사내들의 물건을 상대해야 했다. 그렇기에 허순화는 이제 준프로라고 해도 좋았다.
그녀는 가슴과 복부로 그의 물건을 희롱하다 쭈욱 미끄러져 올라갔다. 그러자 두 남녀의 얼굴이 맞부딪쳤다.
그녀는 또다시 세차게 허리를 돌려 하체를 압박했다. 그러나 치골 밑에서 그놈은 한사코 뭔가를 노리며 요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올리브 기름의 윤활작용을 이용하여 그놈을 압사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놈의 저항은 완강했다. 그 동안 상대했던 손님들은 대개 이쯤에서 진저리를 치며 나가 떨어졌는데, 이번 손님은 영 만만치가 않았다.
제 솜씨가 시원찮나 보죠?
그녀가 허리질을 중단하고 넌지시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손님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허순화는 별수없이 두 손과 입을 사용해 그놈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입 안이 얼얼할 정도로 열심히 노력을 했는데도 그놈은 여전히 꼿꼿하게 머리를 곤두세운 채 비웃고 있었다.
그녀가 맥이 빠져 잠깐 숨을 돌리고 있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난 그런 식으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체질이야.』
『그럼 어떡해야 만족하시겠어요?』
『글쎄, 뭘 요구하는지는 나보다 그놈한테 물어 보는 게 더 빠르지.』
허순화는 손님이 뭘 원하는지를 그제사 깨달았다. 하지만 R호텔 터키탕의 규칙은 마사지걸이 고객과 섹스를 나눌 수 없도록 하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밀실에서 홀라당 벗은 남녀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러므로 규칙이라는 것은 명분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진해서 규칙을 엄수할 수밖에 없었다. 규칙이 깨졌을 때 돌아오는 소문이 무서운 까닭이었다. 그 터키탕에서 누구누구와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손님들은 너도나도 공평한 서비스를 받겠다고 우겨댈 거였고, 그렇게 되면 호텔 터키탕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윤락과 매춘의 소굴로 전락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사지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직접적인 섹스 행위만큼은 절대 삼갔다.
허순화는 난감했다. 손님의 물건은 계속 화가 나 있는 상태인데 도무지 그놈의 울분을 풀어 줄 재주가 없었다. 재주가 없는 것도 그렇지만 우선 자존심이 상했다.
그 동안 그리 많지 않은 손님들을 상대했지만, 그 모든 고객들이 자신의 농염한 육체 앞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고, 맹렬하게 폭발하지 않았던가. 사내들의 심벌이 반사적으로 팽창할 때마다, 그들의 욕정이 펑펑 새어나올 때마다 그녀는 묘한 쾌감을 느끼곤 했었다.
스물셋의 나이가 되도록 이처럼 자신의 몸에 자신감을 가져 본 기억이 따로 없었다. 그 감정이 아마 나르시시즘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그러면서도 수입은 전직장이었던 편물공장보다 훨씬 넉넉했다. 허순화는 터키탕에 들어온 걸 백 번 잘한 선택이었노라고 자위하기까지 했다. 『아저씨, 그럼 다른 여자들한텐 어떤 서비스를 받았죠?』
그녀는 순진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정말이지 다른 여자들이 어떻게 그를 만족시켰는지 궁금했다.
『터키탕은 처음이야. 그런데 생각보다 시원한 맛이 없군.』
그가 은근히 그녀의 비위를 건드렸다. 경력은 짧아도 프로페셔널의 긍지를 가지고 있는 그녀가 그런 비아냥거림에 고개를 숙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다시 올리브유를 손님의 몸에 뿌리고 리턴 매치를 시작했다. 온몸에 땀이 줄줄 흘렀다. 사내의 심벌도 곧 부러질 것처럼 최대한 솟구쳤다.
그 순간 사내의 손이 그녀의 급소로 쳐들어왔다. 그녀는 움찔하면서 방관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내의 성감이 증폭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분위기가 이상하게 반전되었다. 누가 누구를 마사지하고 있는지, 누가 더 성감에 허우적거리고 있는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뒤엉켜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그의 밑에 깔려 버렸다. 그는 과격하게 그녀의 두 다리를 양 옆구리에 갖다붙였고, 사나운 기세로 돌진해 왔다. 그리고 아차 하는 순간 그의 심벌이 그녀의 급소에 진입해 버렸다. 잔뜩 발라놓은 올리브유가 남녀의 결합을 한층 쉽게 만들어 준 주범이었다.
그는 곧바로 엉덩이를 비틀어 사내의 동작을 방해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한 수 앞질러 가며 그녀의 의도를 분쇄했다. 그의 심벌이 몸 깊숙한 곳으로 뿌리를 내리자 그녀는 별수없이 저항을 포기했다. 대신 시체처럼 냉정하게 드러누운 채 그를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이건 강간이야!
그녀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카드도 오래 가지 못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사이엔가 육체는 그의 장단에 허물어지고 있었던 거였다.
안 돼, 절대로 이런 모습을 보여선 안 돼! 참아야 해.
허순화는 이를 악물고 침대 모서리에 손톱을 박았다.
지렛대의 중심을 확고부동하게 잡아 놓고 난 사내가 리드미컬한 질주를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보폭에 따라 흔들렸다.
고마워, 당신의 소중한 곳을 내게 열어 줘서.
사내가 갑자기 동작을 정지하고 말을 걸어왔다. 그러자 허순화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그의 등을 껴안았다. 그래도 그가 움직이지 않자 그녀가 다급하게 아래쪽에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움직임에 가속도가 붙을 때쯤 그가 느닷없이 지렛대를 뽑아 버렸다. 그녀는 벌떡 상체를 세워 그를 껴안았다. 그는 태연자약하게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녀가 허겁지겁 그의 몸 위로 올라가 휘청거리는 지렛대를 부여잡고 자신의 중심에 꿰어 맞췄다. 그는 누운 채 그녀 몸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과 전신의 성감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자세였다.
그날, 그녀는 부끄럽게도 자신의 몸짓에 의해 몇 번이나 절정을 경험하고 말았다.
그 희한한 고객이 바로 이동선이었다. 이동선은 가끔씩 허순화를 찾아왔다. 물론 그때마다 허순화는 규칙을 위반해야 했다. 그는 정해진 수고료보다 훨씬 많은 팁을 놓고 갔다. 비번일 때엔 그의 오피스텔까지 달려가 서비스를 해준 적도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무시한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곳을 열어 준 여성이므로 늘 감사하고 있다는 인사를 했다. 허순화는 그를 만날 때 비로소 사람다워진 자신의 모습과 만날 수 있었다. 동화조경연구소.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점에서 오연화는 일에 쫓기고 있었다. 하수지가 관장했던 극장건물의 프로젝트를 계약대로 진행하기 위해 직접 총대를 멘 거였다.
그녀의 일을 돕기 위해 미대 출신 후배들이 들어와 사무실은 아연 활기가 넘쳤다. 하수지의 돌연한 죽음이 사무실 분위기를 살려 놓은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모처럼 사람들과 어울려 일다운 일을 하고 있는 오연화의 얼굴에도 전에 없던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후배들이 점심시간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물들을 설치해 사무실 분위기를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어때요, 회장님이 들어오시면 깜짝 놀라시겠죠?』
다섯 명의 신입사원 중 가장 막내인 한성희가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오연화에게 환경미화작업이 끝났음을 알렸다.
『그래, 기뻐하실 거야. 이제 어서들 업무 끝내. 회식이 있으니까.』
『회장님이 한턱 내시는 건가요?』
한성희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새로 들어온 수습사원들은 연구소의 실제 소유자인 이동선을 자기들 맘대로 회장님으로 호칭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척 회장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했다. 입사한 지 보름이 넘도록 창업주와 상견례를 나누지 못한 탓이었다.
오연화도 자연스럽게 그들 앞에서는 이동선을 회장님이라 불렀다. 자신이 소장직을 맡고 있었으므로 그보다 높은 호칭이 어차피 필요했던 참이었다.
『한 가지만 부탁할게. 회식 때 회장님한테 불필요한 질문들은 가급적 삼가길 바래. 요새 심기가 좀 불편하시거든. 그런다고 눈치보라는 말은 아니야. 회장님도 전혀 그런 내색을 보이지는 않으실 거야. 자연스럽게 대하되, 그분의 신상에 관한 질문 같은 것만 자제해 달라는 거야.』
그녀의 말에 모든 후배들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오연화는 주의사항을 전하고 나서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럭비공처럼 튀는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미술학도들이 행여나 이동선을 귀찮게 하지는 않을까 싶어 미리 못을 박아 둔 거였지만 그들의 반응을 보니 괜한 소릴 했나 싶었다. 그들의 눈빛엔 오히려 더 큰 호기심이 반짝이고 있었으므로.
아니나다를까 커피 심부름을 자청해 쟁반에 받쳐 온 한성희가 바로 떠나지 않고 머뭇거렸다.
