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보트-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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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탕아들은 여자의 누드에 집착하는 걸까요?』
희수의 질문에 조재봉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찾고 있었다.
겸사겸사 해서 W-net에 들른 희수가 그의 자리로 다가와서 대뜸 던진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 여자의 육체라고 흔히들 말하잖습니까.』
『플레이보이들이 조각가나 사진작가는 아니잖아요? 여체를 즐기기만 하면 됐지, 구태여 누드 촬영을 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어요. 혹시 여자의 약점을 잡기 위한 술책이 아닐까요? 아주 교활하고 야비한 볼모로.』 『그런 방편으로 써먹는 치들도 더러 있더군요. 그 경우는 정상적이지 않거나 불륜관계에서 덫의 용도로 쓰이죠. 결정적일 때 누드 사진을 미끼로 돈을 갈취한다거나 협박을 일삼는 방법, 제비족들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진짜 레이디 킬러들은 조금 의도가 다르지 않을까요?』
『제비족과 레이디 킬러, 뭐가 다르죠?』 『그게 그거죠 뭐. 하지만 프로와 아마추어로 구분해 보자는 얘깁니다.』
『그럼 프로들의 의도는 어떤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호색한의 대명사로 통하는 카사노바의 유혹술을 분석해 보면 쉽게 수긍이 갈 겁니다. 카사노바는 열 살에 음탕한 시를 쓰고 열한 살에 동정을 잃었으며 열다섯부터는 본격적으로 여성편력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열 살짜리 발레리나 콜데체리를 정부(情婦)로 삼으면서 시작된 엽색행각 초기의 희생자들 대부분이 주로 10대 소녀들이었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소녀들의 허점을 악용했는데, 그때 써먹은 유혹술이 바로 소녀들의 나르시시즘을 충족시켜 주는 거였습니다.』
『자아도취에 빠지게 부추겼다는 얘기로군요.』
『소녀들마다 품게 마련인 자기 육체에 대한 환상적 자긍심을 깨워 줌으로써 마음을 사로잡은 거죠. 그의 회상록을 보면 희랍계 미녀 헬레느가 등장합니다. 빈민굴의 한 아파트 단칸방에 사는 열세 살의 헬레느는 카사노바의 희생양이 되면서 혼자 보기 너무 아까운 육체라는 꾐에 넘어가 카사노바의 친구인 화가 부쉐의 누드 모델이 되지요. 혼자 보기 아깝다는 표현에 순진한 헬레느는 넋을 빼앗겨 버리고 만 거죠. 그녀 이외의 여자들을 유혹할 때도 매번 같은 레퍼토리의 수법을 동원했는데 모든 여자들이 헬레느와 마찬가지로 단번에 걸려들었다고 합니다.』
『카사노바가 생존했던 시대의 유럽 성풍속도가 의외로 자유로웠던 건 아닐까요?』
『글쎄요, 오히려 중세의 유럽이 더 폐쇄적이지 않았을까요? 어쨌거나 카사노바의 솜씨는 특별했던 모양입니다. 어떤 여자와 관계를 맺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당사자에게 최선의 사랑을 바쳤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그가 구설수에 올랐을 때 그와 관계했던 모든 여자들이 발벗고 나서서 옹호를 했겠습니까. 또 그의 아름다움을 보는 심미안도 탁월했죠. 아까 얘기했던 희랍계 소녀 헬레느는 카사노바의 권유에 의해 누드 모델이 된 후, 신분이 수직상승하게 됩니다. 전람회에 출품된 그녀의 누드가 또 다른 호색가 루이 15세의 눈에 들어 베르사이유의 후궁으로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헬레느 입장에서 보면 카사노바야말로 은인 중의 은인이겠군요.』
『그렇지요, 그저 입에 발린 거짓말로 그녀를 꾀었던 게 아니고 그녀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제대로 표현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무턱대고 카사노바를 비난하기도 무색한 데가 있네요.』 『중국 절세의 요부를 들라면 흔히 양귀비를 꼽습니다. 그녀와 호각을 이루는 요남은 양국충이지요. 그는 양귀비의 사촌오빠이기도 한데요, 양귀비의 후광을 입어 재상 반열에까지 오른 양국충은 겨울이면 수십 명의 미녀들을 발가벗겨 잠자리에 둘러 놓는 살병풍으로 난방을 했던 탕아 중의 탕아지요. 그런데 이 양국충도 환락을 더불어 나눈 수많은 여인들에게 그 밤을 영원히 잊을 수 없게 하는 과야시(過夜詩) 한 수를 꼭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과야시가 뭐죠?』 『밤을 보낸 노래죠, 그녀와 함께 보낸 밤의 정감을 시 한 수로 멋들어지게 전달했으니 여성들의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낭만적인 탕아였군요.』 『맞아요. 또 프랑스의 루이 14세도 유명한 탕남이었습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황제의 전용 침대가 무려 413개나 있었다는데요, 그는 한 여자와의 보금자리는 항상 특정 침대를 잡음으로써 상대의 자존심을 보장해 주었다고 합니다. 카사노바나 양국충, 루이 14세의 유혹술은 제각기 방법은 달라도 심리적으로 여자의 허영을 자극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요즘의 레이디 킬러들이 상투적으로 누드를 찍는 행위도 여자들의 허영을 충족시켜 주는 유혹술이라 해석할 수 있겠네요.』
『대충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요즘 제주도 호텔에서 신혼부부의 정사장면을 은밀히 찍어 주는 비디오맨들이 있다잖습니까. 젊은이들의 의식도 많이 달라졌지요. 가장 젊고 싱싱할 때 육체의 향연을 간직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풍속도입니다. 한때 일본의 톱스타들이 경쟁적으로 자신의 누드화보집을 발간했던 적이 있었죠. 미야자와 리에의 ‘산타페’가 대표적인 작품인데요, 그녀의 해명이 우리 시대의 가치관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세상에 보여 주고 싶고 기록하고 싶었다는 말, 더 이상 시비를 걸 이유가 없는 거죠.』 조재봉은 생각난 김에 보여 주겠다며 서랍 속에서 ‘산타페’ 화보집을 꺼냈다.
『이거 한번 보십시오, 폐허의 인디언 유적지에 등장한 리에의 누드는 뭐 어떻게 표현할 찬사가 없지 않습니까?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육체지요. 놀라운 것은 남자들 못지 않게 여자들도 이 책을 많이 샀다는 겁니다.』
『대단하시네요, 아예 그쪽 방면으로 나가 보시지 그래요. 플레이보이의 유혹술에 여성들의 심리까지 달달 꿰고 계시니 어려울 것도 없잖아요?』
『아무리 많이 알면 뭐 합니까? 그것도 기본적인 외모와 연기력이 받쳐 줘야 해먹죠. 아무나 할 수 있는 재주는 아닙니다.』
조재봉이 숱이 드문 머릿결을 코믹하게 쓰다듬으며 낯을 찡그렸다.
『저번에 추적하던 그 사람 어때요, 좀 진전이 있나요?』
『캄캄합니다. 청담동이 아지트였다는데 문이 계속 잠겨 있어요. 문 앞에 신문이 가득 쌓여 있는 걸로 봐서 그 사건 이후로 출입을 끊지 않았나 싶어요. 어디론가 잠적을 해버린 거죠.』
『그 사람 이름이 뭐죠?』 『왜요, 제 프로그램에 관심 있습니까?』
『혹시 알아요? 획기적인 단서를 줄 수도 있을지.』 『이름은 정말 대외비예요. 그걸 아는 사람은 담당 검사밖에 없으니까요. 근데 그 검사가 오프 더 레코드를 신신당부하며 저한테만 귀띔을 해줬지요. 이게 밖으로 새면 전 앞으로 검찰청 못 들어갑니다.』
『내키지 않으심 관두시고요.』 『아, 아닙니다. 해본 소리예요. 이동선이라고 그러더군요, 동녘 동에 베풀 선.』
순간 희수는 아찔했다. 묵직한 둔기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것처럼 휘청거렸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어쩌면 속담 하나가 이처럼 섬뜩하게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지 그저 소름이 쫙 돋을 뿐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내상(內傷)이 더 컸다.
경마장 가는 길은 복잡했다. 올림픽대로에서 이수교 빠지는 길목, 방배동 입구에서 사당동 네거리와 남태령 넘는 길 모두가 차량들로 넘쳐났다. 주말 오후라서 더 붐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과천 경마장 입구의 주차난에 비하면 그 정도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미는 큰길 가장자리에 그랜저의 큰 덩치를 그냥 세워 두고 내렸다.
『여기 놔뒀다 견인당하면 어쩔려구?』 동행한 희수는 아무래도 맘이 놓이지 않는 듯 주변을 살폈다.
『차라리 견인당하는 게 안전해. 오륙만 원 내고 보호받는다 치지 뭐. 빨리 들어가자, 놓치겠어.』
상미가 앞쪽을 가리키며 발길을 재촉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등을 보이고 걸어가고 있는 한 쌍의 남녀가 매달려 있었다. 상미와 희수는 여의도에서부터 그 커플의 뒤를 밟고 있는 중이었다.
두 친구가 경마장행을 결심한 데는 묘한 사연이 있었다.
