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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드림보트-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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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는 특별한 약속이나 일도 없으면서 늦게까지 방송국 근처에서 얼쩡거리다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오늘따라 오피스텔의 복도는 썰렁했다. 아무도 없어 오히려 더 비좁아 보이는 여덟 평짜리 집필공간. 전망 좋은 혼자만의 집필실을 갖기 위해 엄마와 무던히 다퉜고 끝내 혼자의 힘으로 마련한 방이었다.
486 컴퓨터와 잉크젯 프린터, 팩시밀리, 비디오, 오디오 등 첨단 메커니즘을 세팅하고 붉은 벽돌과 목재판자로 만든 책장 가득 손때 묻은 책들을 쌓을 때만 해도 세상 부러울 게 따로 없었다.
또 아무 때나 물만 부으면 향기 짙은 원두커피가 배어 나오는 커피 메이커. 그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움켜쥐고 창밖을 내려다보는 사색의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재산이었다.
흔히 오피스텔 장기 입주자들이 겪는다는 오피스텔 우울증이라는 걸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철문 하나만 걸어 잠그면 번잡한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독립되어 자유로운데 왜 우울증이니 조울증이니 하는 사치스런 병을 얻는가 말이다. 희수는 그런 말을 하는 입주자들을 의아하게 보곤 했었다.
독신의 자유를 위해 제발로 오피스텔에 들어와 놓고 고독 타령을 한다는 건 자유의 참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희수는 비로소 이웃들의 하소연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부와의 통로라고는 쇠로 된 출입문과 조그만 창문밖에 없는 이 고립된 공간은 어찌 보면 감옥이었다.
불안감과 자기 연민으로 맞는 밤이 얼마나 혹독한지, 이따금 어둠을 질주하는 차소리는 또 얼마나 스산한지, 집 밖에서는 세상이 다 내 것인 듯 펄펄 뛰다가도 집에 돌아와 갇히면 세상이 나를 버린 듯 한없이 처량해지는지, 그런 것들이 불면으로 이어져 희수는 겨울 초입의 문턱에서 어지간히 시달리고 있었다.
그 사이 동선에게서 네 차례 전화가 걸려왔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피스텔에 있는 동안에도 자동응답장치로 돌려 놓았다.
희수 씨, 들어오는 대로 연락해 줄래?
동선의 메시지는 늘 간결했다. 그러나 그 간단한 한마디의 메시지는 날카로운 면도날이 되어 희수의 상념을 수천 수만 가닥으로 난도질하곤 했다.
그녀는 되풀이해서 몇 번이고 그의 메시지를 들었다.
들을 땐 감미롭지만 듣고 나면 소름이 쫘악 끼치는 목소리.
희수는 그의 목소리에 연금되어 있었다.
이동선의 실체를 알고 난 후 희수는 차라리 허무했다.
그가 한없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원망이나 경멸이라는 감정은 본디 받는 대상보다 품는 주체한테 더 큰 상처를 안겨 주는 법인지, 그녀는 고통스러웠다.
친구 상미에게 하소연을 했고 상미의 경우도 동병상련임을 확인했어도 시원한 게 없었다. 삼류 대중소설, 싸구려 주간지, 펄프 픽션의 한 면을 장식하는 퇴폐적 연애를 직접 연출한 자신이 미울 따름이었다.
물론 스스로 변명하기도 했다.
내가 겪은 남자는 때묻지 않은 자연인 이동선이고, 우린 아무런 조건 없이 투명한 사랑의 열정을 불태웠을 뿐이야. 그의 전력(前歷)이 무슨 상관이람.
정말 사랑의 순간을 회상할 때면 털끝만큼의 후회도 없었다. 독특한 저음의 음성, 부드러운 손길, 우수 어린 눈빛과 리드미컬한 몸짓. 그와 만나기로 한 날은 하루 종일 그런 감각들을 갈고 닦으며 설레곤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합리화 작업의 뒤끝엔 늘상 허무가 매달려 있었다. 분노나 경멸, 증오 따위의 감정들이야 삭히면 그런 대로 치유가 되는 거였지만, 정말 허무라는 건 대책 없는 최악의 감정이었다. 삭혀지지도, 진정되지도 않는 심연의 바다와도 같은 허무의 무게.
애당초 그와 맺어지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사랑의 절차나 구속 같은 건 없었다. 그녀 자신이 늘 다짐해 왔던 것처럼 첫사랑은 불꽃 튀는 충동의 용광로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용해되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왜 그의 정체를 알고 난 후 절망해야 했을까?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될 사랑의 행로를 기대했단 말인가?
그러나 결혼이라든가 열애 같은 스케줄을 기대한 적은 추호도 없었다. 갑자기 그를 만난 것만큼이나 그와의 관계는 우발적이었고, 뒤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불붙어 버린 거였다.