『왜?』
『저어……소장님, 요즈음 회사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왜 그런 생각을 했지?』
『방금 소장님이 회식 때 불필요한 질문을 삼가라고 지시하셨잖아요. 극장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작가분의 사고 소문도 그렇고 괜히 불안해서요.』
『별 걱정을 다하는구나. 난 지시를 내린 게 아니라 부탁을 한 거야. 하수지 씨의 사고는 안됐지만 우리 회사와는 무관한 일이고. 이제 해명이 됐어?』
『회장님은 총각이시라면서요?』
『내가 그래서 부탁을 한 거야. 너처럼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쓸데없는 소릴 할까 봐.』
연화가 정색하며 꾸짖었다. 그래도 한성희는 애교 있는 웃음으로 물고 늘어졌다.
『죄송해요. 하지만 궁금한 걸 억지로 참는다는 게 더 이상하잖아요. 회장님의 기본적인 신상을 알려 주셔야 이따 실수를 하지 않을 거 아녜요?』
『얘가 정말! 그런 쓸데없는 데 아까운 두뇌 놀리지 말고 아이디어나 개발해,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
연화의 서슬에 한성희가 머리를 긁으며 돌아갔다. 연화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커피를 음미했다.
다섯 명의 후배들 중 가장 눈여겨봐야 할 요주의 인물이 바로 성희였다. 남자 두 명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여자 셋 중에 성희를 제외한 두 사람은 워낙에 성실하고 일밖에 모르는 일벌레들이었다.
물론 한성희도 일에는 억척스런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애들이 일벌레라면 그녀는 개똥벌레 같이 반짝이는 존재였다.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스타일이어서 맡은 일도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재주꾼이었다.
오연화는 그들을 선발할 때 일에 대한 정열을 중요시했다. 특히 여자의 경우, 용모보다는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프로근성을 높이 샀다.
한성희는 면접한 후배들 중에서 가장 돋보였다. 재치와 애교를 겸비했고 무엇보다도 성취 욕구가 끓는 아이였다. 면접점수로 따진다면 단연코 한성희가 최고점이었다. 그러나 오연화는 그녀를 맨 나중에 선택했다. 그러니까 입사 우선순위에 의거하면 한성희는 꼴찌로 턱걸이한 셈이었다.
연화가 그녀의 낙점을 망설인 이유는 첫인상의 여운 때문이었다. 한성희와 처음 대면했을 때 오연화는 괜히 가슴이 철렁했다. 앳된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보통 독특한 게 아니었다. 유달리 짙은 눈썹과 빛을 발하는 눈동자, 특히 촘촘하게 뻗어나온 속눈썹이 어찌나 길고 무성한지 그 위에 볼펜 하나를 올려 놓아도 거뜬할 것 같았다.
그녀가 씽긋 미소를 지을라치면 그 속눈썹이 확실하게 기능을 발휘했다. 성희는 속눈썹 하나만으로 미소를 연출해 내는 장기를 가지고 있었다.
두툼한 코트를 걸친 상태였지만 연화는 한눈에 성희의 몸매를 읽을 수 있었다. 작은 키에 약간 통통한 스타일이었다. 체형의 불리한 여건을 한성희는 얼굴로 충분히 커버하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귀엽고 신비한 그녀의 미소가 오연화한테는 문제였다. 같이 일을 하고 싶긴 한데 저 미소가 언젠가 제값을 하고 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 예감의 뿌리는 동선의 존재로부터 돋아난 거였다. 진흙탕 같은 슬럼프에 빠져 있는 이동선의 소생을 위해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려는 게 오연화의 충정인데, 그 일을 돕기 위해 회사에 들어온 여자아이가 혹시나 동선의 눈을 흐리게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결코 기우(杞憂)는 아니었다.
오연화는 그 동안 동선의 곁에 있으면서 많은 것을 두눈으로 지켜보았었다. 그녀는 그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그가 보고 만지고 느끼는 모든 것을 그녀도 비슷하게 느껴 왔었다. 그녀가 ‘저 여자다’ 싶어 돌아서 보면 그 여자는 틀림없이 동선의 오피스텔로 따라가고 있었다.
오연화는 그렇다고 그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 여자들을 질투하지도 않았다. 그런 광경들이 하도 반복된 탓에 밥먹고 숨쉬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한 사무실에서 일을 해야 하는 멤버만큼은 엄격한 통제가 필요했다. 그것이 동선을 위하는 길이기도 했으므로.
파인힐에서 한식 스테이크 요리로 회식을 마친 동화조경연구소 멤버들은 처음 만난 회장님 이동선에게 2차를 졸라 댔다. 동선은 흔쾌히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2차는 오연화가 단란주점으로 결정했다.
룸에 들어가자마자 노래경연이 벌어졌다. 연화는 동선의 맞은편에 앉아 시종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디스코텍을 가자, 포장마차를 가자 의견들이 분분했지만 단란주점으로 선택한 건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다.
연화는 파인힐에서 상견례와 함께 스테이크를 먹는 동안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동선이 새로 들어온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금세 친해지는 걸 보고 마음은 놓였으나 한편으론 불안했다. 다행히 멤버들은 연화의 당부를 잊지 않고 불필요한 언행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2차에서는 장담할 수 없었다.
디스코텍을 가자니 블루스 타임이 거슬렸다. 멤버 중 누구라도 동선과 플로어에 나서면 손을 맞잡게 될 거였고, 그의 달콤한 리드에 넋을 빼앗기고 말 게 분명했다.
포장마차는 더 불안했다. 디스코텍처럼 신체적 접촉의 기회는 없겠지만, 소주 몇 잔 들이키다 보면 젊은 아이들의 혀가 가만 있지 않을 거였다.
『소장님 차례예요.』
한성희가 마이크를 내밀며 채근했다.
오연화는 주저 없이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가 그녀의 유일한 애창곡이었다.
그녀가 노래의 후반부를 허밍할 때 동선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팡파르가 울렸고 화면에 92점을 알리는 자막이 떠올랐다. 멤버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 중 하나가 연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와, 감동적인 열창이었어요. 하지만 92점은 따라지 한끗 밖에 되질 않네요. 참가비를 내셔야겠습니다.』
멤버들은 노래점수로 내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높은 점수보다는 두 자리 숫자를 합산하고 남은 끗발의 순위를 가리는 게임이었다.
룸 안의 참가자가 모두 한 곡씩 부르고 난 뒤 점수를 비교해 보니 88점을 기록한 장정임이라는 여자아이가 수위를 차지했고, 그에 따라 1인당 만원씩 걸었던 총상금 7만원을 독식했다.
『자, 이제 단식이 끝났으니까 복식 차례입니다. 또 참가비 만 원씩 부과하겠습니다. 우리가 모두 일곱 명이니까 한 사람이 남는데요. 그 사람은 참가비를 면제해 드립니다. 그냥 놀고 지켜보면 되는 거죠. 여섯 명이 세 팀으로 두 명씩 짝을 지어 듀엣곡을 부르고요. 아까와 마찬가지로 가장 고득점 팀이 상금을 차지하는 겁니다. 우승한 듀엣은 3만원씩 나눠가지면 되겠죠? 그럼 추첨을 하겠습니다.』
들어오는 순간부터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회를 맡아 분위기를 리드해 오던 남자애가 언제 준비해 두었는지 꼬깃꼬깃 몇 겹씩 접은 종이쪽지 일곱 개를 테이블 위에 쏟아 놓았다.
『기왕이면 남녀가 혼성으로 듀엣이 되는 게 낫겠죠?』
그가 쪽지 중 네 개를 골라서 여자들에게 내밀었다.
『남자가 셋, 여자가 넷이니까 천상 여자들 중에서 한 명이 제외되겠네요. 자, 펴 보세요.』
여자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쪽지를 펼 동안, 남자들도 하나씩 골라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난 아무 표시도 없는데?』
연화가 빈 쪽지를 들어 사회자에게 보여 주었다.
『하하, 그게 꽝이라는 겁니다.』
연화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쪽지에 적혀 있는 기호에 따라 짝을 찾았다.
동선의 파트너는 막내 한성희였다. 성희는 동선의 옆자리로 이동하면서 깡총깡총 뛰었다. 퍽이나 기쁜 모양이었다.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가사집을 뒤적이는 커플을 지켜보며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새끼를 치며 불어나는 거였다.
차례가 돌아오자 동선과 성희는 ‘그대 먼 곳에’를 불렀다. 그의 저음과 그녀의 하이톤이 절묘하게 어울렸다. 둘은 노래를 부르면서 눈짓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먼 곳에 있지 않아요.
가까운 곳에 있어요∼.
노래의 첫 소절처럼 두 남녀는 너무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다.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서웠다.
일권은 강변 오피스텔 맞은편의 공중전화 박스에서 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이어서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삼십 분이 다 되도록 그 안에서 죽치고 서 있었다.
잠시 후,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지프 한 대가 들어왔다. 일권은 전화를 거는 척하며 지프의 동태를 살폈다.
지프에선 한 쌍의 남녀가 내렸다. 일권은 그 남자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안드로메다에서 눈도장을 찍은 기억이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남녀가 오피스텔 현관으로 들어가자 일권은 고개를 들어 건물의 상층부를 올려다보았다. 예상대로 11층 동선의 방에 한참 뒤 불이 밝혀졌다.