이동선의 정체를 알고 난 희수는 몇 날 며칠을 혼자 끙끙 앓다가 카운슬러로 상미를 택했다.
의리파 잔 다르크 유정이를 먼저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이런 문제는 상미 쪽이 훨씬 격의 없고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이번 주말에 만나서 얘기하자. 그렇지 않아도 너랑 갈 데가 있었어.』
상미는 희수의 하소연을 듣고 나서 그렇게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희수는 상미의 뜻이 한적한 교외로 빠져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자는 데 있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웬걸!
상미는 희수를 태우자마자 시계를 보더니 다급하게 63빌딩 쪽으로 달려가는 거였다.
『나왔다. 저기 앞에 아우디(AUDI) 보이지? 저 차를 미행해야 하니까 절대 놓치지 마.』
『뭐라구, 왜 저 차를 쫓지?』 『남편 차야, 여자친구랑 과천으로 빠질 거야.』
『세상에! 짐작은 했지만 네 남편 정말 바람을 피워도 노골적으로 피우는구나. 언제부터 그랬니?』 『꽤 됐어. 아마 결혼식 직후에도 여자들을 만났을 거야. 내가 몰랐을 뿐이지.』
『어떻게 알았니?』 『그 사람 무선호출기의 비밀번호를 우연히 알게 됐는데 음성사서함에 여자들의 목소리가 잔뜩 들어 있는 거야, 글쎄. 한두 명도 아니고.』
『세상에! 어쩜 그럴 수가 있니, 니 남편이! 너 여태 무진장 마음고생 했겠구나.』 희수는 경마장 가는 길 내내 상미를 위로했다. 사실은 자신이 위로받을 생각으로 만났건만, 만나고 보니까 자기보다 친구의 처지가 훨씬 기막힌 거였다.
그러나 상미는 태연했다.
『쇼킹한 사건이지. 근데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아. 구질구질하게 이런 식으로 남편 뒤를 따라다닐 생각도 해본 적 없어. 니 얘길 듣고 보니까 그 남자나 내 남편이나 한 통속이라는 느낌이 팍 오더라구. 경마장 따라가는 거 별다른 이유 없어. 적을 알아야 이긴다는 말 있지? 우리도 적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자는 뜻이야.』
그랬었다. 상미의 주말계획은 그런 심오한 계산이 깔려 있었던 거였다.
경마장은 만원이었다. 사람들로 가득찬 객석 사이를 누비며 희수와 상미는 빈 좌석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상미의 남편 정용진은 경마 정보지를 한아름 사들고 아예 외진 구석 자리로 가 앉는 중이었다. 그녀들은 정용진의 뒤쪽 대각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경주의 템포는 빨랐다. 열두 마리의 말들이 스타트 라인에 들어섰다가 운동장 한 바퀴를 돌면 한 경주가 끝났고, 또 한참 뜸들이다가 같은 식으로 다른 말들이 후닥닥 달리고 뭐 그런 게임이었다. 어찌 보면 싱겁기도 하고 어찌 보면 우습기까지 한 말들의 달리기 경주에 왜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스탠드 상단에 앉아 불륜의 커플과 말들의 경주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경주 사이사이에 사람들은 저마다 마권을 사기 위해 부단히 창구를 들락거렸다. 상미의 남편도 그들과 똑같이 매표 대열에 거듭 합류했다.
8경주가 끝났을 때 불륜의 커플은 환호성을 울리며 어깨동무를 했다.
『맞췄나 보지? 꽤나 좋아하는데.』
희수가 상미에게 물었다.
『저기 전광판을 봐. 2번하고 7번이 1, 2위를 했잖아. 그 두 마리의 확률을 조합한 게 배당률이래. 얼마니? 34.5배. 그러니까 만 원을 걸었으면 34만 5천 원을 받게 돼.』
『정말 도박이구나. 근데 34만 원을 땄다고 저렇게 좋아할 수 있는 거니? 하루에 수억 원을 주무른다는 니 남편이.』 『나도 그게 궁금해. 하긴 단위가 크다면 얘기가 좀 달라질 수도 있겠지. 가령 만 원 정도가 아니고 거기에 동그라미가 한두 개 더 얹어진다면 일확천금 아니겠어? 백만 원을 걸었을 때 삼천사백오십만 원을 따게 되는 거니까 말야.』
『니 남편 얼마 땄는지 슬쩍 보고 올까?』 『그럴 필요 없어. 아마 몇만 원 수준일 거야. 오늘 백만 원 인출해 왔으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
『비자금 통장의 비밀번호도 내가 알고 있거든.』 『너 정말 대단하다, 얘! 니 남편 뛰어 봤자 니 손바닥에서 맴도는 거 아니니?』
『그러면 뭐 하니. 난 그냥 저 사람의 비밀만 엿볼 뿐이고, 저이는 제멋대로 즐기는 건데.』 희수는 상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앞으로 어쩔 생각이니?』
『왜 내가 할 소릴 니가 먼저 하지? 난 정신적으로 단단히 무장이 돼 있기 땜에 끄떡없어. 면역이 된 거지. 이제부턴 니 얘길 할 차례야. 내가 남편의 치부를 너한테 보여 준 건 예방주사야. 남자들은 거의 모두 속물근성을 갖고 있다고.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 그 남자가 바람둥이건 말건 다 니가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상미는 침착했다. 그 방면으로 이미 달관의 경지에 들어선 사람같아 보였다.
잿빛 아우디가 차량의 행렬에서 빠져나와 과천 의왕간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아우디가 지평선 너머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고 있던 희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상미는 태연하게 운전을 하다 백미러로 힐끔 희수와 눈을 마주치고는 윙크를 했다.
『재미있었니?』
『너 참 비위도 좋다. 저런 꼴을 보고도 웃음이 나오니?』 『저치들 이후 스케줄이 어떨 것 같니? 드라마 작가가 한번 상상력을 발휘해 봐.』
『외박하고 들어올까?』 『그 사람 맘먹기 나름이지 뭐. 오늘 약속이 있어서 늦는데 혹시 못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연락이 왔었어.』
『니가 왜 남자친구 하나 구해 달라고 했는지 오늘에사 알겠다.』 『알겠니? 넌 그나저나 어떡할래?』
『모르겠어.』 『그 사람하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니?』
『아니, 그날 안드로메다에서 나 되게 취했었잖아. 눈을 떠 보니까 그 사람 방에 누워 있었어. 근데 그 사람이 안 보였거든. 불을 켰는데 널찍한 오피스텔이었어. 방을 멋지게 꾸며 놨길래 호기심이 들어서 한 바퀴 둘러봤지. 근데 암실에서 못 볼 걸 보게 된 거야. 서랍마다 여자들 누드 사진이 가득한 거 있지. 아차 싶어서 유심히 들여다보니까 사진마다 일련번호가 붙어 있고 촬영 일자와 모델의 신상명세가 좌악 적혀 있었어.』 『정희수, 기절초풍했겠네?』
『말이라고 해? 심장이 덜컥 멎는 기분이었어. 사진도 웬만하면 이해하겠는데 너무 끔찍한 X등급이었거든.』 『변태 아닌가 모르겠다. 니 사진은 없었어?』
『현상할 시간이 없었겠지. 근데 모르겠어. 내가 인사불성으로 네 시간 가량 누워 있었을 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래서 그날 깨어나서 어떻게 헤어졌는데?』
『방송원고 준비 때문에 일어나자마자 쌩하니 나와 버렸지. 그냥 가겠다고 말만 했어. 잘 가라고 그러더라.』
『약속은 안 하고?』 『우린 항상 다음에 만날 약속을 해본 적이 없어.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오면 그때 약속을 해서 만났어.』
『너는 그 사람 연락처도 모르고?』 『물어 보지 않았어.』
『그래도 가르쳐 주는 게 매너 아냐?』 『몰라,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사람에 관해서는 하나도 몰라. 이 참에 집을 안 것밖에는.』
『하긴 그 사람 자체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기더라. 그날 척 보니까 정희수쯤은 상대가 안 될 것 같았어. 뉴질랜드에서 첨 봤을 때 누가 먼저 유혹했니? 당연히 그쪽이겠지?』 『그런 것만도 아냐. 말은 내가 먼저 걸었고, 어떻게 우연히 다른 장소에서 또 만나게 됐는데 자연스럽게 맺어진 거였어.』
『넌 처음이었잖아. 또 원래 생각도 복잡한 애가 어떻게 그리 쉽게 그 남자와 잘 생각을 했지?』 『내가 하룻밤 신세를 졌거든. 그걸 갚을 생각이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까 그 지경까지 가게 된 거야.』
『니가 뉴질랜드에 취해 버린 모양이지? 여행지에선 누구나 다 낭만적인 로맨스를 꿈꾸곤 할 거야. 어쨌거나 이제부터가 중요해. 그 사람 계속 만날 거니?』 『모르겠어. 그의 이면을 들여다보기 전까지만 해도 솔직히 말해 하루 종일 그 사람만 생각했어. 헌데 그의 정체를 알고 난 지금 대책이 없어. 너라면 어떡하겠니?』
『깨끗이 잊어버리는 게 약이겠지. 하지만 네 성격에 그런 기억을 훌훌 털어 버리기란 쉽지 않을 거야. 더구나 첫사랑이라면 첫사랑인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단지 그 사람의 변신이 너무 충격이었어. 첫인상도 그렇고 만나는 동안도 그렇고 참 슬픈 사람으로 다가왔었는데…….』
『변신이 아니라 이중성이겠지. 누구나 야누스의 기질이 있어. 너 아직도 일말의 미련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없다면 과장이겠지. 아직 그 사람 입으로 본심을 들어 보지 않았거든.』
『말을 들어야 아는 건 아닐걸! 난 벌써 2년째 이러구 살고 있어. 그 동안 남편한테 변명이나 해명 한 마디 들어 본 적 없어. 별로 듣고 싶지도 않고……. 말이라는 게 그 사람의 인격과 신념, 도덕성의 잣대이긴 하지만 때론 진실을 가리는 안개가 될 수도 있지. 자기 남편의 욕구, 남편의 꿈과 이상, 그런 진짜 모습들을 보게 된다면 아마 이 세상에 절망하지 않을 여자들은 없을걸. 모르겠다, 차라리 희수 니 남자는 지금 니가 알고 있는 인식과 본모습이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다시 만나기 두려우면서도 그 사람 입으로 확실한 얘기를 듣고 싶긴 해. 어째서 여자들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그 저의와 배경이 궁금하기도 하고.』 『알고 나면 시원할 것 같니?』
『앞으로 사람이 무서워지겠지.』
『니가 왜 사람을 무서워해야 하지? 웅크리면 자꾸 약해지는 법이야. 너도 마음 단단히 먹고 전쟁을 준비해 보라구. 통쾌하게 복수를 하든지 상처받기 전에 상처를 안겨 주고 니가 먼저 빠져나오는 거야.』 『어떻게?』
『내가 도와 줄게. 다음에 연락이 오면 모르는 척하고 약속을 하란 말이야. 아직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주도권은 너한테 있을 거야.』
상미가 백미러를 통해 다시 윙크를 던졌다. 희수는 떨떠름한 미소로 응답했다.