그렇다면 이토록 뼈저린 상실감과 허무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아, 그게 혹시 사랑의 불공평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순결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심신의 모든 문을 아낌없이 열었다. 헌데 그는 유리창 하나만 열고 나머지 문은 꽁꽁 닫아 두었던 게 아닐까? 막말로 얘기하자면 그는 수십 수백 개의 창문을 갖고 있는 거였다. 창 하나에 여자 하나씩 걸어 두고 상황에 따라 마음 내키는 창문을 골라 열었던 것이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불공정거래였다. 한 인간의 영혼과 에너지 전부를 연소시켜 사랑해도 부족한 게 남녀의 연정인데, 아무에게나 한 움큼씩 집어 줄 수 있는 사랑이라면 결코 사랑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걸 사랑이라 부른다면 사랑은 동전만한 값어치도 없는 것. 희수는 자신이 바친 순수한 열정이 그토록 싼값에 자리매김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허무했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미친 개한테 물린 셈치고 깨끗이 망각해 버려야 하나? 아니면 철저하게 물고 늘어져 불공정거래를 공평한 계산으로 맞추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모든 의지를 접어 둔 채 운명의 물결에 휩쓸려 가야 하나?
그 어느 쪽의 결정도 쉽지 않은 딜레마의 첩첩산중이었다.

『희수의 남자에 대해서 의논할 게 있어요.』
상미는 해우소에 들어서자마자 일권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녀의 초저녁 방문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실내엔 한 팀의 술손님들이 멍석을 점거한 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주방쪽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희수가 곤경에 빠졌어요. 이런 얘기 함부로 하면 희수한테 욕먹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일권 씨밖엔 의논할 상대가 없어서 찾아온 거예요.』
『무슨 일인데요? 희수가 나한테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저번에 만났던 그 남자 있죠? 이동선이라는 희수 파트너.』
『그런데요.』
『그 사람 인상이 어땠어요?』
『글쎄, 샤프해 보이던데요.』
『저도 깔끔한 인상을 받았었어요. 근데 아주 질이 나쁜 바람둥이였다면 믿겠어요?』
『그런 사람 같진 않던데?』
『그러게 말예요. 오죽했으면 희수처럼 단단한 애가 넘어갔겠어요.』
『그 사람을 악한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뭐죠?』
『희수가 그날 그 사람 집에 가서 직접 확인을 했다는 거예요.』
『이상하군요, 그가 일부로 자신의 비밀이나 치부를 공개할 리는 없을 텐데…….』
『물론이죠, 희수가 우연히 그 사람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대요.』
계속 이어지는 상미의 설명에도 일권은 도무지 수긍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녀만 쳐다보고 있었다.
『희수를 만나 직접 얘기를 들어 봐야 판단이 설 것 같아요.』
『걔도 일권 씨한테 의논을 할 거예요. 하지만 희수는 지금 제정신이 아녜요. 아무 일도 못 하고 허우적거리는 상태니까요. 우리가 알아서 뭔가 도울 만한 방도를 찾는 게 걔한테 부담이 덜하지 않겠어요?』
『어떤 방법이 좋겠어요, 상미 씨 생각에는?』
『우선 그 사람을 확실하게 벗겨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정말 불순한 의도로 희수에게 접근했다면 응징해야겠죠. 미행을 하든 잠복을 하든 그의 실체와 행각을 관찰하는 거예요. 가능하다면 그의 악행에 대한 증거물을 확보하는 것도 좋겠죠. 최악의 경우 법의 심판에 맡겨야 할지도 모르니까 말예요.』
그렇게 전략을 세우는 상미의 눈빛엔 투지와 계략, 모험심과 호기심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었다.
『남녀의 문제를 법에 호소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요. 법이라는 렌즈는 어떤 경우에도 일관된 초점 하나만으로 투시하고 마니까요.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동선이라는 사람은 지금부터 내 타깃이 됐다는 겁니다. 무슨 이유로든 희수를 아프게 했다면 절대 좋은 사람은 아녜요. 내가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일권이 이를 악물었다. 그 여파로 관자놀이의 힘줄이 꿈틀했다.
그로부터 삼십여 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상미는 떠났다. 아무 일도 치르지 않고 떠나간 것은 이례적이었다.
일권은 주방의 간이의자에 앉아 마음을 추슬렀다. 태풍은 폭우와 해일을 몰고오는 법! 최근 들어 몰아닥친 비바람은 그를 자꾸만 빈 들로 내몰고 있었다. 피할 곳도 없고 가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는 몸 하나로 그 빈 들을 가로지르는 심정이었다.