그는 불빛을 확인하고 나서 상미의 카폰에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방금 그가 도착했어요. 어떤 여자와 함께.』
- 어떻게 생긴 여자던가요?
『키가 작은 편이고 단발머리였어요.』
- 옷은 뭘 입었죠?
『베이지색 반코트』
- 이상하군요. 여기서 떠날 땐 긴 머리에 쥐색 재킷을 입은 여자였는데. 키도 그 사람과 비교해 결코 작지 않았고…….
『사람이 바뀌었다는 겁니까?』
- 아마 그런 모양이에요. 거기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겠어요? 제가 갈 때까지만요. 지금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으니까 십 분도 안 걸릴 거예요.
『그러죠 뭐.』
일권은 전화박스에서 나와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할일을 끝낸 상태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건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미니 사이즈의 양주 한 병을 사들고 나온 그는 편의점 입구에서 마개를 따고 박카스 마시듯 단숨에 털어 넣었다.
술기운이 전신에 홧홧하게 감돌 무렵, 상미의 뉴그랜저가 나타났다.
상미는 차문을 열어 주며 타라는 손짓을 했다.
『추운데 고생하셨겠네요. 오래 기다렸어요?』
『삼십 분 정도.』
『해우소에서 여기까지 온 시간을 포함하면요?』
『한 시간 남짓 되겠죠.』
『신사동에서 마포까지 오는 데 정확히 이십 분 걸렸거든요. 그 동안에 감쪽같이 여자가 바뀐 거예요.』
일권은 상미가 무슨 계산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이동선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추리소설에 나오는 탐정처럼 변해 있었다.
『그 사람 회사를 알아냈어요. 오늘 직원들끼리 회식을 하더라구요. 그 사람의 눈을 피해서 파인힐 구석에 앉아 그들이 하는 대화를 전부 엿들었어요. 직원들이 회장님이라고 부르더군요. 무슨 조경연구소 같은 회사를 운영하나 봐요. 그 사람 밑에 서른 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가 있더군요. 연구소 소장으로 사무실을 관리하는 사람 같았어요. 2차로 단란주점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간단하게 놀고 나왔어요. 그리고 곧장 그 소장이란 여자하고 연구소 건물로 들어가서 함께 지프를 타는 것까지 제가 보고 왔거든요. 도저히 그 차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 일권 씨한테 전화한 거였어요.』
『내가 본 여자는 스물서너 살쯤 돼 보이던데요?』
『그래요, 단발머리에 베이지색 반코트라고 했죠? 그 직원들 중에 한 여자예요. 가정을 해본다면 소장이라는 여자를 어디까진가 태워다 주고, 다른 장소에서 그 여직원과 다시 만난 게 분명해요. 내가 듣기로는 소장을 빼놓고 모두 새로 들어온 직원들 같았어요. 그러니까 그 중 한 여자와 오피스텔로 동행한 거죠. 회장님과 신입사원이 소장의 눈을 피해서 감쪽같이 눈을 맞춘 거죠. 지금쯤은 배꼽까지 맞추고 있을지도 몰라요.』
상미는 자신의 추리력에 스스로 도취해 한 편의 드라마를 쓰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그럼 하루 종일 저 사람 뒤를 밟았다는 겁니까?』
『저 사람 생리까지도 정확히 파악했어요.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아침에 자는 올빼미 체질이죠. 기상시간은 정오 무렵. 오후에 어슬렁어슬렁 기어나와 운동을 해요. 월요일과 목요일은 인도어 골프장, 화·금은 스쿼시 클럽, 수·토는 수영장, 나머지 일요일은 한강 자전거 전용도로에서 사이클을 타요. 그렇게 체력관리를 철저히 하니 건강할 수밖에요. 거의 매일 여자와 만나 그 짓을 즐기더라구요. 정말 사람 같지 않았어요.』
『그가 즐기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는 말입니까?』
『그럼요, 얼마나 아슬아슬했는 줄 아세요?』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스릴 만점이잖아요.』
『스릴을 즐기려고 미행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지금.』
『희수 때문에 시작했죠. 그 사람의 가면을 벗기기 위해서. 근데 솔직히 미행하는 일도 재미가 있더라구요.』
『적당히 정도를 지키세요. 무슨 일이든 꼬리가 길면 밟히게 마련이니까요. 그쯤 해도 이동선의 실체는 밝혀진 거 아닙니까? 프리섹스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저 사람은 너무 심해요. 정신병을 앓고 있거나 대단한 악취미의 소유자, 둘 중 하나임에 틀림없어요. 희수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충고를 해주세요, 상미 씨가.』
『이미 그런 단계는 초월했어요. 희수가 요새 뭘 하고 다니는지 아세요? 이동선과 관계한 여자들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있어요.』
『조사를 하다니요?』
『방송국으로부터 여자들의 명단을 받았대요.』
『그럼 희수가 방송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모르죠. 방송으로 복수를 하려는 생각인지, 아니면 그냥 여자들한테 관심이 있어 그러는지 더 두고 봐야 알겠죠.』
『복수를 생각할 희수가 아니지만, 정 분하다면 나한테 정식으로 복수를 부탁하라고 전해 줘요. 걔 부탁이라면 청부살인이라도 맡아 줄 테니까.』
『제 생각엔 후자 쪽인 거 같아요. 걔는 글을 쓰는 작가잖아요. 사람 만나는 것도 재산이고 또 이런 황당한 경험도 훗날 작품 소재로 써먹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상미가 말을 끝내고 차를 움직이려다 갑자기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저기 전화박스에 그 여자가 있어요. 아까 신사동에서 이동선의 지프를 타고 떠났던 여자.』
일권도 목을 빼고 앞쪽을 보았다.
과연 전화박스 안에서는 쥐색 재킷을 걸친 여자가 다이얼을 누르고 있었다.
『언제 왔을까요? 일권 씨와 대화하느라 보지도 못했어요.』
『복잡해지네요. 흔히 말하는 삼각관계 구도 아닙니까?』
『이동선한테 삼각관계를 갖다붙이는 건 어불성설이죠, 삼각이 아니라 그 사람은 삼백각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으니까요.』
『저 여자도 그의 오피스텔로 들어갈까요?』
『두고 봐야죠.』
상미는 마른침을 삼키며 흥미진진한 눈으로 전화박스를 지켜보았다. 전화박스 속의 여자는 멀리서 봐도 꽤나 심각한 표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스물여덟, 아홉쯤 됐을까?
희수는 인도어 골프장의 대기석에 앉아 이쪽으로 걸어오는 여자를 예의 주시했다. 체크무늬의 타이트한 스포츠웨어와 눈부시도록 하얀 골프화를 착용한 여자는 섹시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니트 소재로 된 골프복의 품은 원래 넉넉하지만, 그녀의 알찬 몸매가 은근하게 타이트한 자태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녀가 희수에게 다가와 커피를 건네며 목례했다.
『분위기가 어수선하죠?』
『좋은데요. 공기도 상쾌하고요.』
『죄송해요, 이런 곳으로 약속장소를 정해서. 차분하게 만났어야 하는데.』
가까이서 본 여자의 얼굴은 또 느낌이 새로웠다. 완벽하게 균형잡힌 이목구비와 화장기가 전혀 없는 건강한 살결에서 여자의 자신감이 물씬 풍겨났다. 아니 자신감의 차원을 넘어서 오만하고 도도한 인상이라고 해도 좋았다.
희수의 옆, 빈 자리에 앉은 그녀의 자세 역시 흐트러짐이 없었다. 과연 미스 코리아 출신다웠다.
『어떤 프로그램이라고 했죠?』
여자가 다시 희수의 방문목적을 확인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W-net 의 인터뷰 형식으로 면담을 청했기 때문이었다.
희수가 어렵게 전화를 했을 때, 여자는 별로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미스 코리아 출신이긴 해도 자신은 연예인이 아니므로 방송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거였다.
그런 이유로 여자는 희수에게 특별한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대신 정 만나기를 원한다면 자신이 운동을 하는 시간에 잠깐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희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사당동의 인도어 골프장까지 나와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었다.
『바쁘신데 번거롭게 찾아와서 죄송해요. 얼마 전 검찰에 불려간 적이 있었죠? 그 문제와 관련해서 유나영 씨의 견해를 몇 마디 듣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희수는 명함을 건네 주며 단도직입으로 질문을 던졌다. 빈틈을 내 주지 않는 상대에게 형식적인 인터뷰는 오히려 변명의 기회만 줄 뿐이었으므로.
희수의 예상대로 여자는 허를 찔린 듯 당황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희수의 명함을 확인하더니 갸우뚱했다.
『그걸 어떻게 아셨죠, 방송국에서?』
『방송국뿐만 아니라 신문사까지 정보가 들어간 걸로 알고 있어요. 그 사건이 어떻게 비화됐는지 아직 모르고 계시나 보죠?』
『세상에, 누가 그런 악소문을!』
『너무 걱정은 마세요. 그렇다고 이동선 스캔들에 연루된 여성들이 죄를 지은 건 아니니까, 언론에서 함부로 명단을 공개하진 않을 거예요. 저는 같은 여성으로 남성우위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고 싶어요. 문제도 아닌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사회에 우리도 당당하게 할말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희수의 설명에 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데서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공 한 박스 칠 동안만 기다려 줄 수 있겠어요? 대신 제가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죠.』
희수는 쾌히 승낙했다. 한 치의 틈도 없다는 여자가 갑자기 저녁식사 할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알 바는 없지만, 어쨌든 작전은 멋드러지게 성공한 셈이었다. 나영은 자신의 타석으로 가 골프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시원스런 스윙자세와 쭉쭉 뻗어 나가는 공의 궤도로 미루어 상당한 실력임을 알 수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해 보였다.