상미의 충고는 희수의 스타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우리편’이라는 존재는 따뜻한 것이었다.
서초동의 비즈니스맨 클럽 ‘케사르’.
각종 크레디트 카드가 현란하게 붙어 있는 유리문 너머로 술집 내부를 들여다본 일권은 자동문 앞에서 잠깐 망설이고 있었다. 얼핏 봐도 그 문턱 하나를 넘어서려면 꽤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유리문 위에 붙어 있는 감지기가 작동하면서 바람처럼 열린 것이었다. 일권은 자동문 센서의 예민한 반응에 혀를 차며 별수없이 문턱을 넘어섰다.
『어서 오세요. 혼자 오셨나요?』
얼굴과 몸매 어디 한구석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여자가 달려와 그를 맞았다.
그녀는 일권을 피아노 뒤쪽의 자리로 안내했다.
일권은 자리에 앉고 나서야 비로소 실내에 피아노의 선율이 가득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피아노 연주자는 뜻밖에도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머리빛깔만큼 하얀 연주복을 입고 부드럽게 건반을 매만지고 있었다. 연주하는 손길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그가 과연 피아노를 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선율이 케사르의 분위기를 한결 클래식하게 이끌고 있었다.
손님들이 한 곡을 뽑고자 할 때도 노래반주기 대신 피아노 반주가 거들어 주곤 했는데, 트로트에서 가곡에 이르기까지 백발의 피아니스트는 거침없이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케사르엔 룸이 따로 없었다. 조명도 밝았고 안주 접시의 모양새도 심플했다. 그러나 여자는 이상하게도 많았다. 수십 명의 미희들이 정확하게 삼십 분 주기로 테이블을 옮기며 손님들을 응접하고 있었다.
빈 자리가 거의 없는데도 일권은 몇 시간 동안 무려 열 명 이상의 여자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단정하면서도 말솜씨가 능란했다. 무작정 밀실로 모셔다 놓고 흐드러진 술상에 관능과 음담으로 시간을 때우는 기존의 룸살롱과는 차원이 달랐다. 밝고 청결한 분위기 속에서 교양미 넘치는 아가씨들과 말벗 삼아 즐기는 비즈니스맨 클럽이 케사르의 진가였다.
경제적이면서도 많은 파트너를 만날 수 있어 젊은 사업가들이나 전문직종의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강남 일대에 몇 년 전부터 우후죽순으로 생겨 성업중인 신종 유흥업소라고 했다.
『겁먹지 마세요. 이래 봬도 술값은 저렴해요. 아가씨들이 일개 소대로 몰려와 서빙을 해도 테이블당 봉사료는 십만 원으로 고정되어 있으니까요.』
눈치 빠른 여자 하나가 일권의 불안한 표정을 훔쳐 읽고는 슬쩍 귀띔했다.
『그래 갖구서 이 많은 아가씨들 일당을 제대로 줄 수 있을까?』
일권이 의문을 표시했다.
『아가씨들 일당은 무조건 십만 원이에요. 욕심부리지 않고 밤 일곱 시부터 자정까지 다섯 시간만 일하죠. 그 정도 노동에 그 정도 수입이면 결코 적은 수입은 아니죠. 룸살롱처럼 2차로 동행 나가야 한다든가 하는 지저분한 거래를 하지 않으니까 심신도 훨씬 편하고요.』
『그래? 어차피 돈 벌자고 이 바닥에 데뷔한 거라면 화끈하게 뛰고 화끈하게 버는 게 낫지 않을까?』
『어머, 이 아저씨 좀 봐! 우리가 그런 수준으로밖에 안 보이세요? 여기 있는 아가씨들 전부 전문대 학력 이상이라는 거 모르세요? 취업할 때 학생증이 필수라고요.』
일권은 샐쭉하게 대꾸하는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졸업장도 아니고 학생증이라니. 하긴 대학 졸업장을 받을 나이면 이 바닥에서는 정년 퇴직할 나이인 셈이지.
생각의 말미에 은비의 해사한 노란 옷 패션이 떠올랐다.
은비도 혹시 학교를 다니면서 이런 곳에 출입한 건 아닐까?
일권은 설마하면서도 그런 추측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씀씀이가 헤픈 편이었던 은비가 느닷없는 집안의 몰락에 이런 방편으로 궁핍을 피해 갈 가능성도 충분한 거였다. 생각하기 싫은 가능성이었지만 그 불길한 우려는 케사르에 앉아 있는 동안 점점 더 확신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마담 좀 불러 줘.』
『어떤 언니요?』
『주인 마담 말야.』
『소미 언니요?』
『그래, 변소미 씨.』
『어떻게 아세요, 소미 언니를?』
『3년 전에 죽은 장화란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전해 줘.』
『잠깐만 기다리세요. 연락해 볼게요. 오늘 안 나오셨거든요.』
장화란의 이름이 나오자 여자는 자못 진지한 눈빛으로 일권을 훑어보더니 자리를 떴다.
일권은 얼음 수건으로 눈두덩이를 식혔다. 서늘한 냉기가 혼탁한 두뇌의 회로 구석구석을 씻어 주는 것 같았다.
내실에 들어갔다 나온 여자는 다시 한 번 일권을 빠끔히 들여다보고 나서 옆에 앉았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만나서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어.』
『오늘 못 나오실 텐데…….』
『그럼 내일 다시 올까?』
『아녜요, 급하시다면 오늘 만나게 해 드릴 수도 있어요. 이따가 고스톱 한번 치실래요?』
『……?』
『열두 시면 문을 닫아야 해요. 케사르 맞은편에 편의점이 있어요. 그 앞에서 기다리세요.』
일권은 영업이 끝날 때까지 죽치고 있다 계산을 했다. 강남의 유흥업소 치고 그리 비싼 술값은 아니었지만 그는 해우소를 운영해서 모은 한 달치 이익금 전액을 고스란히 헌납해야 했다.
여자는 영업마감 시간 한참 후에야 씨근덕거리며 편의점 앞으로 달려왔다.
『많이 기다리셨죠? 단골손님 한 분이 2차를 같이 가자고 어찌나 채근하든지 뿌리치느라 혼났어요.』
일권은 괜찮다며 빙긋 웃어 보였다. 그는 아까부터 케사르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남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터였다.
『차 어디 두셨어요?』
『차 없어.』
『음주 때문에 놓고 오셨나 보죠? 그럼 걸어요. 한 정거장쯤 되니까요.』
자신을 미스 신이라고 소개한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앞장섰다.
케사르가 위치한 골목을 빠져나오자 대로의 바람이 거셌다. 여자가 몸을 웅크리며 일권의 팔짱을 꼈다.
『겨울인가 봐요, 벌써. 가을은 왜 그렇게 짧은지 모르겠어요.』
일권은 여자와 나란히 걷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한쪽 팔에 매달려 오는 여자의 체중을 부드럽게 이끌며 차가운 거리를 따뜻하게 걷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녀의 엉뚱한 질문과 강렬한 향기, 이따금씩 올려보는 시선이 거북할 뿐이었다.
