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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드림보트-12

같은 시간.
동선은 마포에서 강변 오피스텔로 뻗은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새벽 공기가 어제보다 부쩍 쌀쌀했다.
그는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연화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분간 그 방은 혼자만 쓰세요.’
‘당분간 외로움을 곁에 두셔야 해요.’
적어도 당분간은 그녀의 경고를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고 그는 자책했다.
그는 방금 백화점 아가씨 은영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심야에 은영의 기습적인 방문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돌발사태였다.
두 시 무렵이었을까, 동선은 누드 촬영에 열중하고 있었다.
할로겐 램프의 빗줄기 아래 누워 있는 희수의 나신은 수줍었다. 의식의 통제에서 풀려난 여자의 나신은 가장 편안한 자세로 흐트러져 있었는데도 묘한 긴장미가 풍겼다.
그 긴장미의 근원이 무엇일까?
여자의 몸은 아담하면서도 나름대로 균형이 잡혀 있었다. 일부러 가꾼 흔적은 없어도 스물여섯 해를 수줍게 안으로 안으로 감춰 온 여자의 매력은 목련꽃을 연상케 했다.
그는 그녀의 영혼을 훔치는 마음으로 한 컷 한 컷 공들여 촬영에 임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벨을 놔두고 누군가가 철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그는 노크 소리의 파장만으로도 손가락의 주인공을 짐작했다. 심은영의 체중을 감지한 거였다.
그가 비스듬히 문을 열자 예상했던 대로 은영이 서 있었다. 은영은 그를 보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동선은 조심스레 밖으로 나와 문을 잠갔다.
오피스텔 뒤켠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재개발 지역의 폐허까지 걸어오는 동안 은영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동선도 구차하게 웬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적당히 앉을 곳을 찾아다니며 그녀의 손을 쥐었다. 손은 차가웠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안다는 듯 포근하게 쥔 손에 힘을 전했다.
해머와 불도저로 짓뭉개진 재개발 지역의 풍경은 음산했다.
『무서워요.』
그녀가 더 이상 못 가겠다며 버텼다.
그는 멈춰선 곳의 벽돌 더미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그녀를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혔다.
두 사람의 체중에 벽돌더미가 삐끗 흔들렸다. 그녀는 황황히 체중을 덜려 했으나 그가 놓아 주지 않았다. 그의 손이 젖가슴에 X자로 교차했다. 그리고 테니스 공만큼의 탄력을 즐기다 어깨선으로 흘러내려갔다.
여자는 그제야 안정을 찾은 눈으로 돌아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프렌치 키스를 나누기 시작했다. 목이 꺾인 상태에서도 그녀는 오래도록 견디며 부자유를 감내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목선과 어깨에 뜨거운 숨결을 퍼부었다.
간헐적으로 그녀의 둔부가 수축했다. 반대로 그 곳과 맞닿은 그의 중심은 팽창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너지면서 상체를 그에게 의지했고 뒤통수를 그의 어깨에 실었다.
그의 손 하나가 그녀의 삼각주를 엄습했다. 면바지가 가로막고 있었지만 따뜻한 습기가 만져졌다. 손은 그 속에서 부드럽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다른 손 하나는 여자의 두 손을 한데 움켜쥐었다.
뜨거웠지만 안타까움 짙은 페팅이 끝나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밤새 네 번이나 찾아갔어요.』 그녀는 다섯번째 방문 끝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며 원망 섞인 눈길을 주었다.
『거긴 작업실이야. 비울 때가 더 많지.』
『전 항상 거기에 계시는 줄 알았어요. 생활하는 가재도구들도 있길래.』
『…….』 『아저씨의 방에 꼭 한 번 다시 가 보고 싶었어요.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환상의 세트장 같았거든요……. 근데 왜 이런 곳으로?』
그녀는 새삼스럽게 폐허의 달동네를 둘러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 안에 손님이 자고 있거든.』 『어머, 그럼 제가 큰 실수를!』
『괜찮아. 만취해서 곤히 잠든 상태였으니까.』 『친구분과 늦게까지 마셨었나 보죠?』
『친구가 아니라 여자야.』 『여자라고요?』
『친구이기도 하구.』 은영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함께 주무실 사이라면……?』
그녀가 갑자기 오른손으로 왼손의 반지를 쓰다듬었다. 갈등이 회오리치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녀의 두 손을 다시 잡았다.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더니 그 진동이 어깨로 이어졌다.