예술의 전당 건너편 일식집.
먹음직스런 우럭회를 놓고서도 두 여자는 식욕을 드러내지 않았다. 『실례지만 담배 한 대 태워도 괜찮겠어요?』
유나영은 핸드백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며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벌써 오래 전 일인데 이제 와서 구설수에 오르는 게 참 억울해요. 미스 코리아 출전하기 전에 만난 사람이거든요.』
희수는 그녀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겠다는 고개짓을 해 보였다. 미스 코리아 선발 이전의 행실에 면죄부를 구하려는 그녀의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그 사람 아까 그 인도어 골프장에서 만났어요. 같은 회원이었거든요. 회원들끼리 가끔 필드에 나가 시합할 기회가 있었죠. 언젠가 그 사람하고 같은 조로 라운딩을 했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서 몇 번 만났어요.』
『구체적으로 몇 번인지 기억하세요?』
『글쎄요, 한 서너 번? 그때 전 골프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니고 있었어요. 아마추어 대회에 참가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기억이 나요.』
『서너 번 만났는데 구설수에 오르다니 유나영 씨가 운이 없는 모양이군요.』
『그러게 말예요. 저도 검찰에서 불렀을 때 깜짝 놀랐어요. 처음엔 그 사람 이름도 가물가물해서 부인할 정도였으니까요.』
『짧은 만남이었어도 나영 씨가 너무 많은 흔적을 남긴 게 문제였을 거예요. 저도 그 사람 앨범에서 나영 씨의 아름다운 누드를 감상했거든요.』
『네에? 제 누드 사진이 앨범에 들어 있었다구요?』
『나영 씨뿐만 아니라 수십 명의 누드가 진열되어 있었어요. 불운한 것은 그 여자들 중에서도 나영 씨의 몸매가 가장 완벽한 탓에 그만큼 돋보였다는 거예요.』
『믿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나영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여태껏 오만함을 잃지 않고 당당하던 여자의 몸이 균형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저뿐이니까요. 또 나영 씨 얼굴이 그때와 많이 달라져 있어서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희수 씨는 어떻게 알아봤죠?』
『사진과 이름과 연락처, 그리고 지금 이렇게 직접 만나 확인을 했으니까요.』
『그 앨범이 지금 어디 있죠? 만약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전 끝장이에요. 그 사진을 돌려받을 수는 없나요? 도와 주신다면 성의껏 사례하겠어요.』
『제가 명함을 드렸었죠? 앨범은 절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요.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죠. 대신 저한테 허물없이 그 사람 이야길 해 주세요. 전 나영 씨 편이니까요.』
희수는 그녀에게 음식을 권하며 따뜻하게 화제를 풀어 나갔다. 남의 약점을 추궁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막상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재미도 쏠쏠한 게 사실이었다.
『그 사람이랑 라운딩했던 날, 첫눈에 반했어요. 남녀 한 쌍씩 페어게임을 했는데 우리 둘이서 같은 편이 됐었죠. 그 사람 덕분에 우승을 했어요. 퍼팅의 귀재였죠.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무서운 승부근성으로 홀컵을 공략했어요. 그가 퍼팅에 성공할 때마다 오금이 저릴 정도였어요. 게임에 참가했던 사람들끼리 거액의 내기가 걸려 있던 터여서 시합이 끝난 후 큰 상금을 획득했어요. 사실 저는 상금을 받을 자격이 없었어요. 학생 신분이라 돈을 걸 만한 재력도 없었고, 내기골프를 쳤다가 발각되면 자격을 상실하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은 둘이서 합심해서 번 돈이니까 똑같이 나누어야 된다고 고집했죠. 그래도 한사코 사양했더니 그러면 당일 내로 다 써 버리자는 제의를 했어요. 그건 선뜻 승낙했어요. 돈을 펑펑 써 보자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겠어요? 그날 원없이 돌아다녔어요. 인터컨티넨탈에서 뷔페도 먹었고, 미국제 골프세트도 선물 받았죠.』
『그런 후에 그 사람 집에 동행하게 된 거군요?』
『네, 약간 술에 취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가 좋아 따라간 거예요. 너무 큰 선물을 받아서 마음의 부담도 있었고…….』
『저를 어려워하지 마세요. 저라도 나영 씨 입장이었다면 그 사람을 따라갔을 거예요. 제 생각엔 나영 씨가 그 사람에게 끌린 건 돈 때문이 아니라 골프장에서 맺어진 동료의식이 연장된 게 아닌가 싶은데요.』
희수가 거들어 주자 나영의 어휘구사도 한결 노골적으로 발전했다.
『어머, 어쩜 그렇게 칼이세요? 역시 방송작가다우시네요. 그래요, 동료의식의 연장이라는 말이 정확하겠네요. 팀메이트로 18홀을 돌 때 이미 우리편이라는 연대감이 강하게 둘 사이를 밀착시켰어요. 나는 유달리 피아 구분이 화끈한 스타일이거든요.』
『충분히 이해해요. 연대감이 지나쳐서 탈이었겠죠. 하지만 아무리 우리편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남성적인 매력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없었겠죠?』
『그럼요, 한 마디로 표현해서 캡이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미남에 매너 좋죠, 강한 승부욕에 씀씀이 화끈하죠. 그 사람은 정말 강한 남자였어요. 스포티하면서도 야비한 게 아니라 정열적인 남자. 골프채를 선물 받기 전에도 난 그 남자한테 홀딱 반해 있었어요. 또 순진한 여대생으로서 호기심도 동했구요. 내가 그때까지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완벽한 이상형이었죠. 지금 와서 그 사람이 플레이보이라는 걸 알았지만 난 한 번도 그와 만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그 일로 피해를 당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도 내 머릿속엔 달콤한 로맨스로 남아 있을 거구요.』
『나영 씨는 솔직해서 마음에 드네요.』
『뭘요,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것뿐인데.』
『그토록 마음에 드는 남자와 사랑을 불태웠다면 결혼까지도 생각했을 법한데, 왜 서너 번 만나고 끝냈죠?』
『끝을 내다뇨, 시작한 것도 없는데!』
『남녀관계란 한 번 불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불길이 번지는 거 아닌가요?』
『섹스 한 번 했다고 꼭 결혼까지 생각하라는 법이 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린 서로의 건강한 육체에 서로 반했을 뿐이에요. 건강한 남녀가 서로 아름다움을 교환했는데 더 바랄 게 뭐 있겠어요? 그 이상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불순한 거 아녜요?』
희수는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적어도 연애론에 관해서는 유나영이 한 수 위였고, 한 발 앞이었다.
유나영의 논리는 당당하고도 정연했다. 희수는 그녀의 철학에 압도되어 그때부터 마치 성교육을 받는 기분으로 경청하고 있어야 했다.
청평 휴게소.
동선의 지프가 주차장에 들어서자, 바로 그 뒤에 그림자처럼 흰색 뉴그랜저가 따라와 멈췄다. 그러나 동선은 뒤따라오는 차량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동선이 유원지 전망대 쪽으로 걸어가자, 뉴그랜저에서 선글라스에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여자가 내렸다. 여자는 동선이 전망대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걸 확인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 후, 볼일을 마치고 나온 여자가 나뭇가지 사이로 전망대를 살폈다. 그녀는 다름아닌 노상미였다.
상미는 마포 오피스텔부터 줄곧 동선의 뒤를 미행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강변대로와 경춘가도에서 몇 번 놓쳤지만 동선의 지프가 워낙 독특해서 예까지 무사히 따라올 수 있었다.
상미는 다시 선글라스를 끼고 차로 돌아와 전망대를 감시했다. 그녀가 타고 있는 그랜저의 창은 짙게 선팅이 돼 있어 바깥에선 그 누구도 그녀의 눈길을 의식할 수 없었다.
동선은 그 사이 한 여자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언젠가 바로 이 장소에서 만나 청평호의 요트까지 올라가 섹스파티를 벌였던 청바지의 여자였다. 여자는 이번에도 청바지 차림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어요.』
『나는 늘, 항상, 날마다, 두고두고 너를 생각했는데 억울하군.』
『그런 뜻이 아녜요. 아저씨의 전화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이었어요.』
『그럼 내 생각을 하긴 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군.』
『……아저씨를 만난 이후로 변화가 많았죠. 그 말 혹시 기억하세요? 내 마음의 주인은 나라는 말.』
『기억하고말고. 너랑 헤어지기 직전에 내가 해준 말인데.』
『아저씨가 건네 준 그 한마디가 제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어요. 그 동안 참 흐리멍텅하게 살아 왔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바짝 들더라구요. 그때부터는 누구 눈치도 안 보고 제 마음 내키는 대로 살기로 작정했죠.』
『잘 해낼 줄 알았어. 너라는 여자는 도시의 때가 묻지 않아서.』
『사실 저도 모르게 때가 많이 묻었었죠.』
『천만에, 그런 여자 같았으면 내가 관심을 갖지도 않았을걸.』
동선은 그녀의 귀밑머리를 가볍게 쓸어 주었다. 그녀는 수줍어하면서도 그의 손길에 얼굴을 내맡기고 있었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지프에 동승해 출발하자 상미의 그랜저도 적당한 간격을 두고 뒤따랐다.