소미의 아파트에서 들은 은비의 행적은 충격이었다. 소미가 은비를 스카웃한 시기는 정확히 7년 전의 겨울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은비가 대학생으로 마지막 맞은 겨울, 종강과 졸업식 사이의 시점이었다. 그 시기가 은비 집안의 몰락과 일치하고 있다는 걸 볼 때, 소미의 말은 틀림이 없을 것이었다.
여대생 호스티스라는 말을 더러 들어 본 적은 있었지만, 설마 은비가 재개봉관 극장에 붙은 영화제목의 주인공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일권은 그때 소미에게 넌지시 물었었다. 그녀의 말을 기정사실로 인정한 상태에서 보다 구체적인 은비의 생활을 알고 싶었던 거였다.
그런 델 나갔다면 남자들과도……?
그렇게 운만 떼었는데 눈치 빠른 소미는 시원시원하게 해명을 해주었다. 지금껏 은비를 찾아다녔으면서도 그녀의 생활을 몰랐다면 지금이라도 확실히 알아듣고 판단하라는 투였다.
나도 그렇고, 여기 있는 후배들도 그렇고, 은비 역시 마찬가지지만, 이쪽 세상에 발을 걸치는 순간 새로운 도덕관으로 재무장했을 거예요. 이런 일을 하겠다는 결심 자체가 직업의식의 스타트 라인이고 동시에 순진한 처녀로서 데드 라인을 넘는 거 아니겠어요? 한 가지 더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은비는 다른 애들에 비해 적응력이 뛰어났다는 점이에요. 유달리 예뻤고 화술도 빼어나 고객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지요. 솔직히 그런 보석을 건졌다는 게 장삿속으로 따지면 횡재나 다름없었어요. 하지만 언니라는 입장에서 볼 때 나도 안타까웠던 기억이 나네요. 저렇게 아름다운 애는 뭘 해도 한 몫을 할 텐데……. 그런 아까운 생각이 가끔 들더라구요. 아무튼 은비는 생각보다 쾌활하게 잘 적응했어요. 그래서 혹시 경험자 아닌지 의심했던 적도 있었을 만큼요. 남자관계는 제가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거겠죠? 예쁘면 예쁜 만큼 값어치가 있는 거고, 그 값만큼 받을 기회도 많고, 받으면 또 지불해야 하는 것도 있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소미는 장화란과 은비의 관계까지 밝혔다.
화란이는 나와 동업자 사이였어요. 걔가 나보다 사업수완이 뛰어났었죠. 손 큰 손님도 많았고, 거느린 후배들한테도 참 잘해 줬어요. 걔랑 의기투합해서 지긋지긋한 마담생활 정리하고 가게를 냈어요. 그런데 장사가 될 만하니까 건물주가 농간을 부리더라구요. 이 핑계 저 핑계로 가계를 빼라는 거예요. 그래서 딴 건물로 옮겼는데, 그때 타격이 컸어요. 실내장식비와 권리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거든요. 아무튼 화란이랑 가게 세 곳을 전전하면서 고생 많이 했었어요. 손님은 늘상 바글바글한데 이상하게 월말 결산을 해보면 남는 게 없더군요. 외상이 지천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어요. 우리가 미처 거기까진 보질 못했죠. 술집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우선 손님들의 외상심리와 그걸 제대로 이용할 줄 아는 상술, 또 제때 받아낼 줄 아는 능력이 필수조건이거든요. 분기마다 가득 쌓이는 외상장부의 사인지를 볼 때면 정말 미쳐 버리겠더라구요. 그렇게 고전을 거듭하다가 우리들 스스로가 파산선고를 내렸죠. 그때 같이 일하던 애들하고 셔터 걸어잠그고 엉망으로 마셨어요. 밤새 울기도 많이 울었죠.
그래서 화란이랑 갈라섰는데 그때 많은 애들이 화란이를 따라 갔어요. 은비도 내 그늘에 있던 아이였는데 미안하단 말 한 마디 없이 화란이한테 붙어 버리더군요. 하지만 아이들한테 섭섭한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그 상태에선 따르는 아이들이 없는 게 훨씬 홀가분했으니까요. 나는 서너 명만 데리고 나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새끼마담 일 말이죠. 하지만 화란이는 작심하고 일을 더 벌였던 모양이에요. 휘하에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을 거예요. 그렇게 억척스럽게 뛰다 죽었어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지만 선생님께서 은비를 계속 찾을 의향이시라면 죽은 장화란을 다시 만나는 길밖에는 없어요.

소미를 만나고 돌아온 후 일권은 식욕을 잃은 채 묵혀 두었던 원고 뭉치를 펼쳐 읽고 또 읽었다.