『이 반지…… 어떡하죠?』
그녀가 한참 울고 나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건 마법의 손에 바친 예물이야.』
『정말 제 손이 예뻤나요?』 그녀는 다시 한 번 동선의 진심을 확인했다. 하룻밤 노리갯감으로 삼기 위해 반지를 선물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돋아났기 때문이었다.
『진심이야. 다시 말하지만 은영이 손은 내가 본 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었어. 앞으로도 무척 보고 싶을 거야.』
『고마워요. 그럼 반지는 가질게요.』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일어났다.
반지는 갖겠다?
반지를 갖겠다는 말과 뉘앙스가 다르다. 목적격조사 대신 단독격조사를 사용한 건 반지만 갖겠다는 뜻에 가까웠다. 그 외에 건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사실 그녀는 그에게 오늘 밤의 배신감을 토로할 자격이 없었다. 첫 만남 때의 섹스는 어디까지나 그녀가 먼저 도화선에 불을 당겼던 것이기에.

땡…….
희미하게 엘리베이터의 경종이 들리자 희수는 재빨리 암실을 정돈해 놓고 침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실내의 조명을 끄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가 오기 전에 원상태로 돌아가는 게 급선무였다.
발자국 소리가 문 앞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마지막 속옷을 벗어 네 겹으로 접었다. 열쇠소리와 함께 그녀는 시트 속에 알몸을 묻었고, 문이 열리자 눈을 감았다.
다행히 그는 불을 켜지 않았다. 환하게 불을 밝혔더라면 그녀는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그녀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애써 숨을 죽였다.
어느 사이엔가 그는 침대 곁에 와 있었다. 밤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댔다. 열을 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서 슬그머니 옆에 누웠다. 그런데 나란히 눕지 않고 희수와 거꾸로 누웠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빼앗겼다. 그는 그녀의 무릎을 베고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하느님 맙소사!
그녀는 속으로 절규했다. 언제까지 이 자세로 누워 있어야 하며 깨어나면 또 그의 얼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녀는 무릎에 전해오는 그의 머리 무게를 실감하고 전율했다.
이 남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녀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암실에서 받았던 충격을 낱낱이 헤아리기 시작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암실 데스크의 서랍 하나를 열고 나서 희수는 깜짝 놀랐다. 8×10 사이즈의 인화지에 대담한 포즈의 여체가 박혀 있었던 거였다. 한 장만 그런 게 아니라 그 밑에 있는 모든 사진이 전부 누드였다. 그 아래의 서랍, 또 아래의 서랍에도.
누드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그렇게 이해해 주기에는 사진들이 너무 야했다. 성기만 확대해서 찍어 놓은 것도 있었고 성교의 장면을 적나라하게 담아 놓은 것도 있었다. 게다가 사진의 뒷면마다 촬영일자와 모델의 신상명세가 적혀 있었다.
희수는 불현듯 현대판 카사노바의 행각을 떠올렸다. 한때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색마. W-net의 조재봉 PD가 뒤쫓고 있다던 문제의 인물. 그 자의 행각과 이동선의 행각에 상당한 유사점이 있었다.
그녀는 혹시나 싶어 그 많은 여자들을 일일이 넘겨가며 확인했다. 행여 자신의 육체도 서랍 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지 않을까 싶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던 도중에 다행스럽게도 엘리베이터의 경종을 감지하고 되돌아나왔던 거였다.
차라리 그가 들어왔을 때 천연덕스럽게 암실에서 사진들을 한아름 들고나와 이것들이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면 지금처럼 조바심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랬더라면 그는 뭐라고 변명했을까? 아니, 내가 지나치게 과민반응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곳이 꼭 동선의 방이라는 법도 없다. 혹시 친구의 작업실일 수도 있잖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다소나마 충격이 다스려지는 것 같기도 했다.
동선 씨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냐.
희수의 마음은 자꾸 그의 편에 서고 싶어졌다.
아서스패스의 호숫가에서, 소래포구 갈대밭 수문에서 느낀 그의 체취에는 결코 악취가 섞여 있지 않았어. 그때 만난 그의 눈빛은 우수로 가득했지. 우수의 창엔 먼지가 끼지 않는 법이야.