요트로 들어온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먹서먹한 얼굴로 마주 앉았다. 낯을 가릴 사이는 아니었지만 밀폐된 공간에 들어서자 괜히 어색해진 거였다.
『키가 없으니 호수 가운데로 나갈 수도 없고…….』
동선이 착잡한 얼굴로 선실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했다.
선실의 모든 공간에는 그와 절친했던 친구 최종명의 체취가 묻어 있었다. 동선의 얼굴에는 그와의 즐거웠던 한때를 회상하는 듯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 요트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거야.』
『왜요?』
『소유주가 없어졌거든.』
『…….』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선실을 거닐며 냉장고 손잡이와 벽장, 그리고 거울 등을 어루만지고 다녔다.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 그의 손 안엔 화투 한 모가 들려 있었다.
『그때 생각나? 오늘은 멧돼지 뽑기가 아니라 껍데기 뽑기를 하는 거야.』
『네에? 껍데기가 얼마나 많은데요.』
『어차피 언젠가는 둘 다 껍데기를 벗게 될 텐데 아까운 시간 낭비할 필요 없잖아?』
그는 여자의 대답을 구하지도 않고 화투짝을 섞기 시작했다.
여자는 무척이나 난처한 표정이었다. 지난번에는 밤이었고, 술이라도 몇 잔 들어간 뒤라, 곤혹스러웠어도 그 황당한 게임에 동참했던 것이지만 백주에 맨 얼굴로는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않았던 거였다.
그러나 동선이 먼저 난초 껍질 하나를 까뒤집고 나서 코트를 벗어 던지자 계속 장승처럼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망설임 끝에 슬그머니 화투 윗장을 뒤집었다. 다행히 비 광이었다.
『후후, 광이니까 면제죠?』
『운이 좋군, 초장부터.』
이후 둘은 번갈아가며 패를 떼었다.
그런데 행운은 철저하게 여자의 편을 들고 있었다. 마치 사전에 꾸며 놓기라도 한 것처럼 여자의 손에는 띠나 열끗짜리 멍텅구리만 걸려드는 거였다.
결국 동선은 화투짝을 반도 떼기 전에 전라로 벌거벗겨지고 말았다. 그때까지 그녀는 달랑 점퍼 하나만 벗었을 뿐이었다.
난방을 가동하지 않은 선실의 기온은 바깥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그의 몸엔 삽시간에 소름이 돋아났다. 계속되는 행운에 즐거워하던 여자가 동선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그쳤다.
『그만 해요. 이 게임은 아저씨가 완패한 거예요. 추우시죠?』
『오싹한걸.』
그가 양팔을 X자로 교차시켜 어깨를 문지르자 여자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해요 마구 벗겨서……. 대신 제가 따뜻하게 해드릴게요.』
여자가 테이블에서 일어나 그의 등 뒤로 돌아가더니 포근하게 껴안았다. 그리고 그의 귓불에 입술을 맞추고 나서 속삭였다.
『아저씨, 저를 첨 만났을 때 했던 말 기억나세요?』
『청평의 가을 하늘만큼이나 네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고 말했었지.』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오늘은 그 말을 제가 아저씨한테 해드리고 싶어요. 아까 휴게소에서 뵈었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아저씨 모습이 참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 말이 엉뚱한가요?』
동선은 뒤쪽에서 안겨오는 그녀의 머리를 당겨 입맞춤으로 대답을 했다. 키스는 격렬했다. 그가 그녀를 업어메치듯 앞쪽으로 돌려세웠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의 격렬한 흡입으로 인해 그녀의 양 볼이 홀쭉한 분화구처럼 패였다.
그의 손이 여자의 청바지를 다급하게 벗기기 시작했고, 그녀의 손 역시 상의의 단추를 허겁지겁 열고 있었다.
두 남녀가 공평한 알몸으로 포개어졌을 때, 그가 여자를 벽장 쪽으로 이끌었다. 입을 떼지 않은 상태인지라 둘은 게걸음질로 이동해야 했다.
그가 옆눈질로 벽장의 손잡이를 가늠하고서 문을 연 다음 담요를 거칠게 끌어내렸다. 담요 위로 쓰러진 남녀는 편한 자세로 서로의 혀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길고 긴 키스였다.
요트의 선실 밖에서는 상미가 창틈으로 그들의 사랑을 엿보고 있었다. 하이힐 두 짝을 양손에 쥐고서 요트의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조차 했다. 그러나 무게에 예민한 요트 위로 겁없이 올라와 엿보는 그녀의 대담성은 실로 놀라웠다.
12월 중순이 넘어갈 때까지 희수가 만난 여자들은 얼추 스무 명 가까이 되었다. 그 여자들을 하나하나 순례하느라 희수는 무던히도 고생을 했다. 스무 명과 만나기 위해 거의 하루 종일 전화통을 끌어안고 지냈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재봉 PD가 넘겨 준 명단의 전화번호는 절반 가까이 허탕이었다. 많은 여자들이 검찰의 조사가 끝난 후 전화번호를 바꾸어 버린 모양이었다.
희수의 다이얼에 포착된 대상들은 거의 모두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이었다. 주거지의 전화번호는 아무 때나 바꿀 수 있지만, 직장의 전화번호는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애꿎은 OL들만 희수에게 노출된 것이었다.
희수가 대면한 여자들의 반응은 그들이 갖고 있는 직업만큼이나 다양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이 경계심을 품고 나와 대화를 풀어 나가기가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희수의 대처 또한 상대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변화했다. 더러는 강하게, 더러는 부드럽게.
스무 명의 여자들 모두 동선과 교제한 사실을 부인하진 않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동선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차이점은 동선의 매력에 관한 시각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희수는 그들의 증언을 컴퓨터에 입력하면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여자들은 똑같이 한 남자를 겪었으면서도 전혀 다른 남자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골퍼 출신 미스 코리아는 그의 스포티한 매력에 반했다 하고, 보험회사의 생활설계사는 그의 따듯한 인간미를 높이 샀으며, 헤어 디자이너는 그의 예술적 안목을 사랑했다고 했다.
또 호텔 커피숍에서 일하는 여자는 그의 신사적인 매너를,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는 그의 유머감각을, 시립 도서관의 사서는 그의 몽상가적 기질을, 발레리나는 그의 강인한 육체를, 텔레비전 아나운서는 그의 패션을, 모닝콜 교환원은 그의 음성과 화술을, 항공운항과를 다니는 여대생은 그의 깔끔한 성격을, 그리고 카페 여주인은 그의 담배 피우는 모습에 모성을 베풀어 주고 싶었노라 토로했다.
어떻게 한 남자가 이토록 많은 매력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일까?
여자들의 회상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편집해 본다면 이동선의 형상은 초인이라 해도 좋았다. 강인한 스포츠맨에 정열적인 아티스트였으며, 우수 넘치는 센티멘털리스트와 따스한 로맨티스트의 얼굴을 동시에 갖고 있는 남자였다.
그가 그처럼 완전무결한 남자인가?
희수는 그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 자신도 그의 마성에 휩쓸려 홍역을 치렀지만, 아무리 따져 봐도 점수를 높게 매길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확실한 직업이나 소속이 없고, 정서마저 몹시 불안한 결점투성이 노총각에 불과했다.
물론 다른 여자들에 비해 희수는 특별한 입장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그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므로 특별한 선입견을 갖고 있을 수도 있었다. 또한 그런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음에도 그의 포로가 되어 있는 현실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가 그런 불완전한 모습으로 그녀를 사로잡았는지도. 그것까지도 동선의 매력으로 친다면, 아아, 그는 흠마저도 장점으로 소화하는 불가사의한 인간이 아닌가.
희수는 몇 번이고 여자들의 증언을 되풀이해서 읽으며 분석에 열중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실체는 잡히지 않았다. 카멜레온처럼 천변만화하며 시선을 교란할 뿐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상대가 누구였든 간에 동선은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상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진실은 그 혼자서만 알고 있겠지만 적어도 여자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희수도 그 점은 인정했다.
열일곱 번째의 여자였던가? 허순화라는 여자를 만났을 때 희수는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검찰의 명단에는 호텔에 근무하는 사무직 여성으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직접 만나 확인해 보니 그녀는 호텔 터키탕의 마사지걸이었다.
『기분 좋은데요. 저 같은 여자도 그분의 애인 명단에 올랐다니 영광이에요.』
허순화는 희수를 만난 자리에서 시종일관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희수의 질문에 망설임이 없었고, 오히려 보충설명까지 장황할 정도로 늘어놓았다. 희수는 그녀의 생경스런 어법과 노골적인 표현에 적잖이 얼굴을 붉혀야 했다.