자신이 열망하고 그리워하면서 빚어 놓은 원고 속의 주인공, 고은비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 없는 가공의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은비의 베일이 하나씩 벗겨지면서 그녀를 만나고 싶은 열망은 더해만 갔다. 오래도록 그가 구축해 놓은 은비의 형상은 그 어떤 추문이 덧씌워지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쨌거나 은비는 살아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건 그녀가 살아 있다면 일권은, 일권의 청춘은 아직 의미가 있는 것이었고, 막막하게 혼자서 벌여 온 은비 찾기 게임도 지금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냐! 가도, 가지 않아도 젬병 같은 승부가 기다리고 있을 게임.
그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6년 동안 숱하게 겪었던 출정식. 그러나 이번만큼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어쩌면 운명을 관장하는 신이 열어 준 마지막 기회인지도 몰랐다.
그런 와중에 상미가 찾아왔고 희수의 남자에 관해 충격적인 소식을 들려 주었다. 그것은 혼란이었다.
영업이 끝난 후 문을 잠그면서 그는 생각했다.
이제 영원히 해우소의 문을 내려야 하는 게 아닐까?

- 은영이에요. 전화하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는데…… 걸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저…… 지금 병원 앞이에요. 산부인과는 생전 처음이라 겁이 나서 못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또 그 수술을 하려면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는데 난 지금 혼자예요. 거부를 당할지도 모르겠네요. 아저씨……, 지금 내 기분 아시겠어요?
자동응답 테이프는 그 대목에서 삐이 소리를 내며 헛돌았다.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서 스위치를 누르는 손가락은 여자의 것이었다.
연화는 조심스럽게 테이프의 녹음을 지우고 난 후 방청소를 시작했다. 정장 차림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석구석 청소기를 밀고 다녔고, 물걸레로 선반과 테이블을 닦았다. 화장실의 변기 내부를 거리낌없이 훔쳐 닦았고, 이동선의 개인 암실까지도 주저 없이 들어가 청소를 하는 품이 이 방에 무척 익숙한 동작이었다.
그녀는 암실의 허공에 걸려 있는 인화지들을 빼내 차곡차곡 추스른 다음 벽장 서랍에 정리했다. 그 사진 속에 도발적인 여체의 나신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도 연화는 별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냥 치워야 할 잡동사니로만 여기는 모양이었다.
오피스텔 전체를 반짝반짝 닦고 난 후, 그녀는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엔 음식이 가득했다. 그녀는 꼼꼼하게 내용물을 살피고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유통기한이 다 되어 가는 우유를 새 걸로 바꿔 놓았고, 쇼핑해 온 물품들을 빈 자리에 가득 채웠다. 냉동실의 얼음칸에도 생수를 따라 채웠고, 그리고 나서 깜박했다는 듯 물걸레를 가져와 냉장고 문을 닦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신호가 떨어지자 동선의 음성이 자동으로 응답했다.
- 지금 외출중입니다. 메시지 남겨 주시면 돌아오는 대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상대 쪽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없었다.
연화는 그 잠깐의 침묵에 뭔가를 감지한 듯 전화기 앞으로 다가왔다.
- ……아저씨, 은영이예요. 병원 앞 공중전화 박스 안인데요, 지금 나오는 길이에요. 마취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서 있을 힘조차 없네요. 정신이 돌아오면서 많이 울었어요. 근데 지금은 괜찮아요. 저요, 카톨릭 신자라서 정말 고민 많이 했어요. 종교의 교리 같은 거 얘기하지 않더라도 정말 아기를 지울 자신이 없었는데 생각보다 간단하더군요. 별로 아프지도 않았고요. 이런 얘기 괜히 아저씨한테 주절대서 아저씨 마음 불편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어요. 근데 왜 전화를 하게 됐는지 모르겠네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연화가 갑자기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은영 씨라고 했나요?』
- 어머, 누구시죠?
『놀라지 마세요. 지금 컨디션도 좋지 않을 텐데.』
- 거기 이동선 씨 댁 아닌가요?
『네, 맞아요.』
- 실례지만 어떻게 되세요, 그분과?
『음, 같이 사는 사람이에요.』
연화의 대답에 수화기 저쪽의 은영이 한동안 침묵했다. 난데없는 여자의 출현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연화는 도자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감싸쥐며 그녀를 불렀다.
『괜찮아요, 은영 씨! 기왕 이렇게라도 만났으니 맘 편하게 얘기해요, 우리. 전화로 곤란하다면 내가 거기로 나갈 수도 있어요.』
- ……아녜요, 죄송해요.
『끊지 마세요. 은영 씨가 죄송할 건 하나도 없어요.』
- 부인이신가요?
연화의 부드러운 응답에 마음이 풀린 듯 수화기의 목소리도 안정을 찾았다.