새벽이 올 때까지 희수는 자신의 무릎에서 잠든 사내를 그렇게 변호했다. 암실 서랍 속의 사진들은 꿈의 파편이었을 거라고 자위했다.

나는 혹시 이 지독한 불운을 은근히 명예로 삼고 있는 건 아닌가. 유난히 가혹한 운명의 포로, 이 사실을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환기시키면서 생존의 명분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신의 질투를 살만큼 내 운명은 값어치 있는 것이라고.
일권은 해우소의 멍석에 널브러져 낙서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남들이 점심 먹을 때쯤 기상했고, 하루의 출발을 꼭 낙서로 시작하는 습관이 있었다. 정제하지 않고 생각 이어지는 대로 갈겨 쓰는 것이어서 낙서였지, 남들 부르는 대로 하자면 일기인 셈이었다.
해우소 촌장이 되면서부터 그는 늘 하루의 마지막을 알코올에 절어 맞이하곤 했다. 마지막 취객이 빠져나간 술집은 연극이 끝난 무대와 마찬가지로 공허한 공간이었다. 술잔에 묻어나던 허구한 사연들이 허공에 맴돌다 지쳐 떨어진 멍석 바닥에 일권은 드러눕곤 했다.
한참을 누워 있다 일어나 청소를 하고 송죽(松竹)이라 명명한 탁자로 가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한 줄을 쓰든 몇십 장을 쓰든 간에 새벽녘까지 모나미 볼펜을 쥐고 열병을 앓는 거였다.
그러나 잠들기 직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 보고 절망하곤 했다. 혈액의 알코올 농도가 감상적인 단어를 고르게끔 사주하고 과격한 문장을 부채질하는 거였다.
그래서 낙서 형식의 일기는 잠이 깬 다음에 쓰기로 했다. 맑은 정신으로 어제의 기억들을 조립해 나가다 보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영위할 것인지 방향이 잡히기도 했다.
또다시 시작된 하루의 입구에서 오늘도 그는 일기를 쓰고 있었다. 어젯밤의 일들을 재생 화면으로 되돌려 보며 그는 ‘불운’이라는 단어를 또 들먹여야 했다.
폭음으로 흔들렸던 어젯밤. 일권은 상미와 함께 안드로메다를 나와 모범택시를 탔었다.
나이트클럽에서 보낸 시간은 결코 유쾌하지 못했다. 느닷없이 불려나갔던 것부터 황당했거니와 답답한 정장 신사복에 갇혀 젊은 애들과 한통속으로 너울너울 춤을 춰야 했다는 사실이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또 희수 앞에서 상미와 블루스 스텝을 밟았다는 것, 자기 앞에서 희수가 다른 남자와 엉켜 있는 광경 역시 심기에 마땅한 게 아니었다.
불편한 건 또 있었다. 상미의 오버 액션이 그것이었다. 그녀는 어제따라 유난히 도발적이었다. 일권이 상미와 춤을 함께 춘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녀의 육탄공세는 정말 방어하기 힘들었다. 람바다의 무희처럼 밀착해 오며 흔들어 대는 데는 대책이 서질 않았다. 물론 그보다 더한 몸짓의 섹스를 수시로 교환한 사이였긴 했으나, 둘만의 공간과 다수의 공간은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는 법이었다.
무엇보다도 일권은 희수의 시선이 거북했다. 상미와의 관계를 훤히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래도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막 놀아나는 꼬락서니를 보여 주고 싶진 않았던 거였다.
그렇고 그런 민망함을 삭히기 위해 일권은 폭음했다. 체내에 감도는 알코올 기운으로 인해 몸은 이내 제어불능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정신은 청동거울처럼 맑아졌다.
그 맑은 정신으로 상미를 보니 까닭 모를 패배감이 솟구쳤다. 그녀는 오로지 성적 에너지의 분출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 같았다.
과연 그녀가 누구를 대상으로 그토록 안타까운 몸짓을 발산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절대 일권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자유로의 모텔에서, 서오능의 벙커에서, 고수부지의 차 안에서, 해우소의 탁자에서, 그 외의 모든 장소에서 섹스를 나눴을 때도 상미의 그러한 시선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 그녀의 눈빛은 유별나게 몽롱했다. 피사체를 향해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었지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던 것이다.