『아저씨 뭐 하는 분인지 제가 맞춰 볼까요? 음…… 글 쓰시는 직업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학교 선생님 맞죠? 틀림없어요, 우린 척 보면 대충 손님들의 직업을 맞추거든요.』
『틀렸어, 난 술집을 하고 있으니까.』
『피이, 거짓말 마세요. 아저씨 오른손 중지 첫 마디에 사마귀처럼 돋아 있는 펜혹을 봤어요.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
그녀가 일권의 호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고 그의 손가락을 더듬었다. 일권은 그녀의 세심한 관찰력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술집을 경영해도 장부 같은 걸 쓰려면 꽤 많이 펜을 잡게 되잖아.』
『거짓말을 하시려거든 리얼하게 하셔야죠. 말씀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괜찮아요. 어쨌든 제 느낌만으로 계속 말한다면 아저씬 글을 써도 되게 슬픈 글을 쓰실 분 같아요. 이를테면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 같은 분위기의 작품을.』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나도 사실은 살면서 그토록 애절한 감정을 세상에 노래해 보고 싶은 소망이 간혹 들긴 했어.』
『아저씨, 소미 언니 아파트에 초청 받은 손님은 여태껏 몇 명 안 돼요. 내가 왜 아저씨한테 특혜를 드렸는지 아세요?』
『글쎄.』
『바로 아저씨 손가락의 펜혹 때문이에요. 다른 손님들처럼 미끈한 손이었다면 핑계를 대서 모른 척했을 걸요.』
『매끈한 손의 소유자들이 아가씨들한테는 제격 아닐까? 돈을 써도 훨씬 매끄러울 텐데.』
『돈이 전부라면 내가 왜 아저씰 따라왔겠어요.』
여자가 고개를 돌려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입에서 달콤한 술내음이 풍겼다. 그러고 보니 술집에서 만난 여자치고는 의외로 청순한 얼굴이었다.
그는 또 은비의 얼굴을 떠올리며 바람 속을 걸었다.
『왜 장화란을 찾으셨죠?』
『화란 씨가 아니라 고은비라는 친구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누가 제 이름을 알려 주던가요?』
『이름은 모릅니다. 그냥 케사르의 위치를 알려 주더군요. 서른쯤 됐고 갸름한 미인형의 여자였죠.』
변소미는 의아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요. 화란이나 은비를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안 되는데 말예요.』
『은비를 알고 계신단 말입니까?』
일권은 다짜고짜 따지고 들었다. 이 대목에서 변소미가 궁금해하는 의문들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거였다.
『제가 어떤 경로로 여기까지 온 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은비가 어디 있는지 좀 알려 주시죠.』
『실례지만 은비와 어떤 사이죠?』
『결혼을 약속한 사입니다.』
일권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둘러붙였다. 은비와 특별한 사이임을 강조해야 상대도 좀더 각별한 성의를 보여 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은비한테 약혼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군요.』
『이번엔 제가 묻고 싶습니다. 은비와 어떻게 아는 사이였는지.』
『제가 데리고 있던 아이였어요.』
『데리고 있었다면…….』
『방배동 업소를 나가던 시절 제가 스카웃했던 애였죠. 아마 칠팔 개월 같이 있었을 거예요. 장화란이가 새끼마담으로 승격하면서 은비를 채 갔어요. 그 일 때문에 걔들과 틀어진 이후로는 본 적이 없고요.』
『장화란 씨가 죽은 건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죠. 장례식 때 저도 참석했었으니까.』
『그때 은비를 보진 못하셨나요?』
『장례식 때 은비가 왔었다구요?』
『그 사실을 몰랐습니까?』
『제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선생님은 저보다 더 정확히 은비 소식을 알고 계시는 거예요, 지금.』
둘의 대화는 거기서 잠깐 끊겼다.
그 사이에 일권을 소미의 아파트까지 데려다 준 여자가 커피를 끓여왔다. 그녀는 아마 소미와 함께 사는 모양이었다.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작은 방으로 들어가 스스럼없이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것으로 미루어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 여자 하나가 더 들어왔다.
『언니 조금 늦었어요.』
새로 들어온 여자가 품에 들고 있던 쇼핑 봉투를 바닥에 내려놓고 소미에게 정중한 인사를 했다. 일권과 마주앉아 커피를 마시던 소미는 고개만 돌린 채 쌀쌀한 눈빛으로 후배의 지각을 책망했다. 여자들끼리여도 위계질서가 분명한 분위기였다.
『라면 끓일까요?』
커피를 끓였던 여자가 새로 온 여자의 쇼핑 봉투에서 라면과 찬거리들을 꺼내 놓으며 물었다.
『알아서 해.』
소미가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나서 일권을 보았다.
『우린 올빼미 체질이라 이 때쯤 야참을 먹는데 같이 드실래요?』
『불청객이 얻어먹을 자격이나 있겠습니까. 제가 당번을 하죠. 괜찮으시다면.』
일권은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소미는 의외의 사태에 어리둥절해 그의 발길을 제지하지 못했다.
『미인은 식생활이 만드는 겁니다.』
일권은 그 한마디로 주방에 서 있던 여자를 물리치고 싱크대를 점령했다. 그리고 나서 냉장고를 뒤져, 메뉴를 결정했다.
조바심 섞인 표정으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던 여자가 한참 후에 혀를 내두르며 거실로 물러났다. 쌀을 씻고 쇠고기 덩어리에 칼질을 하는 일권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 여자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요리에 몰두했다. 곱게 다진 쇠고기를 파, 마늘, 진간장, 참기름, 설탕, 후춧가루의 양념장에 재고 냄비에 넣어 볶다가 쌀을 넣었다. 그러다가 물 몇 컵과 다시마를 넣었고 다른 쪽 가스렌지에는 런천미트햄을 튀겼고, 그리고 나서 멸치국물을 끓여 팽나무 버섯국을 만들었다.
삼십 분도 채 흐르지 않았는데, 식탁 위엔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야참상이 차려졌다. 장국죽과 런천미트 피카타, 팽나무 버섯국이 메뉴였다.
여자들이 식탁에 앉으며 환호성을 울렸다.
『어머, 이 햄 튀김 접시 좀 봐. 파슬리에 당근 조각까지 곁들여져 있어!』
『아저씨, 혹시 무슨 호텔 주방장 아니세요? 이 짧은 시간에 어쩌면 이렇게 감쪽같이 상을 차릴 수 있죠?』
여자들의 칭찬에 일권은 머쓱한 표정으로 땀을 훔쳤다.
『맛있게 먹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금남의 집에 초청해 주신 답례니까요.』
네 사람은 한데 어울려 수저질을 했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만큼 낯선 사람과 친해지는 방법도 드문 법. 식사를 끝내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소미의 표정은 한결 따뜻해져 있었다.
『너무 맛있게 먹었어요. 밤마다 선생님을 초청해야겠네요.』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이런 말도 있잖습니까? 따지고 보면 먹는 일만큼 즐거운 일도 따로 없을 텐데, 섭생을 등한히 한다는 건 삶을 게을리 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거죠.』
『누가 그 이치를 모르나요? 밤낮을 바꿔 살고 식사시간을 맞추기 힘든 이 직업을 가진 게 죄라면 죄겠죠.』
『그럴수록 잘 먹어야죠. 미녀들한테 인스턴트 식품은 극약이나 다름없어요.』
소미뿐 아니라 나머지 두 여자도 한결 친근한 얼굴로 일권을 대했다. 매일 뭇사내들에게 술을 따라 주며 세월을 견디는 그들로서는 따뜻한 야참을 지어 주고 끼니 걱정까지 해 주는 남자는 여지껏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일권과 동행했던 여자가 꼬냑병과 술잔을 가져왔다.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최대의 감사표시는 이것밖에 없군요.』
일권은 마지못해 술잔을 받았다.
『케사르에서 질리도록 마셨잖아요. 여기선 커피만으로도 황송한데.』
그러자 소미가 강권했다.
『받으세요. 쟤 말대로 이 아파트에서 술잔 받은 남자는 특별한 사람이라고요. VIP 중에서도 스페셜 VIP한테만 주어지는 특권이에요.』
여자가 일권의 잔에 반쯤 차도록 코냑을 따르면서 윙크했다.
『술맛도 각별할 거예요. 수박이 따르는 거니까요.』
『수박이 뭘 의미합니까?』
일권이 한 모금 코냑을 음미하고 나서 묻자 여자들이 까르르 웃었다.
술을 따랐던 여자가 대답했다.
『요즘 유행하는 과일 시리즈 모르세요? 호두는 껍질을 벗기기가 곤욕스럽잖아요. 기껏 어렵게 까서 먹어 봐도 맛은 떨떠름할 뿐이고요. 그리고 저같은 여자를 수박이라고 해요. 벗기기도 쉽고 맛도 달콤하니까요.』
여자의 비유에 일권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여자는 계속해서 곁에 있는 두 여자를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얘 같은 여자는 석류라고 해야 어울리겠죠? 늘 열려 있지만 맛은 시큼할 뿐이죠. 또 소미 언니는 토마토예요.』
『석류는 이해하겠는데, 토마토는 또 뭡니까? 물렁물렁하다는 건가요?』
『아뇨, 토마토는 과일이 아니라 야채잖아요. 과일도 아닌 것이 과일 흉내를 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순간 일권은 포복절도하면서 술잔을 엎지를 뻔했다. 그와 동시에 얘기를 듣고 있던 두 여자가 자칭 수박이라며 술을 따르던 여자를 꼬집기 시작했다.