『그 사람 연락처나 좀 주세요. 검찰 소환 이후로 연락이 끊어지는 바람에 뵙질 못했거든요.』
허순화는 아직도 그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는 표정이었다.
『뵐 때마다 하느라고 했지만 그분한텐 아쉬운 게 많았어요. 지금 만나면 끝내주게 해드릴 수 있을 텐데.』
허순화의 경우는 희수가 그 동안 만난 열여섯 명의 여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녀는 그의 맹목적인 신도였고 열렬한 팬이었다. 허순화는 스스로도 그렇다고 인정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라고 다짐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녀는 명단 속의 다른 여자들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는 듯 보였다.
희수는 그녀의 의지에 기가 질렸다.
『우리들 세계에도 엄격한 규칙이 있어요. 고객과는 철저하게 거래만 할 뿐이죠. 헌데 그분이 규칙을 위반했어요. 업주에게 들켰으면 진작에 목이 잘렸을 텐데 다행히 잘 감춰 온 거죠.』
하지만 허순화는 자신 있게 동선과는 거래가 아니라 사랑을 했노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희수가 구태여 묻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그와의 내력을 깡그리 털어놓았다. 희수가 내민 작가 명함에 고무되어 마치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허순화가 동선을 처음 만난 것은 R호텔 터키탕에 취직한 지 닷새쯤 되었을 때였다.
아직 신참티를 벗지 못해 손님이 방에 들어오면 마냥 불안하기만 했던 그녀는 그날 첫 손님을 맞았을 때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그의 겉옷을 받아 걸었다. 그녀는 그의 나신에 정성껏 비누를 칠해 씻겨 주었고, 마사지 침대로 안내한 다음 자신도 유니폼을 벗어 던졌다.
손님의 등에 올리브유를 바르고 그녀는 자신의 몸을 던져 보디 마사지를 시작했다.
후면 마사지가 끝나면 손님을 돌려눕힌 후 전면 마사지, 그리고 그의 말초신경을 자극해 하복부로 쓸어내린 다음, 하복부로 강하게 마찰시켜 사정을 유도하는 게 터키탕의 순서였다. 그녀는 배운 대로 충실하게 순서를 밟아 나갔다. 몸의 전면을 위로 향하고 누웠을 때, 이미 손님의 물건은 대공포처럼 잔뜩 화가 나서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리 쪽으로 활강한 다음, 풍만한 가슴으로 돌출한 그놈을 사로잡았다.
비록 닷새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동안 하루 평균 세 명 정도의 손님을 맞았으므로 도합 열댓 명의 물건을 지켜볼 수 있었다. 물론 수치심은 없었다. 터키탕 룸에 배정되기 직전에 한 달 가량 피나는 훈련을 했기 때문이었다. 강습기간 때 그녀는 신물이 나도록 사내들의 물건을 상대해야 했다. 그렇기에 허순화는 이제 준프로라고 해도 좋았다.
그녀는 가슴과 복부로 그의 물건을 희롱하다 쭈욱 미끄러져 올라갔다. 그러자 두 남녀의 얼굴이 맞부딪쳤다.
그녀는 또다시 세차게 허리를 돌려 하체를 압박했다. 그러나 치골 밑에서 그놈은 한사코 뭔가를 노리며 요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올리브 기름의 윤활작용을 이용하여 그놈을 압사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놈의 저항은 완강했다. 그 동안 상대했던 손님들은 대개 이쯤에서 진저리를 치며 나가 떨어졌는데, 이번 손님은 영 만만치가 않았다.
제 솜씨가 시원찮나 보죠?
그녀가 허리질을 중단하고 넌지시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손님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허순화는 별수없이 두 손과 입을 사용해 그놈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입 안이 얼얼할 정도로 열심히 노력을 했는데도 그놈은 여전히 꼿꼿하게 머리를 곤두세운 채 비웃고 있었다.
그녀가 맥이 빠져 잠깐 숨을 돌리고 있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난 그런 식으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체질이야.』
『그럼 어떡해야 만족하시겠어요?』
『글쎄, 뭘 요구하는지는 나보다 그놈한테 물어 보는 게 더 빠르지.』
허순화는 손님이 뭘 원하는지를 그제사 깨달았다. 하지만 R호텔 터키탕의 규칙은 마사지걸이 고객과 섹스를 나눌 수 없도록 하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밀실에서 홀라당 벗은 남녀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러므로 규칙이라는 것은 명분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진해서 규칙을 엄수할 수밖에 없었다. 규칙이 깨졌을 때 돌아오는 소문이 무서운 까닭이었다. 그 터키탕에서 누구누구와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손님들은 너도나도 공평한 서비스를 받겠다고 우겨댈 거였고, 그렇게 되면 호텔 터키탕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윤락과 매춘의 소굴로 전락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사지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직접적인 섹스 행위만큼은 절대 삼갔다.
허순화는 난감했다. 손님의 물건은 계속 화가 나 있는 상태인데 도무지 그놈의 울분을 풀어 줄 재주가 없었다. 재주가 없는 것도 그렇지만 우선 자존심이 상했다.
그 동안 그리 많지 않은 손님들을 상대했지만, 그 모든 고객들이 자신의 농염한 육체 앞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고, 맹렬하게 폭발하지 않았던가. 사내들의 심벌이 반사적으로 팽창할 때마다, 그들의 욕정이 펑펑 새어나올 때마다 그녀는 묘한 쾌감을 느끼곤 했었다.
스물셋의 나이가 되도록 이처럼 자신의 몸에 자신감을 가져 본 기억이 따로 없었다. 그 감정이 아마 나르시시즘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그러면서도 수입은 전직장이었던 편물공장보다 훨씬 넉넉했다. 허순화는 터키탕에 들어온 걸 백 번 잘한 선택이었노라고 자위하기까지 했다. 『아저씨, 그럼 다른 여자들한텐 어떤 서비스를 받았죠?』
그녀는 순진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정말이지 다른 여자들이 어떻게 그를 만족시켰는지 궁금했다.
『터키탕은 처음이야. 그런데 생각보다 시원한 맛이 없군.』
그가 은근히 그녀의 비위를 건드렸다. 경력은 짧아도 프로페셔널의 긍지를 가지고 있는 그녀가 그런 비아냥거림에 고개를 숙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다시 올리브유를 손님의 몸에 뿌리고 리턴 매치를 시작했다. 온몸에 땀이 줄줄 흘렀다. 사내의 심벌도 곧 부러질 것처럼 최대한 솟구쳤다.
그 순간 사내의 손이 그녀의 급소로 쳐들어왔다. 그녀는 움찔하면서 방관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내의 성감이 증폭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분위기가 이상하게 반전되었다. 누가 누구를 마사지하고 있는지, 누가 더 성감에 허우적거리고 있는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뒤엉켜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그의 밑에 깔려 버렸다. 그는 과격하게 그녀의 두 다리를 양 옆구리에 갖다붙였고, 사나운 기세로 돌진해 왔다. 그리고 아차 하는 순간 그의 심벌이 그녀의 급소에 진입해 버렸다. 잔뜩 발라놓은 올리브유가 남녀의 결합을 한층 쉽게 만들어 준 주범이었다.
그는 곧바로 엉덩이를 비틀어 사내의 동작을 방해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한 수 앞질러 가며 그녀의 의도를 분쇄했다. 그의 심벌이 몸 깊숙한 곳으로 뿌리를 내리자 그녀는 별수없이 저항을 포기했다. 대신 시체처럼 냉정하게 드러누운 채 그를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이건 강간이야!
그녀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카드도 오래 가지 못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사이엔가 육체는 그의 장단에 허물어지고 있었던 거였다.
안 돼, 절대로 이런 모습을 보여선 안 돼! 참아야 해.
허순화는 이를 악물고 침대 모서리에 손톱을 박았다.
지렛대의 중심을 확고부동하게 잡아 놓고 난 사내가 리드미컬한 질주를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보폭에 따라 흔들렸다.
고마워, 당신의 소중한 곳을 내게 열어 줘서.
사내가 갑자기 동작을 정지하고 말을 걸어왔다. 그러자 허순화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그의 등을 껴안았다. 그래도 그가 움직이지 않자 그녀가 다급하게 아래쪽에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움직임에 가속도가 붙을 때쯤 그가 느닷없이 지렛대를 뽑아 버렸다. 그녀는 벌떡 상체를 세워 그를 껴안았다. 그는 태연자약하게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녀가 허겁지겁 그의 몸 위로 올라가 휘청거리는 지렛대를 부여잡고 자신의 중심에 꿰어 맞췄다. 그는 누운 채 그녀 몸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과 전신의 성감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자세였다.
그날, 그녀는 부끄럽게도 자신의 몸짓에 의해 몇 번이나 절정을 경험하고 말았다.