일권은 그녀의 눈빛을 해석하면서 ‘난 정말 불운한 놈이다’라고 마음 속으로 자탄했다. 어차피 사랑 따위는 기대하지 않고 이상하면서도 속 편한 계약을 통해 만난 파트너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타인으로 멀어져 가는 것만 같은 느낌, 그 느낌이 그냥 쓸쓸하고 분했다.
불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희수와 동선이라는 사내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동행한 것이 불운이었고, 상미와 자신이 모범택시를 탄 것도 불운이었다. 택시 뒷좌석에 상미를 부축하고 힘겹게 들어앉았을 때, 그는 우연히 그녀의 스커트 속을 보게 되었다.
시트에 걸터앉는 순간, 그녀의 스커트 자락이 펄럭였고 새하얀 둔부가 선명히 노출됐던 것이다.
일권은 갑자기 욕정에 사로잡혔다. 참 개떡 같은 욕구였다.
『아현동 육교까지 갑시다.』 그는 그녀의 의사를 묻지 않고 행선지를 결정했다. 그녀는 뭔가 말하려다 말고 그의 결정에 따랐다.
택시에서 내린 일권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고 육교를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면서 그는 생각했다.
이 여자의 노출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녀는 가파른 경사의 계단을 오르면서도 태연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짧은 스커트 안쪽에 그 어떤 보호막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깜박 망각하고 있는 듯싶었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요.』
그가 해우소의 현관 자물쇠를 열기 위해 열쇠를 찾을 때 그녀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어렵게 어렵게 열쇠를 찾아 문을 땄고 다짜고짜 그녀를 해우소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가야 해요. 기분도 별루구요.』 『오늘은 내가 급해.』
그는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잔뜩 힘을 주었다. 그녀가 뒤로 크게 꺾이며 멍석 위로 쓰러졌다. 그는 가차없이 올라타고서 그녀의 몸을 훑었다. 노팬티의 히프가 쌀쌀한 감촉으로 손바닥에 잡혔다.
『이러지 말아요.』 『상미나 그러지 말아. 난 지금 너를 갖고 싶어. 이름을 불러 줄까? 상미야, 상미야, 상미야, 상미야!』 그는 턱으로 그녀의 어깨를 찍어 누르면서 허리띠를 풀었다.
단 한 번의 동작으로 두 사람의 성기가 밀착되었다. 그녀는 몇 번 힘을 모아 저항했지만 술기운 탓인지 맥을 쓰지 못했다.
그는 그 상태로 강하게 태클을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저항을 포기했다. 아니, 그녀의 하체는 은연중에 그의 움직임을 지원하고 있었다. 짧은 접촉이었는데도 그녀의 언덕 아래에서 유징(油徵)의 기운이 감돌았으므로.
그러나 그는 원유 채굴에 실패했다. 질 좋은 유전을 발굴해 놓고서도 채굴 파이프를 시원스레 꽂질 못했다. 애타게 펌프를 가동했지만 번번이 파이프가 부러지거나 휘고 말았다. 애꿎은 헛펌프질에 유전은 다시 사막으로 변해 갔다.
『그만 해요, 다시 연락할게요.』
그녀는 그의 체중에서 빠져나와 몸을 털었다. 그리고 바닥에 뒹구는 핸드백을 주워들고 총총히 걸어나갔다. 일권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헐떡이다 잠이 들어 버렸다.
그처럼 불운한 밤도 따로 없을 터였다.

『더운물 받아 놨어. 푹 몸을 담그고 나오면 술이 확 깰 거야.』 남편은 평소답지 않게 자상했다.
상미는 남편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었다. 남편은 욕실 문턱을 밟은 채 그녀의 탈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단 한 번의 동작에 전라가 된 상미는 욕조로 풍덩 뛰어들었다. 그녀의 몸체만큼 물이 넘쳐 흘렀다.
남편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뒷머리까지 물 속에 담그고는 눈을 감았다.
노팬티의 과시를 그가 깨달았을까?
그녀는 남편의 추궁을 기다리고 있었다.
팬티의 행방에 관해 물어오면 즉각 대답해 주리라. 안드로메다 화장실의 쓰레기통에 버렸노라고. 왜 그랬냐고 물으면 시니컬하게 대답해 주리라. 그냥 내팽겨쳐 버리고 싶었노라고. 그쯤 되면 설전이 벌어지리라.
상미는 은연중에 불꽃튀기는 설전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의 반응이 김을 새게 했다.