웃음이 가라앉고 나서 소미는 허심탄회하게 자기가 알고 있는 은비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희수의 질문에 조재봉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찾고 있었다.
겸사겸사 해서 W-net에 들른 희수가 그의 자리로 다가와서 대뜸 던진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 여자의 육체라고 흔히들 말하잖습니까.』
『플레이보이들이 조각가나 사진작가는 아니잖아요? 여체를 즐기기만 하면 됐지, 구태여 누드 촬영을 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어요. 혹시 여자의 약점을 잡기 위한 술책이 아닐까요? 아주 교활하고 야비한 볼모로.』 『그런 방편으로 써먹는 치들도 더러 있더군요. 그 경우는 정상적이지 않거나 불륜관계에서 덫의 용도로 쓰이죠. 결정적일 때 누드 사진을 미끼로 돈을 갈취한다거나 협박을 일삼는 방법, 제비족들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진짜 레이디 킬러들은 조금 의도가 다르지 않을까요?』
『제비족과 레이디 킬러, 뭐가 다르죠?』 『그게 그거죠 뭐. 하지만 프로와 아마추어로 구분해 보자는 얘깁니다.』
『그럼 프로들의 의도는 어떤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호색한의 대명사로 통하는 카사노바의 유혹술을 분석해 보면 쉽게 수긍이 갈 겁니다. 카사노바는 열 살에 음탕한 시를 쓰고 열한 살에 동정을 잃었으며 열다섯부터는 본격적으로 여성편력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열 살짜리 발레리나 콜데체리를 정부(情婦)로 삼으면서 시작된 엽색행각 초기의 희생자들 대부분이 주로 10대 소녀들이었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소녀들의 허점을 악용했는데, 그때 써먹은 유혹술이 바로 소녀들의 나르시시즘을 충족시켜 주는 거였습니다.』
『자아도취에 빠지게 부추겼다는 얘기로군요.』
『소녀들마다 품게 마련인 자기 육체에 대한 환상적 자긍심을 깨워 줌으로써 마음을 사로잡은 거죠. 그의 회상록을 보면 희랍계 미녀 헬레느가 등장합니다. 빈민굴의 한 아파트 단칸방에 사는 열세 살의 헬레느는 카사노바의 희생양이 되면서 혼자 보기 너무 아까운 육체라는 꾐에 넘어가 카사노바의 친구인 화가 부쉐의 누드 모델이 되지요. 혼자 보기 아깝다는 표현에 순진한 헬레느는 넋을 빼앗겨 버리고 만 거죠. 그녀 이외의 여자들을 유혹할 때도 매번 같은 레퍼토리의 수법을 동원했는데 모든 여자들이 헬레느와 마찬가지로 단번에 걸려들었다고 합니다.』
『카사노바가 생존했던 시대의 유럽 성풍속도가 의외로 자유로웠던 건 아닐까요?』
『글쎄요, 오히려 중세의 유럽이 더 폐쇄적이지 않았을까요? 어쨌거나 카사노바의 솜씨는 특별했던 모양입니다. 어떤 여자와 관계를 맺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당사자에게 최선의 사랑을 바쳤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그가 구설수에 올랐을 때 그와 관계했던 모든 여자들이 발벗고 나서서 옹호를 했겠습니까. 또 그의 아름다움을 보는 심미안도 탁월했죠. 아까 얘기했던 희랍계 소녀 헬레느는 카사노바의 권유에 의해 누드 모델이 된 후, 신분이 수직상승하게 됩니다. 전람회에 출품된 그녀의 누드가 또 다른 호색가 루이 15세의 눈에 들어 베르사이유의 후궁으로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헬레느 입장에서 보면 카사노바야말로 은인 중의 은인이겠군요.』
『그렇지요, 그저 입에 발린 거짓말로 그녀를 꾀었던 게 아니고 그녀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제대로 표현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무턱대고 카사노바를 비난하기도 무색한 데가 있네요.』 『중국 절세의 요부를 들라면 흔히 양귀비를 꼽습니다. 그녀와 호각을 이루는 요남은 양국충이지요. 그는 양귀비의 사촌오빠이기도 한데요, 양귀비의 후광을 입어 재상 반열에까지 오른 양국충은 겨울이면 수십 명의 미녀들을 발가벗겨 잠자리에 둘러 놓는 살병풍으로 난방을 했던 탕아 중의 탕아지요. 그런데 이 양국충도 환락을 더불어 나눈 수많은 여인들에게 그 밤을 영원히 잊을 수 없게 하는 과야시(過夜詩) 한 수를 꼭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과야시가 뭐죠?』 『밤을 보낸 노래죠, 그녀와 함께 보낸 밤의 정감을 시 한 수로 멋들어지게 전달했으니 여성들의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낭만적인 탕아였군요.』 『맞아요. 또 프랑스의 루이 14세도 유명한 탕남이었습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황제의 전용 침대가 무려 413개나 있었다는데요, 그는 한 여자와의 보금자리는 항상 특정 침대를 잡음으로써 상대의 자존심을 보장해 주었다고 합니다. 카사노바나 양국충, 루이 14세의 유혹술은 제각기 방법은 달라도 심리적으로 여자의 허영을 자극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요즘의 레이디 킬러들이 상투적으로 누드를 찍는 행위도 여자들의 허영을 충족시켜 주는 유혹술이라 해석할 수 있겠네요.』
『대충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요즘 제주도 호텔에서 신혼부부의 정사장면을 은밀히 찍어 주는 비디오맨들이 있다잖습니까. 젊은이들의 의식도 많이 달라졌지요. 가장 젊고 싱싱할 때 육체의 향연을 간직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풍속도입니다. 한때 일본의 톱스타들이 경쟁적으로 자신의 누드화보집을 발간했던 적이 있었죠. 미야자와 리에의 ‘산타페’가 대표적인 작품인데요, 그녀의 해명이 우리 시대의 가치관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세상에 보여 주고 싶고 기록하고 싶었다는 말, 더 이상 시비를 걸 이유가 없는 거죠.』 조재봉은 생각난 김에 보여 주겠다며 서랍 속에서 ‘산타페’ 화보집을 꺼냈다.
『이거 한번 보십시오, 폐허의 인디언 유적지에 등장한 리에의 누드는 뭐 어떻게 표현할 찬사가 없지 않습니까?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육체지요. 놀라운 것은 남자들 못지 않게 여자들도 이 책을 많이 샀다는 겁니다.』
『대단하시네요, 아예 그쪽 방면으로 나가 보시지 그래요. 플레이보이의 유혹술에 여성들의 심리까지 달달 꿰고 계시니 어려울 것도 없잖아요?』
『아무리 많이 알면 뭐 합니까? 그것도 기본적인 외모와 연기력이 받쳐 줘야 해먹죠. 아무나 할 수 있는 재주는 아닙니다.』
조재봉이 숱이 드문 머릿결을 코믹하게 쓰다듬으며 낯을 찡그렸다.
『저번에 추적하던 그 사람 어때요, 좀 진전이 있나요?』
『캄캄합니다. 청담동이 아지트였다는데 문이 계속 잠겨 있어요. 문 앞에 신문이 가득 쌓여 있는 걸로 봐서 그 사건 이후로 출입을 끊지 않았나 싶어요. 어디론가 잠적을 해버린 거죠.』
『그 사람 이름이 뭐죠?』 『왜요, 제 프로그램에 관심 있습니까?』
『혹시 알아요? 획기적인 단서를 줄 수도 있을지.』 『이름은 정말 대외비예요. 그걸 아는 사람은 담당 검사밖에 없으니까요. 근데 그 검사가 오프 더 레코드를 신신당부하며 저한테만 귀띔을 해줬지요. 이게 밖으로 새면 전 앞으로 검찰청 못 들어갑니다.』
『내키지 않으심 관두시고요.』 『아, 아닙니다. 해본 소리예요. 이동선이라고 그러더군요, 동녘 동에 베풀 선.』
순간 희수는 아찔했다. 묵직한 둔기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것처럼 휘청거렸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어쩌면 속담 하나가 이처럼 섬뜩하게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지 그저 소름이 쫙 돋을 뿐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내상(內傷)이 더 컸다.
경마장 가는 길은 복잡했다. 올림픽대로에서 이수교 빠지는 길목, 방배동 입구에서 사당동 네거리와 남태령 넘는 길 모두가 차량들로 넘쳐났다. 주말 오후라서 더 붐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과천 경마장 입구의 주차난에 비하면 그 정도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미는 큰길 가장자리에 그랜저의 큰 덩치를 그냥 세워 두고 내렸다.
『여기 놔뒀다 견인당하면 어쩔려구?』 동행한 희수는 아무래도 맘이 놓이지 않는 듯 주변을 살폈다.
『차라리 견인당하는 게 안전해. 오륙만 원 내고 보호받는다 치지 뭐. 빨리 들어가자, 놓치겠어.』
상미가 앞쪽을 가리키며 발길을 재촉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등을 보이고 걸어가고 있는 한 쌍의 남녀가 매달려 있었다. 상미와 희수는 여의도에서부터 그 커플의 뒤를 밟고 있는 중이었다.
두 친구가 경마장행을 결심한 데는 묘한 사연이 있었다.
이동선의 정체를 알고 난 희수는 몇 날 며칠을 혼자 끙끙 앓다가 카운슬러로 상미를 택했다.