『편하게 생각하세요. 동선 씨 아기를 가졌었나 본데…… 그분이랑 상의는 하신 건가요?』
- 아녜요, 그냥 어쩌다…… 그렇게 된 건데……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저랑 조금만 더 일찍 통화를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군요.』
- ……무슨 뜻이죠, 그 말씀이?
『뱃속의 아이도 하나의 생명체인데 은영 씨가 너무 간단하게 결정한 거 같다는 얘기예요.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아이를 가질 정도로 사랑을 했다면 그 사랑에 대한 책임은 끝까지 질 줄 아는 게 도리 아닌가요?』
-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전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요.
『최소한 동선 씨 동의는 구했어야죠. 그렇지 않아요? 그이도 무책임한 사람은 아녜요. 은영 씨와 사랑을 나눴을 땐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테고 아기를 만들 계획도 갖고 있었는지 모르잖아요.』
- 그런 건 아니었어요. 아저씨랑은 갑자기 만나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지, 서로 계산 같은 건 없었어요. 근데 지금 전화받고 계시는 분이 아저씨의 부인이신가요?
『맞아요.』
연화가 딱잡아 대답하자 수화기 속의 목소리가 또 흔들렸다.
- 근데 말씀하시는 게…….
『이상해할 거 없어요. 우린 아이가 없거든요. 아기를 가지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런데 은영 씨가 그이의 아기를 가졌었다니 문제는 내 쪽에 있다는 게 밝혀진 셈이죠. 은영 씨한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아기를 낳아 줬으면 그이가 굉장히 기뻐했을 텐데.』
- ……!
『듣고 있어요, 은영 씨?』
- 어떻게 그런 말을…….
은영이 말을 잇지 못하고 훌쩍이는 울음으로 대신했다.
『뭐가 어때서 그래요? 은영 씨도 그 사람을 택했을 땐 생각이 있었을 거 아녜요?』
- ……그런 거 없었어요.
『생각 없이 아무 남자랑 자는 여자도 있나요?』
-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구요.
『어쨌거나 아기를 지운 건 큰 실수를 한 거예요. 그 사람도 알면 화를 내실 거예요.』
- 전화 끊겠어요.
『끊지 말아요. 하던 얘기는 마저 끝내야죠.』

장화란의 흔적을 역추적하는 길은 멀고도 복잡했다. 그녀의 이력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난잡하기 짝이 없었다.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하다 휴학을 했고 모델협회와 영화배우협회에 가입하여 연예활동을 한 시기도 있었다.
일권은 며칠 동안 충무로와 강남 일대를 돌아다녔다. 변소미가 알려 준 몇 가지 단서만으로도 그는 용케 장화란의 발자국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숨을 거둔 병원의 일지를 뒤져 주소를 찾아냈고, 동사무소와 복덕방을 전전하면서 기어이 보호자를 찾아내고 만 거였다.
뜻밖에도 그녀는 20대 중반의 처녀였다. 일권은 집 앞에서 꼬박 사흘을 잠복한 끝에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와 조우한 시각은 새벽 세 시.
여자는 긴 생머리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나른한 피곤기를 느꼈다. 소미의 아파트에서 만난 여자들과 비슷한 내음을 맡은 것이었다.
그는 장화란의 이름을 대면서 사정을 호소했다. 여자는 그의 표정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나서 시간을 내주었다.
『집을 치우지 않아서 어지러울 텐데 이해해 주세요.』
그녀는 선뜻 집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러나 말과 달리 그녀가 사는 방은 청결했다. 독신녀의 주거공간답게 은은한 향기가 풍겼고, 동물 인형과 영화 포스터로 온 벽면이 치장되어 있었다.
일권은 거실에 붙어 있는 포스터 한 장에서 여자의 얼굴을 발견했다.
『영화배우세요?』
『그렇게 보여요?』
『저 포스터에.』
『아, 제가 아니라 화란이 언니예요. 삼류 영화에 몇 번 출연했던 적이 있었지요.』
『와, 언니와 동생을 구별 못 하겠는데요. 너무 비슷해서요.』
『많이 닮았죠. 근데 성격은 정반대였어요.』
자신을 화란의 동생 화숙이라고 소개한 후 여자는 일권의 질문에 성의껏 대답을 해주었다. 화숙은 언니의 내력뿐만 아니라 데리고 있던 여자들까지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은비는 화란이가 마지막까지 데리고 있었던 여덟 명의 가족 중 한 사람이라고 했다.