그 희한한 고객이 바로 이동선이었다. 이동선은 가끔씩 허순화를 찾아왔다. 물론 그때마다 허순화는 규칙을 위반해야 했다. 그는 정해진 수고료보다 훨씬 많은 팁을 놓고 갔다. 비번일 때엔 그의 오피스텔까지 달려가 서비스를 해준 적도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무시한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곳을 열어 준 여성이므로 늘 감사하고 있다는 인사를 했다. 허순화는 그를 만날 때 비로소 사람다워진 자신의 모습과 만날 수 있었다. 동화조경연구소.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점에서 오연화는 일에 쫓기고 있었다. 하수지가 관장했던 극장건물의 프로젝트를 계약대로 진행하기 위해 직접 총대를 멘 거였다.
그녀의 일을 돕기 위해 미대 출신 후배들이 들어와 사무실은 아연 활기가 넘쳤다. 하수지의 돌연한 죽음이 사무실 분위기를 살려 놓은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모처럼 사람들과 어울려 일다운 일을 하고 있는 오연화의 얼굴에도 전에 없던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후배들이 점심시간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물들을 설치해 사무실 분위기를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어때요, 회장님이 들어오시면 깜짝 놀라시겠죠?』
다섯 명의 신입사원 중 가장 막내인 한성희가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오연화에게 환경미화작업이 끝났음을 알렸다.
『그래, 기뻐하실 거야. 이제 어서들 업무 끝내. 회식이 있으니까.』
『회장님이 한턱 내시는 건가요?』
한성희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새로 들어온 수습사원들은 연구소의 실제 소유자인 이동선을 자기들 맘대로 회장님으로 호칭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척 회장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했다. 입사한 지 보름이 넘도록 창업주와 상견례를 나누지 못한 탓이었다.
오연화도 자연스럽게 그들 앞에서는 이동선을 회장님이라 불렀다. 자신이 소장직을 맡고 있었으므로 그보다 높은 호칭이 어차피 필요했던 참이었다.
『한 가지만 부탁할게. 회식 때 회장님한테 불필요한 질문들은 가급적 삼가길 바래. 요새 심기가 좀 불편하시거든. 그런다고 눈치보라는 말은 아니야. 회장님도 전혀 그런 내색을 보이지는 않으실 거야. 자연스럽게 대하되, 그분의 신상에 관한 질문 같은 것만 자제해 달라는 거야.』
그녀의 말에 모든 후배들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오연화는 주의사항을 전하고 나서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럭비공처럼 튀는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미술학도들이 행여나 이동선을 귀찮게 하지는 않을까 싶어 미리 못을 박아 둔 거였지만 그들의 반응을 보니 괜한 소릴 했나 싶었다. 그들의 눈빛엔 오히려 더 큰 호기심이 반짝이고 있었으므로.
아니나다를까 커피 심부름을 자청해 쟁반에 받쳐 온 한성희가 바로 떠나지 않고 머뭇거렸다.
『왜?』
『저어……소장님, 요즈음 회사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왜 그런 생각을 했지?』
『방금 소장님이 회식 때 불필요한 질문을 삼가라고 지시하셨잖아요. 극장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작가분의 사고 소문도 그렇고 괜히 불안해서요.』
『별 걱정을 다하는구나. 난 지시를 내린 게 아니라 부탁을 한 거야. 하수지 씨의 사고는 안됐지만 우리 회사와는 무관한 일이고. 이제 해명이 됐어?』
『회장님은 총각이시라면서요?』
『내가 그래서 부탁을 한 거야. 너처럼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쓸데없는 소릴 할까 봐.』
연화가 정색하며 꾸짖었다. 그래도 한성희는 애교 있는 웃음으로 물고 늘어졌다.
『죄송해요. 하지만 궁금한 걸 억지로 참는다는 게 더 이상하잖아요. 회장님의 기본적인 신상을 알려 주셔야 이따 실수를 하지 않을 거 아녜요?』
『얘가 정말! 그런 쓸데없는 데 아까운 두뇌 놀리지 말고 아이디어나 개발해,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
연화의 서슬에 한성희가 머리를 긁으며 돌아갔다. 연화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커피를 음미했다.
다섯 명의 후배들 중 가장 눈여겨봐야 할 요주의 인물이 바로 성희였다. 남자 두 명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여자 셋 중에 성희를 제외한 두 사람은 워낙에 성실하고 일밖에 모르는 일벌레들이었다.
물론 한성희도 일에는 억척스런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애들이 일벌레라면 그녀는 개똥벌레 같이 반짝이는 존재였다.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스타일이어서 맡은 일도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재주꾼이었다.
오연화는 그들을 선발할 때 일에 대한 정열을 중요시했다. 특히 여자의 경우, 용모보다는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프로근성을 높이 샀다.
한성희는 면접한 후배들 중에서 가장 돋보였다. 재치와 애교를 겸비했고 무엇보다도 성취 욕구가 끓는 아이였다. 면접점수로 따진다면 단연코 한성희가 최고점이었다. 그러나 오연화는 그녀를 맨 나중에 선택했다. 그러니까 입사 우선순위에 의거하면 한성희는 꼴찌로 턱걸이한 셈이었다.
연화가 그녀의 낙점을 망설인 이유는 첫인상의 여운 때문이었다. 한성희와 처음 대면했을 때 오연화는 괜히 가슴이 철렁했다. 앳된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보통 독특한 게 아니었다. 유달리 짙은 눈썹과 빛을 발하는 눈동자, 특히 촘촘하게 뻗어나온 속눈썹이 어찌나 길고 무성한지 그 위에 볼펜 하나를 올려 놓아도 거뜬할 것 같았다.
그녀가 씽긋 미소를 지을라치면 그 속눈썹이 확실하게 기능을 발휘했다. 성희는 속눈썹 하나만으로 미소를 연출해 내는 장기를 가지고 있었다.
두툼한 코트를 걸친 상태였지만 연화는 한눈에 성희의 몸매를 읽을 수 있었다. 작은 키에 약간 통통한 스타일이었다. 체형의 불리한 여건을 한성희는 얼굴로 충분히 커버하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귀엽고 신비한 그녀의 미소가 오연화한테는 문제였다. 같이 일을 하고 싶긴 한데 저 미소가 언젠가 제값을 하고 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 예감의 뿌리는 동선의 존재로부터 돋아난 거였다. 진흙탕 같은 슬럼프에 빠져 있는 이동선의 소생을 위해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려는 게 오연화의 충정인데, 그 일을 돕기 위해 회사에 들어온 여자아이가 혹시나 동선의 눈을 흐리게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결코 기우(杞憂)는 아니었다.
오연화는 그 동안 동선의 곁에 있으면서 많은 것을 두눈으로 지켜보았었다. 그녀는 그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그가 보고 만지고 느끼는 모든 것을 그녀도 비슷하게 느껴 왔었다. 그녀가 ‘저 여자다’ 싶어 돌아서 보면 그 여자는 틀림없이 동선의 오피스텔로 따라가고 있었다.
오연화는 그렇다고 그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 여자들을 질투하지도 않았다. 그런 광경들이 하도 반복된 탓에 밥먹고 숨쉬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한 사무실에서 일을 해야 하는 멤버만큼은 엄격한 통제가 필요했다. 그것이 동선을 위하는 길이기도 했으므로.
파인힐에서 한식 스테이크 요리로 회식을 마친 동화조경연구소 멤버들은 처음 만난 회장님 이동선에게 2차를 졸라 댔다. 동선은 흔쾌히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2차는 오연화가 단란주점으로 결정했다.
룸에 들어가자마자 노래경연이 벌어졌다. 연화는 동선의 맞은편에 앉아 시종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디스코텍을 가자, 포장마차를 가자 의견들이 분분했지만 단란주점으로 선택한 건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다.
연화는 파인힐에서 상견례와 함께 스테이크를 먹는 동안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동선이 새로 들어온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금세 친해지는 걸 보고 마음은 놓였으나 한편으론 불안했다. 다행히 멤버들은 연화의 당부를 잊지 않고 불필요한 언행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2차에서는 장담할 수 없었다.
디스코텍을 가자니 블루스 타임이 거슬렸다. 멤버 중 누구라도 동선과 플로어에 나서면 손을 맞잡게 될 거였고, 그의 달콤한 리드에 넋을 빼앗기고 말 게 분명했다.
포장마차는 더 불안했다. 디스코텍처럼 신체적 접촉의 기회는 없겠지만, 소주 몇 잔 들이키다 보면 젊은 아이들의 혀가 가만 있지 않을 거였다.
『소장님 차례예요.』
한성희가 마이크를 내밀며 채근했다.
오연화는 주저 없이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가 그녀의 유일한 애창곡이었다.
그녀가 노래의 후반부를 허밍할 때 동선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팡파르가 울렸고 화면에 92점을 알리는 자막이 떠올랐다. 멤버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 중 하나가 연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와, 감동적인 열창이었어요. 하지만 92점은 따라지 한끗 밖에 되질 않네요. 참가비를 내셔야겠습니다.』
멤버들은 노래점수로 내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높은 점수보다는 두 자리 숫자를 합산하고 남은 끗발의 순위를 가리는 게임이었다.
룸 안의 참가자가 모두 한 곡씩 부르고 난 뒤 점수를 비교해 보니 88점을 기록한 장정임이라는 여자아이가 수위를 차지했고, 그에 따라 1인당 만원씩 걸었던 총상금 7만원을 독식했다.