의리파 잔 다르크 유정이를 먼저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이런 문제는 상미 쪽이 훨씬 격의 없고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이번 주말에 만나서 얘기하자. 그렇지 않아도 너랑 갈 데가 있었어.』
상미는 희수의 하소연을 듣고 나서 그렇게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희수는 상미의 뜻이 한적한 교외로 빠져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자는 데 있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웬걸!
상미는 희수를 태우자마자 시계를 보더니 다급하게 63빌딩 쪽으로 달려가는 거였다.
『나왔다. 저기 앞에 아우디(AUDI) 보이지? 저 차를 미행해야 하니까 절대 놓치지 마.』
『뭐라구, 왜 저 차를 쫓지?』 『남편 차야, 여자친구랑 과천으로 빠질 거야.』
『세상에! 짐작은 했지만 네 남편 정말 바람을 피워도 노골적으로 피우는구나. 언제부터 그랬니?』 『꽤 됐어. 아마 결혼식 직후에도 여자들을 만났을 거야. 내가 몰랐을 뿐이지.』
『어떻게 알았니?』 『그 사람 무선호출기의 비밀번호를 우연히 알게 됐는데 음성사서함에 여자들의 목소리가 잔뜩 들어 있는 거야, 글쎄. 한두 명도 아니고.』
『세상에! 어쩜 그럴 수가 있니, 니 남편이! 너 여태 무진장 마음고생 했겠구나.』 희수는 경마장 가는 길 내내 상미를 위로했다. 사실은 자신이 위로받을 생각으로 만났건만, 만나고 보니까 자기보다 친구의 처지가 훨씬 기막힌 거였다.
그러나 상미는 태연했다.
『쇼킹한 사건이지. 근데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아. 구질구질하게 이런 식으로 남편 뒤를 따라다닐 생각도 해본 적 없어. 니 얘길 듣고 보니까 그 남자나 내 남편이나 한 통속이라는 느낌이 팍 오더라구. 경마장 따라가는 거 별다른 이유 없어. 적을 알아야 이긴다는 말 있지? 우리도 적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자는 뜻이야.』
그랬었다. 상미의 주말계획은 그런 심오한 계산이 깔려 있었던 거였다.
경마장은 만원이었다. 사람들로 가득찬 객석 사이를 누비며 희수와 상미는 빈 좌석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상미의 남편 정용진은 경마 정보지를 한아름 사들고 아예 외진 구석 자리로 가 앉는 중이었다. 그녀들은 정용진의 뒤쪽 대각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경주의 템포는 빨랐다. 열두 마리의 말들이 스타트 라인에 들어섰다가 운동장 한 바퀴를 돌면 한 경주가 끝났고, 또 한참 뜸들이다가 같은 식으로 다른 말들이 후닥닥 달리고 뭐 그런 게임이었다. 어찌 보면 싱겁기도 하고 어찌 보면 우습기까지 한 말들의 달리기 경주에 왜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스탠드 상단에 앉아 불륜의 커플과 말들의 경주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경주 사이사이에 사람들은 저마다 마권을 사기 위해 부단히 창구를 들락거렸다. 상미의 남편도 그들과 똑같이 매표 대열에 거듭 합류했다.
8경주가 끝났을 때 불륜의 커플은 환호성을 울리며 어깨동무를 했다.
『맞췄나 보지? 꽤나 좋아하는데.』
희수가 상미에게 물었다.
『저기 전광판을 봐. 2번하고 7번이 1, 2위를 했잖아. 그 두 마리의 확률을 조합한 게 배당률이래. 얼마니? 34.5배. 그러니까 만 원을 걸었으면 34만 5천 원을 받게 돼.』
『정말 도박이구나. 근데 34만 원을 땄다고 저렇게 좋아할 수 있는 거니? 하루에 수억 원을 주무른다는 니 남편이.』 『나도 그게 궁금해. 하긴 단위가 크다면 얘기가 좀 달라질 수도 있겠지. 가령 만 원 정도가 아니고 거기에 동그라미가 한두 개 더 얹어진다면 일확천금 아니겠어? 백만 원을 걸었을 때 삼천사백오십만 원을 따게 되는 거니까 말야.』
『니 남편 얼마 땄는지 슬쩍 보고 올까?』 『그럴 필요 없어. 아마 몇만 원 수준일 거야. 오늘 백만 원 인출해 왔으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
『비자금 통장의 비밀번호도 내가 알고 있거든.』 『너 정말 대단하다, 얘! 니 남편 뛰어 봤자 니 손바닥에서 맴도는 거 아니니?』
『그러면 뭐 하니. 난 그냥 저 사람의 비밀만 엿볼 뿐이고, 저이는 제멋대로 즐기는 건데.』 희수는 상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앞으로 어쩔 생각이니?』
『왜 내가 할 소릴 니가 먼저 하지? 난 정신적으로 단단히 무장이 돼 있기 땜에 끄떡없어. 면역이 된 거지. 이제부턴 니 얘길 할 차례야. 내가 남편의 치부를 너한테 보여 준 건 예방주사야. 남자들은 거의 모두 속물근성을 갖고 있다고.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 그 남자가 바람둥이건 말건 다 니가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상미는 침착했다. 그 방면으로 이미 달관의 경지에 들어선 사람같아 보였다.
잿빛 아우디가 차량의 행렬에서 빠져나와 과천 의왕간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아우디가 지평선 너머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고 있던 희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상미는 태연하게 운전을 하다 백미러로 힐끔 희수와 눈을 마주치고는 윙크를 했다.
『재미있었니?』
『너 참 비위도 좋다. 저런 꼴을 보고도 웃음이 나오니?』 『저치들 이후 스케줄이 어떨 것 같니? 드라마 작가가 한번 상상력을 발휘해 봐.』
『외박하고 들어올까?』 『그 사람 맘먹기 나름이지 뭐. 오늘 약속이 있어서 늦는데 혹시 못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연락이 왔었어.』
『니가 왜 남자친구 하나 구해 달라고 했는지 오늘에사 알겠다.』 『알겠니? 넌 그나저나 어떡할래?』
『모르겠어.』 『그 사람하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니?』
『아니, 그날 안드로메다에서 나 되게 취했었잖아. 눈을 떠 보니까 그 사람 방에 누워 있었어. 근데 그 사람이 안 보였거든. 불을 켰는데 널찍한 오피스텔이었어. 방을 멋지게 꾸며 놨길래 호기심이 들어서 한 바퀴 둘러봤지. 근데 암실에서 못 볼 걸 보게 된 거야. 서랍마다 여자들 누드 사진이 가득한 거 있지. 아차 싶어서 유심히 들여다보니까 사진마다 일련번호가 붙어 있고 촬영 일자와 모델의 신상명세가 좌악 적혀 있었어.』 『정희수, 기절초풍했겠네?』
『말이라고 해? 심장이 덜컥 멎는 기분이었어. 사진도 웬만하면 이해하겠는데 너무 끔찍한 X등급이었거든.』 『변태 아닌가 모르겠다. 니 사진은 없었어?』
『현상할 시간이 없었겠지. 근데 모르겠어. 내가 인사불성으로 네 시간 가량 누워 있었을 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래서 그날 깨어나서 어떻게 헤어졌는데?』
『방송원고 준비 때문에 일어나자마자 쌩하니 나와 버렸지. 그냥 가겠다고 말만 했어. 잘 가라고 그러더라.』
『약속은 안 하고?』 『우린 항상 다음에 만날 약속을 해본 적이 없어.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오면 그때 약속을 해서 만났어.』
『너는 그 사람 연락처도 모르고?』 『물어 보지 않았어.』
『그래도 가르쳐 주는 게 매너 아냐?』 『몰라,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사람에 관해서는 하나도 몰라. 이 참에 집을 안 것밖에는.』
『하긴 그 사람 자체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기더라. 그날 척 보니까 정희수쯤은 상대가 안 될 것 같았어. 뉴질랜드에서 첨 봤을 때 누가 먼저 유혹했니? 당연히 그쪽이겠지?』 『그런 것만도 아냐. 말은 내가 먼저 걸었고, 어떻게 우연히 다른 장소에서 또 만나게 됐는데 자연스럽게 맺어진 거였어.』
『넌 처음이었잖아. 또 원래 생각도 복잡한 애가 어떻게 그리 쉽게 그 남자와 잘 생각을 했지?』 『내가 하룻밤 신세를 졌거든. 그걸 갚을 생각이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까 그 지경까지 가게 된 거야.』
『니가 뉴질랜드에 취해 버린 모양이지? 여행지에선 누구나 다 낭만적인 로맨스를 꿈꾸곤 할 거야. 어쨌거나 이제부터가 중요해. 그 사람 계속 만날 거니?』 『모르겠어. 그의 이면을 들여다보기 전까지만 해도 솔직히 말해 하루 종일 그 사람만 생각했어. 헌데 그의 정체를 알고 난 지금 대책이 없어. 너라면 어떡하겠니?』
『깨끗이 잊어버리는 게 약이겠지. 하지만 네 성격에 그런 기억을 훌훌 털어 버리기란 쉽지 않을 거야. 더구나 첫사랑이라면 첫사랑인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단지 그 사람의 변신이 너무 충격이었어. 첫인상도 그렇고 만나는 동안도 그렇고 참 슬픈 사람으로 다가왔었는데…….』
『변신이 아니라 이중성이겠지. 누구나 야누스의 기질이 있어. 너 아직도 일말의 미련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없다면 과장이겠지. 아직 그 사람 입으로 본심을 들어 보지 않았거든.』
『말을 들어야 아는 건 아닐걸! 난 벌써 2년째 이러구 살고 있어. 그 동안 남편한테 변명이나 해명 한 마디 들어 본 적 없어. 별로 듣고 싶지도 않고……. 말이라는 게 그 사람의 인격과 신념, 도덕성의 잣대이긴 하지만 때론 진실을 가리는 안개가 될 수도 있지. 자기 남편의 욕구, 남편의 꿈과 이상, 그런 진짜 모습들을 보게 된다면 아마 이 세상에 절망하지 않을 여자들은 없을걸. 모르겠다, 차라리 희수 니 남자는 지금 니가 알고 있는 인식과 본모습이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다시 만나기 두려우면서도 그 사람 입으로 확실한 얘기를 듣고 싶긴 해. 어째서 여자들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그 저의와 배경이 궁금하기도 하고.』 『알고 나면 시원할 것 같니?』
『앞으로 사람이 무서워지겠지.』
『니가 왜 사람을 무서워해야 하지? 웅크리면 자꾸 약해지는 법이야. 너도 마음 단단히 먹고 전쟁을 준비해 보라구. 통쾌하게 복수를 하든지 상처받기 전에 상처를 안겨 주고 니가 먼저 빠져나오는 거야.』 『어떻게?』
『내가 도와 줄게. 다음에 연락이 오면 모르는 척하고 약속을 하란 말이야. 아직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주도권은 너한테 있을 거야.』
상미가 백미러를 통해 다시 윙크를 던졌다. 희수는 떨떠름한 미소로 응답했다.