일권이 은비의 약혼자라고 소개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아저씨 성함이 이봉영 씨세요, 시를 쓴다는?』
『이봉영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알죠?』
『그때 우리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이름이었어요. 우리가 은비 언니를 무던히도 놀려먹었었죠, 시인의 연인이라고.』
『은비가 제 입으로 그 사람을 약혼자라고 말했나요?』
『그렇게 말한 적은 없었어도 우리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기정사실로 알려져 있었어요. 은비 언니도 애써 부인하질 않았구요. 또 그 사람이 은비 언니를 만나러 업소에 간혹 오곤 했었대요. 우리집까지 데려다 준 적도 많았구요.』
『직접 본 적은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그땐 단발머리 여고생이었죠. 화란 언니가 집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했어요. 학창시절 내내 학교 근처 독서실에서 살았어요. 근데 아저씬 이봉영 시인이 아니고 또 다른 분이신가 보죠?』
『은비와 동창이에요. 친한 친구 사이면서 좋아했던 사이였죠. 어느 날 은비가 가출을 했어요. 6년 전이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찾아다녔는데 얼굴은커녕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어요. 지금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깝다고 해야겠죠.』
『정말 은비 언니를 사랑하셨던 모양이군요.』
화숙은 감동 어린 눈빛으로 반문했다. 일권은 쓰게 웃었다.
『제가 허깨비를 쫓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진짜 사랑이라는 걸 알았다면 처음부터 은비를 놓치지 않았겠죠. 출발부터 자신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 것도 같네요. 한 가지만 더 여쭤 볼게요. 지금이라도 은비 언니를 찾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녀가 생각보다 불행한 모습으로 존재한다면 조금이라도 불행의 무게를 덜어 줄 수 있는 방향으로 노력해야겠죠.』
『그 반대라면요?』
『은비가 잘 살고 있다면 구태여 가족한테까지 연락을 끊진 않았을 거예요. 그래도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모습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 조용히 돌아서야겠죠.』
화숙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핏 그녀의 동공에 이슬이 맺힌 것도 같았다.
『모처럼 아름다운 얘기를 듣는군요. 참 이상하죠, 왜 선한 사람들한테 불행은 지름길로 찾아오는 건지 모르겠어요. 어떤 책에선가 이런 구절을 읽고 뼈저리게 공감한 적이 있었어요. ‘우리는 자주 야망을 위해 사랑을 희생시킨다. 하지만 사랑을 위해 야망을 바꾸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어때요? 사람들의 이기적인 속성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명언 아니겠어요? 하지만 아저씬 극히 드문 경우에 해당되는 분 같아요. 제가 힘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끝까지 도와 드릴게요. 사실 저도 은비 언니를 포함해서 우리 언니랑 끝까지 어려움을 같이했던 여덟 명의 언니들을 꼭 찾고 싶었어요. 그 언니들 덕에 지금 나는 이 집에서 잘 살고 있는 거예요. 화란 언니가 빚더미에 올랐었는데 언니들이 똘똘 뭉쳐 나를 지켜 준 거예요.』 독백처럼 말을 잇던 화숙은 그 대목에서 끝내 어깨를 들먹이며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일권은 여자의 눈물 앞에서 딱히 해줄 만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가 욕실로 가 세수를 하는 사이 그는 다시 포스터 속의 화란을 보았다. 화란은 ‘엘리베이터 속의 욕망’이란 영화의 조연으로 매끈한 각선미를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화란은 사는 동안 후회 없이 세상과 충돌하고 장렬한 전사를 택했던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내가 쓰러지기만을 기다리는 세상에 비칠비칠 쓰러지지 않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인간의 몸뚱이가 지니고 있는 무게 전부를 고스란히 실어, 보란 듯이 내리꽂혀 산화해 버린 것이리라.
일권은 병원에서 그녀의 사망원인을 확인했을 때부터 그녀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나름대로 유추해 보고 있었다. 과다한 약물 복용에 의한 사망, 그건 자살을 의미하는 거였다.
무엇이 그녀를 자살로 이끌었을까? 스스로 숨을 끊으면서 그녀는 세상에 어떤 적개심을 품었을까?
병원을 나오면서 그의 가슴은 스산했다. 저토록 고통스럽게 살다 간 여자와 동고동락했을 은비는 또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있을까?
『출출하지 않습니까?』
욕실에서 나온 화숙에게 그가 말을 건넸다.
『조금요. 참 저녁 드신 지 오래 돼서 시장하시겠군요. 뭐라도 사다 드릴까요?』
『아뇨, 냉장고에 재료만 있다면 제가 마술을 보여 드릴까 해서요.』
『마술이라뇨?』
『보시면 압니다.』
그는 성큼성큼 부엌으로 갔다.
어떤 메뉴를 택할지는 냉장고를 열어 봐야 알겠지만 어떠한 재료로도 그녀를 만족시킬 만한 요리를 만들 자신이 있었다.