『많이 취했군. 어디서 마셨길래.』
『안드로메다에 갔다왔어요.』 『그렇게 떡이 되도록 마시다니?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구.』
『사고요? 무슨 사고를 말하는 거죠?』
『…….』 『남자와 블루스를 췄어요.』
『그래? 즐거웠겠구만. 능력만 있다면 가끔씩 바람을 피우는 것도 괜찮아. 남편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산다는 건 따분한 일이지.』 『그 얘기를 뒤집어 본다면 당신도 아내 한 사람만 쳐다보고 살 생각이 없다는 얘기군요.』
『천만에, 난 일이 있잖아. 당신도 내 스타일 잘 알지?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일로 풀어내는 거.』 『그럼 가정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느끼고 있다는 건가요?』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도…….』 『당신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오직 잠자는 시간뿐이에요. 그렇다면 잠자리 때문에 스트레스가 발생한 거로군요?』
『왜 자꾸 그런 소릴 해? 당신답지 않게시리.』
상미는 남편의 얘기를 듣다 말고 물 속에 고개를 처박았다. 누워 있는 자세에서 측면으로 몸만 비틀어 잠수해 버린 거였다.
잠시 후, 폐활량의 한계치까지 꾹 참다가 밖으로 나오려던 그녀는 손을 잘못 짚어 허우적거리다 꿀꺽 물을 먹고 말았다. 허겁지겁 발버둥을 쳐 몸을 세운 뒤 그녀는 헛구역질을 했다.
술에 물을 타면 알코올이 희석되는 게 아니라 물의 분량만큼 술이 늘어나는 것이라 했던가.
그녀는 비위가 뒤틀렸다. 밤새 마신 술과 안주 찌꺼기들을 모조리 토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전신의 근육을 움직여 뱉어내려 해도 그냥 헛구역질만 계속될 뿐이었다. 쓰디쓴 위액이 짜르르 솟구쳐 식도 뿌리까지 넘어왔다 다시 돌아가곤 하는 거였다.
그녀는 검지손가락을 목젖 아래까지 집어넣었다.
욕조에서 나와 변기 앞에 꿇어앉아 용을 쓰는 그녀에게 남편이 다가왔다. 그리고 다정하게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못 참겠으면 억지로라도 토해 버리는 게 나아. 마시더라도 적당히 마셔야지.』
한참 동안 헛구역질을 하다 탈진해 주저앉은 그녀를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던 남편이 부랴부랴 목욕을 시켜 주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의 손에 몸을 맡긴 채 깜박 잠이 들었다.
애정이 식을 대로 식어 버려 그녀는 남편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의 손은 부드러웠다. 오랜 공백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길은 낯설지가 않았다. 비누거품을 전신에 도포하는 요령이며, 그것을 빙자해 그녀의 급소 구석구석을 건드려 오는 익숙한 테크닉.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미모사 꽃잎처럼 반응해 버리고 말았다.

다시 그녀가 잠을 깬 것은 침대에서였다.
아주 짧은 시간을 졸았던 것 같은데 수면의 효과는 산뜻했다. 의식이 명료하게 깨어 있었고 신체의 리듬도 여간 개운한 게 아니었다.
남편은 언제나처럼 등을 돌린 채 잠들어 있었다.
문득 그녀는 하복부에 남아 있는 야릇한 쾌감을 감지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쾌감의 진원지를 쓸었다. 비너스의 계곡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남편의 머리맡에 휴지뭉치가 구겨져 있었고 그 한쪽에 콘돔의 테두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휴지를 벌렸다. 콘돔은 한 모금의 액체를 머금은 채 풀이 죽어 있었다.
세상에!
그녀는 기가 막혔다. 잠든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남편이 들어왔다 나간 거였다.
왜 몰랐을까?
예민한 체질이라 웬만한 손길쯤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을 텐데 그가 한바탕 일을 치르고 끝냈을 때까지 잠들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기가 막힌 건 또 있었다. 대체 남편이 무슨 생각으로 오래도록 끊고 있었던 부부관계를 되살렸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감개무량할 입장은 아니었고, 기분도 상쾌하지 않았다. 남편과의 미묘한 관계야 어찌됐건 간에 우선 하복부의 정리되지 않은 감각이 찜찜했던 거였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피아노 방으로 건너갔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그 곳의 미묘한 여운만큼은 확실하게 제압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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