상미의 충고는 희수의 스타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우리편’이라는 존재는 따뜻한 것이었다.
서초동의 비즈니스맨 클럽 ‘케사르’.
각종 크레디트 카드가 현란하게 붙어 있는 유리문 너머로 술집 내부를 들여다본 일권은 자동문 앞에서 잠깐 망설이고 있었다. 얼핏 봐도 그 문턱 하나를 넘어서려면 꽤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유리문 위에 붙어 있는 감지기가 작동하면서 바람처럼 열린 것이었다. 일권은 자동문 센서의 예민한 반응에 혀를 차며 별수없이 문턱을 넘어섰다.
『어서 오세요. 혼자 오셨나요?』
얼굴과 몸매 어디 한구석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한 여자가 달려와 그를 맞았다.
그녀는 일권을 피아노 뒤쪽의 자리로 안내했다.
일권은 자리에 앉고 나서야 비로소 실내에 피아노의 선율이 가득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피아노 연주자는 뜻밖에도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머리빛깔만큼 하얀 연주복을 입고 부드럽게 건반을 매만지고 있었다. 연주하는 손길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그가 과연 피아노를 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선율이 케사르의 분위기를 한결 클래식하게 이끌고 있었다.
손님들이 한 곡을 뽑고자 할 때도 노래반주기 대신 피아노 반주가 거들어 주곤 했는데, 트로트에서 가곡에 이르기까지 백발의 피아니스트는 거침없이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케사르엔 룸이 따로 없었다. 조명도 밝았고 안주 접시의 모양새도 심플했다. 그러나 여자는 이상하게도 많았다. 수십 명의 미희들이 정확하게 삼십 분 주기로 테이블을 옮기며 손님들을 응접하고 있었다.
빈 자리가 거의 없는데도 일권은 몇 시간 동안 무려 열 명 이상의 여자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단정하면서도 말솜씨가 능란했다. 무작정 밀실로 모셔다 놓고 흐드러진 술상에 관능과 음담으로 시간을 때우는 기존의 룸살롱과는 차원이 달랐다. 밝고 청결한 분위기 속에서 교양미 넘치는 아가씨들과 말벗 삼아 즐기는 비즈니스맨 클럽이 케사르의 진가였다.
경제적이면서도 많은 파트너를 만날 수 있어 젊은 사업가들이나 전문직종의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강남 일대에 몇 년 전부터 우후죽순으로 생겨 성업중인 신종 유흥업소라고 했다.
『겁먹지 마세요. 이래 봬도 술값은 저렴해요. 아가씨들이 일개 소대로 몰려와 서빙을 해도 테이블당 봉사료는 십만 원으로 고정되어 있으니까요.』
눈치 빠른 여자 하나가 일권의 불안한 표정을 훔쳐 읽고는 슬쩍 귀띔했다.
『그래 갖구서 이 많은 아가씨들 일당을 제대로 줄 수 있을까?』
일권이 의문을 표시했다.
『아가씨들 일당은 무조건 십만 원이에요. 욕심부리지 않고 밤 일곱 시부터 자정까지 다섯 시간만 일하죠. 그 정도 노동에 그 정도 수입이면 결코 적은 수입은 아니죠. 룸살롱처럼 2차로 동행 나가야 한다든가 하는 지저분한 거래를 하지 않으니까 심신도 훨씬 편하고요.』
『그래? 어차피 돈 벌자고 이 바닥에 데뷔한 거라면 화끈하게 뛰고 화끈하게 버는 게 낫지 않을까?』
『어머, 이 아저씨 좀 봐! 우리가 그런 수준으로밖에 안 보이세요? 여기 있는 아가씨들 전부 전문대 학력 이상이라는 거 모르세요? 취업할 때 학생증이 필수라고요.』
일권은 샐쭉하게 대꾸하는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졸업장도 아니고 학생증이라니. 하긴 대학 졸업장을 받을 나이면 이 바닥에서는 정년 퇴직할 나이인 셈이지.
생각의 말미에 은비의 해사한 노란 옷 패션이 떠올랐다.
은비도 혹시 학교를 다니면서 이런 곳에 출입한 건 아닐까?
일권은 설마하면서도 그런 추측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씀씀이가 헤픈 편이었던 은비가 느닷없는 집안의 몰락에 이런 방편으로 궁핍을 피해 갈 가능성도 충분한 거였다. 생각하기 싫은 가능성이었지만 그 불길한 우려는 케사르에 앉아 있는 동안 점점 더 확신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마담 좀 불러 줘.』
『어떤 언니요?』
『주인 마담 말야.』
『소미 언니요?』
『그래, 변소미 씨.』
『어떻게 아세요, 소미 언니를?』
『3년 전에 죽은 장화란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전해 줘.』
『잠깐만 기다리세요. 연락해 볼게요. 오늘 안 나오셨거든요.』
장화란의 이름이 나오자 여자는 자못 진지한 눈빛으로 일권을 훑어보더니 자리를 떴다.
일권은 얼음 수건으로 눈두덩이를 식혔다. 서늘한 냉기가 혼탁한 두뇌의 회로 구석구석을 씻어 주는 것 같았다.
내실에 들어갔다 나온 여자는 다시 한 번 일권을 빠끔히 들여다보고 나서 옆에 앉았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만나서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어.』
『오늘 못 나오실 텐데…….』
『그럼 내일 다시 올까?』
『아녜요, 급하시다면 오늘 만나게 해 드릴 수도 있어요. 이따가 고스톱 한번 치실래요?』
『……?』
『열두 시면 문을 닫아야 해요. 케사르 맞은편에 편의점이 있어요. 그 앞에서 기다리세요.』
일권은 영업이 끝날 때까지 죽치고 있다 계산을 했다. 강남의 유흥업소 치고 그리 비싼 술값은 아니었지만 그는 해우소를 운영해서 모은 한 달치 이익금 전액을 고스란히 헌납해야 했다.
여자는 영업마감 시간 한참 후에야 씨근덕거리며 편의점 앞으로 달려왔다.
『많이 기다리셨죠? 단골손님 한 분이 2차를 같이 가자고 어찌나 채근하든지 뿌리치느라 혼났어요.』
일권은 괜찮다며 빙긋 웃어 보였다. 그는 아까부터 케사르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남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터였다.
『차 어디 두셨어요?』
『차 없어.』
『음주 때문에 놓고 오셨나 보죠? 그럼 걸어요. 한 정거장쯤 되니까요.』
자신을 미스 신이라고 소개한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앞장섰다.
케사르가 위치한 골목을 빠져나오자 대로의 바람이 거셌다. 여자가 몸을 웅크리며 일권의 팔짱을 꼈다.
『겨울인가 봐요, 벌써. 가을은 왜 그렇게 짧은지 모르겠어요.』
일권은 여자와 나란히 걷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한쪽 팔에 매달려 오는 여자의 체중을 부드럽게 이끌며 차가운 거리를 따뜻하게 걷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녀의 엉뚱한 질문과 강렬한 향기, 이따금씩 올려보는 시선이 거북할 뿐이었다.