하수지에게 맡긴 극장건물의 환경미술 프로젝트는 출발부터 순조로웠다. 그녀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건축주의 취향을 단번에 만족시켰고, 무엇보다 건축주는 그녀의 자신만만한 브리핑에 매료당해 버린 거였다.
하수지의 기용은 한마디로 대성공이었다. 그녀의 거침없는 활약은 매니저인 동선에게도 행운을 안겨다 주었다. 아무 사심 없이 그녀에게 뛸 마당을 마련해 주겠다는 생각에서 연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물건을 따냈던 것인데, 그 동기가 선행이었던지 뜻하지 않은 결과가 돌아왔던 것이었다.
얼마 전부터 서울시 의회에서 환경미술업계의 비리가 거론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아홉 시 뉴스를 통해 이 세계의 흑막이 벗겨지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감사가 진행됐었다. 그래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선의 활동반경은 극히 부자연스러웠다. 검찰이 호시탐탐 사생활을 견제하고 있는 마당에 사업 쪽까지 압박을 받는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해서 사무실의 유능한 동반자 오연화의 조심성 덕택에 어렵게 어렵게 법망을 빠져나오던 중이었으므로 하수지를 위한 프로젝트는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하수지가 화성의 작업실에서 초안을 디자인할 무렵에도, 업계는 강진에 흔들리고 있었다. 몇몇 작가들이 양심선언을 통해 건축업계의 리베이트 관행을 폭로해 버렸고, 그에 따른 여파로 유수의 건축주와 브로커들이 굴비 꿰이듯 철창신세를 지게 된 거였다.
오연화는 하수지에게 각별히 신중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워낙에 활어 같은 하수지는 거침이 없었다. 매스컴은 빼어난 미모에 큰 프로젝트를 주무르는 전문직 여성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가 한 번 매스컴을 타자 여성지들이 경쟁적으로 그녀의 일상과 작업세계, 예술혼, 남성관 등을 조명했고 토크쇼 프로그램에서도 출연 요청이 잇따랐다.
그 와중에 독수리처럼 그녀의 배경과 작품 수주과정의 의혹을 노려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하수지는 그런 시선에 당당했다. 그녀는 작품 계약서와 계약금이 입금된 통장을 선뜻 공개했고, 그 돈이 어떻게 쓰였지에 대한 명세서까지 낱낱이 밝혀 보는 이들을 감탄케 했다. 그 바람에 극장 건축주까지 양심적인 사업가로 세간의 칭송을 받게 되었으며, 아직 완공되지도 않은 극장건물은 젊은이들 사이에 벌써부터 예비 명소로 회자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극장주는 조경에 관해 충고를 해주고 하수지를 연결해 준 블루맥주의 최종명 사장에게 고마워했다. 물론 한 푼의 중계료도 먹지 않고 작가에게 고스란히 지원해 준 동화조경의 배려에도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최종명 사장은 어느 날 친히 동화조경연구소까지 방문해 한턱 내겠다고 제의했다.
『내가 도와 준 건지 도움을 받은 건지 구별할 수가 없군. 하여간 네놈은 괜찮은 새끼야.』
연화와 수지가 보는 앞에서 최 사장은 동선에게 막말을 일삼았다. 그만큼 친밀하다는 표시였다.
『이 친구한테는 무슨 일을 맡겨도 걱정이 없다니까. 사생활만 깨끗하다면 우리 회사 홍보이사로 스카웃하고 싶은데 말야.』
그의 넉살에 연화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는 사장님 사생활은 어떤지 궁금하군요?』
『나요? 하늘을 우러러 한 줌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죠.』
『피이, 칠공자 시절 선친으로부터 회초리 맞은 사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요.』
『흐흐, 그거야 병아리 때의 추억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때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맥주회사를 물려받지도 못했을 겁니다.』
『모르긴 해도 지금이 그때보다 더 자유롭지 않을까요? 권력과 재력까지 겸비했는데 말릴 사람이 어딨겠어요.』
연화의 톡톡 쏘는 말투에 하수지는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무소불위의 재벌 앞에서 서슴없이 말대꾸를 하는 그녀의 배짱이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어쨌든 메뉴를 정하자고. 내 오늘 기분 좀 내고 싶어. 그대들이 원한다면 뭐든지 오케이야.』
『한턱은 그렇게 내는 게 아냐. 호스트가 알아서 선택하고 게스트를 초청하는 게 매너라고.』
『그래? 그럼 홍콩으로 갈까?』
하수지가 최 사장의 말꼬리를 물었다.