『자, 이제 단식이 끝났으니까 복식 차례입니다. 또 참가비 만 원씩 부과하겠습니다. 우리가 모두 일곱 명이니까 한 사람이 남는데요. 그 사람은 참가비를 면제해 드립니다. 그냥 놀고 지켜보면 되는 거죠. 여섯 명이 세 팀으로 두 명씩 짝을 지어 듀엣곡을 부르고요. 아까와 마찬가지로 가장 고득점 팀이 상금을 차지하는 겁니다. 우승한 듀엣은 3만원씩 나눠가지면 되겠죠? 그럼 추첨을 하겠습니다.』
들어오는 순간부터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회를 맡아 분위기를 리드해 오던 남자애가 언제 준비해 두었는지 꼬깃꼬깃 몇 겹씩 접은 종이쪽지 일곱 개를 테이블 위에 쏟아 놓았다.
『기왕이면 남녀가 혼성으로 듀엣이 되는 게 낫겠죠?』
그가 쪽지 중 네 개를 골라서 여자들에게 내밀었다.
『남자가 셋, 여자가 넷이니까 천상 여자들 중에서 한 명이 제외되겠네요. 자, 펴 보세요.』
여자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쪽지를 펼 동안, 남자들도 하나씩 골라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난 아무 표시도 없는데?』
연화가 빈 쪽지를 들어 사회자에게 보여 주었다.
『하하, 그게 꽝이라는 겁니다.』
연화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쪽지에 적혀 있는 기호에 따라 짝을 찾았다.
동선의 파트너는 막내 한성희였다. 성희는 동선의 옆자리로 이동하면서 깡총깡총 뛰었다. 퍽이나 기쁜 모양이었다.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가사집을 뒤적이는 커플을 지켜보며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새끼를 치며 불어나는 거였다.
차례가 돌아오자 동선과 성희는 ‘그대 먼 곳에’를 불렀다. 그의 저음과 그녀의 하이톤이 절묘하게 어울렸다. 둘은 노래를 부르면서 눈짓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먼 곳에 있지 않아요.
가까운 곳에 있어요∼.
노래의 첫 소절처럼 두 남녀는 너무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다.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서웠다.
일권은 강변 오피스텔 맞은편의 공중전화 박스에서 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이어서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삼십 분이 다 되도록 그 안에서 죽치고 서 있었다.
잠시 후,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지프 한 대가 들어왔다. 일권은 전화를 거는 척하며 지프의 동태를 살폈다.
지프에선 한 쌍의 남녀가 내렸다. 일권은 그 남자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안드로메다에서 눈도장을 찍은 기억이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남녀가 오피스텔 현관으로 들어가자 일권은 고개를 들어 건물의 상층부를 올려다보았다. 예상대로 11층 동선의 방에 한참 뒤 불이 밝혀졌다.
그는 불빛을 확인하고 나서 상미의 카폰에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방금 그가 도착했어요. 어떤 여자와 함께.』
- 어떻게 생긴 여자던가요?
『키가 작은 편이고 단발머리였어요.』
- 옷은 뭘 입었죠?
『베이지색 반코트』
- 이상하군요. 여기서 떠날 땐 긴 머리에 쥐색 재킷을 입은 여자였는데. 키도 그 사람과 비교해 결코 작지 않았고…….
『사람이 바뀌었다는 겁니까?』
- 아마 그런 모양이에요. 거기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겠어요? 제가 갈 때까지만요. 지금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으니까 십 분도 안 걸릴 거예요.
『그러죠 뭐.』
일권은 전화박스에서 나와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할일을 끝낸 상태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건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미니 사이즈의 양주 한 병을 사들고 나온 그는 편의점 입구에서 마개를 따고 박카스 마시듯 단숨에 털어 넣었다.
술기운이 전신에 홧홧하게 감돌 무렵, 상미의 뉴그랜저가 나타났다.
상미는 차문을 열어 주며 타라는 손짓을 했다.
『추운데 고생하셨겠네요. 오래 기다렸어요?』
『삼십 분 정도.』
『해우소에서 여기까지 온 시간을 포함하면요?』
『한 시간 남짓 되겠죠.』
『신사동에서 마포까지 오는 데 정확히 이십 분 걸렸거든요. 그 동안에 감쪽같이 여자가 바뀐 거예요.』
일권은 상미가 무슨 계산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이동선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추리소설에 나오는 탐정처럼 변해 있었다.
『그 사람 회사를 알아냈어요. 오늘 직원들끼리 회식을 하더라구요. 그 사람의 눈을 피해서 파인힐 구석에 앉아 그들이 하는 대화를 전부 엿들었어요. 직원들이 회장님이라고 부르더군요. 무슨 조경연구소 같은 회사를 운영하나 봐요. 그 사람 밑에 서른 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가 있더군요. 연구소 소장으로 사무실을 관리하는 사람 같았어요. 2차로 단란주점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간단하게 놀고 나왔어요. 그리고 곧장 그 소장이란 여자하고 연구소 건물로 들어가서 함께 지프를 타는 것까지 제가 보고 왔거든요. 도저히 그 차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 일권 씨한테 전화한 거였어요.』
『내가 본 여자는 스물서너 살쯤 돼 보이던데요?』
『그래요, 단발머리에 베이지색 반코트라고 했죠? 그 직원들 중에 한 여자예요. 가정을 해본다면 소장이라는 여자를 어디까진가 태워다 주고, 다른 장소에서 그 여직원과 다시 만난 게 분명해요. 내가 듣기로는 소장을 빼놓고 모두 새로 들어온 직원들 같았어요. 그러니까 그 중 한 여자와 오피스텔로 동행한 거죠. 회장님과 신입사원이 소장의 눈을 피해서 감쪽같이 눈을 맞춘 거죠. 지금쯤은 배꼽까지 맞추고 있을지도 몰라요.』
상미는 자신의 추리력에 스스로 도취해 한 편의 드라마를 쓰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그럼 하루 종일 저 사람 뒤를 밟았다는 겁니까?』
『저 사람 생리까지도 정확히 파악했어요.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아침에 자는 올빼미 체질이죠. 기상시간은 정오 무렵. 오후에 어슬렁어슬렁 기어나와 운동을 해요. 월요일과 목요일은 인도어 골프장, 화·금은 스쿼시 클럽, 수·토는 수영장, 나머지 일요일은 한강 자전거 전용도로에서 사이클을 타요. 그렇게 체력관리를 철저히 하니 건강할 수밖에요. 거의 매일 여자와 만나 그 짓을 즐기더라구요. 정말 사람 같지 않았어요.』
『그가 즐기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는 말입니까?』
『그럼요, 얼마나 아슬아슬했는 줄 아세요?』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스릴 만점이잖아요.』
『스릴을 즐기려고 미행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지금.』
『희수 때문에 시작했죠. 그 사람의 가면을 벗기기 위해서. 근데 솔직히 미행하는 일도 재미가 있더라구요.』
『적당히 정도를 지키세요. 무슨 일이든 꼬리가 길면 밟히게 마련이니까요. 그쯤 해도 이동선의 실체는 밝혀진 거 아닙니까? 프리섹스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저 사람은 너무 심해요. 정신병을 앓고 있거나 대단한 악취미의 소유자, 둘 중 하나임에 틀림없어요. 희수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충고를 해주세요, 상미 씨가.』
『이미 그런 단계는 초월했어요. 희수가 요새 뭘 하고 다니는지 아세요? 이동선과 관계한 여자들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있어요.』
『조사를 하다니요?』
『방송국으로부터 여자들의 명단을 받았대요.』
『그럼 희수가 방송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모르죠. 방송으로 복수를 하려는 생각인지, 아니면 그냥 여자들한테 관심이 있어 그러는지 더 두고 봐야 알겠죠.』
『복수를 생각할 희수가 아니지만, 정 분하다면 나한테 정식으로 복수를 부탁하라고 전해 줘요. 걔 부탁이라면 청부살인이라도 맡아 줄 테니까.』
『제 생각엔 후자 쪽인 거 같아요. 걔는 글을 쓰는 작가잖아요. 사람 만나는 것도 재산이고 또 이런 황당한 경험도 훗날 작품 소재로 써먹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상미가 말을 끝내고 차를 움직이려다 갑자기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저기 전화박스에 그 여자가 있어요. 아까 신사동에서 이동선의 지프를 타고 떠났던 여자.』
일권도 목을 빼고 앞쪽을 보았다.
과연 전화박스 안에서는 쥐색 재킷을 걸친 여자가 다이얼을 누르고 있었다.
『언제 왔을까요? 일권 씨와 대화하느라 보지도 못했어요.』
『복잡해지네요. 흔히 말하는 삼각관계 구도 아닙니까?』
『이동선한테 삼각관계를 갖다붙이는 건 어불성설이죠, 삼각이 아니라 그 사람은 삼백각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으니까요.』
『저 여자도 그의 오피스텔로 들어갈까요?』
『두고 봐야죠.』
상미는 마른침을 삼키며 흥미진진한 눈으로 전화박스를 지켜보았다. 전화박스 속의 여자는 멀리서 봐도 꽤나 심각한 표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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