『아저씨 뭐 하는 분인지 제가 맞춰 볼까요? 음…… 글 쓰시는 직업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학교 선생님 맞죠? 틀림없어요, 우린 척 보면 대충 손님들의 직업을 맞추거든요.』
『틀렸어, 난 술집을 하고 있으니까.』
『피이, 거짓말 마세요. 아저씨 오른손 중지 첫 마디에 사마귀처럼 돋아 있는 펜혹을 봤어요.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
그녀가 일권의 호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고 그의 손가락을 더듬었다. 일권은 그녀의 세심한 관찰력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술집을 경영해도 장부 같은 걸 쓰려면 꽤 많이 펜을 잡게 되잖아.』
『거짓말을 하시려거든 리얼하게 하셔야죠. 말씀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괜찮아요. 어쨌든 제 느낌만으로 계속 말한다면 아저씬 글을 써도 되게 슬픈 글을 쓰실 분 같아요. 이를테면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 같은 분위기의 작품을.』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나도 사실은 살면서 그토록 애절한 감정을 세상에 노래해 보고 싶은 소망이 간혹 들긴 했어.』
『아저씨, 소미 언니 아파트에 초청 받은 손님은 여태껏 몇 명 안 돼요. 내가 왜 아저씨한테 특혜를 드렸는지 아세요?』
『글쎄.』
『바로 아저씨 손가락의 펜혹 때문이에요. 다른 손님들처럼 미끈한 손이었다면 핑계를 대서 모른 척했을 걸요.』
『매끈한 손의 소유자들이 아가씨들한테는 제격 아닐까? 돈을 써도 훨씬 매끄러울 텐데.』
『돈이 전부라면 내가 왜 아저씰 따라왔겠어요.』
여자가 고개를 돌려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입에서 달콤한 술내음이 풍겼다. 그러고 보니 술집에서 만난 여자치고는 의외로 청순한 얼굴이었다.
그는 또 은비의 얼굴을 떠올리며 바람 속을 걸었다.
『왜 장화란을 찾으셨죠?』
『화란 씨가 아니라 고은비라는 친구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누가 제 이름을 알려 주던가요?』
『이름은 모릅니다. 그냥 케사르의 위치를 알려 주더군요. 서른쯤 됐고 갸름한 미인형의 여자였죠.』
변소미는 의아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요. 화란이나 은비를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안 되는데 말예요.』
『은비를 알고 계신단 말입니까?』
일권은 다짜고짜 따지고 들었다. 이 대목에서 변소미가 궁금해하는 의문들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거였다.
『제가 어떤 경로로 여기까지 온 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은비가 어디 있는지 좀 알려 주시죠.』
『실례지만 은비와 어떤 사이죠?』
『결혼을 약속한 사입니다.』
일권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둘러붙였다. 은비와 특별한 사이임을 강조해야 상대도 좀더 각별한 성의를 보여 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은비한테 약혼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군요.』
『이번엔 제가 묻고 싶습니다. 은비와 어떻게 아는 사이였는지.』
『제가 데리고 있던 아이였어요.』
『데리고 있었다면…….』
『방배동 업소를 나가던 시절 제가 스카웃했던 애였죠. 아마 칠팔 개월 같이 있었을 거예요. 장화란이가 새끼마담으로 승격하면서 은비를 채 갔어요. 그 일 때문에 걔들과 틀어진 이후로는 본 적이 없고요.』
『장화란 씨가 죽은 건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죠. 장례식 때 저도 참석했었으니까.』
『그때 은비를 보진 못하셨나요?』
『장례식 때 은비가 왔었다구요?』
『그 사실을 몰랐습니까?』
『제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선생님은 저보다 더 정확히 은비 소식을 알고 계시는 거예요, 지금.』
둘의 대화는 거기서 잠깐 끊겼다.
그 사이에 일권을 소미의 아파트까지 데려다 준 여자가 커피를 끓여왔다. 그녀는 아마 소미와 함께 사는 모양이었다.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작은 방으로 들어가 스스럼없이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것으로 미루어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 여자 하나가 더 들어왔다.
『언니 조금 늦었어요.』
새로 들어온 여자가 품에 들고 있던 쇼핑 봉투를 바닥에 내려놓고 소미에게 정중한 인사를 했다. 일권과 마주앉아 커피를 마시던 소미는 고개만 돌린 채 쌀쌀한 눈빛으로 후배의 지각을 책망했다. 여자들끼리여도 위계질서가 분명한 분위기였다.
『라면 끓일까요?』
커피를 끓였던 여자가 새로 온 여자의 쇼핑 봉투에서 라면과 찬거리들을 꺼내 놓으며 물었다.
『알아서 해.』
소미가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나서 일권을 보았다.
『우린 올빼미 체질이라 이 때쯤 야참을 먹는데 같이 드실래요?』
『불청객이 얻어먹을 자격이나 있겠습니까. 제가 당번을 하죠. 괜찮으시다면.』
일권은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소미는 의외의 사태에 어리둥절해 그의 발길을 제지하지 못했다.
『미인은 식생활이 만드는 겁니다.』
일권은 그 한마디로 주방에 서 있던 여자를 물리치고 싱크대를 점령했다. 그리고 나서 냉장고를 뒤져, 메뉴를 결정했다.
조바심 섞인 표정으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던 여자가 한참 후에 혀를 내두르며 거실로 물러났다. 쌀을 씻고 쇠고기 덩어리에 칼질을 하는 일권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 여자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요리에 몰두했다. 곱게 다진 쇠고기를 파, 마늘, 진간장, 참기름, 설탕, 후춧가루의 양념장에 재고 냄비에 넣어 볶다가 쌀을 넣었다. 그러다가 물 몇 컵과 다시마를 넣었고 다른 쪽 가스렌지에는 런천미트햄을 튀겼고, 그리고 나서 멸치국물을 끓여 팽나무 버섯국을 만들었다.
삼십 분도 채 흐르지 않았는데, 식탁 위엔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야참상이 차려졌다. 장국죽과 런천미트 피카타, 팽나무 버섯국이 메뉴였다.
여자들이 식탁에 앉으며 환호성을 울렸다.
『어머, 이 햄 튀김 접시 좀 봐. 파슬리에 당근 조각까지 곁들여져 있어!』
『아저씨, 혹시 무슨 호텔 주방장 아니세요? 이 짧은 시간에 어쩌면 이렇게 감쪽같이 상을 차릴 수 있죠?』
여자들의 칭찬에 일권은 머쓱한 표정으로 땀을 훔쳤다.
『맛있게 먹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금남의 집에 초청해 주신 답례니까요.』
네 사람은 한데 어울려 수저질을 했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만큼 낯선 사람과 친해지는 방법도 드문 법. 식사를 끝내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소미의 표정은 한결 따뜻해져 있었다.
『너무 맛있게 먹었어요. 밤마다 선생님을 초청해야겠네요.』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 이런 말도 있잖습니까? 따지고 보면 먹는 일만큼 즐거운 일도 따로 없을 텐데, 섭생을 등한히 한다는 건 삶을 게을리 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거죠.』
『누가 그 이치를 모르나요? 밤낮을 바꿔 살고 식사시간을 맞추기 힘든 이 직업을 가진 게 죄라면 죄겠죠.』
『그럴수록 잘 먹어야죠. 미녀들한테 인스턴트 식품은 극약이나 다름없어요.』
소미뿐 아니라 나머지 두 여자도 한결 친근한 얼굴로 일권을 대했다. 매일 뭇사내들에게 술을 따라 주며 세월을 견디는 그들로서는 따뜻한 야참을 지어 주고 끼니 걱정까지 해 주는 남자는 여지껏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일권과 동행했던 여자가 꼬냑병과 술잔을 가져왔다.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최대의 감사표시는 이것밖에 없군요.』
일권은 마지못해 술잔을 받았다.
『케사르에서 질리도록 마셨잖아요. 여기선 커피만으로도 황송한데.』
그러자 소미가 강권했다.
『받으세요. 쟤 말대로 이 아파트에서 술잔 받은 남자는 특별한 사람이라고요. VIP 중에서도 스페셜 VIP한테만 주어지는 특권이에요.』
여자가 일권의 잔에 반쯤 차도록 코냑을 따르면서 윙크했다.
『술맛도 각별할 거예요. 수박이 따르는 거니까요.』
『수박이 뭘 의미합니까?』
일권이 한 모금 코냑을 음미하고 나서 묻자 여자들이 까르르 웃었다.
술을 따랐던 여자가 대답했다.
『요즘 유행하는 과일 시리즈 모르세요? 호두는 껍질을 벗기기가 곤욕스럽잖아요. 기껏 어렵게 까서 먹어 봐도 맛은 떨떠름할 뿐이고요. 그리고 저같은 여자를 수박이라고 해요. 벗기기도 쉽고 맛도 달콤하니까요.』
여자의 비유에 일권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여자는 계속해서 곁에 있는 두 여자를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얘 같은 여자는 석류라고 해야 어울리겠죠? 늘 열려 있지만 맛은 시큼할 뿐이죠. 또 소미 언니는 토마토예요.』
『석류는 이해하겠는데, 토마토는 또 뭡니까? 물렁물렁하다는 건가요?』
『아뇨, 토마토는 과일이 아니라 야채잖아요. 과일도 아닌 것이 과일 흉내를 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순간 일권은 포복절도하면서 술잔을 엎지를 뻔했다. 그와 동시에 얘기를 듣고 있던 두 여자가 자칭 수박이라며 술을 따르던 여자를 꼬집기 시작했다.
웃음이 가라앉고 나서 소미는 허심탄회하게 자기가 알고 있는 은비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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