『중국요리집인가요?』
『아니, 영연방 홍콩을 말하는 겁니다.』
『지금 홍콩으로 떠나자고요?』
『뭐, 문제될 거 있습니까? 식도락에는 국경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여기서 공항까지 40분, 웨이팅 1시간, 비행시간이 세 시간쯤 걸리나? 맘만 먹는다면 좀 늦더라도 오늘 중으로 맛있는 저녁식사를 즐길 수 있을 겁니다. 홍콩이야말로 음식의 천국이니까요. 노비자니까 수속도 간단하고.』
최종명의 제안에 하수지와 연화가 눈을 마주쳤다. 상상을 불허하는 그의 스케일에 질린 눈치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약속이나 한 듯 난색을 띠었다.
『솔깃한 제안이지만 홍콩은 좀 차분해질 때로 미루고 가까운 데서 맛있는 저녁이나 사 주세요.』
『그래요? 그럼 청평 쪽으로 가서 메기 매운탕을 먹는 게 어떨까요?』
최종명의 말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밀리기 전에 빨리 빠지자고.』
동선이 일어서며 바람을 잡았다.

청평 호반에 떠 있는 요트 블루호.
최종명과 이동선은 갑판으로 나와 휘네스를 나눠 피우고 있었다. 푸짐하게 저녁을 먹고 호수로 내려와 벌써 두어 병의 와인을 비운 후였다.
『멧돼지 뽑기 할까?』
『누가 맘에 들어?』
『둘 다.』
『하나만 고른다면?』
『글쎄, 우열을 가리기 힘든데……. 하수지는 새콤한 맛이 있고 오연화는 매콤한 맛이 있단 말야.』
『그럼 새콤한 쪽으로 결정해. 난 연화랑 낚시나 할 테니까.』
『후후, 알겠어. 벌써 연화를 주워 먹었나 보지? 자식, 어쩐지 싶었어. 내가 오래 전부터 눈독들였는데.』
『앞으로 연화한테는 딴 맘 먹지 마.』
『어쭈, 웬일이야? 우리 사이에 뭐든 나눠 갖는 게 철칙 아니었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만 알고 어서 들어가.』
최종명은 미심쩍은 눈길을 뿌리고 나서 요트 선실로 들어갔다. 동선이 선미의 갑판에 낚싯대를 설치하고 나자 연화가 걸어왔다.
『저 불렀어요?』
『같이 낚시나 하자.』
『저랑 함께 있겠다는 게 목적인가요, 아니면 선실의 두 사람에게 기회를 주자는 게 목적인가요?』
『둘 다.』
『여기 자주 왔었나 보죠? 낚시하는 폼이 자연스러운 걸 보니.』
『가끔.』
연화는 동선의 옆자리에 걸터앉아 그와 함께 수면을 응시했다.
그때부터 그는 말을 잃었다. 손등에 턱을 괴고 찌만 볼 뿐이었다.
연화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낚시법을 잘 알고 있는 터였으므로 왜 고기가 물리지 않는지 묻지 않았다.
선실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최종명과 하수지가 격렬한 몸싸움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뭔가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도 들렸고, 찰싹 때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다가 잠잠하더니 야릇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연화가 빙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여전하군요, 저 사람.』
『옛날이나 지금이나 외로운 것도 여전할 테니까.』
『참, 은영이라는 여자한테 전화왔었어요.』
『뭐래?』
『별다른 말은 없었어요. 내가 누구냐고 묻더군요. 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대답해 줬더니 죄송하다면서 끊더군요.』
『……!』
『요즘 들어 곰곰이 생각해 본 건데…… 한 1년쯤 밖에 나갔다 오는 게 어떨까 싶어요.』
『연화가?』
『같이요.』
『…….』
『건강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공기 맑은 곳에서 요양하는 기분으로 쉬었다 오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요.』
『…….』
『뭐랄까…… 자꾸 불안한 생각이 엄습하곤 해요.』
『연화답지 않은 소릴 하는군.』
『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어요.』
『밖에 나간다고 능사가 아냐.』
『나가기 싫으면 운동 같은 취미라도 가져 보세요. 옆에서 보는 사람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잖아요.』
『걱정 마.』
『자극이라는 것은 끝이 없는 법이에요. 갈구할수록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고 그러다가 갈증으로 메말라 버리게 된다구요. 제가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도 마포 오피스텔에 여러 여자들을 불렀더군요.』
『…….』
『낚시와 여자, 지금 상태에선 독약이나 마찬가지예요.』
『중병에는 독약이 잘 들을 때가 있어.』
동선의 무심한 대꾸에 연화가 눈을 감았다. 이내 그녀는 뒤로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선실의 교성도 여전했다. 그 안에서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수지의 음성이 요란했다. 때론 울부짖기도 하고, 숨이 곧 넘어갈 것 같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요트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 파문이 달빛에 일렁이며 멀리 퍼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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